정확한 뜻

두 종류의 설거지(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3. 1. 28. 10:50

두 종류의 설거지 
이근호   2006-10-20 15:45:03, 조회 : 117, 추천 : 4

어린 아이들은 곧장 엄마 흉내를 낸다. 특히 딸애는 더더욱 집안 살림에 흥미를 보인다.

설거지의 예를 들어보면,

1,첫 번 경우의 예는,

어머니는  TV를 시청하고 있고, 어설프기 짝이 없는 어린 딸애는  싱크대에 매달려서 나름대로 설거지 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딸애는 자꾸만 엄마 한테 묻는다.

"엄마, 설거지를 어떤 식으로 하면 엄마나 할머니(여기서 엄마의 시어머니를 말한다)가 만족케 하는 할 수 있는 설거지를 할 수 있는거야?"

엄마는 딸애 설거지를 하는 광경을 먼 발치서 보면서 이렇게 이렇게 지시한다.
(여기서 설거지와 성도의 말씀 지키기를 혼용해서 언급하면)

"너도 이제 우리집의 새살림꾼이 되어서 네가 알아서 잘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그릇은 이렇게 하고 접시는 저렇게 하란 말이다. 이제 너의 거듭난 능력과 솜씨를 나에게 보여봐. 평소에 이 엄마가 새로운 피조물은 마땅히 살아야 될 지침들을 고 성경에 사도의 명령법으로 얼마나 많이 이야기해 왔느냐 네가 눈이 있고 그것을 보았으면 새로운 피조물인 네 안에 계신 성령으로 거끈히 설거지를 깨끗하게 할 수 있어. 나중에  할머니가 오셔서 설거지 검사할 때 거룩하다고 판정받을 수 있어"

그 소리를 듣고 딸애가 이렇게 응답한다.

"엄마. 나도 방종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니 그릇 하나하나가 반들반들하게 빛나. 엄마 정말 나는 성도 맞는가 봐"

2. 또 다른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 번의 경우는 딸애와 엄마가 같이 싱크대 붙들고 엄마가 손수 행주를 들고 물에 손에 담겨고, 고무장갑 끼고 손설거지에 나서는 경우이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적용되는 경우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그런데 딸애와 엄마가 같이 설거지 하는 광경을 마침 감독자인 시어머니가 귀가해서 두 모녀가 같이 설거지를 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계시다.

엄마가 옆에 있는 딸애보고 말한다.

"애야, 이 그릇을 깨끗하게 설거지해봐. 그 그릇의 이름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그릇이다.

딸애가 하는 말이, "엄마 잘 안돼. 자꾸 이 그릇 안에 '생존과 생계가 염려가 차 올라와서 염려로 가득차게 해. 엄마 아무래도 나는 저주받아야 마땅한 딸 같애"


이 광경을 먼 발치서 보던 시어머니가 이렇게 소리친다.

"설거지에 무슨 문제있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그릇들을 거룩하게 흠도 없이 티도 없이 안해놓으면 그 딸애는 지옥 보낼 줄 알아야"

이 소리를 듣고 딸에 옆에 있던 엄마가 시어머니에게 대신 말씀드린다.

"어머니 걱정마세요 . 아무 문제없어요 제가 다 이미 그릇이란 그릇마다 죄다 깨끗하게 설거지 다 해놓았으니 어머님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하고는 옆에 있는 딸애보고 말한다.

"애야, 네 힘으로 그 그릇을 거룩하게 하려니 불가능함을 이제 알았지. 그리고 이 엄마의 옆구리를 만져야. 뭔가 만져져? 옳지 창자국이야. 이번에서 손자국을 만져봐 뭔가 만져지지? 옳지 못자국이다. 엄마가 이루어놓은 화목제물이야.
너는 평소에 설거지 할 그릇들을 보면서, 그 까짓것 얼마든지 거듭나고 새롭게 된 내 의지로서 거룩하게 반들반들하게 해놓을 것이라고 큰 소리쳤지. 막상 해보니 어떻든?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에 대한 염려하는 것조차 제대로 처리 못하겠지?

그러니 너는 나 앞에서 형편없는 저주받을 죄인 맞지? 이 사실은 이 엄마가 너와 함께 설거지 하고 있으니 비로소 깨닫게 되지. 그렇지 않으면 너는  이 엄마의 의로운 솜씨를 얼마나 무시할 뻔 했겟니. 네 이 말씀 기억나니?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는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심이니라'(고후 5:21)
너는 나와 함께 있는 것으로 이미 의인이야. 아직도 너는 네가 왜 의인 될 줄 모르겠지? 앞으로 평생 나와함께 설거지 하면서 회개를 통해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깨달아가자꾸나"

딸애가 대꾸한다.

"그러면, 엄마, 나를 이렇게 함들게 말씀 속으로 집어넣는 것은, 엄마가 의도적으로 한 거야?"

엄마가 듣고서는 "그렇단다. 너는 태어날 때부터 네 밖에 몰랐지. 심지어 이 엄마가 네를 대신해서 설거지 한다는 소식을 돋고서도 너는 너의 신앙적 자존심을 지탱하려고 이용물로 생각했지. 그런데 막상 이 엄마가 너를 네가 원치 않는 상황 속으로 몰아넣으니 이제 너도 사도 바울처럼 '정말 나는 죄수 중의 괴수라'는 고백을 할 수 있게 된 거야. 이 고백이 아무나 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님을 알겠느냐"

두 모녀의 대화를 먼 발치서 보고서는 시어머니가 한마디 거든다. 

"거기 뭐 문제있어? 엄마가 설거짓을 몽땅 대신 다 해준 것에 대해서 손녀 딸에 무슨 불만이레?"

엄마가 변호에 나선다.

"아닙니다 어머니, 자신이 설거지를 갈수록 못한다는 것을 이 엄마 솜씨와 비교해보고 난 뒤에 절감했답니다"

시어머니가 하는 말이,

"정말 네가(엄마) 네 딸애와 함께 있는 것이 맞기는 맞는 모양이구나. 그런데 옆에 있는 손녀야. 설거지 네가 다 했느냐?"

이 소리를 듣고, 딸애가 하는 말이

"할머니, 저는 이미 죽었어요. 저 한테 설거지 솜씨 묻지 마세요. 울 엄마가 다했어요"
(여기서 '죽었다'는 말은 시체라는 말이 아니라 무슨 활동을 해도 주님의 영광에 이를 만한 의를 만들어 낼 수 없어 죽은 자의 입장에 있다는  말)

시어머니가 이 소리를 듣고 ,

"고것참 하나님을 잘 섬기는구면. 저 딸애가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을 아네. '저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심은 산 자들로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5). 세상 사람들 같으면 자신이 설거지 솜씨 자랑할 만도 한데..." 

엄마가 이제 다시 딸애에게 말을 건넨다.

"애야 이제 다른 그릇에 도전해 보자. 이번 그릇은 골로새서 3:2의 말씀이야.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이다. 이번 설거지도 네가 못하고 나 엄마가 다 이루심을 같이 설거지 하면서 체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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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 빚진 자 
이근호   2006-10-20 19:46:18, 조회 : 131, 추천 : 3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 1:14)

도대체 사도 바울이 이미 구원받은 자신이 왜 타인들에게 빚진 자로서 살아야만 하는가?

이것은 본인이 결심했다든지 각오한 사항이 아니다.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 역사하느니라"(살전 2:14)

그렇다. 말씀이 사도 안에서 역사하여 사도를 가만 두지 않게 만든다.

사도 바울의 마음은 곧 하늘나라 우편배달부의 크다란 가방과 같다. 그 안에는 말씀이 들어있는데, 이 말씀은 쿵당쿵당 요란을 떨면서 사도 바울로 하여금 자기 안일에 빠지지 않게 한다.

상대방은 사도 바울에 대해서 그 어떤 복음의 권리를 주장하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스스로 상대방에서 어떤 채무감을 느낀다.

'빚진 자'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이 어깨에 거머쥔 복음의 배달 가방은,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지시에 따르는 것이기에(행 9:15) 사도의 자기 신세가 처량하다고 함부로 쳐박아 놓은 사항이 아니다.

그런데 날이갈수록

복음의 채무감을 갖지 않는 교인들이 너무 많다.

사람들이 자신의 자존심을 짓밟는데 왜 힘들게 전하느냐고 짜증낸다.

성령받았다고 우기지만 사명감은 어디에도 찾을 길없이, 편한대로 세월 보내기에 작정들을 했다.

탈없이 자기 인생 코스만 끝나기 만을 고대하는 것 같다.

복음의 배달가방도 안 보인다. 그냥 텅 빈 마음 뿐이다.

성도는 해탈을 시도하는 자가 아니다. 타인들을 향하여 복음에 빚진 자이다.

마음 속에서 과연 쿵당쿵당 말씀이 폭발하지 않는가?

"말씀이 너희 마음 속에 역사하느니라"(살전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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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어린양 이야기 
최은성   2006-10-21 03:30:58, 조회 : 149, 추천 : 0

어느날, 한 젊은이가 등산을 하고 있었는데 계곡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서 내려가 보았더니
어린 늑대 새끼가 길을 잃어버리고 울고 있었다.
불쌍한 생각에 그는 어린 늑대를 집으로 데려와 좋은 음식과 좋은 집을 지어주고 잘 길렀다.

이듬해 봄이 되었을 때, 그는 늑대 새끼를 우리에서 풀어주어서 자유롭게 풀밭을 뛰어 놀도록 하였다.
늑대 새끼는 곧장 멀리 풀밭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떼들에게 달려 갔다.

늑대는 자신과 비슷한 크기의 양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양들의 흉내를 내면서 뛰어 놀려고 노력하였다.
풀밭에 이리 저리 뒹굴기도 하였으며, 풀에 코를 들이대고 먹는 시늉을 하기도 하였다.

얼마 후에 늙은 양이 다가와서 " 너는 누구냐? " 라고 물었을 때,
늑대는 " 나는 여기에 있는 양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 라고 대답하였다.

늙은 양이 말하기를 " 네가 양이라고? 너는 양이 아니란다."

이에 늑대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소원을 말하였다.
" 나는 양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서 양이 되려고 하고 있답니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늑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 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고, 많은 헌금을 내며, 자선을 베풀고 있습니다.
  나는 죄를 이기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어린 늑대가 양으로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결코 양으로 변할 수 없다.
인간의 방법과 노력으로는 전혀 불가능하다.

그러나 오직 한가지 길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늑대를 양으로 재창조해주시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늑대를 양으로 만드실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 여기서 새것은 진짜 새로운 것이 되었기 때문에 새것이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마음속에는 옛것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슬쩍 말로만 새것이 되었다고 불러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옛것을 새것이라고 거짓 선언하는 분이 아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어린 양으로 묘사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그리스도인들을 또한 양떼로 표현하고 있다.
타고난 본성에 이끌려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늑대이고, 거듭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양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보내실 때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던 것이다.

" 갈찌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누가복음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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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이근호   2006-10-21 08:18:23, 조회 : 140, 추천 : 0

이호식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저와 공개 토론를 벌렸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사상을 한 번 들어보세요.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더이상 예수를 믿지 않게 된다. 만약 여전히 예수를 믿는 자는 결코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자기와 똑같은 형제를 만들면서 예수 본인이 자유로운 것처럼 온전한 자유인을 생산하셨다. 따라서 이제 새로운 피조물은 더이상 누구에게 기대거나 의존할 필요가 없는 자이다.

죄와 죽음과 율법과 저주에서 벗어난 자라면, 더 이상 예수께서 와서 징징대지 말라. '이제 너는 그 누구도 의지할 필요없이 네 힘으로 영생얻을 수 있게 되었어 그런 능력이 너에게 있단 말이다'라고 밀쳐 버리신다.

본인이 스스로 말씀을 지킬 수 있는 능력(성령)을 받은 자이기에 그것을 마음껏 활용하면 된다. 마치 나 예수가 성령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여 모든 말씀을 다 지킨 것처럼 말이다.

이것을 '말씀의 사람'이라고 한다.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된 것처럼, 이제 새로운 피조물인 된 자도 그 안에 말씀이 있기에 말씀의 사람이다.

따라서

성경 조차 더 이상 의존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성경에 나오는 명령들을 참고로 하는 것은 어린아이적 시절에만 해당될 사항이기 때문이다.  보다 어른스러운 단계에 접어들어가라 그렇게 되면 사도들의 잔소리도 들을 필요가 없다.

성경의 내용은 그 당시에 필요했던 잔소리이다. 그만큼 융통성이 없다는 말이다. 지금 네가 무엇을 하는지는 성경이 다 일일이 기록해 줄 수 없지 아니한가! 

네가 곧 말씀의 사람이다. 이는 네가 이제부터 하는 모든 것이 다 성령이 하는 일이다는 말이다. 따라서 네가 무엇을해도 너는 진리 그 자체를 성취하고 있는 자로서 사는 것이다. 

이로서 '새로운 피조물'은 곧 다시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완전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수준 높은 가치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새로운 피조물'의 온전함이다. "

이상이 이호식씨가 주장하는 바입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 사람의 행하는 모든 것이 새로운 성경, 새로운 말씀에 해당된다는 겁니다. 만약에 아직도 문자로 복사된 일률단편적인 전통 성경책을 의존한다면 여전히 하나님이 주신 자율성과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성경의 노예가 된 신세라는 겁니다. 이것이 무슨 완전한 자유라고 할 수 있느냐고 그는 반문합니다. 그가 보기에 이렇게 되면 '새로운 피조물'라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밫에 다가가면 갈수록 나의 어두움은 더욱 짙어진다'라는 고백은 이 이호식에게는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어두움을 느낀다면 아직 이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빛의 자녀가 왜 아직도 어두움을 느끼느냐'는 겁니다.

이 이호식씨의 문제점은, 피조물의 역할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증거하는 새언약 증거에 종속되어 있음을 알지 못하고, 독자적으로 신이 되는데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고린도후서 5:15을 거부합니다. 즉 왜냐하면 이호식가 보기에 사도 바울은 여전히 수준낮은 신앙인에 불과하기 때문에 계속 예수로부터 못벗어나는 온전한 신앙인으로 보이기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장하기를, 예수의 십자가는 인간을 절대 자유자로 만들기 위한 과거 한 때 있었던 일로서 더이상 거기에 억매이지 말고, 얼른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과 동일한 절대 자유자가 되어 사는것, 이것이 처음부터 하나님이 그리워하던 새로운 인간상이라는 겁니다.

저는 이런 사상은 많이 알려져야 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자신의 신되었음을 증거하는 자인지, 여전히 예수님의 살과 피의 새언약 만을 증거하는 자인지 구분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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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최은성   2006-10-21 13:19:00, 조회 : 143, 추천 : 2


"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증거와 훼방이라" (마태복음 15:19)
마음의 냇물이 맑게 되려면 먼저 마음에 있는 샘이 정결하게 되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행위로 혹은 자신의 생각으로(이호식) 율법을 더 이상 의존 할필요가 없다느니, 성경의 내용을 잔소리라고 말하는 그는 정말 거듭난 자인가?

율법주의적인 종교, 즉 경건의 모양만을 가진 자, 자기 생각으로 말씀을 붙잡는자는 매우 깊은 자기 기만의 늪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옛 것을 변경하고 개량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본성에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자아가 자신과 죄에 대해서 죽고 전혀 새로운 생명이 나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생애에 결정적인 변화가 없으면 결국에는 잃어버린바 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변화를 위한 방편들(예수님의 살과 피의 새언약)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거기에는 생애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죄악을 즐기고자 하는 생각은 사라지고 악한 동기는 그 자취를 감추게 되며, 사랑과 겸손과 화평이 분노와 시기와 분쟁의 자리를 채우며, 기쁨이 슬픔을 대신함으로써,
용모는 하늘의 빛을 반사하게 되며, 아무도 짐을 덜어주는 손을 보지 못하고, 아무도 빛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지 못하지만, 사람이 믿음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바칠 때에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이 임하게 되는데, 그 능력은 죄인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새겨놓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늘(천군,천사,온 우주의 거민들)은 그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선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가 우리 안에서 일어나지 않는한,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타락한 인간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은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지만 말이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이 어디서 어떻게 벌어지느냐에 대한 문제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마음 속에서 벌어지는 싸움입니다.

누구에게 우리의 의지를 굴복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권을 놓고 벌이는 싸움입니다.

사단은 순간마다 우리를 지배하려고 노리고 있습니다.
그가 노리는 것은 우리의 의지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의지를 당신께만 굴복시키라고 호소하십니다.
우리의 의지를 누구에게 바치느냐에 따라서 우리를 지배하는 주인이 결정됩니다.

"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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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박윤진   2006-10-23 12:29:51, 조회 : 76, 추천 : 2

최은성 님께서 말씀하신 것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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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의지를 누구에게 바치느냐에 따라서 우리를 지배하는 주인이 결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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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표현을 읽고

어떤 CCM의 가사가 생각나서
지난 번 썼던 글을 이 곳에 옮겨 봅니다.

아래는 그 가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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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인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되신 주 앞에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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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의 속성을 아주 잘 보여주는 가사입니다.
인간이 자신이 처한 사태를 어떻게 착각하고 있는지,
인간이 십자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잘 반영합니다.

내가 주인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라는 말을
무심코 들으면 그럴싸 합니다.
'나의 의지를 드리는 분이 나의 주인이 된다'는 말씀과 비슷하게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주인'이라는 말의 위력을 잘 몰라 하는 말입니다.

주인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종은 주인을 임의로 골라 잡을 수 없습니다.
종은 자신의 결정에 따라 주인에게 작별을 말할 수 없습니다.

주인은 종의 생명을 쥐고 있는 자입니다.
종은 자신이 좋던 싫던 그 주인에게 매여 있는 자입니다.
종의 개인적인 사정, 환경, 취향은
주인에게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주인는 종된 내가 주인 되어주세요라고 할 수도 없고
이제 주인 노릇 그만 두세요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종은 주인을 교체하여
주인 앞에 스스로 나갈 수도 없습니다.
주인이 와라 해야 갈 수 있는 것이지
주인이 오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나아갔다가는
죽습니다.

이것이 종입니다.

자신의 의사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견, 자존심, 생명까지
주인에게 매여있는 자가
바로 종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결단으로
언제든지 자신의 주인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주인이 사탄이라면
경악하면서 언제든지
굿바이를 통고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선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될 자격이 있으므로
자신이 그 분을 주인으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자신의 돈과 기도와 봉사로,
자신의 의지로 나갈 수 있다고 여깁니다.

과연 그럴까요?

인간은 세상의 주인 소유의 살림살이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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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2장  29절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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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예수님께서 세상의 주인을 결박하시고 늑탈해 주셔야만
주인이 바뀌는 처지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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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장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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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전쟁 사이에 끼여 있는 운명이지
자신이 스스로 이 전쟁을 당사자가 아닙니다.
이기는 쪽이 당연히 차지하는
전리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 세상의 임금을 심판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을 이겼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강한 자를 어떻게 결박하셨습니까?

십자가로 결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세상의 주인에게 매맞고 조롱당하고 버림받아
결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뱀의 머리를 가진 죄인의 눈으로 봐서는
승리하고 보여지지 않습니다.
패배로 여겨집니다.
완전히 당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가 멸만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지만
구원을 얻은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가옵니다.(고전 1장 18절)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의 도로 얻어진 전리품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십자가만 자랑하며
십자가에서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게 됩니다.

자신이 스스로 주인을 결정할 수 있다고 여기고
그 주인에게 열심히 봉사할 수 있는 자는
여전히 뱀의 머리를 가진
세상의 임금의 수중에 있는 세간살이에 불과합니다.


이제 그리스도가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된 성도는

주님께서 오라하시면 오게 되어 있고
가라하시면 가게 되어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다 이루심이
성도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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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언약 방식과 새언약 방식의 차이 
이근호   2006-10-22 07:58:33, 조회 : 110, 추천 : 2

옛언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마음까지 들어오지를 못하고 외부에 멈추고 있다.

따라서 비록 택함받은 자(이스라엘 백성)라고 그 외부에 있는 거룩한 말씀을 지켜야하며 만약 지키지 못할 시에는 거주를 받게 된다. (신명기 28장)

자신의 의지를 어떤 식으로도 주무리고, 관리하고, 반성하고, 복종과 순종을 하고, 혹은 절제를 하든지간에 어디까지나 본인의 마음 능력의  책임 하에 그 말씀이 요구하는 일치된 성취를 달성해야 만 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했다.

선지자를 보내도 소용없고, 성전을 허락해도 소용없었다. 심지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도 죽여버렸다.(포도원과 악한 농부들의  비유에서)

이는 인간의 마음이 이미 악마의 수중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아담으로부터 줄기차게 내려오는 죄는 인간의 마음을 왕적인 통치를 하면서 지배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영이 왔지만 그 영은 인간의 구원을 전적으로 책임질 수는 없었다.

새언약의 시대에는 구원방식이 전혀 다르다.

인간이 자기 인생을 책임지는 방식이 아니다.

밖에 있던 말씀이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전에 옛 언약 시대에 인간이 차지했던 그 자리를 말씀이 차지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 말씀의 성취자 되시는 예수님께서 그 인간에 대해서 책임지는 방식으로 구원이 전개된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전 1:8)

"그러므로 자기(예수님)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를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히 7:25)

새언약 시대의 성도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증거하는 증거인에 역할을 하게 된다.

예수님과 그 예수님의 영에 의해서 구원 되기로  이미 확정되어되었음을 증거케 하신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새언약에 행할 선한 일이요 의로운 일의 바탕이다.  왜냐하면 성도는 이제 선한 일의 책임자나 주인공에 있는 자가  아니라 '의의 종'의 자리에서 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증거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의 강도나 성실함을 내세운다면 마귀가 웃을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는 옛언약 방식 안에서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내 힘으로 지켜내어서 그 덕으로 구원받았다"라는 주장은 악마가 고대하고 고대하면서 듣고 싶어하는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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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옛언약 방식과 새언약 방식의 차이 
이준   2006-10-23 05:52:50, 조회 : 62, 추천 : 0

   이 말은 좀 이해 하기가 힘듭니다.
  즉 "하나님의 영이 왔지만 그 영은 인간의 구원을 전적으로 책임질 수는 없었다."
   하나님의 영은 "성령님"을 말씀하심이 아닌가요 ?
   - 책임을 질 수는 없었다 -  이렇게 말하면 구원할 능력이 없으신 성령님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

   에녹의 구원은 어떻게 설명하여야하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구원과
   엘리야의 구원은 어떻게 설명하여야 합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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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옛언약 방식과 새언약 방식의 차이 
이근호   2006-10-23 07:34:06, 조회 : 61, 추천 : 0

성령님, 혹은 '하나님의 영', 혹은 '하나님의 신'께서는 온전히 독자적인 기능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 언약에 준해서, 언약이 정해진 범위 안의 내용만을 가지고 일하실 수가 있습니다.

구약, 즉 옛언약 시절에는, 영께서 언약이 허락한 것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적용하시기 때문에, 신약(새언약)의 시절처럼 구원에 관한 온전한 전 내용을 성도에게 다 담아줄 바탕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께서는 구약의 성도들에게 오실 분을 고대하도록 조치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대표적인 분입니다. 예수님 오시기를 고대하다가 만나 뵙고 기뻐했습니다.(요 8:56)

엘리야나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마 17).

그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에녹이나 엘리야나 모두 하늘로 승천갑니다. 단지 그들이 보여주어야 될 구원의 내용이 신약의 경우처럼 온전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마 11:11)


이처럼 구원이란, 그 사람의 영생소유에 초점을 둔 개념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보여주어야 하는 예수님의 온전하신 내용의 충실한 기능과 관련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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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7: 5- 8 (144,000명) (에러로 안 보이시는 분) 
김대식  (Homepage)  2006-10-22 22:16:31, 조회 : 78, 추천 : 0

이번주 우리교회 설교 입니다.

저번주까지만 보이고 이번주 내용이 안 보인다고 하시는 분이 계셔서 올립니다. 아마 홈 개편으로 어떤 분들은 안 보이시는가 봅니다. 여기를 참고 하시고 조금만 기다리시면 해결 됩니다.

계 7: 5- 8 (144,000명) 

본문 : 요한계시록 7장 5- 8절
제목 : 144,000 명
일시 : 2006년 10월 22일

Re..계 7: 5- 8 (144,000명) 

2006년 10월 22일                              성경 본문: 요한계시록 7:4-8

(계 7:4)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계 7:5) 『유다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계 7:6)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계 7:7)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계 7:8) 『스블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하늘 나라에는 좌석이 있습니다. 마치 극장 안에 지정된 좌석들이 있는 것처럼 지정된 숫자 만큼만 천국에 들어가고 나머지는 배제됩니다. 그 자리를 앉게 된다면 다른 그 어떤 자도 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배정받은 자들은 한결같이 이스라엘의 지파 지파에만 국한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 인류 가운데 야곱의 12 아들에게면 천국의 복을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연히 다른 자손들의 반발이 있겠지요. “우리와 왜 저들 이스라엘 민족과 차별을 두는가! 이런 차별을 두면서도 만인을 공평하게 대하시는 정의롭기도 하고 자비롭기도 하는 그런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는가! 도리어 깡패같은 하나님상이다”라고 반발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반발하는 자를 두고 ‘개’라고 표현하십니다. 자신이 원래 생각해 놓은 그 인간이 아니기에 개와 다를 바 없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하기전에 먼저 자기 자신이 ‘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왜 개같은 인간밖에 안되는지를 염두에 두지도 않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따지려 드려고 합니다.

마가복음 7:26-30에서는, 수로보니게 여인 하나가 자신에 대해서 ‘개 같은 여자’임을 고백했습니다. 이 여인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어떤 모습인 가를 너무나도 명확히 아는 자입니다. 원래 인간은 현재 우리가 사는 이런 지상의 삶을 살던 자가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살던 자입니다.

그 때는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을 안가졌던 시절입니다. 인간이 선과 악에 대해서 지식을 갖고 있을 때부터 인간은 그 좋던 낙원에서 가차없이 추방당했습니다. 그 때부터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자기를 살려내어야 하는 힘든 시련의 인생을 보내야 했습니다. 특히 자신의 가치나 의미를 원래 하나님의 창조성에서 찾지 않고 이 세상 삶을 통해 확인해보고자 합니다.

자신이 추방되었다는 사실을 빼놓고서는 자신을 평가합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은 마치 당연히 천국에 가야할 인물로 간주하고 시작합니다. 자신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충분히 된다고 장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들의 이런 객기에 말려들어가지 않고 죄를 가지고 다가섭니다. 그렇게 되면 그 어떤 인간도 구원될 자격자가 못되고 도리어 지옥에 반드시 가야한 자로서 노출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보고 ‘개’라고 묘사한 것은 참으로 합당한 용어입니다. 옛날 조선시대의 개를 보세요. 그 때 개나 요즈음 개에 무슨 차이점이 나던가요? 없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문명과 문화의 옷을 껴입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보시는 시선과 안목은 동일합니다. 아무리 인간들이 발단과 발전상을 증거로 내세워도 하나님의 구원방식은 전혀 달라진 바가 없습니다. 동일하게 흠없는 분의 피로만 구원될 뿐입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이 지옥가도 하나님 편에서 당연한 조치를 취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을 통해서 은혜 줄 자와, 긍휼을 입을 자들이 등장됩니다. 그들이 야곱의 12아들로서 나온 이스라엘 12지파입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언약과 맹세가 덧입혀졌기에 자기네의 방식으로 구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만 구원됩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당연히 지옥 갈 개입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의 구세주, 자신이 메시야인 하나님 아들이 왔지만 그들이 자기 행위에 의존했기에 메시야를 배척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궐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구원받은 자가 숫자가 모자란 것입니다. 이 자리에 ‘이방인의 사도’인 사도 바울을 보내어 그 부족한 자리를 이방인 그리스도 사람으로 채우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자신을 배반한다는 사실을 미리 아시고, 기존의 혈통적인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여기는 그 인간들의 신학적 오류를 거부하시고 오직 예수님 자신이 짠 천국의 실상을 소개하십니다.

그것은 혈통의 아브라함 자손이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예수님을 메시야로, 심판주로, 천국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영적인 자만이 참 이스라엘이요 아브라함 자손으로 인정하겠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여, ‘이리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겠나이다’라는 이방인이 천국가는 방식으로 바뀐 것입니다.

기존의 혈통적 아브라함 자손들은 천국에서 추방되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은 새로운 이스라엘 나라의 기초로 삼기 위해 12제자들을 뽑아 12지파를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이들 제자들의 말을 듣는 자가 곧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말을 듣는 사람입니다. 이 12제자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긴 말씀이 곧 이 성경 말씀입니다. 사도의 죽음을 끝으로 성경 내용도 종결되었습니다.

개같은 이방인들의 구원은 율법을 준수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성령께서 먼저 오셔서,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부르는 것으로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곧 하나님의 맹세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8에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7:25에서는,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라는 말씀도 나옵니다. 이런 말씀을 과연 자신이 만든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신 믿음으로 받아드리십니까? 이런 판정은 우리가 환란과 어려움에 처해 봐야 하고, 또한 자기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스럽고 책망할 게 많고, 자살 할 수 밖에 없는 절망의 지경에서도 주님 덕분에 구원됨을 의심치 않을 때 알 수 있는 겁니다.

이런 자가 바로 택한 받은 자입니다.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낳습니다. 사망과 심지어 천사나 악마의 유혹 앞에서, 십자가의 공로가 의심되지 않아야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 세 친구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죽음으로 몰아세우듯이, 지금도 하나님은 자기 사람을 늘 죽음 지경으로 만들어 그 가운데서는 십자가 생명의 능력을 확인케 합니다.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는 우리가 늘 세상 것을 사랑할 수 밖에 없다는 현실 속에서도 끊어지지 않고 있음을 보이기 위한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가짜는 기어이 하나님의 그 선택된 자리에 이르지 못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마땅히 개같은 존재이며 지옥갈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절감하면서 그 가운데서 주님의 사랑이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더욱더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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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계 7: 5- 8 (144,000명) (에러로 안 보이시는 분) 
이준   2006-10-23 05:42:39, 조회 : 75, 추천 : 0

질문이 있읍니다 :
  2. 선악을 알게된 인간의 상태는 어떤 상태인지요 ?
      즉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되었는데 .. 선악을 알게된 이들의 행위를 지적한다면 어떤 것인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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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계 7: 5- 8 (144,000명) (에러로 안 보이시는 분) 
이근호   2006-10-23 07:25:15, 조회 : 75, 추천 : 0

율법의 제정자 되시는 분 이외에는 누구도 온전한 지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실은 진정한 '지적'에만 머물것이 그 지적한대로 심판을 행사할 수 있는 자격자가 지적해야 제대로 된 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