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뜻

복음을 안다고 하는 이들에게(손무성)과 관련된 생각들

아빠와 함께 2013. 1. 28. 10:42

복음을 안다고 하는 이들에게 하는 안타까움의 외침 
손무성  (Homepage)  2006-10-07 00:12:21, 조회 : 380, 추천 : 10

이 글은 '김인철님'의 질문답변란에 있는 것을 옮겨 놓았습니다. 아마 복음을 안다고 하는 이들을 지켜보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남기신 글인 줄 압니다. 저 역시 서서히 방종해 가는 모습을 보였고, 20년 동안 십자가 복음을 알게 되었다는 이들의 생활 양상 역시 지적교만과 방종하는 모습들을 지켜 보았습니다. '김인철님'의 외침에 저도 공감하여 이글을 옮겨 놓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안다고 하시는 이들께서 이 글쓰신 김인철님의 마음을 읽으시고 이게 누구의 책임이냐 하는 따짐보다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되길 바랍니다. 어떠한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아래는 김인철님의 글입니다.
제가 궁금히여겨 십자가의 피로 구원된자의 삶은 ? 무엇인가요 질문 한것은 아래의 내용 때문 입니다
-------------
1] 십자가의 피로 구원된자의 삶은 ?

" 십자가 중심 주의는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에서 방종을 확산 시킬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반쪽 진리가 전락할 수가 있습니다.
무엇을 해도 죄가 된다는 말은 그 자체가 옳은 말이지만
성경에 보면 분명히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적극적으로 강권하는 말씀을 많이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라고 하면
교인들이 마치 그것이 성경 내용의 전부인 줄 알고
복음을 안답시고 교회에서 아무 것도 아니하고, 심지어 아무런 신앙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고 마구 방종으로 치달아, 순진한 교인들 까지 물들어 버린 사례가
소위 십자가 복음을 안다는 사람들 속에 허다합니다.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주님의 바른 뜻이 아나라고 봅니다.
십자가 중심 주의는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에서 방종을 확산 시킬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반쪽 진리가 전락할 수가 있습니다.

무엇을 해도 죄가 된다는 말은 그 자체가 옳은 말이지만
성경에 보면 분명히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적극적으로 강권하는 말씀을 많이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라고 하면

교인들이 마치 그것이 성경 내용의 전부인 줄 알고
복음을 안답시고 교회에서 아무 것도 아니하고, 심지어 아무런 신앙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고 마구 방종으로 치달아, 순진한 교인들 까지 물들어 버린 사례가

소위 십자가 복음을 안다는 사람들 속에 허다합니다.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주님의 바른 뜻이 아나라고 봅니다.

-------------
저의 좁은소견으로는 나의 나됨이 나로 인함이 아니고 오직 주예수 그리스도의 인도 하심에 따라 된줄로 믿고 나를 내세우지 않고 항상 주님이 하심을 믿고 범사에 감사 하며 선한 일을 할수 있는데 까지 도모 함이 마땅 하다고 생각 되어 집니다
이것들이 내 의지되로 되지 않는 줄 믿어며  또한 누구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 운운은 아닙니다.
------------
2] 연보에 관한 나의 생각
그곳이 참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몸된 교회라면 모든것이 주께로 부터 왔은즉 우리의 형편되로 힘써 연보 함이 마땅하다
생각 합니다. 너무 얌체 같은 짓은 하지 말았어면 합니다.

--------------
위글은 저의 솔직한 생각을 정리한 글이오니 누구든지 비판할 자격있는자 비판 하시지요. 김인철님의 글. 끝

======================================================
[re] 이 글이 십자가 마을의 주장입니까? 
박윤진 
  2006-10-09 08:53:05, 조회 : 192, 추천 : 1

-------------------------------------------------------
십자가 중심 주의는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에서 방종을 확산 시킬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반쪽 진리가 전락할 수가 있습니다.
------------------------------------------------------

십자가 중심 주의라는 말이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바울의 고백과 같은 말이라면

이것이 교회에서 방종을 확산시킬 우려가 있다는 말자체가
모순아닙니까?

십자가와 그리스도가 머리 되신 교회가 서로 공격하는 것이 가능한가요?

십자가 중심 주의라는 말이 다른 뜻이라면
그 개념을 분명히 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반쪽 진리라니요?
진리의 나머지 반쪽은 무엇입니까?

진리의 구성요소의 50%는 십자가 은혜이고
나머지는 그에 합당한 책임있는 성도의 행위라고
말씀하고 싶으신지요?

==========================================================================
[re] 이 글이 십자가 마을의 주장입니까? 
정판옥  (Homepage)  2006-10-09 09:04:09, 조회 : 174, 추천 : 0

처음 이 글을 인용하신 김인철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주장을 하시고 있네요.
김인철님의 질문과 답변, 그리고 질문 게시판 1815번이 나오게 된 경위를
다시금 살펴 주시지요?

==========================================================================
[re] 이 글이 십자가 마을의 주장입니까? 
우인숙   2006-10-09 09:09:18, 조회 : 192, 추천 : 0


좀 놀라셨죠? 질문답변란의1870번 참조하시고
어제 화평의 밥상머리에서 김 인철 장로님

정리하셨습니다...

==========================================================================
[re] 이 글이 십자가 마을의 주장입니까? 
손무성  (Homepage)  2006-10-09 12:36:01, 조회 : 217, 추천 : 3

박윤진님의 말씀
>십자가 중심 주의라는 말이 다른 뜻이라면
>그 개념을 분명히 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반쪽 진리라니요?
진리의 나머지 반쪽은 무엇입니까?
>
>진리의 구성요소의 50%는 십자가 은혜이고
>나머지는 그에 합당한 책임있는 성도의 행위라고
>말씀하고 싶으신지요?

답변

십자가의 은혜를 전하면 방종하게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진리의 구성요소의 50%는 십자가 은혜이고 나머지는 책임있는 성도의 행위가 50% 되어야 된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전도해도 죄고, 기도해도 죄고, 봉사해도 죄고, 헌금해도 죄다라고 하니.... 사람들이 그러니 죄를 짓는일 왜 해...
이렇게 되니 오해해서 방종을 하게 되는 이들이 발생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 안타까워 하는 것입니다.

==========================================================================
[re] 복음을 안다고 하는 이들에게 하는 안타까움의 외침 
박윤진   2006-10-09 14:20:21, 조회 : 212, 추천 : 8

위의 글을 읽고 제 생각을 정리하여 봅니다.

먼저 십자가 중심주의라는 말이 어떤 뜻인지 고민이 됩니다.
중심주의이라는 말은 어떤 관점이 들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제된 관점에 의해 중심과 변두리가 분리됩니다.
즉, 전제된 관점이 다르면 중심과 변두리가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십자가가 어떤 관점에 의해서 변두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어떤 관점에 의해서도 변두리가 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성경을 볼 때,
죽여놓고 시작하시는 것이 십자가의 영의 역할입니다.

"저는 이 관점에서 성경을 읽습니다" 하고 하면
"그런 너를 죽였다!"고 선포하시는 것이
십자가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중심 주의라는 말은
이미 내가 무엇에 의해 편집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십자가를 편집할까요?

위의 글을 보면 교회와 순진한 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교회와 순진한 교인들을 보호한다는 미명아래
복음이 방종을 유도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와 순진한 교인들을 보호해야 한다면

과연 누가 보호해야 합니까?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 아닙니까?

머리를 믿지 못하니까
손은 손대로, 발은 발대로
제 살 길을 마련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순진한 교인들이라고 판단하는 자가 과연 누구입니까?

순진과 불순을 교인, 성도라는 그리스도의 몸에서 구별해야 합니까?
구별이 가능합니까?
그리스도의 몸으로 확정되었다면 그것으로 이미
순진과 불순을 넘어선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통제하고 지배하고 계신 머리가 바로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 만으로 안심이 되지 않는 사람은
아직 십자가위의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외에
다른 무엇인가를 강조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성도로써의 선한 양심,
뭐 이런 것들입니다.

인간은 무엇을 해도 죄가 됩니다.

인간이 무엇을 한다는 것은
그것이 헌금, 기도, 봉사, 설교라고 할지라도
죄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로부터 나온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외에는 그것을 정지시킬 것이 없습니다.
반대로 헌금하는 것이 죄이므로 헌금하지 않는 행위를 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까?
그것 또한 죄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허다한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덮고 있습니다.

설교하는 것도 죄고
이것이 죄인 것 같아 설교하지 않는 것도 죄인데
이렇게 아직도 행함으로 내 존재를 들어내고 싶어하는
내 머리를 싹뚝 잘라버리시고
주님의 머리 아래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이
감격스럽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분명히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적극적으로 강권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성도의 책임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강권하신 말씀과 강권하지 않으신 것으로 말씀이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강권했던, 명령체이던, 서술체이던
말씀은 이미 십자가 위에서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성도)에게는
이미 온전히 성취된 말씀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즉 성도는

"아, 주님께서 이 강권하신 말씀을 이루셨네!
주님께서 서술체로 되어진 말씀도 이루셨네!
주님께서 명령체로 되어진 말씀도 이루셨네!"

인정되고 놀라고 감사하는 자인 것입니다.

성도는 신약의 하라, 혹은 하지말라의 명령을 이루어야 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신약의 모든 말씀까지도 주님께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증거하는 자로 불러 주신 것입니다.

방종이라는 말은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에게나 어울리는 말입니다.
개가 전봇대에 오줌누는 것을 보고
"개가 참 방종하다"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바르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방종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라고 해서 자신의 행동에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가 아닙니다.

그 성도를 책임지고 계신 분이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인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 모두 방종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과연 십자가 앞에서 누가 방종하지 않은 자로 자처할 수 있습니까?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우리는 방종할려고 벼르고 있는 자들입니다
.

십자가는 바로 그러한 우리를,
방종하고 싶어 안달하고 있는 우리를
지금도 공격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누가 누구보고 방종하게 한다고 합니까?

누군가가 방종하게 보이고
누군가가 방종을 유도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면
그렇게 판단하고 있는 자신의 눈의 들보부터
빼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내 눈에 있던 들보도
십자가의 은혜로 다 죽었다는 것을 알고 나면
상한심령으로 십자가만 자랑하게 되겠지만 말입니다.


십자가가 눈 앞에 밝히 보이는데
선한 양심, 순진한 교인, 방종 등의 단어로
속지 않기를 바랍니다.

==========================================================================
[re] 개 패듯이 자신을 패지 아니하면 나올 수 없는 글 
이근호   2006-10-09 16:31:58, 조회 : 181, 추천 : 3

박윤진씨의 글은.

개 패듯이 자신을 패지아니하면 나올 수 없는 글이다.

죽으라고 자신을 팬다.

제발 이 세상에서 그만 얼쩡거리고 빨리 뒈지라고 자신을 패는 자만이 나올 수 있는 글이다.

바라기는 목사들은 먼저 자신을 개 패듯이 팼으면 좋겠다.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

돼지가 죽어야 잔치집이 흥겁게 포식하듯이!  

==========================================================================
[re] 복음을 안다고 하는 이들에게 하는 안타까움의 외침 
서동훈  (Homepage)  2006-10-09 16:56:57, 조회 : 175, 추천 : 1

손무성 목사님이 인용한 김인철님이 "질문답변"란에 올리신 글을 보고 질문드립니다.

글중에 "십자가 중심 주의 , 방종, 반쪽진리, 선한일 도모, 신앙양심, 주님의 바른 뜻, 순진한 교인, 신앙양심,  얌체연보 " 등등의 말이 있는데 안 맞는게, 이렇게 예를 들어 말씀드려 뭐합니다만 " 우리 쇠똥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라고 하곤 자꾸면 이야기 할때 상정하는 것은 개똥을 상정해놓고 이야기 하나까 무슨 말씀인지 감을 못잡겠습니다.

질문1. 언급하신 십자가 중심주의가 무엇이고, 방종이 무엇인지요?  왜 십자가 중심주의가 되면 방종으로 확산되는지요? 그 관계를 질문드립니다 

질문2. 십자가 중심 주의가 방종을 낳게 되고 그로인해 성경의 온전한 진리가 반쪽진리로 전락하게 된다는 논지인데 그럼 어느시점까지가 십자가 중심주의로 나가야 되고 또 어느시점에서부터는 또다른 중심으로 조화를 맞추어야 만 온전한 진리가 되는지요? 십자가 중심주의 (편의상 언급하신 그대로 '십자가 중심주의"란 용어로 표현)로만은 온전한 진리가 되지 않고 반쪽진리로 전락된다면 하나의 온전한 진리가 되게 하는 또 다른 반쪽은 무엇인지 이부분에 있어서 명확하게 제시해주실수 있는지요?
 두가지 경우로 생각해볼 수있을 것같습니다. 첫째, 성경 안에서 동등한 관계에서의 또다른 한 가지의 중심 ( 중심이 둘) 둘째, 중심은 십자가 중심 하나인데 십자가 중심안에 구성요소가 복수 임을 강조하는 입장 ( 형태만 다르고 의미의 동일성이 아닌 다른 성질의 다중요소)

질문3. 십자가 복음을 안다고 하는 사람하고 십자가 복음을 아는 사람하고 같은지요 동질성으로 놓고 유추해도 되는지요?

질문4. 연보에 있어서 얌체짓으로 안하는 것이나 얌체같이 안되기 위애서 연보하는 것이나 뭐가 다른게 있는지요? 이것이나 저것이나 똑같은 연속선상의 성질같은데?

질문5. 무엇을 해도 죄가되는 죄인의 실존에게 있어서 선한일을 도모한다는게 어떤 것인지요?  무엇을 해야 선한일이 도모
          된 것인지요? 

##############################################################################################
어느 목사님과의 편지 
이장   2006-10-09 10:20:57, 조회 : 150, 추천 : 2

목사님, 안녕하시지요?
오랜만에 안부를 드립니다. 사모님도 안녕하시지요? 일전에 아버님의 부음 소식을 어느 게시판에서 읽었습니다. 늦었지만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전 밭일하다가 몸을 좀 다치는 바람에 집으로 올라와 있습니다. 불편해진 날들이 꽤 길게 흐르면서 5월도 이젠 그 꼬리만 남기고 있군요
5월이면 어버이날이 오고 이달이 되면 매번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나면서 생전의 그 분들에 대한 그리움이 참 깊습니다. 이런 마음과 함께 이 달에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듣게 됩니다. 5월은 가정의 달이라는 현수막과 함께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눈에 번쩍 뜨이는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대구에 있는 우리교회의 "성경신학" 란에서 "십계명"이라는 글을 읽고는 부모공경에 대한 말씀의 맥락을 찾게 되었습니다. 조금 어렵기도 한 내용이지만 에베소서 6장1절2절과 연결하여서 읽어보니 뚫리는 듯  하여습니다.
순간 머릿속이 번쩍하면서 그동안 제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말씀에 대해 “잘못 들어 온자" 였슴이 밝혀졌습니다.
말씀이 "네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에서 오직  “주안에서" 만이 말씀과 만날 수 있고 들을 수 있는데, 오월이라는 귀 즉 어버이날, 어린이 날, 가정의 달이라는 귀를 가지고 들었으니 “잘못 들은 자" 였슴이 분명해 집니다.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 한다" (엡6-3)는 이 말씀이 가정의 달이라는 귀와 함께 바라보면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것 같으니 말입니다.
목사님,
출20장12절의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와 엡6장3절의 "이는 네가 잘되고 장수하리라" 의 이 구절들을 어떻게 읽어 내야 합니까? 특히 사도는 왜? 엡6장3절의 말씀을 기록한 것일까요?


(목사님의 답신)

잘 보셨습니다.
성령 받은 신약의 증거자들은 예수를 증거 할 때 언제나 언약의 완성차원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받았지만 이루지 못한 언약(십계명)을 예수님이 이루었다는 차원에서 부모공경을 거론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출애굽기 20:12의 뜻은 이렇습니다.

“여호와께 네게 준 땅”은 약속의 땅입니다. 약속의 땅이란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거룩한 땅이란 뜻입니다. 거룩한 땅이기에 거룩한 백성일 때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거룩의 유지는 희생제사로 됩니다(출애굽기 19:5, 24:8 “언약의 피”라는 말씀에 유의).
따라서 이스라엘의 부모란 약속을 증거 하는 선지자들과 같습니다(출 13:14). 그런 뜻에서 부모공경의 계명속에는 곧 약속을 받은 부모가 자녀들에게 약속(하나님의 희생의 능력)을 증거 할 때 그 약속을 믿고 사는 자에 한해서만 약속의 땅에서 살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약속이 제대로 지키는 자에 한해서만 약속의 땅에서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재미 보면서 알콩달콩 가정 이루고 사는 것은 약속의 땅 바깥에서 일어나던 일입니다.

2. 부모공경의 그 계명을 포함한 모든 약속을 제대로 지켜 내신 분은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갈 3:16).
 
빌립보서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버지를 제대로 공경한 아들이 예수님 한 분 뿐인 것입니다. 너무 건너뛰는 것 같지만 에베소서 6장의 부모공경 본문을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에 대한 순종이 십자가의 희생이 된 이유를 혈과 육으로 난 부모 자식 간에서도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떤 아들도 제대로 부모공경 못하고, 이 세상에 어떤 부모도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아들의 순종으로만 구원되는 죄인 됨을 아는 부모, 그것을 알고 사는 자식이 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엡6:3의 땅이니 장수니 하는 표현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약속으로 말미암는 땅은 곧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즉 출애굽기의 땅이 옛언약이 내는 땅, 곧 아브라함 언약이 성취로 주어지는 땅이었듯이, 신약의 땅은 새언약의 성취로 주어지는 땅이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4:3절에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합니다. 20절에는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하고요. 다시 26절에는 그 처소를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고 합니다.  엡 2:22절에 분명하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도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3. 그러므로 에베소서의 부모공경에 대한 말씀은 이렇게 풀이됩니다.

십자가의 피로 구원 된 자들은 그 피의 능력으로 영생에 이르도록 지금도 성령께서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라고 합니다. “주님이 일하시는 영역 안에서” 그런 뜻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부모가 되어서 자식하나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식이 되어서 부모하나 제대로 공경하지 못하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자기 몸을 다 드려서 순종한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의 능력으로 영생에 이르도록 언제나 돌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네가 인정하느냐고 성도에게 확인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순간순간 확인하십니다. 자녀들의 불평을 통해서, 부모님의 덧없는 죽음을 통해서, 앞뒤로 여러 관계들이 나옵니다. 모두 다 십자가의 피 공로가 배어 있는 말씀들입니다. 내(예수님)가 너 같은 못난 인간 하나 책임 못 지겠냐? 못난 네 행동을 믿지 말고 나만 믿어라 십자가의 공로만 믿어라 모두 다 그런 뜻으로 받아들이면 틀리지 않습니다.
참고로 성령은 꾸중하는 영입니다. 선한가정 이루게 해주고 부부 금슬 좋게 해주는 영이 아니고, 부모자식관계를 개선시켜 주는 일에 동원되는 심부름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처소에 들어가면 매사 꾸중을 듣게 되는데 그 꾸중은 행동 잘못한 것에 대한 꾸중이 아니라(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 왜 자기 행동이나 쳐다보면서 예수님의 피 공로를 우습게 여기느냐 에 대한 꾸지람입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한복음 16:9)

그런 의미로 신약의 어버이도 자식들에게 선지자 노릇을 해야겠지요. 기회가 닿을 때마다 복음을 말해주는 어버이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미안한 마음 가지고서요. 나 같은 죄인의 죄성을 물려받아서 고생하는 자식들을 보면 미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정말 줄 것이 있다면 복음뿐입니다.

답을 간단명료하게 해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반가웠습니다.  불편한 몸 잘 추스르시기 바랍니다. 

##############################################################################################
손무성 목사님의 최근 글들을 읽으면서 
박기삼  (Homepage)  2006-10-09 16:19:05, 조회 : 264, 추천 : 19

어느 교회에서 주일 예배 후에 교회 운영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김 집사
우리 교회의 지난 달 재경이 적자가 되었습니다.
사실 목사님 사례비도 줄 수 없는 지경입니다.
다음달부터는 우리 서로 헌금하는 일에 관심을 좀 가집시다.

박 집사
아니! 김 집사님,
교회란 주님께서 세우시는 것이고 주님께서 필요하시면 채워주실 것인데
왜 그런 쓸데 없는 걱정을 하십니까?
교회란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만 찬양하는 곳이지
이런 것 저런 것 하라고 규제하거나 하자고 권면하는 곳은 아니지 않습니까?

김 집사
저는 배가 고프면 밥을 찾듯이 교회의 재정이 부족하니
필요에 의해서 그런 말을 했는데요.
본인이 배가 고파서 밥을 찾으면 정당하고
다른 사람이 배가 고파서 밥을 찾으면
그래서는 안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집사
그 동안 내가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최고라고 소리쳤지만
사실 김 집사의 말을 듣고 보니
내가 얼마나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내 편리한 대로 생각했는지 가슴이 아픕니다.
나는 늘 십자가의 은혜가 최고라고 하면서도
십자가의 은혜보다 돈을 더 사랑하였음이
김 집사의 말을 통해서 오늘 새삼스럽게 다시 들통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무리 십자가의 은혜를 찬양하더라고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고는 안된다는 것을 이순간 또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 집사의 제언은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놀라운지를 알게 하는 은혜의 말씀으로 다가오는군요.
김 집사, 고맙습니다.

*
성도는 레위기를 읽고도 주님의 십자가를 찬양하고
야고보서를 읽고도 주님의 십자가를 찬양할 것입니다

성도는 이웃을 돕자는 권면을 듣고도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찬양하고
늘 기도하자는 말을 듣고도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찬양할 것입니다.
우리 서로 이것이다 저것이다 판단하기 전에 
왜 우리들에게 이런 말씀을 주시고
왜 이런 사람을 우리들에게 붙여주셨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떨까요?

##############################################################################################
죽방과 멸치('방종'과 '성도의 자유') 
이준   2006-10-09 23:52:36, 조회 : 167, 추천 : 4

                                                                                      죽방(죽방렴)과 멸치
                                                                              - 부제 : ‘방종’과 ‘성도의 자유’ -

********************************************************************
부디 제 부족하고도(!), 장황한 글을 끝까지 읽으시고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굳이 말씀드리지만, ‘설득’을 목적으로 한 글은 아닙니다. 설령, 설득을 목적으로 했더라도 설득되지 않는 이들이 있음이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비판하려는 목적도 아니며, 불 붙은 곳 - 이 글을 쓴 때는 김인철씨의 글을 손무성 목사님께서 게시판에 옮겨놓으신 날이었지만, 그 이후에 다듬으면서도 마음 한편으론 게시할까 말까 망설이는 동안에 몇몇 형제님들께서 이미 이의를 제기하신 것을 보면서 - 에 기름 끼얹으려는 의도에서도 아닙니다.
아울러, 제목을 ‘그녀를 쏴야했던 이유’라고 했다가 다시금 위와 같이 정정하였습니다. 제목‘들’과 관련된 사연들은 글을 읽어 가시다가 자연스레 발견하게 되실 것입니다.
*************************************************************************

‘방종’이라 함은 ‘방종’에 따른 책임도 따른다는 말입니다.
(이 글의 부제를 다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성도의 방종과 자유’가 아니고, ‘방종과 성도의 자유’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성도는 자유하는 사람이지, 방종과는 거리가 먼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즉 성도가 방종하는 존재라면 자기의 방종에 대하여 어떤 식으로 책임을 지는 걸까요? 이러한 의문은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원론으로 늘 되돌아가야함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는, 과정이나 결과에 대하여 뭔가 복잡해짐을 느낄 때 다시금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생각해 보곤 하게 되지요. “그렇다면, 다시 수사는 원점으로...”)

구원이란, 이전에는 갖고 있지 않았던 ‘성도’라는 신분을 획득하는 순간만을 두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특정 신분이 있다면 그 신분에 걸맞는 삶의 과정이 수반되기 마련인데, 구원이란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념이지요. 성도라 함은 신분과 그 신분에 따른 삶을 모두 포괄하는 바, 주님의 구원의 대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덮혀진 -은혜로 구원받은 - ‘성도’는 그 신분만이 아니라 그 신분에 따른 삶의 전 영역이 은혜로 포괄되어진다는 말입니다. ‘성도가 성도를’이 아니라 ‘은혜가 성도를’ 포괄할진대, 더 이상 은혜 외에 성도를 포괄하거나 규정하는 결정적 주체는 없습니다.

(소위 ‘상급균등론’이라는 것도 은혜 안에 놓여있는 성도가 더 이상 자기 삶에 책임질 부분이 없기 때문에 성립되는 논리입니다. 마르크스도 공산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이 균등론과 전천년주의자들의 비성경적인 천년왕국론 등에서 일부 받았지요.)

따라서, 근본적으로 ‘성도’란 ‘방종’과 ‘방종에 따른 책임’이라는 말들과는 상관없는 존재입니다.

‘방종’은 흔히 ‘자유의 남용’내지는 ‘자유의 유사품’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일을 하지 않을지라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가 율법에 대하여 자유하는 존재라고 묘사합니다. 그렇다면 ‘자유’ 아닌 ‘방종’은 ‘성도’와 상관없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만일 형제라 여겨지는 자가 이러저러하거든 더 이상 그를 형제 취급하지 말라’고 단호히 말씀하십니다(고전 5:11 및 유사 구절 참조). 그러면서 한편으론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하여 ‘죽었다’가 아니라 ‘죽은 자로 여기라’고 하시면서(롬 6:11) 심지어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까지도 거론합니다(요일 5:17). 저의 이러한 논리는 ‘방종’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출구를 찾고자 함이 아니라, ‘자유’와 ‘방종’에 대한 제대로 구분된 이해에 보다 다가서고자 함입니다.
이러한 저의 논지에 대하여, “‘방종’이 성도와 관련 없다는 게 무슨 말이냐, 성도의 삶에 대하여 경고성어린 권면들이 신약에 얼마나 많이 나오는데 그런 소릴하느냐?”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지만, 이러한 반응은 성도의 ‘자유’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까닭에서 비롯됩니다.
‘자유’라는 말은 ‘성도’의 삶의 실제의 완전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점에 대하여 ‘방종’을 염두에 둔 분들의 생각과 공통점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의 실제와 관련된 불완전성 - 성도 쪽의 불완전성 - 에도 불구하고 그의 구원을 보장해내는 은혜의 완전성을 담지한 말이 ‘자유’라는 말입니다. 은혜의 출처는 구원의 주체자가 누구인가 라는 사안과 늘 결부되어 있습니다. ‘은혜’는 어디까지나 ‘구원자(구원의 주체이신 분)’으로부터만 나오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유’를 보장하는 분은 은혜를 주시는 구원자이시지, 자유 안에서 자유를 향유하는 당사자 자신 - 성도를 가리킴 - 보장해내는 게 아닙니다.
따라서, 자유의 원천이신 분과 그 자유를 향유하는 자는 서로 다름을 우리는 재확인 합니다. 자유의 향유자는 자신이 누리는 자유의 원천자에 대하여 그 자유를 발생시킨데 대한 그 어떤 공로도 공유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누리는 자유를 보존하고 유지해나감에 있어서도 어떤 추가적인 사항을 제시할 입장에 놓여있지 못합니다.
‘자유’의 원천과 유지에 있어 성도는 일방적인 수혜자에 불과합니다. 이는 자유로써 성도를 지배하시는 분이 따로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자유로써 감싸는 분은 자유의 우리(울, 울타리) 안에 자신이 가두어둔 양무리인 성도들을 책임져야 할 책무를 지닙니다. 따라서, ‘자유’와 관련된 ‘책임’ - 자유를 수호하고 보존할 책무 - 의 소지는 울 안에 있는 양(자유의 향유자)이 아니라 목자에게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자유’에 대한 책임은 향유자가 아니라 원천자(자유의 원천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화국 - 곧 아담의 세계의 존립 방편 - 이 자신의 갖가지 법령으로 규정해 놓고 있는 ‘자유’ 개념과 사뭇 다른 까닭입니다. 아담의 세계에서는 곧잘 ‘힘없는 평화’는 존립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 힘 - 경제력, 군사력, 정치적 패권 등 - 을 보다 많이 확보해 두고자 각축을 벌입니다. 이와 마찬가지 논리로서 ‘책임 없는 자유’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상호의존성을 담지하고 있는 아담세계의 생리에서 당연히 도출되는 현상입니다. 아담의 정부들(공화국)은 개인으로부터 각종 의무의 이행을 요청함과 더불어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서의 몇몇 권한을 제시합니다. 그러한 의무와 권리의 균형상태의 조건 및 지향점이 되는 규범체계의 근간을 자유와 평등으로 삼습니다.
이러한 관계에서 파악되는 공화국의 ‘자유’란 순전히 그 자유의 원천과 향유, 그리고 보존의 책임이 인간 당사자 - 개별자내지는 집단적 상호작용으로 결속되는 사회적 관계 구조 - 에게 있음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도의 자유와 그 어떤 공유점을 지니고나 있는 것일까요?
성도에게 자유주신 분께서는 그 자유의 보존과 유지에 따른 책임과 보장성을 아울러 지니고 계십니다. 과연 주님께서는 멸치(성도)에게 자유라는 테두리로 명명된 ‘죽방’이라는 구조물만 덩그러니 마련해주고서, 그 속에서 들어온 멸치에게 “네가 각양 천적들이 도사린 저 넓은 바다의 위험으로부터 피하여 들어와 있는 그 죽방 - 성경이 언급한 바, ‘그리스도 안’이라 명명된 자유의 영역 - 속에서의 자유를 늘 만끽하려면 네 자신이 누리는 ‘자유’를 보장해 주는 죽방(의 견고함)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 책무까지 멸치인 네가 떠맡아야 돼”라고 하신 걸까요?
책무의 당사자가 성도가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사실은 겉으로 보여지는 성도의 불완전한 삶의 실제까지도 그 책무로서 덮어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란 이런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자유’라는 말은 성도의 삶의 실제를 두고서 '진정 자유스런 것이로군'이라 단정지을 정도로 완전하다는 말이 아니라, 그의 삶의 실제적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덮혀진 은혜야말로 완전성을 담지하고 있다는 의미를 띤다는 점에서 '자유'라는 말입니다.
(이 점을 두고서, “그렇다면 자유라는 말 자체가 방종이라는 개념을 필수적인 자기 구성 요소로 파지하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라는 생뚱맞은 생각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성도는 ‘자유’와 관련된 존재이지 ‘방종’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성도의 삶의 실제의 불완전한 부분을 염두에 두고서 ‘방종’과 관련짓는 것은 주님의 책무에 대하여, 또한 성도의 ‘자유’라는 개념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로 비쳐집니다. 자유케 하신 주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한 결과이며, 자칫 신성모독죄에 해당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자신 삶의 행실에 대한 ‘권면’을 ‘자유’ 안에서 종용 받습니다. 결코 한치도 양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담지한 율법 조목들이 성령의 주도적 능력 안에서 그 권면들을 흔쾌히 지지하지요(그래서 율법은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거룩성과 십자가 구속의 절대성을 일깨워주는 또다른 은혜의 방편입니다). 그 과정에서 성도는 자신의 불완전성으로 치닫는 성향에 대하여 그 자유를 제공하시고 보장하시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으로 회개하게 됩니다. 따라서, ‘방종’이라는 말이 함유하는 바, 그리스도 안에서 획득된 ‘자유’를 ‘자신의 삶의 실제’를 통하여 실천, 유지해내지 못하는 것으로 풀이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에 대한 몰이해에 기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의 이러한 논지는 마음대로, 제멋대로 살아도 된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저의 논지는 마치, ‘온갖 행함이 있으니 믿음 있노라고 장담할 수 없듯, 믿음 있으니 제멋대로 살아도 되는 것은 아님’의 논리를 지지하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율법에 대해 ‘자유하는’ 존재로서의 성도는, 겉으로 보기에 온전한 삶을 보유한 자가 아닙니다.
(‘자체적으로’ 늘 - 중생 이전, 이후를 막론하고 - 자유함을 확보하고, 향유할 수 있는 존재였다면 원천적으로 ‘자유’를 거론할 - 자유로워져야 할 -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성도가 자유한다고 장담할 수 있는 근거는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서의 실제’때문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을 증명해 주는 증거물인 ‘믿음’때문입니다(히 11:1).
인간의 눈에 비춰지는 ‘실제’로서의 ‘현상’들 - 혹은 성도의 삶의 불완전한 실제들 - 은 성도가 과연 율법에 대하여 자유하는 존재인가, 아울러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각종 규범들 - 사도들의 권면들 - 에 대한 책무를 제대로 이행해가는 것일까라는 점을 두고서 끊임없는 의혹을 자아내기에 충분합니다.
(한편,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실제로서의 ‘믿음’을 이 시점에서 거론하는 것을 두고서 방종을 부추기는 또 다른 여지를 개입시키는 게 아닌가 라고 여겨질 수도 있음도 저는 간과하지 않고자 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 달리 표현하자면 ‘인간의 외부에서 날아온’ - 믿음이라는 것을 음미해 - 성령의 능력으로 - 보면 우리의 눈에 여지껏 ‘실제’로 비쳐지던 현상들에 대한 이해는 사뭇 달라지게 됩니다. 당연한 책무의 이행이라 일컬어지던 온갖 것들 - 이를테면 헌금, 예배출석, 봉사, 선교, 구제, 교육, 각종 프로그램 등등 - 을 두고서, 그 모든 것들과 믿음의 진위성 사이의 상관관계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고후 13:5, 마 7:15,21-23). 그런 생각을 하는 당사자가 진정으로 성령 임하신 자라면 말입니다.

“온갖 권면들을 실천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반드시 성도 - 혹은 ‘믿음 있음’ - 인가? 반대로, 성도라고 해서 반드시 온갖 것들을 제대로 실천해 나가던가?”

위와 같은 안목 - ‘복음 안에서의 의혹’ - 이 궁극적으로 도달되는 곳은, 현상에 대한 구구절절한 비판 - 혹여, 방종하지 말라는 식으로 경각심을 일깨우려는 글을 가지고 비판을 위한 비판을 일삼는 것도 포함됨 - 의 자리가 아니라, 과연 ‘성도’라 함은 본질적으로 과연 은혜로써만 구원되는구나 라는 원론적인 진리를 늘 재발견하고 그로 인해 다시금 끊임없이 감격, 감사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무를 강조하고 방종에 대하여 단속코자하는 이유는, 복음 안에서의 자유를 수호하고자는 충정에서가 아니라, ‘속이 허해서’ 빚어지는 현상일 따름입니다. 이러한 경각심은, 근본적으로 성도는 ‘은혜’로만 만족하고 복음 안에서 자유를 향유하는 존재라는 말을 하기 이전에, 성도라는 인간 실존의 근본이 처음에 이 아담의 진흙탕 속에서 어떤 ‘질’을 타고 난 존재인지 깊은 숙고함이 부족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울러, ‘십자가의 복음이 인간을 죄인이라 규정하고 오직 은혜만으로 구원시키는 것이다’라는 장엄한 명제에 대한 이해가 피상적인 수준에 그쳤기 때문이며, 십자가의 복음을 두고서 ‘아는 것’의 성질로만 취급함과 더불어, 복음과 관련하여 ‘앎’이라는 영역 이외에 별도로 존재하는 ‘실제’- ‘실천’이라는 말이 더 솔직한 표현일 것입니다 - 라는 영역 - 그 속에 각종 책무와 실천들이 내포되어 있음 - 을 따로 장만해 두려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을 대할 때마다 저는 성도로 하여금 그(녀)의 삶의 실제와 관련하여 ‘방종’이 아닌 ‘자유’를 실감하도록 하기 위해, 이근호 목사님의 신학적인 글들이나 질문답변 글들보다는 오히려 일주일 단위로 올라오는 ‘설교문’들을 읽어보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저는 습관적으로, 이근호 목사님의 설교를 듣기 보다는 주로 설교문을 ‘읽습니다’. ‘읽으면서’ 얻게 되는 것이 제 개인적으로는 더 많기 때문입니다. 설교문에 줄을 긋습니다.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들을 메모해 둡니다. 물론, 저와는 달리, 들으시면서 은혜 받으시는 분들에게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습관을 강요하려는 의도는 결코 없습니다. 그러나, 음성 파일을 틀어놓을 경우 다른 생각들이 끼어들어나 다른 일들이 종종 끼어들곤 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과 함께 듣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주로 설교문을 읽는 편입니다.
어쨌든, 이근호 목사님의 설교문은 복음을 변증하는 신학적인 글들에 비해 십자가의 복음을 보다 현장감, 현실감 있는 실제로서 접근하는데 상대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사료됩니다.)

한편, 앞서 드린 말씀 중에서 성도라는 실존이 어떤 ‘질’을 띠는지에 관해 좀 더 언급하고자 합니다.
인간은 - 성도라는 존재도 예외가 아닌데 - 기본적으로 ‘진화론적 존재’입니다. 굳이 진화론적 아이디어가 담긴 용어를 끌어온 이유는, 진화론을 옹호해서가 아니라, 진화론적 인간상이라는, 이른 바 자체적으로 분명한 모순을 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쉽사리 자각하지 못하는 인간상이야말로 이 글의 논지 전개에 따른 성도의 질을 표현하는데 적절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지점부터 제가 사용하는 ‘진화론적 존재로서의 인간’라는 표현은 ‘자체적인 모순을 담지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쉽사리 자각하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의미로, ‘진화론적 인간의 질을 띤 성도’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뜻을 자각하고 그 지향하는 바를 추구한다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삶의 온갖 불완전한 실제들을 유발하는 존재’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진화론의 기본적 아이디어를 생활 주변의 사례와 관련지어 쉽게 비유한 데 따르면, 마치 “시발 자동차→피아트→르망→소나타”라는 단계적 상승 곡선의 흐름으로 발전, 진보되어 온 것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김학현(2005). 다윈이 들려주는 진화론 이야기. 서울 : 자음과모음. pp.71-74.)
(생물학적 진화론의 기본아이디어가 인문사회 전반 분야로 파급된 복잡다단한 이야기는 여기서 생략합니다.)
어쨌든 이러한 상승 곡선으로 그려지는 발전적 흐름을 기본 입장으로 삼는 진화론 내지는 발전론은 진화의 주축으로 내세워진 개체들의 집단인 ‘개체군’ 자체의 변화에만 초점을 맞추었지, 그  단위의 진화과정에서 소모되는 닫힌 체계에 대한 파장 - 오염과 무질서의 증가 - 은 전혀 무시하고 있습니다. 즉, 심각한 자체적 모순을 안고 있지요. 그런데 이러한 자체적인 모순을 띤 진화론적 아이디어를 성도라는 실존의 ‘질’과 관련짓는 이유는, 성도라는 실존을 개체 수준 및 교회라는 집단의 수준에서 그 진화론적 인간상으로서의 자체적 모순성을 각각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위 교회의 ‘역사성’에는 인간들 - 제 개인적으로는 아담들 내지는 가인들이라 명명하고 싶습니다 - 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행위(실천) 관련 프로그램들을 탄탄한 구색거리들로서 갖추고 있습니다. 심지어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정도입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계 2: 2-3)

위와 같이 에베소 교회로 대표되는 교회의 책무성 실천 사례는 지상의 모든 교회 간판 달린 곳들의 귀감이 될 정도입니다.

이제부터 잠시 동안 제가 겪었던 실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한 남자가 배고픈 1970~80년대 어느 시골의 작은 교회를 떠맡았습니다. 낙타무릎까진 아니었지만 새벽마다, 깊은 밤도 마다하지 않고 식을 줄 모르는 그의 열정적인 부르짖음은 결국 1990년대 초엽에 들어서야 결실(?)을 맺게 되어 수천 명의 교인들이 운집하는 도농 복합적 대형교회로 성장(?)하는 부흥(?)을 일구어 내게 되었습니다.
지난날 배고팠던 시절, 몇 안 되는 모든 교인들이 이렇다 할 양념도 없는 그의 설교를 중심으로 하여, 볼 것이라고는 성경책 외에는 없이, 점심때에는 모두가 한마음으로 옹기종기 모여앉아 양푼이에 끓여 먹었던 소면국수가 그 당시를 회상하는 이들에게 진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중소도시형 대교회를 일궈놓은 그 남성은 어느새 적절하게 머리가 벗겨지고 그간의 인생 역정, 젊은 날에 대한 고진감래의 상징인듯한 볼록한 배를 지닌 채, 급기야 자기 교회가 속한 교단의 총회장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 후 퇴임을 1년여 남겨 놓고 호적나이가 1년 어리다는 이유를 비롯, 갖가지 크고 작은 잡음들이 섞여 후임 청빙 과정에서 그 교회는 수년 동안 내부적 분란의 진통을 겪고서는 이제, 젊은 피로 수혈된 21세기를 주도해 가는 미래형 교회로 다시금 발돋움해 나가려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 ‘젊은 피’ 목사는 지난날 배고팠던 시절 그의 선배들이 신학적 자존심을 지켜가며 거부했던 바, 물 건너가도 벌써 건너간 로버트 슐러씨의 적극적 사고방식과 조용기씨의 축복론까지 끌어들여 강단을 점유하고 있습니다.
수년 전, 제임스왕 성경에 미친 어떤 사람이 “완벽한 교회는 없는가?”라는 자기 책에서 자기 논리대로 외쳤건만 이 한국 땅에, 이 지구 곳곳에 그간 완벽하지는 않지만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실행하고자’ 애쓴다고 자부해온 많은 교회들이 있어 왔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방금 언급한 어느 시골 교회의 변화과정을 몸소 지켜봐옴과 동시에, 교리를 달리하고, 신학을 달리하고, 교회제도를 달리하는 - 제도가 다르다는 것은 수많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그 제도에 몸담고 있는 개체로서의 교인이 지니는 책무도 눈에 보이는 현실에 따라 사뭇 차이가 날 수 있다는 점을 포함함 - 여러 교회들을 제법(!) 경험해 봤습니다. 그들이 내놓은 책자를 통해서, 또 그들의 일시적 집회들과 그들의 일상적 교회 생활에 참여해 봄으로써 말입니다.
경상도 어르신들의 의미심장한 경구들 가운데 하나가 “통시 - ‘화장실’을 뜻하는 경상도 남부 사투리 - 다른데 없더래이”인데요. 이 경구는 참으로, 얼마 되지 않는 나이에 위와 같은 경험들을 거쳐 본 제가 깨닫게 된 결론의 정곡을 찌르는 표현이었습니다. 지난날의 모든 경험을 뒤로 한 채, 다시금 저를 맞이해 준 것이 고향의 품과도 같았던, 앞서 언급한 그 시골 교회였고, 또 활기는 없고 명맥만 남았지만 그나마 가장 중도적이고, 건전하며 성경에 근접했다는 칼빈주의 신학과 교리였지요.
제가 살고 있는 고장의 시내를 가로 지르는 큰 개천이 하나 있는데 간혹 그 곁을 지날 때면 고여 있거나 잔잔히 흘러가는 시냇물을 막대기로 휘저으며 장난을 치는 몇몇 아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 건드리지 않을 때 그저 자기 갈 길을 따라 맑게 흘러가는 듯 보이던 그 물은 막대기를 쑤셔넣어 휘젓자마자 어느새 바닥에 쌓여있던 시궁창의 그것과도 같은 찌꺼기가 솟아오르며 순식간에 더러운 물로 변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수년전 어느 기독교계 엘리트 여성이 비어 있는 총리 자리를 두고서 국회 청문회 조사과정을 거치며 은닉해 두었던 부동산과 자녀 병역회피 의혹 등으로 망신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차라리 흘러가게 놔두지...왜 막대기로 쑤시고 그래...”라며 혼잣말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비슷한 현상이 수년전 제가 다니는 그 시골 교회가 속한 교단에서 재단 운영 비리 문제로 인해 똑같이 일어나더군요.
타교단으로부터 지난날 율법주의적이라는 이야기까지 들을 정도로 가장 보수적이라고 이름난 교단도 막대기로 쑤셔서 휘저어 보니 별수 없던 것입니다. 가장 성경적이며(?) 건전하고, 합리적이고, 이상적이며 민주적인 제도를 고안하여 제네바 등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살상하고 추방하는 살벌한 - 완곡하게 표현해서 ‘엄격한’ - 실험과정을 거쳐 수백 년 동안  시행해 봤지만, 개혁은 웃기는 소리고, ‘“통시 다른 데 없더래이”라는 시골 어른들의 일상적인 경구가 역시 맞구나’라고 다시금 탄식하게 만들어준 이유는, 그 개혁주의자들의 아이디어나 제도 자체에 중대한 결함이 있어 보여서가 아니라, 그 세련되고 정교화된 제도의 구성원이 다름 아닌 ‘진화론적 인간상의 질을 띤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적 아이디어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즉, (방금 언급한 바와 같이) 책무 규정, 제도 등과 관련하여 최적의 아이디어를 고안해 낼 수는 있지만 정작 참여하는 인간 자체에 결함이 있음을 간과한다는 원초적인 모순을 안고 있다 라고 말이지요.

‘진화론적 인간상’이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앞서 진화론의 기본 아이디어를 언급했는데, 그것을 이 글의 논지의 주된 요소 중의 하나인 ‘성도’라는 실존과 관련지어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성도는 개혁을 정당하게(?) 꿈꾸고,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의 책무를 사도들의 권면에 부응하는 입장에서 실천해나가며, 복음적으로 건전한 교회를 일구어내고자 한다는 점에서 성경적이라고 판단되지만, 그 와중에 주님께서 말씀하신 한마디,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4)” 앞에서 그 모든 것들이 성도 자신이 영위해 오던 신앙 생활의 실제가 아니라 거품이요 허상일 뿐이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에베소교회는 칭찬과 꾸중이 함께 주어졌다고 봅니다만, 실상은 그게 아니라 그 꾸중 한 마디로 인해 앞서 언급된 칭찬(?)으로 여겨지던 모든 것들이 일순간에 무색해 진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제가 이 글에서 사용하는 ‘진화론적 인간상의 질을 띤 성도’라는 실존이 근본적으로 안고 있는 자기모순적 현상인 셈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성도가 낙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비유컨대, 성도는 마치 가공될 때부터 치명적인 버그(결함)을 안고 있던 퍼스널 컴퓨터와도 같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 컴퓨터가 자체적으로 결함을 지니고 있어도 자신의 브랜드를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브랜드는 최고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개체로서의 자신은 결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행실이라는 불완전한 실제와 그리스도인이라는 온전한 신분이라는 언뜻 어울리지 않는 관계가 그리스도 안, 곧 ‘십자가’라는 자유의 영역 안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는 신비성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 개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책무를 실천하고 나아가 합심 단결하여 성경에 언급된 바,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각종 권면들을 구현시켜 나가기만 하면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책무를 개별, 집단 수준에서 성취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것은 유태교의 실천의식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저 답습하는데 불과합니다.
십자가 안의 자유와 생명의 성령으로부터 흘러나온 사도의 권면들은 인간들의 실천의식과 만남으로써 어느새 ‘의문(율법조항)’으로 작용하게 되는 경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권면들 그 자체에 문제성이 있는 게 아니라, 인간들의 의식에 결함이 있다는 앞서 언급한 내용을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한편, 십자가의 복음을 접했다는 사람들에게서 ‘방종’을 발견할 수 있다는 언급은 다음 세 가지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첫째, 그러한 ‘방종을 발견한 자’로서는 발견자 자신의 의식을 기준으로 믿음 있음, 없음을 판별해내고자 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둘째, 그 발견자의 눈에 비쳐진 바, ‘방종’을 일삼는 그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아닐 가능성이 있습니다(앞서 언급한 고전 5:11 및 유사 구절들 참조).
셋째, 여지껏 이 글이 중요하게 다루어 온 논지에 따르면, 애초부터 ‘방종’과 ‘성도의 자유’에 대한 무지와 오해 때문에 비롯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 진자 이유인지, 아니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인지 우리는 단정 짓기가 까다롭습니다. 아예 감별하려는 우리 내면의 시도부터가 교만이고, 부질없는 짓일 수도 있지요.

앞서 언급했던바, 성도의 ‘질’을 거론하면서 차용한 ‘진화론적 인간상’이란, 발전 일로를 치닫는 듯 보이면서도 내부적으로는 결함과 근원적인 모순을 안고 있는 인간상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인간상의 아이디어를 성도와 연관시켜 이해해 볼 수 있다고 한 것이 저의 논지의 일부였습니다.
성도는 권면으로서 주어진 각종 규범들에 대하여, 개인적 수준, 또는 교회적(집단적) 수준에서 나름대로 책무를 다함으로써 계 2:2-3(의 칭찬)에 근접해 가는 듯 보이지만, 근원적으로는 오히려 복음에서 멀어지는 모순을 안고 있을 가능성(계 2:4의 꾸중과 경고)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가 감히 “어디까지나 나는 빌라델비아 교인이고, 우리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다”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요?

(혹은 “나는 어디까지나 빌라델비아 교인이 되고 싶은 것이고, 우리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와도 같은 위상을 추구해 가고 싶을 따름인데 왜 불만이야!”라고 반발한다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그렇게 되고 싶다”라는 말 자체가 주님께서 부르신 그 부르심에 불만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수년 간 이곳 십자가마을과 더불어 개혁노회에 속한 여러 교회들을 둘러봐왔지만, 한 번도 위와 같은 단정어린 말투를 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분은 어디까지나 ‘회개’라는 것은 에베소 교회의 회개 제목과 같은 사안이 발생할 때에만 국한된 것일 뿐이라는 입장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중에 그 어느 누구도 ‘늘 에베소 교회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늘 빌라델비아 교회적이라고 말할 수도 없음’을 압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본 입장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은혜 아래에서 자유하는 인간’이라면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말인데, ‘감사’라는 것은 자기가 잘 나고 떳떳함이 있다면, 굳이 상대적으로 표현하자면 회개할 것보다 회개하지 않음이 더 많다고 느껴진다면 나올 리가 없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적 자유’를 누림보다 ‘실제적으로 눈에 보이는 방종을 일삼아선 안됨’에 마음이 더 이끌리시거든 차라리 앞서 언급한 ‘교회의 역사성’의 그늘 아래로 들어가셔서 온갖 ‘방종 금지 프로그램들’이 마련되어 있는 기성교회 속에 파묻혀 맘 편히 그 속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기는 게 가장 손쉽고, 잡다한 고민들을 일소시킬 수 있는 최적의 선택입니다.
그 기성 교회들에는 진정한(?) 헌신을 목적으로 한 헌금, 예배, 봉사, 선교, 구제, 좋은 부모되기 훈련과정, 요즘 각광받는 어린이 영어예배, 전투경찰대 위문 등을 통한 지역 사회 섬기기 코스, 경로대학, 제자 훈련, 청지기 훈련, 성전 건축 또는 리모델링, 보다 큰 비전성취를 위한 각종 투자창구 등 온갖 구색거리들이 갖춰져 있으니까요. 그러한 다양한 흐름 속에 자신을 내맡기고 투자한 만큼 봉사와 헌신의 희열을 만끽할 수 있으니까요.
굳이 십자가가 올려다 보이는 개혁노회 주변에서 얼쩡거리다가 인생 허비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처음에는 낮은데서 봉사하기 시작했다가 ‘시간의 흐름’ - 아담세계의 기본적인 원리로서 인간은 그 시간 의식 속에서 자기 노동에 가치를 부여한다 - 속에서 보다 큰 책무, 이른 바 갈수록 중직자로서의 경험과 경륜 쌓기 차원에서 보다 큰 봉사 실적도 쌓아 올림으로써 - 예컨대, 장로가 되기 위해서 1인당 1000여 만원씩 기부해서 10명의 신참 장로들이 1억 2천여 만원짜리 파이프 오르간을 봉헌한다든가 - 그럴 능력 안 될 정도로 사업 안 되면 장로 후보로 나서지 말 것을 10대들도 듣는 마당에 오전 예배 설교 후 광고 시간을 통해 버젓이 알린다든가 -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기 희생(?)의 더 큰 희열을 맛보아 나가게 될테니까요. 교회 리모델링에 기본 500만원 작정 헌금해야만 안수집사, 권사될 수 있다는 말을 두고서, 권사, 안수집사 되었으니 500만원 작정헌금 하세요 라고 바꾸어 말할 줄 아는 ‘센스’가 마치 실정법의 강제성 그 이상으로 작용하는 그런 곳에서 말입니다. 이런 사례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기성 교회의 치부를 드러낸다고 나무라진 마십시오. 현실을 알아야 제대로 된(?) 봉사의 개념이 정립되지 않겠습니까. 자기 자리 모르고 파고드는 것은 주님의 뜻에서 멀어지는 어리석음이 아니겠습니까. 주님도 좋고 나도 보람을 느끼는 그런 헌신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저는 지금 반어법으로써 현실에 대하여 응수하고 있답니다).

문제는, 이런 교회도 처음에는, 그리고 지금도 겉으로는, 그런 더러운 울타리 속에 가두어진 교인들에게 성경을 펼치면 눈에 띄는 각양 그리스도인들의 순수한(?) 책무 이행을 강조하니까요. 그들이 실행하는 더러운 제도들의 울타리와 개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순수한(?) 책무이행에의 촉구가 어색한 결합을 이루어내지 않으면 이 이상한 교회들은 즉시로 그 존재의 기반을 잃어버리기 때문이지요.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는 주님의 말씀과 더불어, 저의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에이, 그대가 말한 그런 사례는 예로부터 비일비재했고, 이 지상에 분명히 존재하는 성경적이고도 건전한 교회들이 있음에 대하여 그저 정로에서 벗어난 일부 사례일 뿐이야...”라면서 여전히 그리스도인의 순수한 책무를 강조하고 실천해내는 제대로 된(?) 교회들을 찾아 헤매겠지만, 그러한 방랑이야말로 방종의 일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교도소를 보면 교도소 밖의 인간들이 잠재적인 범죄자들이요, 병원에 가보면 병원 밖의 인간들이 잠재적인 환자들이요, 장례식장에 가보면 장례식장 밖의 인간들이 잠재적인 송장들이라는 것을 일시적, 간접적이지만, 새삼 절감하게 됩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순수한 분위기, 성경적인 동기, 소박한 일상의 모습으로 점철된 작은 교회들도 시작은 그러하였지만, 잠재적인 ‘도둑들의 소굴’ 내지는 ‘인간들의 종교 놀이마당’일 가능성을 늘 안고 있다는 말을 하고자 함입니다.

(그러면 개혁노회에 속한 교회에 정작 너의 몸뚱이를 출석시키지 않는 너 - 이 글을 쓴 이 - 는 뭐하는 놈이냐고 물으신다면, 사보나롤라 - 자기 나름대로 소신을 갖고 자기 주변을 개혁한답시고 자기가 속한 교파를 박차고 나오지 않다가 결국은 그 속에서 화형당한 - 의 후예를 사칭 - 이 ‘사칭’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제 개인적으로는 어디까지나 복음에 관심 있지, 개혁에 관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 하는 놈이라 보시면 됩니다. 또는, 이근호가 키운 개혁노회 아닌 다른 우리 - 기성 교회 - 속의 호랑이(?) - 마땅한 표현이 없어서... - 새끼로 보시면 됩니다.)

우리는 사도들의 권면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책무의 당위성을 논하는 순진무구한 짓을 일삼고 있지만(!), 우리 속에는 꿈틀거리는 ‘진화론적 인간상 - 건전함, 변화, 개혁, 실천, 완성, 조화, 발전, 향상을 도모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하고 자체적인 퇴보와 주변에 대한 폐해만 일삼는 아담적 인간상 - 의 질을 띤 근성’은 우리로 하여금 결코 현실적으로 개인 수준 또는 교회 수준에서의 그러한 이상적이고도, 성경적이며, 복음적인 책무를 다하지 못하게 합니다. 저의 이러한 논지가 틀렸다면, 인간은 온전한 존재라서 ‘은혜’가 비집고 들어올 틈새가 처음부터 없었을 뿐더러,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러 오실 필요조차 없었겠지요.

십자가의 복음을 알게 된 이후로 방종을 일삼는 모습들을 많이 봐왔다고 말씀하시는 분께 정중히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만약 개혁노회 소속교인이시라면 그 입 조용히 다무시고 기성 교회로 옮겨가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만약 기성 교인이시라면 이곳에서 더 이상 이러쿵 저러쿵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거기서(소속된 기성 교회에서) 열심히 ‘방종하지 않으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개혁 노회에 소속된 교회 성도분들이시면서 헌금, 출석 등에 인색하셨던 분들이 계신다면 마음 고쳐 드시고 앞으로는 열심히 헌금, 출석하실 것을 아울러 당부 드립니다. 즉, 여기서(개혁 노회 교회들에서) 마음껏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방금 한 저의 사뭇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은, 마치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 나오는바, “유태인 수용소 건물 한 동의 기초가 부실하다”며 반 이상 올라간 그 건물의 기초부터 다시 지어야 한다고 호소하는 여성 건축 감독을 그 자리에서 쏴죽이고 나서, 그 죽은 여인의 말대로 기초부터 다시 쌓으라고 지시하는 수용소장 ‘괴트’의 발언처럼 들릴 것입니다. 왜 제가 이런 의아스런 방식으로 말씀 드렸는지 음미해보시기 바랍니다.
종교인들이 온갖 구색 갖춰놓고 교회 행세하는 것이랑, 성도들이 교회에서 헌금, 예배, 구제, 봉사하는 것이랑 본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온갖 권면들을 실천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반드시 성도 - 혹은 ‘믿음 있음’ - 인가? 반대로, 성도라고 해서 반드시 온갖 것들을 제대로 실천해 나가던가?” 라는 논지와 같습니다.

앞서, 그 어느 누구도 자신더러 감히 빌라델비아 교회만 되고, 에베소 교회 아니라고 말 못한다고 말해 놓고서, 지금에 와서는 정작 개혁노회는 빌라델비아 교회인 것처럼 옹호하면서, 기성교회를 형편없이(에베소 교회처럼) 치부하는 저의 발언이 모순적이라고 나무라실 것입니다. 맞습니다. 저는 이른바 ‘성도’라는 ‘진화론적 인간상’이 어른어리는 모순적 존재인가 봅니다. 내뱉는 소리의 한쪽 귀퉁이마저도 ‘모순적일 수밖에 없는 것 같아 더욱 그렇게 느껴집니다. 저 또한, 성경적인 것 - 사도들의 권면들이 지시하는 바 - 을 추구하지만, 온전히 행하지는 못하여 또 다른 성경적인 것 - 절대적 십자가 은혜 - 만을 사모하는 모순적인 인간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