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말라기16강-헛된 섬김(말3;13-15)이근호140907

아빠와 함께 2014. 9. 7. 19:59
헛됨 섬김(말라기 3: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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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9-07 16:31 
헛된 섬김

2014년 9월 7일                            본문 말씀: 말라기 3:13-15

(3:13)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3:14)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3:15)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니라

그 당시 사람들이나 요즈음 사람들이나 눈에 보이는 것은 어디까지 인간 자체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거론해도 눈에 띄는 인간들을 상대로 끼리끼리 어떤 결과를 도출해내려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역사가 되고 그 결과는 문명이 됩니다. 사람들은 성과를 바라보면서 즐거워합니다.

과정은 중요하지 않게 여깁니다. 결과가 깔끔하다면 어떤 의도나 어떤 마음가짐도 결국은 문제 삼지 않게 됩니다. 얻고자 하는 바를 얻었다고 자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이런 태도를 ‘주님에 대한 대적’ 혹은 ‘완악함’이라고 보는 겁니다. 말라기 계시가 주어지는 취지는 바로 이런 ‘대적’과 ‘완악함’을 유발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성질들은 하나님 쪽에서 주어진 말씀이 유포되는 그 현장이 선행해서 마련되어야 합니다. 즉 말씀이 먼저 주어졌기에 위반이 발생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얻어진 위반은 장차 신약의 복음을 위한 필수적 요소가 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구약에서는 개인적인 추궁과 닦달하심이 여전합니다.하지만 신약에 오게 되면, 새삼스럽게 개인을 놓고 잘 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일괄적으로 따지게 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식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공히 누구에게나 그 적용된 원칙이 예수님의 등장으로 본격화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대적’, 혹은 ‘완악’, 혹은 ‘헛된 섬김’ 같은 것은 신약의 십자가 복음 구성에 필수적으로 관여합니다.

이는 모든 인간들이 다 십자가 복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나타냅니다.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원칙이 다같이 적용되는 환경은 인간적으로 붙들 수 있는 환경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유지하는 환경은 곧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변화되고 변동되는 역사가 아니라  시간이 흘러고 동일한 원칙이 안에서 작동되는 것은 곧 사건입니다.

이로서 우리는 신약 뿐만 아니라 모든 구약의 말씀들도 다 사건으로 간주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말씀을 그냥 이해하는 것과 ‘사건으로 이해한다는 것’과는 어떤 차이가 날까요?  사건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개인용도로, 혹은 자기 자신에게만 적용되는 원칙을 뽑아낼 수 없다는 점에서 차이납니다.

즉 ‘나의 역사’라든지 ‘나의 구원’과 같은 것들은 사건 앞에서는 용납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개인은 사건 앞에서 그 빛을 잃어야 합니다. 말씀을 사건으로 대하게 되면 비로소 밝혀지는 사실은, 먼저 일어난 사건의 원칙이 스스로 적용되기 위해 계속 새로운 사건을 발생시킨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말라기 같은 경우에, 백성과 제사장, 그리고 제사장과 하나님 사이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제사장’이라는 존재가 등장될 때, 사람들은 제사장을 자기네와 같은 하나의 인물로 간주해서 권위를 옹호해줄 수도 있고 아니 할 수는 없는 자율성이 자기네들에게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 전체를 볼 때, 제사장은 그 이전의 사건을 반복해서 전수하고 전달되기 위해 등장된 존재들입니다. 그 사건이 바로 출애굽기 3:3에 나오는 떨기나무 사건입니다. “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출애굽기 3:3-6)

이 대목은 인간쪽에서 유발할 수 있는 그 어떤 예상된 역사나 문명이나 문화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침입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침입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찾아와서 벌리신 그 사건의 연속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 들이닥치신 하나님께서 남겨진 원칙이 뭘까요?

그것은 바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입니다. 즉 이 원칙을 실현하려면 계속적으로 하나님께서 실제로 인간 세계에 침투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말라기 게시를 듣는 제사장들이나 백성들은 단순히 하나님의 교훈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지를 밝혀줄 ‘대적’ 혹은 ‘완악’의 개념을 유발할 필요성이 연속적인 사건에 의해서 나와야 함을 믿어야 하는 겁니다.

떨기나무 사건을 통해서 모세는 신발을 벗어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예배와 섬김은 딴 게 아니라 우리 삶의 현장에서 늘 ‘신발을 벗어야 하는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자체가 이미 사건에 의해서 운용되는 대 현실 체제 속에 놓여 있음을 자인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사건이 운행하면서 도출되는 것은 바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입니다. 즉 비록 ‘대적’, 혹은 ‘완악’을 언급하더라도 도리어 그 언급이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를 받쳐주는 필요내용이 됨을 믿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오늘 본문에서 ‘헛된 섬김’이라는 지적을 보고, “나는 이 말라기의 지적을 감안해서 이제부터 하나님을 제대로 섬겨야지”라고 나온다면 이미 그 사람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를 살리는 사건의 취지를 모르고 있는 자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로마서 9:15-18에 나옵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즉 말씀 지키기를 원하는 자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긍휼이라는 원칙으로 구원되는 겁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가 의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구원 사건에 이미 휘말려 있음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4-09-12 06:35 
16강-말라기 3장 13절-15절 (헛된 섬김) 14090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말라기 3장 13절에서 15절입니다. 구약성경 1330페이지입니다.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니라”

지금 무슨 이야기 하느냐 하면은요, 눈에 보이는 제사장과 상대하게 되면 같은 인간과 상대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제사장이라는 것이 어디서 나왔느냐, 그것을 사람들이 놓쳐버려요. 제가 중국에서 강의하고 난 뒤에, 낮에 다 끝나고 난 뒤에 식사를 하고 있는데 장로님이 목사님에 대해서 불만을 가져요, 저한테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중국의 목사한테 불만을 가지면서 왜 자꾸 권위를 내세우느냐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이건 장로님들의 상투적인 불만입니다.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장로도 좀 목사와 같은 레벨로 쳐달라는 그런 이야기죠. 목사보다 장로가 낮다는 그 말은 제발 좀 하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그런 말씀을 하신 장로님께서 집사나 장로나 같은 레벨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장로님 못 봤습니다. 항상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바라보게 되기 때문에. 그럴 때, 그래서 제가 무슨 답변을 하려고 했는데 마침 앞에 계신 분이 이랬습니다. “목사의 권한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이렇게 딱 나왔어요. 딱 그 이야기 듣고 제가 이야기 했어요.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존경은 강요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하나님이 생기게 하는 것이다.” 그게 안 생기기 때문에 본인이 그런 성령을 받은 것이 없기 때문에 억지로 만들다 보니까 목사의 권위가 있는데 성경에는 복음의 권위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권위 앞에서는 목사 본인도 굴복되어야 돼요. 무슨 말이냐 하면, 어떤 집사가, 어떤 평신도가 복음에 대해서 언급할 때는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생각을 항상 잊지 말고 저게 복음이라면 그 복음 앞에서 목사도 거기서 그 권위에 굴복을 해야 되겠죠.

사람에게 굴복한다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 입에서 나왔던, 현장에 있는 복음의 외침에 굴복해야 되는 겁니다. 방금 길게 이야기 한 이걸 가지고 두 자로 줄이면 '사건'입니다. '사건'에 굴복하는 거예요. 사건에. 지금 오늘 본문에 있는 사람들이 눈에 제사장이 보이니까 “니들은 뭐가 잘났느냐” 하는 식으로. “니들이 똑바로 했으면 우리나라가, 이스라엘이 이렇게 먹혔겠는가.” 하고 제사장보고 자꾸 닦달 내는데요, 이거는 광야에서 모세가 눈에 보인다고 모세한테 닦달 내는 것과 똑같은 사고방식이에요. “니나 내나 똑같은 인간인데 뭐가 중요하냐.” 맞습니다. 그 말 맞아요. 모세나 제사장이나 똑같은 아담의 자손, 죄인 맞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뭘 놓치고 있느냐 하면, 지금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을 누락시키고 있는 거예요. 주께서 일으킨 그 사건을 누락시키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제사장들에게 대들기를, 제사장에 대해서 분위기 자체가 “하나님은 소용없다. 하나님이 만약에 살아 계시면 우리가 이렇게 힘들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대드는데, 제가 여기서 오늘 설교 시작하면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그 제사장이 있다는 것, 레위 언약이 있다는 것, 그 자체는 어느 사건에서 나왔느냐 그걸 지금 언급해 드리는 겁니다. 어느 사건에서 나왔느냐는 거죠. 출애굽기 3장 3절에 보면 사건 하나 나옵니다. 그 사건은 모세가 하나님을 처음 만날 때, 그 때 사건입니다. 산은 산인데 그 산은 호출된 산이 아니고 호렙 산인데, 그 호렙 산에서 떨기나무가 있었습니다. 그 떨기나무가 갑자기 불꽃이 일면서 거기서 소리가 났습니다. 보니까 거기서 하나님께서 그 떨기나무를 통해서 음성을 합니다. 여기서 분명히 제가 하나 다지고 들어갑니다. 다지고 들어가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떨기나무에 불붙은 것은 우리가 착해서 불붙은 것도 아니고 우리가 성실하기 때문에 떨기나무에 불붙은 것이 아닙니다.

사건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행동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사건을 일으킨 거예요. 그러면 그 사건에 담긴 내용이 뭐냐 하면, 갈라디아서에 나와 있듯이 아브라함의 자손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하는 사건입니다. 방금 말을 어렵게 해버렸어요. 아브라함의 자손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그 다음에 사건이라는 거예요.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다. 소방서가 불을 끄면 되잖아요. 그런데 불은 붙었는데 타지 않았다는 거죠. 기존에 알고 있던 불붙음과 관계없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어디까지 연결되느냐 하면,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 그걸로 끝나면 안 돼요. 그 전에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의 자손은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라는 그 사실을 알려주는 사건 하나가 바로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거죠. 우리는 “아이! 뜨거워라!” 이거만 생각하잖아요. 이게 뜨거운 것이 아니고 떨기나무 불붙은 곳에서 나왔던 그 사건 속에서 어떤 이야기가 주저리주저리 나오느냐 하는 겁니다. 그 사건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신발을 벗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뭐냐 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그것이 하나의 문장이 아니고 하나의 명령이 아니라 이게 하나의 사건이잖아요. 사건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수정하거나 뒤따라오는 사람이 계승하거나 하지를 않습니다. 사건은 그냥 밀어붙이는 거예요. 덮쳐지는 거예요. 따라서 사건 앞에서 우리의 태도는 신발을 벗어야 되는 겁니다.

자,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본문 13절에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14절에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이렇게 되어 있단 말이죠. 지금 이렇게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사건 앞에서 신발을 안 벗은 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우리네 인생을 살게 되면 자체가 사건이거든요. 사건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야 되느냐 하면,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가 들려 나와야 돼요.

그런데 사건 앞에 신발을 안 벗게 되면, 순종하거나 섬기지 않게 되면 자기 고집이 있게 되죠. 그 자기 고집이 있게 되면, 나는 고집 있는 내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내가 하나님 앞에 칭찬을 받아서 구원 받을 수 있는가. 이렇게 생각을 하게 돼요. 그러면 오늘 본문 말라기 같은 경우를 딱 보고 하는 말이 “아,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면 그 섬기는 행위로 말미암아 내가 구원을 받겠구나!” 라고 되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이거는 사건이 아니에요. 이게 바로 행함이라는 겁니다.

출애굽기 14장 29절에 보면, 홍해사건 이야기인데, 이거 광주강의 때 했는데, 그 대목을 다시 해보겠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였고 물이 좌우에 벽이 되었더라” 30절에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의 애굽 사람의 시체를 보았더라” 애굽 사람의 시체를 보았더라 했습니다. 사건입니다. 어떤 사건이냐 하면, 홍해라는 것은 사람을 시체로 만드는 그런 바다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시체인데, 그 시체가 누구 시체냐, 이스라엘 시체가 아니고 애굽 사람의 시체였어요.

그러면 홍해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딱 이렇게 정리가 되어야 합니다. 아하! 홍해 사건이 갈라진 것은 애굽 사람들은 시체로 만들고 이스라엘 자기 백성, 어린 양의 피를 바른 그 백성은 무사히 건져내는데, 건져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사건을 일으켰다는 것이 분명히 규정이 되어야 되겠죠. 이 말은 뭐냐 하면, 곧 애굽 사람들이 물에서 빠져 죽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사람이 바다에 들어가면 빠지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이렇게 물어야 됩니다. “주님이여 우리들은 왜 시체가 안 되었습니까?” 이렇게 물어야 돼요. 그것은 시체가 안 된 이유는 주님께서 사건을 전달하라는, 전달의 임무가 있기 때문에,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종이죠.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이 사건을 일으킨 그 내막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그 사건을 품고, 그 사건이 살아있으니까 우리가 살아있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섬김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교회에서 주일 섬겨라, 목사 섬겨라, 뭘 하라, 여호와를 섬겨라 하는데, 섬김은 그 자체가 사건이 되어야지 우리가 의도해서 주님 섬기려면 열한시니까 열시 반부터 와서 찬양 준비를 삼십분 동안 하고 앞에 전도사 인도하니까 노래 부르고 기도는 어떻게 하고 이런 절차, 법령 이런 것을 갖춘다고 이게 섬기는 게 아니에요. 섬기는 것은 신발을 벗어야 되는 거예요. 사건에 휘말려야 되는 겁니다. 그리고 휘말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사건은 뭐냐 하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모르죠. 우리는 모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가 뭔 뜻인지 모르는데 주님께서 사건을 주셨다는 말은 그 다음에 두 번째 사건, 세 번째 사건, 네 번째 사건, 계속 사건, 사건들이 순차적으로 그 원초적인 사건에서 뽑혀 나와서 계속 흘러가게 되면 홍해 사건을 만나게 되고, 아! 홍해 사건에서 애굽 사람들은 죽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살았구나! 그렇다면 이 작업은 누가 했냐?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했다. 그 일방적으로 한 원리원칙은 뭐냐? 오직 아브라함 자손은 믿음으로 의인된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것을 하나님 쪽에서 실천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연이어 사건이 터지는 거죠. 오후 예배이기 때문에 제가 말씀을 길게 하지 않습니다. 핵심만 찍으면 되니까요. 그러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면 여러분들이 그 다음에 궁금한 게 “목사님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섬기고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사건은 어떤 사건입니까? 지금도 뭐 홍해 바다 갈라지고 예수님 십자가 죽고 사흘 만에 살고 뭐 그런 사건은 요즘 왜 안 일어나죠?” 왜 성경에 그렇게 요란스러웠던 사건들은 왜 일어나지 않고 블레셋 쳐들어오고 뭐 그런 거, 우리나라까지 쳐들어오지 않고 왜 그렇죠? 오늘날은 어떤 사건으로써 우리가 사건 앞에 섰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무엇입니까? 이젠 궁금할 거예요.

로마서 9장에 보면 그 대목이 나옵니다. 로마서 9장 16절에 보면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구원을 받는데 원하는 것도 아니요, 달음박질, 열심히 애쓴다고 되지를 않습니다. 라는 것을 제발 문장으로 교훈으로 읽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게 하나의 사건으로 여러분 앞에 배치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 전부가 어떤 사람은 원하는 자도 있고, 교회 안에 그런 사람 많죠. 어떤 사람 달음박질하는 사람 많죠. 그 사람 볼 때, 주께서 일으키신 사건으로 보는 안목이 열리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부탁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어요. “아, 저 사람 열심히 한다.” 아니요, 주께서 그렇게 하시게 하신 거예요. 왜? 그 사람은 그렇게 해서 구원되는 줄 알고.

그게 바로 홍해 바다에서 하나는 시체가 될 수밖에 없는, 또 한쪽은 어린 양 피 발랐다고 그냥 살 수밖에 없는. 그 사건의 맥락을 여전히 인수받은 거예요. 왜 지금은 홍해 사건이 없습니까? 라고 하지 마세요. 지금 있어요. 왜 떨기나무 앞에서 우리가 신발을 안 벗어야 됩니까? 우리가 늘 주체의 신발을 벗어야 될 그 사건 앞에 놓여져 있습니다. 왜 이삭 아들 잡으라고 않습니까? 지금도 아들 잡아야 된다는 그 사태 속에 놓여져 있습니다. 다만 지금의 원리를 아셔야 되죠. 원리가 뭐냐 하면, 원하는 자도 아니다 말입니다. 달음박질하는 것도 아니라 말입니다.

18절에 보면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강퍅케 하신다는 것, 강퍅케 하시는 그런 경우, 그런 사건들을 우리는 아침에 눈만 뜨면 우리 주변에서 나 자신을 통해서 많이 접하게 됩니다. 이건 사건입니다. 말라기라는 것이, 말라기가 구약과 신약의 틈 사이에 있죠. 말라기는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는 겁니다. 그래서 말라기는 개인에 대해서 닦달 냅니다. “똑바로 하란 말이야. 제사장 말 잘 들으란 말이야. 제사장 너희들부터 썩어서 되겠어. 똑바로 하란 말이야.” 계속 잔소리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약에 넘어오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모든 사람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나 개인보고 닦달 안 낸다는 겁니다. 왜? 이미 그런 건 다 해봤기 때문에. 실험을 다 해봤어요. 끝났어요. 개인적으로 달음박질하고 개인적으로 원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그런 시절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물론 옛날 시절도 그게 불가능했었고. 의인은 어떻게 산다고요?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사는 거예요. 행함이 아니고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사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구약 전체를 무엇으로 해석하느냐 하면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쪽으로 해석을 다 해버렸어요. 그리고 성도를 뭐라 하느냐 하면, 아브라함의 아들들. 성도를 가지고 아브라함의 아들들. 그런데 아브라함의 아들들이라고 하면서 뭐라고 토를 달았냐 하면 육적으로 아브라함의 아들들은 아니고 성령 받은 사람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아들들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참, 정말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래요. 정말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이게 왜 어려운가 하면 사건이 없는 상태에서 개인적으로 성령을 받으려고 시도한다면 이거는 어려운 정도가 아니고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이 신약 시대에 개인보고 닦달 내지 않듯이 현재 이 세상 자체를 사건으로 봐버리자 말이죠. 그러면 성령 받은 사람이 출현하는 사건이 있음을 우리한테 이야기 합니다. 그걸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겁니다. 세상 일 돌아가는 것을 하나님이 짜놓은, 하나님이 계획대로 짜놓은, 시나리오대로 진행되고 있는 사건 자체로 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말라기에서 니가 제대로 섬기라 해서 제대로 섬기려고 덤벼들면 로마서 9장에 의해서 그거는 땡! 탈락! 이예요. 왜냐하면 원하는 자로 되는 것도 아니고 달음박질하는 자로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원하겠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내 구원 사건을 내가 따로 만들어내겠다는 노력이거든요.

성경에 거듭나야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거듭나야 된다는 것이 노선이 두 가지라는 뜻인데 거듭나지 않는 사람의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영웅주의에요. 고난을 받았는데 그 고난을 딛고 열심히 일했더니만 하늘의 복을 받아서 나중에 잘 되었더라. 여기에 어떤 다시 태어남은 전혀 여기에 보여주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다시 태어나느냐 하면은 달음박질해서 구원 받으려고 애를 썼는데 그것이 실패로 끝났더라. 그래서 아침에 눈 떠보니까 천국이었더라. 이거 웬일입니까? 이게 주님의 성령에 의해서, 성령이 주시는 사건에 의해서 거듭났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 하는 말이 뭐냐 하면, 다른 사람이 “당신 어떻게 해서 구원 받았지요?” 하면 “내가 한 게 아니에요. 내가 원했던 것도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말씀대로 섬겨서, 섬겼다는 그걸 근거로 구원 받는 거, 그게 내가 원하는 건데, 주께서는 내가 원하는 대로 그걸 허락지 아니하시고 오직 불쌍히 여겨 주시는 그 사건 앞에서 나로 하여금 신발을 벗게 만들었습니다. 매일같이” 나의 주체의 신발을 벗은 거예요.

하루하루 사는 것이 불쌍히 여겨서 사는 거예요. 아침에 생중계 안 되었을 때, 아! 정말 힘들었습니다. 설교는 해야 하고 짜증은 나고. 무엇을 느꼈느냐 하면, 복음 전하는 것은 수 천 수만의 기적이 동원되지 아니하면 복음 전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에, 이거는 동영상이 잘 될 때가 기적으로 본 거예요. 늘 잘 되는 것이 아니고 늘 안 되어야 되는데 잘 되고 있거든요. 이걸 하나의 긍휼로 보자는 거예요. 긍휼, 하나의 일으킨 사건으로 보자는 겁니다. 그러면 내 몸뚱아리 자체가, 모든 덩어리 자체가 긍휼의 덩어리가 되어서 누가 옆에서 툭 쑤시면 주님의 사랑만 이야기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이상하게 나도 예상 못하고 여러분도 예상 못하는, 툭 치면 “주님의 은혜로 되었습니다.” 라는 그런 고백이 나온다는 자체가 주께서 원했던 사건이에요.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반품됩니다.

제가 서울의 가락강의 강의할 때, 식품회사 사무실 빌려서 강의하는데 그 칠판에 보니까 이게 있어요. 재고에 네 가지 재고가 있는데 첫 번째 찌그러진 재고, 두 번째 파손되어서 나온 재고, 세 번째 유통기한이 지나서 초과되어진 재고, 네 번째 반품 재고. 그 중에서 마음에 확 닿는 것이 반품 재고. 반품 재고. 거듭남입니다. 그래 가지고는 상품 가치가 없다는 겁니다. 어떻게 되느냐. 사건이 안 담겼다. 니는 니 잘남이 담겼지 사건이 담기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러면 사건이 담기려면 어떻게 합니까? 세상사람 봐라. 강퍅하기 짝이 없죠. 우리를 포함해서. 세상을 강퍅의 존재로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사건으로 세상을 다시 보는 거예요. 사건은 강퍅에서 요만큼도, 일인치도 빠져나갈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강퍆대회. 강퍆슈스케. 누가누가 강퍅하냐, 그 대회하고 있는 거예요. 세월호 사건도 그렇고 민주당, 새누리당, 전부다 모든 게 누가누가 더 강퍅하냐를 내세우는 이 시대입니다. 누구는 강퍅하지 못해서 벌써 내려가고. 마음도 내려가고. 모든 게임, 야구, 축구 모든 것이 누가 더 강퍅하냐. 누가 자기 능력으로. 이거는 사건이 아니고 내 능력으로 내 행함으로 이만큼 버텼다는 그것 자랑질로 완전히 도배가 되어 있는 이 세상 자체를 주께서 일으킨 사건으로 보자는 거예요. 그게 홍해 사건으로 보자는 겁니다. 따라서 거기서 구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마땅히 시체 되어야겠죠. 하지만 어린 양의 피가 묻은 자는, 죽어야 될 우리가 긍휼을 입어서 산다는 것으로 해석하라고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신약적 해석입니다. 간단합니다. 달음박질하는 자도 아니고, 원하는 자도 아니고, 오직 주님의 긍휼로 된 것이다. 이걸 믿는 자는 믿음으로 의인이 되고 구원 받는데, 그것은 너의 잘남이 아니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연속성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구약에서는 아직 신약에, 말라기 같은 경우는 아직 신약 오기 전이기 때문에 끝까지 말씀대로 하라고 하지만 그것은 절대로 인간의 힘으로 그것을 제대로 섬길 수가 없습니다. 섬길 수 없고 강퍅해질 수밖에 없어요. 신약에 와서는 신약적인 안목을 가지고 이제는 구약도 보고 신약도 볼 수 있는, 그런 주님의 사건 속에서 새롭게 태어난, 중생된, 반품된 재고되지 마시고 그대로 주님 앞에 골인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 잘났는데 나는 왜이리 못났는지 얼마나 자책하고 그 자책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대로 이어졌습니다. 주여,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것이 우리의 일기장이고 우리의 고백이고 우리의 일상이었습니다. 원하는 자로 하지 않고 달음박질하지 않는, 내 중심의 사건이 아니고 주님 중심으로 이미 벌어진 사건을 우리는 긍휼을 입으면서, 긍휼의 혜택을 입는 그런 부류로서 오늘도 주님에 의해서 다루어진다는 사실을 감사하며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