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강-말라기 3장 11절-12절 (복) 140831-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말라기 3장 11절에서 12절입니다. 구약성경 1330페이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오늘 말씀은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멸하지 않게 한다, 이렇게 하셔서, 황충은 메뚜기를 말하거든요. 메뚜기가 왔느냐, 안 왔느냐 하는 그것이 인간이 방제작업을 얼마나 했느냐, 안 했느냐와 상관없이 주께서 금했기 때문에 토지소산이 열매를 맺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곧 뭐냐 하면, 하나님이 여차하면 얼마든지 황충도 모을 수 있고 메뚜기도 모아서 농사 짓는 모든 것을 다 날리도록 할 수 있는 권한도 우리 주님이 갖고 계시다는 뜻이에요.
욥기에서 초반에 보게 되면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욥의 한평생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하나님은 주시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가져가신 분도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욥은 자기의 한평생을 그 말씀을 구체화하는데 내놓아야 되고 제공되어야 될 인생을 욥은 살아 온 겁니다. 우리는 욥을 보고 참 안 됐다, 참 불쌍하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자, 욥이 그렇게 몽땅 다 하나님께 빼앗겼다고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하나님은 욥을 보고 불쌍하다고 하지를 않습니다. 욥을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복 되다' 고 이야기를 합니다. 참, 복이 있다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복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 이게 바로 복된 성도, 참된 성도입니다.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증거 하지 않지만 성도는 예수님을 증거 하는 그러한 모양새가 계속해서 인생 살아가면서 그게 굽이굽이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사람이 예수님을 증거 하게 되면 그 사람을 숫자로 해서 1로 쳐주지를 않습니다. 만약에 성도가 1이 되버리면 성경에 있는 모든 숫자 개념이 거기에 다 깨져 버려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다섯 명이 있더라도 그들의 주가 하나가 된다면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에 종속된 1이 되지 개인적으로, 사적으로 하나가 되지 않아요.
그거는 왜 그러느냐 하면은, 그 사람이 여기 있다, 여기 있네, 저기 있네, 그래서 두 사람이 있네, 네 사람이 있네, 열 사람이 있네, 이렇게 쳐주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은 떼버리고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나타나고 있는 예수님의 흔적을 뽑아내어서 모두 다 동일한, 고 안에서 보편적인 동일한 모습이기 때문에 하나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숫자 개념도 우리가 생각하는 숫자 개념하고 전혀 달라요. 열 두 지파가 있더라도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하나의 원리에서 움직입니다. 그것이 바로 야곱의 원리, 언약 원리라는 것인데, 그래야 이스라엘이 몇 명이든 상관없이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답게 지탱할 수가 있어요.
만약에 개인이 자신의 것을 고집해 버리면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한테 적용되는 원리를 남한테 강요하면서 살아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을 만난다는 자체가 힘든 이유가 나한테 적용하는 원리를 상대방에게 원리를 적용시키면 거기서 자꾸 안 받아주고 튕겨 나오거든요. 자기 부인이 남편한테 잔소리해도 듣는 남편이 참 힘들어요. 힘들지만 잔소리하는 아내도 참 힘들어요. 먹히지를 않는다니까요. 운전할 때, 옆에서 잔소리하면 그 잔소리한 그 반대로 가고 싶은 충동이 그때 일어나요. 천천히 가라고 하면 확 가고 싶어요. 고만 그때부터. 간섭 좀 하지마라. 지금 운전대는 내가 잡았기에 나의 원리를 운전대에 적용시키는데 운전대 잡지도 않은 다른 사람이 운전대 원리를 강요해 버리면 그 다음에 어떻게 하지? 그 다음에 어떻게 하지? 자꾸 물어야 되니까, 운전대는 본인이 잡으면서 괴리가 생기게 되잖아요. 그래서 힘들게 되는 거예요. 이제 운전할 때 그렇게 하세요. “오늘 운전대는 당신이 잡으세요. 니 맘대로 하세요.” 그렇게 해야 집에 가는데 안심하고 집에 올 수가 있습니다. 좀 멀면 토하고 하겠지만 그런 것은 참아야 하고. 울컹울컹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복이라는 말을 할 때는, 복을 뺏어갈 수 있는, 다시 복을 회수해 갈 수 있는 권한자가 나라는 겁니다. 그래서 한 번 복 받았다고 계속 복 쥐고 이거 내 복이라고, 니 복이라고 이전할 수 없어요. 전환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라는 자리가 뭐냐 하면, 한 번 뭔가 사건이 지나가게 되면 그게 곧장 저주의 자리로 바뀌어요. 그것은 인류의 역사라는 이 모든 것이 사람이 복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복만 받았지 누가 줬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누가 줬는지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복 줘놓고 이게 뜯어가 버려요. 스티커 뜯듯이. 뜯어가 버리면 밑에 본드만 나오듯이. 줘놓고 뜯어가므로 말미암아 그들은, 이스라엘은 복을 받기는 받았는데, 예전엔 받았는데 뭔가 뜯겨 나갔던 그 자리만 남죠. 그 아픈 자리에, 그러니까 여자분 들이 다리에 털 났다고 여름 되면 해수욕장에 가려고 털 관리하는데 파스를 붙여놓고 으으윽으으악!! 한 번에 확 떼야 하거든요. 한 번에 확 으드득 떼면 털이 붙어 있잖아요. 고 떼인 허연 그 자리에, 그 자리가 주께서 마련하고자 하는 그 자리에요. 그게 복의 자리에요. 복의 자리입니다.
처음에 복 왔을 때, “나 주님한테 이런 거 받았다!” 이게 복의 전부인 줄 알았죠. “어어??뜯기네? 이런 복을 받았는데 뜯겼어!” 그 다음에 니가 무슨 복을 받았어요? 하는 답변이 아니고 “나는 뜯겼어.” “누가 뜯었어?” “주님이 뜯었어.” 주님이 뜯었어, 라는 주님 주체로 등장할 때 이게 제대로 복 받은 사람이에요. 이것 받았다, 저것 받았다는 것은 그걸 복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박국에서는 무화과나무에 소출이 없다 할지라도, 요새 말로 하면 대추나무에 풍작 됐는데 값이 대폭 하락된다 할지라도 나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리라. 이래 되는 겁니다. 여기 오늘 만군의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할 때 우리가 이 대목을 보면서 방금 설교를 들었기 때문에 이 원리를 적용시켜 봅시다.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멸하지 않게 한다 하면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돼요. 그들이 고생했습니까? 묻지 말고 어떤 원리에 대해서 황충을 금했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해야 하죠. “주님이여, 내가 말한 원리 말고 주님이 알고 있는 원리를 적용시킬 때 어떤 원리를 적용시켰기에 황충이 와도 괜찮은데 왜, 메뚜기가 오지 않도록 막았습니까? 어떤 원리에서 막았습니까?” 이렇게 질문이 돼야 된다는 거예요. 이렇게 질문이. 그래서 우리의 자리라고 하는 것은 항상 소지할 수 없는 말씀에 의해서 적용되는 그 자리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제가 어떤 원리에 의해서 된다는 그 원리를 설명하면서 약간만 어렵게 설명할 테니까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씨 뿌리는 비유가 나와요. 씨 뿌리는 비유가 네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길 가에 떨어진 씨, 하나는 돌짝밭에 떨어진 씨, 또 하나는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 또 하나는 옥토에 떨어진 씨. 이 네 가지가 되어 있거든요.뭐, 첫 번째는 길 가에 떨어졌으니까 주워 먹었고, 두 번째는 싹이 나다가 밑에 숨어있는 바위가 있어서 결실을 못 맺고 세 번째는 결실을 맺어서 좋다 했는데 갑자기 가시덤불이 와서 덮쳐서 결실을 못 맺고 시들어버리고. 네 번째는 그야말로 가시덤불도 없다. 바위도 없다. 그리고 마귀도 없다. 그냥 씨 뿌린 대로 드러냈을 때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었다. 라고 이야기하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이야기했어요. 제자들이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설명을 하면서 지금 어려운 이야기를 하겠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왜 못 알아들었냐 하면요, 못 알아들을 수밖에 없어요. 그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이 백이면 백 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는요? 어느 땅에 속하는데요?” 벌써 출발 자체가 가 네 가지의 밭 가운데 저는 어느 땅에 속합니까? 하기 때문에 주의 말씀을 못 알아듣는 겁니다.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여러분들은 신앙인이기 때문에 화투를 이미 끊었습니다. 화투를 거의 안 치지요. 근데 화투 칠 때 보면, 007영화에 카지노에서 포커 하는 장면을 보면 석 장 주면 그 다음에 석 장을 또 주는데 밑에 거 빼고 처음에 있는 거 남기고 바꿔치기 하거든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내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뭔가 하나님이 주시면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빼버려야 돼요. 밑장빼기거든요. 타짜들 알아요. 밑장빼기. 몰래 자기가 감추어 놓은 화투장 옆에 놓고 10월 단풍이 두 장 들어오면 장땡이라고 하는데 그게 쵝옵니다. 광땡이 있지만. 위에 9자 들어와 있는 거 그것 빼고 밑장 들어가는 겁니다. 몰래. 마술사가 딱 집어넣거든요. 밑장을 빼는 겁니다. 밑장은 빼고 윗장은 있고. 또 주면 밑장은 빼고. 남는 것은 뭐냐, 경계선만 남아요. 경계선. 경계선만 남는다고.
그 다음에 경계선에 무슨 그림을 그릴까? 하는 것은 우리 소관이 아니다 이 말이에요. 마치 우리가 투명한 유리와 같아서 유리에다가 색칠을 하게 되면 색칠은 남고 유리 자체는 아무 색깔이 없고 그냥 투명하기만 하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바로 그런 식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자, 네 가지의 밭이 있다고 한다면 정답은 그거예요. 우리가 어느 밭에 속합니까? 한다면 우리는 네 가지 다 밭을 보여 줄 투명한 거울 같은 그러한 인생을 살게 될 때, 우리는 천국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 가지고 아주 쉽게 말씀 드리면, 황충을 하나님이 오지 않게 하셨기 때문에 농사가 잘 되었다, 라는 사실의 원리를 투명하게 보여 줄 때 그 사람은 바로 하나님에 의해 쓰임 받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겁니다. 아! 요새 그리스도의 종 참 찾기 드물어요. 해운대 모래에서 바늘 찾기에요. 모래에서 바늘 찾기 참 힘든데.
투명한 것 중에서 주님이 주신 일만 보여주면 되는데, 꼭 자기가 하는 일을 집어넣어요. 자기가 한 일을 집어넣으니까, 이게 사람 대 사람의 소통이라는 것이, 대화가 주님은 당신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그걸 듣고 싶은데 내가 이렇게 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자꾸 그런 것만 나오니까 짜증나요. 참 짜증납니다. 중국에서 강의를 하니까 반응 중에서 어떤 반응이 있느냐 하면, 제 강의에 대해서 듣고는 자기 것을 따로 지키려고, 사수하려고 애를 쓰는 그런 모습을 보일 때, 나는 더욱더 쑤셔, 그걸 깨려고 더 지독하게 째려고 시도하다 보니까 나중에 마지막 시간은 기진맥진 되고 말았어요. 얼마나 힘든지. 목사의 권위가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참, 기가 찼어요. 그래 이랬습니다. 존경받는 것은 존경을 강요하는 것과 존경을 요구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인 것을 안다면 나는 그냥 투명한 유리판으로 되잖아요. 주면 주는 대로 하고 가져가면 가져가는 대로 하면 되거든요. 대추가 풍년 되었는데 값은 폭락하는 대로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팔면 되지. 그것가지고 하나님한테 닦달하게 되면, 따로 자기가 지킬 것을 가지고 있으면 본인이 피곤해져요. 그렇게 되면 본인이 복이다? 복 아니다? 를 누가 결정하냐면 본인이 결정해요. 이것은 하나님 나라 아닙니다. 네 가지 중에서 하나를 차지하려고 해요. 목사님이 “하늘나라는 땅이 네 종류가 있거든요. 옥토 있고 가시덤불 있고....” “저요! 저요!” “왜?” “나는 옥토 될래요. 그래서 열매 맺을래요.” 그래 나오니까 목사 본인도 마찬가지에요. “여러분 이렇게 하시면 옥토 됩니다.” 그게 무슨 해석입니까? 이렇게 하시면 옥토 됩니다. 이게 무슨 해석이에요. “여러분들은 네 가지 다를 보여 준다면 천국 백성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야지.
다시 오늘 본문에 들어와서 언급해 보겠습니다. 황충이 토지소산을 멸하지 않도록 한다 할 때, 여기에 정말 제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려운 대목이 하나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은, 하나님은 사람의 위주로 세상을 만든 게 아니고 땅 위주로 세상을 만들었어요. 에덴동산 만들 때에 사람 살기 좋으라고 만든 게 아닙니다. 살기 좋으라고 만들었다면 거기에 선악과라는 것은 아예 심거나 선악과 규칙을 만들지도 말아야 돼요. 땅을 만들 때 중앙에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니고 중앙에는 두 개의 나무가 있어요. 그 나무에 순종하라고, 나무 심은 취지,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부차적으로 인간을 만든 겁니다. 인간은 부차적인 존재에요. 인간은 제일 우선 존재가 아니고 인간은 부차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은요, 하나님 자기만 사랑해요. 지금 이 이야기하는데 30년 걸렸습니다. 제가. 하나님은 하나님 자기만 사랑해요. 하나님이 우리 사랑할 것 같으면요, 절대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랑할 것 같으면 선악과를 아예 심지 말아야 돼요.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되 세상이 아니고 세상 중에 있는 자기, 예수님을 예수님이라고 인정하는 자들만 사랑해요. 이 말은 곧장 뭐냐 하면 하나님은 자기 원리를 사랑해요.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이거는 만고불변의 양보 없는 원칙입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자기만 사랑한다는 뜻이에요. 모든 교회가, 온 천하 이천년 역사의 모든 교회가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 한다 부터 시작하니까 이게 엉터리 교회가 된 겁니다. 사람의 기만 올려 세워놓은 거예요. 사람의 기분만 돋아주고 사람만 포섭해놓고 결국 마지막에 돈이잖아요. 돈만 챙겨가지고 자기 세력화시키는 그런 교단 이외는 다른 교단 어딨습니까? 구원파 욕 할 거 없어요. 모두가 구원파에요. 모두가.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땅을 사랑해요. 땅을. 그 땅은 장차 누가 살 땅이냐 하면, 예수님이 살 땅, 자기 아들이 주로서 살 땅을 만들어요. 땅이 먼저 있고 땅의 조건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아담, 하와 전부다 흙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선악과라 하는 것은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오직 주님만 주다는 것, 오직 하나님은 하나님만의 원리를 적용시킨다는 것이 선악과에 담긴 고집이에요. 하나님의 고집입니다. 따먹는 날엔 죽으리라. 고집입니다. 그 고집을 인간이 따먹고 난 뒤에 인간도 그런 고집을 받아 버렸어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너희도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와 같이 되었다. 선악과 안에 무슨 고집이 있느냐 하면 누구든지 나만 이뻐하지 않으면 전부다 나한테 땡!! 탈락!! 마이너스100점!! 나가!! 나만 사랑하지 않으면.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를 사랑한다고 했어요. 사랑하는 게 아니고. 인간은 사랑할 줄 몰라요. 남을. 하지만 사랑한다고 꼬셔가지고 둘이 결혼한다고 했어요. 남자가 결혼한 뒤에 그다음부터 아내와 살면서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이미 결혼식을 벌려 놓아서 부조 받았기 때문에, 어차피 또 처가 눈치봐가지고 헤어지지도 못하고 억지로, 억지로 이게 사는 것도 사는 게 아니지만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그때 처음에는 둘이 옆에 붙어 있기만 하라고 연애시절에 하다가 나중에는, 결혼해서는 오늘 36도다. 저리 나가라. 결혼한 지 3년, 4년도 안 돼서 각방 쓰는 부부가 한두 부부가 아니에요. 각 방 쓰는 부부가. 왜냐 하면은 사랑하지 않으면서 붙어 있으면 이게 이물질이에요. 이물질. 사람이 아니에요. 이물질이에요. “좀 떨어져 줄래?” 파리, 모기 같아요. 칙 뿌려버려요. 저리가라고. 꼴도 보기 싫어요. “떨어져라!” 그게 선악과 따먹은 속성이 발휘되고 있는 겁니다. 이게 내가 나한테만 적용시키는 원리에요. 이 원리를 우리는 나만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고 남들에게도 똑같이 내 원리가 적용되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러니 남들이 가만히 있습니까. 거기는 각자 자기 원리 적용시키니까 이게 싸울 수밖에 없지요.
땅의 원리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뭘 동원시키느냐, 메뚜기를 동원했습니다. 지금 전라남도 메뚜기 2억 마리 등장해가지고 난리 났죠. 그 동네(해남). 메뚜기 꾸워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데 이런 생각도 드는데 너무 많으면 맛이 없는 모양이죠. 출애굽기 10장, 11장에 보면 애굽에 대해서 열 가지 재앙을 주께서 벌리십니다. 그 재앙 중에 하나가, 여덟 번째 재앙이 뭐냐, 메뚜기 재앙인데, 5절에 “우박에 상하지 아니한 밭에 모든 채소를 다 먹어 버렸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아침에 이야기한 것처럼 죄가 뭐냐, 이미 애굽에서 경험한 거죠. 애굽을 그대로 먹물로 적셔서 큰 붓에다, 이스라엘이라는 붓에다 애굽이라는 먹물의 죄를 적셔서 이스라엘을 끌고 가죠. 그러면 이스라엘은 구원받았다고 착각하는데 사실은 이스라엘이 아니고 애굽의 죄를 그대로 묻혀서 가는 자에요. 그들이 이스라엘 역사에 쭈욱 선을 그어 버리면 이스라엘 전체가 애굽의 확장이고 죄의 연속입니다. 재앙의 연속이니까 메뚜기의 연속이에요.
그들은 약속의 땅에 메뚜기가 안 온 것은 자기들이, 이스라엘이 구원받았기 때문에 안 왔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니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너를 구원한 그 원리, 하나님의 어떤 원리에서 너가 구원이 되고 그리고 재앙이 안 왔는지를. 그 원리를 알기 원하는데 우리는 원리보다도 받아 챙기면, 받아 챙기면 끝이에요.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끝. 가져가신....고만 하세요. 그 말은....고만! 그 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꼭 부모 같아. 애 성적 오르면 잘한다 하잖아요. 조금만 내려가면 “놀았지?” “놀기는 뭘 놀아요? 다른 애들보다 공부 더했는데.” 왜 오를 때만 좋아하고 내려가면 지 자식도 아닌 것처럼 그렇게 잔소리를 하느냐 이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내간 선악과 따먹은 내 원리를 강요하는 거예요. 뭐냐 하면, 니는 내 원대로 안 하면 이물질이다. 호적 파라! 꼴 보기 싫다! 그러니까 내 뜻대로 하게 되면 내한테 붙어 있어라. 아이구 내 새끼. 내 새끼 잘한다. 이래 되는 겁니다. 도대체 자식이 부모 마음에 들기 위해서 자식은 어느 정도 돼야 부모한테 늘, 늘 이쁨을 받을까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식을 공부 잘하는 자식, 자식을 본인의 능력가지고 따지지 마시고 능력을 견주고 하지 마시고 주님께서 내 자식을 어떤 원리를 적용하는가. 자식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복 주시는 그 원리를 찾아내시면 자식이 어떤 짓을 해도 예뻐 보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세리와 창기와 강도라도 니가 천국에 가는 것처럼. 뭐가 이쁘겠어요? 강도가 뭐가 이쁘고 세리가 뭐가 이쁘겠습니까? 주께서는 자기 사람에게 적용시킨 자기 원리가 이뻐서 그 사람을 거기에다 적셔서 천국으로 데려가는 거예요. 그 주께서 구원하는 기준. 그 기준을 찾아내시는 겁니다. 그 기준을 찾는 방법은 뭐냐, 복 받아 놓고 뜯기는 그 과정의 경로를 거쳐야 그 기준을 우리가 목격하게 되고 느끼게 되는 거예요. 그거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겁니다. 이게 바로 주께서는 그걸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두려움을 줘요.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눈만 뜨면 항상 두려움이 택배처럼 와있어요. “오늘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는데. 오늘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데.” 항상 두려움이 와요. 근데 그 두려움의 긴장된 순간이 지나가면서 “아휴! 다행이다!” 하는 감사할 때. 감사할 때 바로 병 주고 약 주시는 하나님. 이게 의사가 제일 듣기 좋은 소리랍니다. 병 주고 약 주고. 병 주고 또 약 주고. 또 돌아서면 병 주고 약 주고. 깜짝 놀라게 했다가 다시 한 번 또 감사케 하시고. 이렇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내가 그 투명한 거울이나 유리에 뭘 그리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리는 대로 우리는 밑장만 빼면 돼요. 밑장만. 이러다 화투 배우겠다. 정말. 밑장만 자꾸 빼고 지금도 또 새로 주시는 것. 뭔가 큰일을 했으면 사람은 교만하기 짝이 없게 돼요.느긋하게 될 때, 또 주께서 새로운 사태로 어려움을 주시면 과거 잘 난 것 싹 사라지고 또 새로움에 대해서 깜짝 놀라게 만들죠.
그러면 그것이 또 주님에 의해서 해결되면 또 감사가 되고. 그러면 그 사람은 하나의 경계선만 남죠. 그게 바로 복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원리에 의해서 이렇게 하시고 이런 원리에 의해서 주시더라. 그럼 원리가 뭐냐? 교만하면 미워하시고 겸손하면 사랑하시더라는 원리입니다. 그러면 늘 겸손하면 늘 사랑받겠죠. 그 겸손의 자리가 어딥니까? 바로 십자가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말라기의 구약은 십자가에서 완성이 되는 겁니다. 니 안에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원리가 느껴질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너에게 작용하실 것이다. 니가 만약에 모든 게 정상적으로 잘 될 때는, 집안에 아무 문제없을 때는 십자가 때문에 잘 된 줄 알고 니가 뭔가 일이 꼬일 때는 십자가 은혜를 놓치기 때문에 꼬이는 줄로 생각하라. 그게 하나님의 고집이에요. 우리 고집도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 고집도 한 고집하거든요. 내가 잘 되면 웃고 내가 못 되면 짜증내고. 그런데 그렇게 돼버리면 세상만사가, 원래 주님의 나라지 내 나라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만날 얻어맞다가 볼일 봐요. 내 원리도 아닌데 내 세상이라고 우기니까 얻어맞거든요. 차라리 주님의 원리로 양보하세요. 모든 걸 일임하시고 맡기세요.
십자가 알면, 마음이 낮아지면 모든 것이 다 감사할 일이고. 내가 우쭐대고 교만하면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안 되니까 짜증내고 그래요. 심지어 프로야구 좋아하는 사람들, 이렇게 자기 원하는 팀이 안 되면 하루종일, 남자들 하루종일 짜증냅니다. 베게 막 던지고요. 그게 스트라이크냐? 류현진 뭐하노? 세상사는 기분이요, 남들 위해서 종속되는, 남들에 의해서 휘말리게 되니까 자기 인생도 없고 그리 살다가 죽으면 얼마나 허무합니까? 주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황충을 금하여, 이것은 레위 언약에서 황충을 금하게 하고 포도나무의 과실을 맺게 한다. 이것은 니가 잘나서가 아니다. 너하고는 관계없어. 내 원리가 너한테 적용시키기 때문에 그렇게 잘 된 것이다. 우리 것은 없고 우리는 아예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하버지, 만날 옥토 되기를 원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경험해야 될 것은 돌짝밭에 씨앗에 있는 운명, 그리고 가시덤불 속에 재리의 유혹과 세상의 유혹 속에 있는 그 씨앗의 아픔도 함께 공유하고 경험케 함으로써 우리의 마음 자체가, 우리 자체가 말씀 판인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