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3강 (강의:이근호 목사)
출애굽 자체가 억지스럽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억지스럽다는 것은 우리 생각에서 출애굽 사건은 우리 아이디어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인간에게 나오지 않았다는 말은, 하나님이 인간과 협상할 용의가 없다는 뜻이에요. 협상할 용의가 없다는 뜻은, 인간들이 추적해서 하나님의 계획에 잠입할 수 있는 어떠한 여건도 인간에게는 실패로 끝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 교회라는 것은 그 교회 안에 예수님께서 비유로 이야기하고 교회 자체가 비밀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 안에 뭐가 담겨 있느냐 하면, 실패성을 함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해봐라. 결국 실패로 끝난다. 그걸 교회가 비밀이다. 다른 말로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비밀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사야 6장에 나오는 말씀들이 신약성경에 붙어있는 경우가 많은데 추임새가 늘 붙어있는 거예요. 그것은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은 이 세상 자체가 무덤입니다. 세상의 무덤화. 무덤이 아니라고 우기는 인생 자체를 무덤으로 보거든요. 19세기에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에서 공리주의가 등장해서 성경에 나오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그것을 국가적 차원에서 실시합니다. 복지정책인데 유럽에서 19세기부터 시작된 거예요. 거기서 나오는 구호가 있어요. 요람에서 무덤까지. 모든 것을 국가가 책임지고 다 해주겠다는 것, 의료보험, 교육혜택, 이런 것들을 하겠다는 겁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고 하는 것은 존재의 버티기. 문제는 존재가 감히 전 세상을 무덤화 시키는 사건에 대항하고 버틴다는 겁니다. 버티는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교회고 종교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회복이란 것. 하나님께서 인간을 힘들게 하지만 결국은 회복시키니까 여러분이 당한 것은 하나님께서 보상해줍니다. 보상심리인 거예요. 지금은 괴롭지만 주께서 자비로 보상해줄 것이라는 보상받으려는 희망을 계속 집착을 갖고 있는 겁니다. 회복이라는 신학을 주장한 것이 통일교부터 시작해서 이단들이 회복을 주장해서 자기 아픔을 보상받기 위해서 자기 재산까지 교단에 다 갖다 바쳐요. 누구만 배부르고 나중에 보상할 길이 없어요.
그리고 내가 듣기에 밉기 짝이 없는 게 힐링이라는 것. 우리가 치유의 대상이 되는 겁니까? 무덤을 리모델링한다고, 잔디 새로 입힌다고 그게 영생이에요?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아픈 사람을 건지고. 존재에서 신약으로 들어가는 방법이 없어요. 신약에 들어가려면 구약부터 들어가야 돼요. 구약은 폼으로 있습니까. 어디서 내 존재로부터 주께서 귀신 쫓아내고 힐링한다니까 치료한다니까 치유한다니까 나도 치유 받아볼까? 그럼 예수 믿어봐야지. 돈만 날립니다. 힐링하는 게 싸게 먹히거든요. 기도안수 받고 낫겠다는 것, 그 약점을 노리고 힐링 사기꾼들이 등장하는 거예요.
성경은 존재에서 사건을 만나지 않습니다. 사건 속에 들어가서 사건의 터널을 통해서 사건을 이해해야 되는데. 신약에 들어가려면 구약부터 출발해서 신약에 도달해야 돼요. 그 구약에 들어갈 때 존재에서 사건으로 바뀌면서 들어가게 돼있어요. 우리는 힐링의 대상이 아니에요. 구약 이스라엘은 좋겠다. 하나님이 친히 찾아와서 구원해주니 얼마나 좋겠느냐. 좋기는 뭐가 좋아요. 나라꼴이 엉망진창인데, 혼돈인데.
왜 혼돈이냐 하면, 존재로 살아가고 싶은 애굽의 속성을 갖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사건이 이건 개입이 아니고 난입이 적당한데, 사건이 난입해서 들어가니까 완전히 엉망진창이 된 겁니다. 뒤집어진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손가락으로 창호지를 뚫으니까 저 손가락은 누구 손가락이냐고 물으니까 뚫은 사람이 니 손가락이잖아.
그러니까 뱀이 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상태. 이건 뭐냐? 힐링, 치료받겠다, 또는 상처받은 심령을 보상받겠다고 자기에게 애쓰면 애쓸수록 그러니까 존재 문제는 존재 문제로 해결하겠다고 버텨봐야 자기 꼬리를 깨물어봐야 더 아파요. 그것을 자기 언급, 자기 자신의 부분집합, 자기 귀속, 그런 용어를 사용하는 거예요.
카오스이론이라고 해서 저절로 에너지가 나오는 어떤 이상적인 장치, 나왔던 결과를 다시 원인으로 집어넣으면 예상 밖의 놀라운 효과를 본다는 그러한 것. 하지만 그러한 모든 것은 존재의 분열로 이어지는데 이 존재의 분열을 하나님께서 사건을 통해서 의도적으로 유발시킨 겁니다. 그러니까 나가 있으면 둘로 쪼개지는 거예요. 원자핵분열처럼 둘로 깨지는 겁니다. 탁 치면 중성자 깨지고 에너지가 나오는 것처럼.
구약은 뭐냐? 구약은 이스라엘을 깨트려서 여기 이스라엘과 또 하나의 이스라엘을 새롭게 생산하는 작업에 하나님께서는 사건으로 잠입하고 개입하는 그겁니다. 그래서 깨어졌을 때 하나는 사건화 되고 하나는 역시 존재로 되는 겁니다.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아무리 이 세상에서 사람이 상처받아도 세월이 약이라고 지나가면 무마가 돼요. 그럼 존재에서 하나님께서 금을 그으면 아파요. 많이 아파도 다시 세월 지나가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약간의 상처만 남고 다시 복원이 돼버립니다. 존재의 바다에서 다시 존재의 바다로 돌아가 버려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그게 치유에요, 그게 회복이에요? 그게 강력한 죽음 세력의 저항입니다. 존재에서 사건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다시 존재로 되돌아오는 관성의 법칙. 다시 내 존재는 내 존재로 인하여 내가 즐거워하는 것, 그 본성으로 관성적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요. 하나님께서 모든 세상을 무덤화 시킨다는 사실에 대해서 수긍하시면 자기 존재에 대해서 스트레스는 안 받게 되는 겁니다. 이게 해결책이에요. 처음부터 죽은 자로 태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치 여자 죄수가 교도소에서 출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수용생활이 시작된 거예요. 출생지가 교도소이기 때문에. 이게 바로 인생의 실상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주님이 일으킨 사건에 의해서 이미 죄 아래, 죽음 아래, 하나에 무덤화 돼있는 거예요. 콘크리트 돔 아래 있는 거예요. 뚫을 수가 없습니다. 이걸 어떻게 회복하겠다, 힐링하겠다고 하면 그걸 노리는 종교사기꾼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전 세계의 무덤화는 존재의 나로서는 나올 수 없는 아이디어입니다. 그래서 제가 출애굽은 거북스럽다, 억지스럽다, 부자연스럽다고 한 겁니다. 그저 우리가 익혀 온 것은 존재의 풍성함만 정겹지 그 외의 것은 나를 분열시키는 어떤 것도 우리는 배척하고 거부하게 돼있어요. 그러면 세상을 무덤화 시킨다는 하나님의 아이디어는 왜 이런 식으로 시작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해석할 때 반드시 살인사건을 집어넣어서 해석하고 이해하는 겁니다. 살인사건을 집어넣어서 세상을 판정하는 거예요.
그 최초의 이야기가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살인사건입니다. 살인이란 죽음을 의미하고 죽음은 피를 의미하거든요. 그래서 율법의 중심이 뭐냐? 아침저녁마다 피 있는 제사의 반복이 되는 겁니다. 살인사건을 집어넣을 때 이 세상이 죽음의 세계고 무덤화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소급해서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이 세상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살인사건을 유발할 수밖에 없는 일을 하나님이 꾸며요. 하나님은 연출가에요. 일부러 이 세상을 가지고 노십니다.
형 가인이 제사를 드렸는데 안 받았습니다. 조짐이 아주 수상합니다. 음침해요. 그런데 동생이 제사 드렸는데 받았어요. 이건 문제 큽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형이 동생을 죽이는 겁니다. 동생을 없애버리는 거예요. 동생이 없어져야 자신의 존재의 가치가 유지가 되니까. 동생이 있으면 동생과 비교대상이 돼버려요. 비교되면 자신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사이인 것이 들통이 나고 발각이 나버려요. 그러면 나라는 존재를 쥐고 있어도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가 돼버려요. 그 존재는 결국 지옥 행.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존재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절망적입니까. 사람은 희망 없이는 못 사는데.
애당초 운명이 결정되었을 경우에는 그런 판정 자체가 존재에 섞이지 않도록 추방시킬 수밖에 없어요. 그게 아벨을 자기 눈에 띠는 곳에서 없애버리는 겁니다. 이런 아벨의 사건은 장차오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 취지와 연결이 돼있어요. 아벨과 사가랴의 피가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예수님께서 자기 노선을 바로 아벨로 억울하게 죽었던 선지자 사가랴의 노선에 자기 자신을 이어버립니다.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가지고.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벨이에요. 아벨의 존재는 뭐가 됩니까? 제사 한 번 잘 드렸다가 쉽게 말해서 교회에 예배 참석하러 오는데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식이거든요. 예배 잘 드려서 하나님이 기쁘게 받았는데 그래서 지는 팔자 피는 줄 알았지요. 형한테 맞아 죽었는데 그게 팔자 핀 겁니까?
여러분 성경을 보면서 세례요한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세례요한 태어날 때 요란스러웠어요. 이름도 자기 가문의 이름이 아닙니다. 가문의 이름인 사가랴로 지어야 되는데 아버지가 이름 지으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강제로 입을 봉해버렸어요. 말을 못해. 도대체 하나님의 사건이란 것이 아주 억지스럽고 부자연스러워요. 사람을 못 살게 굴어요. 입을 틀어막고. 칠판에 쓰니까 John, 요한이 나왔단 말이죠. 임신했을 때도 마리아와 둘이 만나서 뱃속에서 뛰고, 그리스도의 언약대로 태어난 자에게 복이 있도다. 하고 세상에 그렇게 요란스럽게 태어나면 나중에 위대한 사람 될 줄 알았지요. 그게 어떻게 교회에 계속 잘 다니게 하는 긍정적 동기가 되겠어요.
세례요한은 말하기를 나는 쇠해야 돼야 된다. 나는 그분의 스피커로 내 역할은 끝. 세례요한에게 존재는 없습니다. 그걸 배워야 돼요. 세례요한이나 아벨, 이런 사람들은 존재감이 없어요. CF에 보면 얘들이 놀다가 정수기 자랑하면서 우리 집에 물 나온다고 하니까 다른 아이가, 우리 집에 얼음 나온다는 소리에 자기 존재감이 팍 죽었어요. 어릴 때부터 정수기 하나로 존재에 상처를 입었어.
주님께서는 우리 존재에다 사건을 새겨버려요. 그러면 그 사건은 우리에게 거북합니다. 나는 흥하고 싶어요. 그러나 사건은 쇠하라는 것이 아니고 나는 흥하다, 쇠하다 이것 자체를 주께서 허용하지 않습니다. ‘나는’ 자체를 목적어, ‘나를’로 바꾸고 미지의 X께서 나를 이런 식으로 활용한다는 사건을 표현하는 문장으로 바꿔버려요. 이걸 이스라엘에게 실시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죽음 사건을 때려버리면 존재로 남아있는 이스라엘, 존재화 된 이스라엘, 죄지요. 악이고. 그 다음에 사건화 된 이스라엘, 사건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무존재기 때문에 붙일 이름이 없어요. 이름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이름은 이름 없음이 이름이에요.
이름이 없다는 말은, 이들 이름은 누가 붙여줘요. 주의 이름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에 성령이 오게 되면 각자 자기 이름을 포기하는 집단이 발생합니다. 그들은 자기 이름으로 자기 존재감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 사람들은 아낌없이 자기 재산을 내놓았고 자기 소유의 모든 것을 사도 발 앞에 던졌습니다. 그 중에 반만 내다가 걸린 사람도 있지만. 그 사람들이 기대한 것은 주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0장 13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 말이 이렇게 무서운 말인지 몰랐지요. 그냥 주의 이름을 부르면 오늘밤 구원받는 줄 알았지요. 구원에서 내려오는 계통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 존재를 자기 존재 식으로 존재가 존재로 귀속하기 위해서 잠시잠간 주의 이름을 부르면 되는 줄 알았지요. 그 가운데서 존재 자체가 사건화 되어서 갈가리 내 존재가 사라질 줄은 상상도 못한 겁니다.
구약의 사건 속에 다시 들어와야 됩니다. 그 들어오는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없다 하면, “안 하면 되지.” 하는데 한다, 안 한다는 이야기는 일단 존재로 구축될 때는 나란 존재로 해볼까, 말까라고 되는 거예요. 할까, 말까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존재를 주님의 사건 앞에 반납을 해버렸어요. 아예 거기다 일임을 해버리면 우리는 매일같이 주님에 의해서 하게 되는 사람으로 되는 겁니다. 내 존재로 하는 일이 아니고 주님이 내 안에서 살아계셔서 주님의 일을 내 몸뚱아리로 펼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될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 일은 나의 존재의 우수함을 증명하는 것을 수집되질 않습니다. 오히려 그 가운데서 우리는 제한테 일을 맡기지 않은 것을 감사하면서 자기 존재의 실패성을 즐길 수가 있어요. 오늘도 실패하는 즐거움으로 시간시간 사셔야 돼요. 아침에 요 앞에 계곡 쪽으로 산책하려고 마음먹었는데 실패로 끝났습니다. 비가 부슬부슬 오니 그래서 못 갔습니다. 주께서 비 오게 하셨고 타이밍 맞춰서 우산 없고, 그래서 안 간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자기 존재가 유지된다면 이것은 바로 주님이 주신 인간의 능력마저 내 존재의 위력에 묻혀서 “그래 없었던 걸로 해버려.” 이렇게 되어서 전혀 달라진 게 없습니다. 존재적 이스라엘이 존재로 가버리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살인사건으로 개입해서 이스라엘을 쪼개는데 출애굽 때 개입된 살인사건이 어린양의 죽음이었습니다. 피 발라라. 그러면 건너뛸게. 유월절이거든요. 문설주에 피 바르면 피를 보고 그냥 넘어가겠다. 이게 무슨 황당무계한 아이디어입니까. 바쳐라. 구원해줄게. 우리는 납득이 되는데 피 발라라. 넘어간다. 존재를 죽이면 존재적 차원해서 심판하지 않겠다는 취지거든요. 제가 너무 함축해서 어렵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와 함께 일년 동안 살았던 어린양이 우리의 존재를 대변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옆집에 사는 애굽 사람들이 받는 심판을 일년 된 어린양이 그 존재로서 심판을 다 받았다는 표시로 죽였다고 말로만 하지 말고 진짜 죽였다는 혈관 밖으로 흘러나오는 피를 페인트칠하는 거예요. 우리 집에는 존재 없습니다. 우리 집에는 내 존재 잘났다고 주장하는 사람 없고 이미 죽었다고 한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는 존재를 말살하려고 하시는가? 그것은 인간의 존재 속에 하나님의 일에 버티는 반항하는 세력이 이미 상주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존재와 존재로 계속 이어가면서 대를 이어 반항하세. 인류역사가. “우리 존재에 대해서 부정하는 존재가 누구야? 내 존재에 대해서 반항하는 존재가 누구야? 가만두지 않겠어.”
그게 바로 대학시험이고 취직시험이고 공무원시험이잖아요. 공무원시험이 150:1이잖아요. 내가 만약에 거기에 응시했다. “누구야? 나 빼놓고 합격한 사람이.” 이 세상 자체가 내 존재에 대항하는 것은 나의 적이 되는 겁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 이건 이유가 없어요. 그래서 문제에요. 왜 내 존재를 고집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존재는 왜 우리가 죽어야 되는지 어떤 이유와 해결할 자체를 끄집어낼 수가 없습니다. 만들었는데 왜 해체되느냐 이 말입니다. 이미 있잖아요. 있는데 왜 없어지느냐? 거기에 대해서 아는 사람 있습니까? 아무도 몰라요. “에이 그냥 살던 대로 살지.” 이게 해결책입니까? 그거는 무덤 안에서 이사하는 것 밖에 안 돼요. 무덤 안에서 실내 장식하는 것밖에 안 돼요.
이렇게 적용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전부 좀비로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하는데 간주하는 걸 받아들이면 아무 문제없는데 네 존재가 우선돼야 된다고 부추기는 어떤 강한 세력이 힘들게 하고 있어서 우리는 그 기운에 말려들어서 오늘도 버티고, 내일도 버티고 매일같이 눈만 뜨면, “하나님이여, 내 소원대로 해줘야 됩니다. 힐링해야 됩니다. 회복해줘야 돼요. 오년 전에 잃었던 오천만원 30배, 60배로 보상해줘야 됩니다.” 자꾸 이런 식으로 그래서 내 존재는 존재로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증명하는 그 재미로 살고 싶다는 요소가 있어요.
그런데 누가 그렇게 버티게 하느냐? 그건 인간들은 왜 그래야 되는지 몰아요. 프로이드라는 사람은 그걸 알았어요. 인간의 근본적인 본능은 죽고자 하는 것이다. 그걸 알았는데 왜 그런 죽고자하는 의식이 무의식 속에 있는지 이유는 밝혀내지 못했어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자기만 그런 게 아니에요. 대대로 그래요. 우리 집안만? 남의 집안도 마찬가지에요. 왜 인간은 통째로 전부 다 죽고자하는 본능이 있느냐? 이로써 개인적인 질병이 전체 정치적, 윤리적 체험으로 확대가 됩니다. 방금 중요한 이야기했어요. 아침부터 잠이 와서 꾸벅꾸벅 조는데 강의는 점점 더 어려워지는데 저는 참 난처해지는데
이게 출애굽 당시의 지리에요. 애굽이고 광야고 가나안 땅이고 지리적이고 2차적이고 평면적이죠. 여기에 있는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건 신약입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구약은 지리적이고 공간적이고 실제적으로 전쟁, 칼싸움하고 있는 상황이 어떻게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 보면 영적 싸움으로 개인적으로 마음적으로 전환되느냐? 그런 쪽으로 우리가 생각해야 되거든요. 여기서 칼부림이 있는데 사건의 금들, 신약에서는 마음의 금으로 전환되는 거예요. 줄기차게. 이렇게 전환되기 때문에 무관한 게 아니란 말이죠.
신약에 와서 우리나라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건 묻지 마세요. 구약의 이스라엘이 어떻게 됐습니까? 그건 의미가 있는 거예요. 구약적 입장에서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고, 블레셋은 어떻게 되고, 그런 건 의미가 있는 이야기지만 신약에서 필리핀 어떻게 되고 중국의 윈난성 지진이 일어나고 그런 건 묻지 마세요. 신약에서는 인간의 마음속으로 모든 것이 적용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진이 나든 말든 “너나 잘하세요.” 이런 식이란 말이죠. 남 욕할 것 없어. 바깥에서 들어가는 게 더러운 게 아니고 속에서 나오는 게 더럽단 말이죠. 속에서 나오는 게 더러운데 눈 돌리고 남 지적할 일이 어디 있느냐 말이죠.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나오는데.
신약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다고 확정날짜 받은 거예요. 완전히 모든 게 끝나버린 거예요. 그래서 종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종말은 더 이상 시간의 진척이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신약은 해석하기가 너무너무 어려워요. 구약은 쉽습니다. 실제로 홍해가 갈라졌어요. 홍해가 갈라진 의미가 뭐냐? 그것은 신약으로 보게 되면 우리의 마음과 또 다른 마음이 있는데 그것이 갈라졌다. 이런 식으로 전환이 되는 겁니다. 이러니까 신약해석은 상당히 복잡한 논리적 절차가 요구되고 있지요. 구약에서는 간단한데.
어쨌든 간에 그 이야기 계속해봅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살인사건을 집어넣는 이유가, 그러니까 왜 존재에 대해서 싫어하고 존재 자체를 용납하지 않는가? 그 이유는 인간의 존재 안에 하나님께 반발하고 반항하는 세력이 존재라는 이름으로 계속 살아나는 겁니다.
그렇다면 창세기를 쓰게 된 모세가 받았던 계시 안에는 어떤 내용이 포함돼 있느냐 하면,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사고방식이 어떻게 달라졌고, 자기를 보는 관점, 하나님을 보는 관점, 세상 보는 관점이 어떻게 변질되었는가? 제가 ‘변질’이란 말을 아예 써버렸습니다.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변질된 거예요. 왜냐하면 따먹지 말라는 것을 따먹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악과나무 안에 해로운 독약 요소가 있어서 죽었습니까? 그러면 선악과 따먹은 그날 당장 게거품 물고 죽어야 돼요. 그런데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서 멀쩡했단 말이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럼 선악과나무 과일을 따먹은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말씀 자체를 인간이 따먹은 거예요.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 자체를 따먹고 영구 없다는 식으로 이제는 그런 잔소리는 내 눈앞에 없는 거예요. 무슨 말했어요? 없지요?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그 말은 이제 삼켜서 없애버린 거예요. 없애라고 마귀가 없애라고 하는 거예요. 너의 자유의지를 침해하는 독소조항을 네가 없애면 된다는 거예요.
나를 믿지 않는다는 말을 지옥 간다는 그 말에 대해서 대처하는 방법? ①믿자. ②믿는 척하자. ③그 예수를 없애자. 몇 번이 제일 속 편해요? 그 말한 당사자를 없애는 거예요. 없애는 방법은 뭐냐 하면, 예수님을 4대성자의 한 분으로 넣어주면 돼요. 소크라테스, 공자, 부처, 그 다음에 예수. 4대성자로 존경하면 되는 겁니다. 존경하게 되면 예수는 그냥 평범한 서른세 살 먹은 청년이지요. 그들이 믿는 것은 신성, 인간을 초월하는 신을 믿으면 되지 예수를 믿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꼭 예수이어야 할 주장은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지금 천주교는 옛날부터 그랬고 감리교, 그리고 대한예수교 통합측 전부 그쪽 신학으로 전환돼요. 종교는 인류의 평화와 공존에 이바지해야 된다. 그 독소조항이 뭐냐?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이 없다. 따라서 그것을 새롭게 해석하면 된다. 십자가는 사랑이다. 하나님이 사랑한 게 아니고 사랑이 곧 하나님이다. 따라서 사랑이 있는 곳에는 신성이 있고 신성을 받게 되면 인간도 신이 될 수 있다. 하여튼 인간이 신이 못 되어서 환장을 했어.
그러면 신이 되는 건 뭐냐? 사건이냐, 존재냐? 존재잖아요. 들통 났잖아요. 결국 존재에서 존재로 귀환되잖아요. 다시 말해서 “내 존재 누가 건드려.” 도대체 이것 자체가 이미 변질된 겁니다. 그러면 변질되지 않은 원형을 찾아가면 되지요. 찾아갈 길이 없네. 한 번 변질된 식품은 폐기처분해야 돼요. 폐기처분하시잖아요. 얼마나 고맙습니까. 칠십 살다가, 어떤 사람은 팔십 살다가, 또는 어린 학생이 일찍 폐기처분 당하고.
하여튼 이 세상에서 주님께서 하신 일이 하등에 주님 쪽에서 잘못한 일이 없어요. 잘못하신 게 없는데 지금의 내 인생은 내가 원치 않는 인생이라고 대드는 속성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겁니까? 주님하신 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데 아무 문제없는데 “잠시 만요. 문제 있습니다.” 손들고 나오고. 왜 손들지요? “내 인생은 내가 원치 않는 인생입니다.” 이름 말해보세요. “이름은 아무개입니다.” 이름 있는 것 보니까 존재 있네. “존재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3번에서 이름이 없거든. 이름 있는 사람은 앞으로 안 주기.
주의 이름으로 살면 주가 하신 모든 일이 오케이가 되고 아멘 된다는 것을 원 없이 살아생전 가야산 정기를 마음껏 받듯이 활짝 펴고 모든 것이 주의 은혜고 사랑을 받게 될 것입니다. 너무 많이 받아서 존재로 변하게 되면 그게 골치 아픈데
그러한 살인사건, 죽음의 사건을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겐 상당히 거북스럽지만 하나님 자기 일에 차질 없게 하시는데 그 살인사건을 집어넣는 내력이 어디서 나왔느냐는 거죠. 그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들에게 살인사건들이 내장돼있었어요.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원한 게 아닙니다. 그리고 본인이 기대한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이삭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도대체 내 존재가 내 대에서 끝이구나. 나는 항상 시작을 증명하기 위해서 있는 존재가 아니고 끝나야 한다는 존재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존재가 그동안 유지돼왔다는 것을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서 인정합니다.
그러니까 동강에서 레프팅하는데 앞에 절벽이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관님, 앞에 절벽이 있습니다.” 교관이 하는 말이, “절벽에 빠지도록 일부러 여러분을 돈 받고 보냈습니다.”라고 하면 얼마나 황당하겠어요. 그게 바로 믿음의 조상이에요. 모든 인간은 절벽에 있다. 끝. 당황하지 말고 노 저어가면 내 존재가 사라지는 그 지점, 그게 뭐냐? 자살이 아니라 언약적인 죽음이 나를 대기하고 있었던 겁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거죠.
그럴 때 나란 존재는 인수인계 절차에 들어갑니다. 마귀로 배려버린 그 존재 이름은 이제는 주님의 것에 의해서 새롭게 탈바꿈 되면서 천국에 골인되는 겁니다. 로마서 14장 7절의 말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게 아주 어려운 신학이에요. 신학 자체가 어려워요. 만약에 구약을 통하지 않고, 아브라함을 통하지 않고 그냥 신약에 들어가 버리면 나의 존재는 주의 것이라고 하면 역시 존재로 끝나버려요. 그런데 우리의 존재는 우리가 새롭게 가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존재가 우리 존재를 대체하기 때문에 따로 내 존재를 구성할 하등의 이유도 없고 구성해서도 안 되는 거예요. 사나 죽으나 주님의 몸의 지체로서 움직이는 거예요. 발가락은 결국 발가락 힘이 아니고 두뇌의 지시에 의해서 발가락을 움직이는 것처럼. 내가 만약에 오늘 아침에 조깅했다면 우리의 머리 되시는 분의 지시에 의해서 조깅해야만 되는 거예요.
아까 아침에 식사할 때 수박이 달고 맛있었습니다. 수박 좀 더 먹었으면 했는데 양성수 장로님이 들어오면서 수박을 갖다 줘서 곱빼기로 더 먹었습니다. 저는 양 장로님이 그렇게 했다고 믿지 않고 주께서 그렇게 했다고 믿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 아닙니다. 주의 영광이에요. 그 차이가 이방인이냐, 아니냐. 그게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고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거예요. 하나님 영광이 되면 나라는 존재에 대비한 새로운 존재가 돼버려요. 존재와 존재로 대화가 되는데 주님이 끼어들면 나라는 존재는 내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고 주님이 부리는 하수인으로 종으로 할 뿐이에요. 그러니까 무익한 종이니 시킨 대로 할 뿐이죠. 시킨다는 것은 그때는 모르고 소급해서 돌아와 보니까 시켰구나 하는 거예요.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결혼하고 보니까 못 생겼어. 왜 했을까? 나중에 소급해보니까 못났다고 여겼던 아내도 주께서 시킨 대로 결혼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부부싸움이 일어날 일이 없어요. 왜 국이 짜냐? 짜증내다가 소급해보니까 주께서 짠 것도 먹어봐라 해서 한 거고, 안 그러면 짜증나서 소금을 일부러 부었든지 무슨 일이 있었겠지요. 늘 안 짜야 된다는 권리는 존재 없는 사람한테는 나올 수 없는 권리입니다. 짜지 않은 국을 먹고 싶습니다. 저 존재 잘라버려라. 주는 대로 먹어야지 말이 많아.
벌써 세 시간이 다 가는데 성경구절 봅시다. 성경도 안 보고 무슨 짓인지 모르겠네. 출애굽기 1장 8절,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등장했어요. 이게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왜냐하면 요셉은 우리 보기에는 존재로 보입니다. 왜 존재로 보이느냐 하면 내가 존재로 살기 때문에 나와 다른 무엇, 나라는 존재와 다른 존재로 보는 거예요.
여러분, 태풍이 무섭습니까, 외계인이 무섭습니까? 외계인이 더 무섭지요. 태풍은 낯설지 않고 외계인은 낯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태풍은 존재가 아니에요. 존재를 둘러싼 환경이 되지만 외계인이 존재가 될 때는 갑자기 인간은 어느 존재가 진짜 존재인지 검토해야 될 부담을 느끼는 겁니다.
요셉이 있을 때 요셉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이게 벌써 잘못된 해석이죠. 제가 지난 대전에서 이야기했잖아요. 창세기 1장 1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그 해석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성경에 나온 건 괜찮은데 그걸 해석하면 잘못된 해석할 수밖에 없어요. 땡, 탈락. -100점. 성경은 그렇게 돼있지 않고 예수님에 의해서 천지가 창조된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창조했다는 그 말은 보지도 않고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그 하나님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내 존재가 평소에 늘 나의 초월을 기대하면서 여분의, 내 존재 이상의 존재로서 나보다 나를 책임질 어떤 종교적인 욕구에 의해서 아우라 같은 존재란 의미의 하나님입니다. 성경에 보니까 천지 창조했다니깐 “저 분이 창조했으니까 내 인생도 책임지겠지.” 이렇게 연결해서 해석해버린다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건 탈락이 되는 거예요. 그건 유대인이나 모든 종교인이 다 그래요.
요셉이 존재한다니까 요셉의 존재는 위에서 조명을 비추면 이것밖에 안 돼요. 그렇다면 출애굽기에서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 왕이 나온다는 것은 우리한테는 어색하지 않고 그럴 수도 있다고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요셉이 죽은 지 사백 년 됐습니다. 사백 년 전에 죽은 사람을 왜 기억해야 됩니까? 사백 년 전에 죽은 조선 사람들을 꼭 기억해야 되겠어요? 당연하지요. 과거는 흘러갔으니까. 존재가 죽었으니까 없어졌잖아요. 그걸 왜 기억해야 돼요?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요셉은 존재로 사건이 되는 겁니다. 여기에 관계망이 있는 겁니다. 이 관계망이 안 보이는 거예요. 이 관계망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까지 연결된 언약에 의해서 올라온 겁니다. 미국 미식축구에서 응원단이 있지요. 남자 응원단이 여자 응원단을 마지막 하이라이트에서 어떻게 합니까? 밑에서 받쳐 올려서 공중으로 솟구쳐 올라오지요. 깃발 하나 들고 올라오잖아요. 그처럼 요셉은 외부에 드러난 거고, 밑에 80%의 빙산처럼 언약이 인간 피라미드 만들어서 올린 거예요.
그렇다면 요셉을 기억 못한다는 말은 뭐냐? 요셉을 요셉 되게 한 언약의 그물망, 관계망을 바로가 놓친 거예요. 바로가 놓친 게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요셉의 관계망 속에 누가 포함돼 있느냐 하면, 애굽의 존재도 같이 엮여져 있던 겁니다. 엮여진 관계망을 바로 왕이 뜯어버린 겁니다. 히브리 종족이 믿는 여호와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출애굽기 5장에 보면, 모세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왔다고 하니까 바로 왕이 아주 옳은 대답을 했어요. 여호와가 누구관대, 여호와와 나와 무슨 관계있는데?
제가 지난 끝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항상 출애굽할 때 어느 편에 서라? 모세 편에 서지 말고 바로 편에 서면 출애굽기가 전부 이해가 돼요. 꼭 바로가 우리의 평소 행동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예요. 요새 말로 네 종교와 내 사업체와 무슨 관계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을 모른다. 모를 수밖에 없지요. 사백 년 전의 사람을 발굴해서 알아야 됩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요.
이 그물망을 우리 자신도 놓쳐버려요. 왜냐? 우리는 존재와 존재를 끊어서 하기 때문에 요셉은 요셉 나름대로 작은 그림자가 있을 것이고 나는 내 바탕의 그림자가 있을 테니까 네가 잘났냐고 비교할 뿐이지 요셉이란 언약의 그물망에 우리가 같이 놓여있다는 것을 감히 생각 못합니다.
파이프에 물이 흐른다면 우리는 우리 바탕에서 언약이 주는 생수를 날마다 공급받으면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게 돼있는 구조 속에 이미 놓여있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겠습니다.” 땡, 탈락. 왜? 주체가 내가 되니까. “주께서 성령으로 물을 공급해서 주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건 +100점이에요.
그래서 항상 우리는 관계망을 봐야 돼요. 가발 쓸 때 밑을 살짝 들춰보세요. 거기에 그물망이 있잖아요. 잔디는 잔디의 그물망에 단단히 있으면 잔디를 무럭무럭 자랍니다. 그 자란 중에 하나가 요셉인데 바로는 그 요셉 덕분에, 언약 덕분에 존재한다는 생각을 못하고, 그 사건에 휘말리지 못하고 자기 존재를 고집하다보니까 요셉의 존재는 잊어버린 겁니다. 그때부터 언약사건은 터지게 되는 거예요.
그 다음 이야기는 10분 쉬고 합시다. |
첨부파일 : 2014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3강.hwp (52.0K), Down:14 |
'출애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출애굽기 5강(주님을 핍박하도록 되어있는 주체자-대표자와 집단의 분리-간격-죽음) (0) | 2014.08.13 |
---|---|
출애굽기 4강(왜 피인가-차이의 고정화) (0) | 2014.08.13 |
출애굽기 2강(내 이름이 있기에 비난 의식-복음은 전쟁하는 주의 이름) (0) | 2014.08.13 |
출애굽기 1강(하나님의 개입-낯선 경계선-존재에서 사건으로) (0) | 2014.08.13 |
2014여름 십자가마을 수련회 자료(음성 동영상) (0) | 2014.0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