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2강 (강의:이근호 목사)
출애굽 기획안이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기획안이었다는 이야기를 했고 하나님의 기획안은 하늘나라를 만드는데 있어서 지상에 있는 사람들을 노예로 삼아서 납치할 이유가 있는가? 전쟁할 때 승리자가 저쪽의 선량한 백성을 노예로 신분 바꾸어서 일시키잖아요. 로마제국이 키워졌는데 하늘나라에 일꾼이 모자라서 사람을 납치한다는 것은 SF영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고 꼭 하나님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는 겁니다.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이스라엘을 전리품이라고 하거든요. 이것은 전쟁이 꾸준히 있어왔다는 뜻이에요. 전리품, 전쟁이 일어나야 발생되는 노예잖아요. 이스라엘 자체가 너는 나의 노획물이고 전리품이다. 그러면 천국이 어디 있느냐 하면, 전쟁을 하신 여호와 이름이 노획물을 옆에 배치해놓고 내가 거룩한 성소로 지정하겠다고 나와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제가 첫째 시간에 하나님의 개입이라고 해서 끝이라고 했지요. 이것이 수련회의 모든 결론입니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자기 계획을 일방적으로 작업해서 모든 것을 완성시킨다 했는데 개입이니까 여기서 더 나가보잔 말이죠. 개입할 때는 하나님의 행동이지요. action. 하나님의 행동이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의 행동을 그냥 행동이라고 해버리면, 예를 들어서 빈 벌판에서 아무도 없는 외로운 곳에서 공을 차거나 밴드 만들어서 고함치고 노래 불러도 아무도 뭐라 그러지 않아요. 그런데 새벽 2시에 밴드 연주를 한다면 신고 들어오고 난리 나잖아요. 경찰이, “당신이 밤중에 주택가에서 노래하면 되겠어요?” 그럼 그 사람이, “내 행동이 뭐 어때서?” 그럼 경찰이, “당신 행동은 당신 마음대로지만 주변의 이웃에 대해서 생각해봤느냐?”고 나온단 말이죠.
전쟁이란 결국 하나님의 행동만으로 일어나느냐?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행동이 성과를 얻지 못하도록 대적하는 숨겨져 있는 행동이 반격해서 나오겠지요. 그럴 때 전쟁이 되고 이 전쟁에 가담하는 분을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는 겁니다. 출애굽기 15장 4절에 보면, 전쟁에 참여한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이에요. 이런 신학적인 용어를 우리가 왜 알아야 되고 이 소리를 들어야 되는지 물으신다면, 신약에서 사도가 하는 말이, 예수 믿으라는 게 아니라 앞에 뭔가 붙어요. ‘주’ 예수를 믿으라. 주 예수를 믿으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 ‘주’라는 것이 그냥 주인이라는 우리가 아는 존재적 개념이 아니고 제가 첫째 시간에 계속 이야기한 것이 뭐냐 하면, 뭔가 이 땅에서 사건을 존재에다 금을 그어서 낯선 경계선을 자꾸 만들어내는 주인공을 ‘주’라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걸 진작 이야기하지 하지만 성경 전체가 이 이야기를 했는데 교회에서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책에서 다른 건 다 버리면 예수만 찾아서 “내가 예수를 믿겠습니다.” 하면, 오늘 밤 네가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으리라. 이렇게 해서 구원이 돼버리는 겁니까? 용어 하나 외워서. 남묘호렌게쿄에요? 주문 외우면 저절로 효과 보는 그런 겁니까?
주문이란 말이 나왔는데 이게 인간의 타고난 미신입니다. 기호와 문자가 나한테 자동적으로 효과를 준다는 겁니다. 타로 점처럼. 이것은 얼마나 인간이 형식에 집착하는가를 보여줍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말라고 하신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형식문제거든요. 나의 이미지를 만들지 말라. 나를 위해서 어떤 모습이나 형상도 만들지 말라. 이 말을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어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만들고 섬기면 우상숭배다. 미신이죠.
800년경에 동방교회에서 우상철폐하고 부수는 성상파괴운동이 일어났거든요. 성상파괴하면서 자기 집은 왜 안 부수는지 몰라. 그리고 성경대로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본인들이에요. 본인을 도끼로 내리까라는 거예요. 하나님과 관련되어 나온 모든 이미지는 우상입니다. 그래서 나 외에 다른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은 점점 더 이스라엘 역사가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그것이 성취 불가능한 말씀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형상인 하나님의 형상, 곧 인간은 십자가에서 모든 인간은 죽어 마땅한 존재로 발각됩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 한 분이 죽음으로써 모든 인간은 다 죽은 것이다. 이제 살 수 있는 사람은 죽은 자를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된 자만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개념에 있어서 왜 그걸 부수라고 하느냐 하면, 인간이 저것은 하나님답다. 그것을 종교학에서는 신이라고 하지 않고 ‘신성’이라고 해요. 신을 달라도 신성은 하나니까. 복음이 아니고 종교학에서. 산이 있다면 그 진리의 산에 불교로 올라가나 기독교로 올라가나 모이는 곳은 한 곳이다. 왜? 신성을 동일하기 때문에. 그래서 신은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다. 거룩하다, 고상하다, 전능하다, 아름답다 등 미학적으로 해야 한다고 하거든요.
이런 이야기를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인간은 뭔가 자기 초월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성을 끌어당겨서 강제로 엮어서 엮인 내가 신성에 의해서 끌려올라가는 것처럼 신을 마음대로 표출하고 표현하고자 본능에서 나왔기 때문에 모든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거예요.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너희들은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형상, 이미지를 만들게 되어있는 필연적 존재라는 겁니다. 율법을 준 것은 우리로 하여금 새삼 지키라는 말이 아니고 이미 율법을 어기고 왔음을 새삼 너희가 파악하라는 겁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3:19)
자기를 신성화한다. 이건 모든 종교의 모티브에요. 초라한 자기의 모습과 대비되는 나의 인격과 나의 품위에 부합되는 새로운 제2의 자아를 상상하게 돼있습니다. 인간에겐 타고난 거예요. 말려도 안 돼요. 지금 교도소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전부 다 비록 사회 탓으로 왔지만 나는 아직도 양심의 쪼가리는 남아있다. 옆에 있는 죄수한테 자비 행해서 구원받습니까?
전쟁을 통해서 구원받습니다. 주 예수의 주가 구약 때부터 줄기차게 너희들이 알지 못한 그러면서 배후에서 지배해왔던 보이지 않는 악마와 싸워서 승리한 열매가 너희들이다. 그래서 너희들은 나의 노획물이고 나의 전리품이다. 그 사이에서 인간이 고매하고 아주 경건해 보이는 인간의 품위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이 날아가 버렸어요. 종교가 종교답게 사회에 대해서 기여하려면 종교인들이 깨우쳐서 돈과 명예에 대해서 초월하여 정부가 손대지 못한 구석구석을 자비의 손길을 베풀게 되면 사회는 결코 종교인들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누가 이런 소리를 합니까? 마귀가 그런 소리해요.
교회에 공부방 만들고 노인복지해서 정부 예산 따내고 해볼까요? 그런 식으로 하는 겁니까? 그런 걸 이미 하고 있고 줄곧 해오고 있습니다. 서유럽, 동유럽 모든 교회들이 해왔습니다. 왜? 교회가 너무 오래되다보니까 피곤해요. 교회 자체가 자기 건물 모습처럼 전부 찌질 해졌어요. 쾰른에 가면 무려 150년 동안 지은 쾰른 대성당이 있습니다. 관광객들 오지요. 그런데 보게 되면 참 초라해요. 지하에 동방박사 해골이 왜 있습니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인간이 아는 역사는 과거입니다. 과거는 지금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마음 놓고 과거를 볼 수 있는 현재 사는 사람을 호쾌하게 증명해주는 것들이에요. “나는 옛날에 태어났으면 큰일 날 뻔했어.” 자기만족에 빠지게 하는 것이 과거의 박물관이에요. “이 시대에 여자로 태어났으면 조졌네.” 지금의 자신의 모든 것이 행복이 충만한 상태임을 과거의 비참한 시절로 돌아가서 해석하면서 반대급부로 자기 행복을 챙기겠다는 수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다니는 교회도 수십 년 지나가면 예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교회역사를 자랑합니다. 이 역사를 역사로 키우기 위해서 박물관으로 키우기 위해서 현물을 더 내시기 바랍니다. 역사는 여러분의 자랑이고 자존심이라고 설교하거든요. 자식들에게 쓸데없는 유산 남기지 말고 그 돈으로 예배당에 헌금해서 자식들에게 경건의 모범을 보여주시면 자식들이 여러분을 존경할 것입니다. 잘도 존경하겠다. 그 돈을 교회 바쳐서 목사가 다 떼먹고 도망가고. 다시는 벌초하나 봐라. 사후 보복을 당할 수가 있어요.
전쟁이란 개념이 들어가면서 우리는 어떤 데서 선을 넘었느냐?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고 이웃 봉사해서 경건 된 삶을 살자는 그 차원에서 이미 벗어나버렸어요. 우리는 전쟁을 원하는 사람이 아니고 평화를 원하는 사람이거든요. 그 평화를 다른 말로 하게 되면, 아부 또는 굴종. 이 자리만 유지된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다는 양보의 미덕, 비겁하게 생존에 집착하면서도 그것을 평화로 위장하는 우리의 솜씨만 빛날 뿐이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람이 회개하고 반성하게 되면 회개하면 할수록 자기는 훌륭한 사람으로 업그레이드된다는 딜레마에 빠져요. “넌 반성 안 했지만 난 반성했어. 넌 나쁜 짓해도 반성 안했잖아. 나는 곧장 반성한다고.” 뭐예요? 누구 약 올릴 일 있습니까. 납득이 되는 신앙생활은 마귀한테도 먹히지 않아요. 왜? 수준 낮아서. 마귀는 수준 낮아서 우리와 상대를 안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마귀를 뱀처럼 지혜롭다고 하거든요. 마귀가 겁내는 분은 딱 한 분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임성한 작가? 아닙니다. 오로라 공주? 아닙니다. 출생의 비밀, 뿌리를 알고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은 마귀에서 입 다물라고 하지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 입 다물라.” 어디서 알아듣지 못한 소리를 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몰라. 소통이 안 되는 이야기를 자기들끼리 하고 있는 거예요.
전쟁은 자기들끼리만 합니다. 전쟁은 자기들끼리만 해도 승자가 다 먹기. 완전히 카지노입니다. 올인해서 승자가 다 가져갑니다. 돈 놓고 돈 먹기. 이 세상은 인간 빼고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의 도박판이고 게임판입니다. 그게 욥기에 나와요. 주님께서 욥에 대해서 이 세상에서 욥보다 믿음 좋은 사람 못 봤다고 하니까 마귀가, “욥이 부자고 건강하니까 행복하니까 주를 섬기지 다 빼앗아보세요. 원망할 것입니다.” 그럼 내기해보자. 남의 노름판에 멀쩡한 욥이 날벼락을 받은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욥이 대들었다? 이것은 갑자기 피조물이란 자리를 망각한 겁니다. 어느 날 개가 침대에 올라오고 개가 수박 들고 하면, 이건 그야말로 사건입니다. 개 데리고 보신탕집에 가니까 개가 자기 친구 고기를 먹겠다고 포크 들면 보통 문제가 아니잖아요.
이 세상이 영적으로 구분되지 않고 혼돈돼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가 망하는 길인지 자기를 살리는 길인지 분간도 못하고 들이대요. 남 예수 믿는다고 하면 덩달아 예수 믿고, 십자가 믿는다면 덩달아 십자가 믿고. 온 몸에 어디서 주워왔는지 쓰레기 천지에요. 나중에는 어느 걸 꺼내야 될지 몰라. 왜 그걸 끌어 모으는 줄 알아요? 자기 전쟁한다고.
자기 전쟁을 이름 전쟁이에요. 결국 전쟁은 이름 전쟁이거든요. 누구 이름을 걸고 하느냐? 어떤 사람은 자기 이름, 또 어떤 사람은 그걸 감추는 묘한 방법으로 나의 아버지의 이름으로. 우리 집안은 보통 집안이 아니고 뼈대 있는 집안이라는 식으로 자기 가문을 빛내는. 안중근 의사처럼 조국을 위해서. 또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정계를 은퇴한 경기도지사하신 분. 뭔가 자기 이름을 걸고 하는 전쟁이에요.
이름이 어디서 나오느냐? 그건 몰라요. 이름은 무에서 나왔습니다. 무는 유의 밑바닥을 무라고 이야기하거든요. 철학에서. 그러니까 우리 상식에서는 존재가 있고 그 다음에 존재를 지칭해서 이름을 붙이는데 이게 문제가 돼요.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강아지가 있다면, 오늘부터 나는 너를 강아지로 부르겠다.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이 피조세계의 이름을 부르지요. 너를 강아지로 부르겠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네가 부른 강아지를 지배하라고 돼있어요. 창세기 1장의 구조가 그렇게 돼있어요.
이름을 부르니까 이름을 부를 때는 좋았어요. 인간이 마귀의 수하에, 죄에 지배되고 난 뒤에는 자기가 이름을 불렀다는 이유 때문에 그 강아지는 내 이름을 위한 내 소유가 돼버렸어요. 차지하고 정복하는 것이 내게 귀환, 귀속하는 쪽으로 모든 것을 행동하게 돼있습니다.
그러니까 전쟁이 결국 영적 전쟁이거든요. 주님과 악마의 전쟁인데 악마가 누굴 앞장세웠느냐 하면, 인간을 세웠어요. 인간의 이름이 등장해요. 인간의 이름에 대해서 대응하기 위해서 하나님도 자기 이름을 가지고 이름 있는 곳에 뛰어들어서 한바탕 전쟁을 벌인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찾아와서 제가 누구 이름으로 가오리까 할 때 지금까지는 이름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너에게는 이야기한다. 출애굽기 3장 16절에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다.
여호와란 내가 계획한 것은 반드시 스스로 알아서 이뤄낸다는 겁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고 스스로 사건을 유발시키는 자란 말이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다 나와 관련되어 일어난 사건인 줄 알라는 말입니다. 이제부터 존재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사건으로 다가와서 사건을 앞장세운 이름이냐 아니면 내 존재로 버티고 있는 이름이냐? 그 사건과 존재의 싸움 또는 인간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의 싸움 다른 말로 하면 나의 자존심과 주의 자존심의 싸움, 거기서 패배 당함을 안다면 그 사람은 주님에 의해서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패배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티는 사람은 지옥 가서까지 계속 버텼을 사람이에요.
그래서 정리하면 구원이란 뭐냐 하면, 주님께서 본인 스스로 설정한 그 계획에 모든 것이 말려들어서 순간순간 수시로 모든 상황과 모든 사태 속에서 내 이름이냐, 아니면 내 이름이 아니냐는 그 전쟁의 감을 느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신자에요. 신앙생활이라고 해서 구제하고 하는 게 아니고 이번 일에 대해서 제가 주체입니까, 아니면 주님이 주체입니까? 이렇게 물음이 나오도록 상황이 그렇게 몰려가는 것, 그게 수동적 신앙생활이에요. 신앙생활은 수동적 밖에 없어요. 능동적 신앙생활은 없어요. 왜냐하면 성령이 주관하기 때문에 수동적 신앙생활을 지금 정상적으로 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지금 집사님이 커피를 마시는데 이 커피가 내가 힘주어 마시는 거예요? 주께서 마시게 하는 거냐? 평소에 마실 때는 전혀 못 느껴요. 그런데 마시는데 누가 가져가면 내가 마시려고 하는데 가져가느냐? 갑자기 주체가 내가 돼요. 주께서 마시게 하는데 니가 왜 가져가? 그건 맞아요. 그 순발력을 인위로 조작하면 기계의 숙달로 나왔기 때문에 그것도 가짜입니다. 이게 아주 어려워요. 순간을 포착해서 순간이 지나가면 존재로 바뀌기 때문에.
처음에 교회 나와서 찬양하라 하면 찬양 가락 보고 해요. 누가 음이 잘 맞는지 제 음을 찾아가는지 피아노 반주가 빠르진 않는지 피아노 반주 무시하고 목사가 지 마음대로 찬송을 부르는지 이런 것이 눈에 들어온단 말이죠. 그런데 정작 주님이 주체가 되는 찬양은 사실 따지고 보면 랩밖에 없어요. 결국 늙어서 혀 안 돌아가면 가락 안 맞으면 랩으로 끝나거든요. 시골 할머니들 찬양하는 것 보세요. 완전히 랩입니다. 랩인지 민요인지 판소리인지 분간이 안 되잖아요.
사람이 열심히 소프라노, 알토 다 지키겠다는 그 틈새 속에는 찬양을 통해서도 나의 자존심을 상처 받을 마음이 없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인간이 자기 이름이 있는 이상은 그 이름을 스스로 배신할 짓은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역사란 자기 이름을 사수하는 시간적인 긴 여정이거든요.
그래서 성경에서 복음이란 주의 이름, 주의 이름 배웠지요. 주의 이름은 존재의 이름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으로써 사건을 유발했던 개입하신 그분의 이름이죠. 따라서 주의 이름을 존재로 받으면, 존재의 특징은 존재는 존재를 소유한다고 했지요. “나는 5년 전에 예수 믿었었지.” 뭐예요? 5년 전부터 주님을 갖고 다녔지. 코카콜라입니까? 주님을 갖고 다니게. 주님은 존재가 아니고 사건이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주님한테 지적 받고 있지. 어떤 점에서? 주님은 내 존재의 사수에 대해서 가만두지 않고 늘 간섭하시고 개입하셔서 너는 존재가 아니고 이미 사건에 편입되었어. 모든 사건이 주님의 사건을 증거하는 증거자로서 살아가게 된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복음이 주의 이름이거든요. 복음은 전쟁을 하는 주의 이름이기 때문에 반드시 적군이 있지요. 두 번째 시간에 우리가 원리를 배웠습니다. 하나님이라 할 때 인간의 품위 같은 것은 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전쟁을 유발시켜서 전쟁 노획물과 전리품이 바로 백성이라고 했지요.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이미 에베소서 4장에 나온 이야기이에요. 우리 존재를 지켜주시는 주님은 없어요. 오히려 우리 존재를 난도질해서 경계선으로 사건화 시키는 주님밖에 없는데 사건화 되는 이유가, 사건으로 찾아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필연이 아니고 우연이에요.
반드시 주님은 적군을 유발시킨다 말이죠. 그 적군의 특징이 바로 나의 이름, 나의 존재의 의미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 10장에서는 적이 뭐냐 하면, 비난받지 않겠다는, 비난받기 싫다는 이런 모습들이 주님에 의해서 적군 계열로 분류가 됩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비난받기 싫어하는 쪽으로 행동하게 돼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비난받아도 구원받으면 되잖아.” 하는 게 주님 생각이에요. 네가 창기야, 네가 세리야, 네가 강도야? 그게 무슨 상관있어. 오늘밤에 낙원에 가면 되지.
“주여, 왜 비난받아야 됩니까?” 그건 네 이름을 소유하기 때문에 비난이라는 것을 의식하게 돼있다는 겁니다. 만약에 내 이름이 통째로 주의 이름에 편입돼있다면 예수님을 비난했던 비난이 오게 되면 우리는 오히려 요한복음 15장에 의해서 세상이 너를 미워하거든 도리어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마태복음 팔복에 뭐라고 돼있습니까? 마지막에 나와 내 복음을 위해서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다. 옛날 선지자들도 욕 얻어먹었느니라. 오히려 욕 얻어먹고는 로또 당첨된 줄 알라, 복 받은 줄 알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마태복음에서 나온 그 내용이 보편화 된 것이 사도 바울의 로마서 복음입니다. 거기에 보면 사람들은(유대인들) 자기 의를 추구하다 보니까 하나님의 의를 힘써 거부하고 자기 의만 챙긴다. 자기 의가 뭐냐 하면, 나는 어떤 식으로든 비난받기 싫다는 모습이죠. 비난받기 싫다면 그 사람이 하는 전쟁은 오직 자기 이름을 유지하는 전쟁 외에는 다른 전쟁으로 간주하지 않을 겁니다.
무엇이 진리냐? 관심 없어요. 내 마음이, 영혼이 안 다치는 그것이 내 편이고 다치게 하면 적이 돼요. 각자 나름대로 적이 따로 있습니다. 이건 주의 전쟁이 아니고 자기 자존심의 전쟁, 자기 이름의 전쟁이 되고 마는 겁니다. 왜 이 시점에서 이런 이야기가 중요하냐 하면, 하나님께서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을 끄집어냈잖아요. 이때 이스라엘이 오해한 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편이지 이스라엘 편은 아니거든요. 지금 말장난도 아니고 여러분을 모독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원통을 두 개 그립시다. 주님께서는 속에 있는 이스라엘을 위함이 아니고 겉에 있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생각하는 아들(하나님의 아들=이스라엘), 이스라엘 속에 기존의 이스라엘을 담아서 이것들이 나중에 겉에 있는 진짜 하나님과 함께 있는 이스라엘을 어떻게 공격하고 어떻게 적으로 행세하는가를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보게 하는 겁니다. 결국 안쪽의 이스라엘이 망하고 겉의 이스라엘이 등장하게 되면 온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는 게 로마서 11장 25절에 나와 있잖아요. 이스라엘이 둘로 되는 거예요. 이게 문자의 특징이에요.
이런 현상들이 현재 자본주의사회에도 있어요. 동전이 녹슬면 돈입니까, 돈이 아닙니까? 동전이 녹슬어도 돈이에요. 약간 녹슬어도 은행에서 바꿔줍니다. 옛날 돈은 그 돈의 가치가 자체적으로 품고 있어요. 금화 자체의 무게로 결정되게 돼있단 말이죠. 그런데 자본주의가 금융자본주의가 되면서 돈을 빌려주면서 시간 따라서 이자 받으면서 돈의 가치가 늘어나는 그런 시장이 형성되니까 그 다음부터는 돈도 그렇고 모든 물건도 그렇고 사용하는 가치는 이건 가치도 아니고 바꾸는 교환가치로 대신하고 말았어요.
그렇게 되면 동전의 가치는 따로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유령이에요. 결국 자본주의사회는 유령입니다. 유령이 떠돌고 있습니다. 이유도 없이 무조건 돈을 가져야 돼요. 물건을 가지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이제는 어느 것도 살 수 있는 돈을 가지는 시대가 된 거예요. 그리고 그 유령은 지금도 계속 떠돌고 있어요. 왜 삽니까? 돈 유령 때문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왜 공부해야 됩니까? 유령 때문에. 무슨 유령? 돈.
그 물체마저 포착되지 않는 물체의 사물 어떤 형상으로도 포착되지 않는 여분의 남아도는 뭔가 있어요. 그래서 현대철학은 자본주의사회를 정신병자라고 합니다. 정신분열증. 이유도 모르고 목적도 모르고 무조건 돈 벌기에 나서는, 그것 모아서 뭘 할 건데 하면, 돈 버는 자체가 취미라고 나오거든요. 사업하는 사람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아니에요. 돈 버는 자체가 취미에요. 이 말은 사업하는 사람이나 화투 치는 사람은 둘 다 똑같아요. 전부 도박하는 사람들입니다. 돈 따는 그 재미에 자기의 가치를 결부시켜서 돈 딸 때마다 “거봐. 나 가치 있잖아. 비난하지 마.” 이런 식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인간에게 닦달 낼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갑자기 인간이 죄인이 아니라는 뜻인데^^ 인간은 죄인이 아니고 예수님이 죄인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만 버림받았기 때문에. 모든 개념은 반드시 십자가를 경유해야 돼요. 만약에 인간이 죄인이라면 윤리적 영웅으로 바뀝니다. 대표적 윤리적 영웅은 가룟 유다지요. 자기 스승 팔았다고 양심에 가책이 되어서 자살한 사람, 자살해서 뭘 얻겠다는 겁니까? 아직도 나에게는 선한 것이 있음을 장렬하게 보여줬잖아요. 주님 증거했습니까, 자기 증거했습니까? 자기 잘남을 증거했잖아요. 그게 전쟁이라니까.
주님이 벌인 전쟁이 그 전쟁하는 거예요. 나한테 돈 바치라고 하는 선교, 전도하는 전쟁이 아니고 매 순간에 도대체 나는 왜 이 일을 해야만 하는가를 내 쪽에서 찾지 않는 전쟁. 그리고 나의 행동의 어떤 정당성도 내가 정당성을 갖출 필요도 없는 전쟁이라는 걸 알란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 정당성, 우리가 정당하기 때문에 구원받는, 우리가 의롭기 때문에 구원받는 그 모든 근거를 네가 만들지 말라는 거예요. “착해서 구원받나?” “구원받습니다.” “어떻게?” “전도하고 선교했습니다.” 그건 내가 만들어야지 왜 네가 만드는데.
그러니까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의 행함과 믿음은 자기 행동한 것을 자기가 믿기 때문에 자기 행동에서 믿음이 바깥으로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빠져나오는 경우는 자기 행동에 대해서 본인이 꼴보기 싫을 때. 어느 정도로? 자기가 있다는 것이 싫어지고 미워질 그 때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을 손을 놓겠지요. 그래서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자기 목숨을 잃고자 하는 자는 얻을 것이요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다. 마태복음 16장에도 같은 말씀이 나오거든요. 그 말씀 있어요.
그러니까 제 말은 어떤 뜻이냐 하면, 교회 문 열 때 “주여, 오늘도 미워하게 하옵소서.” 그런 마음으로 예배 참석하시느냐 그걸 묻는 거예요. “주여, 오늘도 끌려왔습니다. 오늘도 마음껏 나를 미워하게 하옵소서. 하지만 미워했다는 그것이 나의 자랑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본인이 얼마나 복잡한지. 차라리 그렇게 복잡하게 하지 마시고 그냥 사세요.
복잡한 마음을 잘 정돈하게 되면 그것은 구원받는 근거를 본인이 또 만든 게 돼요. 만들지 마세요. 만들지 마시고 여러분께 두세요. 주님께선 근거는 가져가시고 나는 두시고. 완전히 성령에 취해서 온 사람 같아. 저쪽은 만들어서 주시고 우리는 내가 새삼 만들 필요가 없음을 알아주시고 주님께서는 구원의 근거를 이미 십자가로 용서해주시고 우린 내 것 만들 필요가 없으시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전리품이고 노획물입니다. 우리 전쟁 아닙니다. 김의 전쟁도 아니고 비의 전쟁도 아니에요. 우리 이름을 걸고 하는 전쟁은 아닙니다. 그 전쟁터에 말려들었습니다. 창세기 3장의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입니다. 지난번 강의에서 여자의 후손에서 여자는 없다고 했지요. 그 여자가 마리아가 아니라고 했지요. 모든 사람은 남자 투성이기 때문에 여자의 후손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마리아는 성령이 임할 때 여자의 후손 역할을 해야 됩니다. 그것은 마리아만 여자의 후손이 아니란 말이에요. 성령 받은 모든 사람은 여자가 되면서 예수님이 남편이 되는 겁니다. 그 상황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없던 것이 새로 생길 때는 주체가 우리가 만들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뭐냐? 내가 만들지 않은 운명에 의해서 우리가 편입되었음을 우리가 자각하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내가 만든 인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자기 계획 속에 집어넣었다는 걸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 다음 이야기해봅시다. 전쟁 이야기했고 전리품 이야기했습니다. 그게 출애굽기 15장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창세기부터 시작됐지 출애굽기부터 시작된 게 아닌데 왜 불쑥 출애굽기 15장부터 이야기하느냐고 물으신다면, 원래 강의가 출애굽기에요. 그렇다면 그전에는 뭐가 있느냐? 그전에는 찾아오신 하나님이 스스로 이야기하기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했거든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의 특징이 뭐냐 하면, 바로 언약입니다.
그러면 전쟁이란 테마가 어디서 나왔는가? 언약 속에 포함돼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언약 속에 포함된 내용이 전쟁이라면 언약 자체가 적을 의식하고 주어진 것인가? 그렇습니다. 그 적이 뱀의 후손이에요. 모세가 들고 있는 지팡이를 던지니까, 모세가 지팡이 왜 들고 가는지 알아요? 모세가 원래 사십에 현상수배범 되고 팔십에 부름 받았어요. 모세가 허리가 아파서 지팡이 들고 가는 건 아니란 말이죠. 자기가 지팡이를 쥐고 있으면 이건 모세의 전쟁이에요. 모세의 전쟁은 출애굽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주의 이름의 전쟁이 되려면 모세부터 주님께 붙잡힌바 된 관계를 자기의 몸을 통해서 이미 갖추어져 있어야 되거든요.
모세에게 지팡이를 던지라고 했어요. 던지니까 뱀이 되고 말았어요. 모세가 지팡이를 소지했습니까? 소지한 게 아니에요. 소지했다면 모세도 존재고 지팡이도 모세 존재의 일부로 포획돼버려요. 존재가 돼버려요. 뱀이 된 걸 다시 집으라고 하니까 도로 지팡이가 됐단 말이죠. 그럼 모세 자체가 존재가 아니고 사건에 말려든 거예요. 무슨 사건? 주께서 전쟁을 하기 위해서 전 세계의 모든 것을 뱀이냐, 아니면 주의 편이냐를 재편성시키기 위해서.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평지를 전쟁의 배치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모세란 돌멩이 하나 집어던진 거예요. 그러면 파장이 퍼지면서 모든 역사가 전쟁 하나를 위해서 휘말려가는 전쟁이 될 겁니다. 거기에 자연현상까지 메뚜기, 독충, 해와 달, 별조차 모든 것도 여호와 전쟁을 보여주기 위한 배치물로 재조정되고 사건화 될 것입니다.
다윗은 사무엘하 22장에서 장차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하늘의 별도 떨어지거든요. 주님이 재림할 때 하늘의 별이 떨어진다. 이게 뭐냐 하면, 우리가 보는 자연이 붙박이처럼 있는 게 아니고 자연세계가 다른 구심점이 되기 위해서 같이 말려든 거예요. 관계구조 속에서.
신천지에서 잘 써먹는 요한계시록 보세요. 하늘에서 우르르 다 쏟아지잖아요. 쏟아지는 걸 너무 걱정하지 말고 어디를 향하여 쏟아지고 있느냐, 누가 쏟아지게 하느냐? 쏟아지는 게 아깝다면 그건 아직까지 존재에 박혀있는 거예요. “별아, 떨어지면 안 돼. 내 머리 다치면 안 되거든요. 저리 가 있어. 이건 네 존재는 네 존재로 챙기고 그 대신 내 존재는 건드리지 마.” 이게 존재적인 입장인데 같이 사건화에 걸려든 거예요.
별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별은 그 자리에서 활동하도록 주께서 지금도 활동하고 계시는 겁니다. 발걸음도 세시고 머리카락도 세시고. 참새가 떨어지는 것도 주님의 사건의 일부로서, 연로하신 참새들은 살만큼 살다가 죽거든요. 들풀도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때까지 기르시고 우리는 그 나라와 그 의를 바라보게 하시고 모든 만물은 주로 말미암아 주를 위하여 창조된 거예요. 골로새서 1장 16절처럼.
여기에 인간의 존엄성, 나의 인격, 그런 아이디어가 왜 거기에 들어갑니까? 이런 아이디어는 네 존재가 잘났어, 내 존재가 잘났어? 우리가 지옥 같은 세상에서 어릴 때부터 아주 훌륭한 부모 밑에서 양육 받은 대가가 우리 몸에 익숙해지고 맞아서 그런 겁니다. 그게 바로 애굽이에요. 우린 이제 콧물 흘려야 됩니다. 콧물 흘려서 내가 얼마나 잘났나가 아니라 내 속에 이런 괴물이 들어있다는 걸 뽑아내야 돼요. 그래서 절대로 출애굽하면서 모세 편에 서지 마세요. 애굽의 바로 왕 편에 서게 되면 출애굽 전부 다 이해됩니다. 괜히 모세 편에 서지 마세요. 어딜 함부로 섭니까. 모세는 우리와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러워요.
모세가 애굽에 나타났을 때 누가 반대한 줄 알아요? 히브리인들이 반대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철야했겠지요. “하나님이여, 저 인간들 찾아오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사람 잘못 보냈다는 이 말이에요. 우리가 원하는 당회장이 아니란 이런 뜻이란 말이죠. 하나님께서 당신들을 벌 내리기를 바랍니다. 이편에 섰는데요? 그러면 출애굽 이해됩니다. 왜냐하면 출애굽 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실은 우리한테는 없기 때문에 빨리 끝내고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home again cross the sea 오늘 하나 배웠어요.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1975년에 로드 스튜어트가 불렀던 [Sailing] 나는 항해자 나는 항해자 험한 세상 당신이 있는 자유 찾아 가겠다는 그 의식, 그게 어딘데? 내 이름이 있는 곳, 내 이름이 만들어진 곳, 그래서 영원히 빛나야 될 내 이름이 존경받고 오히려 비난받는 것을 우리 부모, 형제, 처자식이 나를 보호해주는 그 행복의 자리, 거기서 탈출을 해요? 미쳤어요. 그 좋은 걸 왜 버려요. 절대로 우리는 탈출할 마음 전혀 없습니다.
정리합시다. 우리 신앙, 없습니다. 우리가 탈출할 마음, 없습니다. 주님 혼자 가라고 하세요. 우리는 이 땅에서 자식 키우고 딸 시집보내고 가더라도 늙으면 가야지. 우리는 갈 마음 없습니다. 우리는 그 대신 종교생활해서 아는 사람끼리 놀러가고 낚시하러 가고 가을에 전어 먹으러 가고 그런 것만 하지. 여전도회에서 돈 모아서 일본에 온천가는 그런 것이나 좋아하지 우리는 노는 것 외에는. 우리가 비난받지 않는 조건 하에서만 그에 맞는 하나님만 섬길 요량이 돼있습니다. 신은 바로 나의 이미지고, 나의 자존심이고. 왜? 내가 믿기 때문에. 너무나 착한 내가 남들 안 믿는 하나님을 믿어주기 때문에 얼마나 위대한 줄 몰라요. 우리는 그것부터 출애굽의 시작된 지점인 것을 우리가 수용합시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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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2014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2강.hwp (51.0K), Down: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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