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출애굽기 1강(하나님의 개입-낯선 경계선-존재에서 사건으로)

아빠와 함께 2014. 8. 13. 18:18

2014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1

(강의:이근호 목사)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시작하지 않는 일이 되게 해주시고 마무리도 주로 마무리되는 그런 말씀의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애굽기는 글자 그대로 애굽에서 떠나는 기록이거든요. 떠나는데 있어서 반대파가 있었습니다. 적이 있는데 적은 애굽이라고 성경에는 나와 있습니다. 지금은 실제적인 애굽은 없습니다만 옛날에는 있었지요. 애굽이란 나라가 있었던 이유가 이스라엘이 있기 때문에 단짝을 이루려고 애굽이 있습니다. 한쪽이 사라지면 저쪽도 사라지지요. 이스라엘이 사라지면 애굽고 사라지고. 애굽이 있다는 말은 반대쪽에 그림자로 이스라엘이 있다는 말이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이번에 수련회에서 옛날 출애굽이 성경에 나와 있기 때문에 출애굽의 정신은 무엇이며 지금은 출애굽의 정신을 어디에 적용할 수 있는가? 대략 그런 쪽으로 정리하시면 되는 겁니다.

 

애굽이란 나라에서 이스라엘이 나오면서 애굽과 이스라엘로 분리됩니다. 이것이 출애굽 정신, 출애굽 사상, 출애굽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이 옛날이야기잖아요. B.C.1400년경인 옛날이야기를 알아야 되는 이유는, 그 출애굽 정신에서 메시아가 오셨거든요. 메시아는 출애굽 정신으로 실시한다. 또는 적용한다는 등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메시아, 예수님은 출애굽 사상으로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는 말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느냐고 물어야 되지요. 예수님은 출애굽으로 하더라. 예수님이 출애굽한다면, 옛날에는 애굽이 있었고 이스라엘이 있었는데 지금은 예수님이 개입하셔서 애굽과 이스라엘이 구분된다면 지금의 애굽은 누구며, 지금의 이스라엘은 누구인지 그것까지 제시되어야 되죠.

 

그냥 예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한국말로 예수고 영어로는 ‘JESUS’라 하고 그러면 어느 쪽을 따라야 합니까? 어떤 문자나 기호를 암기한다고 해서 거기서 구원의 능력이 나오는 건 아닙니다. 오늘 아침에도 그런 설교 했습니다만 암기한다든지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바로 기계가 하는 짓이거든요. 부속품이 있는 기계. 인간은 60조개의 세포가 있고 세포마다 dna가 있고 그 dna를 디옥시리보핵산이라고 보통 학교에서 배우거든요. 그게 기계란 말이에요. 기계를 쪼개보면 역시 그 안에 기계가 있고 더 쪼개면 거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기계가 있는 에너지 장으로 넘어가지요. 양자물리학으로 넘어가면 그렇게 된단 말이죠. 그러니까 양자물리학이고 화학이고 간에 퉁 쳐서 이야기하게 되면 기계입니다. 기계란 원인과 결과, 외부에서 자극을 주면 반드시 반응을 나타나게 돼있는 자동화과정을 거치게 돼있어요.

 

그래서 암기한다든지 교육을 한다는 것은 정확한 결론을 유발하기 위해서 사람을 기계처럼 다루는 식으로 세상은 양육되는 겁니다. 그것이 일종에 애굽이라 할 수 있고 애굽에 있던 히브리인들도 하나에 일하는 기계였습니다. 멈포드라는 사회학자는 말하기를, 옛날에는 기계가 사람을 대신했을 뿐이다. 지금에 노동자는 고대사회에서처럼 일하는 기계에 불과하다. 그럼 더 나아가서 일을 부리는 자본가는 기계 아닌가? 그것도 마찬가지로 기계다. 결국 남는 것은 매트릭스, 정보와 기계로 구성돼있는 세상, 그 세상의 특징은 탈출할 길이 없다는 것. 탈출할 길이 없다면 탈출 안 하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속 편하게 살다가 지옥 가는 거지요. 안 하면 되니까, 출애굽을 몰라도 되니까.

 

그래서 출애굽은 굉장히 억지스럽고 부자연스러운 겁니다. 기계한테는. 기계에 고향이 있습니까? 기계의 고향은 공장이지요. 애굽에서 애굽을 낳았고 아담이 자손을 낳은 거예요. 기계가 기계를 낳은 겁니다. 무슨 고향이 있습니까. 복제만 있을 뿐이지요. 제조만 있을 뿐이지 어떤 고향은 없어요.

 

여러분, 지금 출애굽 보면서 이상하지 않습니까? 모세가 와서 가자. 히브리인들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어디로?” 몰라? 이게 무슨 말이에요.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애굽에 있던 히브리인들은 탈출을 원했던 게 아니고 정권교체를 원했던 겁니다. 너무 압제를 받으니까 같은 백성으로 이주민 취급받지 않고 토박이들과 동등한 대우해달라. 이걸 요구했지 여기서 나가자. 나가긴 어딜 나갑니까? 여기가 전부인데 나갈 필요도 없지요. 나갈 필요 없는 그들에게 나가자고 하니까 모세가 대단히 수상히 보였던 겁니다. “, 어느 별에서 왔어?” 모세가 도민준입니까?

 

지금 출애굽 자체가 이건 종교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종교의 목적은 행복에 있지 탈출에 있는 게 아니거든요. 행복하자면 종교생활하면 돼요. 그러나 탈출해야 되겠네. 탈출하겠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탈출은 어떤 경우에 해당되느냐 하면, 어디 다른데 갔었는데 갔다가 와보니까 재미없어서 왔던 대로 가자. 이미 탈출해야 될 지역이 입력돼있다면 그때나 탈출이란 말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가본 곳도 없는데 나가자. 어디로? 몰라. 그럼 그 자리에 있게 되는 거예요.

 

여기서 정리해봅시다. 출애굽은 없습니다. 출애굽 자체가 인간에겐 없어요. 성경에 있잖아요. 성경에 있어봐야 기계가 성경을 모방할 뿐이에요. 성경에 나오는 모든 용어들, 교재에 보면 언어의 병기창이라고 했는데 병기창에 보면 무기들이 나오잖아요. 막 쏟아진다고. , , 활 등이 있잖아요.

 

사람들은 이 땅에서 행복하기 위해서 인간의 상상력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성경의 용어들을 다 차용합니다. 십자가, 언약, 예수, 메시아, 율법, 로마서, 하나님의 의, 십일조, 안식일, 십계명, 온갖 것 다 끌어 모아서 행복하자. 이렇게 나옵니다. 탈출하자가 아닙니다. 다시 이야기해서 탈출하려면 탈출할 장소를 미리 가본 사람에게나 여기보다 그쪽이 낫다고 할 수 있는데 가본 적도 없는데 무슨 탈출이 됩니까?

 

죽어서 천국 가자고요? 그런 사람에게 묻고 싶어요. 죽어 봤어요? 어디서 상상의 신화의 세계를 펼칩니까? 죽어봤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 말고 실제로 죽어서 갔던 천국을 봤느냐 말이죠. 19세기에 스웨덴의 스베덴보리라는 이상한 신비주의자가 있어요. 요새 그 사람 책도 나오는데, 펜시콜라나 그런 사람들 같으면 그런 구라도 되는데

 

어쨌든 출애굽 자체는 우리의 숙제도 아니고 특히 우리의 관심사도 아닙니다. 우리는 출애굽 의사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나의 자유를 훼방하지 않고 마음껏 성깔대로 살게 해주는 보장된 국가체제, 공동체체제. 결국 그것은 우리의 행복을 추구할 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현대철학까지 이구동성의 외치는 것은 뭐냐 하면, 착하게 살아야 된다. ? 그래야 행복하니까. 이게 칸트의 이야기에요. 소통해야 된다. ? 행복해야 되니까.

 

행복해야 된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깔아버려요. 이랬든 저랬든 행복하지 않다는 겁니다. 행복하지 않으니까 교회에서 하는 말이, “지금 행복하지 않지요. 조금만 참으세요. 주님 재림하시면 행복해질 겁니다.” 주님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려고 오시는 분입니까?

 

맨날 골프에서 지는 사람에게 메시아는 어떤 메시아에요? 한번쯤은 큰 내기에서 이길 수 있도록 행복을 보장하는 메시아에요. 쌍꺼풀 없어서 수술했는데 마음에 안 들 때 그때 주님은 어떤 주님입니까? 어느 밤에 쌍꺼풀 천사가 와서 박아주는 그런 예수에요. 그러니까 행복의 조건이 다 다르기 때문에 열 사람이면 열 사람의 예수가 다 다릅니다. 메시아가 다 달라요. 교회마다 다 달라요. 지금 구원파의 행복은 뭐냐 하면, 재산 손해 입지 않는 거예요. 기계가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이 정말 이상스럽습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했듯이 출애굽의 모든 기획안, 그리고 거기에 대한 모든 아이디어는 히브리인들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아이디어는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출애굽 정신으로 왔다면 그 예수님은 와도 사람들이 못 알아보는 것은 당연한 거예요. 알아볼 수 없습니다. 알아볼 수 없기 때문에 못 알아먹는 예수 대신에 알아 먹히는 예수를 교회에서 생산하고 상품화해서 사업적으로 판매하면 되는 거예요. 예수는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줄 겁니다. 그 구호만으로 충분하거든요.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에서 하는 말이, “나는 떠나고 싶다.” 이거거든요. 그러면 사도 바울이 여기 섰다면 뭐라고 합니까? “여러분, 예수 믿고 떠납시다.” 그러면 여러분은 딸 시집가야 되고, 방금 무사히 제대해서 뒷바라지해야 되는데 떠나긴 뭘 떠나요. 혹시 여기 팔십 이상 되신 분 있습니까? 치매 걸리기 전에 떠나면 괜찮아요. 그러나 아직 치매 안 걸렸잖아요. 왜 떠나요. 할 일이 많은데. 그 이야기는 뭐냐 하면, “예수님 저리 가세요.” 그 말 외에는 다른 말이 아닙니다.

 

이쯤해서 정리해봅시다. 한 것도 없는데 정리는 해봅시다. 출애굽은 뭐냐? 두 가지에요. 하나님의 개입과 하나님의 개입이 없음. 있음과 없음, 그겁니다. . 이번 수련회 끝났습니다. 출애굽의 아이디어는 절대로 인간들의 생각이 아닙니다. 인간들의 생각은 자기 존재의 행복이에요. 마아슬로우의 욕구설에 의하면, 인간은 나로 인하여 행복하면 최상의 욕구입니다. 불교에서는 해탈이라고 하는데 나, 여기 있음 자체로 충분하다는 거예요. 돈도 필요 없고, 권력도 필요 없고, 출세도 필요 없고 나, 여기 있음 그 자체로 계속해서 우려먹을 정도로 행복하다면 그것이 바로 해탈의 상태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개입의 없을 경우에 그렇단 말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개입이 있다면 그 행복 뚝, 그 행복 쓰레기통에 집어넣어. 왜 집어넣어야 됩니까? 너는 행복할 권리가 애초부터 없다는 것을 치밀하게 보여주면서 주님 있는 곳에 데려가겠다. 그러면 백성들이, “그럼 주님 따라가면 행복합니까?” 방금 내가 조건을 달았잖아. 행복할 권한이 없다고. 그러면 우리가 따라갈 목적과 동기가 없잖아요. 따라갈 만한 의지가 동하도록 뭔가 고생한 보상이 있다는 그런 유인책이 없는 거지요. 그럼 왜 불러냅니까? 하나님이 하는 계획에 대해 무작정 말려드는 그것으로 끝이에요. 주가 주 되심에 의해서 피조물은 군말하지 말고 피조물은 피조물 자체를 위한 피조물일 수 없고 창조하신 분에 의해서 우리는 질질 끌려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처음에 히브리인들이 나올 때는 자기는 애굽을 떠났다고 생각한 거예요. 지금은 안 그렇습니다만 옛날 국민학교 입학식 할 때 아동들의 가슴에 수건 하나 늘어져있지요. 그때는 콧물이 왜 그리 많이 나던지 콧물이 나오면 닦으라는 거예요. 콧물이 떨어질 듯 말 듯 하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애간장을 타게 만들어요. 지금 히브리인들은 애굽에서 떨어진 게 아니고 애굽의 캡슐 안에서 흘러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애굽은 껍데기도 애굽, 속 내용도 애굽이지만 이스라엘은 껍데기는 벗겨졌는데 알맹이는 오히려 애굽적 요소로 노출된 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광야로 가는 겁니다.

 

주님이 구원 이야기를 해도 인간은 기계기 때문에 구원을 자기 행복을 위한 조건으로 전부 왜곡해서 차용하기 때문에 그들의 말하는 구원, 여호와, 하나님, 어떤 기적, 그 모든 개념은 쓸데없는 자기 합리화에 불과합니다. 어쨌든 제가 말하는 것은 모른다는 이야기에요. 몰라야 되고 모른다는 겁니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 거예요. 납치된 겁니다. 하나님 앞에 무조건 납치된 거예요.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아무 이유도 모르고.

 

그래서 그들은 누가 부러웠냐 하면, 차라리 떠나기 전에 살던 옆집에 있던 애굽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워요. 걸핏하면 애굽으로 돌아가자. 거기는 부추도 있고, 마늘도 있고, 양념이 잘 된 모양이에요. 그리고 정력에 좋다는 것은 다 있고. 거기다 수박 있잖아요. 수박 좋다는 것은 여러분 다 아시죠. 요샌 전 국민이 건강매니저가 되어서 하여튼 해독주스부터 해서 모르는 게 없으니까. 좋은 것은 애굽에 다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 몸은 어디에 맞춰져 있느냐 하면 애굽의 건강식품에 맞춰있는 겁니다. 우리는 애굽에서 뭘 익히느냐 하면, 인간이 살려면 이런저런 조건은 갖추고 살 때 행복하다는 그 구비조건을 이미 온 몸에다 짊어지고 온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그것과 의도적으로 어긋나게 거기에 부합되지 않도록 하는 겁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우리 괜히 나왔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모세 일파 죽이고 돌아가자. 우리의 행복이 있는 곳은 그곳밖에 없다.” 세상적인 행복이 콧물처럼 늘어져서 그들은 지금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출애굽이란 어색하기 짝이 없는 하나님의 억지가 욕 얻어먹는 기행문이 출애굽기입니다. 그러면 억지스런 일은 안 하겠습니다. 하면 안 되지요. 왜냐하면 오실 메시아, 예수님께서 출애굽 정신을 품고 작용하실 때 그게 참된 진짜 메시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행복에는 관심 없고 그냥 손목 비틀어서 가자고 하면서 그리고 가기는 가되 이런 꼴로는 천국 가면 못 사니까 천국에 맞는 삶으로 바꾸어서 그렇게 하자고 끌고나간 겁니다.

 

알기 쉬운 예로 아침에 예를 들었는데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0장에서 천국은 이와 같으니, 어떤 사람이 포도농사를 짓는데 일꾼이 모자라서 놀고 있는 사람을 아침 10, 12, 오후 3, 5시에 불렀다. 조건은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 주겠다고 데려왔습니다. 나중에 주인이 품삯 계산하면서 5시에 온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줬습니다. 그 사람은 한 시간 일했어요. 아침에 온 사람은 여덟 시간 일했어요. 그러니까 제일 늦게 온 사람이 한 데나리온이니까 아침에 온 사람은 여덟 시간 일했으니까 8데나리온 얻겠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처음에 온 사람까지 한 데나리온을 줬습니다.

 

세상에서는 불합리하다, 말도 안 된다고 하겠지만 주님 생각은, 너희들이 원하는, 너희들의 합리는 뭐냐? 노동시간에 따라서 보수가 비례해야 된다. 두 시간하면 두 시간만큼, 네 시간하면 네 시간만큼. 이미 그것을 주께서 익히 아시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천국은 이와 같으니. 바로 천국과 그리고 이 세상이 근본적으로 어디서 차이 나는지 보라. 내가 노동한 만큼 나한테 보상이 주어진다는 그 생각 자체에서 죽어도 못 벗어난다. 탈출, 어림도 없다는 거예요. ? 노동시간과 비례해서 보수 받는 것은 그들 나름대로 이미 구축되어 있는 진리이기 때문에. 너무나 상식적이기 때문에. 노는 인간이나 일하는 인간이나 똑같이 품삯을 준다는 것은 너무 불합리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걸 아시고 천국의 원리가 얼마나 너희들 생각과 차이 나는지를 보게 하십니다. 차이 나는 정도가 아니라 배척당할 정도로 낯선 원리를 집어넣습니다. 이번 수련회의 제목이 [낯선 경계선]입니다. 낯설다는 말은 천국은 기계 같은 인간이 아무리 상상해도 정말 우리의 생각한 그 외의 요소로서 낯선이란 표현을 했고, 그 다음에 왜 경계선이라 했느냐 하면, 경계선이란 말은 우리말로 금을 긋는다.

 

이 교재를 읽어보셨습니까? 처음에 존재의 바다부터 해서 무슨 소린지 지만 알지 알아듣지 못하는 글들을. 그리고 이걸 하나하나 한다는 것은 끔찍스럽지요. 이것 하나도 안 합니다. 존재의 바다에서는 어떤 사건도 하나의 과정으로서 끝나는 거예요. 사건이란 것이 지나가면 없다는 것이 존재의 바다의 특징이라는 것을 설명합니다. 존재의 바다에서는 경계선도 없고 금도 없어요. 금이라 하는 것은 식스팩 거기나 있지 실제로는 나중에 밥 많이 먹으면 그 마저도 다 지워지잖아요.

 

존재의 바다에서는 존재가 우선이기 때문에 존재와 존재를 그어놓는 그 경계선도 일시적이에요. 사건이라고요? 이순신 장군이 있다는 말은 잘못된 말이에요. 이순신 장군이란 존재는 이 땅에 있었었다. 그 말은 지금은 없다는 말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일으킨 해전 사건도 지금은 존재가 되어 없어요. 이순신 장군의 사건은 지금 [명량]이란 영화로 사건화 돼있지 명량 가면 일본군 나옵니까? 그냥 영화지요. 영화 보고 나면 우리는 다시 존재로 가볍게 돌아옵니다. 남자 보기에는 재미있는데 여자가 보기는 재미 하나도 없더라. 이런 소문 막 들리고. 저는 안 봤습니다만.

 

경계선은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 있더라도 세월이 약이라고 지나가게 되면 다 묻힙니다. 그 배 이름을 얼마나 잘 지었어요. 세월호. 혹시 우리가 컨테이너 많이 실어서 물에 빠지더라도 국민 여러분, 잊어주세요. 세월에 묻히고 팽목항 앞에 묻혀버려요. 남는 것은 사람의 존재의 일부로 남아있는 기억뿐이지 지금은 태풍으로 넘실거리고 이미 사건은 지나가고 사건이 남긴 잔해만 있는데, 무슨 일 있었어요?

 

만약에 물에 빠진 그 사건 있을 때 강원도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 나서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칩시다. 그리고 어제 깨어낫다고 칩시다. 그 사람이 바다에 가면 뭐가 있겠어요? “, 바다다.” 끝이에요. 기억나지 않으니까. 사람은 기계기 때문에 노쇠합니다. 노쇠하게 되면 충격 준 부속품 하나를 떼어내면 그 충격의 사건은 날아가고 남는 것은 존재밖에 남지 않아요.

 

그래서 세상의 학문들, 과학, 철학, 의학 등 모든 학문들은 존재의 바다에서 살만큼 살다가, 멋있게 살다가 그냥 사라지면 여러분은 그걸로 족합니다. 행복합니다. 그렇게 가르쳐요. 눈에 보이는 존재가 우선이기 때문에. 살 때는 멋있게 살다가 죽을 때는 그냥 죽어버리면 그것이 세상을 초월한 사나이로서 멋있는 인생입니다. . 그게 전부에요. 프랭크 시내트라가 불렀던 [My Way]에서 마지막 커튼이 쳐지는 날, 나는 살만큼 살고 제대로 살았다고 그 내용이 거기에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존재의 바다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사건, 특히 십자가 이야기할 때 불교 쪽에선 한심스럽기 짝이 없지요. 이순신 장군의 1592년 임진왜란이나 B.C.30년경의 십자가 사건이나 그것도 역사 중에 한 사건으로 흘러가면 다 사라지는데 왜 자꾸 그걸 들먹이느냐? 제가 들먹였습니까? 사도 바울이 들먹였지. 사도 바울이 들먹였습니까? 예수님이 들먹인 거예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기와 같은 존재인 줄 알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란 존재는 죽으면 사라지고 주님도 나와 같은 존재기 때문에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주께서 다시 부활하셨단 말이죠. 그들은 부활 소식을 듣고 뭐라고 생각했느냐 하면, 내 존재가 길게 늘어질 수 있구나, 안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존재에서 사건으로 이동해요. 사건으로 이동할 때는 반드시 치러야 될 절차가 있습니다. 죽음이에요. 그러면 죽으면 천당 갑니까? 우리가 죽는 죽음은 존재의 연장에서 존재가 사라지면서 죽음이기 때문에 그 죽는다는 것도 존재가 없는(무존재), 어쨌든 죽음이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내가 없는 상태를 죽음이라고 표현하거든요.

 

사람이 괴로울 때 뭐라고 합니까? 이 괴로움을 잊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뼈 보세요. 신경조직도 없지요. 세상에 그렇게 편한 게 어디 있어요. 사람은 기껏 생각하는 게 존재에서 나왔기 때문에 죽음도 존재의 일부로 거둬주는 거예요. 그래서 죽어도 못 가요. 베드로가 주님 가시는 곳에 죽어서 가겠습니다. 너는 죽어도 못 와. 죽어도 안 되는 거예요.

 

사건이 적용된 그 죽음만이 사건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건과 존재의 차이점은, 사건은 존재에 포착되지 않고 존재의 손아귀에 쥐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불쑥불쑥, 그걸 우연. 우연의 반대말은 필연. 필연이란 말은 존재에서는 이 세상에서는 원인과 결과, 이것밖에 없어요. 그런데 우연은 그야말로 예상치도 못하게 내 존재를 차고 들어와서 개입해서,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출애굽은 개입이라고. 사건으로 개입하면 나는 예상 못했다는 그것이 약점으로 등장해요. 하나에 실패로 등장한다니까. 내가 실패될 수 있다.

 

이 사건을 예상 못했다는 것은 전부를 알지 못한다는 뜻인데 전부를 알지 못하면서 행복을 논한다는 것은 뭔가 미흡한 것은 남겨놓고 나머지로 행복을 추구했기 때문에 이것은 항상 오류가 될 수 있고 뭔가 모순이 쳐들어오게 되면 순간적으로 완전히 헛 살아온 것이 될 가능성이 농후해요. ? 세상의 전부를 모르기 때문에.

 

욥이 그런 사람이었잖아요. “하나님이여, 왜 아무 죄도 없는 나한테 고난을 주십니까?” 하나님의 답변은, “나귀 낳을 때 너 있었나?” 갑자기 나귀 임신 문제에 대해서 거론하고 있습니다. 지금 욥은, “왜 제가 아파야 됩니까? 죄도 없는데.” 이러고 있는데, “네가 염소 새끼 낳을 때 있었나?” 산후조리원입니까? 여기서 염소 새끼 이야기를 왜 해요. “별 자리 정할 때 네가 있었나?” 왜 그걸 이야기하십니까? “네가 전부를 알아? 모르면서 그걸 요구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나한테 나대고 있느냐?” 이 말이에요.

 

전부를 모르면 입 다물고 가만있지 마치 이 부분만은 자기가 전공분야인 것처럼 착각해서 이것만은 정답이라고 우기면서 왜 정답에 부합되지 못하느냐고 요구한다는 것은, 전부를 아는 차원에서 시행되는 것과 일부만 알고 시행되는 차원과 다르다는 거예요. 그 소리 듣고 욥이 마지막에 어떻게 합니까? “주여, 제가 입 다물겠습니다.” 입 다물겠다는 말도 하지 말아야 돼요.

 

욥아, 황무지에 비가 오는 이유를 아느냐?” 황무지는 염소를 키웁니까, 채소를 키웁니까? 아무것도 경작하지 않는 땅에 비가 와야 될 이유가 없잖아요. 주님께서 그걸 물으시는 것은, 인간이란 작자들은 모든 것이 자기한테 의미가 되는 것만 질문을 해대서 주님한테 해답을 요구한단 말이죠. 그게 얼마나 억지냐 말이죠. 우리 얘가 의대를 갈까요, 법대를 갈까요? 그건 부채도사한테 물어야 되지요.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권리의 바탕을 우리는 태어나서 아는 것은 존재밖에 몰라요. 주님은 소급해서 원천적으로 우리의 태어남을 존재로 취급하지 않고 사건의 일부로 취급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출애굽 사건에 본의 아니게 이미 말려든 상황인 것을 소급해서 출애굽이란 계시를 통해서 일러줍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에 다니는 것은 내가 다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 다니게 하시는 거예요. 주체가 바뀌는 겁니다. 기도하는 게 아니고 기도하게 하시고 헌금 하는 게 아니고 헌금 하게 하시는 거예요.

 

과부의 두 렙돈은 과부가 두 렙돈밖에 없기 때문에 칭찬받을 짓을 한 거예요. 제가 전부를 드렸다는 것에 대한 칭찬이 아니고 이걸 하게 하신 것은 주님이 하게 하셨다는 것을 칭찬하신 거예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하고 난 뒤에 죽은 이유는 헌금의 주체가 본인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우리가 주체가 주님이라고 생각하고 헌금하지요. 여러분, 그럴 능력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다에 배 지나가면 물결이 일어난다고 그 물결이 동결 됩니까? 배 지나가고 30분 지났는데 물결이 얼음 되었나요. 바다에다 액화질소를 부었습니까? 지나가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시 고요해지지요. 주께서 사건으로 사시미 칼로 찔러도 돌아서면 우리는 존재의 바다에 원상회복이 돼요. “주여, 헌금을 성령에 의해서 제가 했습니다.” 이러고 있다고. “성령에 의해서 제가 헌금했으니까 이것만은 영광이 되겠지요.” 그럼 주님이, “그렇게 해서 뭘 원하는데?” 정신분석학에선 그걸 케 보이(Che Voui)라고 해요.

 

네가 뭘 노리고 그런 행동을 하지? 이걸 묻는 겁니다. 그걸 사람들은 모른다는 거예요. 모르면 가만있으면 되는데 인간의 정신을 그렇지 않아요. 모르면 환상을 동원해서 그 구멍을 메워버려요. 메워놓고 나는 이것 때문에 행복하다고 우기는 꼴이 가관이란 말이죠. “주의 영광을 위해서 교회 다녔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정말 주의 영광을 위해서 교회 다녔다면 메시아 필요 없습니다. 네가 알아서 천당 오너라. 이렇게 될 거예요.

 

우리는 어떤 한 순간도 어느 한 시점도 주님의 용서 없이 천국 갈 수 있는 그러한 요건은 주님은 우리한테 허락한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건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사건을 사건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우리로 하여금 존재로부터 시작해서 존재를 부정하는 새로운 날카로운 십자가 사건이 꽂히는 방법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돼있어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라는 고백을 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좀 오래 산 사람의 배 들춰보면 온 천지에 그어있어요. 나이 어린 아이들은 배가 조용한데 그 옆에 아버지는 등어리에 다 그어져있어요. 돈에 고개 숙이다가 주님한테 당해서 칼자국 있고 출세하려고 아부하다 주님한테 멍들고. 모든 게 온통 주님이 그어버린 경계선, 사건의 흔적들이 가득 찰 때 그건 훈장입니다. 그게 많을수록 자기 자랑 안 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을 할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찬송하지요. 성경은 기호와 언어로 돼있단 말이죠. 기호는 기존의 언어 창고에서 가져온 거예요. 기존의 기호와 언어는 인간에 인간을 위한 공동체 사회를 만들면서 서로 의사소통을 위해서 역사, 시간의 흐름 따라서 정립된 거예요. 따라서 그것을 차용한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숙달된 의미를 적절하게 반복하는 것밖에 안 돼요. 다시 말해서 존재를 대변해주는 것이 기호와 언어에요.

 

성경 원어연구요? 성경은 원어라는 게 없어요. 이제야 말한다. 왜 그러냐 하면 고대 언어의 특징은 경계선이 불분명하거든요. 인간의 언어라는 것은 개념이 있어야 되는데 그 개념이 다양하게 파생되려면 문명이 그만큼 발달해줘야 돼요. 문명이 발달할수록 새로운 신조어를 개발해야 되는 거예요. 그 신조어에 이미 우리는 몸에 젖어있습니다. 신조어가 없는 고대 언어로 된 성경책을 내놓고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면, 물어본 사람이 사기 당하려고 환장을 한 거예요.

 

언어의 파생어가 계속 번지는데 지금 인간이 멈추고 있습니까? 계속 갈래갈래 개별화가 되는데 그 개별화 푹 젖어있는 우리가 그만큼 개별화 되지 않은 듬성듬성 개념을 잘랐던 그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서 고대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지금의 자기 행동을 정당화해요? 말도 안 되는, 진짜 사기를 쳐도 그런 사기가 어디 있어요. 교수들이나 이런 사람들이 자기 밥벌이하려고 그런 짓하는 거예요.

 

성경에서 어떤 구원이라든지 십자가라는 개념을 차용할 때 주님께서는 존재에서 나온 개념이기 때문에 선을 그어버려요. 선을 그으면 두 동강나지요. 예를 들면 요한복음 11장에서 마리아나 마르다가 예수를 믿는다고 했거든요. 그건 거짓말이거든요. 왜 거짓말이냐 하면, 자기 오빠 죽었다고 주님 멱살 쥐려고 달려드는 그게 믿음입니까? “주님, 내 오빠 왜 죽였습니까?” 존재에서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고 했지요. 죽음이란 뭐가 다가와야 돼요? 모든 개념은 언약이 담겨서 하나님에 의해서 죽음이 왔을 때 그것만이 죽음이지 인간이 아는 죽음은 죽음이 아닙니다.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아담이 선악과 따먹을 때 갑자기 게거품 물고 죽었습니까? 멀쩡했어요. 이건 뭐예요? 약사가 이것 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했는데 안 죽으면 고소할 겁니까?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그 죽음은, 네가 죽는다고 해서 경험될 죽음이 아니고 장차 이 말씀대로 죽어야 될 분이 따로 온다는 뜻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진정한 죽음인 이유가, 그때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게 죽음이에요. 모든 성경 언어는 십자가를 경유해요. 십자가가 새 언약의 완성이기 때문에.

 

인간은 죽을 수가 없습니다. 죽는 날에 다 호출해요. 남자들은 알아요. 꿈꿨는데 제대 분명히 했는데 다시 입영영장 나오면 끔찍합니다. 그것만 끔찍한 게 아니에요. 죽어서 이제는 교회도 안 다니고 예수 안 믿어도 된다고 자부했는데 마지막 날에 예수님한테 호출 받아서 명단 보고, “26번 아무개 지옥 가!” 이렇게 나온다면, 이건 빼도 박도 못하지요.

 

마리아가 신앙이란 용어를 사용했어요. 이 용어를 사건으로 자릅니다. 자르면 절개 면이 생깁니다. 이 자르는 데서 진짜 신앙이 나와요. 중요한 것은 누가 자르느냐는 겁니다. 누가 자르겠어요? 인간 쪽에서 볼 때 사건으로밖에 소개할 수밖에 없는 천국에서 오신 분이 존재의 바다에서 칼 쥐고 너희들의 신앙이란 것은 잘라버립니다. 그러면 그 신앙은 신앙이 아니었지요. 잘라줌으로써 이 절개 면에서 진짜 신앙이 나옵니다.

 

신앙과 더불어 나오는 말씀이,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 절개 면에서 나오지요. 나올 때 이 말씀을 우리가 지켜야 된다?? 지킬 수가 없지요. 존재는 못 지켜요. 결국은 이 말씀이 배태되도록 그것이 나오도록 우리는 철저하게 존재의 일부로서 이용당한 거지요. 베임을 당한 거예요. 그러니까 피동적이고 매사가 수동적이에요. 주님은 말씀의 칼로 요리조리 다 잘라버립니다. 삼겹살은 삼겹살대로 등심은 등심대로 우리는 잘릴 때 말씀의 칼로 잘라질 때 그 속에서 우리가 미처 예상 못한 새로운 개념이 나오는 겁니다.

 

또 디모데전서에 보면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돈을 사랑한다. 그걸 존재로 보게 되면, “주님이여, 돈을 사랑하지 않겠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기존에 존재의 바다에서 알고 있던 그걸 모방해서 하는 거예요. 주님이, “너 돈 없이 어떻게 살래?” 그러면 이 말씀,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은 뭡니까? 그건 우리가 지킬 게 아닙니다. “그럼 저는 어떻게 됩니까?” 못 지킨 사람이 되지요. “못 지키면 천당 못 가잖아요.” “네가 천당 왜 가야 되는데? 갈 이유 있나?” 관계자 외에는 출입금지 돼있어요. 창세기 321절에. 우리가 들락날락하는 곳이 아닙니다. 갈 수 없는 곳이에요. 천국은 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으로 따로 만든 게 가짜 천국입니다. 예수 믿으면 천국 갑니다. 가짜입니다.

 

성경에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고 나와 있지요. 그 말씀은 사건이 와서 우리를 잘라줘야 그 말씀이 그 말씀이구나. 다시 말해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말은 잘라보니까 부자 되도 갈 수 있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개념이. 너무 황당해서 안 믿어지지요.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은, 돈을 사랑하는 내 주체를 부정한 상태에서 돈이 억만금 주어줘도 감사히 멋있게 쓰라 이 말이에요. ? 부자 되도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지 않는 이상 온갖 명품을 사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상태에서 뭘 사도 그건 돈을 사랑하지 않는 게 돼요.

 

 

10분 쉬고 합시다.

 

 

 첨부파일 : 2014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1강.hwp (50.0K), Down: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