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7-13 15:07:03 |
조회 : 18 |
헌물 받지 않음 140713 |
이름 :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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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물 받지 않음(말라기 2:13-14) 음성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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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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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7-13 15:28 |
헌물 받지 않음
2014년 7월 13일 본문 말씀: 말라기 2:13-14
(2:13)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우게 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
(2:14) 너희는 이르기를 어찜이니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찍이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맹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궤사를 행하도다
하나님께서 헌물을 받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심사가 드리는 인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단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제단의 거룩한 취지에 부합되지 않는 요소가 외부에서 첨부되는 것을 차단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유대 입장에서 합치되도록 하면 될게 아니겠습니까?
1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불가능함을 말씀드립니다. 제물을 어떻게 손질 하느냐와 제물 안 받음이 관련 있는 것이 아니라 경건치 않는 가정, 곧 인물 자체에 문제가 발생되었음이 제사 드리는 행위를 통해서 알려지고 밝혀져버렸다 는 겁니다. 백성들의 인격이 하나님에게 합당한 인격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못보이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내리신 조치는 ‘헌물 안받음’임니다. 사실 인간적인 관계로만 형성되는 인간 사회에는, 어떤 이가 내가 준 물건을 더럽다고 안 받겠다면 우리 쪽에서는 반발의식이 발동해서 이렇게 쏘아붙일 것입니다. “받기 싫으면 치워라. 우리 관계는 이것으로 끝이다. 주면 고맙다고 여길 것이지 어디 배부른 소리를 해대느냐. 사람의 성의를 무시해도 유분수이지…”라고 나올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 인격의 문제점이 어디에 박혀있는지를 알려집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성의를 무시해도 유분수이지’라는 대목입니다. 사람이란 자기 것을 누구에게 줄 때는 상대방이 나의 성의에 충분히 동감하는 상황을 은근히 기대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렇게 되면 “고맙습니다”로 되돌아올 인사를 미리 예상하고 주는게 되기에 전적으로 상대방에게 나의 것을 준 게 아닙니다.
반대 급부로 나에게 되돌아올 뭔가 있어야 스토리가 끝이 난다고 믿고 싶어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한 행동을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기억의 정보들이 엮어져서 나만의 역사와 현실상을 실로 직물짜듯이 평생을 짜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이 그물코에 개입하고 말려들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이미 인간들이 기획한 기획안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항상 기적으로 주어지는데, 그것은 인간들이 늘 신의 기적을 나름대로 내용을 구상하고 있음을 감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드리는 헌물이라는 것이 이미 목표치로 잡은 그것을 쟁취하는 노림수의 발동으로 진행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어떤 나라입니까? 그 나라에 애굽의 일부로서 애굽에서 지리적으로나머 떨어져나와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나라입니다. 하지만 이사야 31:1-3에 보면,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의 말씀들을 변하게 하지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들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들을 치시리니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 떼내시는 것은 애굽이 내부적으로 품고 있는 그 속성을 언약을 가지고 노출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노출의 기준이 되는 율법이 비록 이스라엘의 부족으로 인하여 중도 폐기는 아니하고 장차 메시아를 통해서 온전히 이루어짐을 보여주는 그 마지막 단계에 말라기가 위치해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도리가 전혀 하나님에게 먹히지 않음을 여지없이 규정되어될 시점입니다. 이렇게 되면 율법에 대해서 두 가지 양상이 나타냅니다. 하나는 영속성이요 다른 하나는 비-영속성을 보이게 됩니다. 영속성이란,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한다는 겁니다. 비-영속성은 히브리서 8장과 10장의 말씀처럼 폐기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둘을 합치면 이렇게 됩니다. 촛불을 가운데 두고 양편에서 그 촛불을 해석하는 내용에서 대립적으로 차이남을 보인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표현에 대해서 하나님의 특별한 해석이 마태복음 1:21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사람들이 이름 자체에서 밝혀내지 못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라는 이름은 그냥 ‘구세주’라는 내용입니다. 이는 곧 백성은 이미 확보되어 있음을 전제로 하는 메시아로서 그 당시 유대인들이 고대하는 상황을 고려하신 이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쪽에서 붙이신 해석은, ‘하나님 백성’은 예수님과 하나님에 의해서 정해져있지, 결코 인간들이 스스로 백성이라고 나설 수는 없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께서 ‘예수’라는 이름에 부합되는 활동되는 여정을 통해서 새삼스럽게 모집되어 생겨나는 것이 바로 ‘자기 백성’이라는 겁니다.
요한복음 6:65에 보면,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즉,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는 기적을 통해서는 아버지께로 올 수가 있고, 바로 이 사실을 인식하게 된 자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겁니다.
즉 ‘올 수 없음’을 자기에게 적용시키는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달리 표현해서, “하나님께서 저같은 자를 구원할 줄을 제가 미처 몰랐습니다. 지옥이 있다면 그곳에 저같이 오로지 자신만 생각하며 사는 존재가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저를 천국으로 가라고 하십니까”라고 반문하면서 고백하는 자가 곧 천국의 백성입니다.
왜 이런 고백이 나오느냐 하며는, 하나님의 말씀이 구원의 가능성을 차단시킴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오로지 예수님의 몫에 의해서 정해집니다. 우리와 협의하는게 아닙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헌물을 받지 않을까요? 남편은 아내에게서 헌물을 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 그 제공된 사랑으로만 만족하는 아내에게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가 경건한 자식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독자적으로 살지 말고 남편만 자랑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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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강-말라기 2장 13절-14절(헌물 받지 않음)140713-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말라기 2장 13절에서 14절입니다. 구약성경 1329페이지입니다.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우게 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 너희는 이르기를 어찜이니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찍이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맹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궤사를 행하도다”
말라기 2장 13절, 14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헌물을 받지 않겠다는 겁니다. 주겠다는데 안 받겠다는 겁니다. 뭔가 분위기가 좀 이상하죠. 우리가 자녀가 되어서 부모를 섬길 때에, 자식이 해드리는 대로 용돈 드리면 고맙다 받고 음식 해드리면 고맙다 받고 이러면 참 분위기가 괜찮은데, 이제 너희가 용돈 줘도 나 안 받겠다는 말은 지금 화내고 있다는 뜻이잖아요. 지금 상당히 까칠하게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러면 누가 힘드냐 하면 해 줄 대로 다 하는 자식이 힘들어져요. 그냥 받으시지. “야야 아무것도 필요 없다.” 아무것도 필요 없다 해놓고 다음 주 되면 또 뭐 죽겠다고 하시니까. 좀 이렇게 자식들을 생각해서 수월하게 주면 고맙다고 하면 되고 없으면 달라 하면 되는데 꼭 체면차려 가지고 “야야 나 반찬 없어도 잘 먹는다.” 그러면 뭐 진짜 반찬 안 해주면 또 난리 나거든요.
하나님께 뭘 드리면 하나님도 곱게 받으시면 드리는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편합니까? 주시는 대로 넙죽 “아이고 고맙구나! 복 줄게.” 굉장히 편한데, 안 받겠다 하면 우리는 그러면 뭐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지 난처한 거예요. 심지어 말라기는 그 대목이죠. 아모스에 가면 이런 내용 나옵니다. 찬양을 해도 나한테 찬양하지 마라 그럽니다. 성가대 치워라. 없애버리라. 찬양도 안 받겠다. 헌금도 안 받겠다. 봉사도 안 받겠다. 그러면 그 하나님을 달래려면 얼마나 뇌물을 받쳐야 돼요? 어떻게 해야 돼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나오시는 이유는요, 이런 말라기란 말씀 자체가 율법에 속한다 이 말이죠. 이 율법이 폐기할 시점이 된 거예요. 쉽게 말해서 헌금을 안 바쳐도 바친 만큼의 효과를 너희에게 주겠다는 겁니다. 아, 이거 듣기만 해도 기분 좋은 말이죠. 십일조를 안 해도 십일조를 한 이상으로 십일조 했다 치고 그 다음에 당황하지 않고 십일조 안 바쳐도 거기에 대한 모든 십일조 했던 축복을 너희에게 안겨 줄 그때가 온다는 겁니다.
너희들이 준비한 것을 나한테 바쳐서 너희들이 어떤 그 효과를 얻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마지막 때에 준비한 그것은 더 이상 너희들의 것을 일체 안 받는 상태에서만 이게 효용을, 효과를 발휘한다는 거예요. 너희들이 나에게 안 바쳐야 비로소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빛이 난다는 거예요. 참 이게 하나님 말씀이니까 우리가 기분 좋지만 평소에 잘 받아 챙기던 부모님이 그렇게 나오신다면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삐져도 단단히 삐졌구나.” 아마 그렇게 나올 거예요.
그래서 오늘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이겁니다. 어떻게 해서 우리가 바치지도 않는데, 줘도 안 받아요. 하나님이 안 받겠다는 그것으로 인하여 바친 것 이상으로 효과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가? 그 내용을 간파해야 합니다. 이것을 간단히 말하면 기적이라고 하는 겁니다. “기적.” 뭔가 바치는 것은 기적이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어려운 사람, 거지 왔다. 거지가 와서 내가 쌀을 퍼줬다. 고맙습니다. 하고 가더라. 이거는 기적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지가 받았으면, 챙겼으면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이 당연하지. 이거는 우리가 예상하고 있는 겁니다. 예상하고 있는 것은 기적에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이 우리에게 기적으로만 주어지기를 원해서 우리 존재 자체가 기적덩어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기적덩어리”
내가 나로 인하여 인생을 맞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백퍼센트 주님의 기적으로 인하여 내가 이렇게 천국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모습을 새로운 피조물이라. 백퍼센트 주께서 새로운 피조물 되게 합니다. 그러면 기적이 되려면 출발점이 우리부터 출발하는 것은 일체, 전부다 치워버려야 돼요. 내 쪽에서 출발하는 것은. 그러면 그 기적에 관한 것 같으면, 기적이 어떤 것입니까? 기적이 아닌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부터 먼저 검토되어야겠죠. 그 점을 위해서 말라기가 있는 겁니다.
이렇게 정리하면 되십니다. 말라기라 하는 것은 사백년 이후에 신약시대가 오는데, 신약시대에는 구약 율법 시대, 말라기 시대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말라기는 어느 지점에 있느냐 하면 바로 백퍼센트 기적으로만 구원되는 그 지점이 오기 전에 최후로 통보해주는 율법의 절정으로써 말라기가 위치해 있습니다. 그래서 말라기를 보면서 우리는 어떤 결론에 도달해야 하느냐 하면 “아, 우리가 바칠 것이 더 이상 없구나!”를 여기서 완전히 확답지어야 돼요. 찬양도 안 받는다. 헌금도 안 받는다. 봉사도 안 받는다. 이 몸을 드려도 안 받는다. 심지어 우리의 순종도 안 받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해놓고 우리의 순종도 안 받아요.
그럴 경우에 우리의 입장은, 그렇다면 신약시대에 야! 공짜로 준대! 이것만 신경 쓰고 좋아하지 마시고요. 왜? 우리 것을 안 받는가?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있기에, 뭔가 생색내밀어도 안 받겠다고 거절하시는가? 그것부터 먼저 알아야 되겠죠. 이사야 31장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을 믿었을 때 그들이 원하는 효과를 믿은 겁니다.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어떤 기적을 생각했는데 그 기적의 모델은 어디서 가져 왔는가. 애굽에서부터 가져 왔어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면서부터 온전하게 나오지를 못했어요. 애굽에서 나오면서 항상 뒤에 고무줄이 달린 것처럼 항상 다시 탱하고 애굽으로, 애굽처럼만 되면 좋겠다는, 애굽을 하나의 이상적인 모델로 염두에 두면서 그냥 억지로, 애굽에서 갈라지지도 않으면서, 헤어지지도 않으면서 그냥 위치상 헤어졌을 뿐입니다.
겉으로는 지역상 애굽에서 벗어났지만 마음으로는 항상 걸핏하면 애굽처럼 되어야 돼. 애굽처럼 되어야 성공한 나라야. 항상 애굽이 모델이 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러면 기적이 아니거든요. 기적이 되려면 애굽이란 모델을 닮아있는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애굽화 시켜버립니다. 마음에 와 닿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①세상이 더럽고 교회는 깨끗하니까 더러운 세상 버리고 교회 사람으로서, 교회 다니면서 깨끗하게 살겠다고 교회 다닙니다.
하나님의 구원방법은 뭐냐 하면, ②그 교회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 교회에 모든 움직이는 것이 세상보다 더욱 더 세상적으로, 더 세속적으로 만들어 버려요. 그러면 교회가 마지막 희망이고 마지막 구원의 탈출구라고 여겼던 그 사람들이 교회 와서 사탄의 얼굴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이 구원받는 사람들이 필히 겪어야 될 코스예요. 필수 코스입니다. 문제는 교회마저, 부루투스 너마저. 시저가 죽을 때 이야기 한 것처럼. 교회마저 세상이라면, 그러면 우리의 구원 가는 길은 어떻게 되느냐. 구원 가는 길은 없는 거죠. 그러면 절에 갈까요? 절에 가지 말고 교회가면 되겠네요. 없는 거예요. 그 없음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느냐 하면 인간의 힘을, 인간의 힘으로 이 말씀을 지켜서 어떤 기적을 유도 해내는 것은 길이 차단되어 있습니다.
원래 철도 공사 하다 보면, 철도 공사 하는 길을 쭉 가다 보면 뭔가 막아가지고 갑자기 둔덕이 나오죠. 철도 공사 하다가 그만뒀다는 말이거든요.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③하나님께서는 율법 속에 두 가지 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나는 끊어져야 되는 율법과 하나는 이어져야 될 율법과, 같은 율법인데 율법 노선을 두 개 나란히 가게 만들어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율법을 이루기 위함이라” ⓐ마태복음 5장 17~18절 보면 “내가 온 것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고 되어 있어요. 일점 일획이라도 율법을 폐하지 않고 완성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8장, 9장, 10장에 보면 나는 율법을 폐기처분하러 왔다는 겁니다. 둘 중에 어느 것이 맞습니까? 히브리서 8장 6절에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7절에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10장에 가면 9절에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첫째 것을, 율법을 폐함으로써, 율법에는 뭐가 들어 있습니까? 다오, 지켜라, 이것을 하라, 이것은 하지 마라, 전부다 인간의 행함에 대해서 요구하는 내용들이 율법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행하라, 행하지 마라,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자진해서 없애버리시겠다는 겁니다. 그것을 없애버리면 이것은 인간이 안 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뭘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지 않는 그런 존재가 바로 너라는 거예요. 이 말을 더욱더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면 너는 니가 구원받으려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이제는 너의 구원에 어떤 보탬이 되지 못할 것이라.
제가 의존교회에서 했던 말씀을 잠시 하면 이렇습니다. 그 예수님의 이름이 뭐죠? 예수죠. 이건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예수라는 말을, 이게 촛불이라면, 촛불을 가운데 두고 이쪽에서 인간들이 예수를 분석하는 것과 진짜 하나님이 예수를 분석하는 그 차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쪽에 인간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구원주, 구세주로 생각해요. 천천히 이야기하게 되면 메시야가 오게 되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였습니다. 그런데 이쪽에, 하나님 쪽에서 예수님을 생각하는 견해는 뭐냐,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질 자가 예수님이라는 거예요. 들어보니 이 말이나 저 말이나 똑같은 말 아닙니까? 똑같은 말 아니거든요.
왜, 똑같은 말이 아니냐 하면은, 하나님 보는 입장은 기적적인 입장입니다. 구원이 나한테 기적으로 다가와야 돼요. 기적으로. 기적이 되려면 “주여! 저 구원되려고 요청한적 없습니다.” 라고 할 때만 이게 구원이 되어야 돼요. 그리고 내가 한 짓을 내가 율법에 비춰보면 나는 지옥가야 합당하지. 나 같은 인간이 천국 간다는 것은 이거는 말도 안 돼. 이거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이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제가 왜 천국가야 합니까? 지옥을 가도 백번을 가야 되는데 왜 천국 갑니까? 주님께서 뭐 사람 잘못 고르신 것 아니에요. 지금 엉뚱한 사람을 지옥 보내고 나 같은 인간을 왜 천국 보냅니까? 다시 한 번 장부 맞는가 봅시다. 주민등록번호 맞아요? 530xxx 맞습니까? 그게 하늘나라 맞아요? 저 같은 인간이 천국 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나는 나만 생각하지 주님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우선입니다. 하나님. 그거 저도 알고 하나님도 아시는데 이거 왜 이러십니까?
그러면 하나님 쪽에서 해석하기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본인이 만들어요. 왜? 이름 자체 안에 그 기능과 역할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란, 예수아, 여호수아, 구원자란 뜻이에요. 구원자란 것을 제시했을 때, 사람들은 자기가 갖고 있는 기대나 포부를 거기다가 언어를, 표현을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일방적으로 자기 쪽으로 끌어 당겨요. “아, 이제 오시면 어떻게 합니까? 기다렸습니다. 저를 구원하러 오셨군요.” 이렇게 끄집어 당겨 버려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6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44절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아버지께서 내게 오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그걸 줄여 버리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걸 달리 이야기 하면 너희들 중에 날 제대로 알아보고 올 사람은 너희들 능력으로써는 불가능하다. 그것을 더 줄여 버리면 기적이다. 기적이 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 다시 합시다. 헌금을 가지고 하나님께 헌금을 바칩니다. 우리가 드리면, 우리 행위에서 나왔으면 좀 넙죽넙죽 받아 주시고 복 주시면 돼요. 바치면 복 받고 안 바치면 저주 받는다. 이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친숙해져요. 친숙하고 우리는 다 같이 그런 소리에 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 동일한 공감을 가져 냅니다. 아, 생각해 보세요. 뭔가 성의를 표시하고 복을 준다면 우리가 아쉬울 때마다 성의만 표시하면 이거는 자동기계라. 헌금 봉투를 저기 아래다 내면 안 돼요. 위에까지 당겨줘야 돼요. 여기까지 와야 목사가 축복기도를 해주거든요. 몰래 이름 안 쓰고 하면 안 된다니까요. 이름 써가지고 위에다 내야 돼요. 왜냐하면 그게 법칙이 돼버리면 참 편리한 법칙이에요. 이거는 뭔가 가정이 어렵다, 우울하다 하면 감사헌금 적어가지고 아래쪽 말고 요 위쪽에까지 올라와주면 되는 거예요. 참 쉽죠. 정말 쉬운 거예요.
이게 무슨 기적입니까? 이게 무슨 기적이에요? 우리는 기적을 싫어해요. 요렇게 하면 요렇게 된다는 그런 필연적인 법칙을 우리는 교회 와서 한 수 배우기를 원합니다. 필연적인 법칙을. 아들이 군에 갈 때 보는 성경본문 그거 외우고. 그거는 여호수아1장에 나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면 후방으로 빠질 것이다. 그리고 병났을 때 하는 기도 있잖아요? 기도와 금식은...이런 것. 뭔가 사업이 안 될 때는,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엔 창대하리라, 이런 것. 특수한 이런 구절을 외워서 자동적으로 그것이 효과보기를 원합니다. 이런 것은 기적이 아니에요. 이거는 우리가 예상한 거예요. 그러나 천국은 기적이 없으면 못가거든요. 그러면 기적이 되려면 예상한 것을 다 버려야 된다는데 다 버려 버리면 갑자기 우리가 의욕이 상실됩니다. 해도 소용없는데 미쳤다고 해.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해도 소용없는데. 기도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 우리 기도 안 받는다는데. 하지 말자. 헌금해도 상관없단다. 돈만 날린단다. 미쳤다고 돈만 날리나 맛있는 거나 사먹자. 6개월 만에 교회 나와도 출석한 걸로 쳐준단다. 6개월 만에 딱 한 번만 나오지 뭐. 진작 그렇게 하지. 진작 그렇게 나오지. 진즉에.
이거는 우리가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은, 교회 나오기 전부터 열심히 해서 주께 영광 돌려야지 라는 그거는 표면적 심보고. 사실은 그 내면적 심보에는 진즉에 그게 이미 들어있었어요. 그게 감추어 있는 것을 주님께서는 우리 뜻대로 안 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나자빠지도록 만든 거예요. “에이 씨, 나 안 해” 이렇게 해서 본색을 충분히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 말라기의 기능입니다. 말라기가 안 받는다고 할 때, 유대인들이 안 드렸겠습니까? 안 받는다고 하니까 유대인들이 이렇게 했습니다. 더 달라는 모양이지. 더 드리자. 안 받겠다는 데 더 달라는 모양이지. 꼭 요새 부모님처럼. 야야, 아무것도 해오지 말라는 것은 더 해달라는 이야기입니다. 명절 때 봉투 뭐 하러 가져 오노? 그냥 아무 때나 해라. 그 다음부터는 봉투 따로 챙겨라 하는 식으로 해석을 하면 되거든요.
시편 50편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산에 있는 짐승도 다 내 것인데 니가 산에 있는 짐승을 위치 이동시켜서 니가 제단에 가져온다고 니가 헌금한 것 맞느냐 이 말입니다. 그 자리 있느나 내 것이고 이 자리 있으나 내 것인데.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누구한테 받는 것이 아니고 본격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대에 도립했습니다. 사람이 뭘 바치게 되면 바친 것을 기억하지만 우리는 공짜로 받은 것을 기억한 적이, 기억하지를 않습니다. 왜? 내가 안 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기적이 없는 곳에서 자꾸 노는, 그런 애굽적인 속성 속에 지금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기적을 발견할 생각을 안 합니다.
기적을 어떻게 발견하는가. 모든 것, 내가 하지도 않았는데 결과가 나온 것, 그것을 주변에서 한 번 찾아보세요. 내가 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이렇게 예쁜 딸내미 낳을 줄 생각도 못했는데 딸이 나왔을 때 이거는 기적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경우에 그렇게 딸이 예쁘냐. 그거는 자기가 못났다고 생각할 때만, 그 순간에서만 기적적인 현상이 느껴지는 겁니다. 엄마가 잘 났는데 딸은 항상 엄마보다 못난 딸이 돼요. 그런데 엄마가 스스로 주여, 저는 별로 인물이 안 좋은데 왜 저렇게 딸이 예쁩니까? 이렇게 될 때 모든 게 감사하게 되죠.
그래서 이스라엘의 말라기는 그야말로 이스라엘을 쥐 짜버립니다. 다 놔버려라. 다 놔버려라. 너희들 그 썩어빠진 행동 때문에 내 기적이 완전히 물을 먹는 거예요. 메시야가 올 때는 자기 백성을 그냥 공짜로, 아버지 뜻대로 택한 자를 그냥 건져 가버립니다. 그런데 누가 백성인지를 어떻게 구분하느냐.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질 자거든요. 따라서 그 백성들은 자기가 죄 있음을 자각하는 사람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질 자거든요. 그래서 죄 있다는 사실과 그 죄에서 스스로 어떤 수를 써도, 아무리 하나님께 찬양과 헌금을 바쳐도 그 자체가 죄이며 아무리 죄에서 빠져나오려고 해도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자인하게 만드는 그 절차를, 예수님에 의해서 조장되는 그 환경을 우리는 누리게 되는 겁니다. 이 땅에서 어떤 행동을 해도 교회에서 어떤 봉사를 해도 그것이 전혀 내 구원이나 하나님께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갈수록 점점 더 느껴지도록 하는 거예요. 사람은 뭐 하나 하면 항상 생색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생색을 내게 되어 있어요. 생색을 내버리면 이미 기적에서 그거는 이탈된 느낌이 될 뿐이에요.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안 받겠다는 그 이유가 그 끝에 보면 나와요. 그게 뭐냐 하면 말라기에 너희들이 아내가 있지 아니 하냐. 그 대목이 어려운데 쉽게 말씀 드리면 이렇습니다. 자기 아내한테 월급 주는 남편 봤습니까? 자기 아내한테 월급 주게 되면 아내가 기분 좋아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이거는 세상에 가장 잔인한 인격 모독이 아내한테 월급 주는 겁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봉투 베게 옆에 있는 것 보세요. “에이 씨, 니가 가져라. 갈라서자.” 이렇게 될 겁니다. 얼마나 인격 모독적입니까? 아내한테는 월급 주지 않습니다. 다 줘야 되죠. 오늘 교육 아주 철저하게....다! 그냥 다 줘야 돼요. 왜? 남자는 주는데서 오는 기쁨이 있고 여자는 받는데서 오는 기쁨으로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좀 적어 놓으세요.
“고생은 내가 하고 그 고생의 효과는 네가 가져라.”고 여자를 붙여 준 거예요. 주례 미리 하는 겁니다. 그냥 내 것 가지고 마음대로 쓰는 그 모습을 보고 행복해 하는 것이 그게 남자예요. 여자는 마음대로 다 빼먹고 옷 사 입을 것 다 사면서 니 덕분에 산다고 할 때 남편은 아내에게서 즐거움을 느끼는 겁니다. 신랑은 예수님이에요. 우리는 신부입니다. 왜? 우리가 남편한테 바칩니까? 이게 신약시대 방법이거든요. 사랑하는 자가 모든 것을 책임지게 되어 있는 것이 이게 사랑의 완성체, 완성된 관계라 이 말이죠. 그 사랑의 기적을 받은 사람은 바치지 않습니다. 끝.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봉사, 찬양, 헌금, 교회 섬기기, 목사 섬기기, 그러지 마세요. 이미 다 받았음을 알았으면 그 사람이 바로 교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입장을 독자적으로 계산한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누구의 아내인 것을 알지 못하고 우리 혼자 살려고 했습니다. 이제는 주님을 남편으로 삼고 남편이 주는 십자가 사랑으로 마음껏 남편만 자랑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