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의 문
2014년 6월 8일 본문 말씀: 말라기 1:9-11
(1: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1: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1: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문 닫으라!” 하나님의 명령인 동시에 그렇게 되도록 조치하시겠답니다. 이스라엘은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타민족과의 차이나는 점이 바로 성전의 존재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성전 자체를 폐쇄한다면 자신의 나라가 타민족과는 달리 하나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받는 민족이라는 근거가 사라지는 바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실 말라기 1:4의 말씀이 비단 에서의 후예들에게만 적용된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즉 에서는 이미 저주받은 민족이라고 단정지어져 있기에 아무리 본인들이 고집을 부려서 다시 재건에 나선다 할지라도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계속 헐어버리시겠답니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알게 되면 자신들이 얼마나 뿌듯하겠습니까. 하지만 10절의 말씀처럼 “받지도 않겠다. 성전문 닫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자신들과 저주받은 민족인 에돔과 다를 바가 없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서나 야곱이나 양쪽에서 드리는 모두를 받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받지도 않을 거라면 제사 제도의 주신 취지가 무엇인지가 궁금해집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제도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본심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즉 구약 때의 모든 제도는 장소적이나 시간적으로 구분지어진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특정 장소나 특정 시간에 제사를 드리도록 되어있습니다. 이 말은 특정 장소나 특정 시간 외에는 거룩이나 구원과 특별한 관계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바로 구원이 이런 식으로 율법적으로 정리된 그 간편함을 갖고 있는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은 자부심을 가진 겁니다. 하지만 실은 인간들이 쉽게 성취할 수 있는 상태가 율법의 끝이 아닙니다.
율법의 끝은 미래에 메시야가 세상을 방문하시면서 드러납니다. 그 끝에 가서나 드러나는 사실과 미처 끝의 내용을 모르고 율법을 다루는 사람들 사이에 견해차는 확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쥐고 있는 그들을 향하여 계속 추궁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율법의 완성 차원을 그런 식으로 의도적으로 노출시킵니다.
즉 “성전 문을 닫으라”고 하실 때에 이스라엘은 도대체 하나님께서 이토록 성전 전면 부정으로, 과격하게 나오시는 이유를 모르게 됩니다. 특히 ‘문’이란 안과 밖을 정하는 경계선상에 있습니다. 성전 안에 들어가려면 문만 열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전문을 닫으라고 하신다면 결국 이스라엘은 성전 밖에 추방된 바가 되어버립니다.
하나님과 무관한 민족이 되어버립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사랑한다”는 취지는 어떤 식으로 실현이 될까요? 하나님의 방식은 이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체를 ‘성전의 문’으로 삼아버리는 겁니다. 곧 이스라엘 자체를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경계선상’에 두는 겁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이라는 곧 천국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지옥간다는 말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체는 천국과 지옥을 구분 짓는 경계선상에 있는 나라로 다루시겠다는 말입니다. 물체인 문짝을 인물로 전환하시겠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문짝이라는 특정 물체로 공간이 구획되던 것이 특정 인물에 대한 태도 여부로 천국과 지옥이 구분되어져 버립니다.
‘주 안’에 들어온 사람은 영생이지만 ‘주님’으로부터 튕겨져 나간 사람은 지옥입니다. 주님으로부터 튕겨져 나간 사람은 본인들이 알아서 예수님을 튕겨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이 세우고, 또 세우고, 하나님이 헐어버리면 또 세우는 방식으로 구원받겠다고 나서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새롭게 만드는 방식의 구원을 거절하고 자신들의 행함으로 가능한 방식을 고집하게 됩니다. 이들은 자신이 경계선으로 다루어지기 보다는 아예 자신이 구원의 중심이기를 원합니다. 그러다보니 “내 방식 아니면 지옥간다”를 주장하게 됩니다. 사람을 구원의 문으로 삼아버리는 형편에 대해서 요한계시록 22장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10-12에 보면,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새로운 신비인 새예루살렘성의 가치는 문을 통해서 드러나는 겁니다. 그렇다면 물체인 문짝에서 인물로서의 성전문으로 전환되는데 어떤절차가 주어지게 됩니까? 바로 이 절차 중의 하나가 율법의 철저함에 의해서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이 추궁을 당해야 하는 겁니다. 사람이란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서는 항상 정당하다고 간주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완성도에 자신의 행함과 직접 연결을 시도하게 됩니다. 즉 “이 율법 말씀의 완성도는 이정도인데 나는 나의 행함으로 그 수준에 도달했다”고 자부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왜곡은 지속적으로 제공되는 하나님의 율법의 철저함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고 위선부린 것이 됩니다.
율법의 철저한 준수는 곧 십자가 죽으심 뿐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여기서 벌어집니다. 그런데 이 율법 완성을 위한 일에 인간들이 부정적으로 가담되고 있다는 겁니다. ‘나홀로 집’이라는 영화를 보면, 거기에 평소에 말썽꾸러기 막내 아들이, 가족들 크리스마스 휴가 여행에 참여하지 못하고 집에 홀로 남게 됩니다.
그런데 휴가철을 노리고 금품을 털기 위해 쳐들어오는 두 명의 강도와 마주치게 되면서 아이는 기지를 발휘해서 홀로 그 두 명의 강도를 체포하고 경찰에 넘기게 됩니다. 모든 사태가 종료되고 뒤늦게 집으로 돌아온 남은 집안 식구들에 비해, 그 말썽꾸러기 아이는 이미 영웅이 되어있습니다.
강도를 홀로 체포한 가치는 단순히 본인만의 것이다 는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그 아이의 지혜와 기지를 무시하고 모독한 남은 식구들의 가치는 우습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이 진행되는 사건 안에는 필히 인간들이 자기 가치를 계속 사수하기 위한 모든 시도들에 부정적인 평가가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이 주시는 추궁은 성도에게는 ‘주 안’에서 주님의 공로만 드높이기 위한 절차에 이미 가담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말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만이 성전의 문인 것을 우리가 죄인인 입장에서 증거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강-말라기 1장 9절-11절(성전의 문)140608-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말라기 9절에서 11절입니다. 구약성경 1327페이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이스라엘 보고 하는 이야기인데,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이 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겁니다. “너희가 제단에서 제사를 드려도 나는 그 제사를 받지 않겠다.” 라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어 보면 우리가 어떻게 행해도 주께서 안 받겠다는 이 이야기가 사실은 말라기 1장 4절에 보면 나옵니다. 거기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양쪽 고집이 대단하죠. 한쪽은 안 받으면 받을 때까지 해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너의 그 고집으로도 기어이 안 받겠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에서한테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야곱은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아마 하나님께서 살려 줄 거라고 이렇게 생각했는데 그거는 에서한테 해당되는 이야기가 드디어 확산이 되어서 이제는 소위 야곱의 자손, 에서가 아니고, 에돔이 아니고 이스라엘이라고 여겼던 그 제사장에게도 동일한 취지의 하나님의 선포가 제시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핵심은 이겁니다. “안 받겠다”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게 되게 되면 결국은 거부 반응으로 돌아서게 되어 있어요. 거부 반응이 강렬하게 일어나는데 그쪽에서 하는 이야기를 제가 대신 해볼께요. “결국 이목사 당신이 하는 이야기는 인간이 뭘 행해도 안 받겠다는 그런 이야기잖아? 그러면 우리가 뭘 행해도 죄가 된다면 성경에 나오는 이 모든 성도의 삶은, 우리가 하지 못할 것 같으면 성도의 삶은 어디서 챙길 수 있느냐? 그 점에 대해서 당신은 왜 언급이 없느냐?” 라고 이렇게 나와요. 여러분도 그런 소리 좀 들었을 거예요. 그럴 때는 이렇게 하세요. “당신은 성경을 보면서 지키지 못하겠다는 쪽으로는 생각을 안 하고 지켰다고 여기는 것을 일방적으로 내거라고 자꾸 직접 연결시키는 것이 문제다.” 라고 이야기 해주세요. 제가 너무 길게 이야기 했습니까? 다 못 외우겠습니까?
성경을 보면서 “아, 이거 육으로 못 지키겠구나!” 이렇게 하게 되면 어떤 것이 즐거우냐 하면 뭘 해도 죄가 된다는 것이 성경에 합치되는 내용이라고 받아들이면 되는데 그들은 성경에서 좋아 보이는 내용과 합치를 시도할려고 하다 보니 그러지 못한다고 하니까 그들은 낙이 없는 거예요. 신앙생활에 어떤, 그야말로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다고 하면 짤린다고 하니 얼마나 섬뜩하겠어요? 육신의 열매, 성령의 열매 나오니까 육신의 열매는 돌아보지도 않고 성령의 열매 덥석 맺을려고 하는데 성령의 열매는 육신의 열매 속에 있는 사람에게 성령의 열매가 비로소 보이는 법이예요. 물론 성령 받아야 되지만. 너무 자기 주제 파악을 못해가지고 욕심을 내요. 촌에서, 제가 전에도 그런 설교 했죠. 봉화에 그냥 있었다면 촌스럽게 했다고. 이제 도시 나왔다고. 대구 도시 나왔다고 옷차림도...전에 봉화 가니까 아이구 촌스러워. 벌써 도시물 먹었다고 봉화가면 봉화 사람들 왜 그렇게 촌스러운지. 이거 또 봉화 사람 들으면 화내겠다.
사람이 자기 주제가 다시 봉화로 돌아가야 해요. 원래 촌스러워야 돼요. 왜냐하면 천하에 촌스러운 분이 예수님이거든요. 우리가 어디서 구원받느냐 하면 예수 안에서 구원받습니다. 주 안에서 구원받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완성시켰다는 말은 우리가 덥석 손잡는, 우리가 막 땡기는 그쪽으로만 성취시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기피하는 것, “아이구, 이런 나쁜 사람이 어딨어요? 저거는 나하고 상관이 없어.” 우리하고 상관없이 저주받아 마땅한 그쪽에 예수님이 벌써 경유하고 있으면 우리도 같이 그쪽을 경유를 해줘야 돼요.
성경에서 누구 욕한다고 해서 남의 이야기로 들으면 안 돼요. 그게 바로 우리이야기예요. 우리가 그쪽과 가까와요. 그쪽에 속해 있습니다. 에서를 이야기 하니까, 에서는 저주받아 뭘 시도해도 헐어버린다 하니까 야곱은 신이 나서 “우리가 드리면 꼭 받죠?” 하나님께서 “너가 드려도 너도 안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이 전부고, 그걸 주께서 안 받으면 결국 우리는 할 게 없는 거예요. 할 게 없고, 뭐 하나 안 하나 우리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가 드려도 안 받겠다는 그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의외로 굉장히 간단해요. 어느 정도 간단하느냐 하면, 현재 우리가 하나님께 요구하는 정도로 간단해요. 그러면 우리는 어떤 것을 요구하느냐 하면, 어는 지역에다 교회를 세우는 겁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 등록하고 일요일 아침만 나와서 출석하면 구원을 해주겠다는 이런 시스템, 이런 제도. 우리는 정말 간편해요. 정말 우리가 이런 것을 원하는 거예요. 인간이 바뀌는 것은 골치 아파요. 골치 아프고 어떤 특정 제도나 장소에 가서 잠시 얼굴만 보이고 출석해서 싸인만 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천국 가는 문제가 해결이 되는 겁니다. 이거는 간편해도 너무 간편하고, 이것이 간편하고 마음에 들기 때문에 우리는 자꾸 어떤 일을 할 때, 그쪽, 방금 이야기한 그런 식으로 구원되기를 간곡히 마음속에 선망하고,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 간편한 방식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느새 물이 든 거예요. 오늘은 제사 드리는 날. 나, 오늘 제사 드렸습니다. 드디어 구원은 끝. 얼마나 간편합니까? 그러면 제사는 어디서 드리느냐. 성전에서 드리겠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봅시다.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이렇게 이야기 하거든요.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요, 너희가 제사 드려도 안 받겠다. 하나님께서 제사 드려도 안 받겠다 이렇게 나올 때에 그들은 생각하기를 “아, 지정된 장소에서 지정된 시간에 제사 드리는 것은 인정하는데 제물 쪽에서 문제 있어서 안 받겠다는구나.” 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나중에 나옵니다만, 이건 제물이 문제가 아니예요. 사고방식 자체가 구원을 우리 편리한대로 간편하게 구원 챙겨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성전 문이 나중에 신약에 가게 되면, 이 성전 문이 나중에 사라져 버립니다. 아예 간편하게 하겠다고 여기서 여기까지는 거룩한 공간, 이쪽에서는 우리의 사적인 공간. 사적인 공간에 있는 사람이 일 년에 세 차례씩 거룩한 공간에 가서 양 잡고 소 잡고 피내서 드리면 하나님이 응답해서 우리나라 복 주고 나중에 영생 주신다. 세상에 이것처럼 간단한 것이 어딨습니까? 그런데 그 간단한 것 조차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안 받겠다는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유를 모릅니다. 왜 모르냐면 그 다음 선지자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몰라요.
참, 성경이라는 것이 이런 겁니다. 성경이 어떤 거냐 하면은 사울과 사무엘이 있었거든요. 전쟁할 때 제사 드리면, 언약궤 앞장서서 제사 드리면 그것이 전에 성공했거든요. 그러니까 사울은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 제사 드리기를 준비했는데 선지자가 약속시간 지나도 오지를 않아요. 그래서 자기가 하도 약속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자기가 먼저 제사 드리고 난 뒤에, 적들은 지금 코앞에까지 들이닥쳤기 때문에, 지금 긴급한 사태기 때문에, 제사 드리고 그 때 선지자가 온 거예요. 그러면 누가 잘못한 거예요. 선지자가 약속을 어긴 거잖아요?
그런데 오자마자 선지자가 화부터 먼저 냅니다. “당신이 왜 제사 드립니까?” 하니까 사울이 할 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백성들은 지금 동요하고 있지, 지금 전쟁은 해야 되겠지, 당신은 약속시간에 안 왔지, 그러니까 구차없이 제가 드렸습니다.” 라고 하니까 사무엘이 그 때 하는 말이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그제야 그 이야기를 해요. 위반을 이미 저질러놓고 뒤늦게 그 위반사실을 위반했다고 이야기해 버립니다. 뭐예요? 이게. 이건 처음부터 사울왕과 같이 해보겠다는 마음이 아예 없다는 말이거든요. 이게. 일부러 노린 거예요. 위반하기를 노린 겁니다.
그런데 위반이 없으면 진리가 파악되지 않는다고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했죠. 반드시 위반을 통해서 알지 못하는 진리가 새롭게 거기에 물 고이듯이, 이게 흙구덩이 파놓으면 나중에 비오면 거기에 물 고이듯이 난데없는 물이 스며들어 고이듯이, 진리가 그제야 나옵니다. 진리는 우리의 위반을 이용해서 진리가 자기 앞에 등장하는 식으로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그렇게 해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꾸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미래로 오실 분을 고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 보기를 고대했고, 다윗이 죽어 가면서 메시야 보기를 고대했고, 엘리야도 그렇고, 모세도 그렇고. 전부 다 뭔가 자기 쪽이 아니고 오실 분에 의해서 소급해서 완성시킨다는 그 약속의 진행방향을 그들이 이미 눈치를 챈 겁니다. 우리만 바보같이 눈치를 못 챘죠. 그렇다면 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하는 것이 뭐냐 하면 간편한 거예요. 이 간편하다는 말은 내 마음이나 내 정신은 손대지 말고 어떻게 특정 장소에서 특정 예배만, 제사만 잘 드리면 자동적으로 축복이 오고 영생이 오기를. 그런 간편한 장소를 원합니다.
그러면 미래에 있는 하나님쪽에서 생각을 해봅시다. 이게 제도를 바꾼다고 해서 될 문제입니까? 안 되지요. 제도 바꿔봐야, 제도만 철저히 한다고 그것만 신경썼지 자기는 변하지 않거든요. 이번에 울산서 그런 강의했습니다만, 재직회 할 때, 장로 뽑을 때 3분의 1 이상으로 한다. 3분의 2 찬성표라는 것이 성경에 어디에 나옵니까? 이게 안 나오잖아요? 3분의 2 해서 그 장로를 뽑아 보니까 이상하게 마치 진리처럼 행했다는 어떤 뿌듯함이 들지 않습니까? 진리처럼. 예를 들면 목사가 어떤 장로를 밀어 줬는데 가만히 목사가 계산을 해보니까 3분의 2가 안되거든요. 2분의 1정도 되거든요. 개표할 때 갑자기 “당회장 직권으로 이야기 합니다. 이것만은 특별히 2분의 1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할 때 그렇게 해서 장로가 뽑혔는데 뭔가 찝찝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뭔가 찝찝하죠. 3분의 2가 진리인데 이거 반칙해 가지고 2분의 1로 장로되면 그 장로가 나중에 낙하산 인사 비슷해 가지고 장로 값에 들지도 않죠. 목사가 잘못이예요? 찝찝한 그 사람 다 잘못이예요? 다 잘못이예요. 3분의 2 했으면 뭔가 의로움을 느끼고. 3분의 2인데 2분의 1로 했으면 뭔가 죄지은 느낌이 들고. 그 마음 자체가 이미 썩어 빠진 거예요. 3분의 1 하든 그냥 하든 아무 의미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자기는 일단 사랑받고 구원받는다는 그것이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시키는대로, 법대로, 율법대로 규칙 정해서 간편하게 나갔던 거예요. 자,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조치는 어떻게 하시는가. 여기 10절에 보면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거는 제가 아까 이야기 했죠. 이건 사실은 에서한테 이야기하는 것을 지금은 누구한테 이야기 합니까? 야곱에게도 이야기하죠.
그러면 하나님의 거룩한 공간 따로 있고, 거룩한 성전 따로 있고, 성전에서 복 주셔서 구원받는다는 이 변하지 않는 원칙이 있어야 되고, 그러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원칙대로 한다고 따로 장소 정해서 성전이고 우리는 바깥에 있고 일 년에 세 차례씩 예배드리자. 이것도 문제 있다면 그러면 이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면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좋은 의견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그 방법이 뭐냐 하면, 이겁니다. 이스라엘아 너희들은 진정 천국과 지옥을 구분해 주는 경계선 위에 있는 민족으로 세웠다. 진짜 신약에서 확정된 천국과 확정된 지옥을 구분 짓는 경계선 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표로 그들이 있는 겁니다.
그들이 하는 모든 행동은, 다시 말해서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우리가 어떤 법을 지키고, 어떤 규칙을 지켜서 구원받겠다는 그 사고방식 자체가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지옥으로 밖에 갈 수 없는 그들이 이스라엘이예요. 하지만 그들을 누가 사랑하고 누가 택했습니까? 하나님이 사랑하고 택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그런 태도를 보여주는 그들을 그 경계선에서 천국으로, 영생으로 인도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다른 요소가 그들에게 개입되는 새로운 사태가 미래에 제공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뭐냐, 그들 자체를 문으로 만드는 거예요. 이게 아이디어예요. 문이 따로 있고 지정된 장소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 자체가 하나님의 거룩한 문이 되게 하는 겁니다. “목사님 그게 어디에 나옵니까?” 요한계시록 22장에 나와요. 예루살렘 성전이 나오는데 그 열 두 문이 이제는 문이 아니고 전부 다 사람의 이름이 붙여져 있어요. 움직이는 문이 돼요. 내가 여기 있고 열고 들어가는 문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내 자체가 문이 되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거 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 문이 될 수 없어요. 우리는 죄만 짓기 때문에 문이 될 수 없어요. 그러면 먼저, 우리를 문일 되게 하신 분이 먼저 등장해야 되겠죠.
요한복음 10장 7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예수님 자신이 바로 경계선,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그 기준점이 되는, 움직이는 문으로써, 입구로써 오신 거예요. “내가 문이다.” 문이 막 돌아 다녀요. 내가 문인 거예요.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는 사람은 영생을 얻고 나한테 튕겨나가는 사람은 그것이 바로 지옥이다. “지옥이 보고 싶나? 지옥이 보고 싶어?” “궁금해? 오백원.” 어떤 사람은, 제가 버스 타고 있는데 어떤 아가씨가 이야기하면서 내가 아빠한테 천 원 얻었다는 거예요. 왜? 아빠한테 궁금해? 궁금해? 두 번 이야기해서 오백원씩 받았다는 거예요. 어쨌든 궁금하면 오백원인데 오백원도 안 받겠습니다. 지옥이 궁금해요? 그러면 예수 안 믿는 것이 지옥이예요. 예수 앞에 튕겨나간 것이 지옥입니다. 가룟 유다가 지옥이예요. 사탄의 아들입니다.
자, 여기까지는 알았는데 아직까지 남은 문제가 있어요. 남은 문제가 뭐냐 하면, 예수님은 좋겠다. 예수님이 문이라서 좋은데 지금 우리가 문이냐는 그 문제가 남았어요. 예수님이 문이라고 해서 우리가 자동적으로 문이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예수님이 문이다. 그리고 너희도 내 안에서 성전에서 움직이는 문이다. 이것이 될려면 예수님의 어떤 연속적인 작업이 있어야 됩니다. 그 작업이 뭐냐, 이 작업이 어렵기 때문에 제가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크리스마스 때마다 특선영화 라고 보여 주는 영화가 있어요. KBS, SBS, MBC 3사에서. 그 영화 중에 <나홀로 집에> 라는 영화가 있어요. 연세 많으신 권사님들, 나홀로 집에 라는 영화 봤어요? 맨날 나홀로 집에 있으니까 본인이 뭐 나홀로 집이지요.
나홀로 집에 내용이 이런 거거든요. 크리스마스 때 온 가족이 집 비우고 휴가를 가게 되어 있는데, 평소에 말썽꾸러기였던 그 아이가 또 뭔 말썽을 부려서 합류를 못하고 식구들은 나중에 공항에 가서 보니까 자기 막내아들이 없어요. 그런데 아이는 자기 집에 있는 거예요. 그게 나홀로 집에 시작이예요. 이제 식구들 없고 엄마, 아빠 헤어지고 크리스마스를 자기 혼자 그 큰 저택에서 보내게 됐는데, 그것도 지가 평소에 혼자 외로워하지도 않고 신나가지고요. 평소에 아빠가 바르던 면도 크림 바르면서 “아악~~~” 이렇게 거울보고 고함지르면서. 그런식으로 즐기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강도가 왔어요. 그 도둑을 여덟 살 먹은 그 아이가 혼자 다 처리하고 신고해서 다 잡았어요.
자, 봅시다. 나홀로 집이 왜 중요하냐면,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아이는 버림받은 아이예요. 떨어진 아이입니다. 다른 사람은 휴가 가고 혼자 남았어요. 걔는 막내아들이고 말썽꾸러기고 가치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집에 와보니까 강도가 잡혔어요. 강도 잡은 그 가치가 누구의 가치냐 하면 결국은 아이 혼자가 다 해치웠거든요. 괴상한 것 발명해가지고 강도 골탕 먹이고 결국은 체포했단 말이죠. 왜 크리스마스 때 하냐면은 눈이 많이 와요. 눈이 많이 내려서 경치도 좋고 그래서 크리스마스 특선영화인데 애가 강도를 다 잡았다 이 말이죠. 그러면 강도 둘을 어린아이의 힘으로 다 잡았던 그 가치, 그 공로는 상대적으로 뭐냐 하면, 그 주인공 아이를 아주 우습게, 무가치하게 봤던 그 어른들, 기존 식구들의 가치를 무시하게 만드는 새로운 가치가 등장하게 된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오늘 본문에서 자꾸 주님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추궁을 하는데요. 이 추궁이 의미가 있어요. 왜? 우리는 자기 자신이 잘났습니다. 하나님. 지시만 하면 헌금하라면 헌금, 어떤 장소에 가서 예배드리라면 예배, 기도하라면 기도, 하나님이 간편하게 시키는대로 하면 시키는대로 해서 영생 얻겠습니다. 왜? 우리는 택한 백성이니까. 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우월함, 스스로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을 우리는 반복을 하고 있어요. 반복하고 있는 것을 주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고 우리를 경계선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천국과 지옥은 이렇게 니가 철없음을, 가치도 없으면서 가치있는 척하는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쓰레기로 버리지 않고 거기에서 끄집어내서 그것을 가치있게 보는 거예요.
가치있게 보면서 그 안에다가 뭘 집어넣는 하면, 세상의 끝을 집어넣어 버려요. 세상의 끝, 인간은 이렇게 해서 인간은 무가치하게 끝났다. 끝을 집어넣어 버리면 우리의 모든 행동들이 뭐냐 하면 하루의 일과가 끝의 매일 되풀이 되는 반복입니다. 끝을 보여주는. 우리가 이렇게 모든 것이 죄의 끝. 죄의 막장을 보여주는 일상적인 삶으로 활용하게 되죠. 그렇게 활용하게 하면서 나라는 것은 이렇게 인생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게 되는 것은, 이거는 우리가 무가치하게 봤던 분의 가치가 나한테 개입된 그 여파라는 겁니다. 주님이 개입됐기 때문에 나로 하여금 말라기 1장 9절에서 11절의 말씀이 이게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매일같이 반복되는 나의 이야기로 받아지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주와 함께 있는 경우, 이미 사랑이라는 의미를 발견하라는 거예요. 발견하게 하시는 겁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뭐 하라고 하는 것이 없잖아요? 그러면 죄만 지으면 되겠습니까?” 하라 하지 못하는 쪽으로 성경말씀은 접근해 가지고 결국은 용서와 사랑과 자비가 우리로 인해서 발현되고 그것이 방출이 되도록 하는 그 조치, 그 여정에 그 코스에 우리가 놀랍게도 이미 참여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과 지옥의 경계선, 성도가 곧 천국과 지옥의 경계선, 주 안에서 하나님의 성전의 문이 된 상태가 일어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우리가 말씀을 어떻게 지킵니까? 물으신다면 이미 말씀이 알아서 말씀대로 사는 사람으로 만들었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말씀의 좋은 쪽을 택하지 말고 말씀의 위배되는 쪽에서, 그것이 우리 속에 발현될 수 있도록, 주께서 우리를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는 바로 사랑의 관계, 축복의 관계, 자기를 부인하고 주의 약속만 드러내는 그런 관계속에 우리가 이미 놓여져 있는 겁니다. 이게 말씀의 완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잘난 체 하다가 어린아이한테도 무시당할 정도로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발각될 때에 그것이 하나님의 성도의 가는 길임을 저희들이 새삼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 힘으로 지켰다고 여길 때 그것이 자기 의로 굳어지고 딱딱하게 되고 암세포가 된다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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