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서

고란도서2-4 광주강의 050225

아빠와 함께 2014. 5. 12. 08:31

05광주강의(실로암교회) 05 - 고린도전서2-4 

                                                                05,02,25    강의: 이근호 목사


◈ 목사님, 조선시대 사람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지난 시간의 해답을 말씀을 안 드렸습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불쌍히 여기면서도 지옥에 잘 갔다' 하는 식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조선시대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천국에 갈 것이냐, 지옥에 갈 것이냐?' 라고,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고, 천국과 지옥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때문에 이미 확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보내야 할 사람을 만들어야 해요.  지옥에 가야 될 사람을 만들어 놓고 지옥에 보내고, 천국에 가야할 사람을 만들어 놓고 천국에 보내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지옥가야 하느냐I 하면, 거기에 앞서 먼저 천국 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만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냐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냐를 보여 주어야 하겠지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을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야 "은혜가 무엇이며, 사랑이 무엇인가?" 라는 것이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 열 처녀 비유 - 구원은 본인 행실이 아니라, 기름을 준비하라는 주님의 요건 !!

마태복음 15장에 이런 비유가 나옵니다.  열 명의 사람이 있는데, 열 명 다 처녀입니다.  이들 중에서 이혼한 사람이 있다거나, 동거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다 처녀라는 말입니다.  다만 여유 분의 기름을 준비했다는 것과 준비하지 못했다는 것의 차이가 있지요.  

그런데 기름 준비한 그것을 다섯 처녀가 기름 준비할 때 신랑이 와 버려요.  미처 기름 준비 못한 사람들이 기름을 사러간 사이에 말입니다.  그들이 사서 돌아올 때 신랑이 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한 명도 도착하기 전에 신랑이 왔어요.  왜 그렇습니까?  다섯 처녀만 혼인잔치에 참석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여기에서 기름이 등장한 것은 사실 핑계에(?) 불과합니다.  애초에 다섯 명만 들어가도록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본인의 행실이 아니라, 기름을 준비하라는 주님의 요건 때문에 천당에 가고 지옥에 가는 것이지, 그 사람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예수를 믿으면 구원시켜 줄게" 라고 요한복음 3장에서 말했잖아요.  그러면 날 때부터 불교 집안에 태어나서, 학교도 불교 재단학교에 다니고 그러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조차 없었잖아요.  이것은 마치 주일학교 학생의 질문처럼, "조선시대에는 목사도 없었고, 선교사도 안 왔고, 교회도 없었는데 어떻게 됩니까?" 하는 것과 같은 말이지요. 

이것은 일부러 천국에 못 오도록 가로막는, 즉 사랑을 못 받도록 하는 그러한 작업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기어이 지옥에 갈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는 하나님의 솜씨에 대해서 찬양해야 되지요.  "야, 주님 참 끈질기다. 역시 하나님의 능력은 대단해!" 라고 찬미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이런 소리해서 얼마나 욕을 많이 들어먹는지 모르는데, 하지만 성경을 한 번 찾아봅시다.  누구 말이 맞는지 말입니다.  시편 69편 27, 28절입니다.

(시 69:27)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시 69:28)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이 말씀은, "죄를 짓게 해서라도 기어이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신다" 라는 것이지요.  신약시대에는 이러한 역할을 누가 합니까?  구약의 여호와가 하시는 일을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하시지요.  구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을, 빈틈없이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성취해 내시는 그런 자리에 지금 주님이 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예수'가 아니고, '주 예수' 라는 것입니다.  '주 예수' 라는 말은, 구약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을 다 성취해서 오직 사랑을 입은 자에게만 천국을 허락하시는 그런 분이란 말이고, 이런 주님의 활동 때문에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 열 처녀의 비유 - 공평의 원리는 없다 !!

사실 조금 전에 말한 열 처녀의 비유에 있어서 공평의 원리는 없습니다.  인간 측에서 보자면 전혀 공평하지 않지요?  그리고 디모데전서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만민이 구원되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구원을 얻기 위한 어떠한 장벽도 하나님은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구원을 결정할 때 인간들이 "너는 이런 죄를 지었으니 구원을 못 받아, 너는 이런 삶을 살았으니 반드시 구원받게 되어 있어" 라는, 이런 것들은 하나님 앞에 안 통한다는 말입니다. 

구원의 조건에 그 사람이 유리하든 불리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그 모든 장벽을 허시고 자신이 원하는 자는 다 구원해 내시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편을 가르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름을 준비할 때, 기름을 준비하라는 소식이 다 같이 들었잖아요.  그것을 보고 공평하다고 생각하시는데, 과연 맞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꽃 한 송이씩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했다면, 어떤 사람은 금방 가서 꽃을 준비한 사람이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급한 일 먼저하고 나중에 준비하려고 한 사람도 있고, 아예 잊어버린 사람도 있겠지요.  우리 같으면 모든 사람이 꽃이 있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면 다 꽃을 준비해 오도록 기다리겠지요.  

그런데 다섯 처녀들은 미처 기름 준비가 늦었지만, 그래도 준비를 했는데 혼은 잔치 집 대문은 닫혔고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기름을 준비하라는 취지는 무엇입니까?  "내가 원하는 사람만 부르겠다" 라는 뜻입니다.  뭐가 어렵습니까?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이렇게 쉬운 이야기가 왜 납득이 안 되고 이상하게 들리는가 하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방법과 우리가 평소에 생각했던 구원방식이 너무나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려운 것이 아니고 다르기에 생소하다는 것입니다. 

◈ 왜 조선시대에 사람들이 살고 있어야 되는가?

조선시대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받는가?" 라고 묻지 말고, "왜 조선시대에 사람들이 살고 있어야 되는가?" 라는 것을 먼저 물어야만 합니다.   구원이 안 될 사람 같으면 아예 이 땅에 태어나지도 말게 하지, 왜 태어나게 해놓고 지옥으로 보내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 같은 인간이지만 천국에 가는 인간도 있잖아" 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천국에 못 가는 사람들을 배경에 깔아 놓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에 못 간 사람이 있어야만 천국에 간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간단한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설명을 해야합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고소하다'가 아니라 '고맙습니다' 라고 해야지요.  우리가 잘 나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조선시대처럼 복음이 우리시대가 아닌 200년이나 300년 후에 온다고 해도 우리는 할 말이 없어요.  

아니 만드신 분이 알아서 마음대로 하는데 우리가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그런데 하필이면,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복음이 전해져서 그 복음에 걸려들어서 구원받게 되었으니, 조선시대 사람과 비교를 해보니까 "이게 웬 떡이냐?" 라는 거지요.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렇게 감사한 일을 가지고, "조선시대 사람들은 왜 안 넣어 주는데요?" 라고, 이렇게 불평을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네가 하나님이냐?" 라고 하겠지요.  늦게 기름 준비한 다섯 처녀가 나중에 와서 얼마나 애절하게 문 열어 달라고 애원을 했습니까?  그래도 안 열어 주잖아요.  참 하나님이 비정하지요. 

◈ 달란트 비유 - 내가 있어나 없어나 열심히 일해라 !!

열 처녀 비유 다음에 나오는 비유가 달란트 비유인데, 달란트를 각 사람에게 나눠주면서 주인이 한 말이 있어요.  "내가 있어나 없어나 열심히 일해라" 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 달란트를 받은 게으른 종은 "이제 주인은 떠나는구나" 라고 생각해서 평소의 자기 본색을 드러내지요.  주인이 없을 때 자기 본색이 드러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은 재림하실 때까지 안 보이잖아요.  

주님이 보이지 않는 동안 이 인간은 자기 본색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오셨을 때에, "이 게으른 종아!" 라고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정으로 주를 사랑하는 자와,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척 하는 것을 주님은 다 아십니다. 

◈ 조선시대 이야기의 결론 - 구원은 오직 하나님 마음먹기에 !!

조선시대 이야기의 결론을 말하면, "하나님께서 사랑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어떤 특정한 시대에 사람을 보내셔서 살게 하셨다가 은퇴하게 하셨다. 그걸 통해서 아무나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만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잠시 그들을 엑스트라로 사용하셨다" 라는 것입니다. 

다시 고린도전서를 봅시다.  1장 4절입니다.  

(고전 1: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 하나님은 예수님만 구원하신다 - 성도는 '예수 안에서' !!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데 어떻게 주십니까?  우리에게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만 구원해요.  우리는 구원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구원받은 자는 예수님 안에 있어서 구원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임의로 어떤 사람을 내 안에 넣어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가 맡겨주신 생명만 내가 품는다" 라고 했지요.  양이 목자를 아는 것은 양이 똑똑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보낸 자만 예수님이 목자인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보내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쫓아내는 경우는 없습니다.  아버지가 보내셨기 때문에 아들 입장에서 가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보낸 자들을 예수님은 다 자기 품에 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예수 안에 있기에 하나님과 예수님간의 그 관계의 축복을 다 공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같이 결부할 때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령' 이라고 합니다.  성령 안에서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가 되듯이, 이 성령께서는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성령으로 연결되게 하시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성령으로 연결되게 하시고, 이런 관계가 바로 '삼위일체' 인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누구 중심이라구요?  우리 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안 중심으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소위 신학이라는 것이 누구 중심입니까?  우리 인간의 구원 중심으로 삼위일체가 펼쳐져서, 삼위일체가 완전히 장난이 되고 말았어요. 

예수님 활동중심의 삼위일체가 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인간 구원중심의 삼위일체가 되어서, 이런 삼위일체를 믿고 지옥에 가는 일이 생깁니다.   왜요?  그 안에서는 누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까?  자기가 구원받았다는 것이 들어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예수님이 활동하신다는 내용이 들어있는 삼위일체이어야 하는데, "나 구원받았다' 라는 것이 들어있는 삼위일체는 가짜라는 것입니다.  유사품에 속아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채표가 없으면 활명수가 아니듯이 말입니다. 

◈ 삼위일체 - 예수님 활동 중심이 아닌, 인간 구원중심은 다 엉터리 !!

예수님 중심의 삼위일체가 아니면 다 엉터리입니다.  "나 구원받았다" 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구원되었다" 라고,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면 구원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면 자기의 잘남은 어떻게 됩니까?  인간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십 년을 가도 같은 고백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누구 공로라구요?  예수님 공로이고, 무슨 은혜라구요?  십자가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럼 자기 자신은 어떻게 됩니까?  "나는 주 안에서 죄인인데, 그분이 나를 의롭게 하셨다" 라는 것입니다.   

◈ 예수 안에서 - 우리의 행위로 구원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 

앞으로 고린도전서 보면 '예수 안에서' 라는 말이 많이 나올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란 말은, 절대로 우리 자력으로, 우리의 행위로 구원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하는 이야기니까, 그렇게 알아들으시기 바랍니다.  전부다 예수님의 공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가 예뻐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아들 예수님을 기뻐하시기에, 그 아들 안에 있는 우리는 아들이 누리는 영광을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예수님께 보내셨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사랑을 공급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예수 안에서만 이루어져야지, 예수 밖에서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 성도가 예수 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 - 예수님의 다 이루심 덕분에 !!

그렇다면 예수 안에 있는데 탈락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이 아담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성령의 은혜로 예수 안에 있게 된 자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면서 "다 이루었다"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것을 확실히 믿지요?  그렇다면 그분이 십자가를 통해서 다 이루심, 그 안에 우리가 놓여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다 이루심에 근거해서 우리에게 용서와 은총이 계속해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갑자기 기도하기도 싫고, 성경 읽기도 싫고, 교회에 가기도 싫고, 목사 꼴도 보기 싫을 때가 있어요.  그러나 이것은 제가 볼 때,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그래요.  뭔가 안 좋아서 말입니다.  

우리나라가 축구를 하는데 지는 것을 보고 강단에 올라가서 설교하면 짜증이 나서 설교가 잘 안 되듯이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 몸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수시로 변합니다.  교회에서 혼자 조용히 기도하고 있는데 난로에 기름에 떨어져서 불이 꺼지면, 갑자기 몸이 추워지고 기도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이 어리석은 인간들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는데 뭐가 그리 걱정이냐" 라고 하지요.  그런 변화에 너무 신경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을 달리 표현하면 십자가 안에 있다는 겁니다.  십자가 안에 있는 자는, 십자가 안에서 통하는 그 자비와 사랑과 용서를 받게 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행동을 하던 간에 십자가가 주도권을 쥔다는 것인데, 이것을 고린도전서 1장에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받는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 고린도전서가 기록될 당시는 이미 60-70년 전에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거든요.  그런데 왜 70년이 지난 상태에서 십자가를 다시 거론합니까?  고린도 교회에서 왜 70년이나 지난 과거 이야기를 꺼내느냐는 말입니다.  

◈ 십자가 사건 - 시간을 넘어서 !!

그 이유는, 십자가 사건이 떠진 이상은 그것이 지나간 과거의 사건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구원이 십자가를 근거로 해서 이뤄지기 때문에, 그 이후에 나오는 어떤 행동과 무관하게 십자가는 효과 있게 적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3장 1절에서 그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리석은 자들은 십자가외의 것에 대해 자꾸 마음이 빼앗기는 것입니다. 

◈ 고린도전서 - 다양성이 아니라, 오로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한 분 !!

이제 십자가로 달려들겠습니다.  십자가에 빠져보는데, 고린도전서의 십자가로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사도 바울이 먼저 한 작업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몇 분입니까?  예수님 한 분이지요.  그러면 십자가 달리신 분이 예수님 한 분이라면, 그래서 구원받는다면 그 구원의 능력도 누구한테서 나옵니까?  예수님 한 분에게서 나오지요.  따라서 여기서 '하나'의 원칙, 즉 다양성이 아니고, 다양함은 전부 하나로 모아져야 됩니다.  이것을 고린도전서에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 여러 파가 있었어요.  1장 12절에 보면, 바울 파, 아볼로 파, 게바 파, 그리고 그리스도 파가 있어요.  그런데 이 여러 파 중에 사도 바울 본인의 파도 포함되어 있지요.  그런데 자신을 지지하는 자들을 포함한 여러 파들에 대해 책망을 합니다. 

(고전 1:12)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우리나라에 '노사모' 라는 단체가 있지요.  소위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 인데, 이 모임을 누가 야단치고 누가 해체시켜야 합니까?  노무현 대통령 자신이 해체시켜야 됩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만약에 노무현 대통령이 사도 바울의 정신이라면 말입니다.  아니면 그대로 가고 말입니다.  미쳤다고 해체시킵니까?  얼마나 든든하고 좋습니까?

바울은 말하기를 13절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라고, 이렇게 나옵니다.  즉 바울의 이름은 없애버리라는 말입니다.  아울러 아볼로 이름도 없애라고 합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인간들의 이름을 없애버리면, 뒤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이름이 남는다는 말입니다.  

(고전 1: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이것이 뭐냐 하면, 교회라는 것이 자꾸 눈에 보이는 사람의 경험담과 지식에 의존하는 경향이 많아요.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2,000년 전에 십자가를 지신 분이 누구냐?" 하고, 그 십자가의 능력을 믿는 것이 믿음인데, 눈에 보이는 사람이 등장해서 "날 따르라!" 라고 나오니까, "나를 따르는 사람은 이단이다" 라는 말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문제는 있어요.  "나를 따르는 사람은 이단이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이 이건 정통이다" 라고, 또 이렇게 나와요.  이런 사람은 할 수 없어요.  말려도 안 되고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무한 논리가 아닙니까?  돌고 도는 말입니다.  "나를 따르면 이단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정통이라고 생각 안 하고, 이것도 부정하는 사람이야말로 정통이니까 그 사람을 따르자" 라는 것도 말이 안 되지요. 

◈ 사도바울 - 십자가를 지신 분은, 너도나도 아니고, 오직 예수님 밖에 없다 !!

사도바울이 말한 것은 이런 무한 논리를 이야기 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지신 분은 몇 분이라구요?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오직 예수님 밖에 없다" 라는 말이지요.  손가락은 달을 가리키고 있는데 "네 손가락이 굵다' 라고, 이렇게 나오면 됩니까?  중요한 것은 손가락이 아니라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본인이 생각해도 십자가를 안 믿고 예수도 안 믿는데, 예수를 안 믿는 것이 하나님께 발각될까 싶어서 믿는 척 하는 거예요.  의외로 신학생이나 목사들 가운데 이런 사람이 굉장히 많습니다.  목사 초반에는 믿는 것 같은데, 목회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짙어집니다.  그러다가 목회 10년 정도 하면 "그래, 하나님은 없는 거야' 라고, 이렇게 결론을 내라고 자기 목회를 자기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밥벌이 목회가 되는 것이죠.  밥을 퍼주기는 뭘 퍼줘요?  순 사기꾼들입니다.   

왜 이런 결론이 나오는가 하면,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어떻게 나를 이렇게 고생하도록 내버려두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종으로 이렇게 헌신하고 살았는데, 주님이 계신다면 나를 이런 비천한 처지에 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말이지요.    

상황이 이쯤 되면, 지금까지 괜히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면서 살아온 것이 후회되지만, 그래도 이것을 숨겨야 하는 이유는, 교인들이 알면 목사 자리에서 쫓겨나니까, 그냥 모르는 척 하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처럼 오히려 더 과장해서, 자기 믿음이 없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하지요.

이런 방법 중 하나가 '교회의 조직강화' 라는 것입니다.  무조건 윗사람의 말에 복종하기 말입니다.  그 근거가 뭐냐 하면, 교회는 군대라는 겁니다.  디모데후서 2장에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지요.  군대는 고참이 있고 졸병이 있으니까, 대장은 목사인 자기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딤후 2:3)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딤후 2:4)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 교회를 믿는 사람은 결국 불신자 !!

그러니까 교회를 믿는 사람은 결국 불신자란 말입니다.  정말이지 놀라운 공식입니다.  이것 시험에 나오니, 꼭 외우세요.  "교회를 믿는 사람은 불신자다" 라고 말입니다.   누가 교회를 믿느냐 하면, 목사가 잘 믿어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안 믿고, 그 대신 보이는 교회를 믿지요.  아니 이게 무슨 자기 직장이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슈퍼마켓을 한다고 하면, 누가 슈퍼마켓을 믿습니까?  가끔 오는 손님이 믿습니까? 옆집 부동산 아저씨가 믿습니까?  누가 믿습니까?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그 사람이 슈퍼마켓을 믿잖아요.  자기 밥벌이 수단이니 말입니다. 

목사가 재산 다 털어서 교회가게를 열어놓으면 그 교회를 누가 믿겠어요?  목사는 그 교회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고 장렬한 순교를 각오하겠지요.  그러나 정말 예수님을 믿는다면, 설교시간에 "교회를 키웁시다, 교회를 잘 되게 합시다' 라는, 이런 개소리는 안 나옵니다.  교회의 머리되시는 분은 예수님이고, 그러니 교회를 안 믿고 예수님을 믿는 그 모임을 두고 '교회'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있으면 교회는 있는 겁니다.  제가 첫 시간에 말씀드렸지요.  가족에 대해서 말입니다.  가족이란 사람들의 모임이지만 우두머리가 있게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우두머리는 예수님입니다.  교회 자체가 아니고 말입니다.  

기성교회 불만을 품고 따로 나가 교회를 세우면, 자신들이 세운 건전한 교회를 믿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건 또 하나의 이단이 새끼를 친 거예요.  예수를 믿어야지 기성교회 부정하고 개척교회 세웠다고 해서 그 교회를 믿으면 안 됩니다.  당회장 목사에게 시달린 부목사가 그 교회를 나와서 개척교회를 세웠는데, 그런데 자기 교회에 부교역자 오니까 얼마나 핍박을 하는지 모릅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군대시절에, 고참이 경상도 사람인데 전라도 졸병이 오니까 얼마나 구박을 하는지, 정말 힘든 세월을 보냈는데, 그 사람이 자기 졸병을 맞았는데 이 사람은 경상도 사람이었는데, 예전에 당한 것을 자기 졸병에게 그대로 행한단 말입니다. 

이런 연쇄 고리를 끊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어떻게 합니까?  자기 자신을 십자가 앞에서 부정하지요.  "나는 십자가 진 적 없다" 라고 하면서 자신을 바라보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그게 십자가의 정신을 아는, 성령은 받은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럴 경우, 진짜 믿는 사람은 여전히 십자가만 바라보며 믿겠지만, 평소에 십자가를 안 믿고 사도 바울의 말을 믿은 사람 같으면, 바울의 이런 말을 듣고 교회를 떠날 것입니다.  평소에 눈에 보이는 지도자 바울을 믿었는데, 자신을 믿지 말라고 하니까 더 이상 믿을 대상이 사라져 버렸으니 말입니다.  여기서 17절을 보겠습니다.  

(고전 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예수님이 나를 보내심은? - '나'를 ( ) 속에 !!

이 말이 참 어려운데, 지금 예수님과 자기 중에서 누가 눈에 보입니까?  예수님은 눈에 안 보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나를 보내심은" 라고 할 때,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느끼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자신을 긍정하기 위해서 없는 예수를 이용한다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은, 사도 바울이 "예수님이 나를 보내심은" 라고 할 때, 사도 바울이 눈에 보이지만 이것을 없는 것처럼 괄호 안에다가 과감하게 집어넣는단 말이지요.  이런 교회가 제대로 된 교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다 괄호 안에 마구 집어넣는 것입니다.    

저는 실로암 교회가 이런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분명히 목사님이 계시지만 있는둥 없는둥 해야 되요.  우리교회 이근호 목사 있지만 있는둥 없는둥 해야하고 말입니다.  우리 교인들이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사실은 일종의 무시지요.  사모님이 들으면 화나는 이야기지만 말입니다. 

물론 예수도 안 믿고 목사를 무시하는 이런 사람은 할 수 없는 것이고, 그런데 예수를 믿고 목사를 무시하면 이런 사람에 대해 목사는 오히려 감사해야지요.  "진짜 예수 믿는 자들이 있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보내심은" 라고 할 때, 자기는 무엇을 했다구요?  "나는 십자가 안 졌다" 라고 했지요.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나'를 괄호 안에 집어넣어요.  없는 것으로 간주한단 말이지요.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에서, '나'가 빠지니까, "내가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다" 라는 것이 빠지겠지요.  그 뒤에 뭐가 나옵니까?   예수님이 친히 십자가 지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만 남는다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중요합니다.  꼭 외우세요.  시험에(?) 나오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교회에서 "그 교회가 이단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예수님 아닌 '나'에 괄호를 치느냐 안 치느냐로 구분하면 됩니다.  '나'를 괄호 안에 안 넣으면 모두가 다 이단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다" 라는, 이것으로 다 끝나는 거예요.  왜 그런가요?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 때문에 구원받기 때문에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고린도전서를 다 살피려면 10년도 넘게 걸리겠는데, 그리고 17절에서, '말의 지혜'도 역시 괄호 안에 집어넣지요.  '말의 지혜'는 필요 없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라는 것만 강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미 수십 년 전에 일어난 과거 사건입니다.  그런데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 지금 현재 고린도 교회에 실제로 적용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성경을 읽으면서 깜짝 깜짝 놀라야 합니다.  "내가 이런 놀라운 사실을 믿다니, 이건 내 능력이 아니야. 수십 년 전에 일어난 사건 때문에 지금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믿게 되다니, 이건 놀라운 축복이야. 그렇다면 나는 지금 죽어도 낙원에 가는구나!' 라고 하는, 이런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고린도전서에는 그 은혜에 감사하고 찬양하라고 하지요.  이제 18절 봅시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십자가의 도(언약)는,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을 나누는 조치를 !!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라고 했는데, 지난 시간에 한 것 다시 해봅시다.  '십자가의 도'가 하는 일이 두 가지고 있지요.  언약은 두 가지로 결과물이 나오게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을 나누는 조치가 안에 들어 있다고 했어요.  다시 말해, 분명 '십자가 도'는 하나인데 나오는 결과는 두 개로 갈라져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천국이고, 또 하나는 지옥이고 말입니다.  

여기서 다시 설명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누구든지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구원받는다" 라고 했지요.  행하지 아니하면, 마치 모래 위에 세운 집처럼 무너지고, 듣고 행하게 되면 반석 위에 지은 집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 라는 구절을 사도 바울은 어떻게 해석했는가를 살펴봅시다.  아버지의 뜻을 누가 행했다구요?  예수님이 행했잖아요.  그런데 아까 고린도전서에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이 반드시 구원한다고 했지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하지요?  그리고 십자가의 도가 천당 가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행하심이 은혜로 주어지고, 지옥 갈 사람한테는 미련하게 들려서 거부하게 된다고 했지요.

십자가는 모든 자들이 멸망해야 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런데 이 십자가의 도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진 자가 있어서, 이들은 천국에 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자는 지옥에 간다는 말이 취소됩니까, 유효합니까?  계속해서 유효해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십자가의 도가 은혜를 준 자에게만, 결국 천국으로 간다는 것이 성립이 되고 말입니다.

◈ 십자가를 거부해서 지옥 갈 사람이 반드시 나타나기 마련 !!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 이라고 했기에, 십자가를 거부해서 지옥 갈 사람이 반드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복음을 전해서, 그 반응이 미련한 소리한다고 나오거든 복음을 제대로 전했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소리가 안 나오면 엉터리로 전한 것이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방금 제가 한 이야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시비를 걸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사도 바울처럼 그렇게 해석해 버리면, 십자가 도를 아는 사람한테는 예수님 말씀은 이제 안 지켜도 되겠네요?"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지킨다, 안 지킨다" 라고 말하는데 사실 지킬 수가 없습니다.  못 지키는 것을 가지고 건방지게 "안 지켜도 되겠네요" 라고 하고 있어요.  웃기는 짜장면들(?)입니다.  누구도 못 지킵니다.  지키라고 해도 못 지킵니다.  

그런데 성화론 자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지" 라고 합니다.  '지켜야지' 라는 말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지켜야지' 라고 다짐했다고 해서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탐내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탐내지 말아야지' 라고 결심했다고 해서 그 자체가 탐을 내지 않는 것입니까?  오히려 반대이지요.  그런 마음이 드니, 그런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문제는, 탐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니까 탐내더라도 탐을 안 낸 것으로 인정해달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마음대로 입니다.  지킬 수 없는 것을 자꾸 '지켜야지' 하고 떼를 씁니다.  목사가 교인에게 "성경에 거룩하라고 해서 내가 거룩하라고 했는데, 그게 뭘 잘못했냐?" 라고 나옵니다.  

목사:  거룩하게 사세요.
교인:  목사님이나 거룩하게 사세요.
목사:  나는 거룩하게 사는데, 하루 세 번 정한 시간 기도하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교인: 그게 무슨 거룩입니까?  그게 거룩이면 나도 거룩합니다.  아침에 나가서 장사하고...

교회에서 서로 누가 더 거룩한가 경쟁하고 있어요.  그런데 '십자가의 도'가 어디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에서 나온 말이 바로 '거룩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배경으로 해서 나온 말입니까?  십자가의 도를 깔고 나온 말이라는 것입니다. 

◈ 거룩하라 - 왜 십자가의 도가 능력으로 다가와야 하는가를 !!

그러니 '거룩하라'는 소리를 듣고 거룩하려고 애를 쓰지요.  이렇게 거룩을 힘쓰면서 성도는 무엇을 느낍니까?  왜 십자가의 도가 나에게 능력으로 다가와야 하는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하라' 라는 말을 우리보고 얘기를 하지만, 실상은 '십자가의 도'가 이 말씀을 이루어서 우리에게 선물로 준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거룩하라'는 말씀은 십자가의 도가 이미 십자가를 통해서 다 이루시고 그냥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 성령 -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 !!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을 내립니다.  "내가 거룩을 이루겠다는 그 사실 자체가 주님께서 이루신 거룩을 모독하는 것이기에, 그것이 바로 죄이다" 라는 사실을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신약에는 십자가의 도가 깔린 채 "거룩하라. 돈을 사랑하지 말라" 라고, 이렇게 나온다면, 그러면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은 누가 지킵니까?  십자가의 능력이 지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데,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그것 말고 또 따로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지" 라고 주장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교인들이 농담으로, "교인 수가 더 많아지면 예배당을 지어야 하는데 돈이 없으니 로또복원을 살까요?" 라고 해요.  만약 이럴 경우 "로또복권을 사지 마세요" 라고 하면 안 되요.  그런 것은 성경에 없는 얘기인데,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지 로또복원 사지 말라고 하지 않았잖아요.

하나님은 로또복권 25억에 당첨시켜서 돈을 사랑하는 인간의 죄성을 고발해서 회개시키기도 하고, 또 로또복원이 하나도 당첨이 안 되어서 "내가 왜 헛된 꿈을 꾸었나?' 라고 회개케도 하시는데, 이런 저런 방법 선택은 하나님이 그때그때 다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던 회개만 나오면 되요.  어떤 방법을 사용하시든 그것은 관계없어요.  이것은 회사도 마찬가지인데, "노조를 할까요, 말까요?' 라는 것은 사실 간단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조를 만들게 해서 회개를 시키든지, 아니면 노조를 탈퇴해서 회개시키든지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어떤 방법이든 주의 뜻은 "돈을 사랑하지 말라" 라는 것이거든요.   

노조를 가입해서 대모해서 월급이 예전보다 100만원이 올랐을 경우에, "주여, 제가 100만원 때문에 이렇게 악을 썼습니다" 라고 회개케 하시는 방법도 있고, 노조에 탈퇴했는데 회사측에서 노조한 사람을 쫓아내고 자기는 월급을 더 줘서 "내 평안을 위해 동료를 팔았군요' 라고 하면서 회개하는 방법도 있고, 이렇게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선택을 했건, "나는 잘했어" 라고, 이렇게 나오면 안 됩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심방을 갈까, 말까?  심방을 가면 나올까,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좋을까?' 라고, 이런 것을 따지는 자체가 믿음 없는 짓입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을 어떤 방법을 사용하시든 유익하도록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 성경에 그런 것이 어디 있더냐?

그러기에 방법론으로 스스로를 자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방법론으로 자책하면 이것이 마귀의 시험입니다.  이것 때문에 목회자들이 사실은 갈등을 많이 해요.  "목사님, 남편이 내 허락 없이 돈을 빼돌려 비자금을 조성했는데, 그도 신앙인인데 내가 이것을 지적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그런데 이건 절대로 내가 돈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남편과의 신뢰성 때문입니다" 라고 할 때, 하나님의 응답은 뻔합니다.  "성경에 그런 것이 어디 있더냐?" 라는 것입니다. 

◈ 항상 마지막에는 회개의 열매를 맺도록 !!

그러니 어떤 선택을 해도 괜찮아요.  단지 주께서는 어떤 방법이든 마지막 결론은 "내가 쓸데없는 것 때문에 고민했었구나" 라고 하는 회개가 나오게 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이 점을 잘 아시고 기도하실 때, "주여, 제가 어떤 방법을 취하든 결론은 제가 쓸데없는 짓을 했음을 회개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라고 기도하면, 주께서는 한 수 더해서 "그런 쓸데없는 것 왜 구하느냐?" 라고 하시지요.

이렇게 하나님은 반드시 마지막은 회개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아무튼 이렇게 마지막은 항상 회개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5분 쉬고 좀 더 할까요?  갈 길이 멀고 하니 오늘은 그만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2005년 4월 15일 16시 34분  녹취 마침.  서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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