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광주강의(실로암교회) 02 - 고린도전서2-1
05,02,25 강의: 이근호 목사우 집사님 아직 안 오셨는데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기도하고 시작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발걸음을 인도하시고 마음을 주장해 주셔서, 약속된 시간에 약속된 장소에서 다시금 얼굴을 볼 수 있도록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자리가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던 그 내용만 담길 수 있는 귀한 자리가 되게 해주시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인가, 우리가 어떻게 구원되었는가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공로에 대해서 찬미하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 말씀은,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
지금 우리는 고린도전서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가 어디 있는가 하면 신약성경 안에 있고, 263쪽에 고린도전서가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만이 성경이 아니고, 그 앞에도 성경이고 그 뒤에도 성경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면 그 앞에 있는 내용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고, 그리고 그 뒤에 있는 내용도 아셔야 합니다.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이렇게 해서 전체적인 내용이 구성이 됩니다.
제일 앞부분이 창세기, 제일 끝에 요한계시록 이 틈바구니에 고린도전서가 있는데, 우리는 고린도전서의 내용이 뭐냐, 그 속에 하나님이 어떤 이야기를 하셨는가, 지금 이것을 알아보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이 성경의 앞부분과 뒷부분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이것만 달랑 떼 내어서 해석해 버리면 오해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늦게 오신 집사님이 계셔서 다시 한번 설명하겠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놓치면 안 됩니다. 처음의 내용을 잘 안 들으면 나중에 꼭 그 부분에 대해서 질문이 나와서 제가 귀찮아서 안 되겠어요. 제 시간에 오신 분은 두 번 들으시면 됩니다.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고린도전서를 떼 내어 생각하면 어떤 오해를 하느냐 하면, "고린도전서는 교회에 관한 책이다" 라고 오해해요. 제가 방금 오해라는 말을 했지만, 사실 제가 본 고린도전서에 관한 책들이 전부 이런 식이에요.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고린도전서는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서신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올바른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즉, 참 된 교회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고린도전서를 주셨다" 라는 거예요.
◈ 성경에서의 교회 - 손에 잡히지 않는다 !!
그러나 저는 이런 주장들에 대해서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성경에서 교회라는 것은 손에 잡히지를 않아요. 이것이 오늘 제 강의의 첫 번째 어려운 대목인데, 교회라는 것은 손에 잡히지를 않는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가족' 이라는 개념을 생각해 봅시다. "가족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답변하는 분이 말하기를, "예, 저랑 아내랑 두 아이 이렇게 다섯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가족이 몇 명입니까?" 라고 물었으면, "몇 명입니다" 라는 게 말이 되지만, "가족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는데, "다섯 명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정답이 아니지요. 가족 중 한 사람이 멀리 외국에 가있으면 현재 집에는 4명뿐인데, 그러면 떠나 있는 사람은 가족이 아닙니까? 아니지요. 떠나 있으나 같이 있으나 가족은 가족이란 말입니다.
◈ 가족 - 내가 없으면 너도 없다 !!
그렇다면 가족이 가족 되게 하는 그 요소는 무엇입니까? 이것을 좀 유식한 표현으로 '혈연관계' 라고 하지요. 혈연관계가 무엇인가 하면, "내 없으면 너도 없다" 입니다. "나는 아버지고 너는 자식인데 내 없으면 너도 없는 것이다" 라는 겁니다. 이런 관계가 가족이지요. 즉 자식이란 아버지의 확대입니다. 자식은 어디에서 생기느냐 하면 부모가 확대되어서 자식이 됩니다.
가족이 무엇이냐고 할 때는, 아버지나 엄마 중심 즉, 부모 중심 체제가 가족입니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이 있을 때 부모 중심 체제, 자식을 낳기 전까지는 남편 있고 아내 있고, 이렇게 남자 중심으로 가족이 있지요. 결국 가족이 무엇이냐를 말할 때, "누구의 가족이냐?"로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족을 이렇게 어렵게 설명하는 사람도 없습니다만, 인내심을 가지고서 들어주세요. 가족의 가장이 누구냐를 묻잖아요. 이것을 가지고 혈연관계 즉, 피로 맺어진 관계 아닙니까? 피로 맺어진 관계라고 해서, 헌혈할 때 피 뽑는 간호사와는 혈연관계가 아닙니다. 사실 말로는 혈연관계라고 하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관계지요. 손에 잡히지 않는 관계를 가족이란 말을 쓰면서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어요.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거예요. 이 세상은 꼭 손에 잡혀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손에 잡히지 않는 가족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그런 추상적인 것이 오히려 힘이 되는, 그것이 오히려 이 사회의 근간이 되고 힘이 되어 이 사회가 이상스럽게 돌아가요.
가족도 이러할진대, 교회라는 것은 더더욱 어려워요. 교회는 누구 중심이냐 하면 예수님이 중심 되는 영적인 혈연관계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있어요. 가족이 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무엇인지 잡으라고 하면, 가족이 잡히지 않는 것처럼 교회도 잡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가족이란 것은 가장이 있어서, "그에게 아내가 누구입니까, 자식이 누구입니까?" 라고 물으면, 누가 가족인지 알 수 있지만, 교회에 주인 되시는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누가 가족인지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가족이란 개념 구성하기도 힘들어요. 이렇게 힘이 들기에 가짜가 많이 양산되지요.
고린도전서가 바른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있다고 주장하면, 이것은 잘못 된 겁니다. 왜냐하면, 교회라는 것을 일단 있다고 여기고, 그 다음에 "바른 교회를 한 번 해볼까?", 요새 말로 "한번 개혁을 해볼까, 한국교회를 개혁해볼까?" 라고 할 때, 이 말이 잘못된 이유가 뭐냐 하면, 한국교회라는 것 자체가 성립이 안 되거든요. 성립이 안 되는데 뭘 개혁합니까?
이런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어떤 가족이 놀이동산에 놀러 가는데, 누가 묻기를, "이 가족이 김씨 가족 맞지요? 김씨 가족을 한 번 개혁해 볼까요?" 라면, 이게 말이 됩니까? 가족이란 관계는 이미 완성된 관계지 뭐가 부족해서 개혁해야 할 것이 없어요.
◈ 어떤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면, 그 교회는 애초부터 교회가 아니었다 !!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어떤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면 그 교회는 애초부터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개혁해야 할 교회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고, 인간들이 생각하는 가짜 교회였음이 들통이 나는 것이지요.
제가 이렇게 교회라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가, 사람들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것 전체를 봐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고린도전서만 빼서 보잖아요. "성경 전체에서 고린도전서가 어떤 내용이냐?" 라고 보지 않고, 그냥 고린도전서만 뽑아서 보면, 고린도전서에 교회가 있으니까, "아하, 여기 교회의 모델이 있네. 내가 다니는 교회와 성경에 나타난 고린도교회를 어떻게 일치시킬까?" 라는 식으로 고린도전서를 보게 된다구요.
현실 교회가 엉터리 교회인데 엉터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현실 교회를 교회로 인정한 상태에서 "우리 교회는 부족한 것이 많을 거야. 그런데 고린도전서에 보니 그기에 참된 교회가 나오니까, 현실 교회를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교회와 일치시키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교회 되겠지" 라고 잘못 생각하는 겁니다.
목사가 고린도전서를 이런 식으로 가르치면, 교인들은 자꾸 교회를 보는 거예요. "바른 교회 되어야 하는데' 라고, 자꾸 이런 생각을 한단 말이지요. 그러나 이렇게 되면 성경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교회를 믿는 사람이 되겠지요. 주님의 사람이 아니라 교회 사람이 된다구요.
교회 사람이 되면 결국 교회는 친목단체가 되고, 그 교회를 출석하는 사람은 친목단체 회원이 되는 거지요. 사교클럽의 맴버 밖에 안 되는 거예요. 취미단체의 취미 생활하는 것이고, 계모임이지요. 그래서 "여기서 당신은 뭘 믿습니까?" 라고 물으면, "우리교회가 참된 교회인줄 믿습니다" 라고, 이렇게 나와요. 자기가 소속된 그 단체를 믿어버리는 모순에 빠지지요?
◈ 믿는 대상 속에는 내 것이 조금이라도 포함되면 안 된다 !!
여러분 한 번 생각을 해보세요. 뭘 믿는다고 할 때, 믿는 대상 속에 자기 자신이 포함되어 버리면, 이건 믿는 것이 아니고 그 속에 있는 자기를 재확인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그런 것은 믿는 게 아니라는 말이에요.
만약에 제가 체구가 작기에 그래서 체구가 큰 사람을 믿는다, 혹은 의지한다고 할 때는, 그냥 큰 덩치에 기대서 의지하면 될 텐데, 그 덩치 큰 속에 자기가 들어가 있다면 "나는 당신을 의지합니다. 믿습니다" 할 때는, 덩치 큰 사람은 안 보이고 그 안에 들어있는 자기에 대해서 긍정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는 내 것만 챙기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지요. 자기는 자기가 기대하는 것에 대해 정당하다는 식이 되어 버리지요.
다시 말해서, 자기가 이 교회 안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가 "교회를 믿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교회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있는 나를 놓지 않겠습니다. 절대 포기하지 못하겠습니다" 라는 뜻이에요. 왜요? 그 교회 속에는 자기가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니 이게 무슨 믿는 것입니까? 생뚱맞게, 자기가 토한 것을 도로 삼키는 것이지 말입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믿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는, 예수님께서 이러한 점을 아시고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라고 했지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 속에는 우리가 전혀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없으니까 우리의 것은 생각하지 말고, 전적으로 예수님의 것만 의지하고, 그기에 기대고, 그기에 풍덩 빠져버리라는 것입니다. 그게 믿는 것 아닙니까? 이걸 어렵게 말해서, "믿는 대상 속에는 내 것이 조금이라도 포함되면 안 된다" 라는 말입니다.
좀 쉽게 말하면, 여기에 꽃이 있는데 어떤 집사님이 지난 주일 여기에 꽂아 놓았습니다. 다른 사람은 별 관심이 없지만, 꽃을 장식해 놓은 집사님은 얼마나 그 꽃에 관심이 가는지 몰라요. 그런데 목사님이 광고 시간에 "누가 꽃을 장식했습니까? 다음 주부터 교회 나오지 마세요" 라고 했다면, 얼마나 그 목사가 밉고, 교회가 밉고, 모든 것이 밉겠습니까? 그러나 자기가 장식해 놓은 꽃은 미워할 수 없어요. 왜, 자기가 가져다 놓았기 때문이에요.
늦게 오신 분이 있어서 다시 하겠습니다. 처음부터 계시던 분들도, 지금까지 전개한 논리가 어려워서, 다시 한 번 더 듣는 것이 좋습니다.
고린도전서라는 것이 성경 중간에 들어 있잖아요. 맨 처음에는 창세기, 끝에는 요한계시록으로 말입니다. 그러니 이 고린도전서는 이렇게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고 해서 전체가 연결된 속에서 고린도전서가 있습니다. 그런데 앞뒤 보지 않고 고린도전서만 빼서 보면, 어떤 오해가 생기는가 하면, "이것은 교회를 위한 책이다" 라고, 이런 생각을 해요. 무슨 의미인고 하니, "현재 우리가 다니는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상적인 교회로 만들기 위해서 고린도전서를 참고서로 주셨다" 라고 오해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눈에 보이는 기존 교회가 교회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되는 이유가, 교회 주인은 예수님인데, 즉 예수님이 주가 되시고 예수님이 머리되는 곳이 교회라고 성경에서는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족의 가장이 놀이동산에 놀러 가면, 아이들 손잡고 그 아내가 뒤따라가고 하면, 보는 사람들이 "아, 한 가족이 놀러가는구나!" 라고 아는데, 그런데 교회의 가장되시는 예수님은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잖아요. 안 보이니까 가짜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눈에 안 보이는 교회를 억지로 눈에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틀을 만드는데, 제일 높은 곳에 목사가 있고, 제일 밑에 사찰 집사가 위치하고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어떤 조직체를 갖추고, 노회를 만들고, 교단을 세우고 해서, 얼기설기 남들 보기에 하나의 조직적인 틀이 있음으로써, 그것이 마치 하나님도 인정해 주시는 교회인 것처럼 꾸밀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거예요. 그것을 흔히 '현실교회' 라고 말들 하잖아요.
◈ 현실교회가 불완전하니 본받으라고 고린도전서를 주셨다 ??
이렇게 현실교회가 있는데, 그런데 이 고린도전서의 교회는 뭐냐하면, "현실교회는 불완전하니까 이상교회인 이 고린도교회를 본 받으라고 고린도전서를 주셨다" 라고... 이런 오해를 일으킨단 말이지요. 그러나 이러면 안 되지요? 교회라는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을 믿는 것인데, 예수님을 믿으면 믿는 대상 속에는 믿는 본인과의 공통성이 없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꽃을 예로 들어서 설명했잖아요. 교회당에 꽃을 장식해 놓았는데, 목사가 "꽃을 장식한 사람은 이제 교회에 나오지 마세요" 라고 하니까 기분 나빠하더란 말이지요. 왜 그런가요? 교회는 꼴 보기 싫어도 자기가 장식해 놓은 꽃은 미워할 수가 없잖아요. 자기 소유를 떼어서 교회가 옮겨다 놓았는데, 만약 이 교회를 미워해 버리면 자기가 장식해 놓은 꽃도 미워하는 모순에 빠진단 말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미워하는 모순에 빠졌다는 말은, 요한복음 12장 25절에 보면, "누구든지 자기를 미워하지 않고서는 구원될 수 없다" 라고 했지요. "자기 자신을 미워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자신을 미워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생명을 잃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2장에서 하셨다 이 말입니다. 이 얼마나 모순 된 이야기입니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요 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성 도: 예수님, 어떻게 하면 구원받지요?
예수님: 너 자신을 미워하라.
성 도: 예, 알겠습니다.
이게 믿음이 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자기 자신을 미워하면서까지 구원받고자 하는 그 자기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 아니고 뭡니까? 머리 나쁜 사람은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자기 자신이 구원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미워하라" 라고 하니, "예, 미워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미워한다구요. 그런데 이렇게 자기 자신을 미워하면서까지 안 놓치고 건져보려는 그 대상은 뭡니까? 결국 자기 자신이잖아요. 그러니 결과적으로는 뭡니까? 미워하는 폼만 냈지 궁극적으로 자신은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니 결국은 위선으로 포장한 것이지요.
지금 우리가 고린도전서를 공부하고 있는데, 성경은 창세기를 시작으로 마지막에 요한계시록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는 그 중앙 한 부분에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보다 좀 앞부분에 마태복음이 있는데, 마태복음의 한 대목을 가지고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무슨 내용이 나오는고 하니, 예수님께서 부자가 천국 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했지요? 부자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이야기지요. 왜냐하면 낙타고 바늘구멍으로 못 들어가니까요.
(마 19: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마 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야고보서 5장에,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부한 자들은 천국 가기 힘들다고 하니까, 가난한 자만 가는구나. 재산이 없어야 하는구나" 라고, 이렇게 성경을 해석하겠지요.
(약 5:1)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할 권리가 없다 !!
그런 해석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가 해석할 자격이 있는 것처럼 해서 나온 것인데, 그렇다면 예수님의 12제자의 성경 해석은 그냥 폼으로 있는 것입니까? 의외로 이 점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예수님 말씀의 해석을 우리가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고 있어요. 우리는 해석할 권리도 없고, 해서도 안 되고, 할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 7:21)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여기에 보면, "행하는 자라야" 라고 했지요? 마태복음 12장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밖에 와 있습니다" 라고 했을 때, 예수님 하신 말씀이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라고 했어요.
(마 12:47)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마 12: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마 12: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마 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이 마태복음 7장이나 12장의 말씀을 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본인이 해석할 자격이 되는 줄 알고, "아, 그렇구나! 이제부터 내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하리라" 라고 하면서, 예수님 말씀에 동의하고 그 말씀대로 지켜보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사도 바울의 해석은 뭐가 됩니까?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신 예수님 말씀을 누가 해석할 수 있는가 하면, 바로 사도들이 해석할 수 있는 거예요. 아무나 해석하면 안 돼요. 이 사실을 목사도 모르고 신학 교수들도 몰라요. 예수님 말씀의 해석권은 사도들이 갖고 있지 우리에게는 그런 권이 없다는 말입니다.
◈ 예수님의 말씀 해석은? - 오로지 사도들에게 물어 봐 !!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한 것을 가지고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을 받아야 깨닫게 되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부자가 천국에 못 간다면, 그럼 이 세상 부자들은 다 지옥 갑니까? 부자가 천국 못 간다는 말씀에 대한 사도 바울의 해석이 뭐냐 하면, 성령의 선물로 믿는 자가 구원 얻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해석입니다.
산상설교의 이 말씀도 마찬가지예요.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천당 가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간다" 라고 했는데, 사도요한은 그 예수님의 뜻이 두 글자로 '사랑 '이라고 말했어요. 그것이 요한일서 4장에 나옵니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사도들만이 해석할 수 있어요. 그래서 그 사도들이 예수님 말씀에 대해 뭐라고 했는가를 보고, 사도들은 성령 받은 사람들이니, 성령 받은 사람들의 성경 해석과 육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의 해석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한 번 대조해보라는 말입니다.
◈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대결 !!
육적인 사람은 기껏 '자기 행함' 밖에 믿을게 없어서 항상 "이것 행할까요? 저것을 행할까요? 몇 퍼센터나 행할까요?" 라고, 항상 이런 식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행한 것도 없이 의롭다 함을 받은 자가 누구냐?" 라고 나오지요.
(롬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사도는 "누가 복 받은 자인가?" 라고 나오고, 저쪽에서는 "내가 너보다 더 많이 행했는데?" 라고 나옵니다. 육적인 사람은 같은 육적인 사람끼리 서로 비교하고, 사도 바울은 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을 대비시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여겨지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원리 원칙이 되풀이 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입니다.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여기에 가만히 서 있는데, 저쪽 건너편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의논을 하시더니만, 죄를 알지도 못하신 성자 예수님을 죄인이 되게 만들어서, 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담당하셔서 우리는 졸지에 의인이 되어버렸다는 말이에요.
인도네시아의 지진을 예로 들면, 지진은 바다에서 났는데, 해변에 가만히 있는 나에게 집채만한 파도가 밀려오더니만 가만히 있는 우리를 덮쳐버린 것이지요. 우리가 파도를 일으켰습니까? 아니지요. 그냥 가만히 있는데 파도가 덮친 거예요.
◈ 사도바울의 성경해석 - 성부와 성자의 작업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작업 때문에 해일처럼 그 여파가 우리에게 덮치니, 우리도 모르게 확 쓸려갔는데, 그런데 우리도 모르게 의인이 되어버렸다는 말이에요. 이것이 곧 예수님의 구원에 대한 사도바울의 성경해석 전부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해석도 전부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바울서신을 봐야지 자기 마음대로 하면 안 되지요.
다시 말해,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그 육에는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해일이 왔지만 그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파도를 보면서 카메라로 촬영한 사람도 있죠. 그 사람은 해일과 상관없이 그대로 육이 머물러 있었어요. 그럼 이 사람에게는 해일이 왜 안 덮쳤는가? 그것은 저쪽에서 작업하는 분이 그 사람한테는 해일이 안 오도록 했지요. 그게 '예정론' 입니다.
◈ 바울서신 - 예수님의 말씀이 이 땅에 적용이 될 때는 이런 식으로 !!
사도 바울이 성경을 지어낸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이 이 땅에 적용이 될 때는 이런 식으로만 적용됩니다" 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바울 서신이에요.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건방지게 해석하려고 하지 말고, 성경 말씀을 해석하도록 위임받은 사도에게 맡겨야지요.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그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고 해요. 인간들이 그에게 사도의 직분을 준 게 아니에요. 사람들에게 사도의 직분을 받은 것이 아니란 말은, 사람들은 성경을 해석할 권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함부로 해석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했지요. 사실 사람들은 저주받을 짓을 해요.
(갈 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갈 1: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성경해석의 독점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바로 사도들입니다. 사도 이후에는 그 어떤 사람도 성경을 추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교회는 사도의 터 위에 세운 것이라고 하지요. 그러니 건방지게 기도원에 가서 은혜를 받았다고 함부로 성경해석을 하면 안 돼요. 예수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을 뒤에 있는 사도들이 어떻게 해석했는가를 찾아봐야 합니다.
◈ 고린도전서 - 고린도교회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 !!
고린도전서를 공부하려고 하는데 아직 시작도 못했어요. 고린도전서를 해석하려고 하는데, 앞에서 창세기가 끌어주고 뒤에서 계시록이 밀어주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하면 해석 자체가 안 됩니다. 앞 뒤 다 무시해 버리고 고린도전서만 달랑 보면, "아하, 교회는 이렇게 해야 하는구나" 하고 제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하게 된다구요.
예수님 말씀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밤에 유서 써놓고 자살해야 합니까? 실제로 이 구절을 읽고 아내와 자식을 살해하는 그런 경우도 있어요. 왜요? 예수님 말씀을 실천한다고 말입니다. "주님! 저는 주님 말씀처럼 아내나 자식을 주님보다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사도도 아닌 것이 제 멋대로 성경을 해석해서 그렇지요.
(마 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 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 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그런데 사도는 뭐라고 해석합니까? "예수님만 사랑하라"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사랑하는 것이 그 말씀의 의미라구요.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 라는 말씀도 같은 의미이고 말입니다.
(고전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그러면 왜 예수님의 말씀을 사도 바울은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냐 하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에 상대자가 있어요. 그 상대자가 누구냐 하면, 바리새인, 사두개인, 유대인들이에요. 즉 유대 신학이란 말입니다.
◈ 요한복음의 '육' - 유대신학 !!
예수님과 유대신학은 적대적의 관계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바리새인들, 즉 유대신학을 향해서 하신 말씀인데, 이것을 가지고 요한복음에는 '육'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라는 말씀이 있죠. 그리고 육과 예수님 사이에 구분되는 그 기준점을 가지고 고린도전서 1장에는 '십자가' 라고 했습니다. 십자가가 육에 속한 사람에게는 무척이나 미련한 것으로 보이지요. 너무도 천박하고 웃기는 이야기로 들려요.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우리를 구원할 유일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어지지요. 그리고 그 십자가만을 자랑하지요.
(고전 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2: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멸하느니라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여기에서 십자가만이 자랑이란 말은, 자기의 모든 행함은 절대로 자랑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절대 육의 행위가 자랑에 포함될 수 없어요. 십자가를 통해서 육이 무엇이며, 영이 무엇인가가 확연히 구분되기 때문에 우리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보아야 해요.
우리의 육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어요. 그러기에 이 십자가는 모든 육을 차단시켜 버리는 거예요. 육에서 나온 것을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육에서 나온 것을 자랑할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까? 저 바다 한 가운데서 밀려온 해일에 의해 휩쓸려가듯이,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육을 가진 인간이 의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을 보겠습니다.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의가 되는 그 대상자가 누구입니까? 우리지요. 이렇게 구원받은 우리는 무엇만 자랑하게 되겠어요? 자기 행함을 자랑할까요? 아니지요. 자기는 아무 것도 행한 것이 없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 라는 명찰이 붙게 되었어요.
◈ 성도에게 붙여진 명찰 - 하나님의 의(義) !!
만약 이 의가 우리의 행함으로 얻게 된 것이라면, 15년 동안 의의 명찰을 달고 있다가도, 우리가 죄를 범하게 되면 '하나님의 의'라는 명찰을 떼게 될 것을 염려할 수 있는데, 처음부터 이 의의 명찰은 우리 행함과 무관하게, 그분이 대신 담당하신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붙여주신 의의 명찰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짓는 죄 때문에 이 명찰을 떼게 될 염려가 없어요.
어떤 사람은 주장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된 것은, 법정에서 판사가 피고에서 선고하듯 그렇게 하나님이 선고해서 의가 되었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엉터리입니다. 그것을 '법정적 칭의' 라고 하는데 거짓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왜 이게 엉터리냐 하면, 아니 인도네시아 해변에 있는데 해일이 일어서 우리가 그 바닷물을 소유했습니까? 우리가 물을 가진 게 아니고, 물이 우리를 가졌잖아요. 하나님의 의가 우리를 갖고 있잖아요. 그런데 재판장이 왜 등장합니까? 만약 재판장이 법정에서 선포해서 의롭게 되었다고 하면, 그 사람은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자기 의를 자기가 간직해야 될 의무가 있어요. 그런데 그 의무를 평생동안 간직할 위인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 의(義)가 성도를 데리고 다님 !!
의가 우리를 짚어 삼켜서, '의' 라는 영역이 발생되어서 그 안에 잠식당해서 그 위력에 보자기처럼 휩싸여서, 그 의가 끌고 가는 대로 우리가 호되게 어디 가든지 의로움을 드러내는 의의 종으로서 발산될 뿐이지, 자신이 책임지고 지켜야할 어떤 여지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의인 된 것이 자기로 말미암아 된 게 아니라면, 이미 하나님의 의(義) 안에 들어 있는 이상, 처음에 찾아왔던 그 하나님의 의가 계속해서 우리에게 작동하도록 발휘하게 되어 있습니다. 가뭄에 수돗물 끊기듯 뚝 끊기는 것이 아니에요.
광주에 눈 내리듯 한 번 내리고 그치는 게 아닙니다. 지난 번 공부 때 엄청나게 내리더니만 오늘은 안 오네요.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내리는 것은 한 번 오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 지금도 내리고 있어요. 뭘 가지긴 가져요? 눈을 가집니까? 눈에 아예 파묻히지 말입니다.
왜 이런 사실을 사람들이 잘 모르느냐 하면,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가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자신이 사도도 아닌 주제에 마태복음 또는 고린도전서를 보면서 "아! 이 말씀 내가 이해하니까 난 구원받겠다" 라는, 이런 식으로 늘 자기 구원 챙기는 쪽으로 성경을 보니까, 구원을 자기 확실한 소유로 삼고 싶은 거예요.
◈ 성경을 자기 구원중심으로 보면, 일종의 종교놀이에 불과 !!
이런 생각으로 성경을 보니까 모든 말씀이 자기 구원을 확정해주고, 안심시켜주는 식으로 만들려 하는 거예요. 이런 것은 일종의 종교 놀이에 불과해요. 참으로 눈물겨운 노력이지만 나중에 힘 빠지면 놓을 수밖에 없는 부질없는 노력이지요. 그래서 나중에 나이 많아 치매에 걸리면 "예수가 누구더라?" 라고 하지요. 찬송 불러주면 그건 싫어하고 TV에 나오는 노래 불러달라고 하고 말입니다. 늙어서 이렇게 되는 분이 한 두 사람이 아니에요.
아직 나이가 젊을 때에는 체면 차리느라 가식으로 꾸미고 포장하지만, 그러나 노인이 되면 그 때는 본색이 드러나지요. "목사도 귀찮고 말씀도 싫다. 날 좀 자유롭게 내버려둬라. 죽을 때는 좀 편안하게 죽자" 라고, 이렇게 나오는 것이 인간이에요.
◈ 이은주 - 그녀는 영화배우가 아니라 죄인 !!
'이은주' 라는 영화배우가 영화배우였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환상이었습니다. 이은주는 하나의 죄였습니다. 죄인데 죄 아닌 척 하고, 팔 다리 있고 손가락 있고 해서 그것으로 주홍글씨라는 영화에서 연기를 했는데, 나중에 필름이 빨리 지나가서 그의 마지막을 보니까 한 줌의 재, 즉 아담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아담이라고 불렀습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인간을 아담(재, 티끌)이라고 불렀는데, 이은주는"'난 죄인이 아닌데, 난 이은주인데" 라고 하다가 결국은 죄인으로 끝나버렸어요. 이은주에서 죄인으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아무리 몸부림 쳐도 하나님의 능력 밖으로 못 벗어납니다. 하나님이 규정해 놓으신 틀에서 벗어날 재간이 없습니다. 자신이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생명은 마지막에 화장터에서 불꽃으로 타 올로 한 줌의 재로 끝나는 겁니다. 영화 '터미네이터' 마지막 장면을 보면, 터미네이터가 죽을 때 눈에 왜 불이 깜빡 깜빡하다가 그냥 꺼져버리지요. 그러니 우리 모두는 이은주처럼 한 줌의 재로 끝나는 겁니다.
◈ 너는 나로 말미암아 의인되었어 !!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규정을 무시했습니까? 마찬가지로 "너는 의인이다" 라는, 이 말을 젊은 사람들이, 늙은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나중에 여러분이 천국에 가게 되면, "너는 나로 말미암아 의인되었어" 라는 그 놀라운 선언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가를 뒤늦게 깨닫고, 주님이 주신 면류관을 "주여, 이 면류관을 저는 쓸 자격이 없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받으셔야 합니다" 라고 계시록 4장의 말씀처럼 면류관을 반납하는 겁니다.
"너는 의인이야" 라는 주님의 말씀을 처음에는 고마운 줄 모르지요. "나도 조금이 착한 구석이 있지. 더 착해질 수 있어" 라고, 평생 이런 생각하다가, 나중에 천국 가보니까, "예수님이 나를 용납해 주지 않으셨다면 어떤 방법으로도 나는 천국에 올 수 없는 자였다" 라는 사실을 깨닫고, "왜, 나는 진작 하나님의 규정에 대해 의심했으며, 이해를 제대로 못했던가?' 라고 하면서, 은혜와 사랑의 주님 앞에서 영원히 경배와 찬양을 드리겠지요.
◈ 고린도전서 - 너희들이 주님의 뜻을 알어?
이것을 제가 지금 미리 앞당겨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런 사실을 삼층천에 올라갔던 사도 바울이 알았어요. 사도 바울이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이 눈치 저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지요. 여러 철학서나 기타의 책을 참고로 해서 서신서를 쓴 것이 아닙니다. "너희들이 주님의 뜻을 알아?" 하는 식으로 고린도전서를 썼어요.
◈ 사도바울도 저주를 받을 수가 !!
그래서 "난 사도야, 내가 전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 심지어 천사라 할찌라도" 라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천사가 아니라 우리라고 할지라도, 사도바울 자신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이 복음을 안 믿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거예요. 그 대목이 갈라디아서 1장 8절에 나옵니다.
(갈 1: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우리가 거부한다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사도가 이런 이야기하는 것은 이 복음은 우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약에 자기 머리에서 짜낸 것이라면 자기가 전한 복음을 자기가 거부할 리가 없지요.
◈ 제발 우리 자신을 보지 말고,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가만 주목하라 !!
제가 글씨를 쓰면서 "이 글씨는 내가 쓴 것이 아니다' 라고 하면 말이 안 되잖아요. 이처럼 바울은 자신의 입으로 복음을 전하면서 자신도 이 복음을 믿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모순처럼 보이는 말을 하는 이유는, 제발 우리 자신을 보지 말고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가만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사도가 그것을 어떻게 해석했느냐를 봐야지, 우리가 바로 예수님 말씀을 해석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의 해석을 가지고 다시 예수님을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궁금한 것이, 예수님의 말씀과 뒤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말 사이에 도중에 뭐가 있었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바로 해석하지 못하고 사도의 해석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까? 여기에 대한 문제는 5분만 쉬었다가 하겠습니다.
2005년 4월 10일 01시 24분 녹취 끝. 서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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