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광주강의(실로암교회) - (1)고린도전서
05,01,31 강의: 이근호 목사
◈ 복음의 특징 - 이 땅에 없다 !!
이 시간에는 고린도전서를 강의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가 복음을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그 점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복음이란 것이 무엇인가 하면, "복음은 이 땅에 없습니다" 라는, 이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은 기아자동차에서 생산되지 않습니다. 전혀 공장에서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이 땅에 없는 것이 복음이에요.
이 땅에 없다는 말은 사람들이 "나 복음에 대해 경험했다" 거나 "내가 생각해 보니까 복음이 정리 돼" 라는 것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복음은 아예 처음부터 없는 거에요. 복음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생소해야 됩니다. 복음이 생소해야지, "전부터 나는 그렇게 생각했어" 라고 하면, 그것은 백발백중 엉터리입니다.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복음이란 것은 이 땅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하늘에서 주어집니다. 어디는 없다고요? 사람들 속에는 이 복음이 없습니다. 하늘에서 주어지는데, 하늘에 어떤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주어졌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의 승천, 즉 구름타고 올라가신 일' 때문에 생겼습니다.
우리는 구름타고 올라갈 수 없습니다. 구름을 타면 빠집니다. 예수님이 구름타고 올라가셨습니다. 몸무게가 몇 Kg인가 따지지 마세요. 그냥 구름타고 올라가셨습니다. 구름타고 올라가서 나온 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구름타고 올라가신 것과 복음이 관련이 있습니다.
이 말은 구름을 탈수도 없는 인간의 행위는 그 복음에 섞어 넣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름을 타면 빠지잖아요. 그러니 사람이 자기 뜻을 복음에다 섞으면 안 돼요. 왜냐하면 복음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하늘의 주(主)로 계셔서 나온 결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자면, 좀 천박스런 예를 들어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늘에서 방귀를 꼈다" 라고,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 방귀를 껴야 그것이 복음인데, 이 지상에서 방귀를 아무리 뻥뻥 껴봐야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 복음 - 너무나 생소해서 !!
그러니까 제가 좀 전에도 말했습니다만 "생소해야 된다" 라는 말을 뒤풀이해야겠는데, 복음은 생소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복음이 생소해야 된다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뭔가 하면 복음이 생소해서 즉, 이 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면 이 지상에 있는 교회가 안 받아주잖아요. 그렇게 되면 교회가 안 되거든요.
사람이란, 서로 납득이 되고 의사소통이 이뤄질 때 조직이 형성되고 모임이 만들어지게 되는데, 너무 생소하면 그걸 알아듣는 사람이 없고, 알아듣지 못하면 모이지 않고, 그렇게 되면 교회가 전혀 안 되잖아요. 그렇지요?
여기에 교회 구성원들, 목사나 장로 혹은 집사들이 공포를 느끼고 알아듣고, 생소하지 않는 복음으로 바꿔버려요. 복음 내용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섞어 넣어버리면 그 때부터 이 복음은 하늘나라의 방귀소리가 아니라, 인간들이 지옥가면서 떠드는 헛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은 백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매주 와서 들어도 늘 새로워야만 합니다. "아! 목사님, 처음 듣는 소리네요. 오늘 이 말씀 정말 새롭게 들립니다" 라는, 이러한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왜냐 하면, 복음이란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셔서 예수님의 관리 하에 있지 목사의 관리 하에 있지 않습니다. 목사가 독점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이 그 모임에 함께 계셨기 때문에 그 집회에 참석하는 자의 마음이 "오늘 이런 것 처음 듣는데" 하며, 새롭고 신선하게 들려져야지 TV드라마처럼 "나머지는 다음에 합시다" 라는, 이런 식으로 목사가 독점해서 목사가 마음대로 떼어 내는 식으로 복음이 전파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왜 안 됩니까? 이렇게 되면 그것은 목사의 교회가 되고, 목사의 사조직이 됩니다. 전혀 주님이 함께 계시는 교회가 아니에요. 그것은 사람들이 먹고 노는 계모임에 지나지 않고, 그냥 친목 단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제가 방금 이렇게 쉽게 이야기를 했는데, "복음이란 것은 하늘나라에 예수님께서 승천하셨기 때문에 비로소 터져 나온 하늘의 소리다" 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지상에서는 아무리 찾아도 인간의 아이디어에서는 나올 수 없는 신선해야 되고, 생소해야 된다는 말을 했지요.
방금 한 얘기를 조금 어렵게 해봅시다. 우리가 고린도전서를 공부하려는데,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이것을 누가 썼는가 하면 사도 바울이 썼습니다.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1절입니다.
(고전 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복음을 전하는 내용이 고린도전서인데, 그렇다면 고린도전서를 보면서 뭘 알아야 하는고 하니, 사도 바울이 어떻게 이해하느냐, 어떤 마음가짐을 가졌는가를 알아야겠지요? 그것이 사도행전의 마지막부분에 나옵니다. 28:26-27절입니다. 그기에 사도 바울이 어떤 취지로 복음을 전했는지 나와 있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행 28: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행 28: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어떻습니까? 생소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같은 한글을 읽었는데 참으로 생소하지요? 우리네 상식으로는 하나님은 사랑이 넘쳐서, 사람들을 천국에 보내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전도하도록 사도를 세우셨다는 그런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은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영생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원합니다. 이 교회에 와서 복음을 믿으면 천국 갑니다" 라는, 이런 내용이 우리가 흔히 듣는 교회에서 외치는 복음이지요. 이것은 전혀 생소하지 않는 참으로 정겹고 듣기 좋은 소리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니 사도 바울은 그런 투가 아니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돌아와서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일하신다" 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나가라, 그러니 오지 마라" 라는 말입니다. 이것보다 더 생소한 복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세요.
교회가 열심히 전도해서 사람을 모아야 돈이 모이고, 돈이 모여야 목사 월급 주고 그렇게 해야 교회가 운영이 되잖아요. 이게 교회가 전도하는 즉, 사업하는 목적이잖아요. 그런데 사도가 전하는 복음은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나가라, 천국 오지 마라" 라는 식으로 전도하고 있습니다. 감히 천국이 어떤 곳인데 죄인인 너희들이 함부로 오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뭘 좀 깨달았는데요" 라는 사람에게 "넌 절에나 가라" 라고, 이렇게 말합니다. 천국은 사람의 능력으로 오겠다는 것을 거부하는 곳입니다. 아무도 이 사실을 이야기 안 해요. "신학교 나왔다. 뭐 먹고 살지, 교회에서 사람 모아 거기에서 먹고 살자. 교회가 내 한평생 먹여 살릴 곳이다. 이곳에서 영업 잘 꾸려가자' 라는, 이것뿐이잖아요.
그래서 어떤 교인이 "목사님! 복음을 전해야지 그런 식으로 해서 되겠습니까?" 라고 나오면, 목사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당신이 목사 해봐라. 당신은 그런 방법 외에 어떤 식으로 목회할건데. 이렇게 안 하면 밥도 못 먹고 굶어 죽는데 그러면 어떻게 할래? 당신은 직장이 있어서 걱정이 없지" 라고, 이런 식으로 나오지요.
◈ 고린도교회 - 사도 바울과 똑같이 부름을 받은 자들 !!
한국 교회가 정말 모르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이미 사도로 부름을 받았어요. 그런데 이렇게 사도 바울과 똑같이 부름을 받은 자를 두고서 바로 '고린도교회' 라고 하는 거예요.
지금 사람들의 심리는 어떠한고 하니, 천국은 좋은 곳이라는 상식이 들어있어요. 그래서 죽어서 좋은 곳에 가겠다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생각 아닙니까? 심지어는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은연중에 죽어서 나쁜 곳에 가기 싫다는,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을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런 생각으로 천국 가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 "너희들은 천국에 오지 마라" 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사울이 전한 복음의 특징이에요. 그러니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천국에 못 갑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갑니까? 사실 누가 천국 가느냐는 말도 꺼내지 말아야 합니다. 왜? 우리는 천국에 갈 자격이 못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천국에는 누가 모입니까? 그것은 부르심을 입은 자만이 모입니다. 안 불러주면 어떻게 합니까? 안 불러주면 그냥 그대로 지옥 가는 거지요.
이것을 목회자들이 못 믿어요. 그리고 교회 재정을 쥐고 있는 장로나 집사들이 이런 내용에 대해서 견딜 수 없어 합니다. 논리적으로 따져봅시다. 불러주셔야만 교회 나와서 구원받는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논리 아닙니까? 뭐가 교회라구요? 어떤 요소가 있어야 교회라구요? 불러주셔서 나와야만 됩니다.
◈ 바울이 전한 복음의 특징 - 불러주지도 않았는데 나오는 자를 쫓아내는 것 !!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스스로 교회에 나온 사람을 집에 돌려보내기 위해서 복음 전하는 것입니다. 불러주지도 않았는데 죽어서 좋은 곳에 갈 욕심으로 교회 나오는 자를 쫓아내는 것이 바울의 복음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만 남습니까? "나는 교회고 뭐고 모르겠고 집에 갈려고 했는데 어떤 분이 불러주셔서 이렇게 되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사도처럼 불러주셔서, 그분이 누구인지 보니까 구름타고 올라가신 그 주님이 살아계셔서 그분이 나를 불러주시니까 만남이 형성 된 거예요.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라고 노사연이 노래했잖아요.
주님이 부르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의 본성은 죽어서 좋은데 갈려고 한다는 거예요. 그러한 사람은 교회에서 복음을 통해서 집에 가 계시라고 보내야 된다니까요. 성경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 아니면 섞여도 그는 신자가 아닙니다.
제가 오늘 일찍 도착해서 목욕탕에 갔다 왔어요. 남자 목욕탕에 왜 여자가 없습니까? 아무리 찾아봐도 남탕에 여자는 없더라구요. 남탕에는 남자밖에 없어요. 여자가 있을 리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성경에 보면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죄인입니다. 아담 안에서 죄인이기 때문에 의인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천국은 의인이 아니면 안 받아줍니다. 천국은 완벽한 의가 있어야 하는데, 99%가 아니라 100% 의가 아니면 안 받아주거든요. 천국에 죄인들이 들어가면 천국이 엉망이 되어서 천국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마치 남탕에서 여자를 찾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우리들 가운데 누가 의인인가? 찾지 마세요.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아담의 자식들이고 아담이 새끼를 깐 자들이기에 아담이 죄인이라면 그 안에서 태어난 자는 아담의 속성을 입었기 때문에 그 죄의 속성은 평생 발산됩니다.
욕망이란 것은 없어지지 않고 형태만 변형될 뿐입니다. 애들한테 낙서하지 마라고 하면, 또 다른 일을 저지릅니다. 부인들이 남편 경마하는 것 말리면, 낚시하고, 그것도 못하게 하면, 또 다른 일을 합니다. 이렇게 욕망은 변형되지 그 욕망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 속에서 의인은 없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못 갑니다. "인간 중에 의인이 누구지?" 라고 찾는 것은 마치 남탕에서 여자를 찾는 것과 같은 생뚱맞은 일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천국은 그냥 하나님만 계시게 내버려두시기 바랍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후의 인간은 그냥 흙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죽어서 지옥에 가면 죄 값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지, 자기가 지옥 가는 것을 섭섭하게 여기지 마세요. 너무도 당연한 거예요.
이 복음이 특히 신약성경에서 전혀 생경한 것인데, "하나님은 천국 갈려고 하는 사람을 막아버리고, 자진해서 믿겠다는 사람도 거절하고, 힘써 기도하고 헌신하고 충성 봉사하는 사람도 거부하고, 개척교회 20곳을 세워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는 사람도 거절하고, 구원을 위해 아무 한 것도 없는데 그분의 불러주신 자만 구원받는다" 라는, 이런 법칙을 가지고 신약에서는 거듭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듭난 것을 가지고 "너, 교육 잘 받았네" 라고 하지 않습니다. "복음에 대한 강의를 매우 잘 들었네" 라고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야, 너 머리 참 영리하다" 라고 말하지도 않고, "인간 자체가 딴 사람 되었구나!" 라고 하는 것이 곧 성경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인간의 실력이라고 해봐야 아담 안에서의 실력이지요.
그래서 제가 목회자를 볼 때 제일 먼저 보는 것이 뭐냐 하면, "당신 거듭났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은 사도 바울 입니까?" 하고 묻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거듭났잖아요. 이 거듭남의 표준이 훌륭한 부흥강사가 아니고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복음을 외칠 때 그것은 둘 다 동질이니까, 거듭났다고 판정을 내릴 수가 있어요.
사도행전 20장에 나오는 것처럼, 사도 바울처럼 그렇게 생각하세요. "너희들에게 내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라는 말을 목회자가 강단에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사람 새로 왔다고, '아이구 반갑습니다. 저희교회 일군이 없었는데 이제 일군이 생겨 감사합니다.'이런 식이 아니라, '어떻게 오셨습니까? 누가 당신을 불러주셨습니까? 복음에 대해 어떤 선입관을 갖고 계십니까?'라고 하면서 고린도전서에서 이야기한 복음을 그대로 전해야지요.
이렇게 할 때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는 제가 좀 전에 남탕에 여자 없듯이 복음은 당연하게 생소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능력으로는 못 알아듣습니다. 이렇게 먼저 전제를 하세요. "저분은 분명히 못 알아듣는다" 라고 말입니다. 못 알아듣는 것을 당연시 여겨야지, 내가 20시간 열을 토하면서 설교했는데 어떻게 이해를 못하느냐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못 알아듣는 것이 당연하다. 왜? 내가 신학을 공부하고, 기도하고, 목회를 해도 못 알아듣듯이, 저 사람도 당연히 못 알아들을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행여나 알아듣는 자가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이다. 이 복음을 알아듣는다면 분명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이다" 라고 완전히 단절을 지우세요.
◈ 신약성경의 가정 기본적인 요소 - 패쇠성 !!
그래서 신약성경의 가정 기본적인 요소가 뭡니까? 묻는 내가 잘못이지(ㅋㅋ), 이것은 바로 '패쇠성' 입니다. 즉 닫혀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에서의 언약의 패쇠성인데, 이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한데,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 포이에르바하 - 신은 자기 부족을 채워주는 자기 투사체 !!
흔히 일반인들이 신(神)이 뭐냐고 하면, "신은 무한하다. 자비롭다. 전능하다. 모르는 것이 없다" 라고, 이런 것은 일반적인 신인데, 그러나 그것은 우상입니다. 그 신은 신발 나이키보다 못한 신입니다. 철학자 '포이에르바하'는 신을 뭐라고 했느냐 하면, "신은 인간들이 자신의 부족분을 채우기 위해 자신을 투사해서(거울에 비춰서) 자기보다 더 나은 이상향을 비춰서 그것을 되받아 오는 것에 불과하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신이 다 달라요. 병원이 아파 누워있는 사람의 신은 어떤 신입니까? 병 고쳐주는 신이에요. 사업에 부도난 사람의 신은 어떤 신입니까? 사업 잘 되게 하는 신이지요. 길 가는 사람 열 명에게 물어보면 열 명 모두 신이 제 각각이에요. 이렇게 열 명에게서 열 명의 신이 나오는 것은, 모두가 엉터리 신이라는 뜻입니다. 각인각색의 신이 나올 수 없잖아요.
그런데 이 열 명의 신의 모두가 공통점이 있지요. 그게 뭔가 하면, 자기의 부족분을 채워주는 그런 신, 그래서 자기가 기도하고 정성을 바치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처럼 자비가 넘쳐서 내 요구조건을 들어주는 그런 신이지요.
이 산타클로스의 이미지는 신화적 이미지인데, 산타클로스의 원칙이 뭡니까? "울면 안돼!" 입니다. 굉장히 쉽지요. 안 울고 버티면 선물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민중들은 이런 신을 원합니다. 그러니 신은 자기 필요를 채워주는 신이예요.
사람의 노동은 반드시 대가를 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목적인'이라고 하는데, 사람의 노동은 목적이 없이는 그것이 행동으로 안 옮기게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목적이 있어요. 이것을 지향성이라고 하는데, 그 목적이 뭐냐, 현재의 자신이 애타게 기다리는 것, 필요로 하는 것을 갖지 못했을 때, 신을 찾아 그것을 요구하는 거예요.
그래서 학생들이 시험기간 되면, 교회에 가도, 절에 가도 시험을 잘 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구요. 사실은 부모들이 대신 가지만 말입니다. 이런 학생들에게 마이크를 갖다대고 어떤 내용으로 기도했는지 묻는다면, "영어는 좀 되는데 수학만 좀 도와주시면..., 나는 과학이 자신이 없어서..." 라고, 이렇게 자기의 필요를 다양하게 구하지요.
이게 다들 어린애잖아요. 그런데 어린애든 어른이든 다 아담 안에 속해 있어요. 그 애들이 커서 어른이 되는데, 어른이 돼봐야 마찬가지입니다. 찾는 것이 좀 달라질 뿐 여전히 자기 필요를 찾고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가짜 신' 이라고 한 것은 "그런 생각을 품지 말자!' 라는 것과는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런 점이 좀 어려운데, 사람의 본성상 신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장에도 그렇게 되어 있지요. 신을 찾되 그런 나쁜 신을 찾지 말자가 아니라, 노골적으로 자기 성깔상 그렇고 그런 신을 찾아가세요. 괜히 그런 신을 원하면서 아닌 척하고 또 폼 잡지 말고 말입니다.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롬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어떤 분이 기도하는데 그 기도 내용이 가관이에요. "주여! 제가 기복신앙을 버렸습니다. 그러니 이제 복 주십시오." 라고 말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주님, 저는 누구처럼 복권 당첨되게 해 달라거나, 돼지 새끼 많이 낳게 해 달라는 내용의 기도는 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참 신앙을 소유한 내게 진정한 복을 주옵소서" 라는 기도가, 이게 남들 보기에는 고상하고 기복신앙을 버린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아니에요.
◈ 오늘 강의 첫째 원칙 - 기복신앙 버리지 말 것 !!
여러분, 그러니 인간은 복음을 알고 십자가를 알아도 기복신앙은 절대 포기가 안 됩니다. 죽을 때까지 같이 가요. 그러므로 오늘 강의 첫째 원칙 [기복신앙 버리지 말 것] 입니다. 기복신앙을 가지고 오세요. 버리지 마세요.
왜요? 안 버려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절대 버릴 수 없고, 버린다고 착각하면 더 무서운 것은 상호기만과 상호위선으로 빠져요. 목사는 교인 앞에 기복신앙 버린 것처럼 행세하고, 교인은 목사 앞에 기복신앙 포기한 것처럼 행동하는, 상호기만과 상호위선에 빠져요.
이게 헤겔의 철학에 나오는 것인데 여기에 보면, 사회는 상호기만과 상호위선으로 무장되어 있다고 해요. 그 목적은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이걸 '인정과정' 이라고 하는데, 산 속에 혼자 못 있고, 산을 버리고 사회로 나오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왜 열심히 공부하느냐 하면, 부모님께 인정받고, 선생님께 인정받고, 사회 나가서 인정받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핵폭탄이 터져 다 죽어버리고 자기 혼자 남았다면 공부를 안 합니다. 왜, 공부해봐야 자기를 인정해 줄 사람이 없으니까요. 아무도 봐 주는 사람이 없으면 여자들 화장을 안 합니다. 그래서 여자들이 잠잘 때는 화장 안 하잖아요. 머리카락도 수세미처럼 해 가지고도 말입니다. 제 아내가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해 마세요.
상호기만과 상호위선으로 이 사회는 구성되어 있습니다. 서로 그것을 용납을 해 주는 거예요. 그래서 절대로 기복신앙은 버릴 수 없습니다. 만약 기복신앙을 버렸다고 한다면 그것은 백발백중 위선자입니다. 우리 마음속은 성령이 오든, 거듭났든, 복음을 알든 상관없이 평생 기복신앙이 따라다닙니다. 그게 어떤 형태로 바뀌던 간에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목 사: 우리 실로암 교회는 복음만을 추구합니다.
하나님: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목 사: 교인 좀 보내주소.
하나님: ? ? ?
목 사: 잘 아시면서 왜 그러십니까?
하나님: ? ? ?
목 사: 복음 전하는 교회가 남 건물에 세 들어 있으면 얼마나 하나님 영광 가리겠습니까?
하나님: ? ? ?
차마 노골적으로 이런 말을 못해서 "주여! 이 몸 바치겠습니다" 라고 하지만, 주님은 우리 속셈을 다 알고 계십니다. 기복신앙은 우리의 평생을 따라 다닙니다. 우리가 버릴 수 없어요.
◈ 오늘 강의 두 번째 원칙 - 그런데도 왜 나는 구원을 받는가?
두 번째 원칙이 뭐냐 하면, [왜 나는 그런데도 구원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기복신앙을 가지고 있고, 아담의 죄를 그대로 물려받아 24시간 욕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데 왜 구원받느냐는 겁니다.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말입니다. "나 같은 인간을 왜 구원하십니까?' 라고, 이렇게 목사님에게 복음적으로 설명해 달라고 하면, 이것은 말이 되는데, "나는 잘 난 인간이기에 구원받았다" 라고 하면 안 됩니다. 잘 나기는 뭘 잘나요?
그러면 우리 같이 잘난 인간이 아니라, 왜 우리 같은 죄인이 구원받습니까? 우리보다 신학도 많이 공부하고, 우리보다 기도도 유창하고, 우리보다 공부도 잘하고 똑똑한 사람이 세상에 그렇게도 많은데 말입니다. 왜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유독 이렇게 못난 우리를 불러주시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패쇠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패쇠성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약에 진짜 하나님이 이 두 가지, 첫째, "기복신앙을 버리지 마라"입니다. 오늘부터 잠 잘 자게 생겼지요? 실로암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듣고 기복신앙을 가지면 안 된다고 했으니, 얼마나 초초하게 스스로를 절제하면서 살아왔습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에 기복신앙을 버리지 마라고 하니 말입니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십니까?" 하는 것입니다. "온통 기복신앙으로 똘똘 뭉쳐 나밖에 모르고,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도 없이 매일같이 원망하고 불평하며 평생을 '다고 다고' 하면서 살아가는 나를 도대체 어떤 근거가 투입되었기에 구원을 받게 되었는가?" 하는 놀라운 사실을 말입니다. - '다고'는 '주세요'의 또 다른 표현임.
이 두 가지가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구약에 하나님은 무슨 하나님이 아니라고요? 전지전능하시고, 무한하시고, 절대자시고, 뭐 사랑이 많으시고 하는 등등은, 전부 인간들의 상상으로 지어낸 가짜 하나님입니다. 이런 하나님은 인간들이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 스스로의 아이디어를 동원해서 조립해낸 신입니다.
'이세돌' 이란 바둑천재가 이런 말을 했어요. "신하고 바둑두면 3점으로는 안 되고, 4점 깔면 내가 이길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신을 상상해 보는 거예요. 사업에 실패한 사람이 "하나님이면 이런 난국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인데" 라고 생각을 하지요.
항상 "내가 할 수 없는 선을 넘어서 하나님은 하실 수 있을 것인데..." 하는 생각으로 하나님을 기대하지요. 이렇게 인간은 항상 기복적으로 하나님을 찾아요. 이런 신관으로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를 만들었고 말입니다. 이들 교회는 자기 노동의 대가를 하나님께 받는 거예요. 여기에서의 노동은 헌금, 기도, 충성, 봉사 등등, 이런 것이지요. 그래서 노동한 것이 적으면 그들이 하나님께 받을 것이 당연히 적어지고 말입니다. 매사가 이런 식이지요.
그런데 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전혀 엉뚱한 분입니다. 왜, 그 하나님은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히 여기는" 바로 그런 하나님이거든요. 이것이 출애굽기 33장 19절에 나오는데 같이 한 번 봅시다.
(출 33:19)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이것이 바로 모세하고 진짜 하나님하고 독대하면서 하나님이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보내면서 자신의 속성을 그대로 담아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주는 것이 아니고, 은혜 줄 자에게만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들은 마땅히 저주받아 추방된 자들입니다. 아담 안에서는 의인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후손이기에 아담의 죄를 되풀이하게 되어 있는데, 이것이 DNA 아닙니까? 아버지와 어머니의 DNA가 반쪽이 새로운 DNA를 만들지요.
◈ 아담 후손들의 특징 - 유혹을 그리워함 !!
이처럼 아담의 자손들은 어떤 짓을 해도 아담의 속성을 반복하게 되는데 아담의 속성이 뭐냐 하면, 유혹을 그리워하는 거예요. 유혹을 말입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것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손으로 만져보고 싶고 따 먹어보고 싶은 유혹을 인간이 극복할 수 없습니다. 육신의 정욕, 안욕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런 유혹 앞에서는 천하의 어떤 인간도 미혹되게 되어 있습니다.
가인의 후손은 살인하고 싶은 충동이 있어요. 우리 모두가 그런 마음이 있는데 이런 것을 대신하는 것이 스포츠입니다. 그래서 야구할 때 타자가 아웃되면, "죽었다, 죽었다!" 라고 하지요. 스포츠를 비롯해서 모든 것이 다 전투예요.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무슨 죄입니까? 살인죄이지요. 사랑 없이 결혼한 것은 간음죄이고 말입니다. 그러니 결혼해서 남의 여자와 남의 남자를 넘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랑 없이 결혼한 것 자체가 간음죄가 되지요. 왜냐 하면, 결혼은 한 몸 되는 것인데, 이렇게 한 몸이 되는 것은 사랑 외에 다른 접착제가 없습니다.
사랑이란 말은, 그 어떤 조건도 묻지 않는다는 것이 사랑이거든요. 그래서 결혼은 정신없을 때 하는 거예요. 정신이 있을 때 하면 조건을 보기 때문에 결혼이 안 돼요. 미처 조건들이 눈에 안 보일 때 후닥닥 해치우는 거예요. 그래야 결혼이 되지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예수님과의 결혼 외에 다른 결혼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떤 인간도 사랑으로 결혼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그런데 목사가 설교하면서, "여러분 사랑으로 결혼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는데, 아니 목사 자신도 못하는 것을 왜 남들에게 강요합니까?
다시 이야기를 합니다. 두 번째 법칙,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왜 구원했습니까?] 라는 것인데, 즉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데, 나는 위선과 기만으로 살아가고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 몸부림치는데, 이런 나를 도대체 무슨 근거로 구원하십니까?"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렇게 자기 욕망에 몸부림치는 우리를 불러주는 분이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불러주셔야만 구원이 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불러도 소용이 없어요. 그래서 고린도전서는 1장부터 바로 십자가가 나오는 겁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국가 경영에서 제일 시급한 것은 에너지 수급문제입니다. 제가 어느 강의에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석유에너지를 수급하는 공무원이 가치 있습니까? 경찰 공무원이 가치 있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경찰 공무원은 자신이 굉장히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여깁니다.
버스 운전사가 큰 일을 합니까? 에너지 수급하는 공무원이 큰 일을 합니까? 버스 운전사가 일을 안 하면 대중교통이 마비되잖아요. 그래서 버스 운전사는 자신이 굉장히 보람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여겨요. 그런데 기름 없어보세요. 버스 못 움직이지요. 모든 것이 다 멈춰요.
◈ 지금 21세기에 무슨 십자가 타령인가?
그래서 우리나라에게 제일 시급한 것은 에너지고 그 중에 석유에너지인데, 자체에서는 3%밖에 나오지 않고, 97%를 수입해야 합니다. 이것 제대로 안 되면 나라 자체가 마비됩니다. 이렇게 우리 삶에 중요한 부분에 따로 있는데, 십자가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국가의 운명이 에너지에 달렸는데, 석유가 없으면 지금 이 난로도 못 피우고 그런데 왜 우리는 십자가를 이야기합니까?
좀 더 쉽게 이야기합시다. 현재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12,000$인데 20,000$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 20,000$ 되려면 부지런히 일해서 돈을 벌어야 되지요. 그래서 교회에 오는 것도 전능하신 신에게 빌어서 모자라는 돈을 더 많이 벌도록 하기 위해서 나오는 거예요. 이렇게 돈을 구하고 돈에 메여 있는 사람에서 십자가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런데 고린도전서에서는 놀랍게도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강의 초반에 뭐라고 했습니다. 복음은 너무나 생소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아들 대학 진학이 문제고, 국가는 에너지 수급이 문제고, 가뭄이 든 시골에서는 비가 문제인데 엉뚱하게 십자가를 이야기하면 교회 운영이 되겠습니까?
동해안에 고기가 안 잡힌다고 하는데, 그러면 어촌교회에서는 고기를 보내달라고 기도해야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십자가 전해 보세요. 그 사람들이 반기겠습니까? 그렇게 되니 목사도 복음 포기하고 "기도하시면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라고 하면서, 고기 많이 잡는 일에 같이 관심을 기울이지요.
그런데 십자가가 뭐냐 하면, 이렇게 고기 많이 잡기 원하고, 에너지 넉넉히 확보하기 원하고, 직장에서 진급하기 원하는 이런 자들에게도 모든 것을 다 용서하고 용납하는 능력 이예요. 오히려 십자가는 죄인을 부르는 거예요. "기복신앙 버렸습니다" 하고 자랑하는 잘난 사람 찾는 것이 아니고, 우리 같이 죄악 덩어리인 자신에게 복음은 너무나 생소하게, 그리고 놀라운 은총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 교회 - 지옥가야 마땅할 자들이 모인 곳 !!
그래서 성도는 자신의 잘남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지옥가야 마땅한 나를 불러주신 그 은혜와 사랑, 즉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그분의 사랑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라고 감사하는 자이며, 이러한 자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입니다.
따라서 제 3자가 보든 우리 주님이 보실 때, "십자가가 네 가슴에 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제 말을 오해하면, "내가 죄인이다. 내가 죄인인줄 아니까 나는 거룩하다. 남들은 다 자신이 죄인인줄도 모르는데, 나는 죄인인줄 아니까 얼마나 똑똑한가?" 라고, 이렇게 되요. 사실 불교가 이런 형태예요.
이런 모습이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매일 기도하면서 "주여! 나는 죄입니다" 라고 하면서 금식했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은 잔치 집에 다니면서 술 마시고 했어요.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비난하기를 "우리는 금식하는데, 당신과 당신 제자들은 세기와 창기의 집을 전전하며 매일 술 마시고 돌아다니느냐?' 라고 했지요. 이 때 예수님 대답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고 했어요.
(눅 5: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눅 5:30)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눅 5:3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데 있나니
(눅 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여기에서 의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바리새인처럼 "나는 부족합니다. 다 내 탓입니다" 라고 하면서 자기 부정하고, 자기 자학과 금식하면서 죄인들과의 차별성을 주장하는 외식하는 의인들이지요. 그러니 이제 고린도전서를 보실 때 "은혜 줄 자에게만 은혜가 돌아간다" 라는 생각을 해야 되요.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왜 내 몫은 안 주십니까?" 라고 요구할 권리는 아예 없음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제가 처음에 구름을 그리면서 설명을 했는데, 예수님이 주의 자리에 있고, 그 주님이 하는 일은,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는 것이지요. 이 은혜는 인간의 노동이나 행위와는 전혀 무관하게 그분의 뜻대로 다가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복음은 인간들에게 너무도 생소한 것이라고 했지요.
◈ 복음이 왜 비밀인가? - 너무나 생소하기에 !!
이 은혜는 인간의 요구사항, 희망사항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희망사항으로 부름 받은 사람만 구원되는 너무나 생소한 것인데,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두 자로 '비밀'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비밀로 감추어진 것인데 은혜 받은 자는 이 비밀을 알게 되지요.
이제 제가 객관식 문제를 하나 출제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주관식은 아닙니다. 보기에서 하나만 골라잡으면 됩니다. 그런데 제 문제의 해답은 항상 끝에 있습니다.
다음 중 거듭난 사람은 누구입니까?
1) 믿음으로 구원
2) 복음을 영접해서 구원
3) 죄인 되었기에 구원
4) 주님으로 구원
몇 번이 정답입니까? 마지막 4번이지요. 그런데 제가 왜 1,2,3번을 열거했는고 하니, 이런 가짜들이 의외로 교회에 너무나 많아요. 예수님을 자랑해야 할 텐데 자기 구원받은 것을 자랑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요. 그러니까 남들 보기에 어떻게 비치는가 하면 "난 뭘 해도 완벽해" 라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시기에 내가 하는 일은 모두가 성령의 일로서, 만약 내 하는 일을 방해하면 성령을 거스리는 것이야" 라는 생각을 갖는 목사, 장로, 교인들이 굉장히 많아요. 물론 모두가 다 가짜입니다.
첫 번째 원칙이 뭐였습니까? "영원토록 기복신앙을 유지하라' 라는 것인데, 거듭났든지, 복음을 깨달았든지 인간의 기복신앙은 평생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지극히 사소한 것이라도 그것이 남들보다 나은 것이라 여겨지면 그것을 자랑거리고 삼습니다. 그 자랑삼는 것은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함이고, 그렇게 자기의 기복신앙을 감추는 것을 가지고 상호 기만, 상호 위선이라고 했지요. 그러니 이제 '상호인정', '상호기만', '생소' 등등의 단어들이 이해되지요. 이것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1. [기복신앙을 버리지 말라] 2. [그래도 하나님은 구원할 자를 구원하신다] 라고 했는데, 성경에는 무엇 때문에 "기도하라, 전도하라..." 라고 하면서 "하라, 하라" 라는 말을 할까요?
◈ 왜 "하라' 인가? - 우리를 대신해서 다 하신 분이 있기에 !!
진짜 거듭난 사람은 이런 질문을 안 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 하면, 아무리 무엇을 하라고 해도 자기가 그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만 이 '하라' 라는 명령으로 말미암아서, 자기가 죄인이란 사실을 더욱 실감하는 요소인 것을 알지요.
그리고 자기가 믿는 것은. '하라'는 명령을 실천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대신해서 다 이루신 분이 있기 때문에 그분의 공로를 인정하고 감사하면서, 자기는 언제나 죄인에 불구하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 또 "무시로 기도하라" 라고 했는데, 제가 문제 내겠습니다. 여기서 무시로 기도하라는 것은 다음 중 어느 것입니까?
1) 12시간 2) 12시간 반 3) 17시간 4) 24시간
어느 것이 정답입니까? 전부 정답이 아니에요. 시도 때도 없이 기도하라는 말은 기도하는 때가 기도의 때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그 순간이 기도하는 때라구요. 진짜 기도에 들어가면 기간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지금 몇 시지? 내가 오늘 몇 분 동안 기도했지? 이렇게 되면 지금 그 사람은 정신을 엉뚱한 곳에 팔고 있는 거지요.
주님께 정신이 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 잘 하고 있는 자신이게 정신이 팔려 있어요. 사람이 자신에게 도취되어 버리면... 아담의 속성을 뭐라고 했지요? 유혹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도하라' 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기도 잘 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 거예요.
◈ 교회 부흥 - 경쟁을 시켜라 !!
이걸 누가 경쟁을 붙이는가 하면 교회 목사들이에요. 김집사는 3시간 기도하는데, 장로님은 몇 시간 했습니까? 최집사는 이번 주에 5명 전도했는데, 박집사는 1년에 1명도 못했지요? 이런 식으로 자꾸 유혹하지요.
잠자고 있는 재능, 그것을 교회에서는 '달란트' 라고 하면서 그 "달란트를 10개 받고 왜 썩히느냐? 그러니까 구원받고도 나중에 타락하지" 라고, 이런 식으로 협박 공갈을 칩니다. 그러한 사기꾼 목사가 있는 이유가 진짜 거듭난 사람들이 "아! 저런 것이 거듭나지 못한 자의 모습이구나"를 확인하도록 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 전도해서 천당 가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천국 가면 계시록에 있는 말씀대로 어린양의 피로 씻었기에 흰옷 입고 가는 거에요. 지금 제가 걸치고 있는 옷은 이름이 '이근호 옷'이 아니라, '그리스도 옷'이에요.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옷 입은 자만이 천국에 갑니다.
◈ 거듭난 사람 - 내가 참으로 못난 인간이구나 !!
이것이 갈라디아서 3장에 나와요. 누구든지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은 여자나 남자나, 종이나 자유자나, 늙으나 젊으나 관계없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입을 입으면 되는데, 그런데 그리스도의 옷 입었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또 뭐냐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속성이 우리한테 있어요. 그래서 거듭난 사람은 "내가 참으로 못난 인간이구나!" 라는 것을 알지요.
(갈 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갈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 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누구에게 칭찬 들으면 우쭐대고, 목사에게 꾸중들으면 화가 나고, 이렇게 해서 교회에 분란이 일어나고 하는데, 이런 약하고 못난 자들이 모인 집합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고린도전서가 뭐냐 하면, 지금의 교회가 이렇게 못난 것들이 뚝뚝 튀어나오는 것처럼 옛날 초대교회 때 부르심을 받은 교회들도 이런 것들이 튀어나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생소한지 고린도전서 5장에는 이런 것이 있어요. 자기 아버지의 첩과 통간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죽여 버렸다는, 이런 것은 별로 안 생소하지요. 나쁜 짓 했으니까 죽어야지 말입니다. 그런데 그 뒤가 생소해요. 왜 죽였느냐 하면, 몸은 죽이고 영혼은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고전 5: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고전 5: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고전 5: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와! 그러니 이런 사람은 땡잡은 것 아닙니까? 도대체 일반 윤리나 상식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이야기 아닙니까? 아버지의 첩과 통간한 아들이 죽었는데, 그 죽은 이유가 몸은 사단에게 내어주어 죽게 만들고 영혼은 구원받기 위해서 죽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경말씀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예수 믿게 되면 적어도 술, 담배를 끊고 지옥 갈 불신자들과는 뭔가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던 생각이, 고린도전서에서 다 깨집니다. 그것은 자기 위선 자기 기만이요, 우리가 지금까지 상식적으로 알아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생소한 것입니다.
◈ 고린도전서 - 하나님의 왕고집 자랑 !!
성경에 이런 내용이 다 있었나 할 정도입니다. 성경이 끝까지 놓지 않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네가 무슨 짓을 해봐라. 하나님의 은혜가 네 죄한테 질 리가 있느냐?" 라는, 그것입니다. "내가 어떤 짓을 해도 한번 주신 사랑은 끊어지지 않는다. 얼마나 끈질긴지 네 죄가 큰지 내 용서가 더 큰지 한번 시합해 볼래' 라고 해서, 결국 인간의 죄보다 주님의 용서가 더 커서 주님의 사랑이 이기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고린도전서입니다.
이런 주장을 펼치면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는 반발이 있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마음대로 죄 지어도 되겠네요?'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지독한지 죄 짓는 것도 우리 마음대로 안 되지요. 자기가 죄라고 생각하는 죄는 안 짓고, 도리어 "예수 믿고 의로운 행위를 했습니다" 하는 그것이 죄가 되요. 이것 또한 생소한 이야기이고 말입니다.
"야! 이근호 목사님 말 듣고 실험해 봐야겠다' 라는 생각이 듭니까? 지금 이 강의가 녹음되는데, "내 죄 짓는 것이 끈질긴지 하나님이 죄 용서하는 것이 끈질긴지 시험해 봐야겠다" 하고, 오후 1시부터 저녁 7시까지 백세주를 마셨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백세주를 마시고 난 뒤에 은혜가 오니까, 과거에 술 안 마신 것을 의롭게 생각한 것이 죄라는 사실이 드러나요. 술 마신 것이 죄가 아니라, 자기가 그동안 참고 참으며 술 끝까지 안 마셨다고 폼 잡은 것, 그것이 바로 자신기만이었다는 사실이 깨달아지지요. 잘난 체 하는 죄가 큰 죄라는 말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주여 제가 십일조했습니다. 구제했습니다. 금식했습니다" 라고 했을 때, 주님은 "네가 바로 죄인이다' 라고 하셨고, 세리가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남의 것을 토색하고..." 라고 했을 때, 주님은 "네가 바로 의인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땅에서 생각하는 것하고 완전히 바뀌어도 어지러울 정도로 바뀌지요. 그래서 심지어 제가 이런 이야기까지 했어요. "목사가 하는 말은 전부 거짓말이고, 목사가 한 말을 반대로 하면 천당 갑니다" 라고 말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에는, 목사는 윤리,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니까, 그분의 말을 듣고 착하게 되려고 하지요. 그래서 목사는 "교회 와서 좋은 말씀 들으면 여러분도 착한 사람이 됩니다' 라고,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겁니다. 그래야 서로 의사소통이 되거든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의사소통이 아니라 아예 "꺼져라, 그런 생각으로는 오지 마라" 라고 쫓아내지요. "여기는 죄인들이 오는 곳인데 너같이 잘난 사람이 여기 왜 오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잘난 게 죄가 되는 거예요.
마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두 형제 비유가 있는데, 하나는 잘난 체 하는 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잘난 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 비유는 어떤 것인고 하니, 소위 말씀대로 열심히 살면서 잘난 체 하는 바리새인들은 지옥에 가고, 세리와 창기가 너희보다 먼저 천국 간다는 말입니다.
(마 21: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마 21:29)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마 21: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마 21:31)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이게 무슨 의미입니다. 세리와 창기가 착한 일 했습니까? 열심히 기도했습니까? 아니에요. 세리와 창기를 구원하는 그 원칙이 예수님에게서 나온 것이고, 바리새인의 원칙은 자기 구원은 자신의 선행에 달려 있다는 것이지요.
사람에게서 제일 위험한 것이 뭐냐 하면, 자기가 한 일은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생소한 이야기지요. 어느 한 조직에서 제일 밉상스런 인간이 누구인지 압니까? 자기 일에 자기가 책임 안 지는 놈입니다.
◈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 내가 한 일은 내가 책임지겠다 !!
군에서 매 맞는 놈들이 어떤 놈인지 압니까? 물론 저도 군에서 많이 맞았습니다만, 이런 조직체에서 자기 일에 게으르고 모든 사람이 다 하게 되어 있는 일을 본인이 안 하면, 그 일을 다른 사람이 떠맡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은 정말 밉상입니다.
◈ 삐아제 교육 - 자아의식을 일깨워서 책임성이 있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 !!
현대 교육의 모토는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자" 라는 것인데, 유치원에도 그런 노래가 있지요? 이게 '삐아제' 교육의 목표입니다. 삐아제 교육은 자아의식을 일깨워서 책임성이 있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 즉 자율적인 인간으로 만드는 거예요. 타율성이 아니고 자율성으로, 남에 의해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인간은 필요 없어요.
인간은 이렇게 자율성을 가질 때 여기에서 새로운 창조성이 나옵니다. 즉 "하면 된다" 라고 하면서 자기 스스로 자기에게 최면을 거는 겁니다. 교회에서 전도 가르칠 때 "하면 된다! 하면 된다!" 라고, 이렇게 훈련을 시키지요. 다시 말해서, "잠자는 신을 깨워라' 라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잠재력' 이라고 하는데, 잠재태, 즉 잠재력을 가능태로 바꾸는 것이지요.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본인은 모르는데, 그러나 실천에 옮겨보면 "아니, 나에게 이런 놀라운 능력이 있다니' 라고 하면서 알게 되지요. 그래서 "I can do it" 즉 "나는 할 수 있다"가 아니라, "I must do it" 즉 "나는 해야만 한다" 라는 겁니다. 왜냐 하면, 나는 할 수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이것이 칸드의 철학에 보면 다 나와요.
◈ 사회의 특징 - 자율성을 요구 !!
바로 이러한 책임성, 자율성, 창조성을 어디서 요구합니까? 사회에서 요구하는 겁니다. 그것이 직장이든, 군대든, 학교든, 교회든 상관없이 어떤 곳이든 이것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하나 하나가 월급 값을 하는 자가 되고 말입니다.
◈ 책임성이 놀랍게도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는 악마성 !!
이렇게 우리는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자율성과 책임성을 교육을 받았는데, 그런데 그 책임성이 자기를 파괴합니다. 왜 그런가요? 자기 포기가 안 됩니다. 자기가 스스로 성경 읽고, 교회 나가서 예수 믿고 천당 갈 수 있는데, 왜 자기의 재주를 막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의지를 가로막는 그런 하나님은 싫다" 라고, 이렇게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악마성' 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책임성이 놀랍게도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는 악마성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큰 악마 짓을 한 사람을 몇 꼽으라고 하면, 저는 테레사 수녀, 손양원 목사, 밥 퍼주는 사람... 이런 사람을 꼽아요. 이들이 대표적인 악마에요. 왜냐하면 이들은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해서, 하나님의 그저 주시는 은혜가 다 달아나게 만드니 말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꼭 반발하는 사람이 나오지요. "그렇게 책임성도 없고 자율성도 없으면 교회 꼴이 되겠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교회에 와도 아무도 청소하는 사람도 없고, 밥하는 사람도 없고, 헌금도 안 하고 해서 목사 월급도 못 주고 할 텐데" 라고 하지요.
이러한 사람은 제 강의를 제대로 못 들어서 그렇습니다. 이런 책임성, 즉 자율성은 타고난 거예요. 이 세상에 책임성 없는 사람 없고, 자율성 없는 사람 없어요. 최근에 대법원장 지낸 분이 서울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했어요. 왜냐 하면, 자기 몸이 병들어서 가장 노릇 제대로 못하고 가족에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해서 자율성을 발휘해서 죽었어요. 이처럼 인간은 책임성이 투철합니다.
◈ 성도 - 웃기는 짬뽕들 !!
그러니 사실은 사람이 생소한 복음을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황당하고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정말이지 신기해요. 그런데 그러한 신기함을 갖고 있는 사람이 누구냐? 그 사람을 두 글자로 '성도' 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진도를 나가야겠지요? 진도를 나가기 전에 지금까지 한 것을 요약해 봅시다. 제가 묻고 답변할 테니 여러분은 그냥 들으세요.
* 고린도전서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누가 전한다?
* 사도 바울이 전한다.
*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그 마음 자세가 어떠했는가?
* 사도행전 끝 부분에 나오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인간 자력으로 구원받으려는 것을 다 차단시키는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더라.
* 왜 그런가?
* 누구든지 하나님이 불러줘야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천국이고, 그래야 영생을 얻기 때문이다.
* 그러면 왜 불러줘야 되는가?
* 인간은 날 때부터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 왜 죄인인가?
* 선조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동적으로 죄인이고, 이 죄인은 항상 죄 안에 갇혀있기 때문에 자력으로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력으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전제를 깔고 고린도전서가 시작됩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자력으로 복음을 알아듣나요, 못 알아듣나요? 못 알아듣습니다. 이렇게 못 알아듣는다는 것으로 출발하는 것이 고린도전서입니다. 이제 고린도전서를 보시기 바랍니다.
1장 18절에 보면, 누구든지 자력으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보니까 그기에 뭐가 나와요?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의 능력은 어디서 나옵니까? 바로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이란 말은, 십자가에서 능력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능력이 나오니까 십자가의 능력이잖아요.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런데 현대 교회는 십자가에서 능력이 안 나온다고 보는 거예요. 십자가는 가만히 있고, 이 능력은 목사가 준다고 가르치는 것이 교회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일하신다고 이렇게 가르치니 말입니다. 이런 소리 많이 들었지요?
◈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간에 대해서' 일하신다 !!
성도가 목사를 저주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왜요? "하나님은 목사를 통해서 역사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우신 주의 종을 저주하는 것이기에 저주받습니다" 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다 엉터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해서 일하십니다. 말장난 같지요? 말장난이 아니고 맞는 말입니다.
제가 말이 빨라서 잘 못 알아들은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 다시 한 번 말하겠습니다. 십자가만 있는 것이 아니고 1장 18절에 뭐가 있다구요? 십자가의 능력이 있지요. 그런데 십자가의 능력을 사람들은 안 믿고 십자가에 대해 연구한 사람, 즉 신학을 공부한 목사를 통해서 그에 대해 전해 듣고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목사님을 존중한다는 말은, 목사님이 연구한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럴 때 하나님은 "아하, 십자가를 아는구나" 하고 그를 구원하신다는 거지요.
그러나 이렇게 되 버리면, 사람을 통해서 하기 때문에, 사람을 무시하면 구원의 능력이 끊어지고 그래서 구원받지 못한다고 가르치는데, 저는 그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능력에서 바로 구원이 이뤄진다는 거지요. 목사 거치지 않고 말입니다. 그러면 목사가 왜 있나요? 그것은 자기가 받은 성령과 같은 성령인가 확인하라고 있어요.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 일하시는데, "너 죄인이지' 라고 하면서 밀치는데, 그러면서 묻기를, "네 능력이냐 내 십자가의 능력이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라고 하면, 그러면 성도가 맞다는 겁니다.
◈ 아니 2000년 전의 십자가 무슨 능력이 있는가?
그러나 이것은 너무도 생뚱맞은 거예요. 아니 십자가가 무슨 능력이 있습니까? 2,000년 전에 예수님은 죽었고 끝났는데 말입니다. 도무지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이런 것이 믿어지니, 이것이 어찌 십자가의 능력이 아니겠습니까? 과거 2,000년 전에 죽은 예수가,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찾아 오셔서 우리 마음을 움직여서 예수 믿게 한다는 것이 어떻게 믿어지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 올 때 "나 같이 십자가의 화살에 꽂혀서 이곳에 나온 사람이 누가 있을까?" 라는, 이런 마음을 가지고 오는데, "아! 나 말고 또 그런 사람이 있네. 지금도 여전히 주님 살아 계시는구나" 라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이렇게 되니 그 사람의 직업과 나이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배후에 역사하시는 성령이 계시니 그를 존귀히 여기며 사귀는 거예요. 즉 형제를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지요. 목사나 집사라는 직분을 떠나서 서로 사랑하게 되고 말이지요.
그런데 어떤 미친 목사는 "나는 목사다. 날 존경해 다오" 라고, 이렇게 나옵니다. 존경할 아무런 것도 없는데 존경하라고 하면 환장할 노릇입니다. 교인들이 정말 힘든 것이, 존경할 것도 없는 목사를 존경하라고 할 때입니다. 물론 핑계는 좋아요. "장로들, 당신이 나를 존경해야 일반 교인들에게 덕이 되지. 그들도 목사인 나를 존경하고, 그렇게 되어야 교회 질서도 잡히고 부흥할 것이 아니냐"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생각들이 마귀가 심어준 사고방식입니다. 기존 사회 경험과 지식으로, 이것은 틀림없는 진리라고 여기는 이런 것들이 십자가의 화살에 모조리 다 붕괴됩니다. 정말 십자가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그런 인간적인 상식을 다 버리고, 그냥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구원되었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교회 나와서 목사에게 듣기를 원하는 복음은, 우리가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가를 말씀을 통해 다시금 확인하고, 이런 완악한 나를 어떻게 십자가의 능력이 구원했는가를 들으면서, 그 은혜에 감사 찬송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복음을 깨달은 성도나 목사는 둘 다 미친 자들입니다. 남들은 인간의 재능과 솜씨를 자랑하는데 정신이 없는데, 이들은 2,000년 전에 죽은 예수의 십자가 능력을 거론하니 어찌 미친 사람이란 소리 안 듣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장 22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고전 1:22)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사도 바울이 이렇게 전했어요. 그러니까 이런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사람에게서 생산되는 것을 앞장세우는데, 그런데 성령에 의해 거듭난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들고서, "어느 놈이든 자기 것 내세우는 놈은 다 나와봐. 누가 더 지혜로운가 내기하자. 그래 나는 약하다. 너희들은 강하고. 하지만 하나님의 약한 것이 너희들의 강한 것보다 더 강해. 왜? 그 약한 것이 날 구원했어" 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2장 2절에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전 2:2)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성령 받은 사도 바울이지요. 그리고 이 바울은 "내가 전한 복음 이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했어요.
(갈 1: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교회를 경영하고 재정을 담당하는 사람들한테 이런 말을 하면, "그것이 성경에 있는 구절은 맞기는 맞는데, 그렇게 해서 교회가 유지됩니까?' 라고 해요. 여러분의 의견을 한 번 들어봅시다. 그렇게 해서 교회가 유지되겠습니까? 도대체 그들이 걱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아니라 '교회유지'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너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 라고 말하고, 6장에 보면, "그렇게 걱정하는 네 몸이 너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이다" 라는 겁니다. 소유권이 이미 예수님께 넘어가 버렸다는 거지요. 그러니 목사는 그런 것 때문에 걱정할 권리도 없다는 것입니다.
(고전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 교인들의 의외로 놀라운 양심 !!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목사를 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교인들이 목사를 보면서 그런 걱정을 많이 해요. 목사들은 욕심이 많아서 그런 것을 잘 모르는데, 교인들은 제 가정이나 자식들만 챙기지 목사야 어떻게 되는 관심 없지" 라고 불평하지만, 의외로 교인들이 양심이 있어요.
놀라운 사실이에요. 맛있는 사과를 먹으면서도, "목사님은 이런 것 못 드시겠지?" 라고, 이런 식으로 미안해하고 생각을 하지요. 그러나 어쩝니까? 목사한테까지 그 비싼 사과를 사줄 형편이 못되니. 그래서 말은 못 꺼내지만 실은 걱정은 많이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걱정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9절 이하에 보니, 사도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라고 했어요. 그리고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비천하고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맺으며 만물의 찌끼 같이 되어도, 그래도 우리는 구원받았잖아" 라는 겁니다.
(고전 4: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고전 4: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고전 4: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고전 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고전 4: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이 정도로 복음의 능력은 예상 밖으로 크다는 이 말입니다. "너희들이 풍족하게 누리고 잘 먹고 잘사는 것 그 이상으로 내가 받은 복음은 너희들이 자랑하는 돈보다도 내가 받은 복음이 더 자랑스럽다" 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주님이 천히 사도로 하여금 비참하게 살도록 해서, 교인들로 하여금 세상 것으로 만족하고 안일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모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치라는 것도 그때그때 다르고 해서 그게 기준이 없어요. 마음이 하늘에 가 있으면 이 땅에서 부자로 살아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해서, 일부러 가난하게 살려고 초라하게 입고 찌그러진 비참한 집에 살 필요는 없어요.
부자가 어떻게 천당을 갑니까? 그런데 천당 가거든요. 그것은 부자냐 가난하냐를 묻지 않고 그냥 은혜를 주셨기에 천당 가는 거예요. 그게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고린도교인이나 우리나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고린도교회 교인들도 보면 우리 못지 않게 엉망진창입니다.
◈ 이데올로기에 종속된 인간들 !!
하지만 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시대가 그들의 사고방식을 장악하기 때문에 (이것을 이데올로기라고 하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것도 자기 임의로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그 시대가 좋아하는 것을 하나 골라잡아서 좋아하는 거예요. 애들이 휴대폰을 갖고 있잖아요. 조선시대에는 휴대폰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자기가 골라야할 선택사항에 포함이 안 됐어요. 그러니까 휴대폰시대니까 휴대폰을 좋아하는 거예요.
사람은 시대의 산물입니다. 특정시대가 나쁘다고 할 기준이 없어요. 그러니 어느 시대든 상관없이 십자가의 능력이 꽂히면 시대와 상관없이 구원받습니다. 전쟁 중에 어렵게 살았다고 천당이 더 가까운 것이 아닙니다. 또 풍족한 가운데 살았다고 지옥이 더 가까운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 복음 - 우리의 죄를 그분이 다 치르셨다 !!
사도가 말한 것은, "현재 이 세상에 어떤 형편에 있든지 간에, 생소한 것이 다가올 때 우리는 생소한 나라에 들어간다" 라는 겁니다. 도저히 인간들이 생각도 못하는 너무나 엉뚱한 세리와 창기가 천당 가는, 그런 정말 아무 것도 한 것 없고 죄만 지었는데, 그래도 천국 가는 그러한 놀라운 능력이 바로 십자가의 능력이란 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우리 대신 다른 분이 우리의 죄를 다 치렀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이 바로 복음입니다.
◈ 복음 - 주께서 다 이루셨다 !!
복음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의(義)가 들어있어요. 그러니 딴소리하면 안 돼요. 예수님의 의입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복음은 술 끊기, 담배끊기, 충성하기 등등, 이런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자기가 하는 것이 없습니다. 복음에는 자기 쪽에서 행한 것이 없어요. 자기가 앞으로 교회 잘 다니기, 앞으로 열심히 기도하기 등등, 이런 것이 들어가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신 것이 곧 복음이란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해야 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아마 우리 생활을 24시간 비디오로 촬영한다면 역겨워서 도저히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이란, 자기가 뭘 했다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셨다는 겁니다. 이 예수님의 의로 원수 된 우리를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원래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그래서 잘난 우리를 구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 된 우리를 예수님의 의로 덧입혀서 구원했어요. 그런데 이 사랑은 끊어지지 않는 지독한 사랑입니다. 아무리 많은 죄를 지어도 그것보다 더 많은 용서로 씻어주시는 사랑, 이 사랑으로 죄인 된 우리가 의인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전한 십자가 복음이란 말입니다.
♨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거듭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우리가 무슨 성경 공부를 하겠습니까? 해봤자 튕겨 나오고 거부할 수밖에 없는 그런, 항상 우리 속에는 "내가 잘났다. 나도 할 수 있는데. 나도 하나님 뜻대로 할 수 있는데" 라는 생각이 들어 있다면, 다 포기하고, 죄인도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소리만 우리의 귀에 쟁쟁하게 들려지게 하옵소서. 우리가 잘났든 못났든 어떤 상황에 있든지, 예수님께서 "내가 다 치렀다' 라는 그 기쁜 소식만이 우리들의 행복이 되고 희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2005년 4월 8일 서경수 정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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