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서

고린도서2-2 광주강의 050225

아빠와 함께 2014. 5. 12. 08:29



05광주강의(실로암교회) 03 - 고린도전서2-2 
                                                                05,02,25    강의: 이근호 목사


◈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할 권한은 오직 사도들만 !!

이제 둘째 시간 시작합시다.  첫 번째 시간에 너무 압축된 것을 많이 했는데, 한 번 대충 요약해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해석할 권한이 없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누가 끼어 드는데, 누구냐 하면 사도가 들어갑니다.  그러면 "사도들은 뭐 돛대냐, 그들 역시 죄인 아니냐?" 라고 하는데, 그들은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 말씀의 해석에 독점권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도 이후의 사람들은 어떠합니까?  사도이후시대의 사람들은 일체 성경을 추가할 수 없고, 사도로서 모든 것이 다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사도 사이에 뭐가 개입되었기에 "오직 사도들만이 예수님 말씀을 해석할 수 있는가? 쉽게 말해서, 사도가 뭐 잘 났느냐?" 라는 것인데, 사도들이 잘 난 것은 없고,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므로 예수님의 주되심이 본격적으로 시행됩니다.  즉 주(主)되심에 합당한 일을 하는 것이지요. 

◈ 이 세상에는 자기 능력으로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믿는 자는 없다 !!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데, 그 십자가 안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가 하면, 예수님만이 의인이고 인간은 죄인이었다는 사실이 확실히 드러났습니다.  이해하시겠지요?  인간이 떠밀었고, 인간에 의해 떠밀려 죽음으로 말미암아서, 이 세상에는 예수님을 알아본다든지, 자기 능력으로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믿는다든지 하는, 그런 사람이 일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주가 되시기 때문에, 십자가 지신 채로, 그 십자가 지신 당사자가 주가 되심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안에서 주에 합당한 작업에 들어가십니다.  이 말은, 그 어떤 인간도 주의 일에 협조하거나 동조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주(主) 되심이 하는 일은, 이미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인간과 격리되었기 때문에, 만약에 어떤 주(主) 되심에 합당한 일이 성취된다면, 이것은 온전히 예수님 홀로 이루신 작업이지 인간의 그 어떤 일도 거기에 삽입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 유두고를 살린 것 -  사도 바울의 강연이 허튼 소리가 아니다 !!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유두고란 사람이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듣다가, 밤늦게 까지 계속되어서 졸다가 삼층 누각에서 떨어져서, 즉 중력의 법칙, 자유낙하의 법칙에 의해서 죽었습니다.  그러면 끝이지요.  애통해 하거나 억울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마지막에 죽는 것이 당연하고, 원래 죽어야 될 인간이 죽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가서 그 유두고를 살려냅니다.  살려내는데 그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사도 바울이 길게 강연한 그 말씀의 내용이 그냥 허튼 소리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로 계셔서 그 말씀 내용대로 통치하고 있음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행 20:9)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행 20: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행 20:11)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래 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행 20:12)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그런데 사람들은 유두고를 살려낸 것이 사도 바울이라고 생각할 수 있거든요.  그렇다면 바울은 장례식에 찾아다니면서 죽은 자를 살려내야 합니까?  아니지요.  그때그때 달리요.  병든 자들에게 바울의 손수건을 얹어서 낫게 했다고 해서, 공장에서 대량으로 바울의 손수건을 생산했습니까?  아니지요?  

◈ 주님이 바울을 데리고 다니면서 직접 일하고 계신다 !!

사도 바울은 주님의 심부름꾼으로서 예수님의 필요에 따라 적재적소에 투입된 것뿐입니다.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이 바울을 데리고 다니면서 직접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죽은 모든 사람들을 살려내는 것이 아니고, 죽은 자를 살려낼 때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죽은 사람을 살릴까 말까하는 결정권에 사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전하는 말씀이 빈깡통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 있는 생명의 말씀이란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떻게 사도가 예수님 말씀의 해석권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십자가를 통해서 주되심을 보이시는 것이 본격적인 사역인데, 이러한 주되심이 어떤 일을 갖고 있느냐는 것은 구약으로 돌아가야 알 수 있습니다. 

◈ 구약의 여호와께서 하시는 그 모든 일을, 신약에서는 사도를 앞장 세워 !!

구약에 보면 주님이 계시는데 그 주님은 '여호와'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님입니다.  그래서 구약에 나오는 그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그 모든 일을, 신약에서는 사도를 앞장 세워 주님께서 그 배후에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있는 앉은뱅이를 낫게 한 것도, 전혀 그들의 능력이 아니고, 구약에 나오는 여호와의 주되심이 마지막 때에 본격적으로 적용하다보니, 앉은뱅이가 낳게 된 것이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고, 또 유두고가 죽었다가 살아나고, 복음을 모르는 자들이, 즉 영적으로 죽었던 자들이 살아나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행 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행 3: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 예수님이 주의 자리에 앉았기에 비로소 성령으로 세례를 !!

그들이 이런 죽은 자를 살리고 앉은뱅이를 고치고 하는 놀라운 일을 하는데, 그러면 "그 주의 자리에 앉았다, 안 앉았다" 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주님이 되시는 분이 성령을 세례로 퍼붓는 일이 실시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사건 이후에 모든 것이 이미 다 육이 되었으니, 인간은 전혀 협조가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오순절 날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바로 그분이 주가 되시기 때문에, 즉 주의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비로소 성령을 세례로 줄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말입니다.  주의 자리에 앉기 전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세례요한이 물세례를 줄 때에 그 현장에 예수님이 나타났어요.  그때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세례를 주어라. 그는 장차 성령으로 세례를 줄 분이다" 라는 지시가 와서 세례요한이 세례를 준다는 것입니다. 

(요 1:32)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요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요 1: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성령세례가 무엇입니까?  제가 요단강의 세례요한 앞에 있다고 합시다.  세례를 받는데, 제가 강물을 제 몸에 끼얹습니까?  아니지요.  저는 가만히 있고 세례요한이 제게 세례를 주잖아요.  성령세례가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여 오소서!" 하고 부르짖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세례요한이 물세례를 주듯이, 가만있으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세례를 주시는 것입니다.

◈ 성령이 와야, 비로소 구약의 여호와가 신약의 주인 것을 알고 고백 !!

이것을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서는 "한 성령을 마셨다" 라고 말씀을 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옛날 구약에서는 '여호와' 라고 고백하듯 우리는 '주 예수여' 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예수를 '주'로 고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 예수님이 여호와이다 - 여호와의 특징상 본인이 일을 다 한다 !! 

다시 말해서, 성령이 오셔야 비로소 구약의 여호와가 바로 신약의 주인 것을 알고 고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여호와이다" 라는 말은, 여호와의 특징상 본인이 일을 다 한다는 겁니다.  본인이 다 일을 하지 사람들의 협조나 도움을 원치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예로서, 사도 바울은 자기 생각에는 자기가 터키 쪽으로 전도를 가야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어요.  그것은 바로 주께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막으시고, 마게도냐 쪽으로 가도록 지시를 하셨지요.  이렇게 모든 발걸음을 세시고 인도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인 것입니다.  

◈ 왜 감옥 문이 열렸는가? -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베드로가 옥에 갇혀 있을 때에 옥문이 열려서 그곳을 빠져 나왔지요.  그런데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을 때는 지진이 일어 옥문이 열렸지만 옥에서 나가지 않았어요.  간수들은 자신들이 죄수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줄 알고 자결하려고 했을 때, 옥에서 소리가 들렸어요.  얼마나 놀랍니까?  그럴 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라는 복음을 전했지요. 

(행 16: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행 16:26)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행 16:27)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행 16:28)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행 16:29)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행 16:30)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행 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행 16: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 주 예수 - 그 여호와가 이 여호와 !!

여기 '주 예수'는 바로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마지막 때 예수님을 겨냥한 '여호와' 라는 겁니다.  즉 예수라는 실체를 보여주는 여호와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호와가 육체를 입고서 직접 이 땅에 왔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그 여호와가 이 여호와인줄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향해서 조롱하며, 침 뱉고, 옷을 제비뽑고, 뺨을 때리는 그런 짓을 한 거예요.  

이런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내가 너희들을 고소하지 아니더라도 너희들이 그렇게 숭상하는 모세가 너희들을 심판할 것이다" 라고 했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바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당사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 사도들 - 바로 구약을 해석할 때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석해야 !!

따라서 구약의 모든 해석은 누구의 입장에서 해야 된다구요?  예수님 입장에서 구약 전체가 해석이 되는데, 그 해석권을 바로 사도들이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해석권이 없습니다.  이러한 사도들이 바로 구약을 해석할 때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그런 모형들을 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린도전서에 보면 나와요.  

◈ 고린도전서의 특징 -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주시다 !!

그러니까 고린도전서만 달랑 떼서 거기에 기록된 교회를 흉내 내서 "교회는 이렇게 하면 된다" 라는 식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고린도전서의 특징은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주시다" 라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모든 일은 우리 주님이 지금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음을 믿느냐? 믿는다면 마지막 때에 구원받은 성도이다" 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고린도후서 1장 19절을 보겠습니다.

(고후 1: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예" 라고 하면 되요.  뭐든지 "O.K"이고 "아니라" 함이 없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이 벌이시는 일이 실패한다든지, 저지를 당했다든지, 중간에 잘못된 곳으로 간다든지, 지연이 된다든지 하는 일이 일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실패 없이 자신의 일을 진행시키고 있는데, 그런데 소위 예수 믿는다는 자들이 주님의 일을 실패로 느낀다면, 그런 사람은 지금 정신을 엉뚱한 곳에 팔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엉뚱한 곳에 관심을 기울이니까, 교회 헌금이 제대로 안 나온다든지, 뭐 사람이 잘 안 모인다든지 하는, 그런 곳에 마음을 두게 되고, 그러니 주님의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주되심을 못 믿고, 자신의 기대치에 못 미치니까 낙담하고 좌절하고 우울증에 빠지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분명하게 예수님은 모든 것이 조금도 차질이 없고, 하자가 없고, 지연되거나 마귀에 의해 방해를 받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왜 없느냐고 따지지 마세요.  이것은 세상에서 증거물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고 경험한 모든 것을 다 동원해도 "이러니 실수가 없지" 라는 증거물을 전혀 찾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들의 경험을 근거로 해서 "이러니까 성공했잖아" 라고 하는, 그런 것들을 가지고 오지 마세요.  눈에 보이는 증거물은 항상 문제성이 있다는 말이에요.                  

예를 들어, 병이 날 때마다 "약을 쓰기 전에 먼저 기도하고 쓰니까 낳더라" 라는 식으로 계속 나가면, 열 번 그렇게 해서 나아도 열 한 번째에 안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자기 경험을 제 아무리 앞세우고 그것이 틀림없다고 우겨도 그것으로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일은 "예"만 되고, "아니오"는 안 된다는 사실은, 그것은 바로 성령을 받은 사람의 본인 믿음 문제이지 본인이 그 증거를 수집해서 확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체험을 근거로 해서 예수를 믿으려 한다면 백이면 백 모두다 사기꾼에게 속아넘어갑니다.  마귀에게 말입니다. 

아마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안 믿고 사람들의 말을 믿은 거예요.  흉내를 내면 같이 구원이 되는 줄 알고, 즉 복이 오는 줄 알고 말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다 주님으로부터 직접 성령을 받지 못하고, 남 성령 받았다고 하니까 자기도 성령을 받았다고 폼을 내다가 실족하는 것입니다.  

◈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 - 예수님 안에서는 '예' 만 !!

정말이지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예수님 안에서는 "예"만 되는데, 즉 주되심 안에서는 전혀 하자가 없는데, 그 예수님의 여파로 아무 행한 것도 없는 자기가 의인이 되었다는 이 사실이 믿어질 때, 그 사람은 누구 뭐라고 해도 성령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이렇게 "누가 뭐라고 해도 예수님의 공로로 내가 의인되었다" 라는 것이 믿어지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인데, 그런데 저를 보고 "목사님, 저는 믿는 것이 맞습니까?" 라고 묻는 사람들이 가끔 있어요.  아니 자기 마음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사람 마음을 제가 알 수 있겠습니까?  상대의 마음을 안다고 장담하면 그것은 부채도사지 말입니다.  사기꾼이에요.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믿음을 집어넣어 준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십자가 진 적도 없고, 그는 주님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사도 바울의 이야기는 주님이 따로 계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즉 "내가 여러분의 주인도 아니고, 여러분이 나의 주인도 아니고. 우리의 주인은 따로 계신다" 라는 것을 소개하는 자가 사도이지, 사도 본인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고, 성령을 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도 모르고 믿음이 없으니까 자꾸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주목을 해요.  그리고 이렇게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니, 그것을 이용하는 사기꾼들이 생기고 말입니다.  돈이 되니까 말입니다.

논산 감리교회 어떤 목사가 간증을 하는데, 교인들이 자기에게 2,000cc 승용차를 사주고 난 이후 그 교회가 부흥되었다고 해요.  목사가 왜 이런 거짓말을 합니까?  시골에 사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이런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을 믿더란 말이지요.  그러니까 계속 그러한 손에 잡히고 눈으로 확인하는 것들로 유혹을 하지요.

사도 바울이 "우리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의인은 없습니다" 라고 하면, 그 말은 믿지를 않고, 목사가 "이렇게 받쳤더니만 복을 받았습니다" 라고 하면 그건 믿어지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 십자가란, 인간의 신에 대한 모든 적개심의 발로 !!

그러므로 십자가란 인간의 신에 대한 모든 적개심의 발로입니다.  인간은 희망을 원하지, 신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인간의 희망이 바로 신(神)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희망을 들어주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왜요?  희망을 들어주면 희망이 사라지는데, 그러면 무슨 낙으로 산단 말입니까? 

인간들은, 신이 우리의 희망을 들어주는 신이 아니라 희망 자체를 생산하는 신, 즉 희망을 계속 만들어내는 신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아이디어와 희망을 만들어줄 때 목사는 교인들에게 환영을 받습니다.  물론 계속 교인들에게 희망을 안겨줄 때, 그 교회는 날로 부흥하고 날마다 지옥이 되어가겠지만 말입니다. 

사람들은 희망을 얻기 위해 교회에 나옵니다.  그러나 이미 희망을 얻어서 교회 나온 사람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없습니다.  이미 성령 받은 사람은 자기가 원치도 않았는데, 즉 자기가 기도하지 않았는데 놀랍게도 보이지 않는 희망을 주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더 이상 새로운 희망을 꿈꾸지도 않습니다.  이미 희망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즉 예수님이 주신 희망이 중요하지 자기가 만들어낸 희망은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강의해도, 집에 고3이 있다든지, 로또 복권을 산 사람은 발표 시간이 가까워오면 초조해 하면서 뭔가를 기대하며 잔뜩 부풀어 있습니다.  목사 같으면 열심히 설교 준비해서 강단에 섰어도, 강단에서 김장로가 아직 안 보이고, 헌금 많이 하는 박집사가 안 보이고, 열심히 봉사하는 강집사가 안 보이고 하면 설교할 맛이 안 나고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 율법을 행함으로 지켜보겠다는 그러한 의도로 나왔기 때문에 그것을 감안해서 이야기 한 것이지만, 사도 바울은 아예 처음부터 모든 것을 완전히 육으로 간주해서 전혀 어떤 것도 기대하거나 묻지를 않습니다.  다만 "신자가 아니면 나가라" 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신자가 됩니까" 라는 것이 아니라, 성도 아니면 나가라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자가 아니면 나가주세요" 라는 것이지요. 

◈ 고린도전서 - 나가, 다나가 !!

그래서 고린도전서의 내용은 뭐냐 하면, "나가라!" 라는 것입니다.  "내가 전한 복음이 안 믿어지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힘쓰면 됩니다" 라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이 이해가 안 되거든 나가라" 라는 것입니다.  일종의 '추방령' 이지요.

(갈 1: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왜 나가라고 외치고 있는가 하면, 들어올 자들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나가라고 해서 안 나가는 겁니다.  자기 말의 설득력으로 그들이 온 것이 아니고, 설득하기 전에 이미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말입니다.  사도가 전하는 복음이 믿어지게 되어 있는 사람한테는, 아무리 나가라도 떠밀어도 복음이 있는 이상은 절대로 안 떠나지요.  복음이 있는 이상은 말입니다.

그래서 목사가 복음만 전하면 아무 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복음을 깨달은 사람은 3주 째 안 보여도 4주 째 오게 되어 있습니다.  4주 째 안 보여도 5주 째 나옵니다.  그러면 10주 째 안 보이면 어떻게 합니까?  내버려둬요.  11주 째 나올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교인들이 들쑥날쑥 나오다가 안 나오다가 하는 과정 속에서 주님은 누구를 상대하는고 하니, 목사를 성도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 교회 주인은 목사가 아니라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시지요.  그런데 이런 안타까움을 목사는 본인만 느끼는 안타까움이라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 교회 다니는 모든 성도들이 같이 느낍니다.  한 형제가 안 보이면 같이 염려하고, 그 다음 주에 보이면 같이 즐거워하고 말입니다. 

이것은 배가 파도에 흔들리면 탄 사람이 모두가 다 두려워하면서 같이 염려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항상 주님의 "예" 되심만 의지하도록, 그렇게 활동하고 계신 증거가 되고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강의를 하는 가운데 "주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가?" 라는 것은 아직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려면 구약 전체를 다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래도 해야 합니까?  물론 해야지요.  남는 게 시간인데 뭐 하겠습니까?

제가 강의 초에 말씀했잖아요.  고린도전서를 공부한다고 해서 고린도전서만 보지 말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에서 고린도전서를 봐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해야만, 고린도전서의 어떤 부분을 말해도 그와 더불어 성경 전체가 딸려 나오게 되지요.  고린도전서를 얘기하고 있는데 성경 전체가 같이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의 장난 가운데 이런 게 있습니다.  이불 속에 숨어서는 "나 어디 있게?" 하고 말하고는 "나 여기 있다" 하고 불쑥 머리를 들면, 이불과 같이 들썩 들려서 올라오지요.  이처럼 고린도전서를 해도 성경 전체가 불쑥 다 딸려 나와야한다는 말입니다.  

◈ 창세기와 고린도전서 !!

그래서 지금부터는 창세기와 고린도전서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 전체가 한 권의 책임을 명심하시고 잘 따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성경 초반에 나타난 제일 중요한 점은, 창세기 2장과 3장 가운데 단절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단절인가 하면, 창세기 2장에서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말씀이 나오고, 창세기 3장에서는 인간이 흙이 됩니다.  신분의 변화가 일어나지요.  2장에서는 아직 안 죽는, 죽음의 세력이 아직 인간에게 닥치지 않았던 시절이고, 3장은 이미 죽음의 세력이 지배하는 흙이 된 인간, 이런 단절이 성립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창세기 3장 이후에 "인간 스스로는 힘을 쓸 수 없음" 이라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거예요.  인간 스스로는 힘을 쓸 수가 없어요.  어떤 힘에 놓여 있지 스스로 힘을 쓸 수 없는 입장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악한 힘이든 선한 힘이든 간에 스스로는 전혀 힘을 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힘을 낼 수 없다는 말은, "행동을 안 한다' 라는 말이 아니라, 행동을 하는데, 그 행동이 "악한 힘의 지배를 받았느냐, 아니면 선한 힘의 지배를 받았느냐" 라는 것을 점검하는 것이지 "자기 스스로 힘을 발휘했습니다" 하고 하는 행동은 아니란 말이지요. 

창세기 3장 이후에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는 방식이 뭐냐 하면, 인간이 행동을 해요.  그런데 그 행동은 어떤 힘의 지배를 받았기에 나온 행동이냐를 검증하는 식의 행동이지, 스스로의 의지를 보여주는 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을 보니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구나" 라는 것을, 그냥 확인케 하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행함이 아니라 믿음을 이야기하니 인간이 행동조차 안 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시는데, 그것이 아니라 인간이 시체가 아닌 이상은 누구든지 행동은 다 있습니다.  그런데 그 행동을 분석하면, 놀랍게도 과연 누구의 지배를 받는 행동인지 나눌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을 보면, 이 세상은 두 종류로 되어 있지요.  한쪽은 여자의 후손, 또 다른 쪽은 뱀의 후손 말입니다.  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양편에 인간이 있습니까?  없지요.  인간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어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간의 싸움이지요. 

◈ 뱀과 여자의 싸움 아래 우리가 놓여 있다는 것이 인간의 유일한 현실 !!

따라서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해도, 그 행동은 어느 편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는가를 확인할 뿐이지 인간의 행동 자체가 어느 한 쪽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인간의 현실입니다.  뱀과 여자의 싸움 아래 우리가 놓여 있다는 것이 인간의 유일한 현실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성경 해석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 창세기 1,2장 - 원래 인간의 모습은 무엇인가? 
◈ 창세기 3장 - 인간은 스스로 힘을 발휘해서 운명을 결정 못하고, 어떤 다른 힘에 의해서 !!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란 것은, 스스로 힘을 발휘해서 운명을 결정하는 입장이 못 되고, 어떤 다른 힘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만드신 본래의 인간이 그러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창세기 2장이 있다는 말입니다.  즉 "창세기 1장이나 2장에 있는 원래 인간은 안 그랬었다. 그런데 현재는 스스로의 행동으로 자기 운명을 결정할 수 없는 그러한 난처한 입장에 놓여 있다" 라는 것입니다.  

◈ 종교 - 사단의 지배아래 있는 자의 몸부림 !!     

따라서 "창세기 2장 그 때로 돌아가게 해 주세요" 라는 요구 자체가 바로 악한 뱀의 지배를 받아 나온 요구라는 말입니다.  즉 "창세기 2장의 시절 에덴동산이 그립습니다. 어떻게 그 때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을까요?" 라는 요구는, 전혀 자기 주제도 파악 못하는 건방진 소리라는 거지요.  이렇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구원되고자 하는 것이 사단의 지배아래 있는 자의 몸부림이고 그것이 바로 '종교'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해를 잘 못하시는 것 같아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창세기 3장의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간의 싸움이 사실인가요?  사실이고, 이것이 현실입니다.  이것이 현실인데, 그런데 이 현실을 못 받아들이는 것이 또한 인간의 현실이란 말입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간의 전쟁 여파에 우리가 하수인처럼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현실로 안 받아들이기 때문에 나온 결과가 뭐냐 하면, "다시 창세기 2장으로 돌아가서 에덴동산에 살고 싶어요" 라고 하는 소망이 나오는 겁니다.  이런 소망이 자기 주제 파악이 안 된 자의 소망입니다.  아직도 자신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지배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나온 것이지요.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어 흙으로 돌아가야 할 존재가 되었다면, "아! 우리는 죄인이라서 마땅히 죽어야 하고, 지옥가야 하는구나" 라고 나와야지, "아! 에덴동산이 그립도 그 때로 돌아가야지" 라고 나오는 것은, 아직도 자신이 추방된 이유도 모른 채 자신의 욕망만 채우려는 악마의 하수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 인간구원의 희망을 주는 것은 분명히 뱀이 만들어낸 작품 !!

제가 상당히 중요한 것을 이야기했는데,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간의 싸움에 인간의 희망과 소망이 끼여들 수 없다면, 소위 개혁주의 교회, 개혁주의 신학과 철학 등등, 이런 것들은 모두 마귀가 만들어낸 것이라는 말입니다.  왜요?  거기에는 모두가 인간 구원에 대한 희망을 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구원의 희망을 주는 것은 분명히 뱀이 만들어낸 작품임에 분명하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에서 나온 대표적인 것이 바로 구원파나 지방교회, 통일교, 여호와의 증인 등등입니다.  물론 개혁주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이 모든 것은 '회복'을 미끼로 던지는 신학입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신학은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지만 인간이 범죄 해서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고, 사랑 많으신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불쌍히 여겨 원래의 인간으로 회복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냈다" 라는 것입니다. 

왜 지금까지 다들 그렇게 알고 왔잖아요.  그것이 납득이 되니까 말입니다.  아니, 교회에 나오는 보람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뭔가 우리 힘으로 구원이 안 되는데, 교회 와서 들어보니까 예수님을 땅에 보내주셔서, 우리가 안 되는 부분을 예수님이 보충해 주셔서,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게 되었다는 안도의 말을 듣고 싶어서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그들은 '복음'이라고 이야기하지요. 

◈ 마귀 복음 - 우리의 구원 얻으려는 열망과 예수님의 오심이 결합해서 !!

그런데 이것이 생뚱맞게도 마귀가 우리의 눈을 흐리게 한 신학이란 것을 여러분이 상상이나 해 보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스스로 구원되려는 구원 욕구를 긍정하고, 그 긍정한 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박수를 치면서, "다른 것은 다 엉터리지만 그 부분은 봐 줄만하다. 내가 가서 도와줄 게" 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구원 얻으려는 열망과 예수님의 오심과 결합해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오늘 마귀에 우리에게 던지는 구원의 공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구원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외치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음과 전혀 맞지 않습니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간의 싸움으로 세상이 움직인다는 것을 어느 인간도 눈치 못 채는 것입니다.  구원 문제는 자기의 열망과 노력으로 해결되는 문제로만 여기지요.  여기에서 신학이 나오고, 이 신학을 절대 포기 못하겠다는 것이 인간의 고집입니다.  바로 이런 모든 고집에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고 말입니다. 

여자의 후손 되시는 예수님이 일을 하셔서 눈을 떠보니까, "그동안 우리는 어디에 속았다" 라고, 뱀의 후손에게 속아 엉터리 신학을 갖고 있었던 것이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 여망과 그것을 긍정해 주는 모든 신학과 철학과 종교는 다 마귀의 작품이라는 말입니다. 

6시에 저녁 먹는다고 해서 6시까지만 하겠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 하는데, 저녁 먹을 시간이 없지만, 먹어야 몸뚱이가 사고를 안 치니 말입니다.  강의를 계속합니다.   

"내가 구원되어야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라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인 유대인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들은 가슴을 치면서 회개했습니다.  이사야의 말씀에 따라서,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에 보면, 너희들이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않아서 이곳이 성전이 아니라고 했지요?  

(렘 7: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렘 7: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렘 7:5)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렘 7:6)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렘 7:7) 내가 너희를 이곳에 거하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 무궁히 준 이 땅에니라

그래서 유대인들인 고아와 과부를 돌보았고, 이레에 두 번씩 구제하고, 금식하고, 십일조를 했습니다.  왜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 귀여움을 받기 위해서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조상들은 하나님 시킨 대로 못해서 망했지만, 우리는 조상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고 철저히 선지자들이 요구하신 말씀을 지키겠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긍휼만 기대합니다. 그래서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고 있습니다.  이래도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이런 자들을 향해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나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온 것이니라" 라고 하셨지요.  유대인들인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 다 했어요.  인간의 한계 상황까지 가면서 몸부림치고 노력했지요.  그런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고 말입니다.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나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며,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를 만났어요.  주님을 만난 후 그는 "처음부터 우리는 죄인이었다"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어요.  우리가 죄를 짓는 차원이 아니라, 악에 매여서, 즉 우리는 태생부터 죄 아래 있다는 것이지요.  악에 매였기 때문에 나오는 아이디어가 구원을 얻으려는 몸부림이고 말입니다.  

(빌 3:5)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그러면 우리를 점차 악에 묶이게 하는 그 능력은 무엇입니까?  갈라디아서에서는 그것이 바로 율법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율법의 능력으로 우리는 자아를 만들고, 그 자아 속에 죄를 집어넣지요.  율법이 옴으로서 우리 속에 없는 죄가 발생됩니다.  

예를 들어서, "탐내지 말라" 라는 말씀을 알기 전에는 자기는 욕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 말씀을 알고 난 뒤부터는 자기 마음이 탐심으로 가득 찬 것을 발견하게 되지요.  즉 새로운 자아가 발견된다는 겁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도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말입니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지만 이렇게 "누가 나를 구원할까?" 라고 외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이란, 여자의 후손이신 주님의 권한에 속한 문제입니다.  그것을 누가복음 2장에서는 "내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이다" 라고 했지요.  그래서 "내 사랑을 받은 자가 누구냐?" 라고 묻는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자기 사랑을 허락한 사람은, 날마다 생기는 모든 탐욕과 죄가 주님의 사랑 앞에서는 아무도 송사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성령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바리새인의 행위를 반복할 뿐이고 말입니다. 

◈ 창세기 3장 이후에 2장을 설명 - 이 세상은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간의 전쟁터 !!

다시 창세기를 보겠습니다.  창세기 3장 이후에 창세기 2장이 무엇이냐를 설명하는데, 창세기 2장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창세기 2장을 창세기 3장 이후로 어떻게 설명하는고 하니, 인간은 빠져버리고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간의 전쟁터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은 뭐냐 하면, "처음 하나님이 만든 인간은 어떤 힘에 의해서 눌린 존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창세기 3장에 와서는 바뀌었다. 이제는 악한 힘에 의해서 조정 받는 그런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 책임이 아니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창세기 2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자아(自我)라는 것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항상 아메바같이 움직여요.  자아가 넓혀졌다, 좁혀졌다 하고, 아침에 다르고 저녁에 다른다는 말입니다.  들쑥날쑥해요.  새벽에 교회에서 기도할 때는 천당에 있는 것 같다가, 오후에 사람을 만나서 사기를 치고 나면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고 말입니다.  

◈ 행함 - 현재 내 자아는 이런 꼴입니다 !!

이 자아라는 것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감각, 경험, 체험, 환경적 요인 등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것인데, 그러니 결국 인간이 자아를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자신의 모습을 자꾸 드러내게 되어있어요.  다시 말해서, "현재 내 자아는 이런 꼴입니다" 라고 외부에 드러내게 되는데. 이것을 가지고 '행함' 이라고 하지요. 

이런데 무슨 자기 행함을 믿을 수가 있습니까?  도무지 믿을 수가 없지요.  "내가 이제부터는 하루에 1시간 기도해야겠다" 라고 결심하고, 첫날은 잘 실천하지요.  기도시작하고 얼마 안 있었는데 1시간이 벌써 지나가요.  그러나 몇 일 지나면, 1시간 기도했겠지 싶어서 시간을 보면 겨우 15분 지났어요.  이러다가 계획을 수정하지요.  30분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 속에 괴물이 들어있다고 했는데, 우리 자아 속에 괴물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괴물은 어떤 괴물이냐 하면,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괴물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튀어나오기에 이놈이 언제 돌출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기를 절제한다고 눌러봐야, 다른 곳으로 튀어나오고, 여기 누르면 저쪽으로 삐져 나오고 하지요.  마치 물침대같이 이쪽 누르면 저쪽 올라오고, 저쪽 누르면 이쪽 올라오고 말입니다. 

그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포기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그 포기가 안 되지요.  왜요?  남하고 비교해서 자신의 잘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즉 "넌, 어떤 것이 훌륭해, 뭐 자랑할 것 있어?" 라고 나오는데, "난, 죄인이야!" 라고, 이렇게 하면 대화가 안 되잖아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자아를 포기한 상태, 자아를 포기하고 주님께 넘기는 그것을 사도 바울은 '죽음'이라고 했어요.  "나는 날마다 죽고, 내 안에 누가 사는가? -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라는, 이것이 곧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놀라운 이야기지요?  거짓말 같은 이야기 아닙니까?

자기가 자기를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악령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예수님의 영이 계시기에, 그분으로 말미암아서, 그 예수님의 영으로 인한, 예수님의 영께 넘겨진 그러한 자아로서 그렇게 지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도 인정되고 믿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참 이상하게 말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구체적인 정황을 이야기하려면, 고린도전서 1장에서, 왜 먼저 십자가가 꽉 박혀야 되는가가 설명되어야 하는데, 마치 전봇대가 땅에 박혀 있듯이 말입니다.  십자가가 박힌 상태에서, 그 다음에 여러 가지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것,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 등을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러한 십자가 박혀 있는 이상은 그런 것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라는 식으로 고린도전서가 전개되는데, 그것은 저녁을 먹고... 

2005년 4월12일 13시 21분 녹취 마침.  서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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