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이렇게 정리해봤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것-1번. 종교적인 영향력, 종교입니다, 신앙이 아니고 종교적인 영향력을 입었을 때-2번과 3번. 그래서 일단 1번과 2번과 3번을 한번 정리해볼게요.
1번은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 잘 아셨죠? 또 1번이 뭐더라? 하지 마셔요.
1번은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2번은 뭐냐? ‘나를 위해 사는 사람’이에요. 좀 어렵습니다. 1번은 뭐라고요?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 2번은 나를 위해 사는 사람.
3번은 뭐냐 하면 ‘주를 위해서 사는 사람’, 이게 3번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기에는 제가 일방적으로 1번, 2번, 3번 이렇게 분류를 했는데 그 분류에 의하면 여러분들이 ‘아, 1번하고 2번하고 3번하고 그런 차이가 있구나.’ 이렇게 생각이 들겠죠. 제가 1번, 2번, 3번을 나열한 것은, 1번, 2번, 3번 셋 다 차이가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함입니다. 내가 주를 위해서 산다고요? 그거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거예요. 아무 생각 없이.
하나님 보시기에 1번, 2번, 3번 마찬가지에요.
4번은 , 주만 살아계시다는 거예요. 주만 살아계시다. 그게 신약 성도입니다. 주만 살아계시다. 주만 살아계시기 때문에 내가 1번이 되든 2번이 되든 3번이 되든 그걸 자랑질 안하고 “주는 살아계십니다.”라는 고백이 일상생활에서 계속 나오는 거예요. 주만 살아계시다.
그러면 주만 살아계실 때 갑자기 ‘나는 어떻게 사느냐’의 관심사는 여기서 끝났습니다. 주만 살아계시니까 모든 말씀이 주를 향하니까 그다음부터는 ‘주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걸 알면 되겠죠. 주님에게. 다윗의 등불 따라서. 북쪽 아닌 남쪽에 있는 다윗의 등불 따라서 주님은 어떻게 살았는가?
주님은 이렇게 살았어요. 십자가에서 이렇게 살았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6절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제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하셨어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이렇게 외치지 않았어요. “주님, 저 버려도 다시 살릴 거죠? 미리 다 아는데? 그럼 나 죽여주시면 주께서 저를 사흘 만에 살려줄 거니까” 이건 예수님이 알고 있어요. 마태복음 16장에서 그렇게 이야기했으니까. 인자가 죽고 난 뒤 사흘 만에 살아난다 했으니까(21절). “그렇게 해줄 거죠? 그럼 저는 죽습니다.” 이렇게 아주 신바람 나게 돌아가신 게 아니고 어떤 말이 있느냐 하면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여기서 죽는다는 말이 없어요. 버리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외치는 이 말씀이 십자가의 완성과 관련되어 있는데요.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포함해서 모든 인간을 쓰시다가 버리신다 이 말이죠. 쓰시다가 버리시는 거예요.
예후를 쓰시다가 예후를 버리시는 거예요. 이사야를 쓰시다가 이사야를 버리고. 모세를 쓰시다가 모세를 버리고. 엘리야를 쓰시다가 엘리야를 버리고. 이제 그다음에 누구 차례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시다가 우리를 버리십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모든 인간은 자기를 위한 인생의 무대를 만들었어요. 자기가 그 무대 연출자이고. 연출할 때 1번, 2번, 3번을 왔다 갔다 하면서 연출해요. ‘아, 주식을 팔까 말까?’ 이게 자기가 연출하는 자기 무대잖아요, 자기 무대. 철옹성 같은 자기 진지를 위하여. 그게 자기 무대에요. 자기 무대에서 ‘저 사람을 쓸까 말까’ 전부다 재고 있죠.
그런데 하나님도 자기 무대가 있어요. 자기 무대에 등장하는 게… 오늘 본문 같으면 지금 예후가 누굴 죽이는가 하면 요람을 죽였어요. 아합은 이미 죽었고. 요람을 죽이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합 왕가가 나봇 포도원 주인에게 한 짓을 인하여 아합의 아들인 요람을 죽여서 나봇이 죽었던 매장지에다 그걸 던져 넣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왕하 9:26), 그 말씀을 실현했고요. 또 하나는 예후가 오버해서 죽여야 될 명단에도 없는 아하시야를 죽였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짜놓은 그 무대 있잖아요. 연극 무대. 그 연극 무대에 요람 등장하고 죽고, 아하시야의 조카들이죠, 그 사람들 죽고. 그 죽이는 역할에는 예후가 거기 또 등장하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무대에 딱 집어넣고 다루시고. 그걸 하나님께서 연출도 하시고 관람도 하시는 거예요. 음, 일 잘 되고 있다.
그럼 오늘날 우리 같은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구약은 그렇다 치고,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무대에서 어떤 입장에 있는가? 그게 마태복음 24장 37-39절에 나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인자이신 예수님께서 오시기 직전까지 모든 인간은 자기가 만들어놓은 무대를 자기가 연출하면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누가복음에 보면 장사까지 포함되어 있어요. 자기 인생을 살고 있는 거예요. 어떻게? 아무 생각 없이. 정말 아무 생각 없어요, 인간은. 교회 다녀도 아무 생각 없고 절에 다녀도 아무 생각 없고 안 다녀도 아무 생각 없어요. 그냥 아무 생각 없어요.
그런데 인자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오시는데, 그 인자되시는 분이 오시기까지 전에 뭐를 했느냐 하면 십자가에서 이런 말씀을 했어요.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그러니까 “안 버릴 요량으로 쓰셨으면서 이제 와서 왜 저를 버리십니까?”라는 거예요. ‘어찌하여’라는 말을 살려야 돼요. ‘어찌하여’라는 의미를 살려야 돼요. 주님은 뭐 아버지랑 다 알고 짜고 치는 고스톱입니다, 이래서는 안돼요.
시편 22편에 나오는 그 말씀이거든요.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말씀이 나오는 대목으로 가는 거예요. 여기서 다윗이 ‘어찌’라고 하는 것은 “나는 아버지께서 버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라는 다윗의 고백이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겁니다.
다윗은 3번인 거예요. “하나님, 좀 따져봅시다. 나 주를 위해 살았습니다. 주께서도 그런 언질을 줬잖아요. 그렇다면 저 사람은 자기를 위해 사니까 저 사람은 2번이지만, 나는 3번이니까 저 사람은 버림받아도 나는 버림 안 받을 타당성과 정당성과 근거가 저한테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참에 와서 저를 왜 버리십니까?” 왜 버리십니까?
주님께서는 뭘 아시느냐?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쓰시다가 버린다는 사실을 우리 주님은 아셨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 쓰시다가 버려지는 의미가 뭐냐? 버리기 위해서 쓰신다는 사실을 주님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 코스. 인간의 연약한 죄 있는 육신의 몸을 지녔기 때문에 죄 있는 육신이 갖고 있는 한계, 어떤 인간도 하나님께 가는 데에 극복해내지 못한, 극복 못한다는 그 경계선을 예수님만 외칠 수 있어요.
예수님은, 내가 버려지기 위해서 쓰여진다는 것, 그리고 “어찌하여 버리시나이까”라는 그 말씀을 어떤 인간도 따라올 수 없고 오직 나만 쓰시다가 버리는 것에서 버리기 위해 쓰신다는 그 코스를 극복하고 아버지와 함께 된다는 사실을 유일하게 아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 고백을 하시는 거예요.
이걸 더 쉽게 이야기하면, 모든 인간은 다 죽어 마땅한데 그 죽어 마땅하다는 이야기를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분은 우리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부활이라는 것은 죽어야 있는 거예요. 안 죽으면 부활이 없는 겁니다. 안 죽고도 부활하는 것은 인간이 지어낸 거고요. 진짜 부활은 죽어봐야 진짜 부활을 아는데 이 인식은 예수님만이 처음으로 성령을 통해 알게 된 거예요.
그렇다면 끝으로, 신약성경에서 성도의 위치는 뭐냐? 예수님 옆자리(하나님 옆자리-같은 말입니다)에다 인간의 자리를 비워놔요. 그리고 그동안 하나님께서 인간세계를 통해서 무대에서 연출한 모든 것을 같이 관람하게 합니다. 그게 뭐냐? 1번, 2번, 3번이에요.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요. 아무 생각 없이. 성경 알아도 소용없고 몰라도 소용없고.
그런데 4번은 뭐냐 하면… 이게 에베소서 2장 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하늘에 딱 앉혀주는 거예요. 앉혀주면서 뭐하라고? 하나님이 그동안 인류사 연출한 것을 보여주면서 얼마나 하나님이 정당하게 연출했는지를, 그리고 인간들은 인자가 올 때까지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을 딱 보게 하셔요.
그러면 옆에 앉아있는 그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 이미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만이 하나님 옆에 앉을 수 있어요. 그게 부활의 자리에요. 죽은 자만이. 그럼 죽은 자라니까 아깝잖아요. 4번에 해당되는 사람은요, 자기 자리에서 아깝다 안 아깝다, 살았나 죽었나,라는 인식 자체가 이미 소실된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4번은 뭐였습니까? 주식이 억 되는 거예요. 주가 억 되는 것, 코스피 억 되는 것, 뭡니까? ‘예수님만 살아계시다.’라는 그 고백으로 인하여 그 고백을 통해서 본인도 살아있는 예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살아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이 말씀이에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살아있는 건 맞는데, 그러나 이것은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고, 주님이 날 위해 죽었다. 죽음이라는 것을 이미 겪게 하시고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과 함께 나는 땅에서는 죽었고 하늘에 생명이 있는 산 자로 내가 지금 이 땅에 살아있습니다. 살아있으면 뭐하는데? 하루치의 생애를 받아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다 이루어졌음을 기쁨으로 고백하는 그 일이죠.
그럼 마지막으로 이 말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럼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겠어요? “그게 바로 주를 위해 사는 거야.”라고 누가 또 아는 척하고 충고하잖아요. 그거는요, 주식 9000이에요. “그래, 나는 이젠 주를 위해 살아.”하면 미끄럼틀에서 미끌어져가지고 다음 되면 벌써 아무 생각 없어요. “나는 살았으니까 나는 복 받아야 마땅하고, 너는 너를 위해 사니까 지옥이나 가라.” 이러고 있으면 그 자체가 이미 주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살아있는 그걸로 다시 미끌어져버리죠.
바로 그런 그 모습까지 느긋하게, ‘여태껏’이란 것은 다 빼고 지금 이 순간 날마다 주와 함께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세상을 느긋하게 볼 수 있는 그러한 제4의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믿는다고 떠벌이면서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이 얼마나 주님 보시기에 한심스럽고 오버하는 태도고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그러한 철딱서니 없는 생각인지 저희들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그래서 모든 일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던 그 연출 밑에서 십자가에서 일하신 하나님에 대해 감사하면서 그것을 바라보는 즐거움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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