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7/28-‘동행’이라는 의미는 ‘나란히’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일방적인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은 상태로 동행

아빠와 함께 2026. 7. 28. 17:12

천국이든 지옥이든 관찰자로서의 인간은 거부당합니다. 오로지 말씀에 의해서 전달되는 그 내용만 실제 현실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 내용 속에 담긴 환경을 한마디로 말해서 ‘함께 삶’입니다. 결코 홀로 사는 자를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받아주지 않습니다. 천국에 들어올 이유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천사들을 보세요. 하나님 보좌 주변을 독차지 하면서, ‘언제 주님을 떠난 적이 있었느냐’라는 자세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보자 옆에 24 장로들이 자리하면서 천사와 동일한 찬양을 하나님과 주님에게 돌립니다. 바로 이러한 광경이 보여주고자 하는 취지는 이러합니다.

천국에 사는 자들은 지상에서 결코 홀로 사는 식으로 사는 자들이 아니다 는 겁니다. 굳이 천국가서 천국 생활을 하는 자들이 아니라 이 지옥 속에서는 주님과 동행하면서 사는 모습을 보였다는 겁니다. 그리고 동행의 최종 상태가 이처럼 영원한 합류입니다. 만약에 이 세상에서 홀로 사는 것이 즐겁고 재미난다면 이런 자는 천국과 연관된 삶이 아니라 지옥과 연관된 삶입니다.

인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단독자로, 혹은 자기 단일성에 미쳐서 살아갑니다. “나는 혼자다. 신난다”를 외치고 다니는 식으로 평소에 행동해 오고 있습니다. 반면에 천국에 간 구약의 성도들을 봅시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2-24)

뿐만 아니라 노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8-9) 따라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24장로들은 구원받은 인간을 대표하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데 면류관이 어떻게 해서 주님에게 전달되는지를 봅시다.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계 4:10_여기서 ‘자기 면류관’으로 나옵니다. 타인의 면류관이 아니라 자기가 썼던 면류관입니다. 이것을 남도 아니라 주님의 것으로 기꺼이 던집니다. 도저히 자신이 쓰는 것이 용납될 수 없다는 과감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이로서 이 24장로들은 본인들이 마음에 두고 있는 자기 가치는 없습니다. 자신의 가치를 자신이 계속 간직할 수가 없습니다. ‘동행’이라는 의미는 ‘나란히’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일방적인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은 상태로 동행하는 겁니다. 평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점을 유념시켰습니다.

실제로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점을 일찍감치 감안하시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즉 아름다운 집에 평안히 지내는 것이 도리어 징벌로 작용하는 겁니다. 인간들은 단독성을 지니고 그 단독성을 마음껏 발휘하는 방법으로 자랑하는 행위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3:18-24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께서 그 날에 그들의 장식한 발목 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과 귀고리와 팔목 고리와 면박과

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과 호신부와 지환과 코 고리와 예복과 겉옷과 목도리와 손주머니와 손 거울과 세마포 옷과 머리 수건과 너울을 제하시리니 그 때에 썩은 냄새가 향을 대신하고 노끈이 띠를 대신하고 대머리가 숱한 머리털을 대신하고 굵은 베옷이 화려한 옷을 대신하고 자자한 흔적이 고운 얼굴을 대신할 것이며”

자, 그렇다면 주님께서 제시한 방식은 무엇일까요?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1-3) 예수님께서 천국의 사정을 지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주시는데 거론된 대상이 바로 ‘어린아이’입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은 독자성, 독립성이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의존성이요 자기 것을 따로 챙길 것을 모릅니다. 즉 ‘나를 위한 나의 면류관’ 같은 것은 생각지도 못합니다. 어린아이는 늘 보호자를 찾고 보호자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는 자기 가치성에 미쳐버리지 않습니다. 몰입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에게 타인이 고정되었습니다. 부모에게로 말입니다. 이러한 의존성의 극단적인 양상이 바로 주님과 천사의 관계입니다. 천사는 주의 보좌에 밀착한 위치에서 찬양하는 것을 봐서 지상에서는 기능에 있어서도 철저하게 주님의 지시에 따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독자적으로 생각한 천사는 천국에 가 있지 않고 지옥에 가 있습니다.

그런데 천사의 이러한 기능이 순전히 주님의 구원에 관여했다면 어째서 주님이 아닌 일반인에게도 천국이 허용되었는가요? 이 사실을 천사의 기능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천사의 기능의 원판이 되는 에스겔에 나타난 천사에 대한 모습을 보겠습니다. 에스겔 1:10에 보면,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그런데 에스겔 10장에서 보좌에 붙어 있는 천사의 얼굴이 바뀝니다. “그룹들은 각기 네 면이 있는데 첫 면은 그룹의 얼굴이요 둘째 면은 사람의 얼굴이요 셋째는 사자의 얼굴이요 넷째는 독수리의 얼굴이더라”(겔 10:14)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면, 처음에는 인간 및 노아 홍수에 사라진 짐승의 얼굴로 천사의 기능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에스겔 10:14에서, 사자의 열굴 자리에 그룹이란 천사의 얼굴이 나타납니다. 이 그룹이라는 천사의 얼굴은 창세기 3:24에서는 생명나무의 길을 막고 인간이 통과하지 못하는 기능의 그룹입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천사가 짐승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짐승의 기능을 발휘한다는 뜻입니다. 그룹의 기능이 삽입되어서 인간 세계를 활동했다는 말은, 인간은 절대로 구원될 없다는 사실과 관련있습니다. 인간이 결코 생명나무 과실을 따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드린 자만이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에 천사가 관여하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인간을 구원시켜 주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점을 명백하게 드러낸 사실이 바로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께서 해내신 일입니다. 죄로 인해 구원될 수 없는 자임을 분명히 밝혀주시는 취지의 중심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있는 겁니다. 이 십자가 사건에 바탕 위에서 24장로는 자신이 받은 구원을 행위로 보여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제발 나의 일이 없어졌음을 평생 내내 명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