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데 교회
2026년 6월 28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3:1-6
(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3:2)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3: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사데 교회는 죽어가는 교회입니다. 사람이 죽어간다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죽는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죽는다는 게 문제입니다. 죽으면서 죽어가는 이유를 유일하게 알고 있는 단체가 교회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죽음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면서도 ‘죽는 이유’는 아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렇다면 죽지 않는 교회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사도행전 20:28에 나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과 교회와의 매개는 이미 ‘하나님의 피’ 곧 예수님의 피 외에 그 어떤 것도 들어서면 아니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확정된 규정에 대해서 교회에 위반되는 사례와 조건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행 20:29-30)
왜 교회에 흉악한 자들이 들어오는 것을 사람들이 용납하게 될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말들에 더 신경 쓰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에서 어느 정도에 구원될 자신이 있다고 여기면서 그때부터 교회 교리+세상이 요구하는 것=나의 삶이라고 공식을 구축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은 교리상 하자가 없기에 이미 살았다고 하지만 주님 보시기에 이미 죽어가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이런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는 ‘너의 죽었음을 일단 굳게 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회개하라”입니다. 이미 자신이 죽은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확히 한 이상, 더는 자기 행위를 자신에게 더한다고 해서 구원이 성립될 수는 없지요.
그렇다면 회개란 무엇일까요? 실제로 시데교회에 죽지 않고 살아있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흰옷 입은 자’라고 합니다. 흰옷은 인간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옷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한시로 쉬지 않고 계속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형편입니다.
끊임없는 결핍에 대해서 인간들의 의식하고 그것을 마저 채우는 식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주체의 결여’입니다. 마가복음 11장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 이튿날 저희가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예수님께서 시장하시는데 마침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맺히지 못했습니다. 이는 계절상 맺힐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우리 인간들 보기에 전혀 저주받을 만한 이유가 못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왜요? 그것은 이 약속의 땅에 사는 인간에게 있어 무화과 나무는 그러면 안 된다는 겁니다.
미가 4:4에 보면, “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결여가 없어야 할 세계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을 영접할 만한 세상답다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찾아든 세상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인간을 언제든지 충족케 하는 무화과 나무가 되지를 못하는 형편인데 바로 이 형편이 저주상태라는 겁니다. 인간들 대표로 예수님이 나설 때, 무화과 나무은 예수님의 시장기를 온전히 충족시켜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약속의 땅에 합당하다는 겁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해야될 회개란 무엇이 참된 교회의 모습인가를 항시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사데 교회에 흰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 사람들이 자신을 드러내고 빛내기 위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
즉 천국에 이미 합격된 자들은 이런 복장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인다는 겁니다. 이 흰 옷이 가능한 것은 이사야 1:18에 나오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원칙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주홍같이 붉은 죄를 씻는 것은 사도행전 20:28의 말씀처럼, 하나님 자신의 피뿐입니다. 죄로 죽은 자에게 예수님이 피가 뿌려지면 그 피가 살아 있는 한 그곳은 완전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에게는 타고난 자기 위주의 인식이 죽고 난 뒤까지 남아 있게 됩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지옥의 한 장면이 나옵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눅 16:22-24)
이 부자는 지옥에 가서도 끝까지 자기 위주로 삽니다. 이처럼 지옥가는 자들은 지옥가기 전부터 자기 위주에 합당한 조건들을 잔뜩 자기 주변을 장식하면서 그것을 지옥갈 때까지 짊어지고 갑니다. 자신이 그동안 끌어모은 모든 조건과 원칙이 지옥의 구성 조건에 합치되는 겁니다.
반면에 천국 가는 사람은 자신이 일찍감치 죽은 자라는 사실을 알고, 이 ‘죽은 자된 자’를 말씀이 계속 다루고 있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예를 들어 봅시다. “밤 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 새”(마 25:6-7)
이 대목을 보는 모든 살아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은, ‘예수 믿기+ 등 준비’가 갖추어져야 비로소 구원이 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나와 있듯이 ‘도적 같이 ’(계 3:3) 온다는 말씀에 주눅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이 죽은 자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민수기 17:8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 안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 이것이 예수님의 피의 효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에 쓰여짐에 오는 신기함을 한시로 놓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3강-요한계시록 3장 1~6절(참된 교회)260628-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3장 1~6절입니다. 신약성경 377페이지입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아멘.
사데 교회에 언급한 내용인데, 6절에 보면 “교회들에게”라고 돼 있어요. 이건 사데 교회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사데 교회에게 일어나는 이 현상은 그 당시 일곱 교회뿐만 아니라, 오고 오는 모든 교회에 반복해서 일어나는 현상이 된다는 겁니다. 그때마다 이 요한계시록에 예언된 이 말씀, 오늘 본문의 말씀이 계속해서 적용되는 겁니다.
근데 이것은 바로 교회 자체가 말씀을 드러내는 그 바탕이 된다는 거예요.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의 구원이 주의 뜻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 구원을 드러내는 바탕으로써 쓰인다는 거, 이래야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소유하는 그 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쓰인다는 거, 그리고 쓰시는 분은 주님이라는 거, 따라서 우리는 소극적이면서도 그것이 주께 영광이 되는 유일한 경로 속에 포함돼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데 교회와 교회들에게 주시는 이 말씀은 어떤 말씀이냐.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 죽어 있다는 거죠. 그다음에 2절의 말씀이 놀랍습니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살아나라’라고 이렇게 해야 하는데,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너, 죽었어!” ‘예, 죽었습니다’ “계속 죽어” “죽은 것을 확고히 하라”
‘왜 저렇게 우리는 죽은 것을 확고히 해야 됩니까?’라고 물으면, “그래야 쓰여지게 되니까” 구원은 본인이 애쓴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회개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 회개하라는 그 말씀에 쓰이면서 회개가 되고, 구원이 되는 겁니다. 참, 성경에 나오는 이 말씀은, 우리 인간으로 살면서 했던 그 말과는 너무나 보기에 어렵고, 이해 불가능한 말이죠.
아주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에서 자꾸 이렇게 방해되는 것은 말씀에 위배될 때 방해되겠죠. 그 말씀에 위배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우리 인간들이 인간하고 상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씀은 주님한테 나오는데 말씀이 전혀 나오지 않는 이웃 사람하고 이야기한다고요. 그러면서 자기를 규정한단 말이죠.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앞으로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은 ‘한국이 32강 올라가서 뛰는 걸 보고 싶다’ 한국 떨어졌는데요. 땡! 그러니까 감사가 나오는 게 아니고, 자꾸 사람들과 사람들로 형성된 세계에서, 거기서 사는 즐거움과 재미를 자꾸 얻으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 자식은 이번에 또 이렇게 성공을 해가지고...’ 자식 성공 못 하는 사람은 기 죽게 만들어버리죠.
사람과 사람이 상대해서 나오는 그 결과로써, 사는 보람을 자꾸 얻으려고 그걸 채집하고 수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 말씀은 간단해요. “너 살았나?” ‘예’ “살았나? 너 죽은 자야” 죽은 자인데 어떻게 살릴 것인가? 이 내용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일단은 이 교회라는 것에 대해서 요한계시록 말고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돼 있어요.
이 교회에 대한 설명을 내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읽으면서 ‘교회라는 게 이렇게 됐구나’라고 아시면 됩니다. 20장 28절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그다음에 교회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교회가 살아있다, 교회가 구원받는다, 교회만이 천국 간다’에 조건이 있어요. 뭐냐?
예수님의 피가 그대로 회자되고, 예수님의 피의 효과가 인정되는 모임이라면, 그 교회는 누가 뭐래도 살아 있어요. 그런데 교회가 이렇게 살아 있고, 구원을 받고, 천국에 합격돼 있으니까, 누가 성을 내느냐 하면, 마귀가, 악한 마귀가 진짜 교회에 대해서 가만두지를 않고 공격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30절에 쭉 나옵니다. (30절-“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예수님의 피가 살아 있으면 끝났어요. 게임 끝났는데, “죄인인데 피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되었다” 그걸 오늘 본문의 사데 교회는 뭐라고 하느냐. “흰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 흰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 흰옷은 어디 서문시장에서 파는 게 아니고, 흰옷은, 원래 흰옷 입은 자는 이 땅에 없어요. 이 땅에 인간은 매일 같이 죄를 짓기 때문에, 이사야 1장 18절에 보면, 인간은 죄를 지을 때마다 자기 옷에 붉은 죄가, 죄의 색깔이 여기에 묻어요.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라는 이게 구약 예언입니다. 이게 구약 예언인데 이 예언을 예수님이 가지고 와서 성취해 버렸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함께 있는 자는 이사야 1장 18절에 말씀처럼,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라는 작업을 예수님이 자신의 피로 계속해서 해내는 그 흔적을 가지고 교회 또는 성도라고 이야기합니다.
성도는 죄만 짓고 그래서 항상 성도는 더럽고, 돌아서면 또 더럽고, 돌아서면 또 더러워요. 더럽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세상 것으로 자기 삶의 보람과 기쁨을 누리는 그런 충동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남이 가진 거 이상으로 내가 더 많이 가져서, 그것을 나의 기쁨으로 삼는 게 얼마나 세속적입니까? 세속은 예수님을 추방했는데. 사람들은 추방이고 뭐고, 나는 이 세상이 좋아.
‘주님이 어떻게 쫓겨 나가든 난 모르겠고, 나는 내가 태어난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어’라는 이게 바로 죄잖아요. ‘착하게 살아서 복 받자’라는 이것도 죄란 말이죠. 피가 아니라는 겁니다. 죄라는 말은 그거는 예수님이라는 타인의 피가 아니라는 거죠. 나의 기대잖아요. 나의 기대고 나의 애씀이잖아요. 나의 애씀은 무조건 죄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인간의 본성이고 본능인데요. 사데 교회를 보니까, 이 사데 교회는 죽어가는 교회입니다. 그 죽어가는 교회에 누가 등장하냐면, 흰옷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어요. 흰옷을 입고. 원래부터 착한 거 아니에요. 똑같아요. 근데 옷은 흰옷이에요. “예수님의 피로 희게 되었느니라” 요한계시록 7장 14절의 말씀이죠.
요한계시록 7장 13~14절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너 어디서 왔어?” 세상에서 왔습니다. “근데 여기가 어디라고 네가 천국 들어와?” 그러니까 다른 장로 중에 한 분이, “이들은 큰 환란에서 나오는데, 어린 양의 피로 그 옷을 씻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막 변호해 주죠. ‘어이, 신입이! 이 회사가 어떤 회사인데 네가 여기로 출근해?’ 회사 임원진이 있다가, ‘그 사람들요, 예수님의 피로 그 많은 죄가 없어져서 이 천국 회사에 취직한 사람입니다’라는 이야기를 한다는 거예요.
얼마나 죄를 지었느냐, 안 지었느냐는 문제가 아니고, 인식 자체가 예수님의 피로 희어졌다는 게, 이게 박혀 있다는 거예요. 뭐 우리 교회 정도야, 이건 뭐 다 늘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하지만, 우리 교회 정도야. 갑자기 우리 교회 칭찬을 왜 늘어지게 합니까? 다른 교회 같은 경우에는, 이런 이야기하는 사람, 흰옷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을걸요?
왜냐 하면, 없을 거라고 이렇게 자신만만한 이유는, 만약에 그 교회에 흰옷 입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목사 설교에서 예수님의 피 말고 다른 소리가 나오면 그거는 못 견딥니다. ‘여러분,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하나님의 기독교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기독교 나라에서, 그동안 하나님께서 박정희 대통령을 통해서, 6.25 전쟁을 통해서, 많은 선교사의 피를 통해서, 이렇게 지켜줬는데, 이 좌파들이 나라를 버려 먹고...’
만약에 이런 설교가 나온다면, 말씀 들으러 왔다가 갑자기 정치적 발언이 막 나온다면, 흰옷 입은 채로 밖에 나가요. 민주주의가 피가 아니잖아요. 예수님의 피가 민주주의를 위해 있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의 행복과 우리의 인생 성공을 위해서 피 흘린 게 아니잖아요. 우리 인생 성공 자체가 죄인데, 그 죄를 없애기 위해서 오셨잖아요. 예수님 피가.
따라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라는 그 규정. 교회는 이게 교회라고 딱 정해놓으면, 그다음에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사데 교회에 흰옷 입고 다닌다는 이게 무슨 뜻인지를 아는 겁니다. 그러면 죽어가는 교회인 사데 교회를 어떻게 살리겠는가. 여기에 회개하라는 말씀이 옵니다. 회개하라는 말씀 앞에서 그 바로 뒤에, 회개하라고 하는 근거가 뭐냐? 거기에 “도적같이 온다”라는 거예요.
“도적같이 온다”라는 이거 설명해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았다. 감사합니다’라고 이렇게 해놓고는 갑자기 또 어떤 구절을 대면, 두근두근두근하며, ‘아이고, 나 이거 진짜 지옥 갈 것 같아’라는 이런 식으로 불안해서 떠는데, 그중 하나의 말이 뭐냐? 도적같이 온다는 거예요. 도적같이 온다니까, 도적의 스케줄을 알아야 할 게 아닙니까?
그럼, 시간 계산을 해야 하잖아요. 그러면 7년 환란이 언제부터 언제고, 3년 반 환란이 뭐 언제고, 이제 복잡한 시간 계산 들어가는 거예요. 종교 가운데, 시간 계산하는 종교가 뭐냐 하면, 주역(周易)이고요. 그 주역을 이용한 종교가 대순진리회예요. 그 대순진리회가 호텔 지었는데, 그게 가야산에 있습니다. 우리는 실컷 이용하지만, 그렇게 돈 끌어당기지요.
시간 계산하는 이유가, 예수님 재림 언제인지 시간 계산을 해서, 가슴 두근두근 스케줄을 계산하겠다는 말은 결국은 뭐냐 하면, 자기가 살아있다고 우기는 거예요. 죄로 죽은 자를 피로 살려냈으면, 내가 살면 안 돼요. 뭐가 사냐? 피가 살아나야 해요. 피가 살아나야 해요. 내가 살아나면 안 되고, 나한테 도달한 말씀이 살아나야 해요. 상당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걸 어렵게 이야기하게 되면, ‘인간은 항상 자기가 충족하고 온전해야 구원받는다. 다시 말해서, 나한테 모자람이 있으면 안 된다’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그 모자람을 어떻게, 뭐로 채우면 됩니까? 뭐로 채우면 됩니까?’라는 자꾸 이런 걸로, ‘나는 있고, 나는 있는데, 대부분은 멀쩡한데, 결여된 부분, 모자란 부분이 있는데, 그걸 말씀만 채우면 된다’라는 이런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그 예를 들면, 마태복음 25장 7절에 보면,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쌔”라고 이렇게 떡 나온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 말씀을 보면서, ‘야, 예수 믿는 거 가지고 모자라는구나’ 그럼 뭐냐? 신랑이 올 때를 대비해서 등(燈)을 준비해야, 이게 예수 믿는 거지. “예수님은 신랑이다” ‘안 돼! 안 돼! 그걸로 모자라’ 그럼 뭘 해? ‘등(燈)을 준비해야 해’
거기에 등까지 준비해 놓고, 마저 채워져야, 그래야 이게 구원이 된다는 거예요. 이게 정말 인간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크나큰 장애죠. 구원받겠다는 야욕과 야심을, 인간은 지옥 갈 때까지 자기 자신을 못 놔요. 여러분들은 거지 나사라고 맞은편에 있던 부자 아시죠? 그 부자가 지옥 갔습니다. 여러분 생각하기에는 지옥 가면 인간성이 좀 달라질까 하는 이런 생각 들죠.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지옥 가도 자기중심성은 변함이 없어요. 와, 독해요. 누가복음 16장 24절에 아브라함 보고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를,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부자는 지옥 가도, 내 혀를 좀 서늘하게 해달라고, 저 거지 나사로한테 심부름 보내서 좀 오라는 거예요.
왜 아브라함 보고, 아브라함 당신이 오라는 왜 그 소리는 안 해요? 거지 나사로는 항상 거지로 만만했거든요. 자기는 부자고, 나사로는 자기 앞집에서 거지였거든요. 만만하다는 이 말이죠. 만만한 인간 보내서, 지옥 가더라도 살 만한 지옥 만들게 해달라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욕심이 많습니까? 자, 지옥 가는 사람의 특징을 제가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지옥 가는 사람은 자기가 지옥을 만들어요. 자아에서 지옥이 나오니까. 자기가 지옥을 만들면서, 그 지옥을 자기가 뒤집어쓰면서, 평생동안 지옥 갑니다. 멀쩡한데 ‘지옥이네! 아이고 할 수 없이 가서 풍덩 빠지는구나’라는 이게 아니고, 지옥 갈 준비를 살아생전에 지옥에서 필요한 걸 다 갖춰요. 자기중심으로 사는 거. 마치 거북이가 두꺼운 등껍질을 자기가 그걸 짊어지고, 평생을 무거운 걸 짊어지고 느릿느릿 가듯이, 지옥 가는 사람도 스스로 만든 지옥을 자기 무게로 짊어지고, ‘이거는 못 놓는다’라는 식으로 그렇게 가는 거예요.
자기중심의 야망, 야심, 그거는 성도한테는 절대로 주께서는 의도적으로, 주의 뜻대로 안 해 주시는 이유가요, 내 소원, 내 원대로 되면, 그게 나의 업적이기 때문에, 나의 실적이기 때문에, 내 것에 소속이 돼요. 내 것에 속해 버린다고요. 그걸 주께서 알아서 다 없애버리는 겁니다. “너는 제발 좀 죽어 있어라. 네 속에 주어지는 건, 죽어 있는 너에게 주어지는 것은 말씀이다. 말씀이 말씀 되어서 네가 천국 가는 거야. 왜 자꾸 네가 나대”
그래서 인간은 주체의 결여를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결여화된 주체라고 봐요. 예수님 자체가 이 땅의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습니다. 결여예요. 결여인데, 천국에서 왔어요. 그래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합니다. 주님의 그 결여, 그 모자람을, 그 모자람이 우리를 채우는 거예요. 우리는 ‘나는 멀쩡한데 약간 죄를 지었다’라고 이러지만, 주께서는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죄가 아예 없어요. 아예.
없는데, 인간은 예수님에 대해서 탐탁지 않게 여깁니다. 뭐, 이 세상 사는데 별 도움 안 된다고 내쫓아버렸죠. 주님 자체가 창조주인데요. 심판 주인데. 여기서 마가복음 11장에 나오는 예수님이 하신 어려운 말씀을 왜 제자들이 또 못 알아듣는지, 그 이유인 한 구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게 뭐냐? 무화과나무가 있었거든요. 마가복음 11장 13절에 보면, 주님이 가다가 목이 말랐어요.
무화과나무가 있어서 목을 축이고 열매로 허기를 메우기 위해서 열매를 따려고 하는데,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어요. 그러니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내가 착각했구나. 아직 열매 맺힐 때가 아니네. 얘들아, 그냥 가자’라고 이러실 줄 알았는데, 그건 제자들 생각인데, 예수님이 멈춰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면서, “너는 앞으로 인간을 위해서 무화과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라고 저주를 해버렸어요.
저주하니까, 제자들이 그 의미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때가 안 돼서, 때가 안 돼서 열매가 없잖아요. 인간의 합리적 사고로. 근데 때가 ‘안 됐다, 됐다’를 주님 쪽에서 착각해 놓고, 주님께서 지금 당장 열매 없다고 해서 저주를 해버리면, 그러면 그 이야기를 들은 우리는 주님을 어떤 식으로 모셔야 하느냐는 이 난관에 부딪히는 거예요.
열매 없다고 저주해버리면, 그러면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이건 처음부터 저주받아야 마땅한 존재가 돼버리니까, 우리가 주님을 따라다니는 게, 이게 무슨 의미냐가 되는 겁니다. 이 무화과나무 저주는요, 이게 미가야 4장 4절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미가 4장 4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동행할 때, 그들은 약속의 땅, 젖과 꿀이 나는 땅에서, 무화과나무가 풍성한 땅에서 그냥 앉아 있기만 하면 됐었어요. 왜냐하면 에덴동산이 그랬으니까.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농사지으라고 했습니까? 농사는 에덴에서 쫓겨나와서 농사지었어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요.
예수님이 기대한 세계는 무화과나무라는 그 풍성함, 결여 없고 모자람이 없는, 항상 열매로 가득한 그 세계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 꼴이, 이렇게 결여되고 모자란, 천국 같지 않은, 항상 모자람이 있는 세계의 모습, 심지어 창조주 메시아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아의 시장함을 메꿀 수 없는 이 세상의 한계를 그렇게 알려 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가 조금 모자란다고 하지만, 아예 천국에 들어올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무화과나무에 빗대서 설명해 주신 겁니다. 그렇다면 끝으로, 어떻게 하면 죽은 자를 살리는가. 그거는 구약 민수기 17장에 나옵니다. 이건 짧게 이야기하겠습니다. 민수기 17장 8절에 보면, 모세의 지팡이, 다 죽은 지팡이예요. 나무를 죽여서 지팡이를 만드니까.
죽은 모세의 지팡이와 그다음에 각 열두지파의 지팡이를 가지고, 그러니까 총 13개의 지팡이를 가지고 나오라고 해서, 지팡이를 증거의 장막 여호와 앞에 두었어요. 두었는데, 8절에 보면,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
단 24시간 만에, 죽었던 지팡이에서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고, 심지어 참 성질도 급해서 열매까지 맺었어요. 열매까지. 때가 안 돼서 뭐 열매가 없다는, 지금 그거는 인간들의 생각이고, 주와 함께 다니면, 진짜 교회는 항상 말씀의 열매를 따 먹을 수 있는 대상이 진짜 교회라는 거예요. 진짜 교회. ‘내가 행동을 이렇게 했습니다. 저렇게 했습니다’라고 그러지 마.
항상 어떤 행동을 하든, 스스로 어떤 못난 행동을 하든 간에, 항상 회개한다는 것은 내가 뭘 하는 게 아니고, 주께 붙잡힌 바 된 말씀이 쓰인 바 된, 그 십자가의 생명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쓰인다는 그게 바로 교회가 아니고 뭐냐는 거예요. 왜 자기 자신을 남하고 비교하고, 우리 이 세상은 어떻고, 남이 나보고 뭐라 하는지 그런 남의 이야기 듣지 마시고, 주님 말씀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우리들은 정말 신기하고 놀라운 존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우리를 사용한다는 것을 왜 우리가 진작 몰랐습니까? 자꾸 세상, 남들의 평가, 남들 앞에 내보이고 싶은 멋있는 거, 그 자랑질을 하며 살 보람을 찾지 말고, 죽은 존재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열매를 맺는 이러한 천국 백성으로 다루어짐에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