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신명기(41강) 18:19(사기캐릭터) 260720-이근호 목사
자, 시작합시다. 어쨌든 아시겠지요? 새로운 감사를 주시려고, 되돌아보면서 어떻게 살아온 모든 것에 대해서, 그동안 한 번도 보이스피싱 안 걸린 것에 대해서 또다시 다 주님의 조치였다는 것을 감사하는 거예요. 힘들겠지만…. 또 하나는 ‘이렇게 더러운 세상에서 빨리 데려가 주시옵소서.’ 그것도 아울러 보너스로 챙겨주시는 거죠(대전강의, ‘보이스피싱이후’ 영상참조).
신명기 18장 11절에 보면,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진언자, 신접한 자, 박수, 초혼자’ 그것이 나와 있죠. 생각해 보면 그것이 등장하는 게 이상하죠. 왜냐하면, 성경에서 이상한 게 한두 군데가 아닌데, 그중 하나가 이겁니다.
논리로 한번 적어볼게요.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신다. 시편 121편 3-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너를 지키신다’라고 되어 있죠. 첫 번째 논리입니다.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지키신다’라고 하면, ‘신접한 자, 박수무당, 다른 신, 사술, 우상’ 이걸 굳이 우리에게 언급할 이유가 없잖아요. 알아서 지켜주잖아요, 알아서. ‘보이스피싱을 주의하라’, 그럴 필요가 없다니까요. ‘주의하라’가 아니고 주께서 알아서 지켜주시면 안 됩니까? 그 이유를 설명해 드려야죠, 제가. 우리가 바로 신접한 자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주께서 신접한 자, 박수무당 이런 걸 언급하는 것은, ‘이런 자는 하나님께서 배제한다’라는 그런 종류잖아요, 그런 종류 아닙니까. 그것에서 start, 그것에서 출발하라는 거예요. 거기에서 출발하라.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아이고, 그 정도로? 우리가 그 정도는 아니지요. 주님, 왜 이러십니까? 저희는 그런 거 싫어합니다. 점치는 거, 무당, 그리고 또 다른 선지자, 이방 신….”
애굽에서 기적적으로 건져내신 분이 우리 여호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홍해 건너고 난 뒤에 찬양까지 하면서 전체가 고백을 했어요. ‘하나님은 용사시고 이번 전쟁에서의 승자는, 모든 공로는 주의 이름에 있습니다. 우리는 다 같이 지금 찬양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우상, 이런 거는 이제는 우리는 bye~ bye~ bye~’, 빠이빠이 한 거예요. Good bye! 한 거예요.
했는데, 여러분 어떻습니까? 성경 출애굽기, 민수기, 신명기 거쳐서 약속의 땅에 갔을 때 그 이스라엘, 그렇게 다짐했던 이스라엘 어떻게 됐습니까? 완전히 온 천지가 우상이었죠. 열왕기상, 열왕기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선지자, 이런 사람들. 옛날에 주께서 신명기 때 광야에서 했던 이야기를 다시 되돌아보게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언약이라는 것은 한번 지나가면 끝나는 게 아니고 다시 그때 그러한 주의, 그러한 당부, 그것이 ‘우리가 지켰으니까 그냥 넘어갑시다’가 아니라, 지나간 일기장이 아니고, 지금의 이 현재 상황에서 그때 준 말씀이 우리한테 딱 합당하다는 사실을 발견케 하는 거예요.
베드로전서 1장 10-11절, 이걸 제가 말씀드립니다. 베드로전서 이곳 밑에 한 칸 비워두겠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0-11절은 누구한테 해당되느냐 하면, 예수님께 해당됩니다. 비어 있는 이 아래 칸은 우리 자신들, 인간에게 해당됩니다.
베드로전서 1장 10-11절에 보면,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선지자 이야기입니다.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자, 선지자는 껍데기입니다. 구약에 그렇게 많은 선지자가 나타나는데, 그 안에 누가 미리 들어있다고 했어요? 그리스도의 영이 미리 들어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서 예수님의 고난받음과 고난 후에 영광 받음을 선지자들이 예수님 오시기 전에 미리 다 발언했다는 거예요, 그 당시에.
첫 번째, 베드로전서 1장 10절, 예수님께 해당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예수님에 관해서 이미 하나님께서 언급하셨다는 뜻이죠? 그 뜻이 맞잖아요, 그죠? 그러면 아래 빈칸, 우리 인간들 칸을 봅시다. 예수님은 그렇다 칩시다. 우리 인간은요, 인간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율법에서 지적하는 게, 태어난 우리에게 그대로 어떻게 돼요? 다 상기용으로, 반복용으로, 이미 태어나기 이전부터 인간은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려줬겠어요, 안 알려줬겠어요? 어떻습니까? 알려줬겠죠. 누구를 대비해서? 누구와 대비되면서? 예수님과 대비되면서.
그러니까 “목사님, 왜 이런 이야기 합니까?” 물으면,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 하셨거든요. “내가 죽는 것은 너희와 함께 죽는 것이고, 내가 사는 것은 너희와 함께 사는 것이다. 오케이?” 그때 우리는 뭐냐 하면, 우리는 건방지게 ‘오케이’ 하면 안 되고 “아멘” 해야 돼요. “아멘!”
그렇다면 베드로전서 1장 10절에 ‘구원’에 관해서…. 자, 구원이 뭐냐? 예수님이 하신 일에 여기 ‘인간’이라고 되어 있잖아요, 인간, 인간의 속성, 옛날부터 우리는 마귀의 지시대로 움직였다는 그 선지자의 내용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배재한 내용이 예수님의 고난과 영광일까요? 그게 아니면 우리 인간은 이해 안 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해서 고난받는 것이, 예수님의 하실 일에 포함이 돼 있을까요, 안 되어 있을까요?
포함이 돼 있겠죠. 포함이 된 그 내용을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잖아요. 다 이루심이라는 그 취지를 위해서 우리 안에, ‘이렇게 허접스러운 인간을 내가 건진다.’ 할 때 그때 쓰는 용어가 뭐냐 하면,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 어때요? 구원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어요, 없어요? 없죠. 구원은 누구 몫, 누가 알아서 다 했다? 주님이 알아서 다 했어요, 주님이 알아서.
그래서 주님이 알아서 다 해놓고 그다음에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통보해 주죠. 마치 장차 올 예수님이, 자기 앞서 온 선지자에게 통보를 하는 거예요.
“네가 이야기하는 것은 네 이야기 아닌 것을 네가 알고 있지?”
“예.”
“그럼, 누구 이야기지?”
“오실 메시아 이야기입니다.”
“오케이!”
오실 그 메시아가 앞당겨서 자기의 영을, 자기 오기 수천 년 전의 선지자에게 미리 당겼듯이, 이제는 예수님이 다 이룬 상태에서 옛날 선지자에게 주신 그 영처럼, 오늘날 우리에게 주께서 통보하는 영, 전달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영을 우리에게 줘버리면 우리는 ‘구원받아야지’가 아니라 뭐가 됩니까? ‘구원되었구나. 끝났네, 끝났어.’ 끝났으니까 신접한 자, 박수, 초혼자, 이런 자, 그런 자에게 말려든 자가 바로 우리, 우리 자신이었습니다, 우리 자신이었어요.
‘우리가 그딴 거 의지하고 믿을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에 불과했습니다’를 그걸 고백하는 가운데 범사에 감사하는 거예요. 예수님을 누가 죽였는가? “나 안 죽였어요.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어요.” 이거는 변명입니다. 안 돼요! 예수님을 죽였던 그자와 우리, 후에 태어날 우리들과 동류(同類)가 돼요. 같은 ‘류’가 되는 겁니다, 같은 ‘류’가.
그러면 예수님을 죽였던 그 유대인들은 무엇을 사모하는가? 예루살렘을 유지하고, 율법을 굉장히 중요시 여기고, 그들은 또 오실 메시아를 고대했죠, 고대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했던 그들, 마태복음 23장 봅시다. 15절과 16절을 보고 37절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3장 15절에,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이 평가는 예수님 평가지, 예수님 외의 다른 사람 평가입니까? 제자들의 평가입니까? 아니죠. 제자들은 이런 평가를 바리새인에게 하지를 않습니다. 자기들이 지금 남 평가할 입장 아니거든요. ‘예수님 따라다니니까 구원받는다’는 입장이지, 예수님이 무엇을 하든 간에, 이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이 왜 이런 이야기하는지 납득이 안 돼요.
‘그냥 우리만 데려가세요. 이쪽저쪽 간섭하지 말고. 주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선택했다면서요. 그럼 우리는 저 사람들과 다른 종류 아닙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제자들이. 주님은 그렇게 생각합니까? 제자들하고 버림받은 그들 바리새인하고 다른 종류라고 예수님이 그렇게 생각했겠어요? 똑같아요, 똑같아요. 그런데 제자들은 눈에 보이니까, 우리는 예수님하고 한패 먹었으니까 우리는 이제는 됐다는 거예요. 하이고, 이것 참, 같잖아서, 말도 안 되죠.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계속해서 하는 그 종교단체, ‘예루살렘 있고, 여호와 믿고 율법 믿고, 세 가지 요소로 종교를 만들자.’ 그래서 만든 종교가 유대인 종교예요. 여호와 믿고, 예루살렘 성전 있고, 그리고 율법이 있고 이 세 가지. 성전이 있다는 말은 ‘이게 우리의 상상이 아니고 실제로 성전이 있고, 전통적으로 제사를 드리고 있는 성전이 있으니, 누가 뭐래도 우리 믿음이 이건 완벽하다. 이 종교, 우리의 유대교라고 하는 것은 누가 뭐래도 이건 하나님께서 인정해 줬다.’ 철석같이 믿었죠.
그래서 그들은 뭐냐 하면, 그들은 본격적으로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선교죠, 교인 하나 얻기 위하여 다니면서 뒷자금 대주고 후원금 대주면서,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 한 명을 드디어 유대교로 전도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15절 끝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더욱더 뭐 한다? ‘지옥 자식 만든다.’
그리고 제가 추가해서 말씀드리면, 이것이 그 당시 유대인에게만 국한되는 행위다, 아니면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유대인들이나 우리나 똑같은 동류, 같은 아담의 자손으로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성질내는 게 똑같아요. 16절, “화 있을찐저 소경 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계속해서 그 당시 유대인들이 자기 종교를 지켜야 하나님 뜻에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이 열심 내서, 그들이 집중해서 종교를 얼마나 치밀하고 세밀하고 철저하고 완벽하게 해 왔는가를 예수님께서 쭈욱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럴 때 제자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들었어요. ‘맨날 남의 이야기 말고 우리 이야기만 합시다’ 그랬죠.
마태복음 23장 37절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여기 호칭을 뭐라 합니까? 예루살렘아, 호칭이 이렇게 돼 있죠. 우리가 이 점도 생각을 해봐야 됩니다. 예루살렘은 지역 이름이에요, 지역. 대구, 대전…, 지역 이름이에요. 지역 이름, 공간의 어느 특정 지역입니다. 그런데 뒤에 “~야,” 또는 “~아”라고 불렀어요. 그럼 예루살렘은 뭐가 되느냐 하면, 여기서 집단적인, 곧 인물들의 집단이 돼요, 집단.
인격체, 인격체처럼 그렇게 말하는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은 뭐냐? 어렵게 말씀드립니다. 인물들이 모이면, 너와 나 모이면 이게 뭐로 다루어지느냐 하면 사물로, 물체로 다루어지는 거예요. 사물이라는 말로 용어를 굳이 쓰는 이유가, (지금 조시면 안 됩니다, 지금 상당히 어려운 거 하는데, 안 됩니다) 인간은 대상을 보면서, 언어(이름)를 붙여서 ‘사물화시킨다’ 이 말입니다, 사물화시킨다.
그러면 언어로 인하여 그 사물을 인간이 죽여버리는 거예요. 인간이 그 사물을 죽여야 유일하게 안 죽는 나는 안 죽는 것으로 남아 있고 사물은, 죽은 사물은 내 말에 의해서, 이름 지음에 의해서 죽은 그 사물은 내 소유로 ‘꼼짝 마라’가 되는 겁니다. 이 사물에 누가 걸려들었겠습니까? 하나님이 걸려든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하나님이 뭐가 되느냐 하면 내 소유가 되고, 내가 다루면 얼마든지 다룰 수 있는 대상으로 전락 되는 겁니다. 이게 언어, 이름은 원래 그런 거예요.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이거예요. 하나님이 스스로 이름을 가지고 인간에게 찾아왔어요. 이 점, 인간들이 이런 짓 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왜 찾아왔는가? 악마가 생각하지 못한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겁니다. 여러분 알다시피 악마는 선/악이죠. 선 1, 악 1, 합치면 몇 개 됩니까? 2가 됩니다. 제가 아까 미리 와서 식사하는 분에게 언급했는데, 어제 오후 설교 제목이 <세 명의 아기>죠. 1+1, 1(알곡), 1(가라지), 알곡/가라지를 일방적으로 정해주는 것은 미지의 제 3의 존재죠. 어떤 인간도 ‘알곡’으로 태어났다는 생각을 못 해요. 어떤 인간도 ‘가라지’로 태어났다는 생각을 못 해요.
왜냐하면 태어날 때 ‘알곡이다/가라지다’가 되어버리면 내가 내 인생을 이만큼 건사하기 위해서 애썼던 나의 노동과 나의 애씀이 다 날아가요. ‘너는 알곡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라는 것을 듣는 알곡이 기분 나빠요. 왜? 내가 나를 위하여 노동한 게 무가치하게 되기 때문에. 파쇄되기 때문에. 보이스피싱 왔을 때, 그 부고장 누르려다가 마지막에 안 눌렀을 때 그 모든 공로와 영광은 누가 받습니까?
내가 받죠. 역시 내 인생 이만큼이라도 건지는 것은 내가 너무나 지혜롭게 잘 처신해서 그렇다는 생각이 들지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1과 1 그 사이에서 막 반대편을 봐요. 반대편을 보면서 저것만 아니면 ‘나’가 되는 거예요. 저쪽만 아니면 나는 그럴듯한 거예요. ‘알곡과 가라지’라 하는 것은 마태복음 14장 24-29절, 그 본문은 심기를 알곡으로 심었고, 심기를 가라지로 심은 거예요. ‘입 다물어라.’ 이 말이죠.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씨앗 자체가, -인간은 안 달라져요- 이미 확정된 씨앗은 확정된 결과로 반드시, 필히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이 1과 1, 선/악은 악마가 인간을 자기 수하에 장악하는 필살기였습니다. 이것을 인간은 벗어날 수가 없어요. 알곡/가라지, 제3의 요소, 그걸 정하는 나, 그것이 ‘세 명의 아기’ 아닙니까?
‘아기로 태어났다.’ 하는 것은 아까 제가 말씀드렸죠. 어른으로 상대하는 것은 초월자예요. 영적, 곧 뱀과 관련하는 것은 아기 아담이 아닙니다. 아기 이브가 아니고, 어른 아담이에요. 창조할 때는 어른으로 태어났어요. 그 뒤에 아기로 태어난다는 것은 어디에 종속된다? 이미 어른이 된, –베려버린 어른이지만- 어쨌든 간에 ‘아담과 하와’라는 어른에 의해서 종속된 겁니다.
아기로 태어나기 전부터 아담 보고 “나는 선악과 빼고 만드세요.” 이렇게 따질 수 있는 입장이 아니거든요. 그 어른의 연속적인 아기로 태어난 거예요. 아기의 운명은 이미 조상에 의해서 확정되었습니다, 확정되어 버렸어요. 부모 보고 “왜 부모님은 재벌이 아니어서 내가 이렇게 고생합니까?” 그런 소리를 할 수가 없어요.
그거는 어른이 되어서 돌아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지, 처음부터 인간은 태어날 때 아기로 태어나는 겁니다. 악마는 이미 그 선조 아담을 버려놨잖아요. 아담과 하와를 아주 버려놨죠. 악마는 걱정 없어요. 왜냐하면 어떤 위인이 태어나봤자 그 아버지 밖으로 못 벗어나니까. 그게 뭐냐? 봉쇄된 집합, 통조림, 그게 통조림이에요.
통조림 안에 흔들리는 소리 나죠? 용각산은 소리가 안 나요. 그 나머지는 소리가 나요. 우크라이나 전쟁, 가자 전쟁, 이란 전쟁…, 소리가 나는데, 백날 나봤자 그 통조림, 그 철판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빠져나올 수가 없다고요. 그래서 악마는 뭐냐? 악마는 편안~해요. ‘이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군요.’
악마는 걱정 없는데, 하나님께서 악마가 상상도 못 한 일을 저질러 버렸어요. 그게 뭐냐 하면, ‘창조주께서 피조물을 위하여 희생하셨다.’ 이 아이디어, 이거는 마귀가 죽었다 깨나도 생각 못 한 겁니다. 왜? 마귀는 ‘선한 것은 선한 것이고, 이미 범죄 하여 죄지은 것은 죄지은 것이다.’ 악마 입장에서 ‘인간, 네 인생은 조졌어, 끝났어! 네 잘못이 아니야.’
조상이 잘못한 것이 그 조상 밑에 있는…, 명란 알 있잖아요. 그 안에 바글바글 있지요. 명란 알같이 이미 그 안에 박혀있기 때문에 이미 결정된 운명에서, 이 저주에서 인간은 벗어날 수 없다는 점, 그 점에서 악마는 아주 고소해합니다. 자기는 이미 베린 몸이거든요. “예수여, 우리를 아주 작살내러 오셨습니까?” 하지요.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 8:29).
악마는 자기가 멸망될 걸 이미 알아요. ‘나만 죽을 수 없다’, 이 말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의 이런 아이디어, “내가 있잖아! 내가 희생하면 되잖아!” 하나님이 자기가 만든 희생자인데…, 아니 인공지능을 만든 개발자가 그 인공지능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어요? 인공지능 감동할걸? “주여, 믿습니다.” 이럴까요, 인공지능이? 그런 일이 있습니까? 없지요.
만드신 분은 만들어진 것을 자기 뜻대로 조정만 잘하면 되는 거예요. 같은 피조물인 사탄이 이걸 너무 잘 알고 있는 거예요. 옳고 그른 거, 하나님은 정의로우시고 악한 것은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끝! 선하다/악하다, 1+1=2, 끝! 끝났어요. 제3의 요소가 나올 건덕지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자신을 희생해서, 뭘 희생해서? 선과 악의 심판 기능을 희생해서, 그 심판을 본인이 본인에게 심판을 가함으로써 거기서 나오는 ‘사랑’이라는 새로운 잉여분, 그 잉여의 값을 가지고 제공하는 거예요. 자, 정리합시다.
심판은 반드시 값을 치뤄야 한다, 심판은! 내가 준 하늘의 모든 햇빛과 공기…, 공짜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더 정확하게 말해서, 해가 뜨고 해가 지고, 혹은 별이 뜨고 하는 것은 다 토대가 어디냐 하면, 십자가에서 나온 거예요, 십자가에서. 유대인들은 뭐로 봅니까? 하나님이 사랑해서 창조했다고 보죠, 창세기 1장에.
신약은 뭐라고 합니까? 그 모든 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창조가 나왔다. 신약의 복음이, 신약의 복음이 그래요. 그걸 좀 자세히 이야기하면 ‘예수님은 새로운 시공간의 해석을 가지고, 짊어지고 이 땅에 나타났다.’ 그래서 안양강의에서 그런 얘기 했죠. 설명이 우리를 치료한다고요, 설명이. 설명이 우리를 치료한다.
보이스피싱, 나 힘들었다. 이거는 내가 아는 설명이죠. 새로운 설명은 뭐냐? 지난날, 보이스피싱 안 걸린 것도 다 누구의 값없는 은혜였다? 주님의 은혜였다. 이게 위로가 되는지 아닌지는 나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새로운 설명이 “아, 자존심 상해! 내 생돈 나갔다. 내 노동, 내 땀 이거 누가 보상할 거야!!” 고함지르는 나, 이걸 흰 눈처럼 덮어버리죠.
“내 본전 한 번 찾아봐? 불평해? 내가 준 본전 한번 찾아봐? 코로나 걸릴 때 걸렸어, 안 걸렸어?” 이거부터 시작해서 추적, “계좌 추적 다 들어간다? 발걸음 셀 때, 그리고 머리카락 하나 나오고 안 나오고, 그거 누가 다 한 줄 알아?”
그거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 신약에 와서는 ‘십자가의 값없음을 위해서 주께서 값을 따지신다.’ 이거예요, 십자가의 값없음을 위해서. 유대인들에게 “저 종교 만들었잖아.” 그걸 왜 언급합니까?
‘앞으로 내가 너를 위해서, 하나님이 너를 위해 희생을 치를 건데 희생의 그 값을 너희들이 성령을 통해서 받고 난 후에, 그때 유대인들에게 공격했던 그 공격, 그 공격을 왜 너희에게는 안 하는지’를 한번 보라고요. 똑같은 인간인데, 인간은 안 변하거든요, 똑같은 인간인데.
그러니까 바리새인에게 했던 그 공격은, 사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한 공격이라고 나중에 제자들이 성령 받고 난 후에 되돌아서서 이걸 알았기 때문에 마태복음 23장에 쓰인 거예요. ‘우리가 철도 없이 이것이 다 남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우리의 이야기였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다음에 마태복음 24장 봅시다. 1-2절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제자들에게 성전이 보이죠. 눈이 있으니까 보이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유대인들은 이 성전이 있음으로써 아직도 이 우주가 존속된다는 신학을 갖고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멸망할 때 언젠가는 멸망하는데 그 전에 할 일이 뭐냐? ‘성전에서 제사하는 우리 민족은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그다음에 약속대로 우리 여호와를 안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멸망시킨다.’ 이 신학이었던 겁니다, 이 신학. 특히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잖아요.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어요. 사두개인들하고 달라요.
그 부활의 세계, 죽고 난 뒤의 세계까지 아울러서 그들의 중심은 뭐냐? 열왕기상 8장에 근거해서 ‘성전을 사모하는 사람은 모든 죄가 없어지고 다윗의 백성으로서 영원하다.’ 열왕기상 8장을 기억하고 있는 모든 사람은 해석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어요. 유대인의 한계가 곧 우리의 한계지요.
‘성경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했기 때문에, 예정했기 때문에 무조건 살린다.’ 그들의 신학은 곧 인간이, 아담의 죄가 갖고 있던 이성의 한계를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다 내놓습니다. 그다음에 마태복음 24장 37-39절,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인자가 임할 때 깨닫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아무도 없다. 그러면 성령 받은 제자들은, 그들은 깨달았을 게 아니냐? 그렇지요? 그렇다면 이 말씀하고 틀리네요. 인자가 올 때까지는 아무도 깨닫지 못한다고 했는데 미리 성령을 받은 제자들, 특히 마태복음이니까 마태도 마찬가지지요, 마태가 이 복음을 쓸 때 이게 무슨 뜻인지 알고 썼지 않았겠습니까?
심지어 요한복음이나 이런데 보면 예수님께서 ‘46년 지은 이 성전이 무너진다.’ 할 때 스스로 고백하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할 때까지 성전이 예수님 몸인 것을 알지 못했다’라는 말을 요한복음 2장에서 썼잖아요.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 2:21-22).
그렇게 썼다는 말은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 2장을 쓸 때 본인은 이제 알았다는 말입니까, 몰랐다는 말입니까? 이제는, 이제는 알았다는 말이지요, 이제는 알았다. 이제는 알았으면, 그러면 아무도 모른다는 말은 이게 틀린 말이 아닌가? 그런데 마태복음 24장 36절 보면, “그러나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주님께서 이 열두제자 말고 사도바울에게도 성령을 줘서 사도바울로 하여금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신 이유가 있어요. 마태, 마가, 누가복음. 이것도 두껍기는 하지만 사실은 신약성경의 많은 대목이 사도바울의 편지로 되어 있지요. 사도바울의 편지에서 이 대목을, –주의 뜻이지요- 이렇게 설명해 줍니다.
사도바울의 핵심은 십자가잖아요. 십자가 사건에 품어진, 포함이 된 성령 받은 성도는 어떤 위치에 있느냐? 골로새서 3장 3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땅으로 말하자면 우리들은 이미 죽었다’고 되어 있어요. 땅으로 말하자면, 그 범위를 땅으로 한다면 우리는 이미 죽었다.
그러면 우리는 대번에 하는 소리가 “안 죽었는데?” 이렇게 하잖아요. “안 죽었는데?” 네 관점 말고, ‘너 지금 몸 있고 눈 있지? 네 관점 말고 그 관점을 하늘에서 보는 관점과 땅에서 보는 관점으로 나눠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땅에 속한 자는 이미 죽은 것’으로 되어 있어요. 이미 죽었다. 이런 이야기가 사도바울의 편지에 굉장히 많아요.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자꾸 과거시제를 사용해요. 이미 끝났다,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고. 살아 있는 것은 뭐냐 하면 하늘의 관점이 살아 있으니까, “너 성령 받았어, 안 받았어? 받았지. 받았으면 살아 있는 하늘의 관점 가지고 너를 객관화 시키고 너를 대상화 시켜서 너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상을 바라보면 좋겠다. 왜? 너는 계시를 전해야 할 선지자기 때문에. 성도 자체가 선지자기 때문에.”
‘지금 내가 구원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남겨준 이 몸을 통해서 뭘 뿜어낼 것인가?’ 여기에 신경 쓰라는 거예요. 그러면 신약 때 선지자는 누굽니까?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할 때 선지자죠. 그러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신접한 자, 박수, 초혼자, 무당들, 우리도 싫어하는 그런 사람들이 구약의 환경이고 신약의 환경에서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 이런 자들은 누굴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령 안 받은 자 전부 다를 말하지요, 전부 다! 자기가 살았다고 여기는 자는 전부 다가 여호와나 예수님 부를 때 뭡니까? 무당 찾듯이 부를 수밖에 없지요. ‘주여, 저 앞으로의 신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거 물을 수밖에 없어요. ‘어느 날에 혼인을 시켜야 딸이 행복하게 살겠습니까?’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어요. 왜? 살아 있으니까.
성경에서는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다고 결정을 했는데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그 결정을 못 받아들이지요. 못 받아들이니까 그냥 ‘예수 믿고 교회 다녀서 나중에 죽으면 구원받기 때문에 나는 행복하다.’ 이것은 무슨 세계입니까? 살아 있는 내가 꿈꾸는 환상이에요, 환상. 사물이잖아요. ‘사물+그 무엇’, 이게 뭐냐 하면, 환상이에요.
사물은 환상을 꿈으로 빚어내고 있다는 그 말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은, 사물은 물체니까 안 줘요. 그런데 사물이 뿜어낸 환상을 향하여 주께서 말씀으로 심판하시고 공격하지요. ‘사물+환상’, 이것이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해당돼요, 해당 됩니다. 여러분, 광야라는 곳은 머물 곳이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러면 뭐냐? 광야에서 뭘 하겠어요? ‘HOPE’ 영화제목인데 이게 뭡니까? ‘호포항’에서 일어난 일인데 나홍진 감독의 영화지요. 이 영화를 보면 사람들이 도저히 이 영화평을 못 하게 만들면서 허접한, 전혀 영웅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 성질이나 부리는 사람들이 등장해서 대사라고는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욕설밖에 안 나와요. 대사라고 별로 칠 것도 없이 욕만 나와요.
그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들 가지고 장난을 쳐버려요. 장난을 친다는 말은 뒤에 따로 숨겨놓은 것이 있다는 거예요. 숨겨놓은 게 그 영화에 나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을 영화 대사에 박아놨어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이걸 딱 박아놨어요.
이 ‘희망’, 숨어 있는 것이 나타남, 이것을 영화의 마지막에 보여주는데, 외계인의 모선이 구름 속에 숨어 있다가 그게 마지막 장면에 나타나면서 어떤 깊은 산골, 호포항 그 마을 첩첩산중 근처, 고속도로 있는 근처 산중에서 여기 모선이 충돌하면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요.
그게 제가 보기에는 요한계시록 12장 9절, 누가 한 번 읽어볼까요?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이게 영화 주제에요. 이게 모선이요, 땅에서 활동하는 그 외계인들이 하늘 외계에서 와서 잠시 머무는 그 모선이 처박혀서, 외계인이 말합니다. “우리는 돌아갈 곳이 없네.”
돌아갈 데가 없다는 거예요. 나홍진 감독은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 외계인한테 포로 잡혀 있다고 본 거예요. 그래서 외계인하고 싸우는데 싸움이 안 돼요. 인간이 막 작살나요. 그런데 인간에게는 오기라는 것이 있어요. 가오(かお)가 있어요. 가오, 추잡스런 그 가오. 영화 보셨어요? 안 보셨지요? 가오가 있거든요. 그게 있어가지고 외계인이 치니까 “네가 뭔데 우리 인간을 쳐?”
동네 예비군 8명이 있는데 그 8명이 전부 다 60이 넘었어요. 60년대 경찰서 파출소장은 걱정이 돼서, -거기 나오는 주인공이 황정민인데- 아무것도 모르고 도망이나 치고 그저 허둥지둥해요. 변변치 않은 인물들, 영웅이 하나도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건드리면 인간도 가만있지 않고 분노를 일으킨다.’ 그렇게 되거든요. 양쪽 다 분노와 분노의 격돌이에요. 반발과 반발의 격돌.
나홍진 감독에 의하면 한마디로 말해서 이 세상은 다 뭐다? ‘이 세상은 다 마귀 새끼들이고 마귀한테 정신이 다 사로잡힌 인간들이다, 끝!’ 그거예요. ‘너 영화 평하려면 해봐라. 죽어도 평 못해.’ 숨어 있는 것, 잘될 것이라고 희망 걸어놨지요. 그것도 속임수예요. 추잡한 인간들밖에 없는데 무슨 희망이 있어요?
‘인간에게는 희망을 걸지 맙시다. 그러니까 믿지 맙시다. 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기 때문에 여기 인간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 나홍진 감독은 그 이야기 하고 싶은 거예요. 그 점에 대해서 어떤 비평가는 시비를 거는 거예요. “종교가 많은데 왜 자꾸 성경 이야기를 하느냐?” 인터뷰에서 그래요. “여호와가 대빵이거든. 신중의 최고 신이거든.” ‘외계인인 악마를 거론해서, 신나게 추격하는 재미를 보면서라도,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이 복음을 스며들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의도를 감독이 갖고 있습니다. 상당히 용감한 시도에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명기 18장 광야에서, 약속의 땅이라는 희망을 얻었어요. 약속의 땅이라는 희망을 얻으면서 신명기 18:10-11에서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고 하고, 특히 18장 19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무릇 그가 내 이름으로 고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아, “내가 선지자를 보내는데, ‘선지자 너나 나나 똑같은 주제에 네가 뭐 안다고? 그래그래, 알았어. 내가 들을게’라는 이 정도로는 안 되고, 선지자가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말할 때 그 말을 안 듣는다면…” 어떻게 된다? “…하나님의 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을 하는 것은 ‘희망이 있나? 그러면 희망대로 될 것이다’가 아니라 ‘너희가 과연 희망을 가질 입장, 그런 주제가 되느냐?’라는 것을 ‘내가 준 선지자나 계명을 통해서 너희를 점검해야 하겠다’라는 하나님의 심사(審査)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 우리를 구원했대. 너무 좋아요. 진짜 우리를 구원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래서 약속대로 우리를 약속의 땅에 넣어줄 거죠??”
서울말, 표준말로 “넣어줄 거죠?” 주께서 “심사(審査) 해보고!” “무슨 심사(審査)요? 그러면 그냥은 안 넣어준다는 말이지요?” “내가 선지자를 보낼 텐데 선지자의 말을 듣든지, 아니라면 너희는 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언급하는 겁니다. 신명기 18장 22절을 봅시다.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찌니라.”
지금 하나님께서 뭐까지 알뜰살뜰하게 챙기느냐 하면,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작자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아까 본 시편 121편처럼 좀 지켜주고 그런 자는 안 나타나게 하면 되는데 꼭 이렇게 혼란케 하셔요. ‘악한 선지자가 나타났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하면 압니까?’ 하고 신약의 유대인들이 나름대로 연구를 많이 했어요.
연구 중 하나가 뭐냐 하면, 저주받는 자는 무조건 뭐가 돼요? 선지자가 아니죠. 그런데 저주받는 것 중에도 특히 나무에 달려 죽어 저주받은 자는 백 프로 뭐가 아니다? 요거, 요즘 젊은 애들 하는 용어로 ‘사기캐’다, ‘사기캐릭터’의 준말이죠. 이거 가짜다, 나무에 달려서 저주받은 자는.
그러면 저주받았다, 안 받았다는 것은 뭐로 평가하는가? 나무에 달렸는데, 죽을 뻔했는데 하늘의 천사가 찾아와서 살려줬다면 그것은 진짜 선지자죠. 그런데 죽는다, 죽는다, 확인 사살 해보니 진짜 죽었어요. 그러면 뭡니까? 나무에 달려서, 그다음에 진짜 죽었으니까 ‘우리의 판단은 옳았다.’ 우리의 판단이 옳았다는 말은, ‘그동안 우리가 이뤄놓은 유대교는 진짜 하나님께서 땅, 땅, 땅! 진짜 이것은 구원받은 코스 맞다’라고 인정해 준 바가 되지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나름대로의 중대한 결심과 결정적 사건에 맞닥뜨리게 된 거예요. 예수를 죽였는데 과연 예수님 말대로 살아나는지, 아니면 예수님 죽기 직전에 천사가 내려오는지 지켜보자는 거예요. 아무도 안 왔어요. 지켜본 그중에 누가 지켜본 줄 알아요? 제자들도 지켜봤어요. 없어요. 시마이, “끝났다. 다 고기나 잡으러 가자”(요 21:3). 다 흩어졌습니다.
원래 인간으로 돌아갔어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무 일도. 하나의 해프닝이었습니다. 하나의 해프닝이었어요. 끝났어요. 그래서 예루살렘에 있던 두 제자도 엠마오로 내려갔어요. 가는데 어떤 아저씨가 말을 겁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인 줄 몰랐어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는 이유가, 인간 쪽에서 납득이 되어서 말씀대로 알고 있는 모든 해석과 설명은 철저하게 카바, 배제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십자가를 진 거예요.
왜 인간의 이성과 판단을 배제합니까? 그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 마귀가 있기 때문에, 마귀의 생각은 섞여 들어오면 안 되기 때문에.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이성적 판단은 뒤에 마귀의 손아귀에서 마귀가 허락한 이성이에요. 마귀가 허락한 진리 체제에요. 선악 체제, 제3의 요소를 생각 못 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이것도 선악이니까.
어떤 집사님이 가훈을 정했어요. 제가 적어볼게요. “빨리 알아서 빨리빨리 망하자.” 이게 뭡니까? 열심히 공부해서 내가 왜 보이스피싱을 백번 당해도 싼지…, 보이스피싱에 대해서 몰랐는데 이제 새롭게 알았지요. 아, ‘하나님은 왜 내 것 건드립니까?’ 살짝 기분 나쁘지요. ‘살짝 하나님께 순간적으로 오만할 뻔했습니다.’
주께서 “이제 너 자신을 알았느냐?” 이제 뭐가 남았어요? ‘망했다’가 아니라 “이미 죽은 자 가지고 장난 좀 쳤다.” 이미 죽어버린, 그리고 생명을 얻어버린 그 죽은 자를 주께서 이렇게 활용해 주시니, 그점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십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