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신명기(40강) 18장 9절(꿈과 예언), 20260622-이근호 목사
오늘은 신명기 18장 9절, 약간은 난해한 뜻이 있을 건데 그러나 우리가 필히 알아야 돼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땅에 들어가거든…” 그다음에 “너는”, 그다음에 나오는 말이 뭐죠? 그다음에 “그 민족”이죠. 우리가 이 ‘그 민족’에 해당돼요. 그 민족, 이방 민족. 우리가 이스라엘 아닙니다. 그 민족에 해당돼요. 그 민족 -기생 라합이 있던 그 여리고 성의 민족이라고 보면 돼요- 에 해당되고 그 앞에 ‘이스라엘이 있다.’ 이 말이죠.
우리는 그 이스라엘 속에서 보는 게 아니고, ‘그 민족’에서 출발해서 ‘이스라엘’에 속해 놓고, 그 이스라엘 자리에 위치해서 다시 한번 전에 있던 이 고향 민족, 동족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보게 하는 식으로 이 성경 말씀이 주어진 겁니다. 빠이빠이 할 수 없어요. 우리 육신이 있는 한, 육신이 이 민족 속에 살고 있는 한 헤어질 수는 없고 관점만 다르면 돼요. 관점만 바뀌면 돼요.
전에는 이 민족 앞에서 ‘이스라엘이 부럽다.’ 이거였는데 이제는 ‘흩어진 이스라엘’이 되어서 ‘이 민족’을 바라보는 겁니다. 신약적으로 봐서 이 민족에는, 그 민족에는 뭐가 없었냐 하면 성령이 없어요. 그리고 이스라엘, 흩어진 이스라엘에는 뭐가 있습니까? 성령이 계십니다.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나는 성령을 소유했다.’ 안 됩니다. ‘소유 당했다.’ 맞습니다. 소유 당한 거예요. 성령 앞에 우리가 소유 당한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나는 성령이 보고 싶습니다.’ 그 질문을 한 적이 있어요? 지금껏 우리는 ‘주님을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를 보고 싶습니다.’ 했죠. ‘성령을 보고 싶습니다. 성령을 보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그 발상을 우리는 해본 적이 없는데 성경은 그 발상을 이미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아모스 5장 4절과 5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다음에 뭐냐 하면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날 찾아봐~라.” 이렇게 된 거예요. 날 잡아봐~라, 숨바꼭질을 하시면서 ‘찾아라.’ 그러면 사람들이 ‘찾지 뭐.’ 어디에? 여호와께 제사하는 그 집회 장소, 예배드리는 곳, 그런 곳에서 정기적으로 제사를 해왔기 때문에 그곳에 찾아가죠. ‘내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안 계시지만 집회 벌이는, 예배하고 있는 그 장소에는 가겠지.’
그게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면은 영국 성공회, 동방 정교회, 카톨릭. 이 카톨릭, 동방 정교회, 영국 성공회 특징이 있어요. 예배드리는 데 2시간 걸립니다, 예배드리는데. 이 천주교보다 성공회 이쪽이 더 심해요. 제가 옛날 목사 될 때 나하고 교제하던 분이 루터교였어요, 루터교. 아, 궁금하죠.
천주교도 공부하고 이것저것 얼추 공부했지만 루터교는 공부할 수 없었는데, 루터교의 그분과 서로 연락이 되었고 ‘우리는 이렇게 예배드린다’고 얘기해 줬어요. 영국 성공회에 대해서는 공부하고 파악은 했지만, 2시간 반 동안 무슨 짓 하면서 그 시간을 그만큼 보내는지, 그 현장에 가서 내가 거기 참석할 기회는 아직 없었어요. 천주교야 뭐, 우리 고모가 맨날 장례식 하면서 뭘 들고 있었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체험을 했지만.
고정된 장소에서 안 하는 짓을 하게 되면 하나님이 거기에 강제로 소환된다는 식의 발상. 그게 뭐지요, 푸틴이 믿는 종교가 뭐예요? 러시아…? 예, ‘러시아 정교회’죠. 2시간 반 동안 해요. 애초에 그리스 정교회 그 동네, 그래서 그들이 일어서고 앉고, 앉았다가 일어서고. 성공회는 일어서고 앉을 것도 없어요. 아예 서서 해요, 2시간 동안.
그런데 영국, 미국의 청년들이 그곳으로 많이 간다는 거예요. 종교, 제대로 한번 해보자는 거예요. 일종의 자기 도전이죠. 장거리 가서 아무것도 없이 하는 그것도 자기 도전이잖아요. 그거 하는 젊은 사람들도 있지만 종교단체에 참여해서 안 쉬고 2시간 버티는 그것도 일종의 모험입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거예요. “찾아라.” 아모스 선지자의 이야기입니다. 찾습니까, 못 찾습니까? 못 찾아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모스 8장 11절에 보면,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그다음에 여러분 다 아는 유명한 말씀이에요.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이렇게 돼 있어요. 왜 아모스로 하여금 이런 이야기를 하게 하느냐 하면, 그들은 말씀을 찾는데 이게 음흉한 노림수가 있어요. ‘말씀을 찾으면 지금보다 월수입이 더 증가하겠다’는 노림수가 있어요. 돈이 있으면 행복해지겠다는 노림수를 가지고 말씀을 찾는 거예요. 그 말씀을 찾는 방법이 길갈이었고 아까 나온 브엘세바, 벧엘, 그런 거예요. ‘복 받기 위해서 하나님 만나서 줄 것은 주고, 받아낼 것은 받아내겠다.’ 그 당시 아모스 시대의 의식이나, 오늘날 의식이나 차이점 없죠.
그러면 오늘날 의식은 뭐냐? 찾아라, 뭘? 성령이 어떻게 일하는 곳을 찾아라! 이거는 찾으란 말이에요. 못 찾는단 말입니까? 찾을 수 없다는 말이에요. 왜냐하면 성령은 바람 같아서 잡을 수가 없어요, 바람 같아서! 인간에게 잡히지를 않아요. 그걸 ‘사건’이라고 합니다. ‘존재’는 ‘사건’을 포착을 할 수 없어요. 왜? 존재의 자기 뿌리를 스스로 뽑아낼 수가 없기 때문에. 참, 무 뿌리는 뽑아낼 수 있습니다.
존재가 안 뽑히니까 모든 각양 좋은 것은 어디로 다시 소환되겠습니까? go home, 내 존재로 돌아오겠지요. 이게 노림수잖아요. 이게 노림수라고요. 이 점에 대해서 이스라엘도 실패, 그리고 오늘 나오는 그 민족, 그 민족도 실패, 둘 다 존재를 뿌리에 두고, 박아 놓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도 실패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숨바꼭질을 계속하고 계세요. “날 찾아봐~라, 날 잡아봐~라!” ‘날 잡아봐라.’ 할 때는 반드시 너의 실패의 자리에서만 보이는 분, 이분이 바로 예수님이고 성령님이고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비로소 만날 수 있고,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이미 사전에 성령께서 작업을 했기 때문에,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점이 어려워요. 보통 예수님을 존재로 보잖아요. ‘저기 계시다’로 보잖아요. 요한일서에서는 이게 인간들의 한계인데, 왜냐하면 예수님을 ‘저기 계신 분이다’라고 하는 것은 그전에 나는 ‘여기 계신다, 또는 존재한다’라는 인식이 이미 갖추어졌기 때문에 ‘나처럼 저기 계시네’라고 한다는 거예요.
이게 누구 실패냐면 열두 제자의 실패였어요. 열두 제자가 ‘예수님이 여기 계시다, 함께 있다’ 했는데 본인은 몰랐죠. ‘예수님이 여기 있다, 여기 계시다’가 성립되려면 이건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를 옳은 사실로 인정해야 이게 나와요. 그러니까 주님이 떠난다고 얘기하니까 베드로가 ‘우리를 여기 두고 어디로 가시렵니까?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이야기를 했죠.
요한일서에서 이 점을 한꺼번에 지적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물과 성령과 피’라고 이야기했어요. 예수님의 존재를 설명해야 되는데 요한일서는 예수님이 예수님 되기 위해서, 적 그리스도가 아닌 진짜 그리스도의 특징은 뭐냐? 물과 피와 성령, 그리고 이 세 개를 뭐라고 하냐면 ‘셋은 하나’라 했어요.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6-8).
그러면 ‘예수님의 물과 피는 하나’라 했으니까 예수님의 물과 피를 흘린 것은 누구의 역할이었다? 우리보다 예수님께 누가 먼저 왔어요? 예수님께 성령이 먼저 왔죠. 요단강 세례 받을 때 하늘에서 성령 왔지요. 존재로 계신 분, 존재로 계신 분에게 성령이 먼저 임하는 걸 ‘성령 세례’라고 합니다. ‘이 순서 안 밟으면 너는 주님이 먼저 가 계신 곳에 합류하지 못한다.’ 이걸 분명히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요한일서에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성령이 눈에 보이지 않는 거예요. 요한일서에서 어느 정도로 우리를 괴롭히느냐? 이렇게 괴롭혀요. 성령은 눈에 보이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 분을 우리는 존재이기 때문에 모르잖아요. 그 ‘보이지 않는 분이 안 보이는 데 있다’라는 걸 어떻게 압니까? 요한일서에는 ‘성령이 오면 된다’는 거예요. 참, 이거 환장할 지경이에요. 이게 믿으라는 이야기예요, 믿지 말라는 이야기예요? 믿음은 네 소관이 아니라는 거예요.
왜? 성령이 와야 믿어지니까! 또, 또 성령을 동원해요. 그러면 성령 받으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주님을 사랑하라.’ 그러면 어떻게 사랑하면 됩니까? 요한1서 4장에 성령이 오면 사랑한다는 거예요. 지금 우리를 보세요. 우리의 질문은 반드시 우리의 존재를 근거로 해서 ‘내 존재가 얼마나 잘 될까’를 염두에 두고 자꾸 어떤 형식, 질문 형식이 돼요, 질문 형식.
하나님께서 이 질문 형식을 자꾸 배척하는 이유는 이 마귀가 하나님을 공격할 때 하는 버릇이 뭐냐? 꼭 신을 향하여 질문을 해요, 꼭 질문을 한다고. 그게 물리학의 역사예요. ‘요래 해볼까, 저래 해볼까?’ 그게 생물학의 역사고, 철학의 역사고. 어떻게 하면? 진실이 뭐냐? 진리가 뭐냐? 계속 질문을 하는데 기존 도서관에 있는 책들은 해답을 안 주니까 갈릴레오는 실험해야 되고, 뉴턴도 실험해야 되고, 아인슈타인은 사고실험 해야 되고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해서 어떤 결과를 낼 때 이게 진리다, 이렇게 되거든요. 이게 학문이고, 그게 기술이고, 그게 AI가 나오게 되는 결론이에요.
페니실린 실험할 때 2만 번 실험했잖아요, 페니실린. 그 약에 맞는 거. 3500번의 실험을 해서 나온 게 뭐냐? 필라멘트 나왔어요. 에디슨의 전구 연구예요. 이거 뭐 사람 머리카락 갖고 해봤다가 대나무 줄기 갖고 해봤다가…, 3500번. 그 조수들 애 먹었어요. 월급도 별로 안 주면서 이렇게 해봤다고요. 왜 그렇게 합니까?
질문을 한다는 것은 내가 궁금해 미치겠다는 거예요. 궁금해 미치겠다는 것은 뭐냐? 하나님 없이 인간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을 내 존재의 뿌리로부터 시작하겠다는 거예요. 우리 학교 선생님들, 학생들에게 뭘 가르쳐요? “인간들아, 너희들 질문하지 않으면 발전이 없다.” 잘 가르쳤었습니다. 이게 인간은 존재, 자기 존재의 뿌리로 소환되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돼요.
자, 주께서는 질문을 못 하게 만들어요. 못 하게 하고, 질문을 하든 뭘 하든 관계없이 예수님이 알아서 대표로 해버려요. 대표로 하고, 질문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으로 완전히 끝났죠. 끝나고 난 뒤에 예수님은 뭐가 돼요? 진짜 율법에서 이야기하는, 율법을 전부 자기한테 가져오니까 진짜 율법에서 이야기하는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 그렇게 예수님만 이스라엘 되죠.
이게 요한복음 1장 51절에 나옵니다. ‘인자의 머리 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한다’ 했잖아요. 그게 원래 이스라엘인 야곱, 야곱에게 일어난 사건인데 그걸 주님이 자기 사건으로 가져와 버리죠. ‘나만 이스라엘이다.’ 예수님만 이스라엘 되니까 나머지는 이스라엘 아니죠. 유대 나라는 아닙니다. 그것은, ‘저희 아비는 마귀’(요 8:44)예요.
예수님께서 자기 성령을 줘버리면 여기서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는 뭐냐? 율법에 의하면 ‘그 민족’이 돼요. 이방 민족이 돼요. 성령이 오면 이 둘 다를 버리지 말고 이 둘의 차이를, 이 간격을 확보하게 되면 성령 받은 사람은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1장의 ‘두 증인’이 되는 거예요. 그들의 육은 살고자 하는데 주께서는 그들을 죽이고자 하는 그 차이.
진도 나가기 전에 어제 오후 설교에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못 했는데 그거 약간 마저 하겠어요. ‘나봇’이라는 이 사람, 나봇이라는 이 사람이 포도원을 지켰다. 왜 지켰느냐? ‘포도원은 하나님이 주신 땅이기 때문에 내가 지킬 사명이 있다.’ 그래서 ‘이 땅은 사고파는 그런 대상이 안 됩니다.’ 했잖아요.
그런데 이걸 바꿔야 돼요. 포도원이라는 이 땅, 주님이 이 땅을 위해서, 땅이 누구를 지키느냐? 나봇을 지켜요. 나봇을 지키는 이유가, 나봇을 뭘 지킨다는 말인가?어제 오후에 잠시 이야기했죠. 사태가 정상으로 돌아가면…, 그다음에 뭡니까? 모든 것이 보인다. 비정상적인 나라에서 이 사태가 정상으로 돌아가려면 누가 희생이 돼야 돼요. 나봇이 희생이 돼야 돼요. 하나님께서는 사태가 정상으로 되는 이걸 원합니다. 나봇이 죽든 말든 상관없어요.
나봇은 영광스럽게도, 영광스럽게도 땅이, 포도원의 땅이 조상으로부터 주어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그 땅 상속분, -이걸 기업이라 해요- 그 상속분이, 나봇으로 하여금 그 시대의 그 사태가, ‘이래야 정상입니다’를 보여주는 일에 철저하게 사용하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나봇을 철저하게 사용하신 거예요.
이것을 통해서 제가 느낀 것은 이거예요. ‘지금 남 탓할 게 아니고 너나 잘하세요!’ 하는 그러한 느낌이 오는 거예요. 엘리야는 철이 없어가지고 ‘나 혼자뿐입니다.’ 하고, 남은 7,000명이 있는 걸 몰랐잖아요. 나봇은 진짜 혼자뿐이었어요. 주께서는 지금 사태가, 진짜 제대로 된 사태가 어떤 사태냐를 알려주면 그걸로 손 털어버려요. 나봇이 죽든 말든!
그런데 그거 하기 위해서 나봇이 땅을 지키는 게 아니라 땅이 나봇으로 하여금 그 시대에 주님의, 여호와의 증인 노릇 하기를 제대로 시킨 거예요, 제대로. 그러면 이게 뭐냐? 오늘날 성도의 사명이잖아요. 남 탓, 남 욕하지 말고 ‘혼자서도 잘해요!’ 혼자,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뭘?” 무엇이 진실인지를 드러내는데 숫자, 쪽수가 아무 소용이 없지요. 쪽수면 850대 1? 아니에요! 1 대 1이었어요. 이세벨과 엘리야, 1 대 1이었습니다!
우리의 할 일, 사명, ‘주께서 어떻게 쓰시는가?’가 다시 한번 느껴지는 그 기쁨의 순간인 거예요. ‘아,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려고 한 게 아니고, 예쁜 원피스 입으라고 살리려고 한 게 아니고 원피스를 입든 말든 아예 진리를 위해서 우리를 제대로 죽이려고 하는구나.’ 세상에, 여기에 아다리가 되어 걸려든 우리가 얼마나 감사한지요. 얼마나 고마운지!
‘혼자서도 잘해요.’ 혼자서 하는 것 있지요. 혼자서 조물락대면서 하는 애들의 레고 놀이 작업. 남 더럽다 하지 말고 ‘너는 진리에 의해서 죽는 것을 소원하고 있느냐?’ 지금 그걸 물으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다음에 나온 거 보세요. 이제 우리는 위치가 어디라고 했습니까? ‘그 민족’이죠. 이방인입니다. 이방인들이 뭘 하는가? 한번 보세요.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신 18:10-11) 했잖아요. 여러분, 이제 알았죠. 여기 용납 안 한 사람, 누구밖에 없었다? 이스라엘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니고 누구밖에 없어요? 예수님밖에 없죠.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위치해야 됩니까? 이런 것을 원할 수밖에 없는 내 모습을 어떻게 해야 해요? 빨리 찾아가야 되죠.
이게 이방인적인 내 모습이니까, 아닌 척할 게 아니라! 우리 위치가 출발을 이방인으로 해 줘야 해요, 이방인으로. 그래서 뭐 자기가 신접한 자가 누굽니까, 박수가 누굽니까, 초혼자가…, 그런 것은 뭐 주석 보면 잘 나와 있고요. 이방인이 상식적으로 점이나 치고 이런 것을 원했다면, 그러면 점 안 치는 우리는 행운을 기대 안 하는 사람입니까? 그렇게 되면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여기 초혼자나 박수가 있다. 그런데 ‘나는 점 안 칩니다, 사주 안 봅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예수님 빼놓고 다 똑같아’라는 거죠. 그 점을 알기 위해서 제가 유튜브 하나를 보고, 6분짜리인데 그 대사를 일일이 한번 적어 봤어요. 유튜브 제목이, 이것은 제목을 적어놔야 해요. 여러분이 나중에 봐야 되기 때문에. 제목이 길어요. 이거 치면 나올 거예요. <사랑 버리고 속세를 떠나 스님이 된 박해준>, 이게 제목이에요.
드라마 <나의 아저씨(2018)>에 그 결정적 대목이 나오는데 이걸 여기서 틀기는 그렇고, 대사를 한번 적어봤습니다. 처음에 술집 여인으로 배역을 맡은 ‘오나라’가 나와요. 그 얼굴 인상, 머리 모양부터, 옷차림부터, 드라마 술집 주인으로서 너무나 적절하게 연기한 ‘오나라’라는 그 배우가 라이터를 탁 켜요. 라이터를 켜 보면서 장면이 바뀌면서 절에 갑니다. 라이터가 잘 작동하고 있는지 시험하는데 이게 중국산인지 모르겠지만 잘돼요.
장면이 바뀌고 첫 장면이 설법 시간이에요. 50대쯤 된 어떤 남자가 머리를 깎고 중이 돼서 옷을 입고 설법을 시작해요. 앞에 불자들이 앉아 있는데 “날이 춥죠? 여기 산속이라 더 추워요. 이 추운 날 여기에 왜 오셨죠?” 하면서 이제 설법을 시작해요. 아주머니들이 “좋은 말씀 들으러 왔지요”라고 해요. 또 어떤 남자는 “성불하러요.” 또 다른 여자는 “마음공부 하러 왔습니다.”
스님이 듣고 있다가 “그런데 왜 그걸 공부해요? 다들 마음 있잖아요. 근데 그걸 왜 공부해요?” 그리고 설법을 해요. “세상 사람들은 밖에 있는 것이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밖에 있는 것이 내 마음을 즐겁게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설법하고 있는데 가끔은 뭐냐, 오나라가 심각하게 뒤에 딱 앉아 있는 모습을 보여줘요. ‘놀고 있네.’ 이런 거죠.
“우리 불자들은 이것이 망상이라 하는 것을 인정하고 여기 온 겁니다. 내심외경(內心外境), ‘내 속에 있는 것을 밖에서 본다.’ 이것이 진짜라는 것을 인정하고 여기 앉아 있는 겁니다. 인간은 다 열망하는 것을 보게 돼 있습니다. 내 속에서 보고 싶은 걸 밖에서 찾아서 보게 됩니다. 내 마음이 좋으면 밖에 싫은 게 하나도 없어요.” 설법을 계속해요.
“제가 옛날에 마음이 아주 죽겠어서 보음사 토굴에서 3일 밤낮을 기도하고 있었는데, 저도 그때 처음 경험했는데 그냥 마음이 풀렸어요. 밖에 싫은 게 하나도 없어요. 염소 새끼도 이뻐서 한참을 쳐다보고, 풀때기도 이쁘고 그냥 다 이뻐요. 싫은 게 없어요.” 해놓고 “성불하십시오” 하면 교인들이, 불자들이 스님 앞에서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해요. 그다음에 이제 장면 바뀌면서 설교는 끝났어요.
이제 절 바깥에서 대웅전 앞에서 따로 만났어요. 오나라가 스님 따로 만나서 대사를 칩니다. “나 온몸이 다 아파. 안 아픈 데가 없어. 아침에 눈 떠지는 게 싫고 눈 감으면 눈물부터 나. 네가 오면 안 아플 것 같아. 그러니까 와, 그만 와, 그만 와. 나 혼자 늙어 죽기 싫어.” 이렇게 하니까 그 옛날 30년 전의 그 남자 친구 박해준이가 “밥 먹자, 가자.” 이렇게 해요.
그때 오나라가 약이 올라서, “염소 새끼도 사랑하고 풀때기도 사랑하면서 나는 왜 안 사랑해? 너 여기서 득도(得度) 못해!” 이게 결정적인 거예요. “너 여기서 득도 못 해. 나같이 지랄맞은 여편네랑 살아봐야 득도하지, 이런 산골에 처박혀서는 득도 못 해. 내려와! 여기 확 다 불 질러버리기 전에 내려와!” 해놓고 혼자서 흑흑흑 울고 갑니다.
그때 그다음에 심수봉 노래가 흘러나와요. <백만 송이 장미>(1997) 그 노래가 흘러나와요. 노래는 심수봉이 아니라 이선균이 부르는 노래로 나와요.
<백만 송이 장미>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백만 송이 피워 오라는
진실한 사랑을 할 때만
피어나는 사랑의 장미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수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내가 지금 연기를 못해서 실감이 안 나는데, 유튜브 한번 찾아보세요. 이게 바로 신접한 여인이고, 이게 진혼자고, 초혼자요, 이게 요술 하는 자, 무당입니다. 그들은 이런 무당들의 생산자고, 소비자는 누구냐? 바로 우리 자신들이에요, 우리 자신들.
청년 시절에 헤어졌다가 중년 돼서 만난 그 둘 사이에 30년 세월이 사라지고 난 뒤에, 술집 여자로서 그 힘든 것을 이겨내는 것은 언젠가는, 언젠가는 그 남자가 나한테 돌아올 수 있지 않겠느냐, ‘언젠가는’ 하는 그 바람. 그래서 ‘라이터 잘 켜지는가?’ 한번 시험해 본 거예요, 불 확 질러버리려고. 이 노래하고는 다른 거지만 비슷한 내용이 있어요.
<그 사랑이 울고 있어요>
지금도 못 잊었다면
거짓이라 말하겠지만
이렇게 당신을 그리워하며
헤매이고 있어요
한적한 그 길목에서
밤 깊은 이 자리에서
우리가 남겨둔 이야기들이
나를 다시 불러요
당신은 행복을 위하여
돌아서야 했나요
내 모든 꿈들은 사라져
갔어도 바람이 불면
저 창문가에서
그 사랑이 울고 있어요
우리가 헤어진 것은
운명인 줄 알고 있지만
이 세상 어딘가 당신이 있어
기다림이 있어요
당신은 행복을 위하여
돌아서야 했나요
내 모든 꿈들은 사라져
갔어도 바람이 불면
저 창문가에서
그 사랑이 울고 있어요
우리가 헤어진 것은
운명인 줄 알고 있지만
이 세상 어딘가 당신이 있어
기다림이 있어요
<그 사랑이 울고 있어요>(1990), 신정숙 노래. 이렇게 들어보니까 여러분들이 머리 좋은 사람은 생각할 거예요. 결국은 우리가 누구와 헤어지지 못해요? 나랑 헤어지지 못해요, 나랑 헤어지질 못합니다. 내게 허락도 없이 쑥 들어와서 나에게 사랑만 남기는 그 타인을 내가 끄집어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율법의 완성은 뭐라고 합니까? 사랑이죠. 그런데 내가 존재의 뿌리를 가지고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고 말하면 돼요, 안 돼요? 이게 안 돼요.
사람이 복음을 들어도 왜 못 믿고 사랑으로 응답해도 왜 못 믿는가? 본인하고 헤어지지를 못해서 그래요. 이것은 내 심보가 나빠서가 아니라, 복음이 싫어서가 아니고, 예수님이 미워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나의 조건이 있어요. 내가 나를 떠날 수 없다는 것, 차라리 모든 것을 내가 감수하고 받아들이는 것, 이런 것을 생각하면 자꾸 뭐가 생각나느냐? 가룟 유다가 자살한 것이 생각납니다.
가룟 유다가 자살할 때 그냥 잘 먹고 잘살다가 자살한 것이 아니고, 스승에 대한 자기의 사랑이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랑을 어떻게 처우했습니까? 자기 속의 마귀로 인하여 어떻게 했어요? 스승을 팔아넘겼잖아요. 팔아넘기고 돌이켜 보니까 누가 나빠요? 내가 나빠요. 내가 나쁜 그 죄책감을 어떻게라도 감당해야 했어요. 그래서 자살했어요.
어제 낮 설교에 뭐라고 했습니까? 지옥이라 하는 것은 뭐가 안 되는 사람만 지옥 간다? 맞아요. 탕감이 안 돼요, 탕감이. 우리는 선악과 따먹었잖아요. 바르게 살려고 해요. 인간답게 살려고 해요. 양심대로 살려고 해요. 탕감은 싫어요. 왜? 내 인생인데 누가 해결해요? 내 짐은 끝까지 누가 책임져야 해요? 내가 책임지고 싶은 거예요.
이게 마귀가 심어놓은 악마의 양심입니다. 양심은 악마에게만 적절해요. 도저히 자기와 헤어질 수가 없습니다. 이거 나눠주세요. 이 타이밍에 이거 나갑니다. 이 가사를 왜 나눠주느냐 하면, 이것과 이것을 우리가 구분을 좀 해야 해요. ‘꿈과 예언’이 구분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꿈 없는 사람은 없어요. 꿈은 너무 지독해서 이불 덮고 눕자마자, 잠자고 있는 그동안에도 뭐가 떠 오르지요? 꿈을 꿔요.
기억이 안 나는 것은 꿈을 안 꾸는 것이 아니에요. 기억이 안 나는 것 뿐이지 인간은 누구든지 하루에 서너 번은 꿈을 꿉니다. 그것을 뇌과학자들이 REM(Rapid Eye Movement sleep)이라고 하는 거예요. 꿈꾸는 시간. 왜 REM이 있느냐? REM이 일어나는 이유, 전에도 이야기했는데 인간이 꿈을 꾸는 이유가 뭐냐 하면, 지구의 자전 때문에 꿈을 꾼다는 거예요.
지구가 도니까 우리의 두뇌 세포도 돌지요. 그런데 잠잘 때는 세포가 활동을 안 하기 때문에 섬세한 지구 자전을 느끼게 되면, 언어는 발설을 못 하면서 낮에 봤던 그 동영상들이 자기 혼자 돌아다니면서 꿈이 돼요. 꿈은 무엇 때문에 생기는가? 지구의 자전 때문에. 그런데 이 주장을 하는 사람은 그것까지 이야기해야 해요. 지구는 왜 자전하는가? 그것부터 이야기해야 해요.
여기서 진도가 그것까지 나가면 안 되겠지요? ‘꿈과 예언’의 차이는 뭐냐 하면, 예언은 자기 부정이 돼요. 꿈의 특징은 뭐냐? 자기 부정이 안 돼요. 자기 사랑을 더 심화시키지요. 자, 가사(ABBA, I Have a Dream, 1979)를 한 번 봅시다.
나는 꿈을 꿔요, 부를 노래를
(I have a dream, a song to sing)
무엇이든지 이겨내게 도와줄 노래를 불러요
(To help me cope with anything)
자기 꿈이 노래로 나왔다 그 말이거든요.
동화 속의 경이로움을 본다면
(If you see the wonder of a fairy tale)
실패하더라도 미래를 받아들일 수 있어요.
(You can take the future even if you fail)
여기에 미래가 나와요. 그다음에 뭐가 나와요? 난 뭘 믿는다고?
난 천사들을 믿어요
(I believe in angels)
여기까지 하고 이것을 함축해 보겠습니다. 꿈의 특징은 뭐냐 하면, 본인의 현실을 본인이 떠나지 않아요. 나를 떠나서 천사가 사는 세계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누가 좀 도와주세요, 천사가 와서 좀 도와주세요. 이게 꿈이에요. 꿈이 뭐냐 하면, 내가 예상 못한 행운을 내가 할 수 있는 것 말고, 내가 모르는 다른 존재의 초월적인 능력, –여기서는 천사가 되겠지요– ‘천사가 와서 도와주세요’ 하는 거예요.
I believe in angels
(나는 천사가 있다고 믿어요)
Something good in everything I see
(내가 보는 모든 것 속에 좋은 것이 있죠)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야, 이러면 주식 대박 나겠다’라는 꿈이 있더라도 그 꿈은 영 불안하다는 거예요. 누가 와서, 초월적인 존재가 와서 협조해 주면 완벽에 완벽을 기할 수 있겠다는 뜻이에요.
내게 맞는 시간이 올 때를 알 때
(When I know the time is right for me)
다음 가사에서 ‘stream’ 작은 냇가, 조그마한 냇가지요.
I'll cross the stream, I have a dream
(나는 시냇물을 건널 거예요, 나에게는 꿈이 있으니까)
‘강’이라고 하면 너무 엄청나고, 작은 시냇물, 이것은 뭐냐? ‘아, 요거 잘 만하면 되겠네’라는 작은 희망 같은 것. 왜냐하면 천사를 모시려 할 때 너무 욕심부리면 안 되잖아요. 혹시 천사가 너무 욕심 많다고 안 오면 안 되니까요. 어른이 되어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어린애 때는 심각한 것이 있잖아요.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 보면 그게 소박하고 작은 문제잖아요, 동화의 세계니까. 그렇게 어린애의 세계로 돌아가서 ‘나 이 정도로 겸손해요. 천사님, 무시하지 말고 조금만 도와주세요’라는 간절한 심정으로 아바라는 그룹이 부른 거예요.
“I have a dream, a song to sing~” 이런 식으로 부르는 노래입니다.
To help me through reality
(현실을 헤쳐 나가게 도와주는 꿈이에요)
아까 나왔지요? 꿈은 특징이 뭐냐? 첫 번째, 나를 부정 못 한다. 두 번째 뭐냐? 나는 현실을 떠나지 못한다. 이게 꿈이에요, 꿈. 그리고 이 꿈은 세 번째로, 이 꿈은 사춘기에 생기는 것도 아니고 20대에 생기는 것도 아니고 어디서부터 생겨왔다? 어릴 때부터 동화일 때부터. 차라리 더 노골적으로, 태어나면서 꿈이 나를 만들었다고 보면 돼요.
꿈이, 환상fantasy이 나를 만들었다. 내가 만들지 않는 이상을 가지고 ‘이상 자아’라 하고요, 이것은 어릴 때 상상하는 세계입니다. ‘내가 저것이 되고 싶어’하는 것, 이것은 이 현실 세계에서,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사회에서 살면서 가지는 꿈 그것을 ‘자아 이상’이라고 합니다. ‘나 저거 될래.’ 내가 이 사회에 안 나갔으면 몰랐을 것들.
7살짜리 애가 “나는 중고차 안 탈래. 나는 새 차 탈래”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안 하지요. 그런데 커서 사회에 나가면 차 여러 종류를 보게 되죠. “너는 중고차 사라. 엄마의 부탁이다. 맨날 직장이나 바꾸면서…, 중고차나 사서 타!” “안 해. 나 새 차 살래.” “아, 골치아파.” 누구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그 뒤에 중요한 가사가 나와요.
And my destination makes it worth the while
(그리고 나의 목적지는 그 여정을 가치 있게 만들어요)
그 여정을 뭐 있게 만든다? 가치 있게 만든다. 야, 우리가 꿈을 꾸는 본색이 나왔지요? 자, 꿈을 꾸는 이유가 뭡니까? 누가 가치 있다? 꿈을 꾸는 당사자가 누구예요? 나지요. ‘나’를 가치 있게 해주기 위해서 나는 꿈을 꾼다. 그런데 이 사람은 모르고 있지요? 이 사람은 꿈이 나를 만든 것을 모르고 ‘내가 꿈을 꾼 대로 천사가 약간만 도와준다면 나는…’ 뭐가 된다? ‘가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다음에 뭡니까?
어둠 속을 헤치며 아직 한 걸음 더 나아가요
(Pushing through the darkness still another mile)
자, 복음을 아는 우리 입장에서는 ‘불신자들이, 이방인들이 이렇게 하는구나’라고 하지만, 내가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물론 불신자 공격해도 돼요, 맞아요. 맞는데 언제 어떤 상황에서 우리는 후딱 어디로 돌아가요? 바로 이 가사의 세계로 어느새 벌써 돌아와 있어요. ‘나는 꿈이 있어요. 내 딸, 내 애 키우는 꿈이 있어요.’ 또 ‘좀 내 몸이 편히 쉴 수 있도록 하는 그 꿈이 있어요.’
그 꿈이 바로 이 꿈이에요. “I have a dream!” 그 꿈이라니까요. 후딱 다시 내 존재 옆으로 돌아와 있다고요. 아까 뭡니까? “성령이 보고 싶어요.” 그거 아니에요, 지금. ‘나 편하면 좋아요.’ 거기로 돌아온다고요. 계속 봅시다.
I believe in angels
(나는 천사를 믿어요)
Something good in everything I see
(내가 보는 모든 것에 뭔가 좋은 것이 있어요)
꿈이라 하는 것은, 항상 슬픈 것은 꿈꾸지 않아요. 뭔가 좋은 것이 있을 것이라는 거지요.
I believe in angels
(나는 천사를 믿어요)
When I know the time is right for me
(내게 딱 맞는 시간이 온 것을 알 때)
이 점을 보면서 전도서 3장을 찾아봅시다. 주님께서, 성령께서 활동하면서 얼마나 수시로 사태를 일으켜서 우리를 엿 먹이는가를 봅시다. 1절,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그 목적과 기한을 이루기 위해서 뭐가 준비되어 있어요? ‘때’가 준비되어 있어요. 2절입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뽑힐 때가 있으며’ 우리는 좀 안 뽑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요. 심어서 뽑힌다. 뭐 머리 빠지는 사람 이야기인가요? 다음 3절 보세요.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세울 때가 있고 그다음에 무슨 때? 헐 때가 있고. 같은 말이에요.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 3:4-8).
이때를 누가 장악하고 있어요? 신약의 성령님이 장악하고 있다. 성령님은 바람같이 사건을 일으키잖아요. 나봇 같은 경우에 죽고 싶어서 환장했습니까? 아니지요. 권력자가 밭 팔라고 이야기했잖아요. “출세시켜 줄게. 횡재한 거야 너. 포도원 팔아!” 이것을 나봇이 은근히 기다렸습니까, 자기 신앙 자랑하려고? 아닙니다.
그 일을 누가 하느냐 하면, 주께서 하셨고 신약에서는 누가 한다? 성령께서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아모스 이야기가, “너희들이 지금 네 존재를 위해서 돈이 없다, 수입이 없다, 양식이 없다고 한다고?” 기근이 아니고 뭐가 없어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신약대로 하면 “성령이 없어서 네가 항상 불안불안하다.” 그 말이에요.
자, 예언은 뭐냐 하면, 예언은 우리를 죽이는 거예요. 그러나 꿈은 스스로 나를 살리기 위해서 계속 억지로라도 꿈이 나에게서 일어나는 것, 그게 꿈입니다. 여러분이 이 노래를 다 알지만 혹시나 한 번도 안 들어본 사람을 위해서 한번 짧게 들어보겠습니다. 간만 봅시다. 전주만 나와도 알잖아요.
I have a dream, a song to sing
To help me cope with anything
If you see the wonder of a fairy tale
You can take the future even if you fail…
여기까지, 여러분이 다 잘 아는 노래기 때문에 알아서 들으시면 됩니다.
다시 신명기를 봅시다, 신명기 18장…. 이렇게 보니까 어떻습니까? 이게 ‘이방 민족의 특징, 풍습을 따르지 말라’가 아니라 너 존재 자체가 예수님 보기에 뭐냐? 이미 출발점이 너는 어쩔 수 없이 뭐다? 이방인이다, 어쩔 수 없이 이방인이다. 이방인들은 예언을 싫어하지요. 이스라엘이 예언을 뭘로 바꿨어요?
약속의 땅 있겠다. 자기가 살아 있겠다. 예언을 어떻게 해석했습니까? 자기의 꿈을 이루어주는 그런 예언으로 곡해해서 해석해 버린 거예요. 인간의 타고난 마귀 본성이지요. 교회 와서 설교 들을 때 이렇게 하잖아요. 예언을 옴팍 받았던 주님은 죽었잖아요. 살해를 당했는데 인간은 여기서 꿈을 꾸고 있어요. 하나님 말씀의 덕을 보겠다고! 꿈을 꾸고 있다고요.
그런데 ‘아바’ 그룹이 불렀던 이 ‘꿈’같은 것은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해준 셈입니다. 그래서 이 첫 시간 강의를 우리가 끝내면서 이 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사랑이라는 것. 사랑이라 할 때 여러분이 고린도전서 13장을 잘 생각하시면 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선물’이라고 하는데, 이게 인간의 타고난 품성에서 나오지 않고 왜 선물이어야 하는가?
인간은 ‘천사의 말을 하고, 구제하고 방언하면,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이것을 분리시켜요. “구제하고, 도와주고, 착한 일 많이 하고, 지식적으로 완벽한 지식을 말하는 것, 복음을 전하는 것, 그것이 너희는 사랑으로 보이느냐? 사랑은 따로 있어.”
사랑은 뭐냐 하면, ‘네 목숨을 요청한다’는 거예요. 내 목숨을. 하도 우리가 나한테 달라붙어서 안 떨어지니까 ‘사랑은 자기 유익을 찾지 않는다.’ 구하지 않는다. 이것은 미칠 지경이에요.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어디 있어요? 어떤 일을 해도 마지막에 계산하잖아요. 그런데 아까 했잖아요. 주님께서 탕감할 때 계산합니까? 탕감받고 또 계산하는 사람은 저주받았잖아요. 마태복음에 나오지요. ‘야, 탕감받았다. 그러면 나는…’(마 18:23-34). 이렇게 계산하는 거예요.
탕감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고…, 탕감이 용서잖아요. 용서는 우리가 분량을 가지고, 양을 가지고 조정하는 것이 아니에요, 용서는! 어제 오후에 이야기했지만 용서는 이미 그냥 와버렸어요. 용서는 이미 투입되었고 대기하고 있고, 죄만 지으면 용서받은 우리가 용서를 알면서, 거기서 ‘아멘! 감사’로 찬양으로 나올 수 있도록 용서가 먼저 주어지고, 그 용서에 입각해서 우리는 죄를 짓는 거예요.
이것이 성령 안에서의 삶입니다. ‘성령 안에서’를 다른 말로 하면, 예언 안에서, 이 율법서 안에서의 예언인 거예요. 사랑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사랑은 아주 참혹해요. 왜? 안 떨어지려는 내 목숨을 강제로 떼 내니까 얼마나 우리가 발악을 하겠습니까? ‘좀더 내 꿈 꾸고 가겠습니다’ 이런 거, ‘저 여자만큼은 살려주시면 제가 뭐라도 하겠습니다.’ 임재범이 부른 이런 거요.
사랑은 가혹해요. 참 가혹해요. 십자가에서 어떻게 할 수만 있거든…, 겟세마네에서 주님 기도할 때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그런데 ‘안된다고요? 안 돼요, 정말? 아버지, 안 돼요?’ 그러면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사랑은 가혹하게 우리의 목숨을 나에게서 떼 냅니다. 왜?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내가 붙드는 나보다 더 가치가 있기 때문에 주님은 사랑하는 차원에서 ‘봐주기 없기.’ 강제로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성령이 주신 주의 완성된 것을 집어넣고, 그리고 우리가 붙드는 내 목숨을 강제로 앗아가는 방식으로 성령께서 하시고, 그다음에 빌립보서 4장 13절의 말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모든 것에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라고 하는 거예요.
너희는 여호와께 뭐 하라? 찬양하라. 시편의 제일 마지막 대목이 그거예요.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대목이 그거예요. ‘아멘, 할렐루야’예요. 중간에도 계속 ‘아멘, 할렐루야’가 나와요. 찬양하는 것, 이 땅에 살아 있을 때 성령으로 인하여 미리 당겨서 ‘할렐루야’를 미리 외칩시다. 진짜 ‘할렐루야!’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