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복음이냐 교회냐(11강) 갈1:4(사람 없는 곳) 20260720 (강의: 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복음이냐 교회냐』 129페이지에 제목은 <7강. 종말이란>. ‘종말’하면 서글픈 생각이 들죠. 서글픈 생각이 들면서 인간들이 보유하고 있는, 갖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여분, 인간이 알고 있는 시간과 공간에서 아는 것 말고 더 여분의 시간이 종말처럼 그렇게 느껴집니다. 우리가 아는 시간 말고, ‘저기 어디 낭떠러지가 있는 것 같아.’ 뭐 이런 거요. ‘우리가 아는 지평선 말고 지평선 너머에 또 다른 여분이 있는데 그쪽이 종말이 아니겠는가?’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그러한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걸 한번 생각해봅시다. 사람이 있는 시간+공간/ 사람이 없는 시간+공간. 사람들은 생각할 때 사람이 없다는 것은 아예 없는 걸로 간주해요. 사람이 없으니까 아예 없는 걸로 간주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사람은 그냥 홀로 사는 것이 아니고, 사회체 안에서 사람이라는 것을 규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회. 가정도 사회잖아요. 그리고 학교도 사회고 친구들 사회, 사회를 전제로 해서 이게 사람 살만한 곳이라는 전제가 있어요. 아무도 없는 곳에 간다, 그것은 사람에게는 죽음이라고 간주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레위기 14장에 문둥병 걸린 사람은 어디 가서 살죠? 진 밖에 나가 살죠. 진 밖에 나가 살면 어떻게 돼요? 그것은 사회가 형성되지 못합니다. 따라서 기존의 사회체제에서 볼 때 그 사람은 진 밖에서 목숨부지하고 있더라도 죽은 사람이에요. 죽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내가 산다.’는 말의 진짜 표현은 ‘내가 속한 사회가 건실하다. 잘 유지된다. 건실하고 좋은 사회다.’ 이러면 덩달아 우리는 거기에 포함되어서 ‘내가 제대로 살아있다’가 성립돼요, 인간은. 그러니까 그 사회가 졸지에 달라지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안 되겠죠.
그래서 종교라 하는 것은 그동안 정들었던 사회를 떠나서 사람 살지 않는 곳에 갈 때, 대우를 해줘서 산 사람이 아니라 죽은 사람끼리 모인 곳에 잘 합류하라고 옛날부터 종교라는 것이 있는 겁니다. 모든 민족마다 공통적으로 조상 제사가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같이 살았던 사람에 대한 배려. ‘이 땅에서 고생했지만 저 하늘의 별이 되어서 편안히 쉬세요, 어머니.’ 이런 것처럼.
상당히 비(非)실제적이고 비유적으로, 시적으로만 표현될 수밖에 없다는 말은 실상은 그게 아니지만 우리 살아있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환상의 일부를 할애해서 ‘저 별나라, 하늘나라는 좋은 나라입니다.’ 그래서 방송에서 보면 보통 “어머님 일찍 돌아가셔서 섭섭하겠습니다. 자, 지금 하늘에서 어머니가 지켜보신다 치고 어머니한테 무슨 이야기를 하시렵니까?” 그런 이야기를 하죠.
그래서 인간들은 근본적으로 내가 있지 않은 공간은 사실 나쁜 공간이고 없어져야 될 공간이고 별 무가치하고 의미 없는 공간으로 간주해요. 그 중심에 누가 있어요? 내가 있어요. 내가. 그래서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예수님께서는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던 거예요.
사람은, 사람이 없는 공간보다도 사람이 있는 공간 안에서 이러한 종교 같은 것을 의미 있게 봅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후서 3장 2절의 말씀을 제가 말씀드리고 여러분께 질문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신약에서 두 군데 찾아봅니다. 한번 적어볼게요. “…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자, 여기서 ‘믿음, 믿는 세계, 믿음의 세계’는 무엇과 반대가 되느냐? 무엇과 대비가 되느냐 하면, 모든 사람이 익히 아는 그 세계는 아니다. 그러면 믿음은? 믿음이 진리고 진짜라면,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은 진짜 진리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이겠지요. 진리의 반대말이 거짓이잖아요. 모든 사람이 익히 동의하는 것은 스스로 거짓된 세계에 살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내용이 돼요.
이런 내용은 무슨 뜻인가? “빠져나올 거야, 말 거야?” 이 이야기를 묻는 겁니다. 거짓된 세계인데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믿음이 있잖아요. 그 믿음은 언어를 통해서 믿을만한 의미만 소통되고 믿지 못하는 것은 탈락이에요. 뭐 귀신이 있다, 이런 것은 다 탈락이에요. 수능 시험에 ‘귀신은 키가 몇 cm 됩니까?’ 이런 것은 시험 안 쳐요. ‘아인슈타인이 발명한 것은?’ 이런 건 시험에 나오는데, ‘귀신이 주장한 내용을 쓰세요.’ 이런 건 안 나온다고요.
왜? 인간세계에서 믿을만한 것은 인간세계 자체적으로 사회에서 이미 확정 시켜놓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것은 용납되고 이런 것은 용납이 안 됩니다.’라고 확정을 시켜놓고, ‘거기에 대해서 동의합니다.’ 이런 것까지도 이 세상은 인정 안 해요. 수능시험을 쳐요. 시험 치는 내용 자체가 ‘앞으로 이 인간이 고등학교 졸업해서 이 사회에 같이 흡수 통합하고 협력이 가능한 존재인지 아닌지’를 수능시험으로 판단하는 거예요.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계속 남을 거냐, 아니면 우리 사회에서 적대적인 세력이 될 것이냐’를 수능시험으로 판가름하는 거예요.
그런데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는 말씀을 전제로 할 때, 복음이라는 게 뭐냐? 더 나아간다면, 모든 사람들이 독려하고 격려하고 ‘힘내라 힘! 파이팅, 파이팅! 잘해라, 잘해라’ 하는 것은 믿음을 돕는 거예요, 믿음을 방해하는 거예요? 믿음을 방해하는 거죠, 격려해주는 것은. 심지어 배려해주고 동정하는 것.
“우리 인간들끼리 합의한 믿음 외에 다른 믿음은 일체 필요 없음을 너 동의하냐?” 우리에게 묻는 겁니다. 이럴 때 복음, 다시 말하면 기쁜 소식은 인간의 인식 속에서… 여러분 한번 만들어보세요. 어떻게 만들겠습니까?
이런 인간들에게 성경책을 한 권씩 다 줬습니다. 다 주고 난 뒤에, 그 성경책을 통해서 통합된 의견을 한번 끄집어내보자. 이런 실험을 이미 AI를 통해서 했어요. 전에도 얘기했듯이 불경도 성경도 AI가 다 통독하게 했어요. 보고 난 뒤에 내린 결론은 뭐냐?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거예요.
AI가 성경에 대한 신학적 해석만 알았을까요, 아니면 성경책을 직접 다 봤을까요? AI가 성경책을 직접 다 보고 불경책 직접 다 봤죠. 내놓는 결론은, 사랑이다. 그게 사랑이에요? 뭡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에 부합됩니까? 안되죠. 인간들이 내린 결론은 사랑이기 때문에.
AI가 데살로니가후서 3장 2절을 봤죠?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그 AI도 알겠죠? 아는데 사랑이라는 말을 왜 끄집어냈는가? 알면서도 왜 끄집어냈을까요? 그것은 AI한테 요구를 한 그들이 바로 ‘모든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래요. AI한테 질문을 한 자가 모든 사람들이에요. 모든 자에서 시작한 것이 모든 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초반에 다시 한번 어려운 것 합니다. 들어보면 논리가 참 간단해요. 로마서 11장 36절을 제가 써보겠습니다. “모든 것이 주로부터 나와서 주로 말미암고 주께 돌아간다.” 주(主)→ 주(主)→ 주(主). 이거 아시죠? 그런데 문제는 이 주가 인간들에게 죽은 자라는 사실이에요.
인간들이 주님을 죽임으로써 산 자가 누가 돼요? 산 자는 인간들이에요. 아까 이야기한 인간의 사회는 살아있죠. 사회는 살아있으니까 뭐가 살아있어요? 그동안 인간이 만들었던 법률, 제도, 관습 이 모든 것도 다 살아있겠죠. 인간의 제도와 법률과 관습이 살아있다는 말은 성경적으로 로마서 이런 데 보면 인간의 혈육적 관계가 살아있는 거예요.
가정은 사회의 가장 기본 단위니까요. 가정이 모여서 이웃이 되고 이웃이 모여서 사회가 되니까. 가장 기본 unit, 단위가 가정이잖아요. 가정은 혈육에서 나온 겁니다. 살아있어요. 살아있는 부모가 살아있는 애 낳지, 죽은 부모가 살아있는 애를 낳을 수 있습니까? 부모가 없는데 어떻게 애를 낳아요? 부모가 살아계셔서 애를 낳잖아요. 살아있는 거예요.
살아있는데 지금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그 살아있는 인간이 죽였던 주님으로부터 모든 게 나와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주께로 나온다면 이 코스, 이 노선은 철저하게 인간사회에서 알지 못하는 숨겨진 노선이 되겠죠. 그렇죠?
인간은 인간 나름의 역사와 전통이 있는데 인간 노선에서 주님의 노선으로 어떻게 건너갈 것인가? 어떻게 건너가죠? 건너갈 수가 없죠. 죽여 버렸으니까요! 왜 죽였습니까?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주님을 죽였잖아요. 그땐 주님인 줄 모르고, 예수님인 줄도 모르고, 하나님이 오는 것도 몰라요.
왜 살아있는 사회를 공격하느냐는 말이죠. 이 공동체를 왜 공격하냔 말이에요. 이 공동체 역사가 얼마나 오래 됐는데. 왜 한 개인이 나서서 “너희들 마귀 자식이다.”… 그거는 살려두면 안되죠. 죽여야 되죠. 원수를 죽여야 본인이 살아있음이 더욱 더 확증되지 않습니까. 인간이 내부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이거잖아요. 어쨌든 살아있는 것을 더욱 더 살게 만들자. 튼튼하게 살고, 건강하게 살고, 행복하게 살고, 오래오래 길게 살고. 길게 살고 싶어요?
성경에서는, 모든 일은 죽은 자로부터해서 죽은 자가 이끌어낸 현실인데요. 인간은, 살아있는 인간끼리 협력해서 현실을 만들었다고 우기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말이 안 통하죠. 문제는 인간 노선에서 주의 노선으로 건너갈 다리가 없다는 거예요.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성경에 무슨 단어가 나오냐? ‘종말’이 나오는 거예요, 종말. 이 종말이란 단어를 생각할 때마다 옛날에 <아들과 딸> 드라마에 나오는 종말이, 김치공장 사업을 한다는 종말이가 떠올라요. 왜 이름이 ‘종말’인가? 딸 그만 낳으라고, 마지막이라고, 아주 극단적으로 네가 만약 딸이면 세상 끝낸다는 식으로 이름을 ‘종말’이라고 지었잖아요.
종말을 주의 노선에 집어넣어요. 주님 보기에 주님을 대적하는 이런 세계에 대해서 주께서는 방치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합당한 것은 종말입니다. 김치 공장하는 종말이 아니고. 그냥 모든 것을 싸그리 다 끝내버립니다.
끝낼 때에, 아까 공간 이야기했잖아요. 사람이 있는 공간과 사람이 없는 공간이죠. 그럼 종말을 현실화시킬 때 거기는 찾는 이가 없게 만들어요. 인간세계에서 문둥병 걸리면 문둥병자를 사람 없는 곳으로 보낼 때, 같은 사회에 있는 인간들은 문둥병 걸린 사람을 뭐로 보느냐? ‘저건 개인적으로 종말이야.’ 왜? 인간사회에서 격리되어서 사니까 그건 종말이에요.
그럼 주님께서는 7월 10일 속죄일에 염소 두 마리 잡게 해요.(레 16장) 한 마리는 잡고 한 마리는 어떻게 하느냐? 아사셀 염소라 해서 광야에 보냅니다. 뭐를 지고? 죄를 지고 광야에 보내죠. 죄. 훠이훠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지은 죄는 네가 알아서 처리하라.
그 종말에 누가 기다리는가? 죄를 졌던 그 염소를 처리하는, 사람은 없지만 염소를 처리해서 죽여버려서 죄를 없애는 심판하는 하나님, 자비하는 하나님 말고 심판하는 하나님이 광야에 있을 것이다. 거기서 처리하면 그 염소를 보낸 우리들은 이제 1년 동안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다. 대속죄일에 아사셀 염소를 그런 식으로 해석해왔던 겁니다.
죄 짊어지고 광야에 나간다? 광야 같은 경우에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 대해 뭐라고 하셨는가?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7절)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 그건 왕궁에 있지. 그런데 왜 사람 없는 곳에 네가 굳이 시선을 돌리느냐?” 여기서, 이미 죽은 장소에서 죽음의 소리, 심판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죽음의 소리, 심판의 소리. 아무도 없는 데서, 죽은 장소에서 이게 들려오죠. 이 소리를 들으면 된다는 거예요.
흔히 사는 데 바빠서 ‘어떻게 사는가?’ 같은 인간들의 소리만 쭉 듣다가 죽음의 소리를 듣는다는 거예요. 그것은 마치 어린 사무엘에게 엘리 제사장의 목소리로, 목소리 분석하면 분명히 엘리 제사장 목소리에요, “사무엘아” 불렀던 것과 같아요. 어린 사무엘을 불렀단 말이죠. 어린 사무엘이니까, 철이 없으니까, 목소리가 그 목소리니까요, 제사장한테 가서 “저를 불렀죠?” 무려 네 번 불렀어요. “불렀죠?” “안 불렀다.”
이것은 어린 사무엘을 깨우치는 게 아니고, 나이 많은 엘리 제사장을 깨우치는 거예요. 하나님이 엘리 제사장에 소리해야 되는데 엘리 제사장을 비껴서 사무엘에게 그 소리가 들렸다는 말은, 나중에 사무엘이 커서 어느 집안, 어느 혈육, 어떤 사회공동체를 제거하느냐? 엘리 계통을 저주로써 제거해버립니다. 제거하는데, 제거하는 방법은? 블레셋 나라를 통해서 제거해버리죠. 여호와가 없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블레셋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제거해버려요.
지금 제가 종말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사기 9장 한번 봅시다. 사사기 9장 23절,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신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 양쪽 다 나빠요, 양쪽 다. 악을 처단하는데 누구를 동원한다? 양발치기로 양쪽 다 악신이 임해서 자기들끼리 붙어가지고 둘 다 없애게 만드는 거예요. 어느 땅에서? 약속의 땅에서.
약속의 땅에서 ‘어떻게 우리 사회가 잘 먹고 잘사느냐?’ 그것만이 약속이 아니고, 악한 신이 등장했을 때 악한 신을 주께서 활용해주신다는 겁니다. 악한 신은 저리 가,가 아니라 악한 신을 불러서 악한 신에 든 자를 악한 신이 스스로 파괴시키고 무너지도록 하는 조치를 내리시는 거예요.
이 아비멜렉, 세겜 이 사람들이 왜 이런 악한 사람이 되었나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아시겠지만 제가 말씀드리면, 기드온이 워낙 유명하니까 아버지의 명예와 명성, 권력을 인수인계 받아가지고 자기는 아무것도 한 것도 없으면서 ‘나 왕 될래. 왜? 왕족이니까.’ 기드온은 왕 될 마음이 없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왕인데 불쑥 여기 왕이 등장한 거예요. 왕이 등장해서 동생 70명을 다 죽였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인간에게 있어서 그리운 것은 ‘사람 없이 하나님만 만나면 이것으로 족합니다.’가 아니라, ‘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그립습니다. 같이 뭉쳐서 다니는 인간사회공동체, 전통 있고 역사 있는 사회공동체가 사람 사는 데에 딱입니다.’ 이걸 인간들이 원하고 있어요.
같은 사람한테 많이 치일 건데…. 치이더라도 그것 때문에 울고불고 하는 일이 있더라도 외로운 것보다는 낫다는 거예요. 쓸쓸한 것보다는 낫다. 나쁜 사람하고 같이 사는 것이 혼자 사는 것보다 낫다. 그래서 남편 죽고 난 뒤에 그렇게 우는 거예요. 그 우는 내용을 들어보면 이래요. “아이고, 이 나쁜 놈아, 나쁜 놈아.” 그렇게 나쁠 것 같으면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어야 될 건데, 왜 나를 놔두고 네가 그냥 가냐는 거예요. 네가 나빠야 누가 천사가 돼요? 내가 천사임이 계속 확인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보통 딸 시집보낼 때 친정엄마가 빈 말을 하죠. “네가 없으니 내 속이 다 시원하다.” 그러면 딸이 또 그래요. 효도 캐릭터 한다고 “엄마 그동안 고생 많이 했지? 엄마, 내가 효도할게.” 효도한다 해놓고 맨날 애 맡기고는 지는 쉬고 친정엄마는 부엌에서 일하게 만들고… 지나간 것은~ 끝났어요. 지나간 말로 끝났어요. 어울려야 되고, 같이 친근해야 되고. 그게 행복이고 외롭지 않고 쓸쓸하지 않은 인간사회 모습입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종말이라는 것은 일체 사람이 없고 그 사람을 심판하는 하나님만 있는 그 상태가 종말이에요. 뭐 세상 끝 낭떠러지, 그런 게 아니고. 없는 게 아니고. 사람 빼고 갑시다. 사람 없이 정작 우리가 누구를 상대해야 되고 누구의 소리를 들어야 되는가? 그 광야에서 죽음의 소리 담당을 누가 했느냐 하면 세례 요한이 담당했어요. 세례 요한이 남긴 광야의 소리를 누가 인수인계하는가? 예수님께서 인수인계해요. 예수님께서 인수인계하면서 마태복음 11장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디서 오느냐?” 이것은 마태복음 3장에서 말하는 거예요, 세례 요한이. 하나님 나라가 어느 쪽에서 오느냐? 동쪽이냐, 서쪽이냐, 북쪽이냐, 남쪽이냐? 광야에서 오죠. 왜? 광야에는 사람이 없으니까.
사람이 없는 곳인데 거기 가면 사람은 죽는 곳인데 그 광야에서 인간 사는 동네를 심판하러 오신다는 것이 세례 요한의 계시입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을 가지고 오신다. 성령 받은 사람은 알곡, 불 받은 사람은 쭉정이. 내 뒤에 이런 분이 오신다.” 세례 요한이 정확하게 이야기했죠.
그런데 문제는 정확히 이야기한 그 분이 어떤 현상을 보면서 실제로 정확하게 알고 있는 분께서 정확히 성령과 불로서 오는 것을 자기가 목격하고 싶은데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는 거예요. 성령과 불로써 심판한다는 이 분. 그래서 세례 요한에게 있어 메시아는 뭐냐? 심판하는 하나님이에요. 심판하는 하나님입니다.
세례 요한에게 있어 심판이라 하는 것은… 성령이 와야 알곡이 되는데 어떤 자에게 성령을 주는가? 나름 착해야 성령이 온다는 거예요, 착해야. 이게 구약의 여파에요. 가진 자는 없는 사람에게 나눠주고, 군인들은 자기 월급으로 충족하고, 인간이 할 도리를 다 하는 것. 특히 인간은 뭘 해야 되느냐 하면 물세례를 받는데, 이 물세례의 기능이 뭐냐? ‘나 죽어 마땅합니다.’라는 표시를 하는 회개의 세례에요. 회개를 해야 주께서 장차 “오, 회개하고 평소에 착했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다 이 말이지? 그럼 성령 줄게.” 이런 절차를 밟는다는 거예요. 세례 요한이 아는 메시아는 그 메시아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보면 착하고 자시고 관계없이 성령이 이방인에게 어떻게 옵니까? 그냥 오죠. 순서가 어떻게 돼요? 성령부터 먼저 오고, 성령 받은 사람은 어떻게 돼요? ‘내가 받을 만한 존재가 못되는구나.’가 하나님을 흡족케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예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러나 제일 처음에 본 것처럼 인간의 공동체, 사회공동체, 인간이 주고받는 언어의 의미 안에는 이 믿음이라는 것이 없어요. 없습니다.
자, 그러면 중간에 뭔가 과정 하나가 빠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세례 요한을 그냥 인수인계하니까 뭔가 빠졌어요. 물세례 받고 성령세례 받아야 되는데, 그럼 물세례 안 받으면 성령세례 안 오냐? 이런 문제 때문에. 그리고 계속 착한 일을 안 하면 안 되느냐? 착한 일의 끝은 어디입니까? 무한이죠. 무한.
여기서 약간 어려운 것 들어갑니다. 인간의 존재라는 것은 ‘내가 있다.’ 그다음 문제, ‘어떻게 있는데?’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사는데?’ 물으면 세 번째가 나옵니다. 이건 광주강의 때 했는데요. 개인(個人)과 가산(可算), 계산. 산(算), 헤아린다, 셈한다. 무엇을 셈하는데? 착한 것은 카운트해서 불러들이고 악한 것은 카운트해서 제거하죠.
하루 일과를 정리할 때 ‘오늘은 착한 일 몇 가지? 세 가지. 나쁜 일은 몇 가지? 두 가지. 휴우, 3 빼기 2는 그래도 남는 장사.’ 카운트를 하는 거예요, 카운트를. 교회 늦게 왔다. 그러면 천 원 할 거를 천 원 한 장 더 보태서 이천 원 하죠. 내가 그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계산하는 거예요.
그럼 세례 요한처럼 산다는 말은, 현재 지금까지 내가 착한 일한 것과 앞으로 얼마나 더 착한 일해야 되는가? 지금 착한 일이냐, 나쁜 일이냐를 계속 계산하고 있겠죠. 계산하는 존재. 셈하는 존재. 이걸 ‘유한(有限)’이라 해요, 유한. 한계가 있는 존재. 유한이에요. 지금 제가 수학하고 있는 거예요. 유한은 무엇을 지향한다? 무엇을 바라본다? 무한을 지향한다.
지향할 때 여기서 끊어졌다, 안 끊어졌다? 안 끊어졌다. 왜? 카운트가 되니까. 1,2,3,4,…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양 백칠십두 마리 하고 잤잖아요. 그 다음날 백칠십세 마리,… 카운트가 되면서 어디에 접근해요? 무한으로 접근하는 것, 이거 마귀가 시킨 거예요, 마귀가. 이게 아주 자연스러워요.
그래서 지난 설교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처음에 그랬죠. “주님, 앞으로 잘할게요.”라고 했을 때 주께서의 답변은 뭡니까? “누구냐, 너?” 주님은 시간을 삭제해버려요. ‘앞으로’, 뭡니까? 여분이 남아있죠, 앞으로. ‘종말에는’ 주의할게요, 종말. 인간이 생각하는 종말은 뭡니까? 앞으로 남아있는 빈 시간을 이야기하죠. 아직까지 도달하지 않은 빈 시간이 종말이죠.
여기 교재 129페이지에 [다니엘 12장 13절을 읽어보면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구약적 표현으로 ‘마지막 때를 기다리라.’ 앞으로 종말 때가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종말 때가 되어도 소용없는 게, 종말 때에 진입을 하게 되면 우리가 평소에 종말 아닐 때 내가 나를 건사하고 지켜왔던 그 카운트하던 습성이 종말 때도 가동될까요, 안 될까요? 되죠. 주여, 종말을 대비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대표적인 것이, ‘도적같이 온다는데 그럼 깨어 있다가 몇 시부터 몇 시까지는 잠시 눈 부쳐도 되지 않겠습니까?’
마태복음 25장에서 지혜로운 여자가 등을 준비했죠. 등 준비했고요, 거기에 기름 만땅이었잖아요. 그게 시간이 없어진 거예요. 시간이 없어졌죠. 종말은 있는 시간 끝에 붙어있는 것이 아니고 시간이 있는 걸 없는 해석과 설명으로 심판하는 거예요! 덮쳐오는 거예요.
저주받은 문둥병자를 광야에 보낼 때 하나님의 자비로 심판받을 자에게 자비가 덮치면 분명히 문둥병으로 광야에서 홀로 죽어야 되는데 나중에 조사해보니까 다 나았어요. 이게 하나님의 자비라. 자비가 있기 때문에 다시 공동체에 합류할 때는 하나님의 희생 때문에 나았다고 희생, 자비에 대한 제사를 드리게 되어 있어요. 레위기 14장, 15장에 쭉 나와요.
주님께서 자비로 십자가에서 대속했다는 말은 뭡니까? 종말이 우리를 덮쳤다는 말이에요. 뭐로? 내가 대신 지불했다는 걸로. 하나님은 누구다? 심판주다. 심판주에게 심판이 끝난 지점이 있다는 거예요. 심판될까봐 벌벌 떨지 말고. 심판이 끝났어요. 심판이 끝났는데 끝나고 난 뒤에 심판의 합격통지서가 나한테 날아왔다면, 날아온 이것은 뭡니까? 내 시간에 주님의 심판이 끝난 이후에 종말의 시간이 나에게 덮친 순간이 되겠죠. 그것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
그 복음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1장을 봅시다. 잠깰 겸 다 같이 읽어봅시다. 1장 4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5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찌어다” 맨 마지막 단어 뭡니까? “아멘.”
‘아멘’은 어제 낮 설교에서 주님의 절차라 했죠. 주님의 노선. 끝난 노선. 다 완성하신 노선, 아멘. 그 노선에 우리가 놓여있을 때만 아멘이라고 영광과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어요. 끝났네요. ‘이미 우리는 죽었고 우리 생명은 하늘에 있다’는 주님의 노선에 있다는 이것이 늘 새록새록 끝났음을 확인할 뿐이죠. 끝났음을 확인할 뿐이에요.
여기에 ‘세대’라는 단어가 나와요. 세대는 모든 시간의 시작과 끝을 압축하게 되면 세대가 돼요. 어제 오후설교에서 후딱 이야기하고 후딱 끝난 문장이 하나 있어요. ‘패턴 뒤에 패턴’, 기억납니까? 하도 빨리 지나가서. 기억 안 나죠. 녹취 보면 나올 거예요. 패턴 뒤에 패턴.
세상에 얼룩무늬, 패턴들이 있잖아요. 패턴을 찾습니다. 인간들은 찾고 있는데, 패턴 뒤에 패턴은 뭐냐? 마지막 최종 패턴, 패턴 뒤에 패턴이라는 말은 확정된 패턴이거든요. 고정불변의 패턴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카운트할 필요가 없어요. 오히려 성도는 착한 일, 안 착한 일 선악체계를 카운트할 필요가 없고 뭐만 찾으면 되느냐? 확정된 패턴, 숨어있는 확정된 패턴을 내 인생을 통해서 얼룩덜룩한 무늬를 찾는 거예요.
물 위에 기름이 뜨면 기름은 고정적이지 않죠. 번지는 기름 무늬가 거의 1초도 안돼서 늘상 변하잖아요. ‘나는 이거다. 나는 이런 인간이다.’ 거기에 기름을 부어버리면, 그러니까 하늘의 패턴을 부어버리면 ‘나는 이렇다’가 성립되지 않아요. 그냥 성경대로 하면 패턴 뒤의 패턴 입장에서 ‘나는 그냥 죄인 중에 괴수다.’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그럼 ‘죄인 중에 괴수다’ 그것만 반복하면 됩니까? 일상생활을 살아야 될 게 아닙니까. 살게 되면 고린도후서 4장의 말씀처럼 ‘날마다 내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짊어짐은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가 살아있어서 벌이시는 패턴이 나오게 하려 하심이라.’
그게 어떻게 가능하다고요? 바람 같은 성령을 통해서 우겨쌈으로 성령을 뒤집어쓰면 우리는 하나의 얇은 비닐막 같은 패턴이 어른거리는 스크린처럼 그렇게 쓰여지는 거예요. 어디로 튈지 나도 몰라요.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어디로 튀든 그 책임이 나한텐 없어요.
영화 상영할 때 영사기에서 스크린 화면에 쏘잖아요. 그러면 화면에 이미지들이 어른거리면서 나타나잖아요. 그런데 그 영화 보면서 너무 성질났어. 세상에, 불쌍한 여자를 막 때리고 쫓아내고 남편이라는 작자가 그런 짓했어요. 그러니까 성질 난 어떤 사람이 칼 들고 스크린을 찢어버린 거예요. 이 바보 같은 짓을 누가 했느냐? 가룟 유다가 했어요. 그게 자살 아닙니까. 얼룩덜룩한 그림자일 뿐인데.
또 어떤 사람은 이런 사람 있어요. 둘이 고등학교 동창인데 하나는 대기업에 취직했어요. 하나는 대기업 취업자리가 너무 어려워서 중소기업을 갔는데, 그 대기업에서 보너스로 8억을 받았어요. 대기업에서 연봉 5천 받고 나는 중소기업에서 3천 받았다 이러면 친구를 죽일 마음이 없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뭐 SK에서 삼성에서 데모 비슷한 거 하다가 8억을 받았다니까 3천 받는 게 화딱지가 확 올라오는 거예요.
이것은 뭘 몰라서 그러는 것인가? 마지막 중요한 겁니다. 여기 인간이 있는데, 위에 태양이 있죠. 태양은 불변이죠. 태양이 그림자를 비춰요. 그림자를 비추면 아침 10시, 오후 12시, 오후 1시 그림자가 다 다르겠죠. 주님이 우리의 몸을 통해서 주님 자신의 패턴, 그림자를 비춰버리면, 어떤 사람은 대기업갈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중소기업갈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시집갈 수도 있고 안 갈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 있더란 말이죠.
같은 성령 받은 성도라면 ‘너는 키 큰 패턴이구나. 나는 키 작은 패턴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될 터인데, ‘너는 8억 보너스 받고, 나는 연봉 3천 받고.’ 그렇게 생각하면 될 터인데, ‘나 너하고 말 안 해. 너 만나면 왠지 짜증이 나.’ 그런데 그 대기업간 여자 친구가 대기업 SK가니까 남편은 또 의사를 만났네?
자기는? 가오가 있지. 가오 있어가지고, 안해. 결혼 안해. <나는 솔로> 세 번 나갔는데 다 “나는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끝내버렸어요. 가오가 있으니까. 남자 6~7명 나와가지고 처음에는 희망이 확 올라왔죠. 일곱 사람 중에 하나는 마음에 들겠지. 처음에는 그 중에 네 명이 마음에 들어, 첫 날에는. 두 번째 날 미팅 끝나고 난 뒤에는 두 명 남아. 그런데 다른 여자 참석자가 그걸 또 낚아챘어. 한 명은 해도 안 되지만, 처음에 부린 가오가 있어서 마지막 날에 이야기합니다. “선택하겠습니까?” “나는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끝났어요. 끝나고 난 뒤에 또 다시 온 솔로가 있어요. 안 된 사람 모아서 또 특집 방송하는 게 있어요. 그걸 또 넷플릭스에서 틀어줘요.
성령 받았다는 말은, 우리는 그냥 사용당하는 거예요. 키가 크니 뭐 결혼을 하니 안하니 남편이 누구니 연봉이 얼마니. 그냥 우리는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하거든요. 이걸 다른 고상한 말로 ‘우리는 다 유한한 존재다.’ 이 말입니다. 유한한 존재에요. 유한한 존재에게 종말의 영이 와버리면 분명히 나타난 것은 유한한 그림자인데 우리의 본 패턴은 무한에 속해요. 구원받은 자가 되는 거예요.
구원받았다는 근거를 대라. 갈라디아서 1장 4절. 시간이 얼마 흐르든 관계없어요. 수천 년이 흘러도 이미 통째를 하나의 세대로 간주해서 이 세대 앞에 뭐가 붙어요. 어떤 세대다? 악한 세대다. 악한 세대라는 것이 인간이 분석해서 악한 세대가 안 나타나요. 악한 세대는 어떤 사건을 통해 나타나는데, 그게 뭐냐? 최종 패턴 되신 확정된 예수님을 누가 죽였어요? 아까 처음에 얘기한 것처럼 인간의 사회체, 인간의 혈육공동체가 죽였어요. 왜? 의미가 안 통한다는 것 때문에.
인간 속에서는 믿음이 안 나와요. 자기 자신을 믿기 때문에 그 믿음 외에 다른 믿음은 없습니다. 그들이 죽였어요.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마지막에 여러분들이 답변할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간단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매달려야 합니까? 아니면, 우리가 주님께 매달려야 합니까? 어느 쪽입니까?
누가 귀한 분이고 누가 소중한 거예요? 지지난 낮 설교에 소중한 것, 소중하지 않은 것 이야기했잖아요. 누가 소중한 거예요? 주님이 소중하죠. 그러면 우리는 안 소중하죠.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드라빔이 강렬한지 주님을 어떤 식으로 길들였냐 하면 “나 삐칠 테니까 주님이 잡으려면 잡아봐라-!” 이런 식이라고요, 우리의 모든 일상이. 잡으려면 잡아봐라.
말씀이 있다면 내빼기 바빠요, 말씀 없는 곳으로. 그런데 억지로 말씀을 못 피하게 되면 못 피하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포획’이라고 해요, 포획. 포획당하면 우리가 주님 품에서 도망치려는 속셈을 교묘하게 숨기면서 ‘주여, 감사합니다. 이렇게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의상 이야기해버려요, 예의상.
그래서 어제 낮에 액자 하나 만들라 했죠? ‘주님, 나하고 무슨 상관있습니까?’ 이게 도주하는 거예요. 도주하는 것을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자기 백성이니까 덮쳐서 낚아채는 방법으로 끄집어내십니다. 그것조차도 희생이에요.
그게 누가복음 15장에 나와요. 아흔아홉 마리 양을 놔두고 한 마리 양을 찾아내시면서 주께서 어떻게 표현하시는 줄 알아요? 저가 회개했다는 거예요. 이게 말이 됩니까? 이게 말이 돼요? 주님께서 포획해놓고 그것을 “네가 회개했다.”고 해요. 회개.
아…. 그러니까 이미 용서받아놓고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죠. 회개하는 것도, 심지어 믿는 것도 다 주님의 홀로 하신 일이죠. 그러면 고린도전서 16장 22절,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에 종말을 집어넣으면, 이미 너는 사랑한 자로 사랑을 들고 우리를 포획하러 오시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6장 22절을 들고.
“여기에 네가 딱이야. 너는 여기서 딱이야. 이 말씀이 너한테는 딱이야.”하면서 찾아와서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맞습니다.” 사랑으로 낙점을 찍어버려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받는다는 사실을 아는 그것을 사랑의 열매로, 결과로 낙점 찍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주님 앞에 도망치면서도 도망치지 못하는 주의 말썽꾸러기인데, 그 ‘말썽꾸러기’를 약간 바꿔서 ‘말씀꾸러기’. 말장난이 좀 심하지만, 주님의 말씀꾸러기. 특징은 뭡니까? 도망치기. 수련회 오라고 해도 오지도 않고. 하여튼 인간들끼리 행복을 논하고 자기 가족끼리 놀러가는 것에 아주 최적화된 우리, 이 말썽꾸러기를, 하나님이 대신 희생하셔서 말씀으로 주께서는 우리를 십자가의 자랑거리로 삼으시는 이 은혜-. 마지막 때이기 때문에 세상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부지런하신 하나님. 그러나 세상적인 거기에 습성화되어있고 무장되어있고 우리 인간들끼리 노는 것이 더 즐거운 우리들.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여기에 이미 우리를 죽여놓고 살아있는 우리를 가지고 죽어있는 우리를 위해서 이미 값을 다 치렀다는 소식과 더불어서 우리를 사용해주시니 항상 이 은혜를 늘 생각하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