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성령의 공유성

아빠와 함께 2026. 6. 23. 12:17

대전-복음이냐 교회냐(10강) 엡2:21(성령의 공유성)20260622 (강의: 이근호 목사)


오늘 이 강의는 교재『복음이냐 교회냐』 125페이지부터 잠시 하고 120페이지로 돌아올게요. 125페이지 잠시 보겠습니다. 아래 문단입니다. [선지자 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선지자는 대신 죽으심과 희생의 면면을 보이면서 역사 속에서 하나, 둘씩 등장합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선지자들 자신은 절대 선지자 노릇을 원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들 자신은 절대 선지자 노릇을 원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이 왜 중요하냐 하면, 모든 일은 예수님 홀로 해야 돼요. 이것은 신앙의 철칙입니다, 신앙의 철칙.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그 믿음에 내 믿는 행위가 끼어들면 안돼요. 왜냐하면 마지막 때에 선지자가 성도거든요.

성도는 결코 본인이 원하는 인생길 가는 것을 주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내 뜻대로 되거든 자기 자신을 쥐어박아야 돼요. ‘주님, 저를 아주 버리시려고 작정을 했는지… 왜 내 뜻대로 됩니까? 이럴 수는 없습니다, 주님. 맛없는 수박을 원했건만 왜 이렇게 단 거예요, 이게? 제가 그렇게 미워요? 왜 제 소원대로 되게 하십니까?’

그다음에 [그리고 선지자의 모든 말이 다 계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 이거…선지자가 하는 모든 말이 다 계시가 되지 않는다는 무슨 뜻이냐 하면, 선지자가 그 시대에 계시를 이야기하면 듣는 사람들이 ‘앞으로 우리의 미래가 이렇구나. 이게 계시구나. 정치적으로 우리가 이렇게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는데, 이것이 잘못된 해석이거든요. 잘못된 해석이잖아요. 그런데 계시를 전하는 선지자 본인도 그 해석이 잘못된 해석인지를 몰라요.

인간 해석은 용납이 안 됩니다. 모든 고민과 걱정이 자기가 자기를 해석해서 나온 거예요. 본인이 해석 안하면 되는데 계속 해석을 하기 마련이에요, 계속. ‘인간이 어떤 해석을 한다’ 이것은 계시 해석일 수 있는데,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이 현실상 해석,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해석을 인간이 하는 거예요. 당연히 할 수밖에 없죠. 적응해서 밥 먹고 살아야 되니까 해석할 수밖에 없죠.

해석하고 난 뒤에 결론은 뭐냐? ‘이러면 난 곤란한데.’, ‘이러면 난 너무 기쁜데.’ 아니, ‘좋다, 기쁘다’를 누릴 자격이 우리한테 없어요. 없는데,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즐거워하는 겁니다. 이게 인간이 자기 해석을 하는 한계입니다. 주께서는 예언된 계시를 통해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기존에 인간들이 만들어낼 해석을 미리 아시고 그걸 끄집어내고 그걸 제거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예언은 진행됩니다.

그러니까 내 뜻대로 된다고 생각하는 그것도 해석이거든요. 되니까 기쁘잖아요. 기쁜 이것도 해석이에요. 기쁘니까 그 순간 뭐를 삭제 못시키느냐 하면 ‘주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게 삭제가 안 되는 거예요. ‘그냥 이대로 갑시다. 잘 됐습니다. 이걸로 갑시다. 주식 9000, 좋아! 9000 찍고 12000 갑시다!’ 뭐 이런 거. 뜻대로 되었으니까.

그래서 여기 125페이지 마지막에 보면 […선지자는 인간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것들만 이야기해요.] 그런데 이렇게 선지자가 이야기해놓고 선지자 본인도 이 오류에 빠져 있습니다. 따라서 125페이지에 나오는 구약 선지자와 이제 120페이지에서 설명할 신약의 선지자, 예언자들의 차이를 이 시간을 통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면 120페이지에 나오는 신약의 선지자로서 제가 예를 든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두 선지자 이야기입니다. 120페이지 중간에 나오죠. [요한계시록 11장에서는 이들을 ‘두 증인’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입니다. 요한계시록 그 구절은 항상 난해해요.

요한계시록의 성경 해석이 어려운 것은 ‘집약’ 때문입니다. 집약, 압축이 되어 있어요. 집약, 또는 다른 말로 하면 함축이 되어 있습니다. 함축, 집약. 뭉쳐져 있어요. 파리바게트 빵 중에서도 밀가루 층이 이루어져서 겹쳐져 있는 페스추리처럼 수술할 때 의사가 근육층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떼어내야 되잖아요. 요한계시록이 어려운 것은 한층 두층 조심스럽게 떼내야 돼요. 층이 층층이 있는데 이 층이 섞이지 않게 하나씩 떼어내야 된다고요.

이걸 떼낼 때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나와야 돼요. 왜냐하면 구약의 모든 성경구절을 예수님 자신의 사건으로 붙일 때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이것이 한 덩어리져 있기 때문에 이걸 떼내야 돼요.

그럼 원칙을 봅시다. 뭐가 나온다고요, 해석하면서? 죽으심이 나오죠. 누가 죽였습니까? 악마가 죽였죠. 그럼 해석이 됐죠. 요한계시록 해석은 무엇의 정체, 무엇의 실재를 드러낸다? 악마가 어떻게 활동하는가를 드러내는 거예요.

그 악마를 인간이 이겼어요, 못 이겨요? 못 이겼죠. 못 이겼으니까 인간들이 합치해서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그러면 지금은 악마가 한 것에 대해서 누가 나서느냐? 요한계시록 6장을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 1절을 보면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어린 양이 나오죠. 누구죠? 예수님이죠. 그다음에 ‘네 생물’, 천사들이죠. 사람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사람 안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 계셔서 일을 누구보고 시켜요? 천사보고 시켜요, 인간보고 시킵니까? 천사보고 시켜요. 왜? 인간은 뭐하는데? 인간은 마귀의 권세 아래 꼼짝 못하고 있어요. 꼼짝 못하고 있다고요. 그냥 당하기만 하는 거예요.

인간은 당하기만 하니까 인간, 성도에게는 아픔과 고통이 있겠죠. 당하기만 하니까 앞에서 시위하든지 데모하는 게 아니고, 호소를 하죠. 하나님보고 호소를 하게 되면 호소한 것이 향로에 담긴다 했죠. 아까 민수기 16장, 향로. 향로 엎어버리니까 지옥 불이 나오는 거예요, 지옥 불.

언어가 쏟아지면 두 가지 결과가 나와요. 하나는 뭐냐 하면 천국이 나오는 언어, ‘아멘’, 또는 ‘할렐루야’. ‘아멘’이라는 말은 잘하면 된다는 뜻이 아니고 ‘이미 되었다’는 거예요. ‘이미 진실합니다.’ “동의해?” 동의할 때 “아멘” 해요. 이미 되어진 것이 페스추리처럼 접혀진 것이 펼쳐지기만 하면 돼요. 펼쳐지지기만 하면 됩니다.

펼쳐지면서 뭐가 나와요? 계속해서 한 꺼풀씩 펼쳐질 때마다, 아멘, 또 아멘. 아멘. 주께서 계획 잡은 대로 빈틈없이 아멘. 진실로 그러합니다. 고린도후서 1장 같은 경우에 “…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19-20절) 그 고백과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웃고 울고 즐기고 할 때, 웃고 울고 즐기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이 주님의 접혀진 예언대로 펼쳐지는 결과일 뿐입니다. 좋다, 나쁘다의 가치에 대해서 우리가 논할 수 없지요.

언어에서 천국이 나오고, 또 하나의 언어에서는 뭐가 나오느냐 하면 지옥이 나옵니다. 천국에서는 찬양이 나오고, 지옥에서는 하나님을 향하여 아까 질문 형성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노골적인 반발이죠. 율법이 진리잖아요. 진리가 왔음에도 안 봐요. 과학이 진리로 대체되어버렸죠. 코로나 약이 진리로 대체되고.

일본하고 한국하고 월드컵 축구한다면 누가 이겨야 진리입니까? 일본이 한국을 4대 0으로 이기면 이게 진리입니까? 막 기분 좋아서 어쩔 줄 몰라가지고 ‘대~한민국’하면서 광란의 기쁨을 표현하겠습니까? 안하죠. 그러니까 인간은 이미 진리에 대해서 일방적 주장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을 제가 요새 잘 쓰는 말로 ‘개별자’라 하고, 선지자는 개별자 버리고 ‘공유자’로 등장합니다. 공유자. 뭘 공유하느냐? 요한일서 4장에 보면 성령님을 공유해요.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을 공유한다’ 같은 말입니다. 성령님을 공유해버리면 개별적인 기쁨과 즐거움보다도 더 위층에서, 더 총괄적인 층에서 어떤 일에도 감사하고 기뻐할 수밖에 없다는 그 점을 공유하는 것, 그게 바로 구약 선지자와는 다른 신약의 기름 부은 성도들에게 표출되는 성령의 일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뭡니까? ‘나밖에 모르는 개별자가 어떻게 공유자가 되느냐?’ 오늘 강의는 진도 이렇게 나가면 되는 거예요. 개별자가 아니고 공유되어 있다.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면 너무 어렵죠? 그러니까 더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끈’. 각 사람마다 뒤에 끈이 있다는 거예요.

만약에 남자, 여자 성도 다섯 명이 있다고 봅시다. 우리는 남자, 여자, 남자, 여자 이렇게 보지만,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공유된 끈이 있어요. 끈. 이번 수련회 교재 보신 적 있습니까? 여성에 대해서 언급한 게 있죠. 여성은 전체가 아니고 ‘비(非)전체’라는 말이 나와요.

[…남성이 의미의 전체를 대표한다고 주장한다면 여성은 비(非)전체에 해당한다. 그런 남성의 조건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남성이 의미를 잃을 때, 비로소 여성의 본래성이 드러난다.…] (2026 여름 수련회 <그리스도 안의 창세기> 교재 中)

‘교재에 굳이 이 말을 써야만 했었습니까?’ 할 수도 있는데, 비(非)전체라는 말을 굳이 해야 될 이유는 수련회에 나옵니다. 그 단어를 굳이 그렇게 써야 될 이유가 있어요. 누구 괴롭히려고 쓴 게 아닙니다. 그걸 안 씀으로써 자기 세계가 좁아지는 것이 철회되어야 돼요. 인간이 자꾸 자기 세계가 좁아지는 이유는, 개인이 이미 해석이 끝나버린, 해석이 끝나서 자신만만한 단어만 구사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도를 아십니까’도 그렇고 여호와의 증인들 특징이 그거잖아요. 자기 해석이 끝나버린 단어, 그것만 자신 있으니까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낼 수가 없는 거예요. 제가 보기엔 참 답답한 거예요.

용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직장 생활 속에서 자주 쓰는 용어가 툭툭 튀어나오기 마련입니다. 자기 직업이 뭔지, 직장이 뭔지. 그게 공유가 안 되잖아요. 자기 직업이 전공이니까 개별자로 머물게 되는데, 개별자로 머물면 안 되잖아요.

개별자에서 공유자로 교체되기 위해서는 성경에 나온 단어에 대해서 얇은 막으로 겹쳐진 빵처럼 겹쳐진 그것을 풀어내는 가운데서 그 의미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악마의 설침을 같이 경유하면서 새롭게 단어가 이해되어야 돼요. 그러면 악마가 설쳐댔을 때 나오는 단어가 지금 이 세상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단어에요.

하나의 예를 들면 어려운 교재도 풀릴 거예요, 지금 제가 설명하게 되면. 특별히 여러분에게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린 아이가 자기밖에 모른다.’ 맞는 말이죠. 어린 아이는 자기밖에 몰라요, 어른도 마찬가지지만. 자기밖에 모르는데 그 애가 커가면서 엄마, 아빠한테 뭔가 자꾸 사 달라 해요. 그 행위는 자기밖에 모르는 행위에요.

그런데 뭘 사 달라고 할 때, 그 항목, 리스트에 해당되는 단어 있잖아요, 그 단어는 어디서 배웠느냐? 그거 어디서 갖고 온 거예요? ‘이거 사줘, 저거 사줘’할 때, 티니핑- 무슨핑 할 때, 그 단어를 어디서 가져왔느냐? 이미 공유되어 있어요. 인간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통용되는 단어에서 개별자로서 용납이 안돼요.

만약에 거기서 단어 몰라서 친구 간에 무슨 단어냐 물으면 안 놀아줘요. 안 놀아주면 탈락이죠. 탈락이면 이미 그 사람은 주체가 성립 안 되기 때문에 이상 자아, 자기는 뭐 되고 싶은 게 있는데 무엇이 방해받아요? 자아 이상이 안돼요. 나 저거 되고 싶은데 친구들이 막아서버려요. 그럴 때는 자연인 되든지 집구석에 박혀 있든지. 밖에 나갈 수 없는 거예요.

공무원 시험 네 번 떨어지고 그다음부터는 집 밖에 안 나와요. 그냥 자체적으로 감옥 생활하면서 엄마가 방문 밑으로 밥만 집어넣어주죠. 왜 자기 폐쇄, 자폐증의 증세를 보이느냐?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묻지요. 사랑이 뭔데? 내가 갖고 있는 내 마음에 아무도 동조를 안 해주니까 공유가 안돼요.

그렇다면 네가 갖고 싶다고 한 단어가 어디 있냐? 현재 떠돌아다니는 저것을 함께 갖고 있으면 쟤들이 나를 친구로 받아줘요. 그러면 나의 공유가 확장되면서 내 세계가 넓혀지면서 내가 되고 싶은 목표가 생겨버리죠. ‘I have a dream~’ 내가 꿈을 꿀 수 있는, 숨 쉴 만한 공간이 형성된 거예요. 나 저거 될래.

촌에 있는 아버지가 “야, 너 그렇게 방황하지 말고 내가 하던 일 받아라.” 자식이, “아버지, 그런 소리하지 마세요. 아버지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알아서 독립할게요.” “얘, 와서 묵이나 갈아라.” “아닙니다. 나는 세공해야 되고, 내가 요식업을 했기 때문에 요식업을 해서 성공하고 싶습니다. 7년 동안 하고 싶습니다.” 오늘부터 시작한 <인간극장>이에요. “촌에 와서, 충청도 공주에서 묵 갈아라.”

세상 분석하는 거 쉽죠? 무지무지 쉬워요. 기존에 날아다니는 가운데서 자기 어릴 때 자기가 꿈꾸던 꿈이 있으면 그걸 낚아채서 그 노선으로 가면 되는 거예요. 너 정창래 노선이야? 이재명 노선이야? 이런 거 있잖아요. 문재인 노선이야? 이런 거. 그거 한다고 청춘 다 보내요. 세월 다 보낸다고요.

자기 증인이죠. 자기 개별자죠.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이 문제가 비현실이 아니에요. 너무나 철저하게 현실적이에요. 내 세계가 너무 좁다보니까. 한번 적어볼게요. ‘자꾸만 내 세계, 세상이 좁아져요.’ 같은 말, ‘자꾸만 내가 구사하는 용어가 한정적이에요.’ 여기에 대표적인 사람을 대라면 이게 바로 전도하는 사람들이에요.

전도하는 사람들의 단어가 어디서 나옵니까? 성경에서 나오죠. 해석해보세요. 다른 성경구절로 설명하죠. 그럼 구사하는 단어가 어때요? 폐쇄적이죠. 성경에 나오는 단어들만 구사해요. 신학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에요. 목사도 마찬가지에요. 자꾸 교인들과 목사들 자기끼리 아는 단어들만 주고받아요. ‘I have a dream~’ 이런 거 몰라요. 하여튼 그런 건 세속적인 거예요. 거룩한 것은 성경에만 나와요. 그게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했던 거예요. 사실 그들은 성경 말씀보다도 로마 권력에 더 치중했지만, 일반 교인들은 무식해서 오직 말씀만 생각하는 사람인 줄로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꾸 자기 생각이 좁아지죠. 좁아지면 그 후유증이 뭐냐? 갈수록 철저한 자기 방어가 돼요. 자기 방어가 되니까 압력이 바깥에서 자기를 더 압축하죠. 그럼 어떻게 돼요? 찌그러지겠죠. 찌그러지니까 점점 더 자기가 자기 정당화를 위해서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고 도망하는 데에 거기에 신경을 쓰는 겁니다.

그것이 어제 낮 설교에서 A4용지(벽)에 사람 모양을 만들어서 한 이유에요. 결국 막다른 길에 뭐가 나옵니까? 철저하게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 육이죠. 자기 의가 나오죠.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그 나라 의를 구하라”.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 그 나라 의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 한번 봅시다. 여기에 어린 양이 계시고 천사가 네 명 나옵니다. 네 존재가 나오죠. 6장 8절,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땅의 짐승들을 죽이는 거예요. 이것이 네 번째 말, 청황색 말이 나오는 겁니다.

자, 눈에 보입니까, 지금? 천사가 눈에 안 보이죠. 눈에 안 보이는데 희한하게 천사가 설쳐대서 남긴 결과, 이 현실을 우리가 알아요, 몰라요? 알죠. 전염병이잖아요. 전염병. ‘검과 흉년과 사망’, 전염병이죠. 그리고 우리는 모르는데 ‘땅의 짐승’, 악마가 설쳐대고 악마의 졸개들이 설쳐대는 그것들. 이렇게 되면 개별자로서 자폐적인, 자기의 세계가 전부라고 아는 그 바깥에 지금 누구하고 누가 싸워요? 악마와 천사와 마지막 결전이 된통으로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악마 때문에 인간들은 자기 세계에 그냥 파묻혀 있는 거예요. 자기 세계에 푹 파묻혀 있는 거예요. 그 세계밖에 몰라요.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를 봅시다. 분명히 자기가 원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욕망으로서 돈 있으면 살 수 있는 것들이 날아다니죠. 자, 돈 있어서 샀습니다. 사서 어디로 가져와요? 그걸 공유합니까, 자기만 즐깁니까? 자기만 즐기죠. 가족이고 뭐고 간에 갈수록 자기밖에 몰라요, 이 자본주의가.

제가 어느 강의에선가 글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여자는 아기를 낳을 수 있으나 어머니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 그러느냐 하면 여자는 아기를 낳을 수는 있으나, 어머니라 하는 것은 엄마의 body, 몸이 있잖아요. 인간의 몸은 개별자, 자아를 부여받기 때문에 내 생각이 자식한테 전달 안 됩니다. 이게 몸의 한계에요. 육의 한계에요.

그래서 자식한테 잘해준다, 잘해준다 백날 해도 자식은 엄마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자식의 body는 따로 놀기 때문에 엄마를 이용할 뿐이지. 엄마가 사랑한다, 사랑한다 해도 엄마의 사랑이 주님의 사랑을 대신할 수가 없거든요. 엄마의 사랑이 욕심일 수 있잖아요.

예를 들어서 엄마가 바깥에 나가 노동해서 돈을 벌잖아요. 돈을 벌 때 그 돈을 어디다 허비하느냐? 가정이라는 환상, 가족을 위해서 바깥에서 어떤 수모와 욕설을 듣더라도 인내하면서요, 내 자식만 잘된다면 이까짓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다 해서 그야말로 옛날에 반티 장사해서 돈벌어가지고 자식 대학 보내려고 다 했단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육과 육 사이에는 전달이 안돼요. 전달이 안 되는데, 엄마는 내 몸이 부서지더라도 내 몸 위주가 아니고 자식만 잘된다면 되겠다 하죠. 인간의 몸은 그래서 부서지긴 부서지는데, 부서진 그것이 자식에게 효과 있습니까, 없어요? 어머니는 어떻게 됩니까? 불가능해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 26절에 우리 어머니는 누구입니까? 하늘의 예루살렘밖에 없어요. 예루살렘은 공유자니까. 개별자가 아니고, 공유에요. 그게 이 땅에 성령을 통해서 온 거예요.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요한계시록은 조금 이따 보고요. 요한일서 4장 보겠습니다. 4장 11절,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면 사랑을 어느 정도 해야 되는가? 요한일서 3장 16절,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성도의 존재 이유가 사랑 따라서 형제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으로, 이미 이 땅의 성도로서 목적이 하나로 확정되어버렸어요. 아까 끈이라 했죠, 끈. 성도끼리 만날 때 끈을 보잖아요. 그 사람 보면 그냥 육으로 보고 마는 건데 그것은 불신자들이 하는 거고, 성령 받은 사람은 ‘뒤로 돌아봐요, 뭐가 있는지? 어? 성령의 끈이 있네!’

주님과의 연결점이 있으면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이 공유되고, 서로가 서로를 위해 목숨 못 바쳐서 환장한 집단이 되어버린 거예요. 그런데 이것을 우리보고 하라 하면 우리는 일체 못합니다. 못하고, 또 해서도 안돼요. 왜냐하면 요한일서 1장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거든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하나님이 거짓말하는 자가 아니고 하나님은 진실한 분이죠. 하나님이 진실한 분이라면 누가 거짓말쟁이가 돼요? 우리가 거짓말쟁이가 되어야 된다는 그 논리란 말이죠. 우리가 거짓말쟁이가 되어야 된다는 그 논리에 의하면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했다는 것이 천하의 거짓말이다 이거에요. 그러니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범죄한 자에요. 범죄한 자인데, 우리가 우리를 해석할 때 내가 항상 범죄했다는 것을 못 받아들여요. 우리는 개별자로 놀기 때문에.

주께서 지금 바쁩니다. 개별자밖에 모르는 인간을 천국의 공유자로 바꾸는 그 방법을 주께서 실시한다고 애를 먹어요. 지금 카메라 안돼서 애를 먹는 게 아닙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고, 이게 공유가 안돼서 그래요. 공유하는 것이 뭐냐 하면 에베소서 2장 21-22절, 성전이 지어져간다는 거예요. 처소가 지어져간다. 어디 안에서? 성령 안에서.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성령 안에서 처소가 지어져간다 할 때 뭐가 빠져나가느냐 하면 ‘나는 육이다’가 빠져나가 버려요. 육을 육이 다루면 안돼요. 육을 성령이 다루어버리면, 육은 하나의 성전 벽돌로 성령께서 다루시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보다 먼저 자신의 육체가 돌로 다루어졌던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에요.

베드로전서와 시편 118편 22절에 보게 되면, 예수님을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했죠. 그러면 건축자들이 뭐하는 사람들입니까? 뭘 건축하겠다는 말이에요? 성전 짓는 자들이죠. 성전을 짓는데, 그들은 성전을 지으면서 자기가 육이라는 걸 모르죠.

육이면서도 육인 줄 모르는 그런 엉터리 해석을 하면서 성경에 있는 성전을 지어나가겠다는 자들에 의해서 누가 필연적으로 탈락이 되었어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쓸모없다고 탈락된 거예요. 쓸모없다고. 육과 육이 모여서 성전을 짓는 데에 쓸모없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탈락된 자가 탈락되어서 버려진 돌로 그냥 있는 게 아니고, 거기서부터 성전의 건축이 시작되는 겁니다.

집 짓는 시뮬레이션 보면, 건물 기초공사부터 해서 완공까지 진행과정을 빠르게 보여주는 동영상 같은 것이 올라오잖아요, AI로. 주께서 자기가 계실 곳인 성전을 자기가 그렇게 지어버리는 겁니다.

출애굽기 3장 한번 볼까요? 출애굽기 3장 12절에 하나님께서 모세하고 단독으로 만납니다. 모세가 하나님 만날 때, 모세는 어떤 입장이냐 하면 자기 동포 히브리인들을 괴롭히는 애굽인을 쳐 죽이고, 그때가 나이 사십인데 도망치듯이 나와서 팔십 대까지 양치고 있었던 거예요. 양치는 그 근처 모리아 산에 떨기나무가 있었는데 떨기나무에 불이 붙으면서 주와 대화하는 그 장면입니다.

그 장면에서 모세가 애굽으로 가고 싶어하지 않았어요. 하나님에 의해 모세가 강제로 애굽으로 갑니다. 그럼 모세가 뭐가 되느냐? 이런 선지자가 없다는 평을 민수기에서 들어요. “내가 선지자 하나를 뽑아서 너희들에게 파견시켰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자, 단독으로 개별자로 하나님과 모세가 만났는데, 가서 하는 일을 보니까 공유해야 될 백성들이 있었어요. 그들이 하는 일이 뭐냐? 11절,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여기서 누가 가요? 모세가 가죠. 그러나 사실은 모세가 애굽으로 가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 땅에 오신 것에 대해 미리 앞당겨 보여준 하나의 sign(신호)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단독이지만, 와서는 공유자를 만드는 거예요. 집단을 만드는 거예요.

따라서, 성도이십니까? 구원받았습니까? 그러면 더 이상 내 속에서 개별자적 해석은 용납이 안 되고, 공유적 해석-예수님이 모든 율법을 다 이루었던 그것을 같이 나누어 누리는 공유적 해석이 끈을 통해서 전달돼요. 성령 받은 성도를 통해서 끈을 통해 전달된단 말이죠.

그렇다면 아까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에 대한 이 해석, 요한일서 3장 16절에 대한 해석이 두 가지 나올 수 있죠. 개별자인 내가 하느냐, 공유자에 포함된 내가 하느냐가 있겠죠.

공유자인 내가 해버리면, 내가 하고 싶어도 못하고 주께서 그 일이 일어나도록 해주십니다. 그럼 ‘나는 목숨 바쳐서 사랑했습니다.’라는 해석이 우리 입에서 나오면 안돼요. 왜냐하면 나는 못하니까. 그런데 받은 쪽에서 해요. “야, 세상에, 내가 목숨도 안 아끼고 나를 사랑했구나.” 그때 뭐라고 합니까? “언제? 내가 미쳤어? 왜 내가 너한테 해줘?” “저런, 겸손 봐라.”

“이게 겸손이 아니야. 진짜 나는 몰라! 네가 목마를 때 마실 걸 주었고 네가 배고플 때 먹을 것 주었고, 그것은 나하고 전혀 상관없어. 나는 나 챙기기만도 바빠, 지금.” 이렇게 나오면 주께서 뭐라고 합니까? “그래, 너는 지옥가라.” 합니까, 어떻게 합니까? “먼저 된 자가 역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구나.”

나는 그게 아닌데. “오후 5시에 일 시작해서 6시, 한 시간 만에 퇴근했는데 왜 하루 품삯을 나한테 주십니까?” 그러니까 다른 친구들이 “저 겸손 떠는 것 봐. 겸손 떨어서 천당 가려고…” 그게 아닌데! 바로 받은 쪽에서 고백함으로써 그게 나의 개별성을 작살냅니다. 나의 개별성을.

엄마가 자식한테 고생고생해서 다 해주는데 자식은 그걸 알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식이 눈물 흘리면서 “내가 이제 압니다. 엄마가 평생 동안 나 위해서 고생하고, 엄마는 원피스 하나 못 사 입고 예쁜 옷도 못 입고 살아온 걸 이제 압니다.” 물론 그렇게 이야기만 하면 안 되고 옆에 수표 있잖아요, 두둑하게 봉투에 넣어서 이렇게 해야 격식이 맞아요. 그냥 입 싹 닦고 수박 한 덩이 들고 오지 말고. 현찰 넣어서, 안 그러면 아파트 하나 해주든지.

어쨌든 간에 자식이 이렇게 나올 때, 부모 마음은 뭐냐? ‘보람이 있다’ 이렇게 나옵니까? 그건 육이에요. “정말 이것은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할 때 감격하죠. 자식이 전도되기를 아예 기대하지 마세요. 그것은 개별적인 나의 해석입니다.

자, 이제 요한계시록이 풀릴 거예요. 일은 누가 합니까? 천사가 해요. 일은 천사가 합니다. 전염병이든 뭐든 천사가 AI 같아요. 아무 감정도 없이 그냥 일해요. 주께서 시킨 대로 일하는데 현실 꼬라지는 전염병 퍼지고 서로 죽이고 난리도 아니죠.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 인간이 등장하는 대목이 있어요. 요한계시록 11장. 그것 때문에 125페이지를 언급한 거예요. 11장 3절,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개별자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다루어지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가 고생해야 될 근무시간까지 누가 정해요? 이것은 본인이 못 정합니다. 주 52시간 이런 거 없어요. 그냥 존재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계시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 결국 이 한마디로 함축이 돼요. 요한계시록 해석에서 ‘성도=□’, 네모에 뭐가 들어갑니까? ‘천사’다. 다른 말로 하면, ‘기계’다. ‘성도=천사(또는 기계)’. 울고불고 기쁘다, 좋다, 나는 내 뜻대로 했다, 일체 이런 소리가 안 나오죠.

AI 전문가들이 늘 이야기해요. 제발 AI하고 대화할 때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소리하지 말라고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하고 기계보고 쓸데없는 소리하면 누가 손해 보느냐? AI를 굴리는 그 회사에 전기가 더 소모된다는 거예요. 전기 값만 더 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계처럼 다뤄야지, 인간처럼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봅시다.’ 이런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 기계가 누구냐 하면 성도입니다. 성도가 하지도 않았는데 성도보고 ‘고맙다, 감사하다’ 하면 안돼요. 성도는 끈이 있어요. 누구보고 감사해야 돼요? 공유된 자, 누구입니까? 성령을 기름 부은 자, 같은 성전 안에서 같이 성전이 성전 되기 위해서 가동되는 그 시스템 안에서 자기는 그냥 주께서 주신 상황 따라서 끈의 본성대로, 계시가 흘러나오는 본성대로 움직였을 뿐인데, 남들은 뭐 난리도 아니죠.

“어째서 한 골 넣었습니까, 체코전에서?” “공이 그냥 날아왔네요.” 이뿐이죠. “손흥민은 왜 한 골도 못 넣었습니까?” “공이 안 날아오니까 못 넣었죠.”

이럴 때 나의 해석에서 벗어나고 개별자에서 벗어나요. 자기 좁은 세계에서 벗어납니다. 공유된 세계에 일은 주님이 하고, 천사보고 시킨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1장에서 사도 요한이 활동합니까, 밧모섬에 귀양 갔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귀양 가 있잖아요. 아무것도 못해요. 아무것도 못하는데 현실은 잘 돌아갑니다. 참 잘 돌아가요.

이것을 기본 해석으로 보고 11장 해석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세요. 11장 4절에,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죠. 두 촛대가 뭐로 바뀌었다? 두 증인으로 바뀐 겁니다. 촛대라 할 때, 요한계시록 1장에서 촛대는 누굴 이야기합니까? 촛대는 예수님과 함께 공유되어 있는 그 성전 앞에 있고, 주님은 그 촛대 사이를 돌아다니죠.

그 촛대 가지가 몇 개에요? 일곱 개. 그러니까 전체 교회는 몇 개? 일곱 개. 여섯 교회는 안돼요. 다섯 교회는 안 됩니다. 일곱 교회가 있어야 돌아다님이 완성이 되니까요. 그러니까 손가락 여섯 개, 발가락 여섯 개 이게 괴물이에요.(삼하 21: 20, 대상 20:6) 24개 하면 안 됩니다. 다섯 개씩 20개 되어야지, 24개 있으면 안돼요.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은 괴물입니다.

여기서 5절에 보면 5절 말씀이 뒤에 말씀과 안 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5절이 뭐냐?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찌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했잖아요. 그런데 이래놓고 죽기는 누가 죽었어요? 이 대목을 보면 두 증인이 안 죽죠. 멀쩡하죠. 그런데 그 뒤에 보면 누가 죽어요? 두 증인이 죽어요.

죽었는데 그 죽음이 생명이에요! 죽었는데, 개별자 인간이 개별자 두 증인을 죽였는데,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두 증인은 공유된 생명 안에서 공유된 것으로 살았다’는 티를 낸 것이 되고 죽였던 그들은 공유된 생명에서 이미 벗어나 있기 때문에 살아도 죽은 것이라는, 생명과 죽음의 두 개념을 두 증인을 통해서 밝히 확정시켜 주는 그 기능에 두 증인이 동원된 거예요. 이게 말씀이에요.

네가 산다는 것과 내가 산다는 것의 의미가 다르고, 네가 죽었다는 의미와 내가 죽었다는 의미가 다른 거예요. 49제한다고 돈까지 갖다 바치는데, 그들이 말하는 공유된 죽음은 뭡니까? 그쪽 세계에 공유된 죽음은 자아 이상, 자기 잘남을 유지하는데 통용되는 개념을 그들은 뽑아서 ‘나 너하고 같은 한 편이니까 놀아줘.’ 하는 거예요.

엄마도 못하면서 엄마 되기 위해서 그 엄마는 자식의 존재가 필요했고, 자식의 존재로 말미암아 자기의 노동의 대가가 사랑이라는 보상으로 넉넉하게 자기 세계를 구성한 거예요. ‘거봐. 내 자식 잘 키워놓은 것 봐라. 내가 고생한 걸 알잖아. 아, 난 너 볼 때마다 보람을 느껴. 보람을 느낀다고.’

보람을 느껴봐야 자식이 잠을 재워줍니까. 자식이 잠 안 재워주고 새로운 이불이 잠재워주는데. 새 이불이 보람이죠. 그런 분이 있어요. 새 이불 덮고 잘 잔다는 분 있어요. 결국은 이불 덮을 때마다 “자식 아무 소용없다.” 이 말을 하는데, 그 말 하자마자 자식이 새 이불 들고 왔을 때 “역시 자식은 잘 키워보면 다 대가가 오게 되어 있어.” 이런다고요.

모든 해석이 누구 해석이에요? 개별자 나의 세계를 자기 기쁨으로 채우기 위한 자기 해석이잖아요. 우리에게 육이 있다는 걸 참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 점에 대한 해답이 로마서 14장 11절에 나와요.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게 공유 아닙니까, 이게 공유! 이게 공유거든요, 로마서 14장 11절. 10절이 뭐냐? 같은 형제끼리 비방하지 말라는 거예요.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우리는 뒤에 끈이 있다는 거예요, 공유된 끈이. 주께서 그렇게 다루는 거예요.

이것에 대해서 더 분명한, 여러분이 잘 아는 대목을 봅시다. 빌립보서 2장 10절. 보면 아, 그 말씀이구나 생각날 거예요. 10절, 11절,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공유죠. 따라서 이 말씀은 끈이 있는 사람에게만 무슨 뜻인지 의미가 납득되죠. 그렇다면 제가 두 번째 시간 처음에 이야기했던 것- 개인적으로 울고 웃고 승리했다, 이겼다, 졌다, 절망한다, 낙담한다, 아니야 난 안 돼, 인간 안 돼, 패배감 이것이 주님의 이루심 앞에서 그게 무슨 의미 있습니까? 의미 없죠. 따져 보니까 좋다, 나쁘다, 나는 가치 있어, 가치 없어 하는 이 모든 게 너무 개별적 의식이었던 겁니다. 내가 나를 항상 잘못된 방법으로 해석해온 겁니다.

요한계시록 마저 하고 마치겠습니다. 11장 아까 그 문제. 분명히 죽는 것은 선지자를 죽인 쪽이 죽어야 되는데 그다음 보면… 처음에 6절에 잘 나왔어요.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엘리야 이야기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전부다 겁냈는데, 밑에서 올라오는 적이 있죠. 짐승이 올라와서 어떻게 했어요? 7절에, 두 증인을 이겼어요. 그리고 이기는 데서 끝난 게 아니라 저희를 죽였어요.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그다음에 8절에 보니까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그러니까 소돔, 애굽 다 알죠. ‘소돔, 애굽’ 구약에 박혀있는 개념, 이스라엘 개별자에 박혀있는 개념을 뽑아서 마지막 최후에 온 우주의 개념으로 공유화시켜버리는 거예요.

무엇이 소돔이냐, 무엇이 애굽이냐? 동시에, 무엇이 십자가냐? 십자가 달린 분 예수님은 개별자인데 그 개별자가 마지막 때에 주님의 천사와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가 개별자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 택한 백성한테는 공유적 십자가로 나타나시는 거예요. 두 증인을 앞장세워서. 이 세상이 아직 남아있는 일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들이 외치게 하는 거예요.

소돔과 고모라, 특정 지역이 아니고 현재 이 아~ 대한민국이 소돔과 고모라에요. 지금 월드컵 한다고 바빠요. 월드컵 하면 그냥 하는 줄 알아요? 기도 막 해요. 주여, 대한민국 32강 올라가게 해주시옵소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데 박힐 때 그들이 몇일 동안 목도하는가?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했습니다.

그리고 두 선지자가 땅을 얼마나 괴롭게 했는지 땅에 거하는 자들이 서로 선물을 보내고 자축하고 있죠. 10절,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그런데 삼일 반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11절, 저희들이 죽었어요, 살았어요? 생기가 들어가니까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12절에 “구름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고 말았어요.

전체 역사가 성도의 공유적 행위 안에 아까 얘기한 것처럼 압축이 되어 있죠. 딱 압축이 된 거예요. 압축이 되면서 천사의 일을 하고 그게 한 꺼풀 벗겨지니까 이미 시작하고 마감이 된 인류의 역사가 그들 안에서 역사를 움직이는 중심핵이 두 명의 성도를 통해서 전부다 공개되고요. 그다음 13절에, 멸망하고 말았더라.

세상에, 두 명의 선지자가 사태를 정상으로 돌리니까 그다음에 세상은 모든 걸 알게 되었다. 야,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욕하고 예수님께 대드는 지옥이구나. 지옥은 불 받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지옥이라 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단어와 의미를 서로 힘을 합쳐서 그걸 공유하면서 살아보겠다고 애쓰는 그 공간, 그게 바로 지옥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안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그것을 한꺼번에 알게 하옵소서. 때로는 웃고, 때로는 울고, 때로는 좋아들하고, 때로는 낙망하고, 절망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무서워하지만, 그것조차도 주께서 성령의 끈을 통해서 주님을 드러내는 기계로 다루어지는 주의 일인 것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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