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성령의 공유성

아빠와 함께 2026. 6. 23. 13:39

대전-복음이냐 교회냐(10강 전반부) 엡2:21(성령의 공유성) 20260622 (강의: 이근호 목사)


『복음이냐 교회냐』전반부 강의를 새로 하겠습니다. 전반부 강의 파일이 파손되었기 때문에 우리교회에서 다시 하겠습니다. 두 번째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강의 교재 『복음이냐 교회냐』이 교재 120페이지부터 해야 되는데 125페이지부터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 밑에 이런 말씀 나오죠. [선지자 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선지자는 대신 죽으심과 희생의 면면을 보이면서 역사 속에서 하나, 둘씩 등장합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선지자들 자신은 절대 선지자 노릇을 원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 아무리 선지자가 고생을 하고 노력을 해도 예수님께서 홀로 하신 그 일에 본인들이 끼어들면 안 됩니다. 이것이 신앙의 철칙이고 원칙이고요.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 하는 그 믿음 속에도 이 철칙이 계속 유지되어야 되고 지속되어야 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자신들이 원해서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은, 주님께서 선지자 인생을 일방적으로 만들어나갔다는 말이 되거든요. 그것은 오늘날 우리 성도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성도나 선지자들도 그들이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이끌림을 받을 때, 자기 뜻대로 원대로 할 수 없잖아요. 열두 제자가 그 대표적인 예인데요. 만약에 자기 뜻대로 된다, 이것은 뭐 문제 있는 거죠.

오늘날 성도도 자기의 뜻대로 뭔가 된다면 자기를 쥐어박아야 돼요. 쉽게 말해서 ‘주님, 저를 아주 버리시려고 작정을 했는지. 왜 내 뜻대로 되는 겁니까? 주여, 이럴 수는 없습니다.’ 아까 우리 집사님이 수박 사왔잖아요. 수박 사왔는데 수박 깨보니까 맛있어요. 그러면 이렇게 되겠죠. ‘주님, 저는 맛없는 수박을 원했는데, 왜 이렇게 수박이 단 거예요? 왜 제 소원대로 안 되는 겁니까?’하고 자기를 쥐어박아야 되는 겁니다.

사실은 선지자들이 지냈던 시대에 정치적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 예언이 주어졌습니다. 정치적 상황이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뭐냐 하면 ‘하나님의 예언적인 선지자 일을 하면서도 내 목숨은 목숨대로 따로 거뜬하게 부지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물론 선지자나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근원적으로 갖고 있던 우리 뜻이잖아요.

그런데 그 뜻대로 안 해주는 겁니다. 왜냐? 예수 그리스도만 예언대로 실시해야 되기 때문에 어림도 없죠. 우리 자신이 우리의 뜻이 있다는 것은… 주님 홀로 하시는 일에 결국 신약 시대에서 십자가 사건을 밑에 깔고 보세요. 그러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쪽으로 주께서 홀로 일하신다는 그러한 결론에 도달됩니다.

그래서 125페이지 제일 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선지자는 인간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것들만 이야기해요.] 그 뒤에 이어서 보면 [‘나라 돌아가는 꼴을 보니까 곧 망하겠다.’ 이런 소리는 선지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들이 하는 거예요.]

나라가 망하든 나라가 잘되든, 오직 선지자 입장은 내가 성취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세상 돌아가는 모든 말씀과 미래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주신 겁니다. 따라서 정치가 잘되든 못되든 그것에 따라서 물론 해석은 낼 수 있는데, 그 해석이 선지자 본인의 그 시대에 한계 된 해석이죠.

그래서 선지자의 예언의 해석은 미래로 지연되어서, 예수님께서 미리 선지자에게 주었던 예언이 예수님께 어떻게 달성되는가? 그 점은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 사건으로서 모든 것을 다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자기 의견이 있고 자기 해석이 있더라도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한 대로 ‘주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그것을 선지자들은 미리 그 시대에 실습하게 되는 거예요.

선지자들이 자기 의견을 내세울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선지자가 메시아는 아니잖아요. 메시아는 나중에 있고, 그 메시아가 홀로 이룰 일에 대해서 선지자에게 미리 앞당겨준 거예요. 따라서 선지자의 자기 해석, 그리고 선지자의 예언을 듣는 인간들의 자기 해석, 오늘날 식으로 한다면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든 간에 그 말씀을 받고 있는 오늘날 우리 성도가 나름대로의 자기 해석을 내리기 마련입니다.

그 자기 해석이 결국 주님의 홀로 이루었던 그 주님 해석에 어떤 식으로도 방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차이, 그 차이를 항상 발생시키면서 ‘예수님 홀로 다 이루었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모세가 예수님과 같이 대화하죠. 두 명의 선지자와 그리고 그 선지자가 이야기했던 예언의 성취자가 한 자리에서 대화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모세와 엘리야는 알아요. 우리의 모든 예언은 예수님의 별세하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누가복음 9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자, 그렇게 125페이지에 나오는 선지자 이야기를 보고 난 뒤에 다시 120페이지로 돌아가 봅시다. 120페이지 중간 즈음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11장에서는 이들을 ‘두 증인’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위에 줄에 [이 종들이 미움 받고 죽는 현장이 애굽이고 소돔이며, 그것이 바로 십자가가 있는 현장입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11장에 그 대목이 나와 있어요.

11장 9절에 보면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렇게 되어 있고, 그러한 사건 앞에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어디가요? 소돔이고 애굽이고. (8절,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그럼 소돔과 애굽은 뭐냐? 두 증인이 예언대로 외치다가 죽었던 그곳이 소돔이 되고 애굽이 되고 십자가 못 박히신 곳이 되고.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구약의 소돔이라는 특정 지역, 애굽이라는 특정 나라가 우리가 해석할 수 있는 한계 내에 그 해석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들 해석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죠. 진짜 인간들의 해석과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고 난 뒤에 주어진 그 해석의 차이, 그 차이를 아는 자가 바로 이 시대의 선지자요, 성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자, 요한계시록 11장을 방금 제가 잠시 언급했는데,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해석이 상당히 어려워요, 이런 점에서. 항상 말씀보고 우리 해석을 하는데, 그 해석과 주님의 홀로 이루었던 해석과의 격차가 있거든요. 그 격차를 우리 쪽에서 인위적으로 줄일 수는 없어요. 차이는 있는데 그 격차를 건너갈 수는 없다 이 말이죠.

그 이유가 요한계시록에 어떤 집약 같은 게 있기 때문이에요. 파리바게트에 팔고 있는 빵 중에서 페스추리처럼 겹겹이 얇은 빵 층이 있는 빵이 있거든요. 인간의 힘줄 층처럼 얇은 밀가루 층이 겹겹이 쌓이면서 씹을 때 부드러운 맛을 내는 빵이 있습니다. 의사가 수술할 때 근육 층 하나하나를 굉장히 조심스럽게 떼어내야 되겠죠. 층층이 이렇게 겹쳐 있으니까요.

요한계시록은 신약에 예수님의 이루심의 의미를 담고 구약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예언들이 촘촘히 겹쳐져 있어요. 그 겹쳐진 것을 하나 둘씩 떼어낼 때마다 거기서 예수님의 죽음이 나옵니다. 십자가 사건이 거기서 나와요.

그러면 십자가 사건만 나오면서 누구도 덩달아 나오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게 한 악마의 취지도 같이 나오죠. 악마의 활동도 같이 나오죠. 예수님과 악마의 취지를 같이 보여주게 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해석이 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말씀인데, 말씀이 이렇게 촘촘히 겹쳐져 있어요. 이 a, b, c, d, e, f, 한 꺼풀 한 꺼풀 뗄 때마다 겹 사이에 십자가 사건, 예수님의 죽으심+악마의 본색, 정체, 활동이 여기서 나옵니다. 나오면서 이 성령의 해석에 누구를 참여시키느냐? 오늘날 선지자, 성도를 참여시키면 성도의 모든 활동, 성도의 모든 생각들이 결국 성도의 선지자적인 활동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악마의 권세를, 성도를 통해 드러내게 하는 그러한 방법을 성령께서 요한계시록을 통해 사용하시는 거예요.

인간의 해석이 왜 성경을 해석할 수 없었느냐? 바리새인들이 해석자들 아닙니까. 왜 해석을 못하느냐? 인간이 아무리 날뛰어도 인간은 보이지 않는 악마의 권세를 이길 수가 없어요. 못 이기죠. 못 이기니까 합세해서 예수님을 죽이는 데에 한 몫한 겁니다.

요한계시록 6장을 잠시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 1절에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어린 양은 예수님을 말합니다.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이에 보니…”라고 되어 있어요.

예수님한테 지시받는 이 천사들이 주님한테 철저하게 움직임을 조종당하는 하나의 기계 같은 거예요. 물론 천사 하나하나는 분명히 따로 구분되어 있어요. 구분되어 있는데 그 천사가 어떤 기능 면에서 자기 고유의 기능을 따로 생각 못해요. 따로 생각하면 그것은 마귀 쪽에 속한 타락한 천사겠죠.

주님께 속한 천사들은 분명히 존재 하나하나가 있지만 그 기능은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공유’라고 이야기할게요. 공유. 공유의 반대말은 ‘개별(자)’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요한계시록에 유난히도 ‘아멘’이라는 말씀이 1장부터 많이 나와요. 1장 7절에도 “… 그러하리라 아멘”. 요한계시록 3장 14절 같은 경우에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그리고 요한계시록 제일 마지막에 뭐로 끝나느냐? “아멘”으로 끝나요.

이 ‘아멘’이라는 말은 “인간이 개입하나 개입 안하나, 인간이 신경 쓰나 안 쓰나 관계없이 진실로 모든 일은 그렇게 되기로 확정적입니다. 진실로 외친 말씀대로 그렇게 되어갈 뿐입니다.”라는 고백이에요. 동의하는 거죠. 주님이 계획 잡은 대로 아멘, 아멘, 아멘의 연속. 그러합니다, 그러합니다, 그러합니다의 연속이죠.

고린도후서 1장에서도 이 말씀이 나와요. 1장 20절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한다. 주께서 일을 벌이시고, 그 결과물로 우리 입에서 뭐가 나온다고요? “진실로 그러합니다.”하고 “아멘” 되는 거예요.

그런 순간 우리 고유성은 천사를 닮았다고 할 수 있어요. 천사는 시공간을 초월해서 출현됩니다. 성도도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의 새로운 시공간을 옴팍 뒤집어쓰고 있어요. 그래서 성도가 개인적 삶에 어떤 경우,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주님이 벌이는 일과 우리가 생각하는 일과의 격차가 신약 성경에서는 주님에 의해서 성령에 의해서 이게 사라져요.

사라지는 그 결과가 뭐냐? 아멘. 진실로 그러합니다. 시작도 아멘, 중간도 아멘, 끝도 아멘. 아멘의 연속이에요.

이 말씀을 가지고 이러한 성령의 인도하심 말고 그냥 일반적인 인간으로 개인적으로 해버리면, 인간들은 정말 감사의 아멘이 안 나오죠. 개별자의 티를 확확 냅니다. 지금 월드컵하고 있잖아요. 만약에 일본이 한국을 4대 0으로 이겼다. 그러면 우리 한국 사람이 기뻐서 어쩔 줄 모릅니까? 아~ 대한민국! 하면서 광란의 거리행진을 하겠어요? 안 그러겠죠. 그게 바로 개별적인 세상 해석을 따로 챙기고 있었다는 것이 들통 나는 순간입니다.

이게 월드컵뿐 아니고 개인적인 개인사도 마찬가지죠. 고린도후서 1장에서는 늘 주님 안에서 아멘, 아멘, 기쁨의 아멘이 되어야 되는데, 우리는 되어가는 일을 보고 이걸 아멘할지, 노멘할지를 자꾸 재는 경향이 있어요. 개별자 의식으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의 선지자가 오늘날 성도라 했잖아요. 성도가 됨으로서 성도 뒤에 각 사람… 저는 성도를 이렇게 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있잖아요. 있으면 각 사람 뒤에 뭔가 끈이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겁니다. 끈.

그래서 성도님께서 찾아왔다고 뭐라고 한다면, 제가 그렇게 지시는 하지 않지만 ‘잠깐만 돌아보세요. 오? 성령의 끈이 있네!’ 다시 말해서, 이 끈은 개별자가 자기 성경 해석해서 만들어낸 게 아니에요. 신앙 생활해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천사에게 일 시키듯이 공유적인 지시와 명령을 성령을 통해 할당한 거예요.

(각 성도마다) 성령의 끈, 성령의 끈, 성령의 끈,… 함부로 할 수가 없지요. 주님과 이미 끈으로서 연결되어 있고 연락이 되어 있는 사람보고 목사가 됐건 누가 됐건 함부로 할 수 없어요, 그 분에 대해서. 그 분이 잘못 해석한다면, 주께서 잘못했다는 것을 이야기는 할 수 있지만, 어떤 변화가 주어지고 그 사람이 어떻게 인도받는가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주님의 몫이 되는 겁니다.

만약에 지금 남자, 여자 성도 다섯 명이 있다고 봅시다. 우리 보기에는 저 분은 남자, 저 분은 여자로 보잖아요. 그러나 끈을 두고 봅시다. 끈을 보게 되면 그것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에요. 인간 세계에서 말하는 여자가 아니에요. 이것을 이번 여름 수련회 교재 중에 제가 썼습니다. […여성은 비(非)전체에 해당한다.] 따라서, 인간이 아는 전체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다.

자,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으면 여러분들은 생각할 거예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아이 때부터 자기밖에 몰라요. 그 아이가 어떤 요구를 하고 엄마한테 뭘 말할 때, ‘이거 사줘, 저거 사줘.’라고 하잖아요. 우리 보기에는 ‘야, 얘가 자기밖에 모르네.’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죠. 그러나 그 생각도 사실은 틀린 생각이에요.

왜냐하면 아이가 나중에 점점 커서 가정을 벗어나 학교라는 사회와 학교를 졸업하고 일반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 이미 아이 때부터 그런 현상이 있어요. 티니핑 사 달라 할 때, 그 ‘티니핑’이라는 단어도 의미가 어디서 나온 거예요? 기존에 자기 바깥에 있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이미 공유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 공유가 무슨 공유죠?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나름대로의 공유죠.

그러니까 인간들은 자꾸 개인 위주로 살지만 아무리 개인 위주로 산다고 해도 그 사람이 생각한 그 모든 의미는 이 악마의 권세 안에서 벌써 기성세대로부터, 그리고 같은 세대로부터 유포됐던 의미를 마트에서 물건 고르듯이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골라가지고 이것은 나의 세계라고 일방적으로 우기는 결과에요.

인간은 공유 아닌 적이 없어요. 공유인데 공유된 것을 끄집어내놓고 또 개별자로 살아가요. ‘저거 사줘, 이거 사줘’하는 그 항목, 리스트가 어디서 나왔어요? 이미 기존 세상에서 출몰하고 있는 의미들이잖아요.

어떤 사람이 공무원 시험 쳤는데 네 번 떨어졌어요. 그다음부터 집 바깥에 안 나옵니다. 셀프감옥을 스스로 만드니까 부모는 안타까워서 밑에다가 음식을 집어넣어줘요. 그러면서도 안 나옵니다. 일종의 자폐 증세를 보이죠.

그러면 걔는 방안에 갇혀서 자기 나름대로의 꿈이 있다는 거예요. I have a dream. 그 꿈은 어떤 꿈이냐 하면 바로 ‘스스로 자기가 구겨진다, 압축된다.’ 개별자에서 점점 더 개별자로 폐쇄되는 과정이라 볼 수 있어요. 단단해지죠. 그러니까 결국 남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 방어하는 것밖에 남질 않아요.

아까 이야기했던 부분, 요한계시록 6장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6장 다시 보면 8절에,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청황색 말, 아주 흉측하게 생겼겠죠.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른다.

그러니까 인간이 이 땅에서 늙어죽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에요. 자연스러운 현상 같은 것은 인간 자기가 해석한 거고요.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해석이 마감된 최종 해답지를 가지고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것을 보니까, 모든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 주님의 지시를 받은 천사의 활동으로 인하여 인간은 죽고, 죽고 난 뒤에는 음부, 죽은 자가 집결되어 있는 그 장소에 모이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가는 과정 속에서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그 과정에서 고요하게 조용스레 죽는 것이 아니고 전쟁과 그리고 전염병과 앞에 보면 다른 천사가 하듯이 가뭄과 경제난과 경쟁-산다고 얼마나 애를 쓰겠습니까-과 이런 것들이 범람하는 가운데서 조여지는 거예요.

어디를 향하여? 네 명의 천사 작용에 의해서 인간은 서서히 쭈그러지는, 그것도 비참하게 저주 속에서 쭈그러지는 그러한 모습을 보이면서 인간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3장에 나오는 17절 예언들이 아직 죽지 않고 그대로 살아있다는 거예요.

17-19절에 보면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이것이, 저주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이렇게 하나님의 예언은 아직도 계속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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