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을 찾은 여인
2026년 6월 17일 본문 말씀: 열왕기하 8:1-6
(8:1) 엘리사가 이전에 아들을 다시 살려준 여인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서 네 권속과 함께 거할만한 곳으로 가서 거하라 여호와께서 기근을 명하셨으니 그대로 이 땅에 칠 년 동안 임하리라
(8:2) 여인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행하여 그 권속과 함께 가서 블레셋 사람의 땅에 칠 년을 우거하다가
(8:3) 칠 년이 다하매 여인이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돌아와서 자기 집과 전토를 위하여 호소하려 하여 왕에게 나아갔더라
(8:4) 때에 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 게하시와 서로 말씀하며 가로되 너는 엘리사의 행한 모든 큰 일을 내게 고하라 하니
(8:5) 게하시가 곧 엘리사가 죽은 자를 다시 살린 일을 왕에게 이야기할 때에 그 다시 살린 아이의 어미가 자기 집과 전토를 위하여 왕에게 호소하는지라 게하시가 가로되 내 주 왕이여 이는 그 여인이요 저는 그 아들이니 곧 엘리사가 다시 살린 자니이다
(8:6) 왕이 그 여인에게 물으매 여인이 고한지라 왕이 저를 위하여 한 관리를 임명하여 가로되 무릇 이 여인에게 속한 것과 이 땅에서 떠날 때부터 이제까지 그 밭의 소출을 다 돌려주라 하였더라
전에 엘리사와 함께 했던 여인이 여기서 다시 소환됩니다. 이 여인에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열왕기하 4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 여인에서 아들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인과 그 남편은 엘리사 선지자는 지성을 다하여 섬겼습니다. 하지만 자식 없음에 대해서 선지자에게 부탁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1년 뒤 자식이 생긴다는 것은 순전히 선지자의 제안이었고 실현되었습니다. “엘리사가 가로되 돌이 되면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 여인이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 하니라 여인이 과연 잉태하여 돌이 돌아오매 엘리사의 말한 대로 아들을 낳았더라”(왕하 4:16-17)
부부는 너무 기뻤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습니다. 그 아들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부부가 선지자에 대한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여인은 죽은 아들을 두고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 선지자가 아들만 남기고 그 뒤에 올라가서 엎드리니 아이가 살아 났습니다.
“ 아이의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 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 그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왕하 4:34) 이로 인하여 선지자의 예언으로 인해 그 집은 아들 중심으로 예언이 펼쳐집니다. 여기서 정형화된 패턴이 생겨납니다. 없던 데서 있게 되고 그 있게 된 것이 죽게 되고, 그 죽게 된 것이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오늘 본문에 다시 소환됩니다. 그것은 자기 땅으로 귀환하기 위함입니다. 땅을 떠났던 이 가정이 땅을 찾아옵니다. 땅을 떠난 이유는 7년 기근 때문입니다. 선지자가 이 여인에게 지시 내립니다. 땅을 떠나라는 겁니다. 이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만 할당하는 그 땅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7년 동안이나 기근이 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작심하시고 파괴에 나서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이 취소되는 것이 아닐까요? 여기에 언약이 꾸준히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이 언약의 진행 패턴은 여인의 집을 통해서 이미 뚜렷하게 드러났습니다.
‘없음’에서 ‘있음’으로, ‘있음’에서 ‘죽음’으로, ‘죽음’에서 ‘살아남’의 과정을 나타내었습니다. 이것은 개인적 가정에만 적용되는 원칙이 아니라 나라 전체를 움직이는 원칙으로 나타내려면 ‘땅’에 대해서 동일한 언약의 효력이 주어져야 합니다. 선지자가 여인에게 지시한 ‘땅 떠남’은 7년 기간 후에 ‘땅에 다시 돌아옴’이 됩니다.
‘7년’이라는 파괴의 기간은 ‘7일만의 창조’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언약적 활동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성을 잃어버린 땅을 ‘창조의 원천’을 품은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려는 겁니다. 이 창조의 원천으로 돌아오려면 율법적 취지가 살아나야 합니다. 율법은 잃어버린 땅을 다시 갖게 되는 법이 있습니다. 이것이 희년 제도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너는 육 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다스려 그 열매를 거둘 것이나 제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
너의 곡물의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고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나무의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 안식년의 소출은 너희의 먹을 것이니 너와 네 남종과 네 여종과 네 품꾼과 너와 함께 거하는 객과 네 육축과 네 땅에 있는 들짐승들이 다 그 소산으로 식물을 삼을지니라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 제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레 25:2-10)
땅이 없는 집단 중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는 집단이 레위지파입니다. 이들은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제사하는 일에 종사하는데 이 모세 율법에 의해서 더러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씻어져 거룩하게 되는 결과를 남기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다윗 이후, 이러한 제사 행위가 바알종교가 번창하므로서 북이스라엘에 먹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언약의 지속성이 계속되고 있음을 나타내줍니다. 죽은 땅이 언약의 지속성을 통해서 다시금 하나님으로부터 할당받는 그 기간이 오늘 본문에서 7년으로 되어 있습니다. 언약이 스스로 언약을 이어가고 있었던 겁니다. 이스라엘 땅과 그 위에 사는 백성은 언약의 자체적인 순환성을 보여주게 됩니다.
신약적으로 말하는 로마서 11:34-36의 말씀으로 나타내 보입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여인에게 없는 아들이 생겨 이로 인하여 강력한 땅의 파괴 기간을 극복하고 다시 기근이 끝난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분명 여인의 아들은 여인을 통해서 생겨났지만 결국 아들을 통해 이 여인의 가정은 창조의 원천에 접할 수 있었습니다. 최후의 자식이 최초의 창조주가 되는 식입니다. 마태복음 22:42-46에서 예수님은 언약의 순환 흐름을 다음과 같이 알려주십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이로서 여인은 언약의 증인이 되었고 그녀도 다시 찾아온 땅은 언약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은 ‘온전한 안식’의 상태의 땅입니다. 언약 안에서 시간은 종결됩니다. 그저 영원한 안식의 땅이 성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지금도 언약이 흐르고 있음을 늘 감지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강-열왕기하 8장 1-6절(언약의 순환) 260617-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8장 1절에서 6절까지입니다.
열왕기하 8:1-6
“엘리사가 이전에 아들을 다시 살려준 여인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서 네 권속과 함께 거할만한 곳으로 가서 거하라 여호와께서 기근을 명하셨으니 그대로 이 땅에 칠 년 동안 임하리라 여인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행하여 그 권속과 함께 가서 블레셋 사람의 땅에 칠 년을 우거하다가 칠 년이 다하매 여인이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돌아와서 자기 집과 전토를 위하여 호소하려 하여 왕에게 나아갔더라 때에 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 게하시와 서로 말씀하며 가로되 너는 엘리사의 행한 모든 큰 일을 내게 고하라 하니 게하시가 곧 엘리사가 죽은 자를 다시 살린 일을 왕에게 이야기할 때에 그 다시 살린 아이의 어미가 자기 집과 전토를 위하여 왕에게 호소하는지라 게하시가 가로되 내 주 왕이여 이는 그 여인이요 저는 그 아들이니 곧 엘리사가 다시 살린 자니이다 왕이 그 여인에게 물으매 여인이 고한지라 왕이 저를 위하여 한 관리를 임명하여 가로되 무릇 이 여인에게 속한 것과 이 땅에서 떠날 때부터 이제까지 그 밭의 소출을 다 돌려주라 하였더라.”
오늘 이야기는 열왕기하 4장 20절에 나오는 그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그 어떤 여인에게 엘리사가 가서 기적을 베풀어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에게 자식이 없었는데 그 여인에게 엘리사가 하나님의 예언의 소식을 전하지요. 열왕기하 4장 14절에, “엘리사가 가로되 그러면 저를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할꼬 게하시가 대답하되 참으로 이 여인은 아들이 없고 그 남편은 늙었나이다.” 그때 엘리사가 “엘리사가 가로되 돐이 되면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왕하 4:16)라고 했습니다.
놀라운 기적이지요. 하나님의 예언대로 아들이 생겼습니다. 예언한 대로 아들이 생김으로서 엘리사가 방문한 이 가정은 인간의 생각, 예측보다도 하나님의 예언이 먼저 주도적으로 덮쳐진 가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예측과 소망대로 아들이 생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아들이 생겼다면 그 아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그 일들은 인간들이 기대한 일은 아니겠지요?
애초부터 아들을 달라고 한 적이 없는데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아들을 줬다는 것은, 하나님의 예언이 이 땅에 들어왔을 때, 언약이 이 땅에 안착했을 때 그 언약 자체가 어떤 절차를 만들어내는데 그 아들에게 차후에 일어나는 그 일이 좋은 예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예언이 엘리사에게 임했다 – 엘리사의 예언대로 아들이 생겼다 – 여인은 좋아서 아들을 안았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버리면 없던 아들이 생긴 것을 통해서 그다음 이야기, 그다음 언약이 작용하는 그 이야기가 안 나오겠지요. 그런데 열왕기하 4장 19절에, “내 머리야 내 머리야” 하다가 20절에, “곧 어미에게로 데려갔더니 낮까지 어미의 무릎에 앉았다가 죽은지라.” 아들이 죽었어요.
없던 아들이 예언에 의해서 생겼고, 인간은 좋다고 “고맙습니다.” 여기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줄로 알았어요. 그런데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고 그 있던 아들이 죽어버렸어요. 아들이 죽어버리니 그 엄마는 그것으로 또 마무리되는 줄로 알았어요. ‘없던 이야기 생겼다 – 생긴 아이가 죽었다.’
여기서 마무리되어 버리면 ‘어차피 얼마 못 살고 죽어버릴 아들을 왜 굳이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서 하나님이 주신 아들처럼 그러한 생각이 들게 했는가?’ 상당히 의심스럽지요. 그래서 그 아이의 엄마가 하나님의 선지자를 찾아가서 죽은 아들에게 데려오기 위해서 갈멜산까지 달려갑니다. 엘리사가 죽은 아이에게 왔어요.
열왕기하 4장 33-35절에 보게 되면,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아이의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 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 그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번 이리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뜨는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아이의 아버지도 원한 것이 아니고, 아이의 어머니도 원한 것이 아니에요. 일방적으로 아이가 없는 가정에 하나님의 예언이 쑤시고 들어가서 일방적으로 그 가정 안에 ‘하나님의 예언이 이 땅에서 어떤 경로를 밟는지’를 보여준 사례예요. 그런 경험이 있었던 그 여인의 이야기가 오늘 본문 열왕기하 8장 1절에 다시 나옵니다. “엘리사가 이전에 아들을 다시 살려준 여인에게 이르되.”
그러니까 그 여인의 이야기, ‘아들 없다 - 아들 생겼다 – 그 아들이 죽었다 – 그 아들을 다시 살렸다’라는 이것으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끝나는 것이 아니고 열왕기하 8장에 가서 없던 그 아들 중심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열왕기하 8장의 이야기가 뭐냐 하면, ‘그 아들 덕분에 무려 7년이나 되는 가뭄을 무사히 넘겨서 그 여인은 영원히 자기 후손에게 물려줄 땅을 약속의 땅에서 얻게 되었다.’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있는 것을 의도적으로 죽이고, 의도적으로 죽인 것을 의도적으로 살렸다.’ 여기까지는 가정 이야기거든요. 여기까지는 가정 이야기인데 7년 동안 기근이 오니까 엘리사가 거기 있지 말고 블레셋 땅으로 피신하라 했어요. “엘리사가 이전에 아들을 다시 살려준 여인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서 네 권속과 함께 거할만한 곳으로 가서 거하라 여호와께서 기근을 명하셨으니 그대로 이 땅에 칠 년 동안 임하리라”(왕상 8:1).
그러면 그 여인은 ‘아들 없다 – 아들 있다’에서 땅이 있었는데 땅이 없어져요. 아들이 있었는데 죽고 다시 살리는 것처럼, 땅이 있었는데 없어지고 그다음에 없어졌다고 생각했던 땅이 다시 생겨요. 이스라엘 전체에 엘리사라는 하나님의 예언자가 나타나서 ‘주께서 이 약속의 땅에 무슨 일을 진행시키고 있는가?’를 한 가족 단위의 여인을 통해서 알려주고, 거기에 선지자도 같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한 문장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여인과 아들의 몸으로 인하여 땅이 품은 예언적 취지가 나타내는 이야기, 그러한 사례, 사건.” ‘여인과 아들의 몸을 통해서 이 땅, 약속의 땅이 품고 있는, 함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언약적 취지를 드러내는 이야기’, 오늘 이야기입니다.
처음에 아들이 없다가 있고, 있는 아들이 죽을 때는 인간의 몸에 대해서 언급을 했지요. ‘저 가정은 좋겠다. 없던 아들도 생기고, 또 세상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이가 다시 살았구나. 역시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예언, 하나님의 은혜는 정말 놀라워.’ 이것으로 끝날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개인이잖아요. 지금 이스라엘이 살고 있는 그 땅에는 여인뿐만 아니고 다른 사람도 살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 여인에게 언약이 주어졌다면 그 여인이 살고 있는 북이스라엘에도 하나님의 언약의 취지가 계속해서 살아 있다는 것, 언약이 살아있고 언약이 숨 쉬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입장을 대변하는 엘리사 입장에서는 알려줄 필요가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엘리사는 그 여인의 선지자일 뿐만이 아니고 이스라엘 전체, 남쪽 유다 나라와 이스라엘 전체의 예언자기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가 갖고 있던 그 땅의 성격을 여인의 경우를 예를 들어서 알려줄 필요가 있어요. 그 여인에게 일어난 일이 이 땅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줄 필요가 있지요.
오늘 본문 열왕기하 8장 1절에 “여호와께서 기근을 명하셨으니 그대로 이 땅에 칠 년 동안 임하리라.” 하나님께서 기근이 임한다고 말씀하셨는데 혹독한 가뭄과 기근이 3년 반 정도가 아니고 곱빼기입니다. 굳이 하나님께서 7년의 기근을 일으킬 이유가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해요. 기근이 임한다는 말은 거기 있는 사람 다 굶겨 죽인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있던 사람들 다 굶겨 죽이는 것과, 언약이 살아 있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아들이 없는데 아들이 생겼다. 없는데 생겼다. 그러면 기근의 역할은 뭐냐? 이 땅에, 우상 바알을 섬기는 북이스라엘에 7년 동안 기근이 있을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언약이 없는 이스라엘을 없는 아들 취급해 버리는 거예요. 하나님이 언약적으로 그 땅을 볼 때에.
이 땅에 언약이 없다는 말, 이 땅에 언약이 없는 상태라는 것을 그렇게 알려주는 겁니다. 그러면 끝났네. 끝났어요. 끝났는데 오늘 본문에 땅,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땅을 얻는 여인이 등장한 거예요. 7년 기근이 끝나고 난 뒤에 여인이 와서 블레셋으로 떠나기 전의 자기 땅을 다시 얻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보기에는 ‘원래 자기 땅 다시 얻는 그것이 당연하지 그게 언약적으로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겠는데, 레위기 25장에 보면 희년이라는 것이 나와요, 희년.
희년이라는 것이 뭐냐? 이 땅이 약속의 땅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약속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땅이 없는 자는 50년마다 그 땅을 되돌려주는 법이 희년법이에요. 왜 그런가 하면 거기 사는 인간이 땅의 주인이 아니고, 약속의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거든요(레 25:42, 55). 하나님의 율법이 계속 살아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율법을 나타내는 연기자, 배역자, 역할자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삼아서 “내 율법대로 땅 돌려줘. 왜냐하면 땅 주인은 나니까.”
땅 주인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각자 나눠줬거든요. 나눠줌으로써 그 나눠진 땅이 50년마다 따박따박 다시 돌아오는 거예요. 그러면 ‘야, 땅 얻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아직도 살아있네! 뭐가? 이 땅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고, 율법이 살아 있고, 하나님의 언약이 살아 있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언약이 살아 있는 것 하고 내 삶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언약이 살아 있으면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그 효과가 살아 있다는 뜻이에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들이 한 번 태어나서 그냥 죽을래, 아니면 죽고 다시 살래?” 지금 그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죽어도 다시 살고 싶어요.” “그렇다면 언약을 지켜, 언약을! 언약이 죽은 너를 다시 살려줄 거야.”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것도 무슨 증거가 있어야지요. 무슨 근거로 그렇게 이야기합니까? 무슨 근거로 죽은 내가 살아난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한다면 “땅을 봐, 땅. 네 땅이 아니었는데 50년 만에 돌아오잖아. 땅이 50년 만에 돌아온다는 것은, 죽을 너희도 약속의 땅에서 영원히 산다는 그 뜻이야”라고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거예요.
그러면 그들이 다시 돌아갈 땅은 무슨 땅이어야 하느냐? 안식의 땅이어야 하거든요. 레위기 25장 3-4절에, “너는 육 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다스려 그 열매를 거둘 것이나 제칠 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찌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안식이 머무는 땅에 너희들이 살게 되면 너희는 영원히 안식하는 백성,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과 더불어 안식하는 백성이 된다는 거예요.
레위기 25장 8절에 보면,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찌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49년 동안에 안식년을 일곱 번 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7일 만에 처음 창조했던, 그래서 그 처음 창조의 결과가 뭐냐? 창세기 2장 1-3절에 보면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그 안식에 같이 참여된 자가 안식의 백성 천국의 백성이 되는 거예요. 따라서 하나님의 그 창조 때의 원칙을 약속의 땅에 그대로 실현시키는 겁니다. 그 작업을 하는 거예요. 7년마다 농사짓지 않고 안식하는 그 땅에 산다는 것은 그 백성도 같이 하나님의 안식을 함께 누리게 되는 복된 백성이 되는 거예요. 그 안식의 일곱 번, 7×7+1, 그게 50년이에요, 50년.
그 50년째 되면 희년으로서 영원한 안식이, 너희들의 영원한 거주지로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율법을 통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이런 소식을 보고 있고 듣고 있는 우리가 행복한 사람이에요. 이게 언약 작용이거든요. 성경에서 이렇게 친절하게 알려줘도 어떤 사람은 듣고 “하나님이 이렇게 약속했어도 안 해주면 어떻게 하는데, 안 해주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도 사기를 많이 당해가지고 ‘하나님이 이대로 안 해주면 어떻게 하느냐? 그 증거가 있어야지.’
하나님께서 ‘그 증거를 내가 어떤 여인의 집에 일으켰잖아. 없는 애 있게 하고, 그 애를 죽이고 다시 살려줬잖아. 그런데 다시 살아난 그 애와 함께 자기들끼리 잘산다? 아니, 그것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고 약속의 땅의 그 취지와 함께 언약적인 영원한 안식의 효과까지 그 여인을 통해서 내가 증거로 제시했다’라는 그 말이지요. 그러면 그 여인은 뭐냐? 하나님의 언약 사건의 증인은 여인이고, 증거는 뭐냐? 자손에게 영원히 물려줄 땅이지요. 다시 돌아온 그 땅.
여기서 좀 더 나가봅시다. 도대체 그 땅을 어떤 근거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돌려줬는가? 땅을 돌려준다는 이게 무슨 말이냐? 가정에 농사지을 사람도 없고, 가정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그날그날의 수입이 없어요. 수입이 없으니까 굶어 죽기 직전에 하나님이 주신 땅이지만 남에게 팔아넘기는 거예요. 팔아넘기고 받은 그 돈으로 장사를 하든지 딴 데서 농사짓든지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땅 주인은 하나님인데 먹고 살길이 없어서 부유한 친척이나 다른 사람에게 그 땅을 넘긴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땅 넘긴 그 돈도 다 떨어졌다. 그러면 남아 있는 뭘 또 넘기느냐? 자기 몸뚱이는 남아 있잖아요. 생계비를 받고 자기 몸을 넘기는 것을 ‘종이 되었다’, 노예가 되는 거예요. 희년이 되면 땅도 환수받고 몸도 자유가 돼요.
그래서 희년의 가진 자를 통해서 그 취지가 부각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노동력도 잃어버리고, 건강도 잃어버리고, 인생 자체가 꼬여서 이제는 아무것도 없고 남은 몸도 종이 되어 있던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율법의 취지가 확 살아나는 거예요. 자, 희년의 취지는 뭐냐? 땅이 없는 자가 땅을 가지는 거예요. 이게 희년이에요.
땅이 없어 봐야 다시 하나님께서 원래 줬던 그 땅을 도로 주시는 기쁨이 샘솟듯 터져 나오겠지요. 바로 희년의 기쁨을 가장 누리는 쪽이 땅 없어 본 자에요, 땅 없는 자. 그러면 땅 없는 자가 그렇게 지지리 궁상으로 못사는 사람이냐? 물론 그런 사람도 있겠지요. 그러나 희년의 핵심은, 아예 애초부터 이 땅에 거주할 땅이 없는 지파가 있어요. 그 지파가 레위 지파에요.
민수기 25장 29절부터 보면 굉장히 긴데요.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일반 어려운 사람이 땅을 넘길 때 땅을 두 종류로 나눠요. 성안에 있는 땅과 성 밖에 있는 땅으로 나눕니다. 성안에 있는 땅은 돈 벌어서 1년 만에 되찾을 수가 있는데 성 밖의 땅은 한번 팔았으면 도로 살 수가 없어요. 하지만 레위 지파만은 일반인과 다르게 성안의 땅이든지 성 바깥의 땅이든지 주택이든지 간에 희년이 되면 얼마든지 돌려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일반인들 땅 없는 사람과 레위 지파가 땅 없는 것과의 차이점이 뭐냐? 레위 지파가 하는 일이 그 지위가 일반인보다 월등하게 하나님의 뜻에 가까이 있는 거예요. 레위 지파가 하는 일이 뭐냐? 어린 양 제물을 바침으로써 죽은 자를 살리는 거예요. 여인의 집에서 아들 하나 죽었지요. 어떤 아이가 생겼고 그 아이가 죽었지요. 죽었는데 선지자가 찾아가서 살려놨잖아요.
그처럼 ‘이스라엘에서 언약이 핵심적으로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물을 받고 죽은 자를 살린다는 그 일이고, 그 일을 집중해서 하는 것이 레위 지파니까 레위 지파는 희년에 의해서 대대로 죽은 자를 살리는 레위 지파의 그 기능이 이 땅에서 끊어지지 않고 멈추지 않고 계속 살아있도록 하는 한 언약은 살아 있다.’ 이게 하나님의 취지입니다.
그런데 그 좋은 취지, 나중에 이스라엘은 다윗 이후에 율법 자체도 보지도 않아요. 율법에 그런 좋은 취지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 땅을 자기 땅이라고 생각하고 우상을 섬겼어요. 우상을 섬긴다는 말은 ‘여호와께서 무슨 말을 했는지 나는 안들을란다.’ 그렇게 돼요. ‘나 안 듣겠어, 안 듣겠어. 난 다른 이방 민족처럼 내 힘으로 살겠어’라고 얼굴을 돌려버린 거예요.
그들이 얼굴을 돌려버리니까 우상을 섬겼다는 그 말이지요.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그 땅은 어디까지 누구 땅이냐? 하나님 땅이에요. 하나님 땅이니까 인간들이 아무리 자기 위주로 살더라도 땅은 언약대로 유지된다는 것을 계속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그 일을 레위 지파는 이제 못하지만 누가 하느냐? 선지지가 하는 거예요.
선지자가 레위 지파가 아닌 여인에게 가서 옛날 레위 지파가 언약을 실시할 때의 그 효과, 즉 아들 없는 여인을 통해서 선지자와 결부되어서 하나님의 희년의 취지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자, 여기서 좀 더 나가봅시다. 자꾸 더 나가야 해요. 그렇다면 이 여인이 땅을 차지했다는 것, 그것은 여인에게 아들이 있어서 생긴 현상이거든요.
그러면 여인으로 하여금 그 땅에서 그냥 살게 하면 되지 왜 하나님이 7년 기근을 일으켜서 그 땅에서 7년 동안 떠나게 한 다음에 7년 만에 되돌아오게 한 그 취지는 무엇인가? 그 7년이라는 것, 하나님의 창조와 관련된 것, 하나님이 7일 만에 창조했다고 했잖아요. 7일 안식일, 7×7=1, 50년, 희년, 그 안에 하나님의 안식과 결부된 숫자가 7로 나타나는 거예요.
7년 동안 기근이 온 거예요. 기근이 왔다는 말은 하나님이 7일 동안 창조하고 하나님의 언약대로 창조되어 있던 이 땅을 창조주의 취지에 의해서 파괴시켜 버려요. “나는 이 창조된 세계를 파괴하겠다.” 인간들이 언약에 대해서 저항하니까 하나님의 창조가 파괴되는 거예요. 전기는 옛날에도 있었는데 에디슨(Thomas Alva Edison, 1847-1931)이라는 사람이 전구를 발명했습니다.
그 전에 전기를 발견해서 그 전기를 어떻게 가정집까지 운반하느냐 그 연구가 있었지요. 이 땅에 전기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전기를 그동안 활용할 줄을 몰랐어요. 전기라는 것은 전자장의 뭉텅이가 빠른 속도로 흐르는 것을 전기라 합니다. 전자장이 생기는 것은 전자 때문에 그렇고요. 그 흐름을 방해할 때, 그것을 전압이라 하지요, 저항이 생기면 거기서 에너지가 나와요. 그 에너지를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지구가 뭐냐? 지구는 전기가 알아서 순환하는 매체가 지구에요. 전기가 제 선로에서 탈락해서 빠져나올 것을 생각해서 접지를 하지요. 접지한 전기는 어디로 흐르냐 하면 지구로 흐르지요. 지구 자체. 지구에 흐른 그 전기는 어디로 갔느냐는 겁니다. 지구로 흘러간 그 전기는 대기(大氣)로 가요. 수증기가 올라오는 그 대기로 가게 됩니다.
번개가 치는 데 지구상에 1년 동안 번개가 몇 번 치느냐? 초당 40회에서 100회인데요, 초당 40회 쳤다면 연간 12억 6천만 번 치고, 초당 100번을 쳤다면 연간 31억 5천만 번 번개 칩니다. 구름 위의 알갱이는 양전자가 되고 그 밑의 단단한 알갱이인 우박은 음전하가 돼서 지면으로 떨어져요. 떨어지게 되면 지면에서 양전하가 마중을 나가서 마중 나간 스파크가 어떤 경로가 되면 그 경로 따라서 순간적으로 올 때 그것을 번개라 해요.
지구 자체가 전기가 순환하는, 전기장을 갖고 있는 도체(導體)라고 보면 돼요.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약속의 땅은, ‘우리가 예수 믿고,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 믿어서 아들 생겼다. 좋다’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 자기 일을 해요. 뭘 하느냐? 언약을 이 땅에 순환시키는 일을 해요. 물이 증발해서 비가 오고 그 비가 흐르면서 또 수증기가 생겨서 증발해서 올라가고.
이 대기가 순환하고 증기가 순환하듯이 이 땅,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은 애초부터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 있었어요. 언약이 들어 있어서 인간이 언약을 믿든 안 믿든 관계없이 언약을 통해서 언약에서 언약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주께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는 그 언약의 순환구조가 있어요.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3-36).
그 순환구조를 인간이 어떻게 아는가? 인간이 범죄 해야 알아요. 죄를 지어야 알아요. 선악과 따먹지 말라 한 이유를 알겠지요. 따먹을 수밖에 없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한 그 취지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어서 언약이 인간세계에 나타나는 하나의 계기로 삼는 거예요.
지난 강남 강의에서 사도행전 10장을 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무슨 이야기가 있느냐 하면, 고넬료가 있는데 이 고넬료가 이방인이에요. 율법으로는 이방인인데 구제를 많이 하고 평소에 하나님께 기도를 많이 했다고 소문난 사람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보기에 이렇게 경건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율법은 이스라엘 쪽에서나 아니까 베드로가 알지요. 그런데 고넬료는 이방인 로마의 중대장이기 때문에 율법을 몰라요.
‘야, 비록 율법을 몰라도 이렇게 구제 많이 하고 경건하게 바르게 살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모양이다.’ 이렇게 오해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그 오해가 사도행전 10장 14절에서 다 깨집니다. 저 사람은 너무 착하게 사니까 하나님께서 ‘너는 특별 케이스로 내가 구원하겠다. 왜? 너무 착하니까 천국에 딱 적합하다.’ 그렇게 해서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고넬료는 대기 되어 있고, 베드로에게 천사가 오고 어떤 계시가 와서, “먹어라.” 하고 세 번 보자기가 내려와요(행 10:11-16). 두 번째 보자기가 내려올 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보자기 안에 내용이 뭐냐 하면, 먹으면 안 되는 게 들어 있으니까 - 베드로가 율법의 도사잖아요 - “아, 저는 못 먹습니다. 이렇게 더러운 것, 속되고 깨끗치 못한 것은 내가 먹지 아니합니다.”
그럴 때 15절에 주님께서 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고넬료가 경건하고 착하다고 해서 그 자체가 구원될 정도로 깨끗한 게 아니다’ 이 말입니다. 기도한다고 깨끗한 게 아니에요. 지금 고넬료 이야기의 취지는 뭐냐?
고넬료가 여전히 더러워요. 더러운데 고넬료가 스스로 착한 일을 해서 더러운 것을 깨끗게 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더러운 고넬료를 깨끗게 하셨다’라는 사실을, 고넬료를 전혀 알지 못하는 베드로에게 그 언질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더러운 것 – 출발이 더러운 거예요 - 더러운 것을 보자기에 담아서 먹으라고 한 거예요.
베드로는 당연히 율법대로 못 먹는다고 했죠. 그때 하나님께서 “내가 속된 것을 깨끗게 한 것을, 내가 깨끗게 한 것을 네가 더럽다고 하지 말라.” 하신 거죠. 나중에 가보니까 누가 와 있어요. 이방인이 와 있어요, 이방인이. 언약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언약이 있던 이스라엘이 이제 망했잖아요.
그렇다면 그 이스라엘의 정족수를 채우기 위해서 누가 그 빈칸에 들어가야 되느냐 하면, 이방인들이 들어가는 거예요. 들어갈 때 뭐냐, 하나님의 창조한 이 땅이 언약의 순환구조, 언약의 매체가 돼요. 전기가 통하는 전도체처럼 언약이 통하는 도체가 돼요. 자체적으로 순환구조가 되는데 이제는 이스라엘의 그 언약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고넬료에게 간 거예요. 그리고 저와 여러분에게 그 하나님의 언약의, 찌릿찌릿 전기가 온 거예요.
전기가 오는데, 전기가 왔다는 걸 어떻게 아느냐? 더러우니까. 전기가 에너지를 뽑으려면 저항이 있어야 돼요. 코일을 감는다든지 방해하는 요소가 있어야 돼요. 하나님의 언약을 방해한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에 감전됩니다. 감전되면서 하는 말, ‘주님, 저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고백, 우리는 언약이 주는 영원한 천국의 안식, 혜택에 합격한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만들죠, 합격한 사람이라는.
7년 기간 동안, 그러니까 7년의 기근 동안에 비가 오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이 현재 창조한 것을 스스로 없애면서 언약을 통해서 창조의 씨앗, 그 여인이 땅을 얻을 때부터 새출발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게 성경에 들어 있습니다.
지금 다른 사람들은 ‘재선거 하자’, 데모한다고 이걸 못 봐요. 금요일 날 한국 대 멕시코 월드컵 축구한다고 그거 신경 쓰느라고 이 성경을 못 봐요. 이게 뭐냐 하면, 언약이 비켜 가는 비극이에요, 언약이 비켜 가는 비극. 오직 택한 백성에만 그 T.O에 들어갈 사람에게만 이것이 전달되게 돼 있지, “너 오지도 마!” 이 자체적인 주님의 언약 순환구조에 의해서 그들은 이 혜택, 하나님의 영생 혜택, 안식의 혜택을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알아서, 주께서 알아서 홀로 일한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구약에서 우리의 땅은 어디 있느냐, 구약에서는 자기 땅을 다시 찾았는데. 신약에 오게 되면 우선 몸부터, 노예로부터 해방됩니다. 누가복음 4장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4장 18-19절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이게 희년이거든요.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한다”는 이사야 61장의 이 말씀을 지금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성전에 가서, 회당에 가서 그 대목을 펴면서 이 말씀이 지금 예수님 나한테 이루어졌다고 이야기해요. 포로 된 자를 자유케 해준다, 포로 된 자를 자유롭게 해준다, 언약 밖에 있는 자, 언약의 혜택이 없는 자를 예수님 자신이 언약의 완성자가 되어서 안식일이 되어서 빼내 주는 그 일을, 예수님께서 이 말씀대로 앞으로 하실 것이라는 거예요.
그렇게 하시면, 어떤 땅이 생기느냐? 여기서, 현재 우리가 사는 땅 말고 다른 땅이, 다른 공간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해서 짐작을 할 수 있느냐? 그것은 바로 요한복음 1장 1-5절에 보면, 태초에 빛이 있어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빛이 있는데, 그 빛에 의해서 새로운 공간이 생겨요. 시간은? 빛 안에서는 시간은 항상 없습니다. 빛 안에서는 시간이 없어요. 물리학에서도 빛 안에서는 시간이 정지돼 있어요. 1초에 30만km 달릴 경우. 이것은 간단한 하나의 예인데요. 어떤 사람이 허허벌판에 있는데 ‘동쪽으로 갈까 북쪽으로 갈까?’ 하다가 북쪽으로 간다면 북쪽에 가는 속도로 인하여 동쪽의 속도는 제로가 돼요. 동쪽과 북쪽의 방향이 다르죠.
이것을 위아래로 해보자, 위아래. 시간 쪽으로 가버리면 공간은 수축이 돼요. 빛의 속도로 가버리면 공간이 없어지고, 공간을 생각한다면, 빛의 속도를 못 느끼고 공간에 가게 되면 일종의 저항, 빛의 속도에 대한 저항이 공간인데 공간에 가버리면 그때 시간이 생겨요.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공간 생각 때문에 ‘빛이 손해 보는 손실’이 시간입니다.
‘아이고, 이거 내 땅이다.’ 하면 그다음부터 뭐가 생깁니까? 시간이 생겨요. ‘내가 이 땅에서 몇 년 더 살까?’ 이러면 언약 안에서 시간이 없는, 정지된 그것이 안식의 때라는 생각은 못 하고, 관찰자인 내 몸 하나 추스르기 위해서 ‘이 땅에서 앞으로 내 시간은 어떻게 될까?’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특정한 사건, 아들이죠, 여인에게 있는 아들, 그 아들이 죽어버리면 그 아들 덕분에 땅이 생겼잖아요. 그러면 그 아들 때문에 땅이 생긴다면 그 아들은 최후의 아들인 동시에 다시 그 7년 기근, 파괴 끝나고 새 창조, 언약적 창조의 땅으로 돌아옴으로 말미암아 ‘최후의 아들’이 ‘최초의 아버지’로 창조주가 돼버리는 그러한 기능을 보여주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알파요 오메가가 되는 겁니다. 이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마태복음 22장 42-44절에 보면,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예수님께 자기를 소개할 때 “다윗이 ‘그리스도는 자기 주’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오실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냐? 아니면 자신의 선조냐?” 이렇게 물었어요. 그러니까 그 잘난 척하는 바리새인들이 답변을 못 했어요. 왜냐하면 ‘다윗의 주가 어떻게 다윗의 후손으로 오겠느냐’ 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 다윗의 아버지’가 되는 거예요. 다윗을 낳은 창조주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함으로써 다윗이라는 인간, 죄인을 통해서 언약이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는”(롬 11:36) 순환구조, 그 순환구조에 다윗이 걸려든 거예요. 그리고 이 여인이 걸려들었고, 오늘날 우리 성도가 걸려든 겁니다.
“아, 부활이구나, 부활! 주께서 죽으시고 부활하고,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그 부활, 그 부활로 말미암아 천국의 땅을, 하나님의 모든 희년을 다 이루어서 땅을 마련했다. 그렇다면 그 언약이 우리의 저항을 뚫고, 우리의 죄를 뚫고 ‘너의 죄를 속했다. 없어, 더러운 네가, 네 죄가 깨끗게 되었다. 이제 언약이 너를 사용할 거야. 언약을 위한 그러한 사람으로 너는 이 땅에서 예수님의 증인이 될 거야. 땅은 이미 천국에 마련했어. 따라서 내가 몇 살 살았는지 몇 년 살았는지 그 시간은 생각하지 말고 새로운 공간, 새 하늘과 새 땅만 생각하라!’”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눈앞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세상에서 나 건강하고 돈 벌고 잘 먹고 잘살면 그게 복의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 자체가 언약을 방해하는 그런 저항 같은 것인 줄 깨달아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죄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언약으로 그 죄를 다 씻어주시고 안식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의 그 매 순간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범사에 감사케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