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과 육의 갈라짐, 고린도전서
내가 한 일을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은 두려움을 만듭니다. 왜냐하면 내 존재의 자리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대응 조치까지 미리 계산을 해 두어야 하는데 기억이 나질 않으니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까마득 하기 때문입니다.
기억은 내 존재의 흔적이요, 뿌리입니다. 그런데 기억이 어떻게 생성되고 변형되어 다시 출력되는 지 연구한 결과, 그것은 참으로 죄인다움 그 자체였습니다. 기억은 생존에 유리한 쪽으로 생성되고 편집됩니다. 쉽게 말해서, 사건을 있는 그대로 우리가 전부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주체에 의해 조작 편집되어 원하는 정보만 기억이라는 이름표를 붙여 두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아예 처음부터 왜곡되어 접수되거나 아예 입력조차 되지 않고 있다가, 그것을 다시 재생시킬 때는 재생 당시에 맞도록 좀 더 그렇듯 하게 창작해 내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기억이라는 것은 세상의 말과 지혜라는 법칙 속에서 나에게 유리한 모양으로 사건을 [통편집]한 것이 됩니다. 왜 세상의 말과 지혜라는 법칙 속에서만 기억이 편집되느냐 하면, 이 세상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상의 욕망과 부합하는 계산 방식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생존에 불리한 기억은 생존에 유리하도록 변형 저장되거나 아예 출입문을 통과하지도 못합니다. 반대로 트라우마처럼 과대평가되어 자기 자신에게 더욱 얽매이게 만들기도 하죠. 그 어느 쪽이던 자기 생존에 관심이 증폭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이 쯤해서 던져보고 싶은 질문이 생깁니다. 도대체 성도는 어떠한 기억을 가지고 복음과 비복음을 분리해 내고 있는 것일까요? 성도는 내 머리 속에 들어온 어떤 이의 글이나 말을 무엇과 비교하길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요 저것은 [다른 복음]이라고 저주까지 퍼 부을 수 있는 것일까요?
더 나아가서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의 대뇌 피질에는 어떤 기억들이 남아있을까요? 그 역시 육체에 남겨진 채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었기에 그의 기억 또한 자신의 존재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조작되지는 않았을까요?
그런데 당황스러운 것은, 고린도전서 등 바울 서신을 보면 바울이 자신에 대해서 설명하는 부분이 매우 불안정하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결혼 생활에 관한 한 다른 사람들이 나와 같기를 원할 정도로 자신있는 모습을 보이다가도 자신은 세상의 찌끼요 구경거리로서 복음을 다 전하고 난 뒤 버려질 것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율법에 흠없는 자라고 하면서도 어떤 부분에서는 예수와 십자가 말고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종국엔 삼층천까지 경험했으면서도 죄인의 괴수라고 자신을 여깁니다.
즉 바울의 태도는 자신의 주장을 이용하여 자신의 존재가치를 고양시킨 후, 생존 질서 체계 속에서 유통시키고자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바울의 속셈이 [자기 키우기]에 있었다면 자신을 좀더 위대하게 보이려는 의도적인 일관성이 나타났을 것입니다. 위인 전기에 나오는 그런 것들 말이지요. 그도 그럴 것이 바울은 이미 고전 1장에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복음은 세상의 말과 지혜로는 해석이 불가하다고 선언해 놓고 있는 마당이니, 세상 구조 속에서 자기 키우기는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았겠지요.
이제 앞서 제기했던 질문들에 대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와 사도의 기억은 어떤 내용들로 구성되었을까요? 고린도전서에서 찾은 대답은 기억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 뿐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사랑이라는 사건 속에서 자신의 기억을 모두 죄로 고발당한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나를 별도로 구축하고 변명할 필요가 없어진 사건, 즉 십자가 사건이 사랑이라는 율법의 마침, 새 계명의 준수로 여겨지는 일련의 바람과 같은 흐름 속(성령)에 놓여 있는 것이죠. 그래서 기억은 죽음 속에서 불필요하게 되지만 사건은 여전히 나를 덮어 감사와 찬양이 성취되는 성전과의 일치됨, 법과 하나됨, 주님의 사랑을 받아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버린 사건만 남는 것입니다.
좀 더 들어 가겠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일으키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발생시키신 죽음과 부활과 부활 후 삶의 정갈함이 모두 예수님 담당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덧입고]있는 것입니다.
모자란 비유를 들자면, 알 몸으로 노숙하고 있는 아이에게 누군가 따뜻하고 깨끗한 옷을 입히면, 그 옷은 그 누군가가 아이를 배려한 증거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옷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한다면, 그 누군가의 사랑이라는 사건은 증발해 버리고 옷만 남게 됩니다. 이제 그 옷은 사랑의 증거물일 뿐만 아니라, 아이의 배신의 증거물이기도 합니다.
이 때 중요한 관점이 바로 그 옷을 준 것이 [누구를 위해서 인가]입니다.
전적으로 아이를 위한 옷이라면 아이가 옷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옷을 주신 분의 뜻에 맞습니다. 하지만, 그 옷을 준 행위를 통해서 옷 준 사람이 바로 [사랑]이라는 존재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 사건이 벌어진 것이라면 그 아이는 늘 옷이 필요한 벌거벗은 상태로 남아 사랑으로 옷을 입히는 사건의 객체로 남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옷은 구원받은 성도와 사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사랑] 그 자체이었음을 증거하기 위한 사건이라는 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고전 13장에서 하고 있는 주장입니다. 그 사랑만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이며 그것만 알기로 작정한 자가 바울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의 사건이 발생되기 위해서 인간은 모두 (그 사랑이 아니었다면) 정녕 죽은 존재요, 그 죽은 몸으로 행하는 모든 것은 시체놀이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과 시체놀이의 구별, 즉 주님과 한 몸이 된 산 영과 죽은 몸을 지배하고 있는 육이 어떻게 갈라지는지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이 바로 바울이 편지를 쓴 목적이지요.
고린도 교인들로 대표되는 육에 속한 자들은 바울에게 계속 질문합니다.
이들의 이러한 질문은 사실상 사랑의 증거물인 옷을 내가 갖고 싶다는 욕망의 분출인 것입니다. 계속 누군가 옷을 입혀주어야 하는 알 몸 상태가 아니라, 옷이 왜, 어떻게 주어졌는가는 묻지 않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떳떳하게 세상에서 유통되고 싶은 기억만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옷이라고만 하니까, 왠지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너무 심한 것 아닌 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 그깟 옷 한 벌 줘놓고 생색은 있는대로 다 내면서 옷 준 사람의 사랑만을 부각하고 있는 억지로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옷이 만들어 진 재료와 봉제 과정을 좀 심하지만 그대로 표현한다면 구조가 달라집니다. 그 옷의 재료는 한 젊은 남자의 몸 가죽입니다. 마치 포를 뜨듯이 가죽을 벗겨 내고 한 땀 한 땀 장인 정신으로 바느질해서 뚝.뚝. 떨어지는 선혈이 선명한 인육의 옷입니다. 그 가죽을 벗겨 낸 장본인이 바로 당신입니다. 좀 더 몸에 꼭 맞는 옷을 만들기 위해 꾹꾹 힘을 줘 바느질 한 사람이 바로 귀하입니다. 이제 폼나는 예수 밍크코트를 걸치고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게 세상 사람들, 이 옷 좀 보시게. 이 옷이 바로 [예수 안]이라는 옷이라네. 예수라는 젊은 남자의 가죽으로 만든 것이지. 그 예수란 젊은이는 평소 자신을 하나님으로 주장하고 다녔는데 자기의 살과 피를 먹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고 하더군. 그래, 나도 큰 맘 먹고 그 가죽 옷을 사기로 결정했네. 어때! 이만하면 천국잔치에 입고 갈 멋진 예복 준비는 종결된 듯 하지 않은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이 가죽 옷의 구매자들에게 바로 당신이 그 가죽을 직접 벗겨낸 장본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죽의 주인이 바로 하나님이셨고 지금 성령께서 그것을 계속 증거하시기 위해 의와 죄와 심판에 대해서 책망 중이시며,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그 분과 한 몸과 한 영이 된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고 하는 옷을 천국가는 영수증으로만 알고 꼭 쥐고 있던 자들에게 하나님의 가죽 옷을 벗겨낸 마귀 새끼들이 바로 [너]였다는 사도의 지목은 참으로 곤욕스러운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만회할 만한 기억들을 만드는 것으로 자신의 구원을 합리화 하는데 그 좋은 기억들의 대표적인 것들이 세례, 금욕주의, 소송과 음행에 대한 관용 등 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이 입고 있는 옷이 [구원에 적합한 멋진 ‘내’ 옷]으로 여길만한 [꺼리(행위)]를 찾고 있는 셈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가죽을 직접 벗겨낸 장본인인 줄 알고, 죄인으로 고백합니다. 지금 이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러니까 이 옷을 입고 있는 사람에게 적당한 세례의 주관자나 결혼생활의 지침이나 음행 등에 대처하는 자세 등을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게 이런 저런 질문을 쏟아 냈고 그 대답으로 편지를 쓰게 되었기에 그 첫 머리부터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임을 커다란 간판처럼 걸어놓고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도조차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치부해야 했던 것이고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않고 기도하는 기적은 오직 십자가 앞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또 강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그 행위에 집착하는 각종 질문들에 일체 답변하지 않고 1장만 쓰고 그만 두어야 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게 말입니다.
“예수 안에 있다면 모든 행위는 죄로 들어나는 거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능력이야. 그러니 세례니 결혼생활이니 쓸데 없는 질문은 앞으로는 하지도 말아라. 너희들은 그런 주제들이 못 돼!”
그런데 바울은 시시콜콜할 정도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이러면 안된다, 나처럼 되길 원한다, 이건 주님의 명령이고 이건 내 권면이다, 가급적이면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 등등 행동지침들을 적고 있습니다.
윽박지르고 편지를 맺을 만도 한 대, 중간 중간 복음의 취지를 밝히면서도 굳이 끝까지 그러한 질문들에 응대하고 있는 바울의 속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앞서 말씀드린 사랑이라는 것이 피와 곧장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육이 육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각자의 몫으로 돌아가야 할 꺼리를 제공하는 것임을 율법을 통해 잘 알고 있는 바울입니다.
다음은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의 대화를 가상한 것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 : 너희가 직접 십자가에서 죽었냐?
육에 속한 사람 : 아니다.
영에 속한 사람 : 예수님의 죽음을 덧입고 있는 것이지?
육에 속한 사람 : 맞다.
영에 속한 사람 : 너희가 직접 부활 했냐?
육에 속한 사람 : 아니다.
영에 속한 사람 : 예수님의 부활을 덧입고 있는 것이지?
육에 속한 사람 : 맞다.
영에 속한 사람 : 그럼 부활 후 삶(세례, 결혼, 소송, 음행 등)도 예수님의 다 이루심을 덧입는 것이지?
육에 속한 사람 : .......
(내심 : 그것만은 보답하는 차원에서라도 내가 꼭 해 내고 싶어요.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지침을 알려주세요. 어떻게 해야 할지... 제발)
지금 예수 안이라는 옷을 입고 그 죽음이 내 것 아니요, 그 부활도 내 것 아니지만 다 이루심의 능력을 모두 덧입고 있는 것처럼 부활 이후의 삶이 별도로 있다면 그것도 주님의 일하심을 거저 덧입는 것입니다. 굳이 부활 이후의 삶만은 내가 좀 나서야 겠다는 그 마음이 바로 가죽 옷을 입게 된 이유라고 바울은 알려주고 싶은 것입니다.
부활 후 삶만큼은 예수님의 일하심을 덧입지 않고 내 기억을 따로 만들겠다는 저의는 왜 인간이 십자가 죽음이 아니고서는 사랑을 깨달을 수 없는가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살아남고 싶은 것입니다. 당당하게. 십자가 앞에서도 말이지요.
영과 육의 그 갈라짐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사도바울은 소상하게 성도행동 표준윤리강령 정도로 이름 붙일만한 편지들을 적고 있습니다. 사실, 그 편지들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영과 육의 갈라짐이 선명하게 보여지고 있는지 셀 수도 없을 지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