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장부터 3장을 읽어보면 사도바울이 사람들을 분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 영에 속한 사람, 영에 속한 사람 중에 신령한 자(혹은 장성한 자),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 같은 자(혹은 육신에 속한 자) 등으로 나누면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고 있습니다.
분류의 목적은 이익의 극한 값 축출입니다. 분류를 할 때 그냥 분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렇게 나눌려고 하는 사람의 의도가 충분히 들어 있는 것입니다. 분류자는 분류 작업을 통하여 자신에게 가장 큰 이득, 혹은 가장 설득력을 강하게 할 목적으로 분류를 시작합니다. 이것이 보통 세상에서 일어나는 분류의 원인입니다. 그러니까 버섯을 식용버섯과 독버섯으로 분류하는 목적은 인간의 건강 증진이라는 목적에 부합하기 때문이며,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을 구별하는 이유도 그 분류의 기준과 인간과의 관계를 조합할 때 생겨나는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바울의 위의 분류, 육과 영, 그리스도 안에서의 장성한 자와 어린아이라는 분류(혹은 구별) 또한 위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일까요? 왜 사도바울은 사람들을 분류하고자 한 것일까요? 우리는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처음 적을 때부터 쭉 견지해온 이야기를 고려해 볼 때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7, 18)
사도바울은 말의 지혜를 거부합니다. 그러니까 위의 분류의 목적은 말의 지혜를 통해 복음의 논리를 설득시키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임을 누차 강조하고 있고, 그래서 본인 또한 이것 말고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계속해서 사도바울은 십자가는 비밀이며, 만세전의 일이며, 감추어진 것이므로 그것을 비밀로 한자, 만세전에 정한 자, 감춘 자만이 그것을 알 수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결국 성령만이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유일한 분이시며, 그 분께 가르침을 받은 자가 바로 신령한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7)
위와 같은 사도바울의 태도로 볼 때, 사도바울이 사람을 분류한 목적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복음을 설명하거나, 그들의 잘못된 태도를 비난하기 위한 근거를 만들거나 자신의 주장을 체계화할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사람의 분류를 통해서 비밀을 더욱 비밀스럽게, 감춘 것을 더욱 감춘바 된 것 답게 하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비밀은 도대체 알 수 없도록 되어 있음을 정교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알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류를 통해서 명확히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흔히 지혜있는 세상 학문하는 자들의 분류의 목적과는 정반대 입니다.
노골적으로 이렇게 까지 적고 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과 그 사랑하는 자들 사이에서는 과연 소통이 가능할까요?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 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9-11)
영에 속하는 자가 있는데 그것이 철저히 비밀이며 오직 성령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가능하다면,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은 원래부터 십자가를 깨닫는 것이 예초부터 글러 먹었다는 말입니다. 영에 속한 자 중에 장성한 자와 어린아이라는 분류를 통해서 장성한 자의 특징과 어린아이의 특징을 쭉 목록으로 만들어서 공적화하고 나름 예수 안에서 구원받았다고 주장하는 그러한 심보자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의 속성 그 자체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의 분류를 말의 지혜 혹은 세상의 지혜가 즐겨찾기하는 분류로 접근하는 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게다가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함정인 셈입니다.
제가 이제 8살 초등학생에게 다음과 같은 문제를 함께 풀고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다음 수들의 규칙을 알아보고 ( )에 알맞은 수를 적어 넣으세요.
3---7---11---( )---( )
어른들은 이미 정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3, 7, 11이 '4'만큼 증가하고 있다는 규칙이 있고 그러므로 ( )안에는 15, 19가 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문제를 잘 읽어보면 당연히 풀 수 있는 쉬운 문제라고 생각하죠.
"문제를 천천히 끊어서 잘 읽어라, 그러면 답이 보인다"
그러나 초등학교 1학년인 아이는 그 말이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한번 끊어서 읽어 봅니다.
다/음/수/들/의......
아무리 읽어도 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규칙이라는 말도 어렵지만, 규칙을 규와 칙으로 나누어 읽도록 유도한 아버지의 가르침은 더욱 어렵습니다. 도대체 알수 가 없습니다. 과연 답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 문제에 관한 한 모든 정보와 지식을 알고 있는 어른이 아이에게 가르치는 것은 그나마 수준을 낮추면 소통이 가능합니다. 그럼 이렇게 수준을 낮추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장성한 자와 어린아이의 소통도 가능할 까요? 그래서 사도바울도 그런 입장에서 지금 분류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사도바울은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님 뿐이라는 성령의 가르침 안에 들어와 보니 신령한 영에 속한 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었다는 사실만 더욱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온통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 궁리만 하는 죄덩어리였으며 나 또한 다른 개성없이 그저 그 중 하나에 불과했을 뿐이라는 것이 피 속에서 터져 나오더란 말이죠. 그러니까 영의 세계란 왜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이 우주의 주인이며, 왜 그러한 사실이 비밀이며 왜 인간은 철저히 육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없는 가를 통해서 의와 죄와 심판의 주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달려있음이 밝히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진리가 소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고유권한이라는 측면에서 분류를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성한 자와 어린아이 사이에 전달과 교육이 성립할 수 없고 오직 자라나게 하려는 분의 전적 은혜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 7)
지금 혹시 장성한 자라고 착각할 수 있는 바울이나 아볼로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 분류하는 것입니다. 분류가 불가능 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 분류에 충실하고자 옷매무세를 다시 챙기는 그 자의 속성을 폭로코자 분류합니다. 분류의 목적이 어떤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직 생명주시는 분은 하나님, 십자가지신 예수님 뿐입니다.
성령은 딱 하나, 이것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자가 그리스도 예수라는 기초 위에서 어떤 형태(금, 은, 보석, 풀 등)로든 십자가를 부정하고 자신의 공력을 자랑코자 하는 것이 무의미하며, 그에 따라 주어지는 상이나 벌도 모두 기초에 소급되어 버립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 3:23)
결국 사도바울이 고전 3장에서 이야기 싶은 신령한 자는 오직 성령 뿐입니다.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그 안에 담긴 모든 자들은 육신에 속한 자로써 왜 십자가 피가 구원의 유일한 길인지를 늘 성령에게 배워야 할 처지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분류라는 언어를 통해서 길게 다시 적을 뿐 입니다. 영은 영이고 육은 육입니다. 육이 영에 들어갔다면 영의 사랑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