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다른 복음의 기준
모든 언어는 주체의 욕망을 담는 그릇입니다. 왜냐하면 말하는 주체는 언어를 통하여 비로소 자신의 욕망을 구체화하면서 듣는 자들을 자신의 내부 욕망체계로 끌어당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언어는 이미 고정된 어떤 의미가 있다고들 생각합니다. 소위 말하는 사전적 의미가 그것이죠. 그런데 인간의 지배욕은 그 언어가 가진 사전적 의미 말고 그 때 그 때 욕망의 흐름에 따라 얼마간의 변동이 가능한 데, 그것을 ‘맥락’이라고 합니다. 흔히 ‘말귀도 못 알아듣는다’고 할 때 그 말귀입니다. 말귀,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소통이죠. 결국 소통도 욕심의 교환이며 이해했다는 말은 거래의 조건이 분명해 졌다는 의미입니다.
성경 해석은 언어를 통한 이러한 욕망의 거래에 대한 심각한 예외입니다. 왜냐하면 거래당사자들 모두를 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영혼과 골수 및 관절까지 아주 잔인하게 토막내서 말입니다. 즉, 성경의 저자는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 인간과 소통할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욕망의 성공적 거래 조건인 [역사]라는 것 또한 성경 해석에서는 배척당합니다.
역사라는 것을 마치 [실존]과 동의어로 사용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만, 실존은 사건 혹은 현상에 불과한데 비해서 역사는 실존 중 역사라고 부르는 주체에 의해 [중요하다]라는 의미를 부여받은 것으로 일련의 맥락, 그러니까 주체의 불안정한 욕구의 흐름 속에 자연스럽게 배치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역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르는 주체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인간의 세계에 구속당한 채로 있기 때문에 그것을 기준삼아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육으로 영을 해부하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육으로 영을 해부한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아니던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이 육으로 남고 영은 영으로 남도록 조치하시는 이유는 그 사이에서 흘러나온 사랑의 피만이 모든 해석의 기준됨을 영원히 지속하시겠다는 취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어떤 구절이나 어떤 이의 글이나 설교가 복음적 인지 여부를 판단할 때 그 기준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 외에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결심의 내용, 그러니까, 예수와 그의 십자가 지심 말고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했다는 말씀은 이렇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주인이 아닙니다. 누군 가의 종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그 누군가의 이름은 딱 둘 뿐입니다. [의] 아니면 [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말과 행동은 모두 죄가 시키는 대로 혹은 의가 시키는 대로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럼 A라는 행위만으로는 그것이 죄인지 의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A를 누가 시켰는가를 봐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설교나 글이 다른 복음인지 여부를 확인할 때는 그것을 누가 시키고 있는 지를 보고 그 주인장을 공격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죄와 의에 대한 관점을 공개해야 되는 것이죠. 이렇게 공개되면 심판이라는 개념이 자연스럽게 의를 가지고 죄를 치게 되죠. 의와 죄와 심판관이 모두 공개되면 이제 남은 차례는 성령이 갖고 계신 의와 죄와 심판관에 의해 책망 받는 것 뿐 입니다.
성령은 앞서 말씀드린 죄와 의의 유일한 기준이신, 십자가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므로 결국 예수님을 증거하느냐 나를 증거하고 있느냐를 기준으로 책망하십니다.
이제 ‘막 산다’라는 표현에 대해 검토해 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막 산다라는 표현이 과연 의와 죄를 구별하는 기준일까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행위를 하는 자는 곧장 죄의 종이나 의의 종이라고 추측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의에 의해 용서받았다면 이미 사함을 받았기에 다른 이가 정죄할 수 없고, 버림받았다면 그대로 죄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의와 죄를 구별하는 독점권을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 가지고 계시므로 어떤 사람이 무슨 말을 하던지 간에 십자가 사건으로 소급되며, 그 소급은 다시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수 밖에 없었는가]를 증명할 때 소비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어떤 분들은 댓글을 통해서 그런 말이 복음 증거에 [불리]하다는 취지의 글을 쓰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십자가 사건은 새로운 피조물을 생산해 내는 완벽한 하나님의 [창조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사건에 인간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좋은 조건, 나쁜 조건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요? 처음 창조가 그러했듯이 모든 인간의 조건은 창조 전 [혼돈]이라는 단어 속으로 흡수되면 그 뿐입니다. 창조를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창조가 없다면 아무데도 쓸모없는 혼돈 말입니다.
인간이 생각한 조건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다른 조건이 있나요? 즉, “내 아들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한 것은 사실 이러이러한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뿐이다”라고 하신 그 엄청난 조건이 성경 또 어디에 있나요?
또 어떤 분은 막 산다고 하는 것은 나쁜 것이라는 전제하에 하나님의 이끄심에 의해 [순종]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순종을 두 가지 경우로 나누어 보겠습니다.
1. 순종 = 하나님의 이끄심 + 인간쪽의 반응
---> 이 경우는 십자가 창조 사역에는 그 어떤 인간 쪽의 반응이나 조건도 필요없다는 앞의 설명에 위반됩니다.
2. 순종 = 순수한 하나님의 이끄심만
---> 이러한 경우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생깁니다. 즉, 순수한 하나님의 일하심만으로의 순종은 오직 하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뿐 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는 굳이 [예수 안]이라는 가죽 옷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그 분의 순종을 입은 채 별도의 순종이라는 것을 해야만 한다면 예수님의 순종은 무색해져 버립니다. 자신의 아들의 희생을 무색하게 만드는 것이 과연 순수한 하나님의 이끄심일까요? 결국 이러한 순종은 [예수 밖]에서의 독자적인 순종을 말합니다. 예수 밖과 순수한 하나님의 이끄심이라는 말은 상호 모순됩니다.
결국 [막 산다]라는 말은 의와 죄의 구별점도 아닌 그냥 죄이며, 하나님의 이끄심에 의한 순종이라는 것 또한 죄라는 것이 밝혀집니다.
이제 구조는 명확해졌습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 의인이시며 그러므로 죄와 그에 대한 심판권을 독점하고 계십니다. 그가 십자가라는 가장 말석에 앉으셨기에 그 안에 놓인 성도도 덩달아 말석에 앉게 되며, 그가 십자가라는 가장 겸손한 모습을 보이셨기에 그 안에 놓인 성도로 덩달아 겸손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 뿐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144,000명이 모두 말석에 앉아야 한다면 계속해서 뒤로 뒤로 방석을 놓은 헤프닝을 보이다가 결국 모두 한 줄로 쭉 앉게 되고 말겠죠^^ 모두 옆으로 쭉 앉으면 그것은 아예 말석이 존재하지도 않는 상태가 됩니다. 맨 왼쪽이 말석이라고 하면 또 다들 방석을 들고 왼 쪽으로 왼 쪽으로 경쟁을 벌여야 할 판입니다.
십자가 외의 모든 것은 십자가 창조사역에 의해 새롭게 될 대상에 불과합니다. 의에 의해 씻김 받아야 할 죄에 불과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은 살아있는 것 자체가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넉넉한 창조사건의 객체가 된다면 이 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