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6장 9절~10절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만약 위 본문을 성령 받지 못한 평범한 윤리의식을 가진 자가 읽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구절이 이해가 되지 않을까요, 아니면 아무런 거리낌없이 잘 이해될까요? 그리고 이해되었다면 그 구체적인 내용은 어떤 것일까요?
너무나 잘 이해 될 것입니다. 저렇게 막 사는 사람들은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것은 종교 불문하고 누구나 인정하는 바입니다. 즉, 위 본문에서 열거하고 있는 모습을 이해하는 데 굳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론하지 않아도 됩니다. 음란, 우상숭배, 간음, 탐색, 남색, 도적, 술 취하는 것, 후욕, 토색 등의 개념은 죄악된 세상에서 유통되고 있는 윤리의식으로도 가뿐하게 거부하고 자신과의 거리를 최대한으로 벌려놓으려는 책임감 내지는 선한 양심의 동력으로도 분별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이 이해한 구체적인 내용인 즉, 세상 윤리관과 아주 잘 맞아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큰 문제이지 않습니까? 기존 죄인들의 윤리의식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성도의 삶이 십자가 능력의 결과물이라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은 괜한 일을 벌이신 꼴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빼도 다 알아듣는 나쁜 짓 아닙니까? 알았으니 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노력하면 될 일을 왜 굳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귀한 신분이 친히 육체로 오셔서 그것도 개보다도 못한 극악무도한 인간 버러지들이나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를 짊어져야 그것이 나쁜 일인 것인 줄 깨닫고 그 일을 하지 않도록 또 성령이 돕고 노력하고 반성해야 한단 말입니까?
평범한 윤리의식을 가진 불신자가 질문할 것입니다.
“도대체 십자가 사건이 벌어질 이유가 무엇인지요?”
제가 이것을 문제시 하는 이유는 소위 성화론, 별도의 성도의 삶, 성도의 애씀, 노력, 진정성 등을 이야기 하시는 분들의 공통점 때문입니다. 그 분들은 바로 위 본문에서 열거하고 있는 유형의 삶을 [좋은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고 그 근거가 다름 아닌 [윤리의식]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절차도로 그려보면 이렇습니다.
십자가 → 성도 → 성도의 삶(경건한 삶, 위 본문과 같은 유형의 삶) → 좋은 것
이 때, 성도의 삶이 경건하다, 그래서 좋다라고 판단하는 기준이 뭐냐 이 점을 지금 문제삼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만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이 참 하나님이다라고 큰 목소리로 주장하다가, 바로 그 십자가로 파생된 성도의 삶이 경건하다, 천국의 삶이다, 좋은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진정성을 가지고 노력해야 한다고 할 때, 그렇게 몰고가는 힘의 원천이 무엇이냐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싶은 것입니다.
경우의 수는 단 2가지 뿐이겠지요?
첫 번째 경우, 십자가지신 예수님 기준이다.
두 번째 경우, 인간의 선악관이 기준이다.
그런데 문제는 모두들 자신의 주장의 근거는 첫 번째라고 한다는 점이죠. 하지만 저는 그 사람들의 주장은 여전히 두 번째인 인간의 선악관에 근거한 것에 불과하다고 지금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그 주장의 근거를 제시해야 할 시점입니다.
만약 [십자가 → 성도 → 성도의 삶(경건한 삶) → 좋은 것] 이라는 이 판단이 십자가 지신 예수님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라면 도대체 불신자들은 어떻게 위 본문의 삶의 모습을 좋은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예수 밖에 있는 자들도 옳다고 여기는 것들을 예수 안의 사람들도 옳다고 여기는 것이 수상하지 않는가 하는 점입니다. 서로 원수관계인데, 십자가를 사이에 놓고 서로 죽은 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의 모습은 같다??? 피뿌림의 용서하심이 없어도 옳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을 예수 안에 있는 사도바울이 권면이라면서 성도에게 전했다???
이것이 맞는 주장이라면 예수님 안이라는 세계는 고작 세상 윤리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가치관에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통일된 우주 전체의 주되심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선악관에 의해 파생된 윤리가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십자가 필요 없습니다.
성화론을 주장하는 어떤 분이 이렇게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꼭 살아야 한다는 [법]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그 행위를 구원의 요건으로 삼는 것도 아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면 위 본문에서 말하는 삶처럼 살려는 갈망이 당연히 성도에게 나온다. 그래서 성도는 막살 수 없고, 주님이 막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신다.”라고 말입니다.
자, 이 부분을 조금 세밀하게 돋보기를 대고 확대해 봅시다.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 십자가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아니면 윤리의식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십자가에서 비롯되었다면 십자가는 대속의 피이기에 용서받을 [죄]가 나와야 하는데 위 주장 속에는 도대체 죄가 보이질 않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혹시 초등학생 권장도서인 은혜갚은 까치나 은혜갚은 호랑이 같은 동화책 속에서도 쉽게 발견되는 수준의 것이 아닐까요?
성도가 막 살수 없고 막 살도록 주님께서 내버려두지 않으신다고 할 때, 그 [막 되먹음]을 판단하는 근거가 바로 세상 윤리의식 아니냐 이 말입니다.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은 자는 음란하지 않다, 호색하지 않는다, 도적질 하지 않는다. 어때 이만하면 착하지? 이런 착함이 바로 십자가 구원의 효능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 아닙니까? 여기에 무슨 비밀이 있고, 계시가 필요하며, 죄와 피가 등장하겠습니까? 성령의 교통하심이 왜 필요합니까? 잘 만 통하는데.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음란, 호색 도적질이라는 개념을 십자가와 무관하게 정립해야 하고, 그것은 결국 상대적인 선악관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겠기에 결국 기준없음만을 증명할 뿐입니다.
즉, 십자가 사건과 세상 윤리와의 교집합이 성사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이 길이 아니죠. 세상 윤리 쪽에서도 접근 가능한 틈이 생깁니다. 이러한 안목이 사도바울의 안목과 같습니까? 사도바울은 예수 안에서 보니까 세상 모든 지식이 다 배설물이 되어 버렸다고 했습니다. 배설물 속에서 진리에 접근하기 위한 어떤 통로를 발견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 길 맞구나]가 계속 영원히 고백됩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권면했던 수많은 내용들을 세상의 윤리의식은 똥, 오줌으로 만들어 버리면서 여전히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 길 맞구나]하는 쪽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다른 복음] 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안목과 일치하는 것일까요? 고전 2:2에서 큰 간판처럼 걸려 있다는 그 말씀 속에서 권면의 말씀들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한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음란, 우상숭배, 간음, 탐색, 남색, 도적, 술 취하는 것, 후욕, 토색하지 마라]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받지 못한 사람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음란, 우상숭배, 간음, 탐색, 남색, 도적, 술 취하는 것, 후욕, 토색하지 마라]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고객 끄덕일 수 있는 경건은 경건도 아닙니다. 오히려 사도바울이 말한 권면의 말씀들이 주는 이미지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왜입니까? 십자가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도의 삶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음란, 우상숭배, 간음, 탐색, 남색, 도적, 술 취하는 것, 후욕, 토색하지 마라]는 이 지구상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반갑고 지혜롭게 여겨지는 것들 아닙니까? 어떤 사람이 이런 것을 거리끼는 것이요, 미련한 것이라고 할까요? 성도가 세상이 거리끼고 미련하게 여기는 십자가로 태어난 새로운 피조물이라면, 그의 삶 또한 세상 사람들에게 거리끼고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열매는 나무와 일체이니까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한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음란, 우상숭배, 간음, 탐색, 남색, 도적, 술 취하는 것, 후욕, 토색하지 마라(A)]는 A를 간절히 성취하고 싶은 자신이 구원받을 수 없었던 존재, 즉 [죄인의 괴수]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있기에, 주여 저를 떠나소서라는 [상한 심령]이 하얀 뼈처럼 드러나는 삶입니다.
A를 하면서 자신이 죄인의 괴수임이 드러납니까? 아니면, 그렇지 못한 자들은 성도 아니라고 , 막사는 자에 불과하다고 하는 새로운 법이 생깁니까? A를 지키면서 주여 저를 떠나소서 라는 상한 심령이 드러납니까, 아니면 주여 이것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라는 새로운 각오와 다짐이 드러납니까?
모든 것이 십자가 은혜라고 해놓고는 무엇인가 불안하니까, 십자가 은혜에서 파생되어 나온 삶의 가치를 기존 선악관이 덥썩 물고 달아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에 안도가 됩니다. 왜요? 내가 이해되고 세상 모두가 잘 알아들을 수 있거든요. 외롭지 않습니다. 든든합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거리끼거나 미련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의 이 권면의 말씀들(A)은 왜 하필 선악관 중에서 [선한 것]과 중첩되는 것처럼 보일까요? 이 글의 제목입니다. 왜 굳이 세상 윤리와 혼동되도록 기록되었는가?
창세기 3장 6절 상반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을 딱 2명으로 분류하신 이유입니다. 첫 번째 아담, 두 번째 아담......
역사적 해석이 잘못된 이유가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시간은 없습니다. 그냥 두 사람만 있습니다. 어느 시대, 어떤 사건도 모두 첫 번째 아담 속에 들어 있습니다. 시간이 전혀 흐르지 않습니다. 그 흙이 그 흙이요, 그 안개가 그 안개며, 그 뼈다귀가 그 뻐다귀입니다.
창조의 과정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라사대 → 그대로 되니라 → 보시기에 좋았더라
십가자 창조 과정을 이렇게 정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이신 예수님 →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 → 보시기에 좋았더라
십자가 사건을 흔히 새로운 창조사역이라고 합니다. 그 속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피조물이 바로 성도입니다. 그 성도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습니다. [여자가 보기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것은 뱀과의 소통의 조건입니다. 그런데 생명나무인 십자가는 선악과를 따 먹고 난 후에야 비로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면서 위력을 발산합니다. 즉, 여자가 보기에 좋은 것(죄)를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으로 날마다 바꿔치기 하는 것입니다. 이 전체를 의라고 하고 그렇지 못한 것 전체를 불의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권면의 말씀이 보기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시다면 마음껏 드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가 원래 저주받아 마땅한 내 자리 맞가 때문입니다. 그 다음의 용서, 사랑의 영역은 주님의 몫입니다. 화염검으로 에덴동산에 접근을 막으셨던 것이 주님이셨듯이 말이지요.
사도 바울은 예수 안이라는 새로운 창조질서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아는 나무의 위력을 그대로 말씀 속에서 재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그대로 다 응하게 됩니다.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