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무대
2026년 6월 10일 본문 말씀: 열왕기하 7:16-20
(7:16) 백성들이 나가서 아람 사람의 진을 노략한지라 이에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이 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이 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고
(7:17) 왕이 그 손에 의지하였던 그 장관을 세워 성문을 지키게 하였더니 백성이 성문에서 저를 밟으매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죽었으니 곧 왕이 내려왔을 때에 그의 한 말대로라
(7:18) 일찍이 하나님의 사람이 왕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한즉
(7:19) 그 때에 이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 일이 있으랴 하매 대답하기를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였더니
(7:20) 그 장관에게 그대로 이루었으되 곧 백성이 성문에서 저를 밟으매 죽었더라
인간은 자신이 살던 그 시대상이 마치 표준인 것처럼 여겨서 후대에 물려주려고 합니다. 그것은 본인 시대에 본인이 엄연히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항상 자신 생각을 기준으로 해서 살고자 합니다. 오늘 등장하는 장관도 예외가 아닙니다. 상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갖고 삽니다.
거기에 비해서 선지자 엘리사의 주장은 터무니없어 보입니다. 양식이 고갈된 현상황에서 24시간 내에 풍족인 양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누가 들어도 성사될 수 없는 주장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초인적인 능력까지 거론해도 말이 안될 지경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7:19) 이게 무슨 말일까요? 넉넉한 양식을 보게 된다면 그 어떤 경우라도 먹을 기회를 가질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들 누구라도 자신있게 주장할 내용일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 일어난 일은 ‘못 먹는 것’이 아니라 ‘죽었습니다’
이 ‘죽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예언이 도달되면서 예언 성취 과정에 필히 일어나야 할 사항이 됩니다. 죽음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예언은 실제적으로 성취되지 않는 겁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인간들이 제일 기피하는 경우입니다. 즉 아무리 좋은 취지의 일이라도 내가 죽으면 그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식입니다.
그런데 이 죽음을 필히 유발하게 하는 예언의 원칙이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졌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2-3)
즉 축복과 저주의 기준이 실제로 이 땅에 어떤 인물 중심으로 주어진다는 겁니다. 이 아브라함이 언약에 의해 부풀어진 것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따라서 이 ‘이스라엘’이라는 본질은 언약이 계속 살아있는 경우에서만 성립하는 겁니다. 신약 때에 들어와서 예언이 어떤 형식을 갖추어지는 지는 마태복음 9장에 나옵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 9:16-17)
여기서 새 포도주는 예수님을 뜻합니다. 그리고 부대는 그 예수님을 제대로 모시고 담을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옛 공동체에서 새로운 공동체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언약에 의해서 탈락자가 등장해야 하고 그들은 실제로 죽어야 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무대로 신기한 언약의 복과 처벌이 함께 일어납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신기한 점은 성막이라는 텐트가 세워진다면 그곳에 함부로 들어가면 실제적으로 죽은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일부러 죽이지도 않는데 죽는다는 겁니다. 지성소에 함부로 들어가면 죽습니다. 이 진영이 다음 코스로 이동해놓고 남겨진 그 현장에서 가보면 그때는 성막이 있던 장소에 가도 죽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께서 설치하신 무대입니다. 언약의 무대입니다. 오늘 본문도 하나님의 예언을 위해 일들이 펼쳐지는 무대입니다. 네 명의 문둥병자들은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 구역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들어가면 죽는다는 그 지역에 많은 물자들이 있음을 알고 다시 산 채로 살아 돌아왔습니다.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구역에서 내가 죽게 되는 구역으로 둘로 나뉘어지는 무대, 이 무대를 향하여 오늘 본문에서 많은 백성들이 ‘죽음의 구역 쪽’으로 질주하다가 성 문에 서 있던 장관을 밟아죽이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백성들이 죽음의 구역쪽으로 달려가서 결국 그들이 많은 양식을 얻게 되는 것은 엘리사의 예언 때문입니다.
이 예언대로 그들이 배부름은 얻었지만 그 과정에서 한 장관이 죽임을 당합니다. 죽음을 함유하지 않는 언약 성취란 없습니다. 그 예가 민수기 25장에 나옵니다. “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더라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었더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민 25:8-11) 무려 24,000명이 죽고 난 뒤에 새로운 공동체서 이스라엘이 시작됩니다.
여호수아 7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아간 한 사람의 도적질로 인하여 이스라엘 전체 공동체가 진격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 아간을 돌로 쳐서 돌무더기에 묻고 난 뒤에 이스라엘은 그 다음 경로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신약의 무대는 같은 평면에 마련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으로 두 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면 비록 숨을 쉬고 산다할지라도 그것은 산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겁니다.
진정 살았다는 것은 부활의 능력이 임한 사람에게만 해당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9-11)
어린아이 동화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동물원에 간 아이들은 목이 긴 기린이 다른 동물들과 같이 있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기린 아저씨, 나무 위에 올라가면 안 돼요” 그러자 기린 아저씨가 말합니다. “나? 나는 나무 위에 올라가지 않았는데?” 성령을 받은 자가 보면, 이 예수님의 언약의 부대로 살지 않는 자는 이미 죽은 자에 해당됩니다.
그들이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 보이지만 그들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기에 실은 죽은 자입니다. 따라서 신약이라는 무대의 배우로서 성도는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도입니다. 전도란 이미 죽은 자를 향하여 “죽었다!”고 말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것에 미련 갖지 말고 성도로서 할 일을 쉬지 않고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9강-열왕기하 7장 16-20절(부활의 무대) 260610-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7장 16절에서 20절까지입니다.
열왕기하 7:16-20
“백성들이 나가서 아람 사람의 진을 노략한지라 이에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이 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이 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고 왕이 그 손에 의지하였던 그 장관을 세워 성문을 지키게 하였더니 백성이 성문에서 저를 밟으매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죽었으니 곧 왕이 내려왔을 때에 그의 한 말대로라 일찌기 하나님의 사람이 왕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한즉 그 때에 이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 일이 있으랴 하매 대답하기를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였더니 그 장관에게 그대로 이루었으되 곧 백성이 성문에서 저를 밟으매 죽었더라.”
오늘 본문의 말씀은 죽었던 한 장관에 대해서 초점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장관은 왕이 참으로 총애하는 장관이었습니다. 7장 2절에도 나와 있지요. “그 때에 한 장관 곧 왕이 그 손에 의지하는 자….” 장관은 왕의 대리자, 대리인같은 역할을 했던 사람입니다. 이때 왕은 여호람 왕인데 그 왕이 국가의 사정이 아주 긴박하게 돌아갈 때 하나님에 대해서 공격하는 태도를 보였고, 실질적으로 선지자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열왕기하 6장 31절에 보면, “왕이 가로되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날 그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실찌로다 하니라.”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여, 당신 선지자 내가 죽일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그런 식이지요. 선지자 안 죽이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라고 할 정도로. 자기가 아는 하나님과 엘리사 선지자의 하나님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는 거지요.
그 차이를 없애기 위해서 ‘내가 엘리사를 죽여도 하나님은 아무 소리 못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진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처럼 대외적으로 이야기했어요. 왕이 먼저 선지자를 갈구었고, 도전했고, 죽이려고 달려들었습니다. 덩달아 왕의 대리자 역할을 하는 한 장관이 거기에 덩달아 호응해서 선지자의 그 말, 예언에 대해서 정면으로 ‘웃기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라고 공격하면서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왕하 7:2) 한 거예요.
왕이나 장관이 그런 발언을 한다는 것…, 장관은 퍽이나 이성적인 사람이잖아요.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지요. 배울 만큼 배우고 이성적인 사람이 사태에 대해서 해석하면서 ‘하늘에 창을 낸다 해도 이것은 해결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수밖에 없는 정확한 판단을 내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이상한 것은 누가 이상하냐 하면, 엘리사 선지자가 이상한 거예요. 엘리사 선지자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열왕기하 7장 2절에, “엘리사가 가로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라고 되어 있거든요. 여기서 ‘그것을 네가 네 눈으로 본다.’ 그다음에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한다.’ 이렇게 예언을 한 겁니다.
오늘 본문 열왕기하 7장 17절에 “왕이 그 손에 의지하였던 그 장관을 세워 성문을 지키게 하였더니 백성이 성문에서 저를 밟으매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죽었으니 곧 왕이 내려왔을 때에 그의 한 말대로라.” 장관이 성문에서 밟혀 죽었어요. 이렇게 되었을 때 선지자의 예언을 그 해석을 달리해야 해요. ‘장관은 많은 양식을 볼 것이다.’ 그다음에 ‘그러나 못 먹는다.’ 선지자가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정확하게 말해서 ‘죽는다’예요. 죽는다.
하나님이 예언을 하게 되면 반드시 그 결과가 나오는데 그 결과가 다음에 새로운 예언에 합류가 돼요. 예언했다, 결과가 주어졌다, 결과가 주어졌으니 이전의 예언은 버리는 것이 아니고, ‘예언 + 결과 = 새로운 예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작용하게 되면 반드시 거기서 새로운 예언에 적용받는 공동체가 새롭게 조성되었다고 볼 수 있거든요.
‘새롭게 조성된 공동체의 특징은 그 안에 죽음이 깔려 있다.’ 이렇게 공식화시킬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민수기 25장 같은 경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우상을 섬겼습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겼더니만 전염병이 나서 몇 명이 죽었느냐 하면, 2만 4천 명이 죽었어요(민 25:9).
2만 4천명이 죽었을 때 민수기 5장 7-8절에,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보고 회중의 가운데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비느하스가 우상숭배를 했던 남녀를 죽임으로써 2만 4 천명 선에서 끊어져서 전염병이 더 이상 퍼지지 않았는데 거기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민수기 25장 11절에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비느하스가 그들을 안 죽였으면 계속해서 죽는 숫자가 더 많아졌을 거예요. 민수기 25장 12절에,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하나님의 예언이 주어지게 되면 거기에 예언의 위반자가 등장하고, 하나님의 그다음 언약의 시기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그 위반자가 필히 죽어야 하고, 그 죽었다는 사실을 포함시켜서 새로운 언약으로, 새로운 예언으로 굳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의 예언은 하나도 누수가 없는, 허비되지 않는, 꽉 찬, 그래서 반드시 그 결과가 꽉 차고 그다음 시대에 인수인계되는 거예요. ‘죽은 사람은 죽은 거고 우리는 살자’가 아니라, 죽었다는 그 내용을 그대로 품고 그다음 공동체에 넘어가는 거예요.
또 예를 들면 여호수아 7장에 ‘아간’이라는 사람 있잖아요. 이것은 안 찾아봐도 여러분이 잘 아시지요. 여리고 성에서 즐겁게 이겼잖아요. 그러면 되었잖아요. 그런데 그중에 딱 한 사람, 아간이라는 사람이 공동체를 생각하지 않고 개별자, 자신의 이득을 탐해서 하나님께 바쳐야 할 전리품 중에서 약간을 자기 쪽으로 옮겨왔어요. 여리고 성 다음에 아이 성을 치는데 그것 때문에 전쟁에서 패배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여호수아가 초반에는 승리했으나 약속의 땅을 차지 못 할까 싶어서 괴로워할 때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간을 제비뽑기로 색출하게 했어요. 색출해 보니까 유다 지파의 아간이 당첨되었어요. 여호수아 7장 21절에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아간이 훔친 물건을 감추었다고 했거든요. 안 들키게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물건을 누가 감췄는지 딱 지적해서 아간을 끄집어냈습니다. 그런데 아간같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사람이 몇 명이냐? 단 한 명이에요, 한 명. 여러 명 아니에요, 한 명이에요. 우리 같으면 그 한 명 정도는 무시하고 하나님께서 아이 성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딱 그 한 명 아간이 하나님의 뜻을 위반했기 때문에 아이 성에 갔다가 36명이 죽고 전체 공동체가 패배했습니다. 그래서 그 한 명을 어떻게 했느냐? “여호수아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뇨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그것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날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 극렬한 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날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수 7:25-26). 이렇게 했더니만 그다음에 아이 성에서 승리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이스라엘 인도하심이 아니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현재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에요.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언약을 구원합니다. 언약에 위배 되고 언약에 대치되는 자들은 그때마다 색출해서 퇴출시키는데 퇴출시키는 그 원칙이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퇴출시키는 그 원칙이 예언에 추가되면서 ‘이런 경우에는 퇴출당한다’라는 새로운 내용이 첨가되면서 그다음 세대로 예언이 또 적용되는 거예요.
이러한 법칙을 여러분이 간편하게 한꺼번에 알고 싶지요? 한꺼번에 알려드리겠습니다. 이 법칙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창세기 12장 2-3절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계시하기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니지요?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그러니까 이스라엘 내의 언약의 내용은, 예언의 내용은 ‘복 받았다’ 이것만 있으면 안 되고, ‘이런 경우에는 저주도 받았다. 누가? 우리 혈육공동체 가운데 저주받아서 탈락한 사람이 있다.’ 이것을 품고 그다음 세대에 새로운 언약의 규칙으로서, 아브라함 언약의 연속성으로서 새로운 시대에 적용되는 거예요.
이제 여러분이 분명히 아셨지요? 하나님은 인간 구원에 관심이 없다고요. 하나님은 아주 독하게 언약 구원에만 관심이 있어요. 신약적으로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는 데 관심이 없고,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에 관심이 있어요.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구원하신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더 정확하게 해서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을 구원한다.’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사람을 구원하는 거예요.
과연 신약에도 그 원칙이 유지될까요? 유지됩니다. 마태복음 9장에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말씀이 나와요. 16-17절에,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여기서 포도주는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새부대는 뭐냐? 새부대는 없지요. 없기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새부대를 만드는 작업을 하셔서 예수님에 의해서 새로 만들어진 그 포대, 포대기죠, 술 담는 포대, 그 포대에 예수님 자신을 거기에 담기게 하는 조치를 하셨다는 그 말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언약이고, 이게 아브라함의 언약, ‘나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나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받는다’라는 원칙이 그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거예요.
우리는 어떻습니까? 무엇을 담고 있는 포대입니까? 예수님 말고 다른 것을 담고 있지는 않는지요? 나의 희망, 나의 포부, 나의 소원, 이런 것을 담고 있지 않습니까? ‘빨리 취직해서 여자 만나서 장가가야지’ 이런 것. 젊은 사람들 다 그렇지요. “너 앞으로 뭐할 건데?” 하면 그 이야기 하잖아요. “너 앞으로 뭐할 건데?” “난 예수님을 담을 거예요.” 제가 말하면서도 우습습니다. 하도 이 시대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요, 어려워요.
방금 이야기한 것을 정리합시다. 언약이 주어져서 새로운 공동체가 구성되는데 반드시 거기에 무엇을 거친다? 누구 하나 죽어야 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장관은 새로운 양식을 그냥 못 먹는 것이 아니고, 엄밀하게 말해서 죽었기에 못 먹었어요, 죽어서. 장관이 죽었다는 말은, 그 왕을 죽였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열왕기하 7장 17절 다시 보면, “왕이 그 손에 의지하였던 그 장관을 세워 성문을 지키게 하였더니 백성이 성문에서 저를 밟으매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죽었으니…” 죽었다고 되어 있어요. 그래서 “곧 왕이 내려왔을 때에 그의 한 말대로라.” 왕이 확인한 거예요. 자기를 대리한, 자기의 지시와 명령을 백성 앞에서 중간자로 대리했던 그 사람이 ‘어디 있나?’ 보니 죽었어요.
그 장관이 죽었다는 말은 누가 죽었다는 말입니까? 왕의 말이 먹히지를 않은 거예요. 왕이라는 존재 자체가 새로운 공동체에 있으나 마나 한, 이미 죽은 자에 불과하게 된 그러한 사태가 일어난 겁니다. 그게 다 뭐냐? 엘리사 선지자가 내뱉은 그 예언의 말씀 때문에 그런 사달이 난 거예요. 예언의 말씀 때문에!
그 예언의 말씀을 백성들은 알았느냐? 백성들도 못 알았지요. 그러면 누가 알았어요? 아무도 못 알아들었어요. 엘리사의 예언을 해석하고 이해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이게 오늘 설교의 핵심이고 관건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같이 생각해 봐야 해요. 아무도 없는데 왕만 죽었어요. 백성은 살았고, 그리고 예언은 엘리사 입에서 나왔고.
엘리사가 하나님의 입장에서 문제를 던진 거예요. 답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고, 괜히 대꾸한 사람만 대꾸했다가 죽고 나머지가 그 예언의 혜택은 입고. 딱 요 형식이요, 요 형식이 마치 뭘 말해주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외칠 때 아무도 못 알아들었고, 그래서 예수님이 죽을 때 아무도 – 열두 지파도 말리지 못했어요 – 말리지 못했고, 죽은 것은 가룟 유다가 죽었고, 예수님께서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하니까 그 부활의 혜택을 입은 사람은 등장했고, 그들은 새로운 언약 완성의 혜택을 입었고, 그들이 뭐냐, 새로운 공동체고, 그들은 예수님을 담고 살아가는 ‘새 술은 새 부대’에 해당되는, 곧 예수님이 마태복음 9장에서 한 그 예언의 말씀이 직방으로 성취가 된 그 사람이 등장했고.
사실은 그 가운데 가룟 유다만 죽은 것이 아니지요? 누구도 죽었어요? 예수님도 죽었지요. 그래서 이 정형화된 언약의 규칙을 분명히 한꺼번에 확 알기 위해서는 제가 이 단어를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무대, 영어로 하면 stage, 연극이나 어떤 쇼를 할 때 무대가 있지요. 무대인데 두 종류의 무대가 있음을 이야기할 수 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직설적으로 ‘하나님의 예언에 대들면 죽는다.’ 아까 본 민수기 25장에서 2만 4천 명 죽었지요?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언약궤 들여다보다가 죽었지요?(삼하 6:19) 그 ‘죽었다’는 실제로 죽었어요, 실제로! 오늘 본문의 장관도 실제로 죽었다고요. 실제로 죽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문둥병 걸리기도 하는데 실제로 죽었던 그 무대는 이방 민족한테는 해당되지 않고,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한테만 그 스테이지, 무대가 주어집니다. 실제의 무대.
제가 성경 보면서 가끔 ‘기이하다, 참 기이하다’ 생각하는 게 어떤 점이냐? 광야에 성막을 지었잖아요. 일반인은 그 성막 안에 못 들어가요. 제사장들은 동편 문을 통해서 그 성막 안에 들어가요. 성소까지도 들어가요. 그런데 지성소에는 못 들어가요.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라도 들락날락 못해요. 1년에 딱 한 번 7월 10일, 대속죄일에 대제사장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점에서 신기한가? 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 텐트를 철거해서 저 앞으로 갔다 칩시다. 무리가 광야에서 이동하잖아요. 레위인들이 성막을 꾸려서 메고 간 뒤에 그들이 잠시 머물렀던 그 자리가 있을 것 아닙니까. 뭐가 신기한가 하면,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 치고 있을 때는 성소나 지성소, 성막이 일반인들에게 구별되어서 거기 들어가면 죽어요.
그런데 그 텐트를 철거했단 말이지요. 철거하게 되면 텐트를 쳤던 그 토지가 있을 것 아닙니까? “먼저들 가세요. 난 뒤에 따라갈게요.” 하고 그 토지에 한 번 가 보세요. 지성소가 있던 그 자리에 들어가면 죽습니까? 안 죽지요. 똑같은 땅의 일부 아닙니까? 이게 얼마나 신기해요. 이스라엘 백성이 성막을 쳤던 그 장소는 천년만년 들어가면 죽습니까? 그런 거예요? 아니지요.
이동하면 그냥 보통 땅이지요. 보통 땅인데 왜 성막에는 들어가면 죽습니까? 이게 신기하다 이 말입니다. 이게 신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그 말입니다. 그거 뭔데요? 그냥 땅인데, 흙인데. 왜 그런가? 이게 무대기 때문에 그래요, 무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언약이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 자체를 스테이지, 연극무대로 삼은 겁니다.
따라서 이방인들, 이스라엘 말고 율법 없는 이방인들은 늙어 죽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들 자체가 무대의 배우들이기 때문에 안식일 어겼다, 죽어요. 율법을 어겼다, 죽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실제적이에요. 지성소에 들어가면 죽는다, 실제로 죽어요. 이게 신기하다 그 말입니다. 넓은 들판에서 자기 혼자 지성소에서 무슨 역할하고 그러면 안 죽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으로 이스라엘 집단 내에 있을 때는 진짜로 죽어요, 진짜로 죽는다고요. 왜?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무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어 나가는 그것을 보면서 우리가 이방인이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무대에서 배우 역할을 한다고 봅시다. 이스라엘 존재 자체는 마치 섬의 입지와 같아요.
섬이 바다에 둘러싸여 있듯이 그쪽만 그렇게 기이해요. 그쪽만 그렇고 다른 일반 민족, 이순신 장군은 아무 관계도 없어요. 세종대왕도 관계없고요, 강감찬도 관계없고, 삼국시대도 아무 관계 없어요. 오직 이스라엘에만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들이에요. 그것을 이방인인 우리가 보게 되면, ‘쟤들은 왜 저러지? 연기는 아닌 것 같은데 진짜로 죽네. 진짜로 죽어? 참 희한하네. 우리는 그냥 늙어 죽는데 그들은 뭘 위반했다고 죽지?’ 참 신기하지요.
오늘 본문 봅시다. 장관이 성을 지키고 있더라는 말이지요. 장관이 성을 지키고 있는데 갑자기 백성들이 성문을 열고 와르르 몰린 거예요. 백성들이 장관을 미워해서 ‘너 엉뚱한 소리 했지? 내 발에 밟혀 죽어봐라.’ 이것이 아니고, 백성들은 지금 장관한테 관심이 없어요. 마치 이태원 사태 같아요. 뭔가 어떤 것을 추구해서 정신없이 내딛다 보니까, 또 장관은 “여러분, 왜 이러십니까? 정신들 차리세요!” 하는데 밟혀 죽은 거예요.
어떤 억하심정, 그런 감정 때문에 죽인 것이 아니고, 그냥 쓸려가다 보니까 밟혀 죽은 거예요. “우리가 장관부터 죽이자!” 그런 정치적 성향은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신기한 게, 여기서 장관이 죽었다는 것이 신기한 게 아니고, ‘그 백성들이 무엇을 바라보면서 사람 죽는 것도 모르고 그냥 밟고 지나가면서 정신없이 내닫고 있는가?’ 그것이 신기한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삶의 영역에서 죽음의 영역으로 그들은 내닫고 있다는 겁니다. 질주하고 있는 거예요. 백성들이 갔던 그 장소는 전에는 가면 죽는 자리에요. 가면 죽는 자리. 그런데 문둥병자 네 명이 와서 아람 군대는 다 가버리고 병참 물자, 많은 물건들만 가득하다는 소리를 듣고…, 물론 믿지도 않았어요.
믿지도 않았는데 왕의 심복들이 “이왕 망한 것, 가만있어도 죽는데 일단 정탐하고 오겠습니다”(왕하 7:13) 해서 말 다섯 필 취해서 정탐해 보니까 적군은 하나도 없고 물자만 가득하게 있으니까 그제야 그것을 알려줬어요. 그동안 백성들이 얼마나 골았고, 얼마나 굶었겠어요? 장관이 성문을 지키고 있다는 그런 것은 아예 눈에 보이지도 않고 살겠다고 그냥 내닫다 보니까 결과적으로 장관이 밟혀 죽었잖아요.
이게 뭡니까? 무대연출 아닙니까, 무대연출. 어떤 무대연출? 죽어야 되는 무대, 성안에서 꼼짝없이 죽어야 되는 무대와, 그다음에 다른 무대, 성 바깥에 있는 적들의 무대가 있었어요. 그 적들 때문에 백성들은 성 밖으로 못 나와서 오도 가도 못하고 옴팍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적들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냥 물러간 것이 아니고 엄청난 양식을 남긴 채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은 ‘저기 나가면 죽는다’라는 지역에 겁도 없이 맘 푹 놓고 ‘믿습니다’ 하고 그쪽으로 질주했던 겁니다.
지난 시간에 그것을 ‘기쁜 소식’이라 했지요. 기쁜 소식.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 양식을 누가 백성들에게 허락했느냐는 말이에요, 누가? 그 양식은 그들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고 공짜로 얻은 거잖아요. 공짜로 그 양식을 누가 주셨습니까?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그들을 먹여 살렸지요. 그러면 양식을 얻은 백성들은 뭐냐?
‘새로운 공동체’ 이 새로운 공동체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우리를 살린 것은 엘리사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 예언의 말씀이다. 그 말씀이 우리를 살렸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예언의 말씀을 살리기 위해서 그들은 어떤 움직임을 나타내는데 그 움직임은 뭐냐? 전에는 겁이 나서 꼼짝도 못 하고 ‘저기 나가면 죽는다’고 가리켰던 그 지역, – 이스라엘은 무대니까 - 이쪽은 성이 있으니까 그냥 숨 쉴 수 있지만 나가면 죽는다, 사는 장소와 죽는 장소가 구분된 그 무대에서 이제는 용기를 내어서 죽는 지역이라고, 우리를 죽이는 지역이라고 여겼던 바로 그 장소로 내딛는 그러한 연출, 그러한 역할을 그들은 오늘 본문에서 해냈던 겁니다.
그렇다면 신약의 무대는요? 중요한 것은 이거예요. 신약의 무대는? 아까 참 신기하다고 했죠. 참 신기해요. 신약의 무대는 어떻게 되느냐? 구약은 같은 평지를 나누어서 이쪽은 성, 이쪽은 포위한 아람 군대, 같은 위치에서 무대가 되어 있다면 신약은 위아래로 구분돼 있어요, 위아래. 구약에서의 무대는, 잘 들어보세요, 구약에서의 무대는 말씀 위반하면 죽어요. 실제로 전염병 걸려 죽고, 무슨 병들어 죽고, 불뱀에 물려 죽고…, 실제로 죽어요.
실제로 죽는데 어디까지나 그것은 무대라고요. 무대에서 죽어요. 그런데 무대가 신약에 오게 되면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와 보이는 땅으로 두 개로 나누어져요. 나뉘어지게 되면 멀쩡하게 숨 쉬고 살았는데 하나님의 복음으로 넘어오지 않았다는 것때문에, 살아도 그 자체가 위에서 보기에 죽은 겁니다. 장관처럼.
장관처럼 밟혀 죽는다는 물리적인 죽음은 구약 시대의 무대의 한계라면, 신약에서는 멀쩡히 잘 살고, 데모하고, 투표하고, “재투표로 다시 선거하자!” 백날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언약, 그러니까 ‘언약을 위해서 예수님이 죽어야 했다’라는 그 사실을 모르면 무조건 그들은 저주에 갇혀 있는, 저주에 갇혀 있는 그런 역할을 하는 무대의 배우들이에요. 지옥 가는 배우들이에요.
그걸 지금 설명하고 있습니다. 4명의 문둥병자가 나가지 말아야 될 곳에 나갔어요. 나가면 죽어요. 그런데 4명의 문둥병자가 나가면 안 되는 자리에 갔고, 갔다가 분명히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살아서 성으로 돌아왔잖아요. 이게 부활이잖아요. 이게 부활의 저력 아닙니까? 그래서 이스라엘 무대에서는 4명의 문둥병자 때문에 나머지는 공짜로 양식을 얻어서 새로운 공동체로 계속 이어 나가게 될 수 있었던 겁니다.
히브리서는 이걸 ‘모형’이라고 해요. 그림자, 모형이라고 했다 이 말이죠. 제가 어릴 때 들었던 동화가 있는데 아직도 기억하는 동화가 있습니다. 동화가 아주 짧아요. 애들이 동물원에 갔는데 기린이 있어요. 애들이 기린 아저씨께 묻습니다. “어~? 기린 아저씨, 나무 위에 올라가면 안 돼요.” 이렇게 했어요. 동화가 굉장히 짧습니다. “기린 아저씨, 나무 위에 올라가면 안 돼요.” 기린 아저씨가 목이 기니까 나무 사이에 보였겠죠. 그러니까 기린 아저씨가 “나? 나무 위에 올라가지 않았는데?” 끝. 이 동화 이걸로 끝나요.
지금 성도는 기린 아저씨예요. ‘위/아래’ 하늘 위의 안목을 가지고, 현재 무대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이미 우리는 ‘첫째 부활’, 이미 살았다는 것을 알고 기린 아저씨처럼 땅의 전체를 내려다보면서 ‘너희들은 이미 죽었다’라는 사실을 말하는 역할을 하는 배우들이에요, 성도라는 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 그 ‘새 부대’에 해당되는 사람이 이런 사람이에요.
이게 부활의 능력, 성령이죠, 부활의 능력을 입었기 때문에 그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놀면 안 돼요. 무슨 일을 해야되느냐 하면, 기린 아저씨처럼 이미 부활의 능력을 입은 자로서 세상에서 이렇게 주의 일을 해야 될 사람들입니다. 로마서 8장 9-11절을 읽어드리고 제가 잠시 문제를 하나 내볼게요.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구약의 무대에서 4명의 문둥병자가 죽은 데서 다시 살아나서 왔다면, 신약의 무대는 바로 하늘의 영, 하늘의 영을 받은 ‘부활의 영’을 받은 성도가 이 시대에 몸을 갖고 아직도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이에 관한 문제를 드린다면, 방금 읽었던 로마서 8장 9-11절을 여러분들이 실생활에서 속속들이 녹아지도록 한다면 어떤 실생활의 예시를 들 수 있겠습니까? 어떤 실상의 예시, 예를 들 수 있겠습니까?
매사가 ‘기린 아저씨’ 되는 거죠, 매사가! 그런 기린 아저씨 되고, 저쪽에 성령 없는 사람은 매사를 뭐라고 합니까? ‘나무 위에 올라가면 안 된다’는 거예요. 세상 그렇게 봐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살 수 있는 만큼은 악착같이 돈 벌고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장가 좋은 데 가면 축하하고, 취직 잘 되면 축하하고, 그렇게 사는 게 인간의 행복이고 보람이라는 거예요. 너처럼 그렇게 하면 뜬구름 잡는, 그러한 맹한 사람밖에 안 된다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누가 했다고요? 장관, 장관이 했잖아요. ‘하늘에 창을 낸 들 어떻게 양식을 내겠느냐.’ 장관은 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에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몇 달 뒤에 양식이 온다’ 그건 이해가 가는데, ‘24시간 만에 양식이 주어진다.’ 이것은 기이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장관은 뭘 모르는가? 자기에게 있는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의 언약을 증거하는…, 축복만 증거하는 게 아니에요. 저주를 증거해요. 축복과 죽음, 죽음이 통과되지 않는 언약 성취는 없습니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이 언약에 달렸다는, 그 역할을 해야된다는 사실을 장관은 알지 못하고 그저 우리끼리, 공동체가 우리끼리 밥 먹고 살면 된다는 거예요.
그 공동체는, 그 공동체는 옛날 공동체예요. 새로운 예언이 주어진 새로운 공동체가 아니라 이 말이죠. 언약은 진행, 계속 진도 나가고 있는데 옛날 공동체에서 ‘하나님 살려주세요’ 하는 그런 식은 구약을 통해서 용납이 안 됩니다.
끝으로,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전도’지요, 전도. 그러면 그 전도를 어떻게 하느냐? 부활의 영을 입어서, - 이제 실제로 예를 듭니다 - 부활의 영을 입어서 ‘기린 아저씨’가 되어서 세상을 내려다보면서 살게 되면 전도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아까 그 ‘하나님의 예언’이, 예수님의 ‘완성된 언약’이 나오면 되거든요.
엘리사에서 나온 예언이 누구를 죽였어요? 장관을 죽였죠. 그러면 ‘전도’라고 하는 것은, 만나는 사람 족족 가까운 일가친척 가족부터 전도란 사람을 죽이는 일이죠. 말씀으로 사람을 죽이는 거예요. 생사람 잡는 게 아니고 죽은 자를 보고 죽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부활의 저력입니다. 우리에게는 할 일이 있어요. 무슨 일? 사람 죽이는 일. 내일 직장 나가죠. 직장 사람들, 두두두두, 다 죽여요. 우선 가까운 가족부터.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나서 죽은 자예요. 주님이 공짜로 주시는 혜택 없으면, 그 양식 없으면 죽은 자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오셔서 “너 죽었어!” 하니까 성령 있는 사람은 “옳소이다. 제 옛사람은 죽었습니다. 죽어야 마땅합니다.” 이제는 내가 새 사람 된 게 아니고, 예수님을 모시는 조건 하에 우리는 새 부대로서 새 사람입니다. 이걸 기쁨과 감사로서 살아가면 되죠.
‘복음 들었다. 나는 구원받았다. 또 내 일 열심히 해서 돈 벌어야지.’ 지금 이게 성도의 일이 아니에요. 성도는 무대가 있어요. 하늘과 땅의 이 무대에서 구약 사람들이 자기 역할에 충실한 것처럼 우리는 역할에 충실히 하는 거예요.
“이 땅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품고 살지 않으면 그것은 저주받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죽음, ‘이미 죽은 자가 더 깊은 지옥의 저주받는 죽음’의 죽은 자가 됩니다.”
이것을 전하는 일이죠. 디모데후서 4장 2절에서 사도 바울이 하는 말처럼,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권하라’는 이게 뭡니까? “당신은 죽었습니다.” 알아듣는 사람이 있을 거고, 못 알아듣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그게 무슨 뜻인데?” 이렇게 물어온다면 그것은 정말 하나님의 같은 백성이 될 후보감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나 사는 데 급급하다 보니 ‘죽음’이 주님께서 죽었다가 살아나서 실제로 일하는 무대라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이제는 내 인생이 나의 무대가 아니고, 주님의 무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수요설교(260610)요약 열왕기하 7장 16-20절(부활의 무대)
수요설교 요약해드리겠습니다. 수요 말씀의 전체적인 윤곽은 구약에도 부활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구약에도 과연 부활이 있는가? 부활이 있으려면 누군가는 용감하게 죽음의 구역까지 나서야 된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죽음의 구역에 안 나서요. 안 나서는 이유는 이 세상이 힘들지만 살만하니까 그래요. 힘들지만 버틸 때까지 버티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의 땅은 약속의 땅이에요, 언약이 작용하는 땅이거든요. 거기에 북이스라엘도 살고 유다도 사는데, 그 이스라엘 땅에 살면서 그들은 자기가 사는 게 삶의 목적인줄 알았어요. 언약이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이 목적이 아니고 ‘나 살면 그만이지.’ 이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율법을 버리니까 바알 우상을 수입할 수밖에 없죠. 남들은 그러고도 잘 사니까. 산다는 게 목적이 되었을 때는 율법으로 살 것이냐, 아니면 자기 힘으로 살 것이냐 보니까 다른 민족들은 자기 힘으로 잘도 산단 말이죠. 율법이 그다지 내가 사는 데 기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니까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좋아할 수밖에 없어요.
특히 율법은 조항들이 너무 많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대로 고집이 있어가지고 ‘이 땅은 율법이 없는 자는 못 살아.’라고 계속 밀어붙여요. 밀어붙이니까 그게 압박이 되는 거예요. 압박을 할 때 이방민족을 통해서 압박을 했고, 사마리아 성을 완전히 포위했고, 그들이 어느 정도까지 나갔느냐 하면, 이제 하다하다 먹을 게 없어서 자기 아들까지 삶아먹는 지경까지 나간 거죠.
그러니 네 문둥병자는 믿음이 좋은 게 아니고, 이리 사나 저리 사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가지고 ‘가면 죽는다.’는 그 구역에 갔어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니까. 그런데 가보니까, 물자만 남기고 아무도 없었어요. 이 점에 대해서 엘리사도 어떤 언질은 받았는데, 어떻게 내일, 24시간 후에는 양식이 많을 것이라는 건 엘리사가 알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엘리사도 모르지요.
다만 하나님의 뜻은 24시간 후에 엄청나게 많은 것 같다..는 데에서 엘리사도 몰라요. 다만 자기는 전달만 할 뿐이니까. 그런데 엘리사가 말했을 때, 툭 튀어나와가지고 인간이 생각하는 이성적인 답변을 대신한 자가 있었지요. 장관, 장관이 인간의 본심을 드러냈어요. “하나님이 창을 낸들 그런 일은 없다.”
다시 말해서 ‘이 일은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 와도, 100명의 하나님이 와도 이 사정은 해소되지 않는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우리 인간의 힘으로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끝까지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 이게 우리의 존엄성을 유지하는 방법이니까.” 그렇게 되죠.
그때 엘리사가, 제가 설교하면서 유념했던 것은 엘리사가 이렇게 말했어요. “네가 보기는 보아도 먹지 못한다.” 했거든요. 먹지 못한다. 그런데 나중에 실제로 이루어진 일을 보니까 먹지 못한 게 아니고, 죽였어요. 그 장관을 죽여 버렸다고요. 죽이고 난 뒤에 그 남아있는 이스라엘 공동체는 배부르게 먹고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서 살게 했잖아요.
그러면 이거는 언약의 공동체가 주어진 언약으로 앞으로 계속 나가려면 중간에 누가 있어야 돼요? 까불다가 죽는 자가, 언약에 의한 죽음을 통해서 앞으로 새로운 공동체가 공짜로 혜택을 입는다는 언약적 원칙이 수립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백성이 장관이 미워서 밟아 죽인 게 아니고, 양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백화점 문 열면 오픈런 하듯이 정신없이 치고 들어간 거예요. 그냥 장관이고 뭐고 중요한 게 아니고, 양식이 있으니까 그동안 굶어서 얼마나 정신이 없겠어요? 그래서 문둥병자가 먼저 봤던 그 기쁜 소식대로 과연 그게 있더라 라고 왁 나가니까 얼결에 누가 죽었어요? 장관이 죽었다고요.
장관이 죽어버렸어요. 그렇다면, 백성들은 평소에 ‘가면 죽는다.’는 세계에 그들이 드디어 문둥병자들 말을 듣고 갔죠. 그렇다면 그게 무슨 공동체? 새로운 공동체죠. 그 공동체가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지요. 옛 부대는 안 됩니다. 옛 부대는 안 돼요. 그러면 새 술은 예수님이고, 부대는 누가 만드는가? 예수님이 친히 새 부대를 만들어내야 돼요.
인간이 만든 것은 기껏해야 옛 부대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새로운 공동체를 해서 이스라엘을 계속 끌고 가기 위해서는 주님께서는 엘리사에게 계시를 전했고, 그 계시대로 완성하니까 저희는 배불렀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까 장관 하나가 죽어있단 말이죠.
죽음을 딛지 아니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공짜로 주신 언약의 혜택을 입을 수가 없다, 달리 이야기해서 누가 인간적인 생각에서 죽게 된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아, 인간적인 생각은 망해야 마땅하다.’라는 것을 아는 새로운 집단이 생겨나는 거죠.
그러면 이게 뭐가 부활이냐? 부활은 예수님께서 아무도 가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 저주의 세계로 갔습니다. 인간은 갈래야 갈 수 없는 세계, 아버지의 저주의 세계, 지옥같은 세계에 가셔가지고 사흘 만에 부활했잖아요. 그걸 수요설교에서는 ‘부활의 저력’이라 했어요.
저력이란 말은 힘이 죽지 않았단 뜻이죠. 주님의 그 힘, 부활의 저력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전할 때, 어떤 사람만 새 포도주에 적합한 새 부대가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서 외치는 그 말을 새로운 영의 양식으로서, 우리를 배불리는 양식으로 먹을 때, 그게 바로 신약의 새로운 공동체가 되는 겁니다. 새로운 공동체.
누군가 죽어서 갔다 오신 분 때문에, 전에는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 자들의 새로운 모임, 새로운 주님의 백성이 탄생한 거예요. 그러면 그 백성은 자기는 공짜로 얻어먹었으니까 누구만 자랑할 거예요? 주님이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에 몰랐던 내가 알게 되었다. 이걸 어떻게 한다? 네 명의 문둥병자들처럼 가만히 있을 수 없죠.
이 아름다운 소식을 우리만 알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전하지요. 전하는 게 뭡니까? 너희들끼리 있으면 죽는다. 이미 너희는 죽은 자리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외치는 것, 그게 바로 전도지요. 그게 전도예요. 믿을 사람은 믿고, 안 믿을 사람은 안 믿죠. 여기까지.
추가)
제 딸이 아주 어릴 때 가져온 동화책이 있었는데, 아주 어린아이들 동화책인데 그 동화책을 보면 너무 짧아요. 기린이 다른 동물들과 나란히 있고, 그 앞에는 아이들이 구경 가는 그림이 있었어요. 애가 묻는 거예요. “기린 아저씨, 나무 위에 올라가면 안 돼요.” 라고 했어요.
아이들 입장에서는 짐승의 높이가 고만고만하니까 저렇게 툭 튀어나온 것은 뭔가 딛고 올라섰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몸체 자체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내려다보는 안목이 있다는 생각을 못하고, 분명히 나무 위에, 그 약한 나무 위에 ‘참, 나무가 불쌍하지. 왜 거길 타고 올라가서 긴 목을 내 놓나?’ 이렇게 생각한 거죠, 어린 아이 입장에서.
성도가 복음을 전하니까 공부 많이 하고 뭐 교회 다녀서 성경공부 많이 해서 그런 줄 알아요. 본체 자체가 ‘위’이거든요. 부활해서 위에 올라가신 예수님의 영을 받다 보니까 예수님의 안목으로, 마치 기린의 눈으로 죽음의 세상을 내려다보는,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건데,
‘기린 아저씨, 나무 위에 올라가면 안 돼요.’이러니까, 기린이 하는 말이, ‘응? 나 나무 위에 올라가지 않았는데.’ 이게 끝이에요. 이게 동화책 내용의 전부예요. 세상이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해요, 이 사실을, 예수님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되는 겁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