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아름다운 사람

아빠와 함께 2026. 6. 4. 08:39

아름다운 사람

2026년 6월 3일                   본문 말씀: 열왕기하 7:3-9

(7:3) 성문 어귀에 문둥이 네 사람이 있더니 서로 말하되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7:4) 우리가 성에 들어가자고 할지라도 성중은 주리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여기 앉아 있어도 죽을지라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저희가 우리를 살려두면 살려니와 우리를 죽이면 죽을 따름이라 하고
(7:5) 아람 진으로 가려하여 황혼에 일어나서 아람 진 가에 이르러 본즉 그 곳에 한 사람도 없으니
(7:6) 이는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저희로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 하고
(7:7) 황혼에 일어나서 도망하되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였음이라
(7:8) 그 문둥이들이 진 가에 이르자 한 장막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거기서 은과 금과 의복을 가지고 가서 감추고 다시 와서 다른 장막에 들어가서 거기서도 가지고 가서 감추니라
(7:9)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 하고

사람 대 사람끼리 전쟁을 할 때는 각자 강력하게 자신이 존재할 정당성이 있다고 주장하게 마련입니다. 승리한 쪽이 패배해서 죽는 쪽보다 이 땅에서 살 권리를 있음이 현실적으로 증명되었다고 우기게 됩니다. 인간들에게 있어 ‘살 권리’는 ‘힘 보유 권리’를 말합니다. 힘이 있다는 것은 존재의 정당성이 보다 많이 확보한 것으로 사람들이 이해하는 겁니다.

역사의 눈으로 보면, 이 본문은 아람나라와 북이스라엘 간의 전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둘 다 힘을 의존하는 자들끼리의 다툼입니다. 힘과 힘을 겨루면서 자신들의 정당함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데 있어 굳이 선지자가 주도적으로 끼어들 필요가 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에 대해서 이미 엘리사 선지자가 언급을 했습니다.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하셨느니라”왕하 7:1) 여기에 대해서 왕국의 한 장관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그 때에 한 장관 곧 왕이 그 손에 의지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왕하 7:2)

이로서 아람나라 뿐만 아니라 북이스라엘나라도 선지자, 곧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서 적대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냅니다. 왜 이들 인간들은 선지자의 말을 거부할까요? 그것은 전쟁이든 삶이든 항상 ‘자기 중심주의’이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가치를 사수하지 아니하면 삶의 의미가 없다고 믿습니다.

전쟁을 하는 것도 자기 중심주의를 확고히하기 위한 활동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살아 있다” “이 살아 있는 내가 천국을 가고 싶어한다.” “이 살아 있는 내가 천국가려면 나는 무엇을 하면 될까?”라는 의식 같은 겁니다. 즉 인간은 나름대로 삶의 해답과 해결책을 알고자 합니다.

어떤 의식에서요? 자기 중심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요. 그런데 천국은 이런 자기 중심주의자를 넣어주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 생활하면서 하나님의 원칙에 예속되어야 했습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여기서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즉 만나 자체가 인간이 해결책이라고 제시하는 항목에 들어있는 양식이 아닙니다. 인간이 요청할 수 없는 양식을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은 인간들이 자기 중심으로 예상하는 그런 자아를 비켜간다는 뜻입니다.

내가 예상 못하고 내가 알지 못하는 ‘나’가 되지 아니하면 약속의 땅에 들어설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 땅으 ‘아름다운 땅’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신 8:7) ‘아름다운 땅’이란 기존의 인간 정신을 지닌 자들을 거부하는 땅입니다.

아름다움이란 인간 중심이 아니라 처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대로의 세계에서는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 2:9)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해결책이라고 기대하는 그런 양식이 아니라 다른 양식으로 아름다운 땅으로 이끄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양식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새로운 인간은 신약 시대에 와서 최종적인 밝혀집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6-28)

이 양식을 제공하시는 분은 인간 세계에서 ‘거짓말 하는 자’로 낙인찍혀 공식적으로 사형당했습니다. 스스로 가치를 지니고 힘으로 자신들의 가치를 지키려는 인간 중심의 세계에서 예수님께서 더 머물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점에 있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네명의 문둥병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멀쩡하다고 자부하는 인간들의 성 안에서 살 수 없는 문둥병자입니다.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 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지니라”(레 13:45-46) 동시에 이들 네명의 문둥병자들은 힘으로 자신들이 잘났다음을 증명하기 위해 전쟁 하려 온 아람사람에게도 섞일 수 없는 존재입니다.

여기서도 죽고, 저기서도 죽은 존재입니다. 이들만이 잘난 척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자’로서 움직입니다. 그런데 황혼에 막상 아람 진영으로 들어가보니 거기에는 그 어떤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람군대들이 무슨 큰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소리는 바로 힘으로 구성하는 체제의 약점이었습니다.

더 큰 힘이 오면 사족을 못쓰는 것이 힘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자들의 한계입니다. 힘이 있기에 힘에 대해 무서움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그들은 살기 위해서, 즉 죽기 싫어서 급히 그 현장을 떠난 겁니다. 그렇다면 네명의 문둥병자는 충분하게 먹고 소유할 수 있던 양식과 물품은 어디서 온 겁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인간의 힘의 세계와의 전쟁에서 얻어내신 전리품입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문둥병자들이 처음으로 접하면서 ‘거저 얻은 양식’이 되어 버린 물품들입니다. 네 명의 문둥병자는 말합니다. ‘아름다운 소식’에 대해서 말입니다.

소위 스스로 살았다고 여기는 자는 네 명 문둥병자가 물품과 양식을 얻는 그 영역에서 한 사람도 발견되지 못합니다. 복음, 아름다운 소식은 이처럼 불길한 분위기 속에서 나타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를 지키려는 자들에게는 아름다움 대신 불길함만 주어질 뿐입니다. 결국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과 사람의 전쟁입니다.

하나님의 천국 원칙은 인간들의 힘의 체계 가운데서 꿋꿋하게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인간들의 평가를 따르지 않고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님을 아는 자들을 통해서 아름다운 천국 소식은 발설하고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대단함이 천국의 아름다움을 대신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8강-열왕기하 7장 3-9절(아름다운 사람) 260603-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7장 3절에서 9절까지입니다.

열왕기하 7:3-9

“성문 어귀에 문둥이 네 사람이 있더니 서로 말하되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우리가 성에 들어가자고 할찌라도 성중은 주리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여기 앉아 있어도 죽을찌라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저희가 우리를 살려두면 살려니와 우리를 죽이면 죽을 따름이라 하고 아람 진으로 가려 하여 황혼에 일어나서 아람 진 가에 이르러 본즉 그곳에 한 사람도 없으니 이는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저희로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 하고 황혼에 일어나서 도망하되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였음이라 그 문둥이들이 진가에 이르자 한 장막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거기서 은과 금과 의복을 가지고 가서 감추고 다시 와서 다른 장막에 들어가서 거기서도 가지고 가서 감추니라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찌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 하고.”

‘이 전쟁은 아람 나라 군대와 북이스라엘 나라 군대의 싸움이다.’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아람 나라 사람, 자칭 정상이라고 자부하지요. 그다음에 북이스라엘 사람도, 아무리 자기를 봐도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정상적이라는 말은, ‘내가 이 땅에 살 권한이 있고,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 그 정도로 ‘사는 것에 대해서 정당함을 가질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우리다’라고 자부하는 사람인데, 그들과 그들 사이의 싸움이었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던 장관입니다. 열왕기상 7장 2절을 다시 보면 “그때에 한 장관 곧 왕이 그 손에 의지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그 장관은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자기가 정상적인 존재고, 정상적인 존재로서 양식이 궁핍할 때 어떤 해답, 해결책, 대책 이런 것을 강구하려고 할 것입니다.

왜? 자기들은 정상적이니까. 정상적인 존재는 죽으면 안 되니까, 살아야 하니까. ‘산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무슨 방법으로 이 가난을 어 어려운 지경을 헤쳐 나갈 것인가?’ 그들은 해답을 찾고 또 얻고자 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 장관을 통해서 여기서 인간이 어떤 대책, 해답을 내는 것은 한계에 이르렀음이 다 들통났어요. 이 지경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장관의 의견은 다 나왔고 이미 다 끝났어요.

그 장관의 이야기나 왕의 이야기나 백성의 이야기는 모두 누구 중심이냐 하면, 인간 중심입니다. 어떻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인간 중심 아닙니까? 제가 인간중심이라 하는 것은, 어떤 어려움에 처했을 때 대책을 내고 해결책을 내겠다고 마음을 잡는 것, 대책이나 해결책을 궁리하고 끄집어내는 이유가, 난 더 살아야 하겠다는 거예요.

나는 살 가치가 있기 때문에 아직 더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 때문에 학교에서 선생님이 가르치면 학생이 “질문 있습니다!” 하고 손을 들지요. ‘질문 있습니다.’ 뭐가 질문인데? 질문하는 이유는, 내가 사는데 정답을 확보하기 위해서 질문을 던지지요. “목사님, 질문있습니다.” “무슨 질문이요?” “내가 천국에 가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 질문의 내용이 이래요. ‘지금 내가 살아가는 것이 정상인데 이 정상적인 내가 죽어서도 지옥 가지 않고 천국 갈 수 있기를 바라는 요 마음도 내가 보기에는 정상인데 어떻게 그것이 들어왔는지 그것이 모호하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질문 있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사람중심입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 장관이 대변자인데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하나님이 하늘에 창(窓)을 내서 하늘에서 양식이 막 쏟아지지 않는 한 이 난관에서 벗어날 길, 어떤 수단도 없다. 천하의 누가 와도 이것은 안 된다.’ 그런 생각, 그런 발상을 하면서 아직도 자기 자신이 살고자 하는 미련, ‘살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살아야 한다는 이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그 미련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야기 처음부터 다시 해 봅시다. 누구와 누구의 전쟁인가를 다시 봅시다. 이쪽 아람 나라는 자기가 정상인이라고 여깁니다. 다른 쪽 북이스라엘도 자기를 정상인이라고 여겨요. 정상인이 정상인과 ‘누가 더 정상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인가’의 전쟁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누가 끼어드느냐 하면, 엘리사가 끼어듭니다. 선지가 끼어듭니다. ‘선지자 지는 인간이 아닌가? 선지자라도 자기는 살고 싶어하지 않을까?’ 그런데 ‘선지자가 제시하는 해답은 뭘까? 선지자가 제시하는 해답은 뭔지 우리가 선지자에게 물어보자.’ “선생님, 질문 있습니다.” 이거나, “선지자님, 질문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어떻게 헤쳐 나갑니까? 어떻게 하면 이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습니까?”라는 그 질문 자체가 해서는 안 되는 질문이라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인정합니까?

우리는 질문할 자격조차 없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됩니다. 선지자는 우리가 원하는 해답을 주시는 분이 아니에요. ‘구원받고자 원하는가? 이렇게 하면 구원받는다.’ 이걸 제시하는 분이 선지자도 아니고 우리 주님도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뭘 요구하느냐와 관계없이 주님은 주님의 일을 묵묵히 수행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강물을 보고 이렇게 질문을 던진 적이 있지요. “강물아, 강물아! 잠시만 좀 멈춰주면 안 되겠어?” 그러면 강물이 그 소리 듣고 “왜요, 인간님?” “강물이 좀 낮아져야 다슬기를 잡을 수 있잖아.” 이렇게 자연을 향한 질문을 하는 것, 우리의 소원을 외치는 것이 얼마나 인간중심이에요?

우리가 내뱉는 모든 것이 ‘나 중심’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질문 자체가 무가치한 거예요. 그래서 인간 대 인간의 전쟁은 가치가 없습니다. 누가 이기든 전혀 무가치한 겁니다. 의미 없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선지자가 왜 ‘24시간 후에, 내일 이맘때쯤에는 돈도 물품도 넉넉할 것’이라는 장담을 늘어놓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선지자의 자기 의견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묵묵히 자기 일을 하시다 보면 이런 결과가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오늘 본문에 대해서 모른다 치고 열왕기하 7장 1절에서 멈춰봅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곧 ‘내일 이맘때쯤에는 곡식도 돈도 넉넉하게 될 것이다’라고 선지자가 언급할 때 이 언급을 듣고 ‘역시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았어. 우리를 도와줄 대책이 있으시지’라고 좋아들 해야 합니까, 기뻐해야 합니까? 지금 전쟁 중이에요. 인간 대 인간의 전쟁입니다. 이긴 쪽이 진 쪽을 다 먹고, 진 쪽은 이긴 쪽에 다 먹히고. 이스라엘은 벌써 먹히는 중입니다. 양식이 없어서 난리도 아니니까.

하나님의 전쟁에는 원칙이 있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이미 그 원칙을 제시해 줬어요. 그 원칙을 신명기 8장을 통해서 보겠습니다. 신명기 8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면서 그 원칙을 제시했어요. 잘 들으셔야 해요.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알지 못하던’ 그러니까 인간의 입에서 대책 내놓으라는 소리를 못 나오게 해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대책을 하나님이 먼저 준비했거든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을 광야 내내 먹이신 이유는…’ 이렇게 돼요. 인간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안 줬다는 말은, 원하는 것을 대책으로 제공하지 않았다는 말은, 그 대책안에는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만이 아는 어떤 원칙, 인간들에게 숨겨진 원칙이 따로 있고 그 원칙을 역사적으로 쏟아낼 때, 현실화될 때 ‘아, 하나님은 출발점부터가 우리 인간 중심을 비켜서 일하시는구나.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원하는 것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했구나.’

그러면 그 사이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뭘 알아야 해요? 내 중심, 이것은 하나님 앞에 안 통한다는 그 낌새를 알아채야 하지요. 참, 이게… 성경을 보고 교회 다니면서 지금까지 우리가 밥 먹고 사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 우리가 천국 가는 그것도 나 좋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그런 낌새를 눈치채야지요.

백성들이 원하는 것을 주면요, 백성들이 ‘아, 하나님은 우리 편이구나.’ 이렇게 아는데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따로 준비했다는 것은, 만나를 주시는 출발점 자체가 어떤 인간에게도 그것이 감추어진 비밀이라는 그 말입니다. 인간 중심으로 사는 인간에게는 결코 알 수 없는 원칙을 지금 만나라는 것의 내력을 통해서 알려주시는 거예요.

나 중심으로 살면 인생 백날 살아도 헛방이에요. 나 중심이 있다는 것은 딴 게 아니거든요. ‘나 살아 있다.’ 그다음에 ‘살아있는 내가 어떻게 천국 갈까?’ 천국 가는 것을 ‘지금 내가 살아있다’라는 그 조건을 유지하면서 천국 가는 줄로 오해하고 있어요. ‘나 살아 있다. 어떻게 살아있나? 정당하게 살아있다. 그러면 나는 천국 간다. 왜 가느냐? 살아 있을 때부터 정당하니까 내가 천국 가는 것도 정당해진다.’

이런 논리는 본인 인간중심이잖아요. 본인 잘났다 중심 아닙니까. 어디서 천국이 이런 사람을 받아줘요? 천국은 악마하고 전쟁한다니까요. 오늘 본문에 전쟁하고 있잖아요. 전쟁하고 있는데 지금 이스라엘과 아람 나라 둘 다 자기중심이에요. 신명기 계속 보기 전에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열왕기하 7장 9절에,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아름다운 소식’ 복음 아닙니까. 복음이라고요! 아름다운 소식은 누구 몫이었던가요? “여기 아름다운 소식이 있다”라고 누가 이야기했던가요? 왕이었던가요? 장관이었던가요? 백성이었던가요? 누구였습니까? 문둥병자들이었지요. 문둥병자 네 명이었는데 그들이 성안, 백성들이 사는 그 그룹에 섞였던 문둥병자들입니까, 성 밖으로 쫓겨난 문둥병자들입니까?

성 밖으로 쫓겨난 문둥병자들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 3절에 나와 있어요. “성문 어귀에 문둥이 네 사람이 있더니 서로 말하되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성안에 들어갑니다. 왜?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멀쩡한 사람들이고 이 문둥병자들은 저주받았기 때문에요. 레위기 13장 율법에 이미 나와 있습니다.

45-46절에,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찌니라.” ‘진 밖에 살찌라.’ 부정한 것, 저주받아 더러운 것은 깨끗한 자, 성안에 있는 사람과 같이 합류될 수 없고 저주받았기 때문에 성 바깥에 분리된 채 있습니다.

그러면 이번 전쟁은 누구와의 전쟁이냐? 아람 나라와 이스라엘이 둘 다 멀쩡하다고 자부하고, 성안에서 살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그들과 누구와의 전쟁이냐? 성 밖에 있는, 멀쩡한 인간은 일체 나올 수 없는 성 밖에 있는 그 문둥병자 네 명과의 전쟁이었습니다. 이게 바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시는 답이에요.

“아름다운 소식? 너희들은 멀쩡하니까 멀쩡한 너희는 자기중심이잖아.” ‘자기중심’에게 들려지는 복음은 없습니다. 없어요. 자기중심으로 사는 인간에게 들려지는 천국 이야기는 없습니다. 진짜 천국 이야기는 자기가 멀쩡하고 정상적이라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전부 다 거짓말이에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가, 예수님이 거짓말 했기 때문에 죽인 거예요.

그래서 오늘날 신기한 것은, 복음 전하니까 “믿습니다” 하는 이야기가 들려와요. 오! 분명히 “믿습니다”라고 하면서 자기를 정상이라고 여기거든요. 그것은 틀렸어요.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복음을 믿습니다. 복음은 참 복음답게 아름답습니다. 기쁜 소식이 맞습니다”가 되려면 “나 중심으로 사는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정상이 아닙니다”라는 고백을 떠트려야 해요.

제 목 상태가 안 좋지만, 이 중요한 대목에서는 목을 쓸 수밖에 없어요. 내 목을 아껴서 될 문제가 아니고요. 정말 중요한 것은, “복음을 여러분이 믿습니까, 복음을 압니까?”라는 그 말은 뭐냐? “주여, 저 문둥병자예요”라는 뜻이에요, 그게! 지금 멀쩡하다고 자기중심으로 나 잘났다는 사람 있잖아요.

오늘 여러분 투표했지요? 누구한테 투표했습니까? 이 동네 사람들 전부 다 2번 아닙니까, 2번! 기호 2번 찍었잖아요. 기호 2번 표 받는 자들은 본인들이 “여러분, 저 문둥병자입니다. 저 저주받았습니다.” 이래서 출마했습니까? “저를 찍어주시면 우리나라를 힘 있는 나라로 만들겠습니다.” 지금 그 이야기 한다고요.

신명기는 조금 있다가 다시 말씀드릴 것이고, 그 힘 있는 나라가 뭐냐? 오늘 본문 열왕기하 7장 5절에 나옵니다. “아람 진으로 가려 하여 황혼에 일어나서 아람 진가에 이르러 본즉 그곳에 한 사람도 없으니” 아람 군대가 북이스라엘 사마리아 도성을 포위했었잖아요. 빈틈없이 포위했었는데 황혼에 가보니 아무도 없어요. 질서정연하게 철군했다면 창, 칼, 텐트 등 군수물자를 다 가지고 나갔을 것인데 물품은 그대로 있고 사람은 하나도 없는 거예요.

여러분, 소위 정상적이고 내가 멀쩡하다고 자부하는 장관, 그리고 북이스라엘 왕과 백성들이 이것을 예상했습니까? 아무도 예상 못 했어요. 주님의 복음은 그렇게 주어지는 거예요. ‘복음이 이런 것이니까 이것을 믿으면 나는 천국 간다.’ 이렇게 나 중심으로 계산할 경우, 그것은 지식이지 복음의 능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학이지 복음의 능력이 아니에요.

열왕기하 7장 6-7절입니다. “이는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저희로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 하고 황혼에 일어나서 도망하되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였음이라.”

너무 긴급하게 앞뒤 안 가리고 놀라서 후다닥 튀어 나가듯이, 그냥 있는 것 두고 다 도망치고 말았던 거예요. 이게 힘의 세상의 약점입니다. 인간중심, 자기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신명기 8장의 그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예요. 자기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어디서 자아가 형성되느냐 하면, 힘과 힘의 교차점에서 자아가 발생돼요. 힘과 힘의 교차점, 힘이라는 고리, 또는 계열, 좌측과 우측의 힘의 교차점에서 ‘나’라는 것이 굳어진다고요.

힘이 하나의 파동이라면 이쪽 파동과 저쪽 파동이 겹칠 때 약간 파동이 단단해지겠지요. 그게 자아에요. 아동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쉬는 시간이나 혹은 수업 시간에 이야기하잖아요. “느그 아부지 모하시는데? 아파트 몇 평이노? 차는 모타고 다니노?” 이런 거요. 애들이 그걸 왜 묻습니까? <친구>라는 영화에도 나오잖아요. 말썽꾸러기 학생 볼때기 꽉 쥐고 “느그 아부지 모하시노?” 학생 답변이 “우리 아부지 조폭인데요!”

지금 나오는 단어에 무엇이 응축되어 있느냐? 힘이 주어졌어요, 힘이. 한 달 수입이 얼만데, 저축 얼마나 해놨는데, 집은 몇 평인데, 차는 몇 대 있는데, 부동산 얼마나 갖고 있는데…, 이런 이야기가, 힘들이 뭉쳐져서 자아가 된다니까요. 자아를 부인 못 하는 이유가 그 힘이 아까워서 자아를 부인 못하는 거예요.

마치 기어, 톱니바퀴 기어, 힘의 기어가 맞물려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는 이렇다’하고 자기의 주체로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한테 표 찍어주시면 애들이 급식에서 빠지는 일 없게 하겠습니다.” 교육감 후보가 그런 공약하지요. “어려운 사람들 세금 감해주고 잘 사는 사람들 세금 더 거두어서 살기 좋은 나라, 힘 있는 나라 만들겠습니다. 주가 1만 넘는 선진대국 만들겠습니다.”

이게 이 세상이에요. 선지자의 말을 못 알아듣는 이 세상, 선지자의 말을 듣기는 듣는데 그것을 거짓말로 여기는 이 세상에서 그 힘과 전혀 상관없는 존재가 나타났으니 그들이 누구냐? 네 명의 문둥병자고 그 네 명의 문둥병자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왔느냐? 아름다운 소식, 기쁜 소식이 나왔습니다. 네 명의 문둥병자는 어디로 갔느냐? 힘 있는 자, 살고자 하는 자가 일체 들어설 수 없는 영역에 들어섰어요.

왜? 4절에 나옵니다. “우리가 성에 들어가자고 할찌라도 성중은 주리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여기 앉아 있어도 죽을찌라.” 여기서 신명기 8장을 다시 보겠습니다. 신명기 8장 3절에서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라는 말은, 네가 알고 있는 양식는 먹어봐야 ‘내가 아는 나’가 되는데, 네가 알지 못하는 양식을 먹게 되면 너는 ‘네가 아닌 너’가 된다는 거예요.

‘네가 아닌 너’, ‘네가 아는 너’가 아니라 ‘네가 알지 못하는 나’가 되고 난 뒤에 어디로 가느냐?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한다는 겁니다. 7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땅이 무슨 땅이냐 하면, 바로 천국이에요. 약속의 땅이라는 말이지요. 지금 약속의 땅을 누가 방해하느냐? 안다고 여기는 내가 방해한다고요.

그래서 우리는 힘과 힘으로서 자아가 있기 때문에 자꾸 누구하고 싸우면, ‘네가 힘세냐, 내가 힘세냐?’ 하는 그것, 느그 아부지 모하시노, 태권도 몇 급이냐, 금띠냐 은띠냐, 이런 거요, 우리는 싸우기 싫어도 싸워요. ‘나는 성품이 너무 어질어서 남과 싸우기 싫다’ 하거든요. 이게 얼마나 거짓말인지. 취직자리는 하나인데 거기에 친한 친구가 둘이 왔다 해 보세요. 안 싸우겠습니까?

군대서 자대배치 받을 때 몇 자리 안 되는 후방의 진짜 좋은 자리, 같은 훈련소 동기가 있는데 거기로 가게 되면 어떻겠어요? “니는 무슨 빽 썼노” 전부 다 말하는 게 힘이 농축되어 있고 응축되어 있어요.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힘이 없으면 우리는 죽는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 문둥병자의 고백을 보세요. 애초부터 힘하고는 상관이 없어요.

“우리가 성에 들어가자고 할찌라도 성중은 주리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여기 앉아 있어도 죽을찌라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저희가 우리를 살려두면 살려니와 우리를 죽이면 죽을 따름이라”(왕하 7:4).

여기 있어도 죽고 저기 가도 죽고. 그러니까 문둥병자 네 명이 있는 이 위치가 어떤 위치냐 하면, 힘과 힘이 있는 그 틈바구니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그 공간에 이미 죽은 자로서 문둥병자 네 명이 있었던 거예요. 이미 죽은 자입니다. 문둥병자 네 명이 이미 죽은 자로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살고자 간 것이 아니고, 이왕 죽는 것 뭔들 못 하겠습니까?

죽는다는 것은 힘이 없어서 죽는 거잖아요. 이왕 죽는 것, 거기 가서 죽자는 식으로 그냥 가본 거예요. 그러니 이것은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고 아람에도 속하지 않는, 양쪽에서 다 배척받는 제 삼의 존재가 문둥병자 네 명이었습니다. 이 문둥병자 네 명이 보여주는 것은 전혀 힘이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지요.

신명기 8장에서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먹이신 이유가, ‘네가 마음을 낮춰서, 네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너희가 원하는 양식을 주지 않았다’라는 겁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내가 원하는 양식을 안 먹고 내가 살아 있으니까 ‘내가 산다’는 그것과 무엇과 연결되느냐? 신명기 8장 3절에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

내가 준 것은 떡이 아니고 말씀이라고 했어요, 말씀. 그러니까 새로운 인간의 특징은 뭐냐? 힘으로 사는 것도 아니고 떡으로 사는 것도 아니고, 말씀이 살려주고 이끌어주는 대로 가보면 그쪽이 뭐냐? 그쪽 아름다운 땅에 도달되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이걸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쉬울 겁니다.

마태복음 26장 26-28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뭘 줘요. 먹을 것을 주는데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이렇게 되어 있다고요. 천국에 누가 간다고요?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사람, 언약의 떡과 언약의 피를 마시는 사람만 천국에 갑니다. 왜? 천국은 아름다운 곳이기 때문에. 천국은 아름다운 곳이에요. 이 문둥병자가 거기에 가보니 사람이 없어요. 문둥병자들이 간 그곳에 사람이 없습니다. 힘을 좆는 사람은 거기에 아무도 없었어요. 거기에 달랑 네 명밖에 없었어요. 달랑 네 명.

사람을 무서워하고,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의 힘을 은근히 노리는 사람은 그 현장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문둥병자들은 투표할 사람도 없고, 투표를 받을 사람도 없고요. 거기에는 문둥병자들 이야기처럼 죽을 사람만 밟은 영역이 되고 말았어요.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만이 발견하는 것들이 아름답게 되어 있어요. 아름다운 소식을 만들 공간이 문둥병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조금 더 알아야 할 것이 있어요. 문둥병자들이 실컷 먹었다. 금과 은도 가졌다. 그리고 ‘우리만 챙기려고 하니 미안하다. 하나님께 벌받을지 싶다. 일단 우리 것은 꿍쳐놓고 성에 들어가서 알려서 이 아름다운 복락을 그들도 누리게 해서 기근을 해결하는 이것이 옳은 생각’이라고 여깁니다.

이 문둥병자들이 예상도 못 한 횡재를 얻었을 때 이렇게 정리하면 알기 쉬워요. 문둥병자들에 의해서 조성된 복음, 문둥병자들에 의해서 조성된 아름다운 소식,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힘 있는 자들의 전쟁을 통해서 그 속에서 그런 결과물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이 본문 보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뭐냐?

우리도 힘으로 충돌되는 이 세상 속에서 성도가 살아야 할 이유는, 힘들끼리 힘과 힘이 부딪히는 가운데서 그것들이 얻는 것이 결코 해답이 아니고 그게 진리가 아니고 정답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 힘이라는 게. 우리 성도로 하여금 천국을 만드는데 다른 방식으로, 우리 성도를 가지고 그들과 섞이지 않는 방식으로, 천국은 천국대로 쉬지 않고 지금도 계속해서 천국을 뽑아내는데 우리가 말려들고, 끌려가고 있다는 데서 우리는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는, 지금 그 이야기를 제가 하는 거예요.

‘나는 문둥병자다, 저주받았다, 뭐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 이거 하라고 우리가 힘 빼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일관되게 쉬지 않고 벌리는 이 하나님의 일, 천국 만드는 일, 복음 만드는 일에 주께서 우리를 끄집어 당기는데 이 힘의 경쟁, 힘의 전쟁에서, 우리가 거기에서 ‘어떤 가치나 의미를 찾지 말라’ 이 말입니다. ‘나는 저 사람처럼 힘이 없다. 돈이 없다, 엄마야 기죽어.’ 이러지 말자는 말이죠.

‘우리는 힘이 없다, 기죽지 말자.’ 이러면 또 이것도 하나의 오기처럼 느껴지니까 그러지 말고 뭐로 하느냐 하면, ‘아름다운 소식’이라고 했으니까 여기서 그 아름다운 소식이라는 것, ‘어디서 그 아름다움이 발생되는가?’를 우리가 주목해야 돼요. 도대체 아름답다는 말…, 자기 신세가 문둥병인데 문둥병이 밥 좀 먹는다고 해서 병이 나은 거 아니잖아요. 문둥병은 여전히 문둥병이에요. 더럽고 추잡한 그런 대우받는 것은 한결같아요.

지금 그들의 자기 신세가 문둥병이고 몸은 더럽지만, 입에서는 아름답다는 소리가 나오게 된 그 이유가 뭐냐 그 말이죠, 그 이유가. 뭐가 아름다운데요? 자기 신체가 더러우면서 뭐가 아름답습니까? 이 지옥 같고 더러운 세상, 더러워서 천국이 안 만들어지는 게 아니에요. 더럽다고 해서 복음이 안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 도리어 반대로 지옥 같고 더럽기 때문에, 더럽기 때문에 복음과 천국은 귀한 겁니다.

그 천국이 주는 아름다움은 귀한 거예요. 창세기 2장 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바로 에덴동산을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만들었습니다.

그 아름다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시칠리아섬에 있어요? 하와이에 있습니까? 그 아름다움이 어디에 있어요? 우리가 왜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말하지 못하느냐 하면, 자기 자신에게 너무 기대하는 게 있어서예요. 여기 신명기 8장에서 만나를 주신 것은 우리의 마음을 낮추는 거예요.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신 8:3). 마음을 낮추게 되면 아름답지 않은 게 없어요. 왜? 다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거니까요.

아름다움의 특징은 뭐냐? 인간 대 인간의 경쟁과 무관하게 주어지는 게 아름다움이에요.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느그 아부지 모 하시노, 니 성적이 어떤노, 니 수입이 얼마고…, 그런 인간 대 인간의 경쟁과 전혀 상관없이 복음은 아름다워요. 전혀 상관없이 복음이 아름다우면, 우리 자신이 ‘이 세상 인간들이 경쟁하고 다투고 비교하는 그 기준’에서 우리 자신이 전혀 상관없이 살 용의가 있습니까? 그들의 평가, 그들의 시선에 놀아나지 않을 그러한 자유성, 자유함이 있습니까?

욥기 42장 15절에, 욥이 고난받고 난 뒤에 아들, 딸 다 죽었죠. 죽고 난 뒤에 다시 욥이 하나님께 복을 받았는데, 그 복의 내용이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아름다움이 어디서 나오는가? 진짜 저주 속에서 아름다움이 나오는 거예요, 저주 속에서.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이거 달라, 저거 달라’ 또 ‘해답이 뭡니까? 천국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 질문조차 할 자격이 못 될 때, 우리가 질문을 안 할 때, 답은 그 질문을 안 하는 우리 자신이 이미 아름다운 사람이에요.

오늘 설교 제목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하나님 말씀의 결실, 열매가, 힘과 힘으로 내기하는 이 세상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이런 시합이라면 정말 나는 빼줘,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누가 잘났냐, 누가 못났나 하는 그런 시합이라면 나 빼줘. 나는 거기에 낄 수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야. 그게 살았다는 모습이라면 난 이미 죽은 거야’라는 고백으로 나오게 하는 거예요.

이 세상의 경쟁과 기준에서 나는 죽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그 사람을, 아름다움을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주께서 친히 조성해 줬다는 겁니다. 친히 만들어내신 거예요,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내신 거예요.

끝으로 아가, 참 어려운 성경인데 아가 1장 3절과 8절 읽어보겠습니다. “솔로몬의 아가라 내게 입 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 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아 1:1-3). 8절에,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신랑되신 주님께서 자기 신부인 성도를 아름답게 볼 때 여러분, 어떤 기준으로 보시겠습니까? ‘자기중심’ 아니지요! ‘나 힘 가졌습니다.’ 아니지요! ‘이 땅에서 나는 성공했습니다.’ 아니지요! ‘주여, 나는 죽은 자와 다 진배없습니다. 내가 내세울 건 없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나는 개 같은 여자입니다.’

고백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 그런 고백이 나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성도를 직접 만들어내시는 이 아름다움, 그 주님의 솜씨를 많이 품고 있는 ‘아름다운 사람들’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세상 본받는다고, 세상 따라간다고 속은 정말 추잡하면서도 뭐 된 양 여기는 위선적이고 으스대기를 습관화하는 우리 모습. 주여,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과 천국 백성을 어떻게 조성하는지 이제는 깨달아서 감히 우리 입에서 아름다운 소식이 퍼져 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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