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강-에스겔 32장 1절-4절(악어)140423-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32장 1절-4절입니다. 구약성경 1199페이지입니다.
에스겔 32:1-4
“제 십 이년 십 이월 초일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애굽 왕 바로에 대하여 애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열국에서 젊은 사자에 비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 큰 악어라 강에서 뛰어 일어나 발로 물을 요동하여 그 강을 더럽혔도다 나 주 여호와의 말이여 내가 많은 백성의 무리를 거느리고 내 그물을 네 위에 치고 그 그물로 너를 끌어 오리로다 내가 너를 뭍에 버리며 들에 던져 공중의 새들로 네 위에 앉게 할 것임이여 온 땅의 짐승으로 너를 먹어 배부르게 하리로다.”
오늘 본문 말씀에 바로가 등장합니다. 바로는 애굽나라의 왕입니다. 애굽나라의 왕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예언을 하시는가 하면 애가를 불러라, 하는데 애가(哀歌)란 슬픈 노래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애굽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하겠다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야, 우리가 생각하는 최대한도로 인자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늘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 입가에 미소를 늘 머금고 계시는 하나님, 어질고 또 어지신 하나님, 인간이 무슨 행동을 해도 ‘그래, 철없는 인간이니, 연약한 인간이니 너희를 용서하고 봐줄게,’ 하고 넘어가주고 용서해주고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슬픈 노래를 부르라는 말은 하나님에 의해서 슬픈 상황이 유발된다는 것을 언급하게 돼요. 그렇다면 우리 인간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이렇게 약하고 약한 우리, 태풍이나 지진이나 조금만 어려운 일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을 왜 그렇게 하나님께서 갈구십니까? 왜 그렇게 못살게 구는 거예요? 사람으로 태어나서 어른이 되어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만나서 오순도순 가정 일구어서, 그냥 평범하게 짧은 인생이나마 다복하게 살아가는 그것이 우리 인간보기에 얼마나 보기 좋아요.
그 보기 좋은 가정, 오순도순 소박한 작은 행복, 주님께서 그걸 울고불고 슬프게 만들고 비극으로 전환시키고 그걸 깨부수어버릴 때 도대체 하나님께서 무슨 심사, 무슨 생각으로 그 작은 행복마저 허용치 않고 뭉개 버리냐는 말이지요. 하나님이 인간의 행복조차도 사정없이 짓밟아 버리시는 그 의도, 취지, 그것에 대해서 우리가 그걸 ‘우리가 알 수가 있나? 모르지.’ 하고 그걸 그냥 넘어가는 경향들이 많이 있어요. 그래놓고 ‘하나님 믿습니다.’ 할 때 그 하나님은 성경에 나와 있는 진짜 하나님이 아니고 ‘내가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자기 희망사항에 의해서 엉터리로 상상되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은 성경에 나오는 진짜 하나님하고 다릅니다.
어쨌든 이 말을 끄집어냈거든요.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간을 갈구시고 이 땅에 살면서 그렇게 힘들게 살도록 하시느냐 그 말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확실한 답변이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가정을 이루고 직장 생활 하면서 애들하고 호호, 하하, 웃으면서 따뜻한 저녁을 맞이해서 식사하고 즐겁게 하루 살고 잠자리에 편히 눕고 하는 이 바닥, 이 장판, 이 평지, 이것이 사람이 일하는 공간이 아니고 원래 하나님이 일하실 공간인 겁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장기여행 갔다가 와서 오랫동안 집을 비우고 왔는데 여행을 마치고 자기 집에 오니까 집에 엉뚱한 사람이 호호, 하하, 웃으면서 살면 그걸 가만 보고 있겠습니까? “당신이 누군데 남의 집에서 이렇게 재미나게 사느냐? 나가시오. 내 집 비워주시오.” 이렇게 나올 거란 말이지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앙생활이라는 것, 이걸 분명히 해야 돼요. 인간들이 그리워하는 신앙생활이란 뭐냐 하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그것을 신앙생활이라, 나를 행복하게 해 줄 때 좋은 하나님이고 그 좋은 하나님과 함께 더욱 더 행복이 넘쳐나는 것, 그것을 신앙생활과 그에 대한 혜택이라고 생각들 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나오는 진짜 신앙생활은 뭐냐 하면, 이 ‘나’라는 몸체부터 해서 내가 살고 있는 이 공간, 시간, 이 모든 것이 나 위주,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나 좋기 위해서 주어진 공간이 아니고, 사실은 나는 빠져야 돼요, 나는 빠지고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시는 공간이고 그러한 활동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면 신앙이고 모르면 신앙이 아닌 겁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게 딴 게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그 활동하심에 의해서 지금까지 내가 이 모양 이 모습으로 지금 하나님의 일하시는 결과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수용하는 이것이 신앙이에요. 모든 해, 달, 별의 움직임부터 이 세상의 작은 움직임, 개미 하나 기어가는 것 까지 전부 다 하나님께서 조정하시고 시키신 일이 되는 겁니다. 심지어 우리들마저, 우리가 숨 쉬고 걷고 생각하고, 이 모든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하나님께서 힘주시고 조정하시는 활동의 일환으로 우리가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알아요. 참새도 알고 들풀도 아는데 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건방떠는 인간이 ‘내가 왜 태어났으며 누가 태어나게 했으며 누가 나를 죽이며 누가 지금까지 이 땅에 살게 했는가?’ 거기에 대해서 소위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알고 있다는 그 인간자체가, 그 인간들이라는 사람들이 두 사람이 모여도 모르고 열 명이 모여도 모르고 천명이 모여도 모르고, 우리나라 국민이 5천만인데 5천만이 모여도 몰라요. 누가 이렇게 일을 일으키고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살게 하시는지, 누가 우리를 죽게 하시는지. 누가 죽게 하시고 살게 하시는지 그 ‘누가’를 빼버리고 그거 우리끼리, 우리끼리, 우리끼리 살고 우리끼리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말이지요.
사랑하는 아내와 만나서 우리끼리 행복하면 그만이고, 숫자를 더 늘려서 같은 친척들이 모여서 역시 또 ‘우리끼리’, 그렇게 친척이 모이고 같은 동네사람들, 같은 고향사람들이 모이면 단위가 커지면 그 커진 나름대로 또 ‘우리끼리’, 취직을 하면 대기업 같은 경우 사원이 많은 그 많은 사원들이 자기들끼리 ‘우리끼리’ 큰 교회 교인들이 많으면 자기들끼리 ‘우리끼리’, 계속해서 우리끼리예요. 자기들만 만족하고 자기들만 행복하면 된다는 겁니다. 이 동네가 하나님 동네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힘은 하나님에게서 나왔고 우리 육체의 세포 하나하나가 움직이는 것도 하나님이 공들여서 다 주신 건데 그분과의 관계를 잘라버리고, 그 분을 잊어버리고 그저 눈에 보이는 인간들, 우리끼리 살면 행복하다는 겁니다.
그래놓고 하는 말이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소박하게 사는 것을 훼방하고 방해하고 슬프게 만들고, 오늘 본문의 경우에는 “슬픈 노래를 지어라.” 무슨 하나님의 성질이 이렇게 인간을 못살게 굴어야 만족하시는, 어떻게 그런 하나님인가, 이렇게 따지기나 좋아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물론 모든 나라가 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여서 제일 덩치를 이룬 단위가 국가라는 겁니다. 그 국가 중에서 에스겔 당시에 잘산다는 나라가 애굽이었습니다. 그 애굽 왕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슬픈 노래로 지어라, 왜냐하면 왕은 이제 망하고, 왕만 망하는 것이 아니고 왕에 속한 그 애굽나라도 이제는 내가 망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슬픈 노래를 지어라. 내가 망하게 한 뒤에 너희가 할 수 있는 것은 슬픈 노래 외에는 달리 할 것이 없다.”고 단언하시고 합당한 조치를 내리신 겁니다.
그럴 권리 있지요. 마땅히 하나님이 그런 권리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이렇게 나오시면 곤란하지요.” 이렇게 한다는 것 자체가 아주 수상하게 잘못되게 살아온 거예요.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활동영역이고 활동공간인데 하나님의 활동공간에서 하나님의 원대로 활동하겠다는데 누가 말리고 누가 거기서 저항하고 누가 아닙니다, 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할 수가 없어요. 다만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아야 할 것은, 대체 애굽나라가 뭐길래 그들이 이 땅에 하나님이 주신 허락한 땅에서 울고불고, 울어야 되는 팔자와 운명에 속하는가, 그걸 알아채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애굽을 다루시는 그 방식이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다루는 방식안에 그 내용이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에이, 하나님이 애굽을 저렇게 울게 하는구나. 우리는 애굽 아니니 남의 이야기다.’ 이렇게 하시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저쪽을 애굽으로 망하게 하신 그 방식대로 지금 그 방식을 들어서 우리에게 적용을 시키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새삼 알아야 될 순간이 온 거예요. 이 본문 말씀을 펼치는 순간 하나님은 애굽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그것이 애굽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고 우리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라는 것을 감안해야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다루는가? 2절에 보니까 “인자야 너는 애굽 왕 바로에 대하여 애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열국에서 젊은 사자에 비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 큰 악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젊은 사자, 두려울 것도 없고 무서울 것도 없고 하고 싶은 대로 다 설치고, 자기 원대로 사방팔방 마음껏 기개를 펼치고 자기가 먹고 싶은 것 다 삼키면서 활동력을 보이는 그 젊은 사자, 전에는 젊은 사자였는데 지금은 뭐로 변했는가? 큰 악어로 변했는데 그것도 바다 가운데 있는 큰 악어라고 했습니다. 이 점을 한 번 따져봅시다.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이 “야, 바로 왕아” 하던지 아무개라고 부르면 되잖아요. 에스겔한테는 인자야, 사람아, 라고 불러주시잖아요. 그런데 애굽 왕 바로에 대해서는 젊은 사자, 그 다음에 바다 가운데 큰 악어, 바다 가운데 큰 악어에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악어나 젊은 사자로 호칭하는 것은 네가 아무리 까불고 찧고 촐랑대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냥 짐승 하나, 철도 없고 자기밖에 모르는 짐승이 그냥 울부짖는 모양새라는 그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건 뭐냐 하면, 인간이 자기도 모르는 한계를 하나님은 알고 계시다는 그 말이에요.
그 악어가 그냥 악어가 아니고 바다 가운데, 그것도 그물에 잡힌 악어, 3절 끝에 그물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내 그물을 네 위에 치고 그 그물로 너를 끌어 오리로다.” 그물에 잡혀 있는 악어 꼴이라는 그 말입니다. 그런데 평소에 인간이 살아가면서, 특히 바로왕 쯤 되고 요새 같으면 삼성그룹 같은 대 재벌 회장님이 ‘나는 그물에 걸렸어. 그물이라는 한계에 걸렸어. 아, 나는 그물에 걸려서 요지부동이야.’라고 평소에 하나님이 휙 던져서 치시는 그 그물을 느끼고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습니까? 나는 주먹이 있으니 이 주먹을 맘대로 휘두르면서 살고 있다, 나는 목소리를 갖고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지 나는 그물에 갇혀있다, 그물에 갇혀 있다, 하나님이 쳐주시는 그물 안에서만 제한되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나다, 라고 하나님이 쳐주시는 그물 안에 있는 주체, 자아, 그리고 자기, 그런 자기의식, 그런 것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없지요.
바로왕도 마찬가지에요. 바로왕도 천하에 무섭고 두려운 것이 없어요. 자기가 제일 높아요. 오야붕이고 최고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왕이에요. 모든 사람은 그 나라에서 다 자기 아래고 밑이고, 자신은 산으로 치면 제일 꼭대기에 있기 때문에 거칠 것이 없어요. 그냥 전망이 환해서 앞에 가리는 것이 없어요. 무슨 그물이 자기를 지금 옭아맨다는 말입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그물이라는 것은 자기를 옭아매는 것이고 우리를 꼼짝 못하게 체포하기 위한 수갑 같은 종류잖아요. 하나님께서 감히 나에게 그물을 던져서 그물 안에 잡히게 하다니, 그런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감사하고 고마워하겠습니까?
“하나님이여, 이 그물 좀 치워주옵소서.”이렇게 되지요. 사람이 병원에 안 가다가 병원에 간다든지 스무 살 때까지 자기 맘대로 살다가 군에 한 번 가보세요. 군에서 아무리 맛있는 밥을 주고 군대버거, 군대치킨, 뭘 줘도 이 군대라는 그물, 이거 괴롭습니다. 병원에 가면 다 좋은데 병원에서 내 맘대로 못하는 것, 요양사가 와서 두 시부터 네 시까지……, 좀 내 맘대로 하고 싶은데 내 맘대로 못할 때 사람이 사는 게 아니지요. 괴로워 못사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나님이 그렇게 보내신 거예요. 지금 애굽 바로 왕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거칠 것이 없이 돈만 있으면, 우리가 부자 되면 뭐든지 행복할 것 같지요? 부자 되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물을 철거하십니까? “부자니까 내가 그물 던지지 않을게.” 이렇게 하십니까? 부자든 가난하든 주시는 그물 그대로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활동성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 몸, 육체까지 전부 다 하나님의 활동이지 내 활동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이 땅에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도대체 우리는 이 땅에서 누굴 위해 삽니까? 그거야 날 위해서 살지. 그러니까 그게 바로 왕이고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는 슬픈 노래가 적절한 겁니다.
우는 소리가 적절한 거예요. 행복한 순간 행복해도 그 행복은 주님이 주신 큰 비극에 비하면 행복 때문에 그 절망과 아픔이 더 클 겁니다. 여기에 나오는 그물, 그리고 바다, 그리고 젊은 사자, 악어, 이러한 묘사와 표현들은 인간에게는 어느 경계, 한계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묘사하는 겁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이 친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고 꼼짝 달싹 못하는 식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붙잡혀 있는 입장에 있다는 것, 그 입장을 모르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불행이 찾아오고 우는 날이 결국 찾아오고 저주와 심판 날이 찾아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해서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그것은 이렇습니다. 본문 7절, 8절을 보게 되면 이런 말이 나와요. “내가 너를 불 끄듯 할 때에 하늘을 가리워 별로 어둡게 하며 해를 구름으로 가리우며 달로 빛을 발하지 못하게 할 것임이여 하늘의 모든 밝은 빛을 내가 네 위에서 어둡게 하여 어두움을 네 땅에 베풀리로다 나 주 여호와의 말이로다.” 이 애굽나라만을 위해서 하나님이 계시를 주신 것이 아니에요. 성경책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나라, 이스라엘 들으라고 한 거예요.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선지자거든요.
그러면 애굽나라 이야기하는 것은 애굽나라에게 이야기했던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바로 이스라엘에게 직접 나타나셨던 하나님이고 동행하셨던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이 망해버렸거든요. 그 이스라엘 망했다는 이야기만 하시지 않고 왜 그 큰 나라 애굽에 대해서 언급을 하시는가 하면, 원래 이스라엘이 처음에 애굽나라에서 살았던 그 사람들을 거기서 따로 분리해서 이스라엘 나라 만든 거예요. 복잡하게 하지 않고 간단하게 하면 이렇습니다. 도대체 지금 우리가 어디서 구원되어야 됩니까, 하는 그 문제에요.
길가는 사람에게 “아저씨, 당신은 지금 어디서 구원되어야 될 것을 당신이 알고 있습니까?” 그 사람은 “구원이라는 말을 왜 저에게 하며 또 구출된다는 것, 구출되기는 뭘 구출돼? 지금 편하게 잘 사는데 뭘 또 다른데 가서 산다는 말인가? 있을 수 없어.” 그렇게 되지요. 여호와 하나님은 구출해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이에요. 그러면 사람들은 “내가 너희를 건지리라.”고 하나님이 하시면 우리가 물어야 돼요. “하나님이여, 우리가 지금 잘 먹고 잘 사는데 건지기는 어디서에서 건진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사람들이 건진다는 생각이 없이 내가 여기 턱 하니 자리 잡고 있으니까 이 자리 잡고 있는 나에게 행복과 행운을 듬뿍, 축복을 듬뿍 주시옵소서, 하는 용도로 하나님께 매달리며 하나님을 찾습니다. 저기 팔공산이 있는데 그 팔공산 갓바위 보살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보살입니까? 구출하시는 보살이에요? 이 땅에 살면서 보다 행복하게, 이 땅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 살면서 지금보다 더욱더 행복을 보장해주는 부처고 그런 미륵보살로 있는 거예요. 그래서 비는 겁니다. 나가기는 어딜 나가요? 빠져나가기는 어딜 빠져나갑니까?
물에 빠졌다고 우는 것은 오히려 반대입니다. 물에 빠져 우는 것은 하늘나라 갔다고 우는 것이 아니고 현재 이 땅에 보이는 이 땅이 전부인데 왜 그 전부인 땅에서 네가 왜 없어졌느냐고 우는 거예요.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애굽을 하나님께서 갈구시는 이유가 뭐냐 하면, 눈에 보이는 이 땅이 전체고 전부고 이 것 뿐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것이 그것 때문에 망했거든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때는 애굽에서 나오너라, 했단 말이지요. 지금 하나님께서 그 애굽을 닦달 내시고 애굽을 책망하시고 애굽을 벌주시는 거예요.
그러나 인간이라 하는 것은 현재 자기가 자기 몸을 중심으로 해서 자기 몸과 목숨과 재산, 이런 것을 보호해주는 최고의 무리, 집단, 결국은 국가로 마감됩니다. 국가보다 더 큰 덩어리는 없거든요. 그런데 국가 그 안에서 보호받고 사랑받고 자기 생존이 보장되고, 따라서 국가 없이는 나를 지켜주거나 살려줄 것이 없을 때는 우리는 국가가 잘되는 것이 마지막 소망과 희망으로 확정되어 있어요. 다시 묻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구원받아야 됩니까? 바로 이 국가로부터 구원받아야 돼요. 왜 국가로부터 구원받아야 됩니까?
우리는 국가를 어떻게 보느냐 하면, 날 살려주는 제일 믿음직한 단체거든요. 국민연금을 왜 넣습니까? 그건 국가에서 관리하고 나중에 나이 들었을 때 매달 4, 50만원씩 주기 때문에 국가가 얼마나 고맙습니까? 이자 쳐서 불입한 금액보다 더 주니까 얼마나 고마워요. 다시 묻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구원받아야 됩니까? 우리가 국가로부터, 애굽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지금 완전히 비극적인 사태를 유발시키는 그 애굽에서 구원해야 된다는 것이 바로 약속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만 주신 희망이고 약속이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그 약속과 희망을 차버립니다. 듣고 싶어 하지 않아요. 다만 이 땅에 내가 사는 방식으로만 그냥 살도록 복이나 팍팍 내려달라고 그런 식으로 우린 예수,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네 번째 묻습니다. 우리가 어디로부터 구원받아야 됩니까? 바로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나 자신으로부터 구원받아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5천명이 먹을 때가 되었는데 먹을 것이 없어서 곤란에 처했을 때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5천명을 배부르게 먹게 하고 열 두 광주리를 남겼습니다.
요한복음 6장 15절에 보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사람들이 지금 노란리본 달고 기적을 원하잖아요. 그 기적이 뭐냐 하면, “나를 이 세상에서 데려가주옵소서.”라는 기적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 작은 행복이나마 주께서 지켜달라고, 전에 있던 행복이 다시 내 품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그 기적을 달라고 예수께, 하나님께 촛불 기도회를 벌리고 있는 거예요. 요한복음 6장에서 사람들이 떡을 먹고 배부르니까 예수님을 간절히 간곡히 원하는 겁니다.
왜, 떡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에. 우리는 저런 하나님, 저런 메시아, 저런 왕을 원했던 거예요. 바로 그 심보에서 그들은 탈출하고 구출할 생각을 전혀 하고 있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백독하고 천 독하고, 새벽기도로 모이고 금요철야기도회로 모이고 수요일, 수요일은 잘 안 모입니다만, 주일 낮과 오후로 모이고 열심히 봉사하고, 그 모든 것이 ‘그래, 훌쩍 떠나야지.’ 이거 하려고 그렇게 모여드는 겁니까? ‘그래, 떠나야지.’ 이 세상 빨리 하직하기 위해서 금요철야 커피 석잔 마셔가면서 고래고래 고함쳐 가면서 목 터지라고 외치면서 “주여, 떠나게 하옵소서. 주여, 죽게 하옵소서. 나부터 먼저 이 땅에서 떠나게 하고 죽게 하옵소서.” 이렇게 소망하면서 기도 합니까?
애굽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우리가 애굽인이고 우리가 떠날 생각도 하지 않는, 이 소박한 작은 행복이나마 지켜서 사는 재미와 보람을 눈에 보이는 이 세상거리를 가지고 내가 조그만 나의 활동의 결과물로 그 안에서 나는 행복을 얻고자 하는 것, 그러니까 이 작은 행복마저 주님께서 망치지 말라는 거거든요.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이여, 이 소박한 행복을 빼앗아가지 마시고 혹시나 그렇게 되거든 다시 돌려주옵소서.” 그것 때문에 기도회를 하고 간절히 간곡히 기도한다는 말이지요.
그게 무슨 구원이며 그게 무슨 신앙입니까? 떼쓰는 것이고 시위하고 데모하는 것이고 반발이고 반항하는 것이지 그게 무슨 신앙이고 소망이고 그게 무슨 주님에 대한 사랑이겠어요? 뭘 보고 신앙입니까, 도대체?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주께서 탄식한 것처럼 지금 마지막 때에, 아무렇지도 않을 때는 신앙이 있는 것 같지요? 어떤 사태나 사건이 하나 터지니까 그 신앙들 다 어디로 가 버렸습니까? “주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으로서 지금도 그 기적을 주시옵소서.” 그게 바로 주님이 제일 싫어하는 거예요. 그러지 말라고 주님께서 십자가 지신 겁니다. 주께서 십자가 지고 달려가는 것은 인간들이 바로 그런 심보로서 주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지금 제발 우리의 왕이 되어주시고 우리의 구주가 되어달라고 붙잡기 때문에 그 붙잡는 것을 떨치기 위해서 십자가로 달려간 거예요.
제자들도 마찬가지에요. 주님이 기적을 일으키니까 주님과 함께 있으면 자기가 영웅 되는 줄 알고, 스타 되는 줄 알고. 도대체 사고방식들이 십자가 피 흘림은 전혀 모르고 쓴 잔을 마시라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고, 쓴잔을 치워달라고 기도하고 쓴잔을 내쫓는데 바쁘고, 그 저 편하게 매사가 그저 편하게, 편하게만 추구하면서 “주여, 편하게 살게 하옵소서.” 이런 식으로 예수님과 하나님을 이용했습니다. 에스겔 32장 8절 9절에서 그 하나님의 어둠이라는 것은 무엇을 생각하게 하느냐 하면, 옛날 애굽에 하나님의 열 가지 재앙이 떨어졌습니다. 그 재앙에서 아홉 번째 재앙이 어둠의 재앙이었어요. 하늘이 캄캄해지는 재앙이었습니다.
그걸 이 대목에서 다시 언급하시는 이유는 “대체 이스라엘아! 너희가 좋~다고 부러워하는 그 나라, 애굽나라, 애굽나라가 전에 너희 조상 모세가 있을 때 내가 손수 그들에게 열 가지 재앙을 폭격하듯 떨어뜨린 그 나라다. 그런데 너희들은 조금만 아쉬우면 조르르, 잘 산다는 이름으로 애굽나라에 도움을 요청하고 그 애굽의 우상을 섬기고 애굽의 우상을 본받아서 행정적인 관리나 세상나라 만드는데 너희들이 몰두했다는 말이지요. 그걸 국민들이 다 좋아했어요.
생각해 보세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바로 왕이 바보가 아니고 정신병자가 아닙니다. 국가를 통치한다는 것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얼마나 이성적이고 조리가 있고 딱딱 규모가 맞도록 그렇게 통치하겠습니까? 백날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조리 맞게 매뉴얼대로 규격대로 다 하지만 주께서 애굽나라 자체를 하나의 그물로 뒤집어 씌워서, 하나님이 주신 그물로 뒤집어 씌워서 그걸 완전히 우는 땅으로, 우는 동네, 슬픔의 동네로 만드는 것은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이 활동하는 공간이고 하나님이 활동하는 영역이기에 그렇습니다.
남이 일하는데 우리는 그냥 숟가락만 하나 들고 온 것뿐이에요. 우리 인생이란 것은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죽을 때도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몸에 걸쳐 있는 옷 하나, 우리가 먹은 음식 하나, 다 주님의 활동의 결실물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이에요.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도 못하고 죽을 때도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 그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네가 살아가는 모든 것은 나의 활동영역이다.” 그 말입니다. 네가 나름대로 바라는, 네 소망을 이루는 네 현실이나 네 세상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의 세계이고 자신의 현실이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신앙이에요.
그래서 사람이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주의 것이라고 했잖아요. 범사에, 모든 일에 감사하라. 참 이 감사가 정말 찾아보기 힘든, 다시 말해서 믿음이 있느냐고 따질 정도로, 정말 믿음을 찾아보기 힘든 이 어두운 세계, 다시 한 번 우리는 에스겔을 통해서 애굽에게 이야기하는 이 하나님의 계시, “너는 기껏 악어, 그물에 갇힌 악어, 기껏 까불어봐야 젊은 사자고 전부 다 주님의 손아귀에서 하나님께 벌 받기 위해서, 죄받기 위해서, 징계 받고 저주받기 위해서 그냥 노니는 그런 세상,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그런 것들을 너무 부러워하지 맙시다. 그리고 다른 나라 천국이 우리를 지금도 오라고 손짓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한계를 알게 하옵소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주의 활동의 결실물인데 우리는 오해해서 나의 활동의 결실물인지 알았습니다. 이 교만과 자만, 마치 우리가 애굽과 다를 바 없음을 다시 한 번 깨닫고 회개케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