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강-에스겔 32장 17절-21절(할례 받지 못한 자)140507-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32장 17절-21절입니다. 구약성경 1200페이지입니다.
에스겔 32:17-21
“제 십 이년 어느 달 십오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애굽의 무리를 애곡하고 그와 유명한 나라 여자들을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지하에 던지며 이르라 너의 아름다움이 누구보다 지나가는 고 너는 내려가서 할례 받지 않은 자와 함께 뉘울찌어다 그들이 살륙 당한 자 중에 엎드러질 것임이여 그는 칼에 붙인바 되었은즉 그와 그 모든 무리를 끌찌어다 용사 중에 강한 자가 그를 돕는 자와 함께 음부 가운데서 그에게 말함이여 할례 받지 않은 자 곧 칼에 살륙 당한 자들이 내려와서 가만히 누웠다 하리로다.”
성경에서 현실을 묘사하는 것, 현실에 대해서 표현하는 것은 KBS나 MBC에서 현실을 표현하는 것과는 용어자체가 달라요. 신문지상에서나 방송에서 현실을 이야기할 때는, 유엔사무총장이 어떻고, 북한이 어떻고, 검찰총장이 어떻고, 대통령이 어떻고, 이렇게 특정 개개인의 인물에게 어떤 책임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거든요. 이번 일의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이런 식으로. 그런데 성경에서 묘사하는 표현방법은 특정개인이 아니고 이 세상은 하나님이 생각한 집단과 하나님의 버림받기로 한 집단 사이의 암투, 투쟁, 전쟁, 싸움, 그런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 볼 때에 성경을 사적으로 보게 되면 이 용어 자체가 안 맞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성경은 무슨 내용인가?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내용을 덩어리 채로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여러분, 전부를 아는 것이 좋습니까, 일부를 아는 것이 좋습니까? 전부를 한꺼번에 통째로 아는 게 좋아요. 조금의 부분을 알아버리면 그것가지고 다음 사태가 될 때는 써먹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러나 전체를 알아버리면 내 인생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어떤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이미 해답을 다 가진 사람으로서의 넉넉함과 그 자신감과 자유함, 해방감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그럴 줄 알았다.’ 그런 식이지요.
성경 전체를 한꺼번에 내용을 알게 되면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성경대로 되는 거야.’ 이렇게 여유 만만한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을 마치 토정비결 보듯이 내년에는 어떻게, 올해는 어떻게, 이런 식으로 해버리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현실은 전체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성경 보면서 자기 자신이 전체인줄 알고 오해를 하고 있어요. 우리는 전체가 아니고 하나님이 다루시는 한 프로젝트의 일부를 맡은 겁니다. 현대자동차에서 핸들을 꽂는 작업반장이 몸이 안 좋다 하면 ‘내가 몸이 아파 핸들 꽂을 사람이 없으니 현대자동차는 이제 자동차 다 만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반장님이 아픕니까?” 그러면 다른 사람이 대체해서 들어가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전체적으로 하는 일에 나 없어도 하나님의 일은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만약에 제가 아프리카에 가서 선교하다 죽었다. ‘이제 하나님은 일 다 했다.’ 그러면 안 되지요. 내가 없으면 다른 사람이 들어가면 되니까. 이것이 제가 지금 그냥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데 여러분도 여기에 동의를 할 거예요. 이렇게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동의를 하는데 막상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살아보면 하나님마저 내 중심이 되는 것으로 오인하면서 매일 살아가고 있거든요. 하나님께서는 전체를 다루시는데 우리는 그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나 위주로만 모든 것이 돌아가야 하나님다운 것처럼 우리 쪽에서 자꾸 오해를 유발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의 뜻을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해요. 성경 안보고도 뜻을 안다는 식으로 하면 안 되고요. 성경 안 보고 안다는 것은 지금 자기가 편하다는 뜻이거든요. 성경을 보게 되면 편하고 안 편하고 간에 하나님의 계획은 그대로 밀어붙입니다. 성경에 그런 사람 중에 욥이라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욥은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난 뒤에 고생 되게 했습니다. 욥은 짜증났지요. 자기보다 죄지은 사람은 멀쩡한데 남보다 착한 자기에게는 너무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을 주니까 “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고난을 받습니까?”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하나님이 직접 욥에게 찾아와 보니까 욥이 당한 고난은 장차오실, 이 세상을 구원하실 예수님이 당할 고난을 미리 앞당겨서 참여하는 자로서, 그러니까 예수님은 나중에 오지만 욥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살라고 그렇게 고난을 먼저 준 겁니다.
이것은 욥에게 이익이냐 손해인가를 따지면 안돼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욥을 그렇게 쓰셨다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욥을 쓰시니까 진짜 하나님이 장차 오시는 것과 진짜 하나님이 고난주시는 것을 아는 것이고 다른 친구들은 입만 하나님이지 전혀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이지요. 그래서 욥은 알지요. “아하, 전체를 봐야 되겠구나. 나에게 힘든 일 생겼다고 ‘하나님 싫어요.’ 그러면 안 되고 하나님의 그 엄청난, 측량할 수 없는 넓을 뜻이라는 것을 이론상이 아니고 실제 우리 생활 가운데서 아주 절실하게 느끼도록 하나님이 조치를 하셨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표현하는 현실은 오늘 본문 내용을 보게 되면 이렇습니다. 애굽 나오고, 여자들 나오고, 지하 나오고, 특히 할례 받지 않는 자 나오고, 음부 나오고, 음부는 죽음이니까 죽음이 나오고. 이게 하나님께서 현실을 묘사하는 용어들이에요. 다시 할까요? 애곡하는 애굽, 애굽 나오고, 18절에 여자가 나오고, 19절에 할례 받지 않은 자 나오고, 그 다음에 음부가 나오고, 살육당한 자,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KBS, MBC뉴스에 나오지 않는 용어들, 다시 말해서 지하, 죽음의 세계인 음부, 할례 받지 않는 자, 이걸 모르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이야기하는 현실이 어떤 현실인지 아주 모르게 되는 거지요.
그러면 우리가 이 시간에 할 일은 간단한 겁니다. 하나님이 현실을 묘사할 때,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현실이 무엇이냐 할 때 여기에 나오는 용어가 할례 받지 않은 자, 음부, 여자, 지하, 이런 개념들을 가지고 하나님이 묘사하려는 그 현실을 우리가 알아채면 되는 겁니다. 쉽지요? 굉장히 쉽지요. 하나님이 쓰시는 이 특수용어가 있으니까 특수 용어를 디딤돌로 해서 전체 내용을 파악해서 나는 일부고 하나님의 전체 프로젝트는 따로 있다, 이걸 받아들이면 우리는 전체 프로젝트 속에서 모든 정답을 알게 되면 우리는 거기에 참여되는 것만 해도 참 영광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런 현실의 내용이 뭐냐, 차근차근 짚어볼 것이 있습니다만 짚어보다 보면 저녁시간이 되어서 혹시 졸수도 있고 걱정이 되어서 미리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상 나라에서는 너와 나, 우리, 우리들이 만들어나가는 세상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현실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천사가 동원되지 않고 하나님이 개입되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과 사람, 사람 대 사람이 동맹을 맺고 협력을 해서 만들어나가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역사가 중요하고 고난 가운데서도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인간의 지혜와 용기가 추앙받고 영웅이 대접받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영웅이 나중에 지도자가 되는데 그게 바로 인간들이 생각하는 현실이라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동맹관계에 있고 협력관계에 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사실은 관대해요. 봐주기입니다.
관료세계가 서로 봐주기에요. 공무원과 경찰이 서로 봐주고 군인이 경찰을 봐주고. 관련성 있는 직책끼리 낙하산인사하고, 그 쪽 세계가 서로 다 봐주기에요. 이 쪽 세계도 마찬가지고. 미장이 같은 건설하는 사람들끼리도 서로 봐주기. 목수는 미장이 봐주고, 다 봐주기에요. 철도공사도 다 봐주기하고. 자기들끼리 그렇게 해요. 동맹관계. 왜냐하면 인간은 분업화된 협력과 지혜와 힘을 동원하지 않으면 어떤 일을 해나갈 수가 없어요. 협력이 중요하고 동맹이 중요합니다. 인간들의 세상이라는 것은 너와 나와 서로 얼싸안고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고 이해해서 어지간한 잘못도 눈감아주면서 일 되도록 협조하는 인간사회가 18절에 나옵니다.
“인자야 애굽의 무리를 애곡하고 그와 유명한 나라 여자들을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지하에 던지며”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자들이 뭐냐 하면, 애굽나라가 강대국이니까 애굽이 대기업이라면 여자들은 하청업체라고 보면 됩니다. 회사도 마찬가지고 국가도 마찬가지에요. 한 나라가 잘 살면 그 콩고물 뜯어먹고 사는 나라가 주변에 쫙 있는 거예요. 협력체로. 그러면 인간세상이란 서로 관대하고 서로 용납하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화해하고 어지간하면 눈 감아주고 동맹관계 맺고, 이렇게 너 나가 없으면 인류사 자체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공통적으로 생각하는 분위기속의 현실이라면 하나님의 현실은 뭐냐?
그것을 지하에 던지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을 죽음에 던지고 그들을 살육당한 자되게 하고 심판하고 저주하는 그것이 하나님이 만든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현실과 인간현실의 차이점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인간현실은 어지간하면 봐주고 서로 협력하고, 그게 인간현실이에요. 그래서 사형제도도 자제하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현실은 뭐냐 하면, 인간 모든 행동에는 반작용이 있다는 겁니다. 물리학에서 뉴튼의 관성의 법칙인데 반드시 밀면 당기고 당기면 미는 작용이 있어요. S극과 N극이 있고 음이온과 양이온도 그렇고 전기에서 전하의 흐름이 음전자와 양전자가 있잖아요. 음에서 양으로 전기가 흐르듯이 그렇게 모든 이 세상에는 물리학에 보면 반작용, 작용하는데 있어서 반대작용이 있어요.
여러분이 좀 생소할 수 있지만 과학이야기를 할게요. 과학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지금부터 137억 년 전에 우주가 처음 생길 때 빅뱅, 큰 폭발이 일어나면서 그 폭발의 잔재가 바로 복사파라고 해서 지금도 높은 곳의 공기 좋은데 자리 잡은 천문대에서 그 복사 파를 잡아내요. 심지어 TV채널을 바꿀 때 지지직, 복사파가 나오는데 우주가 처음 폭발할 때의 그 잔재가 137억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 퍼지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는 아직도 큰 폭발 안에 그래도 들어 있는 겁니다. 갇혀 있고 들어 있는 거예요. 처음 폭발에서 우리는 벗어난 적이 없어요.
이 우주자체가 큰 폭발에서 계속 확장되고 있었으니까. 이걸 성경에 적용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어떤 요소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만들었다는 걸로 끝이 아니라 그 만든 가운데서 서로가 하나님에 대해서 대적하는, 반작용하는, 하나님이 일을 하게 되면 반발하는 그 반작용요소가 함유된 채 하나님께서 천지를 대폭발, 천지를 창조한 거예요. 그 항거하고 반발하고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대드는 그 요소의 징후, 흔적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에덴동산에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죽음이에요. “이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여러분이 좀 어렵다고 생각되십니까?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전체 다를 알아야 된다고. 일부만 알지 말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 다를 한꺼번에 알아야 돼요. 한꺼번에 다 아는 그것을 지금 말씀드리는 겁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에 대해서 대적하는 그 반작용 원칙이 그 안에 징후로서 증상으로 거기에 있었다, 라는 말씀을 지금 드리는 거예요.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그 행동은 하나님이 하는 일에 반대되는 행동으로서 행동한다는 그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행동을 했을 때는 거기에 대해서 척결하고 죽음을 몰아넣는 조치가 하나님 쪽에서 취해지는 겁니다. 처음 듣는 내용은 아닐 거예요. 하지만 분명히 그렇게 말씀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새벽기도하고……, 우리교회는 새벽기도 없지만 오랜만에 철야하는 사람도 어제 있었어요. 저 뒤에 누워서 철야도 하고 하는데, 그 철야하면서 기도할 때 기도하는 목적이 뭐냐, 인간은 사적인 기도를 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 대통령을 지켜 주옵소서.” 이걸로 철야하는 사람들 없어요. 이건 철야까지 할 필요는 없거든요. 그냥 통성기도나 하면 될 문제정도지 철야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지요.
보통 간곡하게 철야하는 경우는 남의 문제가 아니고 자기문제에요, 자기문제. 그래서 인간은 자기문제를 해결하려고 간곡하게 할 때 그것을 저는 행위라 하고 이 우주에는 그 행위에 대해서 반작용이 반드시 따른다는 이야기를 제가 지금 결론삼아 드리는 거예요. 말이 참 어려운데 더 쉽게 해 봅시다. 여러분이 드라마나 주위에서 듣는 이야기를 보게 되면 “우리 어릴 때는 잘 살았는데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집이고 살림이고 다 경매 들어가서 거리에 나앉고 그 때부터 우리 집안은 꼴아 박았다.” 하거든요.
옛날에는 잘 살았는데 보증잘못 서서 다 망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보증을 서 가지고 망했다는데 처음에 그 사람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은, 만약에 어떤 사람에 보증을 안 서주면 그 사람에게 돈 빌려준 사람이 다 거덜 나게 되어 있어요. 그렇잖아요. “아저씨, 돈 빌려줄 테니 보증인은 있습니까?” “내 친구 보증인이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마음 놓고 돈 빌려주겠습니다.” 그렇게 돈 10억을 빌려줬다 그 말이지요. 만약에 보증 선 사람이 보증을 안 서버리면 10억 빌려준 그 사람이 망하게 된 거예요.
그런데 제가 하는 말은 뭐냐, 이 세상은 내가 안 망하려면 나대신 누가 망해줘야 돼요. 돈 버는 사람이 있잖아요. 누가 돈 벌었다는 말은 반드시 누구는 돈 잃는 사람이 있어요. 우리 동네 지묘동에 한 십년 전에 올 때 분명히 제과점이 두 군데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한 곳이 망했거든요. 주인도 바뀌었고. 가게가 하나 망했다는 말은 그 대신 다른 빵집이 잘 되었다는 말이지요. 이 세상을 나 중심으로 보게 되면 ‘하나님이 참 나를 망하게 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 망하고 남 잘되게 하기 위해서 나를 사용했다, 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까? 아마 생각하기 싫을 거예요. 세상은 얼마나 공평한지 내가 망하면 내가 망한 덕분에 누군가 잘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나는 안 망하고 잘 되었잖아요? 그것은 뭐냐, 나 잘되라고 누구 하나 나 대신 망한 사람이 있어요. 이게 작용과 반작용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하나님 중심이에요. 그래서 세상은 왜 하나님 중심이냐 하면 내가 행동을 잘했다고 할 수 있는 행동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그 행동은 하나님 시선에서 보게 되면 선한 행동이 아닐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요. 내가 웃잖아요. 그러면 나 때문에 우는 사람이 있다고요. 그런데 나 때문에 우는 사람은 생각 안하고 “하나님, 내가 착한 일 해서 복 받았어요.” 이렇게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나 때문에, 내가 웃는 것 때문에 우는 사람을 내 앞에 대령해 와버리면 내가 하는 행동이 결코 완벽하게 착한 행동이 아니고 내가 무지의 소치로서 지금 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하거나 복을 주실 때는 없는 것을 그냥 주시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 것을 빼앗아서 줘요. 다른 사람 것을 빼앗아서 준다고요. 이게 전체로 봐서는 그렇게 보이고, 나를 전체로 보고 ‘나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관심 없어. 나만 챙기면 돼.’라고 된다면 그것은 계속해서 이기주의, 자기운명만 생각하는, 그걸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매달리는, 자기주의밖에 안돼요. 그렇게 되면 자기가 죄인인 것도 몰라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욥이 그렇게 고난 받는 것은 친구를 살리기 위해서 욥이 대신 고난 받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사람들에게 기적을 베풀고 병 고쳐주고, 누가 봐도 예수님은 은혜 베푸는 자요, 하나님의 위대한 자요, 온전한 자요, 하나님 보시기에 완벽한 분으로 왔어요. 사람들이 그 분을 대단한 분으로 봤거든요. 예수님이 처음에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박수치고 환영하고, “호산나, 구원자가 왔다.” 참 대단한 분이 왔기에 하나님이 저분을 버릴 리가 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얼레, 마지막에 보니까 하나님은 죽어나갔습니다.
예수님이 죽어나갔어요. 사람들에게 죄인취급 받아서 죽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떡 주고 고기 줄 때 “야, 제대로 된 메시아가 왔다.”고 다들 인정했지요. 그들은 끝을 몰랐어요. 예수님이 어떤 죽음으로 죽는지를 몰랐습니다. 사람은 전체를 보는 눈이 없어요. 막상 자기에게 이익만 된다면 누구라도 그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보지요. 그런데 그렇게 좋은 예수님이 결국은 그들 손에 의해서 무가치하고 쓸모 짝도 없는 존재로 죽음으로 내 침을 당했지요. 누구에게 문제입니까? 전체를 볼 줄 모르는, 하나님의 뜻에 관심 없는 인간들에게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현실을 어떻게 내치는가? 19절에 보면 할례 받지 않은 자가 나옵니다. 할례 받지 않는 자라고 했는데 할례라는 것은 몸에 새겨지는 언약을 할례라고 합니다. 보통 약속, 언약, 같은 말이라고 보고요. 우리가 약속을 할 때 그 약속이 내 몸에 막 새겨집니까? 7시에 커피숍에서 만나자고 하면 갑자기 내 피부에 7시에 어디서 만나자, 이런 내용의 글자가 내 몸에 막 새겨지는 거예요? 안 새겨지잖아요. 약속이 내 몸에 안 새겨지고 약속은 그냥 소리로서만 내 귀전을 스치고 지나가고 대충 내 맘대로 조립해서 내 머릿속에 저장하는 식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자손에게, 구원받은 자에게는 아예 몸에다가 문신처럼 사인을 해 버린 거예요. “너 이리와. 등짝 대.” 등짝에다 ‘예수’ 하고 사인을 할 때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걸 하나님의 도장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인, 하나님의 도장, 하나님의 인. 유대인들은 그 하나님의 인이 신체 속에 있으니까 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신분이겠습니까? 지금도 유대인들은 그 감격적인 순간을 잊지 못해요. 창세기 17장에 나오는 그 할례언약의 순간을 잊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합니다. 할례 받지 않은 자는 다 지옥가고 할례 받은 자만 천국 간다. 그들은 아주 자신만만했습니다. 몸에 아예 문신을 새겼으니까, 할례를 행했으니까. 남성의 생식기 끝의 양피를 잘라내는 것을 할례라고 하잖아요. 그것이 하나님께서 언약을 새긴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할례를 소유했다고 생각하거든요. 소유했으니까 그들은 구원받았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게 바로 전체적인 하나님의 프로젝트, 하나님의 계획은 모르고 자기만 생각하는, 자기구원만 생각하는 오해였고 오인이었습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전체를 모르고 자기만 챙긴다고요. 이스라엘 사람들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께서 할례를 행하니까 자기 구원받았다고 해서 감사한 거예요. 사실은 할례를 행한 유대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성취에 있어서 그들에게 역할을 준 겁니다. 어떤 역할을 줬느냐 하면, 몸에 할례를 받았는데 그 몸으로 천국가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몸에다가 할례를 새기게 한 겁니다. 몸으로 한 할례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거예요. 구원받지도 못할 언약을, 할례를 왜 몸에 새겨놓았는가?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는 것을 할례 받은 유대인을 통해서 그 증거를 보여주시고자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몸에는 할례를 받았는데 이 몸의 할례가 마음의 할례까지 이어지지를 못했어요. 그런데 마음의 할례로 이어지지 못한 이유가 있어요. 이 할례 받은 내용이 마음의 할례까지 이어지려면 하나님께서 그 할례 받은 백성과 어떤 사건을 마주치게 만들었어요. 지금 표정들을 보니 주무시는 것 같아서 제가 다시 할게요. 지금 하나님께서는 역할을 맡겼습니다. 이건 어렵지 않아요. 유대인에게 역할을 맡겼는데 그들의 몸에다 할례를 새겼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어떤 역할이 있는데 어떤 역할이냐 하면, 할례 받은 자의 혜택이 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어느 정도 혜택이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죽음의 순간이 찾아오는 겁니다. 그게 출애굽할 때 유월절이에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죽입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보면 “인자야 애굽의 무리가 애곡하고.” 애굽의 무리가 애곡하지요. 애굽의 무리가 애곡하는 것이 출애굽기 11장 6절에도 나와요. “애굽 전국에 전무후무한 큰 곡성이 있으리라.” 12장 30절에도 나와요.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호곡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하나님께서는 애굽 전역에 죽음의 폭탄을 내렸어요. 죽음의 폭탄을 내리는데 제가 설교 처음에 이걸 뭐라고 했습니까? 반작용이라고 했지요. 하나님의 반작용. 죽음은 반작용이에요. 하나님께서 만들어놓고 난 뒤에 죽여 버리거든요. 만들어놓았다는 그 작용에 반작용은 뭐냐, 만들어 놓은 그것, 살아 있다고 여기는 그것을 죽여 버리는 것이 반작용이에요.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는 작용과 반작용이 같이 섞여 있는 겁니다. 음부가 있고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이 있고 반대로 영생도 있고 축복도 있고 그리고 천국도 있고 반대로 지옥도 있고.
작용과 반작용이 같이 섞여 있는 것이 하나님이 만든 세상이에요. 그러면 작용과 반작용이 구체적으로는 할례 받은 백성, 언약이 있는, 언약의 위대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언약 받은 백성 앞에 온 애굽이……지금 언약 받은 백성이 여전히 애굽에 같이 살고 있어요. 그 애굽나라에 소낙비 내려오듯이 죽음의 큰 심판이 덮치기 시작합니다. 할 때 누가 살았는가? 몸에 할례 행했던 할례 받은 사람만 살고 할례 없는 사람은 다 죽었어요. 맏아들 다 죽였습니다.
이쯤 해서 설교 다시 해 볼게요. 우리가 보는 현실세계는 인간 대 인간이 서로 협력해서, 이해하고 사랑하고 협조해서 만든 세계기 때문에 반작용 보다는 상당히 관대하고 용서하고 용납하는 소통과 평화를 하나의 모토로 삼고 살아가는 거예요. 우리가 인간사 살면서 서로 찔러 죽이라고 인간이 협력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우리 서로 만나자. 그래서 서로 찔러죽이자.” 이러지는 않는다는 말이지요. 어떻게 하면 네 지혜 끄집어내고 내 지혜 끄집어내서 힘을 모으고 합해서 한 번 살아보자, 살아보자는 것이거든요.
주례사 하면서 “신랑신부는 서로 싸우세요. 망하세요.” 이렇게 주례하지 않잖아요. “그저 아플 때나 괴로울 때나 슬플 때나 서로 협력해서 뭔가 살아야 되니까 살도록 노력해 보세요.”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현실이란 뭐냐 하면, 살아야 되겠다고 하면 거기에 대한 반작용이 있다니까요? 제가 오늘 설교시간에 여러 번 강조했지만 돌아서면 다 잊을까봐 걱정되는데 반드시 죽음이 있고 심판이 있고 저주가 있고 지옥이 있어요. 그런데 그 지옥은 누구한테 가는가? 언약이 없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그 말이이에요. 지금까지 설명한 그 핵심이 그거예요.
여러분, 전체 프로젝트를 알고 싶지 않습니까? 궁금하지요. 그걸 알려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사람, 할례 받지 않은 사람은 다 죽이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뭐냐, 그 애굽나라 사람들은 동맹국과 함께 할례 받지 않는 자와 함께 저주받는다는 내용, 이게 에스겔에게 준 내용입니다. 이게 KBS뉴스에 안 나오는 내용이에요. “이제부터 아홉시 뉴스를 시작하겠습니다. 할례 받지 않는 사람은 지옥 갑니다.” 이게 뉴스에 나옵니까? “여러분, 노란 리본 달고 서로 협력합시다.” 이런 것이 뉴스에요. “할례 받지 않는 사람은 다 지옥 갑니다.” 이게 하늘나라 뉴스에요.
우리는 내 중심으로 하게 되면 하나님의 현실, 성경자체가 싫어요. 내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그저 협력해서 잘 살기를 원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땅에서 정말로 마음에 할례를 받아서 이미 나는 죽어 마땅함을 아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기대할 것, 보이지 않는 소망은 천국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으로 핍박을 받고 마음에 할례 받은 사람으로서 핍박을 받는다면 이 세상 보다 더 천국을 사모하게 되고 그렇게 살아가게 될 거예요.
지금 어디까지 제가 이야기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할례 받은 유대인들은 어떤 기능이 있고 역할이 있다. 그 기능과 역할이 뭐냐 하면, 할례가 무슨 용도냐 그 말이지요. 죽음을 이기더라. 그걸 어디서 알 수 있는가? 유월절 날 애굽 전체를 다 죽일 때에 할례 받은 이스라엘 백성만 살고 할례 받지 않는 애굽의 장자들은 다 죽은 거예요. 이제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유월절 그 죽음이 죽음의 전부인가? 아닙니다. 신약에 와서 골로새서 2장에 보면 영원한 죽음이 있어요. 영원한 지옥죽음, 거기에 또 할례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그것이 몸으로 하는 할례가 아니고 진짜 마음으로 할례입니다. 진짜 마음으로 할례가 뭐냐,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믿는 그 마음,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그 믿음이 진짜배기 할례가 되는데 그 진짜배기 할례는 단순히 숨 끊어지는 목숨정도가 아니고 영원한 저주와 심판 앞에서도 살아남아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그 할례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라고 골로새서 2장 12절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고 장사되어서 사흘 만에 살아난 이것이 바로 진짜배기 할례라는 말이지요. 진짜배기 언약의 완성이고.
그렇다면, 죽어도 산다면, 우리가 이러한 마음의 할례를 이미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세상 전체를 아는 입장에서는 소소한 세상적인 사태나 사건에 깜짝깜짝 놀라거나 힘들어할 필요는 없는 겁니다. 그저 남이 죽고 나는 살아야지, 이런 식으로 살 필요는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저한테 맡겨준 마음의 할례자로서 해야 될 역할을 하게 하옵소서.” 그러면 됩니다.
그게 바로 우리 전체를 아는 사람의 여유로움이고 자신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들이 동맹을 하더라도 할례 받지 않은 자는 할례 받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이 마지막에는 저주받듯이 지금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 몸은 죽고 우리 몸은 새 몸으로 산다는 그 마음을 우리가 이미 믿고 알고 있다면 주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 어떤 마귀의 위협도 괜찮다는 것을, 우리한테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오늘도 우리에게 성령께서 마음의 할례, 사인을 하는 거예요.
“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전체를 알게 하옵소서. 소소한 일에 마음, 심장 상하지 말고 우리 역할이 그냥 밥이나 먹고 사는 것이 역할이 아님을 깨달아서 성령 받아 마음의 할례 받은 사람으로서 제 구실을 할 수 있도록 늘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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