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앗수르의 영광(겔31;1-6)이근호140402

아빠와 함께 2014. 4. 4. 08:07

앗수르의 영광(에스겔 31:1-6)

음성                 동영상

 이근호 14-04-02 21:19 
앗수르의 영광

2014년 4월 2일                   본문 말씀: 에스겔 31: 1-6

(31:1) 제십일년 삼월 초 일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31:2) 인자야 너는 애굽 왕 바로와 그 무리에게 이르기를 네 큰 위엄을 뉘게 비하랴

(31:3) 볼지어다 앗수르 사람은 가지가 아름답고 그늘은 삼림의 그늘 같으며 키가 높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레바논 백향목이었느니라

(31:4) 물들이 그것을 기르며 깊은 물이 그것을 자라게 하며 강들이 그 심긴 곳을 둘러 흐르며 보의 물이 들의 모든 나무에까지 미치매

(31:5) 그 나무가 물이 많으므로 키가 들의 모든 나무보다 높으며 굵은 가지가 번성하며 가는 가지가 길게 빼어났고

(31:6) 공중의 모든 새가 그 큰 가지에 깃들이며 들의 모든 짐승이 그 가는 가지 밑에 새끼를 낳으며 모든 큰 나라가 그 그늘 아래 거하였었느니라

개인적인 일에만 몰두 하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고대 제국의 하나인 앗수르 이야기에 관심 갖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자신들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일 것이라고 짐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 대 인간으로 맺어지는 사회에서는 사상이 중요하겠지만 하나님 나라에는 모든 것이 예언으로 다루어져야 합니다.

사상에는 나름대로 목적과 의도가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 하나님의 예언에는 인간이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목적을 향하여 질주하게 됩니다. 피조 세계의 그 어떠한 방해에도 이 질주를 저지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예언한 대로 움직이게끔 되어 있습니다. 이 예언 앞에서 사적인 모든 시도는 실패작일 수밖에 없습니다.

즉 하나님의 예언은 인간 실패를 유도합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자기네들이 하는 일에 더 신경 쓰고 더 중요시하기 때문에 필히 실패를 낳게 됩니다. 하다 보니 실패로 이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처음부터 실패일 수밖에 없는 일에 인간이 나서게 됩니다. 그것은 그들이 평소에 흠모하고 원했던 바가 하나님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주변에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앗수르 제국은 오늘 본문에 의해서 그 당시 최고의 나라입니다. 인간들이 마음 속으로 품고 있는 그 이상적인 상황이 구체적기고 실제적으로 누리고 있는 나라가 곧 앗수르입니다. 따라서 “내가 무엇을 원하지?”라고 분명치 않았던 사람들도 앗수르 나라를 접하는 순간, “그래 맞아. 내가 평소에 원했던 바가 저것였어”라고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이로서 개인은 ‘멋있는 집단’으로서의 국가 형식에 이미 매료되고 있고 긍지나 자부심의 대상이 됨과 동시에 이미 집단의 일부로 소속되어 버립니다. 한 통속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개인의 자부심이 곧 국가입니다. 이런 예는 교회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만약에 교회에 아주 돈이 많고 유력한 인사 내외간에 참석했다고 가정합시다.

십일조 및 막대한 헌금을 선뜻 내놓았다고 칩시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교인들에게 신앙생활의 방해로 작용하겠습니까 아니면 보람과 활기를 북돋아줄까요? 평소에 교인들은 없는 살림을 가지고서는 좁은 십자가의 길에 들어섰다는 믿음으로 산다고 자부했습니다. 하지만 유력한 자의 기부금을 대하는 순간, 교인들은 흥분상태에 빠집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이 가난한 교회를 살리겠다고 돌보아주시는군요”라고 하면서 감격들을 할 겁니다. 바로 이런 사실로 기뻐했다는 것은 곧 평소에 십자가 길, 고난 운운한 것은 다  정작 얻고자 하는 바가 따로 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한 핑계입니다. 사실, 교인들은 자신들이 뭘 감추고 있는 바로 알 길이 없습니다.

이 감추고 있는 바를 들통내어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유력한 자를 교회에 등장케 하신 것입니다. 앗수르 제국은 요즈음 식으로 하면 미국이나 캐나다나 호주나 서유럽입니다. 선진국입니다. 선망의 대상이 되는 국가를 말합니다. 사적으로 이미 인간들은 자신들이 되고 싶은 상황을 그리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그려진 이상국가를 벌써 현실화한 나라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런 나라처럼 되는 것이 평소의 소망입니다. 기도를 간절히 하는 그 바탕에서 이런 염원들이 작동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해 “망한다”고 예언해버립니다.

예언이란 실은 장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일이 실은 예언 안에서 과거에 속한 현재임을 알리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매일매일 이미 확정난 일에 대해서 확인차원에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인간들의 시간 의식에 의하면, 출생이 먼저 있고 나중에는 본인의 장례식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언 안에서는 장례식이 먼저고 출생은 나중입니다. 미래가 먼저가 과거가 나중에 해당됨을 파악되게 하는 방식으로 적용시킵니다. 인간들이 평소에 해대는 모든 선택은 실은 이미 확정나 있는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패 뒤집기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미 확정난 일에 새삼 확인할 필요가 뭐가 있을까요?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일에 실패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실패가 곧 인간이 짊어져야 할 운명입니다. 실패 중에 최고조의 실패는 본인의 죽음입니다. 그 죽음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인간은 이 당에 출생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에게는 실패의 위치가 중요합니다. 인간은 집단적으로 십자가 앞에서 실패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평생 분투노력을 다해도 최종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마치 곰을 부대 안에 잡아넣으면 곰은 온갖 몸부림을 치고 부대는 울퉁붙퉁 튀어나와도 역시 곰의 형편은 달라질 것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앗수르가 하나님의 예언에서 점하는 취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몽둥이’입니다.(이사야 10:5)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건지시기 위해 필요한 몽둥이입니다. 유다 나라, 특히 앗수르가 더 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성이 드높을 때, 유다의 왕 아하스 왕은 앗수르를 흠모했습니다. 이사야 7장에서 이 때 이사야 선지자가 아하스왕을 찾아옵니다.

이미 아하스 왕은 북쪽 이스라엘과 아람 나라의 공격에 대비해서 최고의 강대국인 앗수르와 동맹을 맺은 놓은 상태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 나라는 그런 식으로 지탱해서는 아니될 나라임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식’입니다. 인간들의 머리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 방식입니다.

흠모할 만한 강대국과 결탁한 아하스 왕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거절하게 마련입니다. 바로 이런 형편을 이미 하나님께서 아셔서 아하스왕을 실패케 합니다. 즉 자신이 믿는 그 나라가 도리어 유다 나라를 치는 몽둥이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처녀가 낳은 아이는 그 어떤 인간으로부터도 흠모를 받지 못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그 인간을 그 인간을 치는 몽둥이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즉 내가 나에게 몽둥이가 되게 하는 방식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기 보다는 정작 내 욕심이 되고 싶어하는 상황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예언이 들리지도 않고 거부하게 됩니다. 바로 이 실패의 자리에서 비로소 예수님의 아픔이 등장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망하는 그 자리가 곧 주님이 우리를 살리는 자리요 복된 자리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4-04-03 17:01 
84강-에스겔 31장 1절-6절(앗수르의 영광)140402-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31장 1절-6절입니다. 구약성경 1198페이지입니다.



에스겔 31:1-6



“제 십 일년 삼월 초 일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애굽 왕 바로와 그 무리에게 이르기를 네 큰 위엄을 뉘게 비하랴 볼찌어다 앗수르 사람은 가지가 아름답고 그늘은 삼림의 그늘 같으며 키가 높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레바논 백향목이었느니라 물들이 그것을 기르며 깊은 물이 그것을 자라게 하며 강들이 그 심긴 곳을 둘러 흐르며 보의 물이 들의 모든 나무에까지 미치매 그 나무가 물이 많으므로 키가 들의 모든 나무보다 높으며 굵은 가지가 번성하며 가는 가지가 길게 빼어났고 공중의 모든 새가 그 큰 가지에 깃들이며 들의 모든 짐승이 그 가는 가지 밑에 새끼를 낳으며 모든 큰 나라가 그 그늘 아래 거하였었느니라.”



오늘 본문 내용은 앗수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평가하신 것입니다. 앗수르는 최고였다, 그 당시에 최고의 제국이었고 모든 것이 풍요로웠고 넉넉했으며 그 나라가 얼마나 번성했는지 마치 에덴동산 같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동산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사람의 동산은 아닙니다. 항상 성경 보면서 자꾸 하나님을 빼놓고 생각하는 경향이 참 많이 있거든요. 에덴동산 같은 ‘야, 살기 좋겠다.’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참 타고난 인식이라는 것이 무시를 못해요.



분명히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거하는 동산이라고 분명히 언급을 해도 꼭 살기 좋겠다는 식으로 나와요. 천국이란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곳이 천국인데 ‘야, 사는데 편하겠다.’ 그런 인식부터 먼저 챙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설교자로서는 그걸 바꿔줘야 되는 부담을 자꾸 느끼게 되는 겁니다. 이 땅에 사람 사는 것이 힘들잖아요. 힘드니까 하나님 도움 받아서 자기가 좀 편한 대로 살아보겠다는 그 생각이 속에 잠재되어 있으니까 하나님이 계시다는 생각은 못하고 내가 살기 편하냐, 그것부터 우선 조건이 되어버렸어요.



그러면 성경해석이 잘못되었습니다. 교정이 필요한 겁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에요. 3절에 “앗수르 사람은 가지가 아름답고 그늘은 삼림의 그늘 같으며 키가 높고.” 이런 식으로 풍요롭게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을 언급을 했을 때, 이것을 오늘날 에스겔이 예언한 말씀을 전달해 보면요, 사람들은 옛날 앗수르 제국에 별 관심 없고 사적인 일에 관심 있지요. 사적인 일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여러분, 이제부터 앗수르에 대해서 설교하겠습니다.” 하면 연결이 안돼요.



우리의 관심사는 사적인 거예요. 일상적인 것이고 하루하루 어떻게 재미있게 사는가, 어떻게 수입을 얻으면서 사는가, 그것이 우선인데 성경에서는 앗수르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까, 이게 대한민국도 아니고 중국도 아니고 북한도 아니고 앗수르 이야기가 나오니 교인들이 성경을 보면서도 무엇과 연결이 되는가 하면, 지금 자기가 사적인 일에 종사하는 것과 에스겔 31장에 나오는 앗수르제국에 대해서 하나님이 언급하는 취지하고 연결이 잘 원활하게 성립이 안돼요.



그러면 우리의 관심은 사적인 내 사생활에 관심이 있단 말이지요. “하나님, 어떻게 하면 올해 내 일이 잘 풀리겠습니까, 이사는 언제쯤 가면 좋겠습니까?” 이런 사적인 일에 관심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앗수르에 대해서 네가 알아?” 하면 앗수르하고 이사 가는 것하고 아무리 따져도 별 상관없이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할 리가 없잖아요. 사람과 사람사이에 중요한 것은 사상입니다. 생각이 같아야 돼요.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중요한 것은 예언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입니다.



사람의 일거수일투족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예언대로 되는 거예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예언을 제켜 놓고, 하나님을 빼버리고 이야기하니까 서로서로 좋은 게 좋은 걸로 넘어가요. 우리 서로 친하게 지내면 저 사람은 나한테 도움 될 사람이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하지만 세상은 사람들이 도와준다고 해서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예언대로 조치됩니다. 그렇다면 앗수르 제국이 등장하는 이유가 뭐냐, 논리를 따라가면 복잡해지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앗수르 나라가 없어진다는 거예요.



없어질 나라가 없어지기 전까지는 너무나 번창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번창한 나라, 만약 여러분의 이웃이 너무 잘살고 모든 능력이 넘치고 권력자와 연계되어 있고 뭔 일을 하는데 있어서 힘이 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을 미워할까요, 아니면 흠모의 대상이 될까요? 흠모의 대상이 되면서 그 사람이 신앙의 방해물이 된다는 생각을 사람들이 해야 돼요. 같은 옆집 말고 같은 교회에 새로 누가 등록을 했는데, 재산이 한 250억쯤 되는데, 대구에서 기업체를 운영하는 사장님이다, 그런 분이 교회에 등록을 했다고 한다면 그 교회 교인들에게 신앙에 도움이 될까요, 훼방이 될까요? 백프로 신앙에 방해물이 됩니다.



앗수르가 분명 개인은 아니에요. 그러나 앗수르제국 안에는 개개인이 소복하게 담겨져 있습니다. 앗수르 국민들은 자기 나라가 천하 최고의 제국이 된 것에 대해서 굉장히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랑스러워한 동시에 주변국가, 약소국가, 작은 나라들, 특히 이스라엘이나 유다, 이런 나라들은 그 앗수르 나라를 그렇게 흠모했어요. 참 부러워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그 나라 사람들이 믿는 종교를 유다 왕이 전권적으로 법으로 정해서 이름만 여호와지 알맹이는 쏙 빼버리고 거기에 앗수르 사람들이 믿는 종교로 대체해 버렸습니다.



왜, 결과를 보라는 말이지요. 교회를 몇 년 다니고 기도를 어떻게 하고,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다 집어치우고 결과를 보자. 이렇게 하나님을 믿었더니 부자 되었더라, 결과가 말해주는 거예요. 평소에 사람들이 부자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어떤 사람이 교회 와서 부자 되었다고 한다면 그 방법, 노하우, 하나님을 설득하고 하나님을 다룬 숨겨진 비법을 하나 배우기위해서 얼마나 그들은 노력을 하겠습니까? 금식기도를 해서 부자가 되었다고 하면 다 따라서 금식기도를 할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 앗수르 나라를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별로 좋아들 하지 않고 정작 하나님보다 더 원하는 바가 있다는 겁니다. 그 있다는 것을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고 내 안에 하나님, 하나님, 해도 사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이용만 하려는 어떤 것, 하나님이 싫어하는 목표가 들어 있을 것인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다 할 때는 하나님께서 바깥에다 유발시켜 놓고 ‘아, 바로 저거야. 내가 되고 싶은 사태가 바로 저런 사태야. 내가 되고 싶은 최종적인 상황, 난 저걸 축복이라고 본 거야. 난 저것 때문에 교회 온 거야. 난 저것 때문에 하나님 믿게 된 거야.’라고 부러워하는 사건을 유발시켜 줍니다.



전부 다 하나님의 전략이지요. 이스라엘, 유다는 구원을 받아야 되는데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한 것이 누구냐, 외부인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외부인이 갖고 있던 것보다 더 큰 덩어리인 암적 요소가 자기 안에 들어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안에 돌멩이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 돌멩이를 네 손으로 끄집어 낼 수 없다는 것을 알리는 방법으로 그들 바깥에 거대한 장애요소를 만들어 놓습니다. 만들어 놓으면 그 제서야 ‘맞아, 내가 그걸 원했어.’ 라고 자기나라가 잘 되는 방식대로 다 동원하다 보면 하나님의 신앙이라 하는 것은 어림도 없이 다 날라가 버리는 거지요.



신앙이 있다고 했는데 사실은 전혀 없었고 하나님의 대적하는 요소만 가득 찼다는 것을 드러낼 때 하나님은 에스겔 31장을 통해서 앗수르 제국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 내막을 펼쳐 가시는 겁니다. 그래도 아직까지 우리가 이해 안 되는 것은 뭐냐, 앗수르라는 것은 특정 개인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집단, 나라를 두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어떤 집단, 21세기 현대인들은 나라보다도 내가 중요하잖아요. 사적인 개인이 중요하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이 개인과 저 국가는 어떻게 연결되느냐?



그것은 간단하게 연결돼요. 사람이 사적으로 살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힘을 원하게 됩니다. 그 큰 힘은 우선 가까운 친척에서 얻고자 하고 그것도 안 되면 친구에게 얻고자 하거든요. 어려서 클 때는 부모한테 기대다가 좀 커서 열 살 남짓 되어서부터는 친구에게 기대고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사회에 기대서 가정보다 사회에서 자기 살길을 찾잖아요. 점점 더 넓은 세계에 가는 거예요. 그 넓은 세계의 끝이 어디냐는 거예요. 그 넓은 세계의 끝에 미리 가 있는 게 있어요. 먼저 선진국이 된 나라가 있어요.



요새 같으면 호주,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아니면 서유럽의 여러 나라들. 젊은 애들의 꿈이 바로 유럽에 가는 것이고 호주에 가는 것이고 뉴질랜드 가는 그거예요. 자진해서 탄자니아에 가겠다든지 자진해서 필리핀이라는 나라를 위한다든지 그렇게 안 합니다. 내가 되고 싶은 희망은 그쪽 나라가 미리 선점하고 있으니까 그 쪽에 가야 뭔가 하나 얻을 수가 있거든요. 제가 그런 소리를 했는데 미디어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한국에서 공부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어디를 가야 하느냐 하면, 반드시 미국에 가야 한다는 거예요.



미디어 공부라는 게 뭐냐 하면, 영화산업에서 3D 그래픽 같은 분야, 그런 기술들은 선진 기술이 있는 미국에서 배워 와야 한국에서 알아준다는 겁니다. 젊은 애들끼리는 그런 정보가 다 되어 있어요. 젊은 애들의 정보라는 것이 결국 선진국에서 흘러내려오는 겁니다. 그 선진국, 미국 같은 선진국이었던 게 그 당시의 앗수르에요. 오늘 본문 1절부터 6절까지 본 것이 뭐냐 하면, 모든 물이 그 위에서 어느 쪽으로? 아래쪽으로, 세상의 모든 중요한 것들, 세상을 살리는 모든 물이 앗수르가 수원지가 되고 거기서 흘러내리는 식으로 내려온다는 겁니다.



마치 에덴동산 같아요. 에덴동산에 강이 있는데 거기서 물이 흘러서 주변에 있는 모든 생물에 생명을 주는 것처럼 앗수르가 그 당시에 그러한 역할을 맡은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가 졸지에 없어졌다는 거예요. 앗수르라는 나라는 세계역사가운데 참 길기도 해요. 앗수르 제국은 BC 1350년부터 시작해서 BC 612년까지 약 730년 동안 거대하게 존재했던 제국입니다. 물론 이집트보다는 짧지만 굉장한 제국이었어요. 그 제국이 나중에 바벨론한테 망하는데 그 제국이 온순하게 있다가 크게 발작을 일으키면서 갑자기 힘을 발휘한 때가 언제냐 하면, 이스라엘과 유다나라와 상관했던, 이스라엘을 건드렸던 그 때가 가장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성경에서 예언하기를 “네가 단단한 몽둥이로 너를 사용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현재 있는 미국, 미국은 2차 대전 때부터 번창하기 시작해서 지금 최고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 전까지는 영국이었고 지금은 미국이 2차 대전 때부터, 2차 대전이 1939년이니까 거의 80년 이상 계속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바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때리는 몽둥이라고 제가 미리 이야기한다면 아무도 안 믿겠지요. 아무도 안 믿을 겁니다.



이 땅에서 힘이 있고 잘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몽둥이로 사용한다는 겁니다. 신앙, 신앙, 하나님, 하나님, 해도 뭔가 하나님 영광이 목적이 아니고 노림수가 있어요. 은근히 얻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본인도 잘 표현을 못해요. 하지만 본인이 흠모하고 사랑하는 것이 있어요. 나는 누구처럼 되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바로 그 당시의 앗수르였습니다. 앗수르가 모든 젊은이의 희망이고 기대사항이었습니다. 지금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들의 모습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이의 희망인 것처럼 그 당시 앗수르가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앗수르를 하나님께서 몽둥이로 사용한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말인가? 몽둥이라는 것은 원래 겁나는 것인데 하나님이 사용하는 몽둥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겁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이 몽둥이인줄도 모르고 그것을 오히려 흠모하고 좋아하고 있는 입장에서 갑자기 얻어맞는 셈이 되는 겁니다. 어째서 그런지 지금부터 그것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성경에 있는 내용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인식의 발상부터 먼저 바꿔야 돼요.



하나님의 예언이라는 것은 인간의 사상이 아니에요. 인간끼리 서로 논하는 사상이 아니고 하나님의 예언은 인간들이 아무리 파악해도 파악하지 못할 요소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사람이 태어나서 늙어 죽을 때 장례식을 하잖아요. 하나님의 예언에 의하면 이 둘을 바꿔놓는 거예요. 사람이 장례식이 먼저고 출생은 나중이 되는 겁니다. 이 바꿔지는 인식이 되지 못하면 성경 전반에 대해서 결국 오해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 인간의 시간은 시작이 있고 끝은 죽음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부러 출생케 하는 거예요. 죽음이 먼저고 그 죽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왜 죽어야 하는지를 증명하기 위해서 인간을 이 땅에 출생케 하시는 겁니다. 그게 전도서에도 나오고 여러 곳에 나와요. 무엇이 먼저냐, 무엇이 나중이냐에 대해서 우리 안목을 버리고 주님의 안목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바뀌지 않으면 우리는 사적인 것에 매여서 결국 자살하듯이 인생을 마감하게 돼요. 현재 사람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그 평소에 괴로울 때가 언제입니까? 짜증날 때가 언제입니까? 진짜 화가 날 때가 언제입니까? 분통 터질 때가 언제입니까?



순서가 안 바뀌어서 그래요. 순서가 바뀌면 화내고 분통터지고 울화증 날 일이 없는데 순서가 안 바뀌니까 울화증이 나고 분통이 터지고 화가 나는 거예요. 이런 말입니다. 결과가 먼저고요, 원인이 나중인데……, 갑자기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세상에서 참새가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니까 세상만사는 다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 좀 다니는 사람들은 다 알아요. 그런데 인간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도 있는 거예요. 그래서 자유의지도 있고 하나님의 주권도 있다면 이게 앞뒤가 안 맞는 거예요.



사람들은 말이 안 맞는다고 보는 거예요. 주권이 있다는 말은 내가 뭘 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되었을 뿐이고 자유의지가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뜻도 있다는 말이에요. 내가 뭐든지 선택할 뜻도 있다는 말이지요. 그것을 어떻게 결합시킬지가 상당히 난처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 뜻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의지 나중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유의지보다 먼저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주권이 먼저 있어가지고 인간의 자유의지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주권이 어떤 뜻으로 펼쳐지는지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인간은 그걸 자기선택을 하면서 하는 거예요.



선택을 하게 되면,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포인트가 나왔어요, 선택을 하게 되면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 있어요.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의 자유의지는. 그런데 실패해도 인간은 한 고집을 하기에 또 성공을 기대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 실패가 멈추는 곳이 있어요. 그때가 가장 하나님의 주권이 확실하게 증거 되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뭐냐, 인간의 눈동자, 손, 발, 모든 것이 멈추는 그날, 죽는 날입니다. 평생토록 살아보겠다고, 살아보겠다고, 먹을 것 안 먹고 쓸 것 안 쓰고 살아보겠다고 그렇게 해도 그 살아보겠다는 것이 뭐냐 하면,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뜻을 해석해 냈다는 그런 뜻이거든요.



“하나님 뜻이 뭡니까? 하나님 뜻에 맞춰서 살면 살 수 있겠지요? 주의 뜻에 맞춰서라도 내가 기어이 살아남겠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그렇게 주의 뜻에 맞춰서 살겠다고 한 그 뜻이 죽는 순간, 한평생 살아온 나의 모든 시도가 실패라는 사실을 아는 거예요. 인간은 실패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인간은 죽기 위해서 태어나는 거예요. 이게 말장난이 아닙니다. 인간이 미리 자기죽음을 인식한다면 모든 것이 실패가 다 없어져 버리고 성공 아닌 게 없어요. 다 성공이에요.



그러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뭐냐? 인간의 자유의지는요, 인간의 모든 행동과 결과를 등질화, 동질화, 등질화라는 말이 더 정확하지만 잘 안 쓰는 말이니까 동질화, 동일하게 보는 겁니다. 지리산 곰을 잡아왔다. 곰을 잡아서 매듭으로 묶어서 부대 안에 넣었습니다. 그러면 살아 있는 곰이 잠잠히 잠이나 자고 있겠습니까? 살아보겠다고 막 부대 안에서 치고 난리 나지요. 그 곰이 몇 살까지 살지는 모르지만 한 80까지 살다가 지쳐서, 지쳤는지 아니면 치매가 걸렸는지 축 늘어졌을 때 부대 열고 매듭 풀어보면 곰이 죽어 있잖아요.



곰이 부대 안에서 여기 쿵, 저기 쿵, 하면서 막 돌출하지요. 안에서 몸부림을 치니까. 곰이 안에서 잠잠하다고 해서 곰이 토끼 되는 것도 아니고 설친다고 곰이 사자되는 것도 아니고 설쳐도 곰이고 잠잠해도 곰이고, 인간이라는 것은 주님의 부대 안에서 아무리 설쳐도 나중에 부대 열어보면 맨 그 인간이 그 인간이에요. 그 인간이 뭘 부러워하느냐 하면, 앗수르를 부러워하는 거예요. 그래서 앗수르를 하나님께서 없애버리는 겁니다. 앗수르가 없어질 때까지 이스라엘과 유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나라가 그렇게 앗수르 종교를 수입해다 씁니다. 왜, 내가 되고 싶은 나는 앗수르가 제공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유다와 이스라엘은 모델을 잘못 본 거예요. 모델을 내가 되고 싶은 것이 곰 같은 앗수르가 설치고 선진국인 미국처럼 잘 되니까 그것을 모델로 본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로 하여금 모델로 보이도록 유발시켜 놓고 그야말로 앗수르를 목 졸라 죽이듯이 그냥 죽여 버립니다. 그럴 때 누가 실망하느냐 하면, 그동안 앗수르를 믿었던 이스라엘 유다나라가 자기 모델, 목적이 상실되어 버려요.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구원하는 방식은 간단합니다.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고 기대에 응하는 그 모든 목적을 없애버리고 그것을 실패로 끝내버리는 거예요.



실패라는 말로 했지만 더 정확한 말은 등질화, 또는 동질화시키는 겁니다. 살아 있는 인간이나 죽은 인간이나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으로 동질화시켜 버려요. 전두환이나 박 근혜나 똑같이 본다 그 말입니다. 김대중도 마찬가지고.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동일하게 보는 거예요. 그런 안목으로 보려면 초월적인 안목에서 봐야 모든 것이 동일하게 보입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그런 것이 없었어요. 그래서 망합니다. 그래서 망하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 시체밖에 안 되는 앗수르를 만들기는 왜 만들어 놓았는가?



저에게 따진다면 제가 분명히 언급했습니다. 몽둥이로 사용한다니까요? 방금 들었는데 다 잊었지요? 몽둥이로 사용하는 겁니다. 자기가 흠모하는 대상에게 얻어맞게 하는 겁니다. 어떤 가정이 있는 남자가 나이가 한 50되면서 사업도 잘되고 애들도 잘 크니까 심심했던 모양이지요. 그래서 20살 아가씨와 연애를 했다 합시다. 사랑과 전쟁에 나올법한 이야기죠. 자기 부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가 허무의 대상이에요. 나이 50에 사는 생기를 북돋아 줄 수 있는, 사람 사는 재미를 느끼게 만드는 멋진 기회가 찾아온 거예요.



갑자기 살맛이 나고, 어디 나갈 때 막 향수 뿌리고, 아내는 눈치 채고. ‘안 그러던 양반이 왜 저러지?’ 이렇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자기가 흠모한다고 생각한 그것이 자기를 향한 몽둥이라는 사실을 그 젊은 아가씨와 만나면서 느끼겠습니까? 지금 적절치 않은 예를 들은 것 같은데 바꿔 봅시다. 교회에 어떤 사업가가 왔는데 헌금도 많이 하고 십일조도 많이 했다는 말이지요. 교인들이 다 흠모해요. 그런데 그 분이 우리교회에 보내준 몽둥이라는 사실을 교인들이 알까요? 생각도 못합니다. ‘야, 이제 우리교회 이제 예배당 짓겠다.’ 대번에 생각하는 것이 그거예요.



몽둥이라는 생각을 못한 거예요. 제가 이런 이야기할 때 이해가 안 되면 십자가만 생각하세요, 십자가만. 예수님만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을 누가 좋아했습니까? 이사야 53장에서 예수님을 가지고 ‘흠모할 것이 전혀 없는 분’이라고 해요. 이 말은 예수님 빼놓고 신앙생활 제대로 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뜻이에요. 신앙 같은 소리, 이 세상에 누가 신앙을 해요. 전부 다 앗수르 백성들인데. 많은 앗수르 백성들인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앗수르가 사람들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들어요. “앗수르 사람은 가지가 아름답고 그늘은 삼림의 그늘 같으며 키가 높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레바논 백향목이었느니라 물들이 그것을 기르며 깊은 물이 그것을 자라게 하며 강들이 그 심긴 곳을 둘러 흐르며 보의 물이 들의 모든 나무에까지 미치매 그 나무가 물이 많으므로 키가 들의 모든 나무보다 높으며 굵은 가지가 번성하며 가는 가지가 길게 빼어났고 공중의 모든 새가 그 큰 가지에 깃들이며.”



하나님 믿는 보람을 이것으로 하고 싶은 것 아니겠어요? 우리 이것 못되어서 환장한 사람들 아닙니까? 야, 이래야 산다는 것, 한번쯤 이렇게 살아야 거기서 살맛이 나지, 라고 우리의 잠재되어 있는 욕구와 욕망을 앗수르 제국이 다 보여준 겁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앗수르 제국은 그 당시 미국입니다. 성경에 나와요. 31장에 나옵니다. 앗수르와 우리가 관계없다고? 관계없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가 미국이나 호주나 선진국을 흠모하고 그런데서 살기를 고대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면 마지막 남은 것은 이것이 몽둥이라는데 어째서 이것이 몽둥이가 되는가? 그 점은 이사야 7장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시간관계상 이사야 7장을 간단히 추려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하스라는 사람이 유다 왕입니다. 이 사람에게 어느 날 선지자가 찾아왔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찾아와서 “제가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그래서요?” “유다나라는 하나님이 세운 나라이기에 당신은 왕으로서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을 들어야 됩니다.” 아하스가 하는 말이 “나는 들을 필요 없습니다.” “왜 들을 필요 없지요?” “이미 잘사는 나라가 목적이 되었으니 당신이 하는 말은 안 듣습니다.”



요새 말로 쉽게 말해서 “나는 이 교회 올 때 하나님께 기도해서 이 정도까지 되겠다는 목적이 이미 확고하게 정해져 있기 때문에 내 목적에 부합되는 소리는 듣겠지만 내 목적에 부합되지 않으면 당신이 하나님이 선지자라도 그 말은 듣지 않겠습니다.” 하고 배척을 해버렸어요. 그래서 이사야가 이야기했지요. “당신이 지금 선진국이라고 한 그게 앗수르가 맞지요?” “맞지요. 내가 유다나라 왕이니까, 어떻게든 지금 한국을 미국처럼 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내가 유다나라 왕 아하스로서 어떻게 하든 앗수르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이 왕은 이미 목적을 ‘앗수르처럼 되기’라고 잡았기에 다른 소리는 나에게 안 들립니다.”



이런 이야기가 이사야 7장의 분위기거든요. 여러분 보기에는 이것이 실감이 안 나지만 복음을 아는 부교역자들이 기존 교회에 갔을 때 새벽기도 맡겨 놓으니까 그 부교역자가 새벽기도회에서 예수님 이야기하고 십자가 이야기하고 복음을 이야기해버렸어요. 실제로 그런 일이 많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 당회장이 당회실로 종용히 불러요. 그냥 조용히, 도 아니고 종용히, 불러요. 불러서는 “네가 하는 이야기가 성경에서 틀렸다는 이야기는 아닌데, 다 맞는 이야기인데 지금 우리 교회 방침하고 다르다.”라고 그 복음 아는 부교역자에게 압력을 가하는 거예요.



여러분, 교회 방침이 뭘까요? 교회방침은 더욱더 큰 예배당 짓고 교인 수 모으고 헌금 모으는 것이 교회 방침이에요. 그게 되는 것, 아까 에스겔 31장 다시 안 읽어도 되겠지요? 많은 사람이 우리교회 그늘아래 오는 것. 우리 교인들이야 그런 꿈을 일치감치 찢어버린 지 오래지만. ‘십자가마을? 에이, 안 돼.’ 그런데 기존교회의 목적은 이미 목적이 정해졌습니다. 앗수르입니다. 아하스에게 이사야가 한 소리는 거부당해요. 이사야 선지자가 뭐라고 하느냐, 이렇게 합니다. “왕이시여, 그 목적은 틀려먹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겁니다.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세요.” 아하스는 “나는 그런 소리 듣기 싫다니까? 나는 하나님께 어떤 뜻도 구하지 않겠다. 이미 확고하기에.” 확고한 게 뭐냐? 그 당시에 북쪽 이스라엘과 아람나라가 공격해 오니까 아하스 왕은 앗수르와 동맹을 맺고 앗수르의 힘만 있으면 이 유다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자부하고 있는 이 정치적 상황을 알고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보낸 거예요.



제가 복잡하게 했지만 간단하게 하면 그런 겁니다. 예배당 짓고 교회 부흥이 지금 확정이 된 상태에서 부교역자가 와서 새벽기도회 시간에 복음 이야기하고 십자가 이야기해버리면 그것은 초치는 거예요. 그럴 때 이사야가 합니다. “당신이 징조를 이야기 안 해도 내가 당신에게 징조를 이야기해야 되겠다.” 선지자는 속이지 않습니다. 이게 선지자의 특징입니다. “한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아들은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의 뜻은 하나님이 함께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앗수르를 쳐다보고 있는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아들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 있습니다. 아하스 왕이여, 아들을 낳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당신은 앗수르를 의지했습니다. 이제 당신이 의지하는 그 앗수르가 몽둥이가 되어서 당신을 내리칠 것인데 치게 되면 앗수르도 실패하고 당신도 실패하고 그 실패한 현장에서 하나님이 메시아, ‘처녀가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이 메시아가 되’는 그 계획이 차질 없이 성공하고 있다는 것을 그때서야 유다백성은 익이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실패하면 돼요. 세상에서는 잘 살아도 실패하고 못 살아도 실패해요. 하지만 미리 실패를 아는 사람은 그 실패의 자리에서 구원이 뭐고 영생이 뭐고 하나님의 뜻이 뭔가를 눈치 챌 수가 있습니다. 눈치를 채게 되면 짜증나거나 분이 나거나 울분이나 화내거나 절망하거나 낙담하거나 이런 일이 생겨나지 않고 반대로 범사에 모든 일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평소에 하루 생활에서 감사가 없었다면 여러분들은 지금 엉뚱한 것을 목적으로 삼았던 거예요. 우리 자신의 인생을 도리어 나를 때리는 몽둥이로 주께서 사용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믿읍시다.



내가 나를 치는 몽둥이로.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얻어맞는 가운데서, 내가 나한테 실망하고 얻어맞는 가운데서, 얻어맞을 때 별이 떠오르는 것처럼 불현 듯 십자가가 떠오를 겁니다. ‘아하, 주께서 죽으셨던 그 십자가, 그리고 부활하신 그 십자가, 그 십자가 안목에서 세상을 다시 보자.’ 그렇다면 사람이 아무리 못되고 아무리 실패해도 예수님만큼이나 실패하겠습니까? 예수님만큼이나 고생하겠어요? 어려워도 복인 줄 아시고 가난해도 사치인줄 아시고 호사인줄 알아야 됩니다. 그게 호사인줄 알아야 돼요.



그저 하루하루 감사하면서 와야 돼요. 그게 교회입니다. 교회가 앗수르 되는 것이 교회가 아니고 실패했음을 십자가 앞에서 자인하는 가운데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떨어져 나가면서 그동안 쓸데없이 객기 부리면서 울분과 울화를 터뜨리고 남을 저주하고 욕설을 퍼붓고 ‘너 때문에 못살겠다.’하고 원망하고 불평했던 그 모든 것, 그것은 성령의 열매가 아니고 육신의 열매, 육체의 열매거든요. 오늘 본문에서 앗수르를 이렇게 화려하게 등장시켜 놓고 하나의 꽃처럼 아주 완전히 멸망시켜버립니다.



그럴 때 우리의 허망한 환상도 같이 없어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하고 상관없게 여겼던 옛 제국, 사실은 우리가 꿈꾸고 있는 지금의 제국, 꿈의 제국인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십자가 잊어버리고 울화통 터뜨리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무슨 감사, 무슨 신앙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한 번 이렇게 살아있는 것 자체가, 주님의 십자가 아는 이 자체가 이미 성공한 것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