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애굽의 꺾인 팔(겔30ㅣ22-26)이근호140326

아빠와 함께 2014. 3. 27. 20:09

애굽의 꺾인 팔(에스겔 30: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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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3-26 21:10 
애굽의 꺾인 팔

2014년 3월 26일                       본문 말씀: 에스겔 30:22-26


(30:22)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애굽 왕 바로를 대적하여 그 두 팔 곧 성한 팔과 이미 꺾인 팔을 꺾어서 칼이 그 손에서 떨어지게 하고

(30:23) 애굽 사람을 열국 가운데로 흩으며 열방 가운데로 헤칠지라

(30:24) 내가 바벨론 왕의 팔을 견고하게 하고 내 칼을 그 손에 붙이려니와 내가 바로의 팔을 꺾으리니 그가 바벨론 왕의 앞에서 고통하기를 죽게 상한 자의 고통하듯 하리라

(30:25) 내가 바벨론 왕의 팔은 들어주고 바로의 팔은 떨어뜨릴 것이라 내가 내 칼을 바벨론 왕의 손에 붙이고 그로 들어 애굽 땅을 치게 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겠고

(30:26) 내가 애굽 사람을 열국 가운데로 흩으며 열방 가운데로 헤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오늘 본문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과 상대하는 나라 중에서 이스라엘은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보통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다른 민족들이 알 수 있는 경우는, 이스라엘 나라의 활동성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눈에 띄는 나라인 이스라엘을 앞장 세워서 자신을 알리십니다.

이러한 원칙은 전에 아브라함 당시에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창세기 12:3에 보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눈에 들어오는 아브라함에 대해서 주위 사람이나 민족들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그들에게 복이 되기도 하고 저주가 주어지기도 합니다.

그 이후에는 이 복과 저주의 근원이 이스라엘 나라가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국가 단위로 복과 저주를 가름하시는 이유는, 각 개인의 자기 선택에 의해서 구원이 성사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디에 소속되어있는가를 통해서 구원이 되기도 하고 저주받기도 결정되는 겁니다.

집단이 먼저이고 각 개인은 그 집단의 성격을 말하기 위해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개별적 의지나 결단에 의해서 자기 구원이 성사되지 못하게 하시는 이유는, 인간은 이미 각 개인의 결심과 상관없이 악마가 지배하는 단일 체제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등장하는 것도 바로 개인의 심기를 건드려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애굽 나라 대 이스라엘 나라로 세상 구조가 짜여지도록 조치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애굽에 내려진 10번째 재앙이 단지 바로왕의 맏이만 죽는 것이 아니라 구치소에 갇혀 있는 이름 모를 죄수의 가정집 맏이도 같이 죽게 됩니다. 단지 애굽이라는 이유 때문에 죽는 겁니다.

복의 근원인 아브라함도 ‘만국의 아비’로 살도록 이름이 바뀌어지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개인이 멀쩡하게 그 고유한 가치가 지켜지면서 집단에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의 고유성과 가치가 죽음으로서 이스라엘에 함유된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본인들도 미처 몰랐던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악마에게 예속됨은 다른 민족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따라서 언약의 나라요 집단인 천국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다른 민족들이 자기 나라에 대한 예속성을 갖고 있는 그것도 동일한 생각이 하나님에 의해서 소실되고 난 연후의 일인 것입니다. 다른 민족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이 생각하는 국가와 나라란, 항상 사적인 가정이나 가문이나 신상을 넉넉하게 지켜주기를 기대하면서 그 나라에 기대와 꿈과 욕망을 공유하게 됩니다. 나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그런 나라이기를 각자 원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인간 본래의 성질을 이스라엘이라도 역시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해서 망하는 겁니다. 자신의 고유 가치가 사라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겁니다. 하나님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 이스라엘 자체를 위한 나라로 이해하고 그리고 사수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애굽 나라가 그토록 부러웠던 것입니다. 막강한 군사력과 국력을 흠모할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우상섬김의 양상이었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배신이요 버림으로 보이는 겁니다.

나 잘되기 위해 신을 섬기는 것은 이스라엘이나 다른 민족들이 모두 공통적인 성품입니다. 바로 이 성품으로 인해 사람들은 힘이 센 나라를 부러워했고 또한 그런 제국에 의해서 여지없이 모든 것을 잃기도 합니다.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인간에게 있어 인간 자체가 구원받는데 한계입니다.

자기가 자기 구원을 훼방하고 방해하는 요소입니다. 어쨌든 나 자신을 살리고 보자는 심보는 보다 더 기댈만한 힘을 찾게 마련인데 그동안 애굽 나라가 이스라엘에게 있어 그 이상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가 오늘 본문에 의하면 여지없이 소멸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여호와에 대해서 사람들은 여지없이 오해하기 마련인데 그 이유는 이미 그들의 마음은 악마가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8:35-36에 보면,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마치 예수님마저 자기가 통치하는 그 나라에 소속된 것처럼 말합니다. 이는 모든 백성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의 여망과 희망은 빌라도가 차지하고 있는 그 자리로 응집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다”고 말입니다.

그동안 유대나라나 이스라엘이 오해했던 바가 이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신들을 지켜주는 그런 나라가 하나님 나라요 천국이라고 이스라엘이 오해한 겁니다. 이러한 오해는 열왕기상 20장에도 나옵니다. 열왕기상 20:13에 보면, “한 선지자가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나아가서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저희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너는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합왕은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편이 되셔서 아람나라 대군을 물리쳐주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자신을 제대로 알려주심이 되리라고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제대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낸 계기는, 스스로 상처나서 멍들고 망가진 얼굴에 아합왕에 나타난 그 선지자를 통해서입니다.

아합왕은 아람나라의 왕 벤하닷을 체포하고서는 객기를 부립니다. 충분히 굴복했다고 여기서 좋은게 좋다는 식으로 평화조약을 맺고서는 그를 풀어줍니다. 이 때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동료 선지자에게 난데없이 죄없이 얻은 맞고서는 아합왕 앞에 등장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당신이 나를 때려서 내 얼굴이 이렇게 엉망이 되겠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이라는 적을 살려두는 오해로 인하여 참된 선지자는 이토록 얻어맞고 벌받는 몰골로 당신 앞에서 등장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참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겁니다. 천국의 백성이란 상처받은 메시아를 쳐다보며 사는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힘 빼고 살게 하옵소서. 내가 나를 살리지 말게 하시는 이미 사는 예수님 안에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에스겔 30:22-26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애굽왕 바로를 대적하여 그 두 팔 곧 성한 팔과 이미 꺾인 팔을 꺾어서 칼이 그 손에서 떨어지게 하고 애굽 사람을 열국 가운데로 흩으며 열방 가운데로 헤칠찌라 내가 바벨론 왕의 팔을 견고하게 하고 내 칼을 그 손에 붙이려니와 내가 바로의 팔을 꺾으리니 그가 바벨론 왕의 앞에서 고통하기를 죽게 상한 자의 고통하듯 하리라 내가 바벨론왕의 팔은 들어주고 바로의 팔은 떨어뜨릴 것이라 내가 내 칼을 바벨론 왕의 손에 붙이고 그로 들어 애굽 땅을 치게 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겠고 내가 애굽 사람을 열국 가운데로 흩으며 열방 가운데로 헤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오늘 읽은 본문에서 놀랍게도 이스라엘은 쏙 빠집니다. 이스라엘은 빠지고 여기에 등장하는 것이 바로 바벨론 제국이고 애굽 왕 바로, 애굽나라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두 번씩이나 말씀하시기를 “나를 여호와인줄 알겠고.” 26절 마지막에도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래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은 이스라엘과 관련 맺을 때 비로소 여호와가 누구신가가 드러나는 걸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눈에 안 보이고 여호와 하나님이 집중 도와주시고, 집중 관리하시고 지켜주시는 나라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의 하시는 모든 일을 대변해서 보여주게 되면 그 주변 나라는 여호와를 아는 방법은 여호와께서 함께 동행한다는 그 이스라엘을 통해서 여호와를 아는 방식이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이라고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해서 아브라함을 앞장세워서 축복과 저주가 하나님 안목에서 어떻게 결정되는가를 벌써 보여줬잖아요. 만약에 아브라함이 눈에 띄지 않는다면, 아브라함이 없다면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복을 받을지 저주를 받을지 판정 내릴 데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앞장세움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게 되면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인정하게 되면, 그것을 언약이라 합니다, 그 특별한 하나님의 언약을 알게 되면 복을 받고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관계가 시시하다고 여긴다든지, 특별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할 리가 없어, 라고 부정해버리면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언약을 부정한 게 되거든요.



노아라는 영화도 나왔지만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게 함으로서 방주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살고 방주 밖에 있는 사람들은 홍수로 다 죽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그 내용 때문에 노아라는 영화가 상영이 금지당한 것 같아요. 노아언약의 방주이야기가 그들에게는 상당히 거북하게 느껴진 모양입니다. 우리가 아는 상식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는 반드시 특별한 자기 백성, 특별한 자기 나라를 앞장세워서 여호와인줄 알리라, 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 이스라엘이 빠져버려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어디에 속했느냐 하면, 전에는 이스라엘이 애굽을 의지했었습니다. 줄곧, 그 당시에는 애굽이 제일 강대국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바벨론이라는 나라에 삼킴을 당한 입장에 있습니다. 어쨌든 이스라엘은 이 지상에서 사라지고 말았어요. 바벨론 제국에 포로 잡혀서. 그렇게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에 대해서 제가 여러 번 언급을 했습니다만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정리해 드리면 이러합니다.



이스라엘이 있었어요. 있었는데 바벨론 나라에 복속이 되면서 사라졌는데 결국은 하나님께서 다룰 때 하나의 개인을 다루는 것이 아니고 그 집단 자체를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알리시기 위해서 다루시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목적이 뭐냐부터 우리가 분명히 해야 되는데 하나님이 일하시는 목적은 아브라함만 구원하려고 아브라함을 택한 것은 아니에요.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으로, 만국의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바꿔지거든요. “아브라함, 너만 구원할게.”라는 목적으로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너로 인하여 많은 후손들을 만들겠다는 거예요.



만국의 아버지니까. 만국 자체가 하나의 최종적인 집단, 국가를 의미하거든요. 개인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결국은 거대한 하나의 집단을 만들어놓고 그 집단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때 비로소 그 하는 작업이 여호와다운 작업이 된다,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올 때도 하나님께서 바로 왕만을 상대한 것이 아니에요. 애굽나라 전체와 상대를 한 겁니다. 유월절,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을 내릴 때에 바로 왕 맡 아들만 죽은 게 아니거든요. 심지어 애굽사람의 이름 때문에, 애굽 사람으로서 교도소에 갇혀 있는 그 사람의 맏아들 까지 죽었습니다. 그 사람은 교도소에 갇혀 있고 자기 식구는 집에 있다면 어느 집에 있는 맏아들이 죽었어요.



개인의 윤리나 도덕, 개인 누가 착한가, 강한가, 그런 게 문제가 아니고 언약의 나라에 소속되어 있느냐, 언약의 나라 아닌 나라에 소속되어 있느냐를 구분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언약의 나라에 속하면 되겠지, 라고 하는데 우리가 언약의 나라에 속하는 이것이 개인의 결단과 결심으로 되는 게 것이 아니에요. 왜 그런가, 개인이 ‘나는 이제 부처 안 믿고 예수 믿을래.’ 할 수 없는 이유가 우리한테는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없어요. 심지어 ‘나는 절에 안가고 교회 가겠다.’고 결심해도 그것은 구원하고 아무 상관없는 호기심에 불과한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개인의 자질과 능력을 높이 사서 “너 그 정도 같으면 천국에 올만 해.”라고 하지 못하는 이유가 성경 전체를 보게 되면 인간이 이미 마귀라는 대장 속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 이제부터 마귀 섬길 거야.’ 라고 해서 마귀를 섬기는 것이 아니고 ‘나는 아무것도 안 섬겨’라고 할 때 이미 마귀한테 소속된 겁니다. 교회가 예수님만을 증거 해야 될 이유가 이미 교회 교인들이 마귀한테 점령당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이름으로 우리가 구원 못 받아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구원 받거든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예수 이름 이전에는 우리가 이미 다른 이름에 복속, 소속되어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여호와를 알리라.” 고 할 때 우리는 개인적으로 여호와만 알면 구원되는 줄 알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은 이런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 하는 것을 알 때 비로소 여호와를 아는 거예요. 상당히 좀 어렵더라도 여러분 잠시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평소에 우리가 너무 개인플레이에 익숙하다 보니까 성경에서의 하나님의 안목에 대해서 상당히 수긍하고 납득하기가 곤란해요. 마귀는 모든 것을 점령해요. 교회, 절간, 성당, 어느 곳도 다 마귀가 점령해 있습니다. 어떤 교회로 구원되는 법은 없어요. 어떤 교단으로 구원되는 법도 없고 어떤 종교, 기독교냐 이슬람교냐 불교냐, 이런 것 가지고 구원되는 법은 없어요. 오직 예수님 이름으로 구원 받는 이유가 예수님 이름을 알기 이전에는 우리는 기껏해야 어떤 나라, 어떤 종교에 속하는 걸로 안심을 하고 구원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는 거예요.



‘나는 이번에 절을 택하지 않고 교회를 택했어.’ 혹은 ‘나는 한국에 살기 싫어서 미국으로 이민 가기로 했어.’ 우리는 내가 소속되어 있는 어떤 단체나 집단을 내가 선택해서 할 수 있다고 자꾸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세상을 보게 되면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선택하기 전에 이미 우리는 누구한테 선택 당했어요. “나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날래.”라고 산부인과에서 갓난애가 말하지 않았어요. 혹은 “너 어느 나라에서 태어날래?”하고 애한테 묻지를 않았어요. 그냥 태어나니까 대한민국 사람이 된 겁니다.



미얀마, 옛날에 버마라고 불린 나라가 있어요. 미얀마라는 나라에서 그동안 뭘 했느냐 하면, 자기 나라에 있는 이슬람교도를 아주 잔혹하게 핍박을 했어요. 학살을 하듯이 이슬람교도를 핍박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바벨론을 통해서 애굽을 치는데 그렇게 하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오늘 본문은 이야기하잖아요. 이건 뭐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미얀마를 통해서……, 미얀마는 95퍼센트, 98퍼센트가 불교신자입니다. 불교나라에서 이슬람 교인들이 엄청나게 고생을 많이 해요.



태국도 불교지만 이슬람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각처에 퍼져 있습니다. 인도에서도 이슬람은 엄청나게 수난 받고 배척을 많이 받아요. 누가 그렇게 하시는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서 애굽나라를 치겠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이전에 13절에 보면 ‘놉’이라 해서 애굽의 땅이 나오거든요. 14절에 바드로스, 소안, 그 다음에 신, 17절에는 아웬, 비베셋, 드합느헤스, 전부 다 이것은 애굽나라의 지명입니다. 놉은 나일 강 서쪽이고 바드로스는 나일강 상류, 소안은 나일강 하류고 신이라 하는 것은 동부지역이고 아웬이라는 것은 하류지역이고 드합느헤스는 바로의 궁전이 있는 장소입니다.



이것은 바벨론을 통해서 여호와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이런 지명들이 나온다는 것은 요새 말로 하면 마치 뭐와 같으냐하면, 폭격을 하되 모든 주요도시를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B29가 와서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이지요. 애굽 온 천지를 완전히 초토화시켜 버린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해놓고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런 불만스런 생각이 들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관계없는 다른 나라를 신경 쓰시고 간섭을 하십니까, 라고 할 때 이렇게 간단하게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가 결국은 그들이 잘못 오인한 것인데, ‘우리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이 백성들로 하나님께서 나라를 만들게 되면 그 나라는 곧 하나님 나라다.’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그 자체가 오해였다는 겁니다. 납득이 안 되지요? 이런 겁니다. 항상 인간은 출발점을 개인, 자기로부터 출발하거든요. 자기로 출발해서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듬직하고 힘 있는 국가나 단체에 들어가서 안정적으로 인생을 살려고 생각해요. 혼자 살면 안 되니까 더불어 살면 그만큼 여유롭고 풍요롭고 행복하고 자긍심도 느끼고 안전하기도 하고, 그렇다는 말이지요. 조선 말기에 군대가 없으니까 일본이 와서 점령하고 명성황후는 황후신분인데도 일본의 사무라이들 칼에 죽지요. “나는 조선의 국모다.” 해도 소용도 없었잖아요.



인간의 본성은 뭐냐 하면,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는 국가가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하늘나라가 아니에요. 이스라엘이 오해한 겁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했더니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벨론에 잡히게 했거든요. 전에는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는 식으로 애굽을 의지한 거예요. 시편도 그렇고 이사야도 보면 맨 날 애굽을 의지했다 하잖아요. 그런데 그 애굽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완전히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온 천지가 다 폭격 맞은 듯이 황폐해서 결국은 오늘 읽었던 것처럼 바로의 팔을 꺾어놓았으니 이젠 장애자가 되어버렸지요?



그래서 26절에 보면 애굽사람들이 온 천지에 흩어져서 도대체 나라 자체가 소실되고 소멸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이스라엘을 사수하기 위해서 애굽을 의지했더니만 자기들이 의지했던 애굽의 말로가 완전히 황폐해지고 폭격 맞고 다 흩어져버렸다는 말이지요. 소멸된 거예요. 그렇게 되고 이스라엘은 어디로 갔느냐? 바벨론에 간 겁니다. 바벨론에 포로 잡혀갔으니까 지금 이스라엘은 기껏 남은 자가 어디 갔느냐, 바벨론에 있는 거예요. 자, 그러면 자기가 전에 의지했던 나라가 자기를 점령한 바벨론에 의해서 완전히 황폐해지고 사라졌을 때에 이스라엘은 완전히 애굽나라를 의지했던 어떤 특정…….



애굽나라를 의지한 이유가 그 나라가 힘이 세고 강하고 말이 많고 병거가 많고 무기가 발달한 그것을 그리워하고 그것이 너무 좋아보여서 의지했거든요. 그렇다면 자기가 의지했던 그 나라가 완전히 소멸되어 버리면 자기 속에서 뭘 빼내야 되느냐 하면, ‘그래, 저렇게 힘 있고 저렇게 무기가 많아야 나라답고 우리를 지킬 수 있어.’라는 그 세속적인 사고방식을 이제는 접어야 되고 포기를 해야 되는 거예요. 왜, 자기가 전에 부러워했던 그 나라가 엉망진창이 되었거든요. 형편없이 된 겁니다.



애굽나라가 자기 이상형이 되고 말았어요. 자기이상형을 이스라엘은 자꾸 동일시 한 겁니다. ‘나도 저 나라처럼 되었으면…….’ 이스라엘이 기대했던, 이상형 나라라고 여겼던 그 애굽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나라에 의해서 여지없이 허물어졌을 때 결국 이스라엘은,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상형 나라가 우리를 체포한 나라로부터 허물어지게 했는가, 정작 우리가 허물어져야 되고 잡혀서 소실되어야 할 그 사고방식은 ‘나를 위해서 건실한 나라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는 나 위주의 구원관, 나 위주의 축복관이 소멸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왜, 내가 기대했던 그 나라가 나를 포로 잡힌 나라에게 망했기 때문에. 자, 그렇게 되면 “아이고, 이제 기대할 것은 바벨론 나라밖에 없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자체도 아직 덜 소멸한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애굽을 치리니 너희가 바벨론을 알 것이라, 가 아니라 “너희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이렇게 되거든요. 하나님이 우리 이스라엘 편인 줄 알았더니 하나님이 어느 쪽 편이냐 하면, 나를 학대하고 나를 불질러버리고 나의 처나 자식을 다 죽여 버리고 포로잡혀 가게하고 모든 재산을 빼앗아가는 그쪽 편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 거예요.



그렇다면 그동안 나를 스스로 지키기 위한 용도로 믿었던 이 모든 것 자체, 이제는 그 생각을 그만둘 때가 된 겁니다. 여호와에 대해서 오해를 해도 너무 큰 오해, 너무 엄청나게 잘못 생각해서 오해한 겁니다. 설교나 강의하면서 항상 전제로 까는 게 뭐냐 하면, 언약 안에 있으면 영생이 있고 언약 밖에 있으면 구원 되지 못합니다, 이 말부터 항상 전제로 하고 이야기 하거든요. 그런데 제가 어딜 가서 그 말을 해도 그 말이 왜 중요한지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언약 안에 포착이 되어야 합니다.”라는 말을 사람들이 어떻게 오해하느냐 하면, ‘아, 내가 사는 방법은 언약 안에 들어가면 사는구나.’라고 이렇게 오해들을 해요. 그게 아니고 언약 안에 포착이 되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내가 언약을 가지는 것이 아니고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거기에 집어넣은 것으로 생각을 해야 돼요. 그 언약 안에는 나의 구원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언약은 나의 구원이 없고 하나님이 새로 만드는 집단을 위하여 내가 거기에 일할 뿐이에요.



이것은 나를 지켜주는 집단이 아니고 여호와인줄 알리라, 여호와를 알리기 위한 집단 속에 내가 한 사람으로 포함이 되어버린 겁니다. 언약 안에 있으면서 또 나를 생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언약이라 하는 것은 나를 소멸시키고 없애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언약 이야기를 하니까, 이것저것 해봐도 안 되니까 언약 가지고 구원받아볼까, 이렇게 나오니까 그 자체가 아직도 여전히 자기 안에서 이게 살아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안에는 ‘내가 이렇게 잘났어.’ 자기 잘난 존재를 아는 게 되지 여호와를 아는 게 아닙니다.



여호와를 안다는 것은 반드시 언약을 알아야 되고 나의 기대나 소원 같은 것은 완전히 삭제되는 상태에요. 날라 가버린 상태,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설교한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뭐가 되느냐 하면, 인간의 한계는 뭐냐 하면 인간 그 자체가 한계가 된다는 말입니다. 나의 한계는 뭐냐, 내가 여기 있다는 그것이 한계라서 내가 여기 있는 한 나는 나의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인을 보지 않고 애굽나라, 바벨론, 이렇게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동안 이스라엘이 망했던 이유가 자기를 위한 어떤 집단 체제, 국가, 그런 것을 하나님 나라라고 동일시 한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나라라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가 안전하게 살도록 하는 나라, 힘의 체제, 힘의 뭉치, 그런 쪽의 나라라면 애굽도 망하고 바벨론도 망하고, 다 망해요. 하나님의 천국은 나를 살리기 위한 천국이 아니에요. 그것은 여호와가 누군가를 알리기 위한 나라고 그 나라는 지상에서 인간들이 본성적으로, ‘거대한 나라에 소속되어 있으면 내가 얼마나 안정적으로 살까?’라는 그 전체나라를 향하여 공격해대는 나라, 그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요한복음 18장 36절에 보면 “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했습니다.



지금 빌라도가 예수님 앞에서 오해를 한 것이 뭐냐 하면, “예수야, 너는 뭐라고 주장해도 이 나라는 내 나라, 이 빌라도의 나라야. 이 빌라도의 나라에 네가 일부로서 소속돼 있어.”라는 투로 지금 예수님을 심문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원하면 너를 살려줄 수 있다.”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여기 있는 제사장이나 유대인들이 잘난 체해도 다 이 빌라도 내 밑에 있는 것이다. 예수 당신도 마찬가지고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고 다 내 밑에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나한테 말만 잘하면 내가 풀어줄게.” 그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그 말이 왜 중요하냐 하면, 이것이 빌라도가 하는 말도 되지만 사실 빌라도를 바라보는 다른 모든 사람이 “이 나라에서는 빌라도가 최고야. 아이고, 부러워라. 우리 집안도 저런 빌라도 같은 왕이 나타나면 좋겠다.” 모든 인간의 염원과 열망을 빌라도라 하는 개인에게 다 응축해 있는 겁니다.



“내가 아들 낳아서 저 빌라도 만들면 얼마나 좋겠느냐?” 이미 백성들이 그걸 추구했고 빌라도는 그걸 수용했고 그래서 빌라도는 큰소리를 쳤고. 누구 앞에서? 예수님 앞에서 큰소리 쳤다 그 말이거든요. 빌라도와 예수님의 만남에서 예수님이 결국 노렸던 것은 “빌라도 너 나와!” 이겁니다. 빌라도 개인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 눈에 띄는 모든 인간들이 결국 그들의 소원하고 소망하고 그들이 진짜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든 목적은 빌라도가 다 갖고 있는 거예요. 빌라도의 갖고 있는 그 위치,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그걸 얻기 위해서, 그게 부러워서 그동안 여호와 하나님께 빌어 왔던 겁니다.



그래서 빌라도의 모습은 예수님에 의해서 제거당해야 될 인간들의 모든 열망이 응집된 그 최종자리에 빌라도가 있는 거예요. 예수님과 빌라도가 참 잘 만난 거예요. 빌라도가 로마제국을 흉내 내 가지고 그 당시 유대인들이 자체적인 나라를 만든 겁니다.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심문했고 최종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았고. 예수님은 말합니다. “내 나라는 네 나라가 아니다. 너의 나라의 특징은 인간이라고 생겨먹은 모든 인간들이 다 너의 나라를 부러워할 거야.” 이 말은 인간이라고 생겨먹은 존재는 어떤 자도 이 나라, 이 예수의 나라를 아무도 믿지도 않고 부러워하지도 않는다는 거예요.



바로 인간이 자기를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내가 나의 구원을 방해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무슨 이야기를 해도 내가 여기 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 내가 나의 구원을 훼방하고 있는 겁니다. 구원받지 못합니다. 열왕기상 20장에 보면, 거기 20장 13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한 선지자가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나아가서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저희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너는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나이다.”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라고 하면서 열왕기상 20장 이야기가 전개되는 겁니다.



그 이야기는 간단하게 이렇습니다. 아람나라 벤하닷이라는 왕이 북쪽 이스라엘을 아주 우습게 보고 시비를 겁니다. “네 처와 자식들을 다 내 놔라. 내가 쳐들어와서 네 신하들의 처자식과 보물을 다 가져가겠다.” 그러니까 아합 왕이 빌면서 “조건이 너무 과합니다. 그건 못하겠습니다.” 하니까 “너희는 다 죽었다.”하고 점령하러 왔을 때에 아람나라는 너무나 많은 군대가 있고 이스라엘은 너무나 소수이고 그래서 전쟁에 이길 수가 없는 거예요. 그 때 선지자 하나 나타나서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반드시 승리케 해 줍니다.”라고 하면서 하는 말이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라고 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아합 왕은 오해했습니다.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도와주게 되면 비로소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을 알리라.”라고 해석을 한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적들은 많고 우리는 작은데 하나님의 선지자가 나타나서 “하나님이 이 전쟁에서 승리케 해 줍니다.”라고 하니까 아합왕이 오해하기를 “하나님이 개입해서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주는구나.”라고 생각한 거예요. 이것은 오해입니다. 제가 방금 이것을 오해라고 했지만 이것은 누가 들어도 “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주는구나.”라고 했을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나타나는가?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이상하게 아람나라가 숫자가 많은데도 져요. 처음에는 술 먹고 있다가 지고 두 번째는 술 안 먹고 평지에서 싸우다가 졌어요. 이스라엘의 7천명 밖에 안 되는 군사가 와서 싸우는데 하루에 십만 병력이 죽어버리고 어떤 데는 아람나라가 성으로 피했는데 성벽이 무너져서 2만 7천명이 죽는 이런 일이 벌어졌거든요.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 있으면 우리가 반드시 승리한다. 그러니까 승리하게 되면 우리는 여호와를 안다.’라는 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여호와섬기기의 한계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구원 못 받는 것은 내가 나의 한계를 못 벗어나서 그런 거예요. 그 한계가 뭐냐, 하나님이 계시면 나를 도와줄 것이라는 그 착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마지막 갖고 있는 한계점이에요. 그걸 벗어나야 됩니다. 그래서 벤하닷이 도망을 쳤습니다. 아합 왕이 가니까 벤하닷이 꾀를 내서 이스라엘왕은 참 성품도 착하니까 불쌍하게 보이면 살려줄 것이라고 해서 죽을상을 하고 굵은 베옷을 입고 “살려주세요.”라고 한 거예요. 아합 왕이 그때는 느긋해졌거든요. “그래, 우리에게 빼앗아간 도시들 다 돌려주겠나?” “다 돌려줍니다.” “그래, 그러면 너희 나라가 우리나라에 무역상사를 차린 것처럼 우리도 너희 나라 수도 다메섹에 우리의 무역상사를 차리게 하겠나?” “차리게 하겠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굳이 널 죽일 필요가 없고 우리가 더 싸울 필요도 없지. 살려주마.” 그렇게 된 거에요.



자기는 하나님이 도와줘서 승리했으니까 그런 여유를 부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 때 선지자 하나가 등장해요. 선지자 하나가 자기 동료보고 자기를 때리라고 합니다. 어떤 선지자가 다른 선지자 보고 “날 때려.” 하니까 때리란다고 때릴 수가 있습니까? “내가 너하고 친한데 널 못 때리겠다.” 하니까 하나님의 보내신 사자(LION)이 등장해서 그 사람을 죽여 버렸어요. 때리라고 했는데 애처로워서 못 때리겠다고 한 그 동료선지자를 사자가 죽여 버렸습니다. 이게 여호와입니다. 여호와에 대해서는 인간이 상상이 안가요.



왜, 인간은 자기한계를 못 벗어나기 때문에. 사자에 물려죽은 그 선지자는 나쁜 짓을 한 게 아니에요. 동무가 때리라고 한다고 해서 때릴 수가 없잖아요. 누가 나보고 때리라고 하면 때립니까? 못 때리지요. “왜 이래? 난 남 때리는 거 싫어.” 이러는데 사자가 달려들여서 죽였단 말이지요. 그게 여호와에요. 그래서 “어이, 네가 한 번 때려봐라.” 그래서 다른 친구가 팼습니다. 패서 퉁퉁 부었지요. 천으로 얼굴을 감았습니다. 누군지도 모르지요. 그렇게 감고 아합왕이 지나갈 때 “왕이시여, 한 가지 조언을 부탁합니다.” “뭔데?” “어떤 사람이 악한 죄인을 잡아서 나보고 잘 지켜달라고 했는데 내가 딴전을 피우다가 그 사람이 잡아준 죄수를 내가 놓쳐버렸습니다. 나는 어쩌면 좋습니까?” “그러면 얻어맞아야지. 네가 벌 받아야 되겠네. 내가 악한 자를 잘 지키라고 했는데 놓쳐버렸으니 맞아도 싸네.” 그렇게 된 거예요.



그때 천을 확 벗어버리고 “임금이여, 당신이 바로 그런 인간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구원받을 수가 없어요. 왜, 자기 한계를 스스로 벗어버릴 수가 없기 때문에, 마귀에 속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은 뭐냐, 여호와께서는 그런 인간에게 얻어맞는 거예요. 죽음을 당하는 겁니다. 그게 여호와에요. 이 땅에 온 여호와. 여호와를 왜 찾느냐 하면, 인간 속에서 찾는 거예요. 인간이 뭘 오해하고 있고 뭘 잘못생각하고 있고 뭘 착각하과 있는 지를, 착각하고 있는 그 인간 속에서 시련 받고 고난 받는 것을 찾습니다.



인간들은 대단한 제국을 원하고 힘 있는 국가, 강대국을 원합니다. 하지만 진짜 구원받아야 될 사람은 그 강대국을 원했기 때문에 우리가 당연히 마땅히 망해도 싸, 라는 것을 느끼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여호와를 제대로 발견하는 사람입니다. 망해야 될 세상에 힘 다 가져가라고 하세요. 우리는 힘 쑥 다 빼야 됩니다. 우리의 구원은 힘없이 구원받는 겁니다. 주님의 의로 구원받지 힘 모아서 구원 받는 게 아니에요. 교인 수나 헌금 많다고 교회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것도, 이 모든 것도 사실은 나의 한계 안에서 일어나는 나의 욕망이고 욕심이고 탐욕인 것을 인정해 줘야 돼요.



그저 내 자식 잘되고 내 가족 잘되고 내 교회 잘되고 내 기독교 잘되고, 이 모든 것은 인간이 넘을 수 없는 빌라도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거예요. 그로 인하여 주님은 계속 얻어맞고 있는 거예요. 상처가 나서 천으로 둘둘 감고 있는 겁니다. 힘이라는 것, 그 힘의 끝은 제국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이 제국 속에서 얼마나 편안한 여생을 그리워하고 있습니까? 혼자 힘으로 안 되니까 여럿의 힘이 더 낫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홀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성령 받은 사람들도……, 나라에서 가이사가 성령 준 게 아니에요. 목사가 성령주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어디서 왔는가를 보세요. 십자가에서 온 거예요. 그러니까 성령 받은 사람은 그 십자가라는 그 바늘구멍보다 더 작은 구멍, 십자가라는 그 구멍, 그 자리, 주께서 빠져나간 그 자리, 바로 그 속에서 생명수가, 생명의 기운이 나온다는 것을 알 때 이 세상 어느 나라도, 미국도 러시아도 어떤 것도 부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로소 그들만 여호와를 아는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 빠진 상태에서 겉으로 부러워했던 애굽이 더 강대국인 바벨론한테 패배당할 때 정작 에스겔과 이스라엘은 깨달아야 했었습니다. 하늘나라는 바로 우리가 원하는 힘으로 된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주님의 희생으로 된다는 그것을 저희들도 새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