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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의 교만(겔32;11-16)140430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5. 4. 17:51

애굽의 교만(에스겔 32: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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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4-30 21:35 
애굽의 교만

2014년 4월 30일                          본문 말씀: 에스겔 32:11-16

(32:11) 나 주 여호와가 말함이여 바벨론 왕의 칼이 네게 임하리로다

(32:12) 내가 네 무리로 용사 곧 열국의 무서운 자들의 칼에 엎드러지게 할 것임이여 그들이 애굽의 교만을 폐하며 그 모든 무리를 멸하리로다

(32:13) 내가 또 그 모든 짐승을 큰 물 가에서 멸하리니 사람의 발이나 짐승의 굽이 다시는 그 물을 흐리지 못할 것임이여

(32:14) 그 때에 내가 그 물을 맑게 하여 그 강으로 기름 같이 흐르게 하리로다 나 주 여호와의 말이로다

(32:15) 내가 애굽 땅으로 황무하여 사막이 되게 하여 거기 풍성한 것이 없게 할 것임이여 그 가운데 모든 거민을 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로다

(32:16) 이는 슬피 부를 애가니 열국 여자들이 이것을 슬피 부름이여 애굽과 그 모든 무리를 위하여 이것을 슬피 부르리로다 나 주 여호와의 말이로다 하라

바벨론과 애굽 나라에 관해 언급이 되면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우리 자신과 관련해서는 의미를 찾고자 합니다. 성경에서 아무리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셔도 우리는 개인적 용도로 주어진 것이라고 오해해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벨론이나 애굽은 너, 나를 비롯해 모든 인간의 대표자입니다.

그들이 당한 것이 그대로 우리에게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즐거운 일이나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나 모두 본인의 체험이나 경험에 기초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만의 즐거움이나 느낌은 타인에게 그대로 전달된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마치 개인적이고 사적으로만 구원되고 지옥가기도 하는 것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들은 본인이 ‘나는 살아있다’고 느끼는 생존의식의 범위 안에서 유효하고 통용될 사실입니다. 즉 “나는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고, 이미 죽은 자만이 죽은 자다”는 생각이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로 최종 모아지게 되고 또한 거기서 의미가 파급됩니다. 따라서 나의 생존의지는 생명이고 사람이 숨이 넘어가버릴 때는 죽음이다는 여기는 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죽음과 생명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죽음과 생명의 범위의 폭를 넓혀야 해야 합니다.

흔히 목사들은 말합니다. 죽음이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다”고 말입니다. 과연 맞는 말일까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우리들은 생각합니다. “나만이라도 우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봐야지”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개인주의적 구원관을 부추기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피흘리신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이런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큰 오해의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오해가 요한복음 13:36-37에도 나옵니다.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베드로가 ‘내가’라고 하면서 묻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기대합니다. 베드로를 뒷받침한 세계는 바로 그런 세계입니다. 즉 개인이 우선이며 개인적으로 살기 위한 모든 노력은 하나님에 의해서 정당성을 부여받는다고 여기는 그런 세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것을 ‘교만’이라고 표현합니다. 사람들은 본인들이 살아있으니 그것으로 생명의 일부 접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성경은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숨이 끊어진 것이 죽음이 아니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했다고 해서 생명이 아니라 십자가에 대해서 감각이 없으면 바로 그것이 죽음이라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언급하고 그 흘리신 피를 언급하면 그것을 성급하게 자기 개인 용도, 곧 자기 구원으로 연결해서 하나님과의 끊어진 관계를 회복했노라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죽음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예수님의 의해서 일어난 일을 근거로 넓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개인에 국한된 죽음이 아니십니다.

많은 이의 죄를 품었기에 버림받아야 될 죽음이요 저주입니다. 이 말씀은 곧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너, 나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겁니다. 특별히 나보다 더 성격이 나쁘다고 해서 더 죄지은 것도 아니요 나보다 더 성격이 좋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도 아닙니다. 일괄 사망이요 일괄 저주입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아담은 개인의 자격으로 인류의 조상이 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아담 안에서 수많은 죽음으로 파생됩니다. 다수의 죽음으로 현실화되고 구체화됩니다. 고린도후서 5:14-15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은 자리에 오직 예수님에게 허락되고 다른 이에게는 개인으로 존재함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개인적이 운명이나 일은 예수님 개인에게만 적용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점에 있어 애굽이나 바벨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서 애굽을 징벌하십니다.

하지만 거기에 사용하신 그 징벌의 몽둥이는 똑같이 바벨론에게도 적용되고, 그 다음 제국인 바사 나라, 그 다음 정복자인 헬라나라, 그 다음 정복자인 로마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이는 바로 그 저주의 징벌이 십자가 상에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아들 되시는 예수님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이로서 인류는 죽음이라는 공통의 장에 함께 지내고 왔던 것입니다. 죽어야 될 이유는, 단지 예수님이 지닌 그 의의를 다른 인간들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이유 뿐입니다. 즉 “왜 너는 예수를 모르느냐?”입니다. 사람은 자기 신상에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자신이 무척 점잖은 사람인 줄 압니다.

하지만 자기 신상에 큰 낭패되는 일이 난다든지 갑자기 주목받는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이 왜 하필이면 저에게 …” 혹은 “신이여 저에게 이런 축복을 주시다니”라는 식으로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개인적으로 자신을 굴릴 수 없는 입장인 것을 알지 못한 행동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만이 지닌 고유한 가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나대고 설쳐도 상관없는 그런 세상을 하나님을 만들어 주었다고 여긴 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은 나일강 밑에 가라앉게 합니다. 그러면 물은 다시 맑아집니다. 우리 인간의 자신의 본 자리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그 자리가 개인용 자리가 아니라 집단으로 공통의 운명을 부여받은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서 비로소 부활의 생명도 집단적으로 떠오릅니다. 이 공로는 오직 예수님이란 개인의 업적입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자신을 돋보니는 쪽으로 살지 말게 하옵소서. 자신이 겪는 일을 남들도 다같이 겪음을 알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4-05-01 06:11 
89강-에스겔 32장 11절-16절(애굽의 교만)140430-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32장 11절-16절입니다. 구약성경 1200페이지입니다.



에스겔 32:11-16



“나 주 여호와가 말함이여 바벨론 왕의 칼이 네게 임하리로다 내가 네 무리로 용사 곧 열국의 무서운 자들의 칼에 엎드러지게 할 것임이여 그들이 애굽의 교만을 폐하며 그 모든 무리를 멸하리로다 내가 또 그 모든 짐승을 큰 물 가에서 멸하리니 사람의 발이나 짐승의 굽이 다시는 그 물을 흐리지 못할 것임이여 그 때에 내가 그 물을 맑게 하여 그 강으로 기름 같이 흐르게 하리로다 나 주 여호와의 말이로다 내가 애굽 땅으로 황무하여 사막이 되게 하여 거기 풍성한 것이 없게 할 것임이여 그 가운데 모든 거민을 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로다 이는 슬피 부를 애가니 열국 여자들이 이것을 슬피 부름이여 애굽과 그 모든 무리를 위하여 이것을 슬피 부르리로다 나 주 여호와의 말이로다 하라.”



성경을 보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성경을 봐도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한다 할지라도 어떤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우리는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 오늘 본문 말씀도 나에 대한 이야기가 없고 이것은 애굽나라가 이렇게 멸망한다, 그것도 바벨론을 통해서 애굽나라가 멸망한다, 그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바벨론도 남의 나라요 여기 본문에 나오는 애굽도 남의 나라인데 우리가 여기서 이 말 들을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이건 남의 나라거든요.



애굽나라는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한다, 그러면 우리는 ‘나하고 상관없네.’ 나하고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나하고 상관없는 이야기라면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이 결국 나를 비켜가고 나하고 상관없이 저 애굽나라, 바벨론과 상관있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성경을 보면서 ‘나하고 상관이 없네. 이것은 나 말고 애굽이라는 나라, 바벨론이라는 나라하고 상관이 있잖아.’라고 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없는 이유가 여기서 드러나는 겁니다.



뭐냐 하면, 애굽나라도 그 나름대로의 개인이고 바벨론도 개인이고 나는 여기 따로 있고, 이런 사고방식이 하나님께서 성경을 아무리 보게 하셔도 하나님의 뜻이 뭔지를 모르도록 방해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제가 미리 이야기합니다. 개인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개인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똑같은 다수요, 동질적인 인간덩어리 뿐이에요. 남보고 이야기했다고요? 남보고 이야기한 것 아닙니다. 애굽보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바벨론 보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보고 이야기한 겁니다. 나 보고 이야기한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우리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나라는 것은 개인을 의미하고 우리라는 것은 다수를 의미하는 겁니다. 현대국가에서 사람들은 다수를 몰라요. 개인밖에 모르기 때문에 성경말씀을 펼쳐도 하나님이 직접 나한테 무슨 말씀을 주시렵니까, 라고 나한테 주신 말씀을 찾고자 하니까 에스겔 본문 같은 것이 쏙쏙 빠져버리는 거예요. ‘이것은 나하고는 상관없고, 이것은 남의 이야기고, 나에게 해당되지 않고…….’ 이것 빼고 저것 빼고 차 빼고 포 빼고 다 빼니까 얻을 것이 없는 겁니다. 개인적 상황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한테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애가 수학여행 가다가 물에 빠졌다. 이것이 남의 이야기다. 남의 이야기 아닙니다. 바로 우리 이야기에요. 살았는데 물이 빠진 것이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모든 인간은 이미 죽은 상태에요.



네가 이미 죽은 것을 물에 빠트려서 확인할 뿐이에요. 그걸 보면서 울면서 또 확인할 뿐이고. 우리가 개개인을 가지고……, 어렵더라도 설교 초반에 이걸 언급을 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개개인을 생각하게 되면 죽음이라는 것이 하나로 통합이 안 되는 겁니다. 나는 숨 쉬고 있으니까 살았고, 라고 분류해버리고 장례식장에서 죽은 사람은 죽었다고 분류되거든요. 여러분, 죽음의 개념이 그렇게 숨 쉬는 것으로 결정되는 것이 성경의 내용이 아닙니다. 죽음의 폭을 넓혀야 돼요. 죽음의 개념을 넓혀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의 폭을 굉장히 넓혔거든요. 하나님의 복음에 반응 없는 것이 죽은 것이고 그걸 보통 하는 이야기로 하나님의 관계가 끊어진 그것을 두고 죽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죽었다는 것은 교회 좀 다닌 사람들은 목사님들한테 많이 들었을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두고 죽음이라고 본다면 그걸 여러분들이 진짜 수긍하고 동의하신다면 누가 죽은 것에 대해서 애타하지 마시고요, ‘나는 살았는데 그는 죽었다.’ 하지 마시고 그 사람이 죽을 때 하나님과 관계가 이어져서 죽었나, ‘그러면 죽은 것이 아니잖아. 그 사람은 지금 편히 쉬는 거잖아.’라고 타인의 죽음에 대한 해석이 불쑥 튀어나온다면 그것은 목사님이 말하는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 죽은 것입니다.”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설교 들을 때는 ‘그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 죽은 거야. 아담 이후에 죽었더라, 죽었더라, 한 것은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죄를 짓고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었더라, 죽었더라, 이미 죽은 존재에서 죽음이 나왔으니까 그건 당연한 확인 작업이다.’ 설교 들을 때는 아는데 막상 사돈의 팔촌이 죽었다고 하면 ‘아 안됐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다행이다, 그 뜻이거든요. ‘아직 젊은데 70도 안되어서 돌아가시면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데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 죽음이라면서요? 아까 설교시간에. 설교 끝나고 나면 다 잊어요.



지난 주일에 윤덕희 집사님 말씀하시는 것이, 하루 종일 강의 듣고 있는데 이상하게 강의 듣고 나면 다 잊어버린다는 거예요. 잊어버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강의를 다시 들으면 새롭게 생각난다면 그것은 정상입니다. 다 잊어버리게 되어 있어요. 하지만 다시 들으면 다시 생각나게 되어 있습니다. 잊어버리는 것 가지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연세 많으면 잊어버리기 마련이기 때문에.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성경말씀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그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설교시간에만 듣고 밖에 나가면 그걸 적용을 시키지를 않아요.



왜 적용을 시키지 않느냐 하면, 설교시간에 들을 때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 주음입니다.”라고 하니까 ‘나는? 나는? 나는 안 끊어졌잖아. 그럼 나는 살았지.’ 하고 개인적인 용도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니까 그게 밖에 나가서는 적용이 안 되는 겁니다. 자기 잘난 것, 나는 다행이다, 그것만 고수하기 때문에. 말씀을 들었으면 이 말씀이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모두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알고 실습에 나서봐야 돼요. 그런데 하나님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 죽음이라고 방금 이야기했거든요.



그것은 밍밍해요. 틀린 말은 아닌데 구체적인 내용들이 없는 빈껍데기 같아요. 그러면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렇게 하면 더 실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뭐냐 하면, 복음에 대해서 반응을 나타내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복음을 이야기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면 그게 바로 죽은 겁니다. 아까 하나님에게서 끊어진 것이 죽음이라 했을 경우에 제가 그 말에 온전하게 동의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어요. 약간 어렵더라도 참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끊어진 것이 죽음이라고 했을 경우에는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그 하나님과 이어버리면 되지, 라는 생각이 자연 생기기 마련이거든요.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다고 생각해서 그게 문제가 있다고 하는 이것은 세상 종교는 다들 그렇게 생각해요. 심지어 부처 믿는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슬람교도 그렇게 힌두교도 그렇고 다 그런 거예요. 그런 이야기를 해버리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직접 오신 이유가 드러나지를 않아요. 예수님은 쏙 빼서 제키고 ‘하나님은 저기 있는데 나는 여기 있구나. 그러면 내가 왜 죽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죽는구나.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면 다시 살 수 있겠네.’ 한다면 이것도 바로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이게 사적인 구원론이거든요. 이것은 복음이 아니에요. 복음은 뭐냐, 이거예요. 어떤 인간도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자기 능력으로 알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다수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사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려운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쉬운 말로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7절에 보면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죽으러 가실 때 베드로 하는 말이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하니까 “지금 네가 따라오지 못한다.” 했어요. 그럴 때 뭐라고 하느냐,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라고 한 거예요. 이것 숨 끊어지는 것과 아무 상관없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우리의 시야를 확장시켜 주는데 예수님은 이 세상 그 너머 세계까지 다 넓힌 상태에서 말씀을 던지는데 베드로는 뭐냐 하면, ‘네가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는가?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내가 이 지상에 실컷 고생해도 죽어서는 편하게 사는가?’ 이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에 묶여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를 못하는 겁니다. 하는 말이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내가, 내가, 내가,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라고 베드로가 이야기했는데 베드로가 이 말 참 잘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들이 교회 나와서 신앙생활 하는 그 모습들이 보편적인 것이 아니고 그냥 나만 살면 된다는 거예요. “주님이여,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또는 “목사님, 어떻게 하면 내가 은혜 받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 은혜라는 것은 나한테만 주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서 내가 붙으면 안됩니다.



은혜는 다수에게 주는 것인데 우리는 다수에게 준다는 생각을 못하고 내가 받아 챙겨야 이것이 은혜답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밤중에 눈 감고 있으면 그것이 정전입니까? 밤에 온 아파트가 전등이 다 켜놓고 밝은데 내가 눈 감아 버리면 그게 정전되는 겁니까? 이 눈까풀이 위력을 발휘해서 갑자기 주변 전기가 다 나가버립니까? 내가 별에서 온 그대에요? 내가 행동해버리면 다 변하는 겁니까? 별에서 온 그대 도민준이는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자기가 행동하면 다 꺼져요. 저는 드라마 거의 안보지만 한 번씩 보게 되면 그걸 느낀다니까요. 예수님이 행동을 하게 되면 주변이 다 완전히 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눈 감았다고 이 아파트가 정전되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 교회 예배하고 있는데 눈 한 번 감아 볼까요? 정전입니까, 지금? 인간은 바보 같아요. 얼마나 어리석은지. 자기만 가슴 아프면 다 가슴 아파야 되는 줄 알고 있어요. 그것은 일종의 횡포입니다. 세상이여 내 사정 알아줘, 이것은 말도 안 되는 횡포를 부리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베드로가 하는 말이 “지금 나는 왜 예수님을 못 따라갑니까?” “그것은 네 개인적인 문제가 있거든.” 개인적인 문제가 있으면 우리가 죽고 사는 것도 전체 죽음과 사는 개념이 개인문제에 국한되면 다 담을 수가 없고 이해도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언약으로 푼다는데 그 언약의 기본이 뭐냐 하면, 개인구원은 없다는 겁니다. 개인구원이 있다고 하는 것이 바로 구원파라는 거예요. 개인구원은 없습니다. 제가 만약 구원파의 목사라면 저는 이번사태에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감사하겠어요. “주님이여, 지금 세상 모두는 구원 파를 이단으로 몰아넣습니다. 우리가 이때를 얼마나 기다렸습니까? 주여, 정말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이제야 동참하는군요.” 이렇게 감사를 해야 될 일이지 여의도 KBS 앞에서 데모할 필요 없어요.



제가 아까 어떤 문자를 받았는데 그 분이 굉장히 다급하게 문자가 왔어요. 오늘 직장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미치겠다는 거예요. 이 힘듦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까, 하는 메시지가 왔어요. 도 그래서 제가 보냈지요. “지금 그 보다 더 힘든 것을 미리 예상하시기 바랍니다.” 하니까 대번 또 급한 답장이 오기를 “이것보다 더 힘든 상황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해결책이 없겠습니까?” 했어요. 그래서 또 답장을 했어요. “차라리 죽여 달라고 주님 앞에 부탁하세요.”라고 하니 1분도 안되어서 답장이 오기를 “할렐루야! 아멘. 감사합니다.” 이렇게 왔어요.



사람이 가장 행복할 때가 뭐냐, “나는 이제 그만 살아도 됩니다. 주여!” 이런 고백이 나올 때가 가장 행복해요. 내가 살려고 생각하니까 사적인 욕망이죠, 사적으로 나만 살려고 생각하니까 해답이 없어요. 아무런 정답도 없고 해답도 없고 성경도 듣고 싶지도 않고 집어던지고 싶어요. 애굽나라가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고 바벨론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말이지요. 나는 지금 내가 죽을 판국인데. 우리가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하는 그 순간이 하나님께서 원래 쏙 집어넣고 싶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놓아두고 싶은 본디 본래의 자리에 온 거예요.



오늘 본문 내용이 이렇습니다. 바벨론을 통해서 애굽을 치겠다는데 그 애굽이 나일강 악어가 되어서 설치기도 되게 설쳤던 모양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네가 설치니까 자꾸 물이 더러워지잖아. 따라서 악어 너를 내가 잡어서 죽여 버리면 그 나일 강이 다시 잠잠하고 물이 맑아질 것이다.” 그런 내용이거든요. 생각해 보세요. 물이 맑다는 것은 뭐냐 하면, 본래 있어야 할 자리에 가만있으면 위의 물이 맑아요. 우리 가정생활이나 사업이나 교회에서 왜 그렇게 분쟁이 많고 투쟁이 많고 불평이 많고 왜 그렇게 짜증이 많고 스트레스가 많습니까? 가만 강바닥에 엎드려 있으면 될 것을 나대서 그래요, 나대서. 나대도 너무 나대요.



경상도 사투리에 이런 게 있어요. “아 지랄” 하나님 보시기에 같잖지도 않은 거예요. 그냥 강바닥에 가만 앉아 있으면 되는데, ‘놀고 있네’ 하는 식으로, 너무 설치니까 나일강물이 흐려지니까 하나님께서 나일 강을 맑은 물로 만들겠다는 거예요. “가만 그냥 누워 있어. 네 자리로 돌아가.” 하는 거예요. 그 자리에 내려갈 때 그게 어떻게 내려가느냐 하면, 올라올 때 설치던 것은 개인적인 욕망으로 설치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다수가 똑같은 운명이고 똑같은 팔자인데, 너나 나나 똑같은 팔자인데, 안산에 있으나 대구에 있으나 다 똑같은 팔자인데 왜 하필이면, 하고 나댈 때, 갑자기 개인적인 문제가 이슈가 되고 그게 중요한 문제가 되고 부각이 되면서 ‘남들은 안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하고 나올 때, 그걸 가지고 오늘 본문 제목처럼 그걸 교만이라고 해요. 교만.



왜 네 자리를 떠나느냐, 그 말입니다. 그러면 한 번 봅시다. 사람이 가만있으면 누구나 점잖고 참 인간성 좋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뭔가 긁어요. 긁어버리면 갑자기 발작을 하면서 왜 나를 건드리느냐하고 ‘나’가 탁 튀어나옵니다. 그것을 가지고 확장된 죽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아, 어렵지요? 다시 해 봅시다.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이란 뭐냐 하면, 나는 숨을 쉬고 있는데 저 사람은 죽었으니 저쪽은 죽는 쪽이고 나는 아직도 안 죽은 사는 쪽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보지 않고 내가 살아 있으면 그게 죽은 것이라는 거예요. 오직 나만을 위해서, 오직 나만 생각하는 이게 죽은 것이라는 거예요.



아까 목사님들이 주장하는 것을 이야기했지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죽은 것이라. 얼른 보면 맞는 말 같은데 결국 그것은 백날 설교시간에 들어봐야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 그러니까 산 사람이 맞다.’ 자꾸 이렇게 주장하는 그 자체가 개인주의다 그 말입니다. 목사님들이 그런 소리 하는 것이 틀린 소리에요. 죽음의 범위를 확장시켜 줘야 하는데 확장을 시키지 않고 아는 지식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수많은 신학과 책과 성경에 대한 아이디어와 정보와 그리고 교회 돌아가는 것, 많은 신학지식이 누적이 되어도 사람이 어느 한 순간에 와르르, 나락으로 떨어져요.



이런 게 있잖아요. 기독교 서점에 가면 이런 수첩 팔아요. 병들었을 경우에 이 구절을 보시고 애가 군에 가면 이 구절 보시고 결혼할 때는 이 구절 가지고 심방가면 되고 입시를 앞두고는 이 구절 하면 좋은 구절이고, 그런 것 지어내라면 나도 지어냅니다. 그걸 달달 외운다고 칩시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진짜 급한 순간이 되어버리면 그동안 외우고 안 노하우 같은 것들이 아무짝에도 소용없고 “난 하나님 안 믿을래.”라는 고백이 툭 튀어나올 때 있을 겁니다. 그걸 포착하는 거예요. “바로 처음부터 너는 하나님 믿을 때 너만 챙기기 위해서 너 밖에 모르고 네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네 영역에 끌어당긴 것이다.” 그게 바로 죽음이에요.



자기 밖에 모르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말이 있지요. 이 세상에서 나만 최고다 하는 것, 그게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관계가 끊어진, 언약 적으로 복음 이야기해도 못 알아듣는 끊어진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시험을 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십자가 피만으로 구원받습니다.” 우리는 그 말을 알아듣는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알아듣는 이유가 성령이 와서 알아듣는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제가 하는 말은 십자가 피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그 뒤쪽에 말이 있어요. 아직까지 그 뒤에 남아 있는 말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 있는 말씀인데요. 이게 제 말이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날 위해 죽었기에 이제 남은 인생 주를 위해 산다, 이것이 뒤에 붙어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딱 떼버리고 뭐냐 하면, 주님 피로 구원받았으니 나는 살았다, 끝! 이래 되는 거예요. 그 뒤에 보면 드디어 산자들로 하여금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아니하고, 라는 것이 분명히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나오는데 뒤에 나오는 이야기는 어, 어, 하고 안들은 것으로 치는 겁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무슨 말을 못해! 인간시대 보면 이런 게 나오지요. 어떤 촌사람이 가훈을 지어놓았는데 “황소처럼 일하자.” 예요. 황소처럼 일하자. 야, 90넘은 할머니도 황소처럼 일하고 67된 며느리도 황소처럼 일하고 40된 며느리도 황소처럼 일하는 그게 나오는데 진짜 황소처럼 일해요. 문제는 그렇게 황소처럼 일하는 그것이 이게 가훈이라는 거예요. 본인 집에만 해당된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그게 죽은 상태에요. 복잡하게 할 것이 없이 간단하게 합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나한테만 적용된다면 여러분,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진리도 아니고 구원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개인용으로 주시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준 적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처소를 준비한 것은 단체로 준 거예요. 개인용으로 준 것이 아니고 단체로 준 거예요. 그러면 개인이 단체에 들어갈 때는 개인을 죽여줘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해야 돼요. ‘이것은 나 좋으라고 준 것이 아니고 단체 좋으라고 준 것이다. 따라서 나 좋으라고 준 것은 일체 없다.’를 우리는 알고 들어가야 됩니다. 이것이 에스겔 3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에스겔 37장에 보면 유명한 구절이죠, 에스겔로 하여금 해골 골짜기로 가게 한 뒤에 주님이 이야기합니다.



“이 뼈들이 살겠느냐.” 할 때 “주께서 알아서 하실 겁니다.” 한 뒤에 살아서 나오는데 37장 10절에 보면 “극히 큰 군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 개인에게 주어진 죽음이라는 것은요, 내가 홀로 죄짓고 나 혼자 악해서 죽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나만 죄짓고 나만 죽는 것이 아니에요.



들어보니 좀 기쁜 소식 같지 않습니까? ‘저 사람은 착한데 나는 성질이 더러워서 하나님이 나는 죽이고 성질 착한 저 사람은 살린다.’ 이런 것 없습니다. 우리는 에브리바디 다 더럽습니다. 성질 좋은 사람 없습니다. 건드려보세요. 건드려 보면 자기 개인이 나오거든요. 그러면 그건 성질 더러운 거예요. 자기 개인, 자기밖에 모른다는 뜻이에요. 천상천하유아독존, 하나님이고 예수고간에 자기밖에 모른다는 겁니다. 자기밖에 모르면 그것은 베드로 꼴 나는 거예요. “주여, 제가 어찌 그곳에 갈 수 없습니까?” 그게 네 자리 아니거든요. 그것은 집단을 위한 자리지 너의 자리는 애초부터 없었는데 베드로는 타고난 못된 성질을 그대로 드러낸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바벨론이 애굽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킵니다. 그러면 그 바벨론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참 희한한 분이에요. 바벨론나라를 가지고 애굽을 쳤으면 바벨론을 우대해야 될텐데 “너도 똑같아.” 하고 바벨론이라는 애굽을 쳤던 그 몽둥이를 다시 다른 나라 바사라는 몽둥이를 통해서 쳐버립니다. 다시 헬라가 와서 그 바사를 쳐버리고 그 헬라는 로마가 쳐버리고 로마는 누가 치느냐, 주님이 와서 쳐버립니다. 이 몽둥이는 개인용이 아니고 모두에게 적용되는 몽둥이에요. 그런데 더욱더 놀라운 사실은 그 몽둥이를 가지고 아버지가 아들 예수님을 쳤다는 사실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얻어맞고 버림받은 그 죄는 예수님 죄가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죄에요.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그것을 파악해야 됩니다. 그걸 눈치채야 돼요. ‘야, 이 죄가 내 사적인 죄가 아니고 같은 인간이라는 이유로 다 같이 발휘된 그 집단 죄’, 집단 죄인 겁니다. 아담이 자라서 집단이 되었고 그 집단은 예수 그리스도로 모아졌고 그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고 그래서 모든 인간은 율법 아래서 마땅히 심판받아야 되었다는 것이 십자가에서 파악되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설명했는데도 불구하고 다음에도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고 하면 마음속에 ‘나만 구원받았지요? 내 믿음으로.’ 개인적인 믿음이라는 게 없습니다. 만약에 개인의 믿음이 와 버리면 그야말로 믿음이 각색이 되어버려요. 하지만 에베소서에 보면 “믿음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그래서 믿음을 주신 동일한 질의 믿음을 각 사람에게 다 줬다는 거예요. “세례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왜요? 성령으로 완전히 칡넝쿨을 만들어서 “너희는 다수라도 내가 보기에는 하나야. 내 한 몸이야.” 하고 뚤뚤 묶는 겁니다. 그 하나 안에서 우리는 너, 나를 자랑할 수 없어요.



성경에 보면 부부도 “주 안에서 사랑하라.” 하잖아요. ‘주 안’이라 하는 것은 너와 나가 없이 우리는 주님께서 하나의 부부로 묶어 줬다는 말인데 부부로 주 안에서 묶였다는 말은 ……, 오늘도 선교사님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데 “주안이 뭡니까?”라고 묻는데 주 안에서 묶일 때는 너 나가 없어요. “네가 시집와서 당신이 나한테 해 준 것이 뭐 있는데?” 이렇게 되면 또 너나가 있거든요. “내가 너 같은 여자 만나서 진짜 후회된다.”이러면 또 내가 나온다고요. 가정이라는 하나만 있을 뿐이지 그 가정 속에 너 있고 나 있으면 세 등분 되어버립니다.



너 있고 나 있고 가정 또 있고, 세 개가 된다니까요. “당신과 나는 반쪽이다.” 이것도 틀린 말이에요. 반쪽이 아니에요. 그 반쪽도 아예 없애야 돼요. 반쪽도 아니고 그냥 삼분지 일 쪽도 아니고 그냥 하나라니까요? 주께서 하나 되게 한 것을 누가 끊으리요, 주께서 하나가 되게 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바벨론이고 애굽이고 모두 다 동일하게 “다 네 자리로 돌아가라. 죽음의 자리가 원래 네 자리야. 괜히 물을 흐리고 있어.” 이렇게 언급할 때 “제가 바벨론이고 제가 애굽입니다.” 너무 깝죽댔어요. “왜, 하필 왜 저에게? 왜 하나님이 저를 힘들게 합니까?”



맨날 튀어나오는 것이 “주여, 제가 어떻게 하면 하늘나라 갑니까?” 또 나, 개인적인 나가 등장하는데 ‘우리’입니다. 그냥 우리가 아니고 주께서 함께 하시는 우리거든요. 그게 왜 그런가 하면,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을 때 음부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올라올 때는 홀로 올라온 것 같지만 그 홀로 안에는 구원받을 다수를 포함해서 생명이 올라왔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구원받은 것은 내가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주님 한 몸 되는 그 한 분 안에 우리가 포함되어서 영생 얻고 구원 받았고 부활된 겁니다.



예수 안에서 부활 된 거예요. 예수님 한 분 때문에 구원된 겁니다. 예수님 한 분 때문에 내가 구원된 것이 아니고 예수님 한 분 때문에 우리가 구원된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끼리는 자기자랑하지 않기, 이것이 원리로 딱 자리 잡고 있어야 돼요. 우리가 주님만 높이기, 자기자랑하지 않기, 이런 공식이 딱 갖춰져야 됩니다. 예수님을 경유해서 주님만 자랑하는 것, 이게 바로 구원받은 사람의 본래의 자리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본래의 자리는 뭐냐 하면, 주님 한 분 때문에, 그 한 분 높이라고, 그 한 분이 나보다 더 중심에 계시기에 그 분 때문에 구원받은 거예요.



따라서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고 주 한 분에게 편입된, 이미 포함되어 버린 지체로서 우리가 이 땅에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적으로 좋은 관계 이루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개인적인 믿음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구원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내려주시는 믿음 소망 사랑이 성령의 은사로, 선물로 주어져서 공통적으로 구원된다는 사실을 알고 더 이상 우리 개인 자랑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