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 특히 ‘끊어지지 않는 끈’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계를 움직이는 중심되는 끈을 시작부터 끝까지 이어지게 하셨습니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끈에서부터 일어나는 효과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끈의 주된 내용을 보호하고 그 취지를 드러내기 위해 마치 전선의 구선을 둘둘 감고 나아가는 고무로 된 피복처럼 세상에 각가지 일들을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전기가 직접 통하는 구리에는 접근하지 못하고 전기가 통하지 않는 피복 부위를 놓고 논쟁하고 시비걸고 있습니다. 무엇이 온전히 체계가 되냐고 따집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선지자의 아픔과 원통함을 알지 못합니다. 선지자에게 언약이 직접 흐르는 구리선 같은 것이 관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선 피복에 관심 두는 것을 중앙을 관통하는 구리선으로 관심을 돌려야 합니다.
선지자는 일반 백성들은 왜 다를까요?
선지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특정 개인이 소유화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은혜‘이고 자기만이 이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십니다. 결국 구리선에 반대되는 피복의 성격은 다른 게 아니라 자기 중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소유화하려는 겁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 9:9)
이는 인간이 아무리 난처하고 절망적인 순간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자질이나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을 끈, 곧 언약의 끈 중심으로 생각하도록 바꾸는데 있어 예수님께서 친히 개입하십니다.
일단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 판단, 자기 결심과 자기를 내어놓게 만드는 상황을 일이키게 됩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하지만 절망적인 사태에서 ’두려움‘이 발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럴 경우라도 인간은 뭐라도 하게 됩니다. 그 예가 마가복음 5:25-28에 나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예수님께서는 12년 동안 피흘리는 여인을 통해서 예수님의 언약의 끈됨을 알리기 위해서 자신의 능력을 증거하는 일에 합류시키십니다. 그렇게 되면 이 여인은 비록 자기 결심과 결정과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의 옷을 만졌다할지라도 거기에 대한 해석은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한 바가 됩니다. 이 사실에 직면한 이 여인은 자기 소중함으로부터 시작한 것은 주님으로부터 시작한 것으로 돌려주시는 주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막 5:33) 즉 결코 여인은 자신의 믿음을 자랑질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두려워하며 떱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입니다. 자신의 죄를 주님의 은혜를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된 겁니다.
"두려워 말라"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 연약해서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지경으로 주께서 의도적으로 몰아넣습니다.
내 결정과 결단이라는 그 손모가지를 비틀어 뭉개버려야 해요.
하나님께서 도대체 우리의 고집스러운 내 결정이라는 그 손모가지를 어떻게 꺾느냐 하면,
대처할 수 없는 상황을 줘요. 우리 힘으로 대처할 수 없는 상황. ‘나는 이거 낭패다. 나는 끝났어’라는 것을 우리에게 제공함으로써, 비로소 우리가 알고 있던 하나님의 은혜는 내가 다인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거 교체돼야 되하고 바뀌어져야 하는 겁니다.
인류의 역사가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쭉 갑니다. 가는데 언약을 보호하기 위해서 주위에 감아놓은 것이 뭐냐 하면은 역사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놓쳤느냐 하면, 안에 언약이 통과하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미나리하고 삼겹살을 먹게 했다는 이 연관성, 관련성을 우리가 놓쳐버리는 겁니다.
내 결정과 내 관심사로 보지 말고, 안쪽에 구리 선에서, 하나님이 이미 통과시킨 끈 쪽에서, 이 끈을 끈 되게 하기 위해서, 이 끈의 의미를 위해서, 나로 하여금 두려울 수밖에 없는 상황과 이게 조합이 되어 있다
여자는 ‘내가 구원받아야 하겠다’라는 나부터 스타트, 나부터 출발해서 어떻게 하면 내 것으로 돌아오는지가 되는데, 주님은 그것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나에게서 출발한 것에 네가 얻어걸렸다”라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주님이 찾아와서 스타트가 되지 아니하면, 출발이 되지 않으면, 이걸 꺾을 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죄란 뭐냐? 네가 소중하지 않다는 사실을 네가 감추고 있다는 거. 네가 전혀 소중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경우라도 두려워 마시고, ‘또 내가 모르는 어떤 죄를 지었구나. 또 나를 소중히 여겼구나’라고 허허 웃으시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언제 철이 날지. 믿는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돌아서면 어찌할까 하고 탄식하고 낙담하는 우리의 반복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끈이 우리를 관통하고 있기에, 다시 관통하는 사랑의 끈을 보기 위한 하나의 기회인 것을, 하나의 계기인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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