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

아가서10강-아름다움이란?(아4;1-5)이근호070708

아빠와 함께 2014. 4. 9. 07:34

아름다움이란? 

2007년 7월 8일                              본문 말씀: 아가 4:1-5 

(아 4:1)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구나』 

(아 4:2)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오는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 

(아 4:3) 『네 입술은 홍색 실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아 4:4) 『네 목은 무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방패 천 개,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 

(아 4:5)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어린 사슴 같구나』 

아름다움이 현실로 이어지려면 우리 신체 자체가 지속적으로 아름다울만한 조건을 내놓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다 아다시피 우리는 지금 죽음으로 내닫고 있습니다. 죽음의 힘이 우리 안에서 힘차게 뿜어져나옵니다. 우리에게 있어 ‘자연스럽다’는 말은 곧 죽음이 이끄는대로 자연적으로 죽음에 끌어가는 것 뿐입니다. 

죽음 있는 곳으로 끌려가면서 그냥 곱게, 아름답게 끌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추하게 늙습니다. 각종 장기는 망가지고, 고장나고, 모든 세포들은 맥이 빠져갑니다. 이런 것들이 모아져서 ‘나’ 라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즉 나는 죽음이 세력을 발휘해서 조립해낸 열매입니다. 이런 나가 이런 자연스러움을 거역하고 살려고 합니다. 

그러니 더 추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죽음이 찾아들 때 곱게 순응하는 자는 없습니다, 반발하고 반항합니다. 그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부자연스럽습니다. 한 때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어도 결국에는 이런 추한 모습을 숨지기 못하고 드러낼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나이고 그리고 우리들입니다. 

한 때 훌륭하고 아름답다고 해서 늘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죽음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아름답지 못한 죽음에 의해서 지배받는 주제에 우리가 무슨 아름다울 것이 있을 것입니까? 아름다움이란 처음에는 있었습니다. 에덴동산입니다. 

거기에 유일하게 한 때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 아름다움을 계속 누리지 못하고 추방당했습니다. 이때로부터 인간들이 아름다움을 논하는 것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오히려 아름답지도 못하는 우리 자신을 기어이 아름답게 붙잡으려고 그 모습 자체가 더욱 징그럽습니다. 

이처럼 육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존재인양 우리에게는 아름다움을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현재 우리가 지니고 있는 육신은 썩고 약하고 욕된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모두가 땅의 저주를 벗어나지 못해서 얻어진 속성입니다. 땅에 속한 자는 썩어질 몸만을 간직하며 일생을 마쳐야 합니다. 아름다움이란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요? 예를 들면 이런겁니다. 석양이 지닌 들녘에 멀리 서 있으면 황금빛 노을을 그 사람을 덮쳐서 그 사람은 간데없고 온통 황금빛 투성이가 되는 겁니다. 어깨에, 등에 황금빛을 가득 짊어지게 됩니다. 이럴 경우, 그 사람의 자질이나 크기나 덩치 같은 것은 구분은 무의미합니다. 

그냥 황금빛 덩어리가 되어 나타날 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빛의 궁전이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온 천지가 다이아몬드 및 11보석으로 각종 색채를 만들어낸 만들어진 성입니다. 이 성 안에서는 빛만이 운동합니다. 빛들만 설칩니다. 온통 빛이 비추고, 되비추고 연이어 지속적으로 반사되어 춤추는 빛의 파티장입니다. 이런 예루살렘 성 안에서는 인간에 내뿜는 빛은 의미가 없습니다. 태양빛도 소용없고 달빛도 소용없습니다. 

성도 자체가 빛의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개별적인 성과는 통하지 않는 세계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주어진 세계입니다. 정작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땅에 속한 육이라는 점에서 썩은 속성만 남아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1절에 보면, ‘썩어짐의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즉 썩어짐에 통치에서 못 벗어나는 신세라는 말입니다. 

이 아름다움이 없다는 것은 인간은 육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신세로 태어났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 어떤 인간이라도 육적인 노력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도리어 우리가 움직일 때마다 우리는 왜 썩어짐의 종이 된 신세인가를 드러낼 뿐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보면,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설명하면서 “율법이 겨냥하는 것은 우리의 죽음이요, 예수님의 부활은 그 율법의 권능에서 벗어남을 선언하는 것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아름다움이란 완전히 주님의 몫이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왜 그토록 한 여인에 대한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가 터져나오는 겁니까? 

그것은 여인이 나름대로 아름다운 기준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을 아름답게 보는 남자의 이목이 아름다운 겁니다. 일방적인 예찬입니다. 남편이 가진 영광에 자신의 여인을 초대하고자 하는 겁니다. 보통 인간들은 차가운 죽음의 기운이 당기고 있지만 우리 성도에게는 부활의 따뜻한 기운이 우리로 하여금 부활의 세계로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이 당김이 사랑입니다. 우리를 두고 쏟아내는 예수님의 찬사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아름다움을 얻어내고자 따로 조건을 만들지 마세요. 그것은 소용없는 처사입니다. 우리의 몸은 흙에 속한 저주받은 양상입니다. 아름다움이란 우리 몫이 아닙니다. 이미 물 건너 간 처지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남편은 아름다운 세계에 살고 계십니다. 

이 아름다움이란 하나님 앞에서도 소멸되지 않는 아름다움입니다. 우리의 그 어떤 조건도 묻지 아니하시고 자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의 아름다움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석구석 속속들이 아름다움이 누락됨이 없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예가 그러합니다. 

솔로몬은 왕은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 술라미여인의 신체를 하나 뜯어보면서 자신이 던지는 아름다움을 덧붙일 만반의 준비를 해두고 있습니다. 눈부터 시작해서 유방까지 이어집니다. 이 세상에서 비공격적이고 순하디 짝이 없는 동물을 동원해서 모두 여자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재료로 바칩니다. 

눈은 비둘기요, 머리털은 나란히 누운 염소 떼며, 이는 말끔하며, 입술은 가늘은 실 같다고 말합니다. 목은 당당하고 대범한 망대같다고 했습니다. 젖가슴은 노루 새끼다고 말합니다. 어느 하나 아름다움에 누락될 요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개인적인 조건이 문제가 아니라 아름다움을 보는 이는 눈에는 모든 것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내에서 아름다움을 따로 마련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