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의 연(가마)
2007년 7월 1일 본문 말씀: 아가 3:6-11(아 3:6) 『몰약과 유향과 상인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내 풍기며 연기 기둥처럼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가』
(아 3:7) 『볼지어다 솔로몬의 가마라 이스라엘 용사 중 육십 명이 둘러쌌는데』
(아 3:8) 『다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밤의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각기 허리에 칼을 찼느니라』
(아 3:9) 『솔로몬 왕이 레바논 나무로 자기의 가마를 만들었는데』
(아 3:10) 『그 기둥은 은이요 바닥은 금이요 자리는 자색 깔개라 그 안에는 예루살렘 딸들의 사랑이 엮어져 있구나』
(아 3:11) 『시온의 딸들아 나와서 솔로몬 왕을 보라 혼인날 마음이 기쁠 때에 그의 어머니가 씌운 왕관이 그 머리에 있구나』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보다 더 생생한 현실이란 없습니다. 이 생생한 현실을 손꼽아 기다리는 자가 있다면 이 사람은 분명 남들보기에 불가능한 그 무엇을 받은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즉 죽음을 애써 고대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자기 식대로 무엇을해도 제대로 성공할 수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아는 자입니다. 살아봤자 별 볼일없음을 인식하고 있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에게는 죽음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죽음이란 생생한 현실을 두려움을 가지고 마지못해 끌려가는 것이 아니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를 연발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손꼽아 고대하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남들이 받지 못한 뭔가 죽음마저 극복한 그런 사랑을 받은 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말은 사는 것도 두렵지 않다는 말입니다. 아가는 이런 사랑의 위력을 말해주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이 아가가 말하는 사랑 앞에서 인간들이 벌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경쟁을 무의미한 것입니다. 사랑 앞에서 경쟁이란 일소에 사라집니다. 누가 누가 힘세냐, 누구 누구 우수하냐 누구 누가 잘 먹고 잘 사냐 라는 경쟁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불가능성 앞에서 그 빛을 잃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랑이 왕의 행차처럼 다가서고 있습니다. 희미한 연기 속에서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는 식으로 왕의 위용을 드러냅니다. 실제로 어두움이란 모든 사물의 실체를 묻히게 만들어서 구분되지 못하게 합니다. 사람들은 깜깜한 밤 중에서는 자신의 행동으로 사태가 얼마나 혼란스러운지를 잘 모르게 됩니다.
하지만 여명이 오면, 무질서 속에 파묻혀 있는 사물들은 하나하나 제 모습을 형편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냅니다. 이처럼 사랑이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면 우리들은 평소에 얼마나 경쟁과 분리와 자존심과 자신의 우월감 속에 짐승처럼 살았는지가 드러납니다. 사실 사랑이 오기 전에 우리는, 이판사판 식으로 살게 됩니다.
남을 모함해서라도 꺾지 아니하면 내가 못산다는 식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곧 진리며 그 외에는 절대로 진리가 아니라고 우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막무가내’입니다. 정도로 없고 삶의 원칙도 없습니다. 짐승이 따로 없습니다. 우리 자신들이 곧 남들에게 짐승처럼 행동합니다.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배신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용합니다. 그 중심에는 오직 나만 있을 뿐입니다. 여기에는 신비스러울 것도 없고 냉혹함만 체험됩니다. 향기라고요? 내 몸에서 향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악취뿐입니다. 정신적 악취말입니다. 혹시 나온다면 나의 정신적 악취를 타인들이 혼돈하도록 조치하기 위해 그때그때 몸이 뿌려대는 혼합물일 뿐입니다.
사람에게서 사람 사는 향기를 맡아본 것이 언제적 이야기이던가요! 어릴 때에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행위들이 용서될 때, 그것은 사랑의 향기라고 일시 착각한 적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자립해야 하는 성인이 되고 난 부터는 사랑도 전략의 일종임을 알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스스로 왕의 흉내를 낸 결과들입니다.
왕이 따로 없으니 스스로라도 왕으로 행세하면서 살 것을 요구받는 곳이 이 세상입니다. 온통 어두움과 위선 뿐입니다. 온전한 사랑이 등장한 기미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참 왕께서 참된 사랑을 갖고서 자기 신부를 찾는 행차에 나선다면 이것보다 더 큰 놀라운 일은 또 없을 것입니다.
그는 사랑의 가마를 타고 등장합니다. 밤의 두려움을 지배하면서 행차하십니다. 그의 가마는 아직 비워있습니다. 하지만 곧 그 빈 자리는 왕이 친히 사랑하는 색시로 채워질 것입니다. 길 가의 예루살렘 여인들은 부러워 죽습니다.
우리는 왜 이 왕이 행차를 원치 않고 겁니까? 그것은 여전히 자신이 왕이라고 우기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머리나 행위 속에서 온통 악취의 연기를 뿜어대면서도 여전히 왕이라고 버팀으로 인해 우리는 참 사랑의 행차도 놓치고 말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왕의 옆자리에 동승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왕이 아닙니다. 참된 왕은 ‘어머니의 면류관’을 섰습니다. 왕은 좋은 옷만 결치고 수행원만 많이 끌어모았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왕관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내려주는 왕관을 쓴 자만이 왕입니다. 솔로몬이 쓴 왕관을 오늘 본문에서 ‘어머니가 씌워준 왕관’이라고 합니다.
왜 솔로몬에게는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에게 관심이 모아져 있어야 합니까? 그것은 솔로몬왕의 출생의 비밀과 관련있습니다. 그리고 이 출생의 비밀은 곧 ‘하나님의 참된 사랑’이 어떤 절차를 거쳐서 주어지는가와도 관련있습니다. 솔로몬에게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어머니에 담긴 의미가 곧 솔로몬이 태어나게 했습니다.
솔로몬의 본래의 이름은 ‘여디디아’입니다. 사랑을 입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다윗과 솔로몬의 어머니인 밧세바의 만남을 통하여 사랑을 소개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이란 누군가 대신 죽어야 생겨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사랑받을 자의 죄와 관련있습니다.
우리아 장군의 아내인 밧세바는 그 미모로 인해 다윗왕의 흠모를 받게 됩니다. 목욕하는 밧세를 보고 난 뒤, 다윗은 도무지 제정신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사랑에 혼이 나간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오로지 자신의 왕됨을 과시하는 용도의 사랑입니다. 자기가 사랑했다는 이유 때문에 밧세바 남편의 목숨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이것은 지독한 자기 사랑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충실하게 전쟁터에서 혼신을 다하여 임무수행하는 우리아 장군의 목숨은 한 여인을 독차지 하려는 왕의 탐욕으로 인해 사라졌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사랑의 위력입니다. 자기 위주의 사랑의 특징입니다. 자기는 사랑했다는 이유로 인해 여전히 살아남아야 하고, 이런 자기 사랑을 방해된 자는 일찍 죽어야 했습니다.
나단 선지자와서 전모를 밝힐 때, 비로소 다윗왕은 자신이 죽어 마땅한 죄인으로 전락되었음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을 죽이는 대신 밧세바가 잉태한 자기 아들이 죽게 합니다. 이로서 다윗은 자신이 용서됨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 자신을 죄인으로 드러나게 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다윗은 솔로몬의 출생에서 자신의 의미가 빠지고 죽은 우리아의 죽음에 기초한 사랑의 증표로서 등장됨을 알았습니다. 바로 참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그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이 죄인으로 등장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아는 자입니다. 이것은 인력으로 불가능합니다. 이 불가능한 사랑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색시되게 한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사랑 앞에서 계속 우리 자신을 사랑하지 말고 미워하게 합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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