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

아가서7강-속했다(아2;15-17)이근호070617

아빠와 함께 2014. 4. 7. 18:33

속했다
2007년 6월 17일                        본문 말씀: 아가 2:15-17

(아 2:15)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 이라』

(아 2:16)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는구나』

(아 2:17) 『내 사랑하는 자야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을지라』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져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모를 뿐입니다

사랑으로 가득차 있다는 말은, 우리의 행동이나 행위에 우리의 운명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사랑의 온기로 인해 우리는 그 혜택을 받으면서 존재하고 살아가고 있는 입장입니다.

마치 딸기 비닐하우스에서 딸기가 자신의 운명을 고치고자 비닐하우스의 기계실에 들어가서 온도조절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조절해주는 대로 딸기의 운명을 맡겨야 합니다. 주인이 온도조절 잘 못해서 딸기가 얼어죽는다면 그냥 얼어죽어야만 합니다. 자기가 살려고 그 비닐하우스에서 벗어나서는 아니됩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어야 합니다.

이처럼 사랑의 체제 안에 놓여있게 되면 그 안에서는 개인적인 자기 처방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가 조절해서 자신을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신 사랑으로 인해 변화가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사랑이란 그 사랑받는 자가 자기 소유로 전환되는 사랑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 사랑에 소속이 되어야 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동산 안에서 성도는 그 사랑을 만끽하면서 즐기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랑 시스템을 깨고 싶지 않으려 합니다. 오직 사랑으로만 사랑하고, 오직 사랑으로만 감사하는 자기 백성이기를 원하십니다. 자기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다 만들어놓은 상황 안에서  사는 사람이기를 원합니다.

이 안에서 자신의 의와 자신의 공로는 만들어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태여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 자체로 충족된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이 사랑답게 유지되려면 사랑에 방해하는 것이 어떤 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 사랑의 동산에 여우가 있습니다.

이 여우를 잡아라 고 합니다. 즉 사랑의 체제를 훼방하는 존재가 사랑의 동산 안에 있다는 겁니다. 참으로 사랑을 안다면 여우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어떤 것이 사랑을 깨는 것일까요? 어떤 생각이 사랑을 깨는 태도일까요?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정결한 처녀로서 우리를 예수님에게 중매해 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관계를 결합하는데는 오직 바른 복음, 바른 예수, 바른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단들은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을 전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들은 주의 사도가 아니라 악마의 종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속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들 여우들은 무슨 짓을 합니까? 고린도후서 11:20에 보면,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그들의 배를 채우고 이익을 위하여 교인들을 상대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정신과 정반대 되는 식으로 교인을 대하는 겁니다.

참된 사도는 교인들을 오직 예수님의 정결한 신부로 간주하여 그 정결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예수님에게 연결하려고 합니다. 처녀의 정결성이란 순전히 남편 되시는 예수님의 사랑만이 그대로 담고 있을 경우에만 성사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다른 복음과 다른 예수가 개입되면 더 이상 정결한 처녀가 되지를 못합니다.

가짜 남편을 소개받는 것은 곧 악마가 교인들을 자기 수하에 두기 위한 전략에 교인들이 말려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순수한 사랑만이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는 맺어집니다. 따라서 이 순수한 사랑을 훼방하는 그 어떤 것도 성도는 배척해야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해도 예수님의 사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 어느 누구도 자기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사랑하는 자는 없습니다. 교회라는 것이 이 예수님의 피로만 이루어집니다. 사도행전 20:28에 보면,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피의 사랑을 훼방하기 위한 방해꾼이 계속에서 성도 주변에 찾아듭니다. 이런 이단성을 구분하고 알아채야 온전한 사랑 속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참된 사랑의 진수가 나타나 있습니다. 즉 “너는 내게 속했고 나는 네가 속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성도에게 찾아온 구원의 최고 절정 상태를 두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점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엇을 해도 자기 안에 예수님께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자기 안에 주님이 계시고, 주님 안에 자기가 있음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의 기도 가운데서도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가 이런 관계라고 했습니다.

한 덩어리가 되고 그것으로 마냥 좋은 상태, 이 사랑 안에서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영역을 따로 생각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상대방 안에서 사라져도 상관없이 좋은 그런 상태에 놓인 겁니다. 따라서 이런 상태를 서로가 원하고 있기에 잠시 헤어져 있는 것도 아픔이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에 보면, 해가 지기 전에 다시 결합하자고 요청합니다. 서로 갈라서 있지 말고 하나가 되어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랑을 만끽하자고 합니다. 물론 이런 사랑이 되려면 자기 자신만의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참으로 사랑을 안다면 자신이 자기를 만들어나가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사랑을 받고 누리고 고마워하면서 그 사랑을 주신 분을 잊지 않고 늘 하나되기를 소원하는 것이야말로 사랑받는 자의 모습입니다.
주님이 주신 사랑은 우리가 하는 행위로 만들어지거나 더 보태지지는 않습니다. 그것으로 너무 온전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십자가로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행함보다 주님의 사랑만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