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찾기
2007년 6월 24일 설교 본문: 아가 3;1-4(아 3:1)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하였노라』
(아 3:2)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안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 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노라』
(아 3:3)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
(아 3:4)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머니 집으로, 나를 잉태한 이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
우리들보고 천국 들어가서는 시나리오를 알아서 써보라면 아마 똑똑하고 훌륭하고 대단한 사람들만 추려낼 수 있는 그런 과정을 담은 시나리오를 쓰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이 천국다워야 하니 못된 인간들이나 성격 나쁜 인간들을 안 넣어주는 그런 천국이기를 원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구상해놓으신 천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방적인 하나님의 자기 사랑을 받은 사람만 들어가는 식으로 구원 과정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인간들의 생각하는 천국과 진짜 하나님께서 생각해놓으신 천국의 차이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그 사랑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아무리 천국에 들어가고 싶어서 반드시 지옥으로 골인해야만 할 자들입니다.
이 아가 전체가 일방적인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2:6에서는, “그가 왼팔로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팔로 나를 안는구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집에서 부부끼리 실습을 해보시면 이것이 얼마나 단단하고 꽉 쪼인 자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품 안에서 절대로 빠져나가도록 허락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서려있는 단돌이입니다.
그리고 2:16에서는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 또한 완벽한 합궁의 모양새입니다. 더 이상 너 따로 나 따로 가 아닌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면, 하룻밤 자고 난 뒤 사랑하는 여인이 침상에서 몰라 떠나버리니, 기어이 동네방네 광고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나섭니다.
그리고 이와같이 외칩니다.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라고 상대를 지칭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일방적 사랑을 저지하거나 훼방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없이 사랑은 반드시 결실로 이어지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의 이해력으로 설명이 불가능함을 아셔야 합니다.
이러한 남녀 간의 사랑은 현재 이미 범죄한 인간 세계에서 통용되는 남녀 간의 사랑이라든지 부부간의 사랑으로서는 연결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서는 ‘일방적 사랑’이라는 것은 없고 항상 ‘조건부 사랑’으로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게 되면 남자는 여자를 향한 자신의 사랑의 원천을 알려줍니다.
찾다가 다시 만나게 되는 그 여인을 데리고 남자는 자기 어머니집으로 데려갑니다. 그리고 그 집 안에서도 자신을 낳았다는 그 방으로 데려갑니다. 이것은 자신의 사랑이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없는데서 새롭게 발생된 창조적 사랑인 것임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쉽게 말해서는, 어머니께서 자신을 가질 때에 생긴 그 사랑의 연장으로 지금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겁니다.
원래 없었던 사랑이라는 겁니다. 단지 내가 너를 사랑하기 위해서 새로 잉태되고 생겨나야만 한 그 사랑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남자나 여자는 자신들의 고유의 사랑이 아니라 반대로 사랑에 의해서 생겨난 남자와 여자로 규정지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내가 너를 사랑한다’가 아니라 ‘사랑이 너를 지목했기에 내가 가서 그 사랑을 심는다’는 식입니다.
사랑 앞에서 너와 내가 사라지고 단지 사랑의 전달물질로서만 등장된 남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당사자가 중요하지 않고 사랑이 우선이고 사랑 자체가 두 남녀를 있게한 원천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와같은 인식으로 우리는 신약에서 부부 사이를 이해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1:3-12에 보면,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만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가릴지니라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를 마땅히 가리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상당히 복잡합니다. 일반적인 사랑 타령으로 이 본문을 해석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들은 일단 자신을 남자나 혹은 여자의 가치를 일단 지니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지독한 이기주의로 작용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기주의적 목적을 지니고 사랑을 논하고 발휘해봤자 이기주의만 더욱 확정지을 뿐입니다.
본인을 남편이라고 우기고 아내를 분석하면 분석이 안됩니다. 아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되면 상대를 결국에는 자기 지배하에 두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자신의 존재를 더 증강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상대의 결합을 추진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관계에 의미를 두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옳지 못합니다.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 세속적 욕망의 표출일 뿐입니다. 남과 여는 사랑에 의해서 맺어진 정도가 아니라 사랑에 의해서 창조된 자이어야 합니다. 즉 사랑을 위하여 새로 창조된 자들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뜻을 구현하는 차원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사랑을 위한 남편이 되고, 사랑을 위한 아내로 등장될 뿐이지, 결코 남편을 위한 아내라든지, 아내를 위한 남편이라는 것은 성립되지를 못합니다. 그 한가지 예로서, ‘아내는 남편의 영광이다’는 대목입니다.
보통 영광이라는 것은 그 영광을 취득한 자의 존재 가치가 담겨 있기 마련입니다. 운동경기에 나가서 일등을 하면 트로피를 수상받게 됩니다. 그 트로피는 그 선수의 영광입니다. 어느 선수가 그 우승 트로피를 받자마자 땅에다 내팽개치거나 손상시키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기 그 어떤 이유에서든지 아내를 구타한다는 것은 곧 그 아내가 자기에게 속했다고 짐작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아내는 자기 속한 것이 아니라 사랑에 속했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신의 영광’된 존재요 주님으로부터 사랑받았다는 증표로서의 트로피입니다. 이 모든 관점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속한 사랑의 영광임을 알 때 비로소 발생되는 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뭐든지 내 것이라고 여길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조차도 주님의 것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아가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가서10강-아름다움이란?(아4;1-5)이근호070708 (0) | 2014.04.09 |
---|---|
아가서9강-솔로몬의 연(가마)(아3;6-11)이근호070701 (0) | 2014.04.09 |
아가서7강-속했다(아2;15-17)이근호070617 (0) | 2014.04.07 |
아가서6강-함께 가자(아2;-14)이근호070610 (0) | 2014.04.07 |
아가서5강-사랑의 병(아2;1-7)이근호070603 (0) | 2014.04.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