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병
2007년 6월 3일 본문 말씀: 아가 2:1-7
(아 2:1)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아 2:2)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아 2:3)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아 2:4)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
(아 2:5)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
(아 2:6)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게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아 2:7)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는 ‘사랑’ 관계입니다. 이것은 목적을 갖지 않는 태도입니다. 목적으로 가지고 움직인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용납될 수 없는 태도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이라는 목적을 위하여 양보없는 투쟁을 벌리게 됩니다. 즉 목적없는 그 어떤 행위도 싫어합니다.
낭비라고 보고 있는 겁니다. 이들에게 있어 목적이 우선이고 나머지 모든 것은 그 목적을 위한 이용물이나 수단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 빼놓고 타인이나 하나님마저 다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동원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과연 우리 내부에 이런 목적성이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우리의 목적성은 일부로 목적을 세우려고 하지를 않더라도 완전히 우리에게 습성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얻을게 없다면 행동에 나서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이런 본성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평소의 습관이 되어버리고 우리는 지금 정상적으로 사는 것처럼 오산합니다. 이러한 과오는 성경을 볼 때에 드러납니다.
성경을 보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자신의 목적하는 바를 달성하겠다는 식으로 기도하는 것이 전혀 문제있는 행동으로 여기지를 않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부흥을 위하여, 자기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고, 사놓은 땅값이 올라 횡재할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것도 마치 교인의 특권이라고 간주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정상적인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는 사랑입니다. 사랑 이외에는 모두 빠져나가야 합니다. 제거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목적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목적이 없어지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몸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몸이 아니라
몸의 움직임 자체가 사랑을 보여주는 목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몸을 굴러서 사랑을 따내겠다는 것이 아니라, 몸의 움직임 자체가 사랑이 표출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따라서 사랑 때문에 병도 나고, 사랑 때문에 몸이 아프기도 합니다. ‘사랑의 병’이 나면, 법도 먹히지 않고, 몸도 아프고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를 않습니다. 흔히들 상사병이라고 합니다.
남들이 좋아하고 기뻐하는 각가지 위로거리를 제시해도 그것으로 인해 사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사랑하는 자와 함께 있는 것만이 해결책입니다. 이것은 곧 그 사람들에게 특별나가 원대한 목적과 목표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를 위한 몸의 움직임을 보이면서 살아가는 현상입니다.
반면에 사랑이 없으면 매사를 따지면서 덥벼듭니다. 그 누구를 상대를 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상대로해서도 따지면서 달려들게 됩니다. 새벽기도나 금요철야 기도회 때,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보면 감사와 고마움을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따지만 원통함과 원함으로 울고 불고가 가득차게 됩니다.
즉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주님 고생하셨습니다”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왜? 왜? 왜? 하필이면 왜 나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을 상대로 따질 것은 따지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뭔가 자기쪽에 잘못한 게 있고 문제점이 있다면 기어이 그것을 고쳐서라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야 말겠다고 고집이 서려입니다.
인간들이 이렇게 옳고 그름을 따지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연하게 에덴동산에서 추방시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감사하기 보다는 인간들이 나름대로 목적을 노리고 에덴동산에 산다는 것은 하늘 나라가 인간 나라가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목적을 버려야 하는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천국가기’가 동원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태도일 뿐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 비유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원래 뜻이 무엇인가가 잘 나와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동안 늘 곁에 있어준 맏이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해주지 않으면서 아버지 재산을 바깥으로 돌아다니면서 다 탕진한 그 아들에 대해서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그 탕자가 돌아왔을 때, 좋은 옷과, 가락지를 손수 끼어주시고, 소까지 잡아서 동네방내 잔치까지 베풉니다.
왜 그렇게 하실까요? 그것은 맏이하고는 달리 탕자는 아무 것도 자기 목적과 음흉함을 더 이상 내세울게 없기에 고스란히 아버지가 주신 사랑이 그 탕자의 심령에 안착할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대우받는 탕자에서는 결코 아버지 사랑이 흠집나거나 누수될 염려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이 용서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최종적으로 사랑만이 남기를 원하십니다. 그 사랑의 관계 말고는 다른 관계로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흔히들 기도를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사도 바울의 기도를 소개합니다.
에베소서 3:14-15, 18-19에 보면,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인간은 누구나 타인을 대하면서 노림수를 갖고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성도에게는 이것은 자신의 본성이 되어서는 아니되고 도리어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충만함이 본성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신랑은 왼쪽으로 배개하고 오른손으로 아내를 보호합니다. 이것은 새삼스럽게 자기 아내를 고문하거나 심문하거나 따지기 위함이 아니라 끝까지 지켜주고 보호해주기 위한 몸짓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수선화 라든지 백합화라든지, 사슴과 노루라는 사물들은 모두 사랑 안에서의 비폭력성을 말씀하기 위함입니다. 가시나무나 잡초나, 불곰이나 승냥이나 시나소니리나 늑대같은 짐승을 등장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사랑은 그 어떤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심지어 악마의 권세로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 사랑은 예수님이 그저 주신 피와 찢기신 살로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랑 관계로만 생각해서 하나님을 이해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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