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가자
2007년 6월 10일 본문 말씀: 아가 2: 8-14
(아 2:8)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
(아 2:9)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 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아 2: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 2:11)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아 2:12)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아 2:13) 『무화과 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 2:14)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속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성경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이 지구를 가지고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지구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다 이 성경 안에서 적혀있는 상황에서 못 벗어나는 일입니다. 한국에 살다가 멀리 아프리카로 이민을 갈려면 참으로 긴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 쪽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그들과 어떻게 적응할 것인지 염려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걱정만 할 일이 아닙니다. 성경 속에서 보면,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하여 배치되어 있고 만나지는 일들입니다. 즉 사랑받을 준비를 하고. 혹은 사랑할 준비가 된 상태에서 그 사람이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두려워할 문제는 아니라는 겁니다.
아가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사랑을 위하여 생겨나고 적용된 상황이라는 겁니다. 이점은 전도서와는 상반됩니다. 전도서는 개인적인 입장에서 세상을 보고 전체를 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고, 헛된 겁니다. 하지만 세상 전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하기 위하여 생겨난다는 입장에서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사랑을 찬미하기 위해 곁에 배치되어 있는 것이 됩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무화과 나무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통하는구나’ 라고 되어 있습니다. 전도서 식으로 보면, 무화과 나무가 아무리 푸른 열매가 맺혔고, 포도나무가 아무리 꽃이 피어 향기를 뿜어대어도 너와 나나 다 세월따라 시들어버릴 피조물이다 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가 식으로 보면, 무화과의 열매나 포도나무의 꽃과 향기는 우리 둘의 만남을 축하해주기 위해 우리 주변에 둘러싸있다 가 됩니다. 따라서 이 둘의 남녀는 사랑, 그 자체를 위하여 서로 달려가고 만나는 겁니다. 상대를 볼 때에 자기 입장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지구 전체를 감싸는 사랑의 입장에서 상대를 봅니다.
그렇다면 그 상대의 모든 모양새와 얼굴과 목소리까지 전체 사랑의 부분으로 다가오기 마련입니다. 즉 남자나 여자는 상대의 다가옴을 곧 사랑이 자기에게 밀려옴으로 이해하는 겁니다. 그 사랑은 흔해 빠진 사랑이 아니라 고귀한 사랑이라고 합니다. 어느 정도인가? 낭떠러지에 있을 법한 비둘기처럼, 평소에 꼭 한번 만나고 싶어있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아 멀리서 그리움만 더 하게 만든 그런 비둘기 같은 사랑이 바로 당신이라는 겁니다.
상대방을 귀하게 본다는 것은 개별적인 사랑의 능력으로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를 한묶음으로 하여 그것을 사랑의 완성이라고 보기 때문에 귀하게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즉 ‘나 하나 즐겁기 위해 당신이 있다’가 아니라 ‘우리의 사랑’을 위해 ‘당신이 있다’는 식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개별자 단독으로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집단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구원도 개별적인 구원이 아니라 집단적인 구원입니다. 즉 ‘너는 〜 소속되었기에 구원되었다’라는 것입니다. 특별 집단에 소속되어야 구원이 되고, 반대로 저주받는 것을 특별집단에 소속되었다는 이유로 인해 집단적인 저주를 함께 받는 겁니다. 예를 들면, 전 세계인을 하나의 통수박으로 간주하면, 하나님은 그 통수박을 두 조각으로 나눕니다.
그렇게 되면 세계로 둘로 나뉘어집니다. 한쪽은 동일한 것을 원하고 있는 특징을 지닙니다. 만약 구원받는 쪽을 가려내기 위해 우리 주님께서 “자장면 좋아하는 사람, 여기 여기 모여라”하는 식으로 자기 백성을 불러모으게 됩니다. 평소에 자기가 과연 자장면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조차 모르고 있다가 이 소리를 듣는 순간 자장면이 좋아지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선택해서 자장면을 좋아하기로 마음먹는 것이 아니라 이미 택한 백성에게는 하늘이 요소와 연결된 요소가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반대편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 자신이 과연 짬뽕을 좋아하는지 여부를 몰랐던 거지만 막상 짬뽕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서는 그 때부터 자장면보다 짬뽕이 좋아지게 된 것입니다. 이 자장면은 바로 ‘나는 무능하다.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된다’ 소식이고 짬뽕은 바로 ‘내 운명을 내가 하기 나름이다. 그럴 능력이 나에게 이미 있다’는 소식입니다. 모든 인간은 반드시 이 둘 하나로 자리를 정하기 마련입니다.
구원받지 못하는 쪽은 사랑의 힘보다 자신의 실력에 합당한 대우를 받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이런 자들은 전도서에 의하면 헛되고 헛되고 헛된 인생일 뿐입니다. 즉 ‘우리’가 없고 결국에는 ‘나’만 남게 됩니다. 하지만 사랑을 받는 쪽은 단독자가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있음을 압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주기 위해서 존재함을 압니다.
사랑 안에서는 어린애가 됩니다. 어린애는 상대방을 경쟁상대로 보지 않습니다. 어리광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격식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마음을 낮추어야 합니다. 상대방보다 자신이 더 우월해져 있거나 우월해져야 함을 인생을 목표로 잡는 것은 ‘우리’를 원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계속 자기 자신으로만 버티겠다는 생각입니다. 사랑을 제공하기 위해 타인과의 만남이 있다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꺽어버리기 위해 타인을 만나게 해준 것으로 오인하고 있습니다. 배우자를 고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자기 자신을 낮추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나를 어떻게 보고 건방지게 감히 나를 배우자로 삼겠다고 덤비는가?”라는 공격으로 상대를 대할 것이 아니라 “나 같이 못난 자에게도 결혼 하겠다는 자가 나타난다는 것이 참으로 기적이다”라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이에는 허물이 없습니다. 벌거벗고 다녀도 그것이 허물이 아닙니다.
둘이 만남 그 자체가 각자의 둘을 위한 만남이 아니라 그 가운데 형성되는 사랑을 위한 만남입니다. 이 사랑은 개인적인 자질이 아니라 세상 전체를 통째로 사랑의 장으로 볼 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볼 때,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말은 세상을 넓게 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세상을 넓게 보지 못한다는 말은 자신의 자존심을 위하여 상대를 골라가며 자기 위주로 대한다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나중에 자기 자신이 정확하게 누군지를 모르고 되고, 세상 모든 것이 다 자기에게 불필요하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더나아가서 여기서 오는 실망감을 폭력으로서 외부에 가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모든 것을 아버지의 사랑으로 이해했습니다. 바로 이 이해 안에 하나님은 우리를 초청하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마음을 어린애같이 낮추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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