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

아가서2강-사랑에 취함(아1;2-4)이근호070513

아빠와 함께 2014. 4. 7. 09:11

사랑에 취함
2007년 5월 13일                                      본문 말씀: 아가 1:2-4

(아 1:2)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아 1:3) 『네 기름이 향기로워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아 1:4)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주체할 수 없는 격렬한 사랑이 아가 전편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어 대쉬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사랑이란 이처럼 이성적으로 따져야 비로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말릴 수 없고 참을 수 없는 격렬함으로 작용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사랑이 덮쳐진 사람이라면, 그 덮쳐진 사랑으로 인해, 매사를 논리적인 따짐으로 자기를 정립하지는 않게 됩니다. 즉 ‘나의 나 됨’을 논리로 설명할 수 없게 됩니다. 격렬한 외부의 힘에 대해서 입을 열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를 질질 끌고 간다면 그 와중에서 한가로이 바깥 풍경이나 즐기고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야, 나를 강제로 질질 끌고 가는게!”하고 당연히 반응을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다.

아가 전체가 급함과 격렬함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발 만나달라고 진드기처럼 달라붙는 자가 있는 반면에 그런 사랑이 부담이 되어 도망치다가 결국은 도망치지 못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단순히 남녀간에 가벼운 호기심이나 오락정도가 아니라 생명을 걸고 성사시키려는 사랑관계입니다.  

‘입맞춤’이라든지 ‘침궁’이라는 것은 남녀간에 결합을 전제로 표현입니다. 즉 사랑이란 결합이요 연합입니다. 둘이 하나가 되는 것으로 통해 ‘사랑’이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따라서 둘이 하나 이기 위해서는 ‘둘’이 먼저 성립되어야 합니다. 즉 남자와 여자가 분명히 구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인에게 있어 ‘남성’이나 ‘여성’이라는 인식보다 ‘인간성’으로 통합니다. 즉 ‘나는 어릴 때에도 독자적으로 사람이었고 지금도 독립적으로 사람이고 죽을 때까지 자립적인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는 겁니다. 남성의 기능이나 여성의 기능이 누락되어 있는 겁니다.

남성이나 여성으로의 위상이 빠지면 결국 ‘사랑’을 표출해 낼 수가 없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사랑을 보여주지 못하는 인간은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요, 사랑을 제대로 보여주려면, 사랑의 요건이 되는 ‘남성’ 혹은 ‘여성’으로서 위치를 갖추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인간에게 있어 ‘홀로 살기’를 위한 훈련이 진정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남성으로 살기’, ‘여성으로 살기’로 살아야 바른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런 위치에서만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쪽은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기에 나오고 다른 한쪽으로 그 무조건인 사랑에 동의하기로 나와야 합니다. 짝이 없으면 통합도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비밀스레 담긴 내용입니다.

에베소서 5:30-32에 보면,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하고 되어 있습니다.

예식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인, 신랑 신부가 혼인하는 것이 무슨 큰 비밀이 담긴 사항이란 말입니까? ‘부모를 떠나’라는 말씀에 유념해봐야 합니다. 즉 신랑 신부가 되는 일은, ‘부모를 떠나’를 전제로 한 일이라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달리 말해서 부모를 떠나지 아니하면, 신랑, 신부를 통해서 비로소 보여주게 될 그 비밀을 못 보여주게 된다는 말입니다.

자식이 부모와 함께 있게 되면 자기 존재의 원천은 어디까지나 부모가 되어버립니다. 즉 부모로 인하여 내가 있기에 부모 없으면 나의 존재의 기반이 없는 셈이 되고, 그 부모와의 영속적인 관계로 인하여 부모의 연장으로서 ‘나’가 있음이 됩니다. 즉 나는 ‘제 2의 부모’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이런 입장에서 구태여 ‘남자’ 혹은 ‘여자’로서의 특성을 주장할 이유가 없게 됩니다.

그런데 부모와의 관계를 단절시키게 되면, 그 자식은 다른 관계를 통해서 자신을 새로 정립해야 합니다. 결혼이란 새로운 관계 정립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사람 대 사람으로서 결합이 아니라 이제는 남자 대 여자, 여자 대 남자의 관계로 맺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총각, 처녀 때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비밀이 비로소 그 얼굴을 내밀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이름의 비밀입니다.

인간의 이성이나 논리나 따짐으로 파악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성이나 논리로 파악되지 아니하면 마치 없는 것처럼 간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다 비밀이라는 말을 붙일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하고 움직입니다. 그런데 만약 누구를 향하여 불타는 사랑이 일어나게 되면 자신의 이익과 손실을 따지지 않고 대쉬하게 됩니다.

이 사랑으로 인하여 혼인이 발생됩니다. 전에 부모로부터 얻었던 그 사랑이 아닙니다. 이미 부모와의 관계가 철저하게 끊어진채 기적적으로 찾아온 사랑입니다. 남편이 된다는 것과 아내가 된다는 것은, 과거와 전혀 다른 인생관을 강요받는다는 말입니다. 부모와의 관계를 끊었다는 말은 자신의 밑둥치가 뿌리채 날아가 버려서 홀로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이점을 두려워해서 계속해서 부모와 함께 있기를 고수한다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그 사람에게 부여해준 사랑의 요건을 스스로 나타낼 통로를 죽이는 셈이 됩니다. 왜 하나님의 사랑이 비밀일 수밖에 없느냐 하면, 부모와 함께 있을 때 감히 상상치도 못한 경험 속에 휩싸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전에 가졌던 사고방식으로는 감히 표현조차 되지 않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스스로 통제가 불가능하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저돌적이고 격렬한 감정에 휩싸여 상대와 만나서 결합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것이 입맞춤이요 침궁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부모로부터의 나와 자립할 때, 인간들은 그동안 살아온 힘을 잃어버리고 홀로 남게 됩니다.

만약 여기에서 뭔가 새로운 것이 발생된다면 그것은 오로지 예상 못한 사랑의 결실 일 것이 분명합니다. 사랑은 바로 이런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도저히 인간이 자력으로 발생시킬 수 없는 일이 바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찾아드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4:27에 보면,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기를 도저히 가질 수 없는 여인이 남편 있는 여인보다 더 많은 자식을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반응을 나타내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아가의 주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받을 그 어떤 조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왕은 무조건적으로 그 여인을 얻고자 사랑의 힘으로 다가서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유일한 우리의 존재 기반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