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는 얼굴
2007년 5월 20일 본문 말씀: 아가 1:5-7
(아 1:5)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아 1:6)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아 1:7)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 같이 되랴』
사랑이란, 사랑받을 요건과 상관없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을 이런 식으로 제공해야 하는 이유는, 인간들이 기껏 ‘사랑받을 만하다’고 내세운 요건들을 보게 되면 결국 자기 과시나 자기 영광에서 나오는 온전치 못한 이기적 사랑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종교적 행위나 거룩한 모습을 가지고 인간은 자기 본색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에게도 통하지 않습니다. 평소에 자신의 성격대로 편하게 사는 그 와중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계속 주어집니다. 당연히 요건을 보지 않고 말입니다. 아가는, 왕으로부터 사랑받는 철없는 한 아가씨에 평소의 성격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랑을 할 때는, 정신없이 설칩니다. 모든 생의 목적이 사랑, 오직 거기로 다 쏠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자로부터 자신이 어떻게 보일까 신경쓰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일과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를 그리워하면서 사는 의욕을 고취합니다.
심각하게 생각하고, 도덕적으로 선과 악을 따지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의 언어 생활에서 무심코 내뱉는 버릇은, 그 어떤 대화에서도 꼭 ‘자기’를 집어 넣는다는데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냥 배고프면 그만인 것을 가지고 꼭 “내가 배고프다”라고 하면서 ‘나’를 집어넣어서 말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배고픈 것이 먼저이기에 배고품이 우리 자신을 덮쳐져서 배고파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나의 배고품과 무관한 법입니다. 그럼에도 ‘내가’를 집어넣는 것은 뭐든지 내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야 비로소 세상이 제대로 돌아간다고 여기기 싶어하는 본심 때문입니다. 지구가 도는 것이 내가 ‘돌아라 돌아라’ 해서 도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지럽다고 해서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는 것을 멈춰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어진 대로 행위로 나타날 뿐입니다. 내가 우선이 아니라 이 세상의 움직임이 우선입니다. 그 움직임이 심지어 나의 내부 본성마저 지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의식적으로 꾸며내는 일이 뭐가 되었든지 간데 우리의 본성을 끝까지 감추거나 속일 수는 없는 법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지배를 받으면서도 곧 죽어도 자신의 행동을 자기가 주관하는 것으로 우기고 싶은 하는 것이 인간들의 습성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것마저 다 아십니다. 우리 인간들이 이런 식으로 움직이는 것도 다 아시기에 조건없이 퍼부으시는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신부는 스스로 변명하기를, 자신의 얼굴이 원래부터 검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본디 곱고 아름다운 얼굴이라는 겁니다. 오빠들이 자신을 번번히 포도원지기로 떠맡겨버리고 자기네들은 놀려가버렸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에 맞서 자기도 또한 포도원지기를 충실히 감당하지도 않고 그 자리를 피해버렸는데 그것은 사랑하는 낭군임이 보고 싶어서 그랬다는 겁니다.
그 낭군은 양들을 치면서 한 곳에 진뜩하게 머물러 있는 타잎이 아니라 이리저리 이동하는 타잎입니다. 그래서 쉽게 만나 뵐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면, 신부는 신랑을 사랑을 유인할 요건이 자신의 본질로서 영구히 박혀 있었으면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에 대한 오해입니다. 민수기 12장에 보면, 모세와 모세 누가 미리암이 나옵니다. 모세가 자기 부인을 얻는데 있어 모세 누나가 불만을 터뜨립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 집안이 최고의 지도자 집안인데 어떻게 이방출신의 여인인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분노를 터뜨리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미리암과 아론을 불러놓고 하나님의 심정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즉 모세의 위상은 ‘하나님의 온유함’이 토대가 되어야 해야지 결코 사적인 토대가 개입되면 안된다는 겁니다.
즉 구스 여인이 모세와 혼인하는 것은 단지 모세 가문을 빛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빛내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이런 면을 드러내는 또다른 방식으로 이번에서 모세 가족의 한 사람인 미리암이 문둥병이 걸려서 격리 수용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사랑이란 멀리 있던 남자와 여자가 점점 당겨져서 결국 하나가 되는 힘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식으로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어서 뭘 한 것입니까? 쉽게 말해서 청춘 남녀가 서로를 너무 사랑해서 미친듯이 만나 한 가정을 꾸몄다고 칩시다. 그래서 앞으로 뭘 할 건데요?
혼자서 각자 하던 그 일이 둘이 되었다고 달라질 것이라도 있습니까? 맹목으로 끌리기만 해서 일단 결합되어서는 그 다음에 뭘 할 것이냐 하는 것이 뭐냐는 것입니다. 결혼전, 미친듯이 사랑할 때는 사랑 그 자체가 사는 이유였고 목적이었기에 따로 목적을 만들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결혼 생활을 길게 가져가면 갈수록 서로를 미친듯이 그리워하던 그 그리움을 사라지고 나면, 우리가 왜 같이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이유가 따로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유도 없고 목적도 없이 이왕 함께 살았으니 계속 산다는 것이 무의미하지 않습니까.
고린도전서 7:4에 보면,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070520하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찬찬히 보게 앞, 뒤의 문구가 상호 모순되어 보일 것입니다. 아내의 인생을 남편이 통치하고 지배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뒷 문구를 보면, 그렇게 지배받는 아내는 남편의 인생을 통치하고 지배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결국 사람들이 서로가 내놓은 힘과 요건으로 인하여 부부라는 것이 성사되고 유지된다고 보지만, 실은 이 남편과 아내를 꽁꽁 붙잡아 매는 다른 힘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결혼 시점에서는 남편이나 아내나 자신의 사랑능력에 대해 자신만만해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곧 주도권 싸움으로 번지게 마련입니다. 서로 자신에게 가정을 통치할 합당한 최종 권리자,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두 사람을 박치기해서 둘 다 말씀 앞에, 사랑 앞에서 평생 회개케 하십니다. 즉 진정한 사랑이란 서로 회개하는 양상으로 전개된다는 겁니다. 이처럼 회개하는 가정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사이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요건이나 조건없이 주시는 사랑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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