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2007년 4월 29일 본문 말씀: 아가 1:1-4
(아 1:1) 『솔로몬의 아가라』
(아 1:2)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아 1:3) 『네 기름이 향기로워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아 1:4)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구원이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주어지는 겁니다. 약속이란 일방적으로 제시된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 하고 사전에 협의해서 결론지은 약속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그 약속을 받는 입장이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을 던져주시는 위치에 있습니다.
옛날 약속을 구약이라고 하고, 새로운 약속을 신약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둘을 합쳐서 성경 말씀이 됩니다. 따라서 구원이란 이 성경 말씀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수용하면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내리신 약속이 아닌 것을 임의로 조작해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자신이 믿고 싶어하는 바를 멋대로 만들어서 ‘하나님의 약속’이 된다고 우기고 나오면, 그것은 구원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당연히 이런 가짜 약속을 의식하고 그 내용들을 배척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우리가 보려는 이 아가도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특히 사랑의 약속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의 성격이 이 아가에 잘 나와 있습니다. 아가라는 제목의 뜻은 ‘최고의 노래’라는 뜻입니다. 즉 최고의 지혜라는 뜻입니다. 최고의 지혜가 다름아닌 사랑입니다.
지난 번 설교에서 우리는 전도서를 함께 보았습니다. 인간이나 인생이라는 것이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헛되고 헛되며 무엇을 해도 헛된 것’ 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죽음의 힘이 맹렬한 덮쳐진 우리들에게 있어 해체되어지는 과정이란 허무스러움의 연속일 수 밖에 없습니다.
과연 허무를 극복할 해결책은 없는가요? 하나님의 지혜는 아가를 통해서 새로운 사실을 말해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죽음과 허무는 사랑에 의해서 사라질 수 있습니다. 사랑만 있다면 전부가 다 받은 것입니다. 솔로몬은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지혜의 최고점은 사랑을 알았고, 그 사랑을 느꼈고, 사랑의 힘으로 살아간다는데 있습니다.
아가 전편에 걸쳐 솔로몬의 해박한 지혜가 나열되어 있습니다. 우선 등장하는 식물 종류를 내열하면 이러합니다. 호도, 니그나로 기름, 백향목, 들꽃, 크로크스 꽃, 유향, 몰약, 나드, 석류, 백합, 무화과 나무, 사과, 삼나무, 포도나무, 멘드레이크, 창포, 육계입니다. 등장하는 동물은 표범, 말, 까마귀, 염소, 어린 숫사슴, 암사슴, 여우, 들비둘기, 사자, 비둘기, 영양, 양 같은 것들입니다. 광물로서는, 대리석, 자색옷, 사파이어입니다.
열왕기상 4:30-34에 보면, “솔로몬의 지혜가 동양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 저는 모든 사람보다 지혜로워서 예스라 사람 에단과 마홀의 아들 헤만과 갈골과 다르다보다 나으므로 그 이름이 사방 모든 나라에 들렸더라 저가 잠언 삼천을 말하였고 그 노래는 일천다섯이며 저가 또 초목을 논하되 레바논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저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를 논한지라 모든 민족 중에서 솔로몬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 중에서 그 지혜를 들으러 왔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솔로몬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혜를 총동원하여 진짜 지혜인 사랑을 증거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즉 세상 모든 만물은 사랑을 표현하는 재료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전도서에서의 지혜가 어디까지나 자아에 대한 관심사가 계속 살아있는 상황에서 드러나는 지혜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적으로 자아의 허무성으로 인해 지혜도 허무성을 띨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나 아가에서는 단독적인 자아가 아니라 뭔가 상대를 찾아 헤매는 자아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즉 독자적으로 ‘내가 뭐지?’가 아니라 사랑하는 상대만 있다면 그런 고민조차 할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2절에 보니 나옵니다. ‘입맞춤’입니다.
입맞춤이란 혼자서 해낼 수 없습니다. 상대가 있고, 그 상대와 하나로 결합되기를 바래서 하는 행위입니다. 즉 사랑이란 ‘하나됨’입니다. 둘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둘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 사랑입니다. 네가 내가 되고, 내가 네가 되는 상황이 하나입니다. 너와 내가 구별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3:4-7에 보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자아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한다는 것은, 더 이상 자신을 그 상황의 중심에 두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허무가 찾아올래야 올 수가 없는 위상입니다. 사랑하는 상대방 속으로 자아가 사라져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전에 ‘나’라고 여긴 것을 희석시켜 상대방으로 인해 나를 잃고 사는 경우를 말합니다.
둘이 하나가 된 상황이 인정하고, 서로의 개인을 인정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상대를 향해 옳고 그름을 따질 입장에 있지 않게 됩니다. 특징 부부사이에서 위기가 찾아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따지게 되는 경우입니다. 사랑 안에서 법적인 옳고 그름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삼스럽게 옳고 그름을 따지겠다는 것은 상대를 나로부터 심판받을 피고로 여기면서 산다는 말이 됩니다. 이것은 더나아가서 상대가 없이도 홀로 살 각오가 되어 있다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다시 사랑이 찾아오면, 옳고 그름을 따질 ‘나’도 없어진다는 말이 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마치 냄비의 뚜껑으로 여기는 태도입니다. 냄비에 뚜껑이 없다면 얼마나 허전하겠습니까. 지나가는 모든 바람도 다 들게 마련입니다. 사람이 혼자 살게 되면 포근함이 상실됩니다. 냉혹해지고 늘 긴장 상태에 돌입되어 있습니다. 푸근함이 없기에 밥을 먹어도 깊은 맛을 느낍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있으면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에서 상처주거나 모독하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더 맛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곧 인간이 느끼는 사람을 사물이 중간에 끼어들어서 주는 자극과 비할 바가 없이 훨씬 진하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사랑이란 나를 잃게 하는 사랑이어야 참 사랑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의 사랑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비교될 수 없는 정도로 월등함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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