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아
2007년 5월 27일 본문 말씀: 아가 1:8-17
(아 1:8)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
(아 1:9)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아 1:10)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아 1:11)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
(아 1:12)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
(아 1:13)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
(아 1:14)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아 1:15)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아 1:16)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아 1:17)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
이 구약 아가 전체를 보면 죽음의 무겁고 음침한 흔적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오직 사랑으로만 가득 찬 공간에 두 남녀가 서로를 향하여 노래를 던지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형성된 공간은 더불어 공유하고 있는 겁니다. 이 둘이 내부로 하나로 해소되어 사라져버리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랑의 대상이 없어지는 것이 됩니다.
사랑이란 단지 일시적 과정에 머물다가 궁극적으로 소멸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과정, 그 자체가 전부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하여 마주보고 있지 아니하면 사랑이라는 것이 형성될 수 없습니다. 외부로 봐서는 그 둘은 하나된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그 ‘하나’라는 것은 한 사랑으로 안에 둘이 되어 서로 마주보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입니다.
이럴 때 사랑이란 서로가 서로를 향하여 화살이 날라갑니다. 사랑의 화살입니다. 자기에게 수고스럽게 다가올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냥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 내가 다가가서 조목조목 사랑의 이유들을 찾아내겠다는 겁니다. 따라서 마주 서 있는 상대방으로부터 사랑받기 위해서는 자신을 가꾼다든지 노력할 이유가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이 자리 그대로, 자체를 사랑해주기 위해서 상대자가 사랑의 눈짓을 보내면서 찾아오는 겁니다. 이것은 남자 뿐만 아니라 여자 쪽에서 그러합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여자는 남자가 보고 싶어 남자의 일터를 찾아가고자 하지만 이상스럽게 상황이 꼬여서 만남이 빗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누가 조언을 합니다. 양떼의 발자취를 찾아내어 따라 붙이라는 겁니다. 부부가 늘 함께 있어도 24시간 늘 보고 싶고 사랑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불현듯이 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여자는 남자의 직장에 전화를 하게 됩니다. 물론 남자는 직장에서 전화를 받으면서 왜 자기 아내를 전화를 한 줄을 모르지요.
“아침에 봤잖아, 왜 쓸데없이 전화해서 통화료만 올리는데”라고 퉁명스럽게 받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말합니다. “잘 있으면 됐지 뭐. 그냥 걸어봤어. 저녁 때 일찍 들어와요”라고 합니다. 하지만 남편이 보고 싶어 전화한 아내는 불쑥 솟아오르는 사랑을 그냥 담아두기에는 너무 힘들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이란 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상대를 항하여 뭔가 표현하고 표출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이 계속된다는 것은 이 둘이 하나로 해소되지 않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자가 있어야 하고 사랑받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위하여 부부가 있는 겁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하나님의 자기 자녀에 대한 사랑을 부부 관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법으로 굳어진 부부를 먼저 거론합니다. 법으로 맺어진 부부도 언듯 보기에 사랑으로 맺어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처음 그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 추가적으로 법이 동원되어야 하고, 그 동원된 법이 처음 사랑을 계속 사랑으로서 지속시키는 힘이 된다고 여기는 부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구원의 사랑이 아닙니다. 즉 “우리의 사랑이 유지 되려면 지금부터 신부는 이 남편의 법을 지켜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이 생각해놓은 구원의 사랑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부부가 되고 난 뒤에도 각자가 가진 인생관을 갖고 있습니다. 이 인생관에 상대방을 포섭하고 통합시키기 위해서 애써게 됩니다.
이것은 부부의 부작용이지요. 즉 한 쪽이 일방적으로 상대편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강요하는 겁니다. “이제부터 내가 법을 제정하노니, 만약 내 법을 지키면 당근을 주고, 만약 내 법을 지키기 아니하면 채찍으로 때리겠노라”하는 식으로 나옵니다. 이것은 사육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자기가 지금껏 살아온 인생관 속에다 상대방을 집어넣어서 상대방의 인생관을 아예 없애서 하나에서 둘로 만들려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사랑의 대상이 사라지는 것이 됩니다. 사랑이란 한쪽이 한 쪽을 흡수 통합 것에서 완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상방간에 주고 받음이 이루어지는 그 자체가 ‘사랑의 완성’입니다.
남편이 율법으로 가정을 유지하려고 시도하게 되면 아내는 계속 아내노릇을 감당해 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남편이 제시한 법이 아내에게 도달되면 아내는 그 도달된 법에 자극받아 계속 죄를 더 낳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흘러 터져 나오는 죄를 발견하고 더 추가적인 법으로 선을 요구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 요구된 추가된 법이 추가적인 죄를 낳습니다. 결국 그 아내는 죽습니다. 설거지 하라는 법을 지키다가 과로로 코피 터져서 현장에서 즉사하는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설사 설거지를 무사히 수행해도 이번에서 다리미질과 옷 수선질이 남아 있어 그것하다가 과로로 쓰려져 죽게 됩니다. 설사 무사히 옷 수선을 끝마쳐도 연이어 또 다른 법이 그 아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처지가 다 이러합니다. 하나님은 법에 쓰러져 죽어있는 신부를 살려서 혼인하십니다. 성령이 찾아와서 살게 됩니다. 성령은 사랑을 적용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제는 성령님이 남편입니다. 사랑을 통해서 아내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아내는 이미 죽었던 적이 있던 아내입니다. 전 남편의 법 때문에 죽은 자입니다.
그래서 새 남편은 법으로 아내에게 다가서지는 않습니다. 사랑을 말하면서 다가섭니다. 새삼스럽게 당신의 솜씨와 능력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냥 그대로 있으면 자신이 다가서서 사랑하는 것들을 조목조목 찾아내겠다고 합니다. 그 찾아낸 조목들이 오늘 본문에 길게 나열되어 있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찬미로 가득합니다. 이것은 결코 사랑받는 자가 스스로 보고 있는 안목을 남편이 되풀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받는 자가 어떻게 생각을 하든지 간에 사랑하는 자가 일방적으로 사랑의 이유들을 열거하게 됩니다. 특히 부부관계가 이루어지는 침실이 온통 여름의 푸르름으로 충만하다고 노래하는 것은, 그만큼 사랑의 관계가 풍성하고 좋았다는 말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아직도 우리를 둘러싼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온통 하나님의 사랑으로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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