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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 14-03-12 21: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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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에 내가 이스라엘 족속에게 한 뿔이 솟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로 그들 중에서 입을 열게 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성경에 이스라엘 나오고 그 다음에 한 뿔, 보통 짐승이나 가축들에, 염소 같은 경우에 뿔이 있지 않습니까? 뿔이 솟아난다는 것은 그 몸체에서 유난히도 돋보이게 불쑥 튀어나온 부분을 뿔이라 합니다. 뿔이 솟아나면 인상이 다 그 솟아난 뿔에 집중되게 되겠지요. 그처럼 이스라엘족속에게 한 뿔이 솟아나서 이스라엘 뿔 외의 다른 부분과 그 뿔을 차이 나게 하는 일어나게 하고, “내가 너로 그들 중에서 입을 열게 하리니.” 선지자 에스겔로 하여금 예언을 하게 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상식 밖의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데, 다른 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하는 그 방식이 그냥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면 그것으로 우리가 여호와를 아는 그런 구조로 인간이 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됩니다.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할 때 어떤 분이 오셔서 “내가 바로 여호와야.” 이렇게 하면 우리는 “아, 여호와이십니까? 반갑습니다. 기다렸습니다.” 하면 아주 수월하게 여호와인줄 알겠는데 하나님의 방식은 보통 인간사회의 방식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일반사회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명함 건네면서 “제가 이런 사람입니다.” 하게 되면 그 명함의 글자를 읽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연결시키면 “당신은 이런 사람이군요.” 하면 그 사람이 “이제야 내가 누군지를 아시겠습니까?” “예, 충분히 알지요.” 이렇게 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인데 하나님 스스로가 자기를 드러내는 방식은 보통 인간사회에서 인간들이 자신을 알리는 방식과 다르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다른가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알리는 방법이 하나님이 알아야 될 그 들이 이 땅에서 심하게 멸망하는 그러한 사태가 일어나는 가운데서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알리시는 겁니다. 보통 인간사회에서는 둘 다 정상인이고 둘 다 정신이 온전한 가운데서 한쪽은 자신을 알리고 한쪽은 그걸 알아듣고, 그렇게 될 때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알릴 때는 인간의 이루어지는 모든 것을 망하게 해 놓고 그 망한 상태에서 “너희들은 이제 망했다. 망하면서 기분이 어때?” 기분이 참 더럽겠지요.
“누구야? 누가 날 망하게 했어?” 그럴 때 하나님께서 “내가 망하게 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알게 하는 방식이라는 겁니다. 세상만사가 우리의 뜻대로, 우리의 소원대로, 기대한대로 잘 될 때 하나님이 등장하셔서 “네가 잘 되었지? 그거 다 내가 준 축복이야.” “고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렇게 축복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는데 이제야 만나네요.” 이렇게 우호적인 관계, 분위기가 좋게 무르익은 가운데서 하나님을 안다면 좋겠는데 그런 방식으로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오늘 본문 말씀 같은 것이, 앞에 애굽이 멸망하는 이야기와 더불어서 이스라엘 멸망도 같이 언급하고 있는데요. 출애굽 전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에 보냅니다. 모세를 애굽에 보낼 때 우리가 다 알다시피 모세가 애굽에 내려가서 “애굽 사람이여.” 또는 “애굽의 바로 왕이여, 애굽의 내 백성들이여, 나는 여호와로부터 왔습니다.”라고 말을 끄집어내면 그들이 “그렇지 않아도 기다렸습니다. 대환영합니다. 이렇게 귀한신분이…….”라고 우호적으로 나올 수 있는 환경이냐 하는 겁니다.
우리가 출애굽기를 보게 되면 여호와 이름으로 왔어도 바로왕은 아주 여지없이 조롱하고 모독하고 무시했지요. “여호와가 누군데? 이게 어디서 굴러온 거야? 여호와가 누군데? 어딜 감히 알지도 못하는 신을 언급해서 내 권좌에 도전하는가?” 이렇게 도리어 상대방으로 하여금 화를 돋우게 하는 사태가 일어날 지경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이름으로 어떤 사람에게 나아갔을 때 개인과 개인의 만남이 아니에요. 이쪽에 있는 여호와께 속한 나라와 저쪽 악에 속한, 마귀에 속한 나라의 충돌이요 마찰이요 만남이라는 말이지요.
그 만남이 적과 적의 만남인데 그 가운데서 그들이 대 환영해줄 것이라고 기대한 그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모세도 사실은 안 가려고 했지요. “저 같은 것은 주의 전령의 인품이 못됩니다.”하고 사양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면 가는 것이지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모세가 핑계대기를 “제가 가기는 하겠는데 말 주변이 없어서 주의 일을 잘 못하겠습니다.” 하니까 하나님께서 모세가 핑계 대는 줄을 뻔히 하시면서 “그렇다면 네 형 아론이 말 잘하니 아론과 같이 가서 너는 할 말을 형 아론에게 이야기하면 형 아론이 네 대신 대변자가 되어서 네가 만나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면 된다.” 했고 이렇든 저렇든 어떻게든 하나님께서는 애굽나라에 모세와 아론을 가게 만듭니다.
막상 그들이 갔을 때 모세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애굽나라는 그 때부터 매사가 꼬이기 시작하고 난데없는 열 가지 재앙을 받고 장자까지 죽임을 당하고 온 나라에 자연재해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성경에 “그러니까 나는 여호와잖아. 그러니까 너희들이 여호와인줄 알리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심지어 모세가 건져내려고 하는 그 애굽에 있는 자기백성들 마저도 모세와 아론의 모든 말씀에 대해서 그들은 아주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네가 와서 일이 잘 된 것이 아니고 네가 온 뒤에 우리 사는 것이 더 힘들게 되었다. 우리 사는 것을 힘들게 했으니, 우리는 축복과 행복을 기대했는데 당신들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등장해서 우리가 살기가 더 괴롭게 되고 힘들게 되었기에 하나님이 당신들을 벌하기를 원한다.”라고 구원받아야 될 그 백성마저 모세와 아론에게 등을 돌립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의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우리가 뭘 더 기대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고, 사적으로 갔을 때는 얼마든지 사람들과 원수지지 말고 좋은 것이 좋다고 다정스럽게 웃으면서 그들의 자존심을 높여주면서 사이좋고 평화롭게 오순도순 행복하게 인생살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보내지 않았을 경우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보냈을 경우에는 인간이 걷잡을 수 없는, 자기가 어떻게 처분할 수 없는 돌발사태가 일어나면서 인간세계와 하나님이 보낸 사람 사이에 아주 껄끄러운 관계가 일어날 수밖에 없음을 우리가 각오해야 되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앞서 보낼 때의 경우와 하나님이 직접 스스로 나타났을 경우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장차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나타났을 때 강렬한 반발과 결국에는 십자가에 죽었다는 비극적 사태를 일으키면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밀려서 떠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인간세계에 나타나도 그런 대우를 받거늘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 세상에 나타났을 때도 동일한 현상이 일어날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 되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란 사람과 사람이 서로 좋은 식으로 말을 좋게 하고 우호관계를 다져서 그들을 구원하는 방식으로 인간을 구원하지는 않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네가 죽든지 내가 죽든지 둘 중에 하나가 죽어야 사는, 그래서 성사되고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상당히 뻑뻑한 관계, 협상이나 타협은 일체 허용되지 않고 우호적인 악수를 내민다고 해서 그 악수를 받아주지를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 앞에서 숨겨진 우리의 본색이 여지없이 드러날 때 그 드러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설수도 없고 하나님 앞에서 아주 잔인한 인간이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몹시도 싫어하는 속마음을 지니고 있는 인간으로 노출당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동안 엉뚱한 신을 신이라고 우겼던 허무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면서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런 방식 외에 하나님 아는 방식은 없는 것이라고 우리가 확정을 지읍시다.
그렇다면 “그 날에 내가 이스라엘 족속에게 한 뿔이 솟아나게 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그렇게 껄끄럽고 부자연스럽고 대적적인 원수관계가 일어나면서 만난다고 했는데 여기에 “한 뿔이 솟아나게 한다.”는 이 계획은 잘못된 계획이 아닌가, 이것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는가, 라고 생각하게 되실 거예요. 그래서 이 ‘한 뿔’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쉽게 전체적인 이야기를 먼저 드리고 이 뿔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순서가 이렇게 됩니다. 18절부터 19절을 보게 되면 유다나라가 멸망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체의 의미, 이스라엘의 존재가치가 상실돼요. 없어집니다. 없어지면서 하나님에 대한 예언을 하게 되고 또는 없어지라고 사전에 미리 하나님이 미리 에스겔을 통해서 말씀을 주게 되고, 이스라엘은 없어지는데 이스라엘 망하라는 그 말씀은 살아있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너 죽어야 돼. 너 심판받아야 돼. 너 멸망해야 돼.”라고 하나님이 보내신 종이 이야기할 때 그 이스라엘은 없습니다. 하지만 망해야 된다는 그 에스겔 말씀은 남아 있지요. 이스라엘이 망해야 된다는 그 에스겔 말씀 배후에 누가 있느냐 하면, “그들이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는 말씀이 같이 연결되어 있어요.
따라서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뒤에 비로소 그동안 가려졌던, 그동안 몰랐던 진짜 하나님의 면면들이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뒤에 에스겔 선지자의 말씀대로현실화 되고 구체화되면서 하나님이 나타나는 거예요. 이 사실을 좀더 쉽게 하면 이렇게 보면 됩니다. 지금 여기 이 말씀을 듣는 사람이 유다백성입니다. 유다백성 앞에 에스겔이 나타났어요. 에스겔도 사람이고 유다백성도 사람입니다. 에스겔이라는 사람이 유대백성 사람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바벨론에게 망해야 된다.” 그런 소리 들을 때에 이스라엘, 유다사람들이 말하기를 “너 뭐야? 너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인데 어떻게 같은 인간인데 우리가 모르는 것을 너는 아느냐? 건방지다.”라고 배척할 수도 있고 그 중에 혹시라도 순종할 사람도 있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이것을 이불로 생각합시다. 이불이 있는데 이불의 두 지점을 딱 집어서 이쪽 지점과 다른 쪽 지점으로 합니다. 이쪽 지점은 에스겔이 예언을 하는 지점이고 다른 지점은 에스겔의 예언을 듣는 지점입니다. 둘 사이에 티격태격 할 수 있고 서로 비난하고 또는 모독하고 핍박할 수 있지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불 위에서 일어나는, 같은 수평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이불위에 A와 B라는 두 지점이 마주보고 있는데 이불자체를 쏙 당겨버리면 이불이 당겨지는 그 바닥에 장판이 그대로 노출되겠지요. 그 장판이 바로 여호와께서 진짜로 생각한 진짜 이스라엘이 거기에 나타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불 위에 두 지점을 정해놓고 서로 한 쪽은 예언을 하고 다른 한 쪽은 예언을 듣는데 누가 봐도 이것은 역사라는 안에서, 역사 속에서 너도 하나의 인간이고 네 말을 듣는 우리도 역사속의 한 인간인 거예요. 만약에 동창회에 가서 오랜 만에 만난 동창들에게 목사랍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친구들아! 전에는 그냥 친구였지만 이제는 내가 목사가 되었다. 그러니까 이제 나이 더 들기 전에 내가 전하는 복음을 들어라.”라고 할 때 동창들이 “와, 주의 종이다. 우리가 술 끊고 담배 끊고 이제부터는 교회 나가자.” 동창들이 이렇게 나오겠습니까? ‘직업상 너는 그걸 하고 싶어 하지. 하지만 내 직업은 따로 있다. 너는 네 직업대로 행세하고 나는 내 직업대로 행세한다.’
그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어떤 동창이 있느냐 하면, 부동산 중개하는 동창이 있다면 “어이, 이 목사! 혹시 좋은 홀 하나 나왔는데 싸게 해줄까?”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같은 이불위에서 각자 자기 직업상 자기 전공분야에 맞도록 자기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해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뭐냐, 그게 역사이불에요, 역사이불. 그런데 그 이불을 싹 잡아당기면 거기 있는 두 지점도 같은 지도상 한 이불이기에 이불을 당기면 같이 당겨지는 거예요. 같이 당겨지면서 마주보는 두 지점이 다 같이 치워져버리고 그 이불이 있던 자리에 천국이 나타나고 지옥이 나타나는 거예요.
천국과 지옥은 역사 위에서 서로 마주보는 상태에서는 그것이 전혀 느껴지지를 않습니다. ‘기독교는 이런 가설이 있고 불교는 이런 이론이 있고 천주교는 이런 이론이 있다. 그냥 인간의 여러 이론, 아이디어 중에서 하나야.’ 이렇게 생각할 뿐이지 진짜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고 진짜 하나님이 만드신 지옥이 있고 진짜 하나님이 만드신 천국이 있다는 것은 눈에 사람들이 들어올 때는 그것이 보이지를 않아요.
제가 자주 하는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십자가에서 눈 돌리면 사람만 보인다는 거예요. 세상만 보이고, 다른 말로 하면 역사만 보이는 거예요. “너만 잘났나? 나도 잘났다.” 십자가에서 눈 돌리면 그렇게 돼요. 그래서 저는 십자가를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이런 게 있어요. 주방기구 가운데 이런게 있습니다. 애들 갖고 놀면 위험한데, 재떨이 같은데 재떨이는 아니고 중앙부분이 뾰족하게 원추모양으로 튀어나온 것이 있어요. 그게 오렌지나 과일종류를 갈아버리면 즙이 밑으로 흘러서 모을 수 있도록 하는 주방기구입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역사를 치워버릴 때 역사를 구멍을 내고 찢으면서 역사는 떠나도 영원히 그 자리에 그대로 날카롭게 솟아있는 것이 뭐냐, 십자가에요, 십자가. 십자가, 또는 선지자의 고난 받음, 그것이 바로 뿔입니다, 뿔.
그게 어떻게 해서 뿔이 되느냐 하면, 시편 89편 2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저와 함께 하리니 내 이름을 인하여 그 뿔이 높아지리로다.” 시편 89편이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언약을 줍니다. 하나님이 다윗과 약속을 맺으면서 “네 자손 대에 와서 뿔이 나타날 것이다. 그 자손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다윗 언약의 완성자요 이스라엘의 왕이요 목자로 나타날 때가 되는데 그 때가 내가 준 약속이 마감되면서 완료가 되고 완성이 되는 그 때가 온다.”고 하는 겁니다. 시편 132편 17절에 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거기서 다윗에게 뿔이 나게 할 것이라.”
뿔이 난다는 것은 보통 짐승의 머리 부분에서 뿔이 나잖아요.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망하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망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굉장히 안타까워하고 “내 조국이 떠나는구나.” 했습니다. 아마 이스라엘에 안중근이 있었다면 이토오히로부미는 또 죽었습니다. 내 사랑하는 조국을 일본이 빼앗아갈 때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고민했습니까? ‘이제 역사 속에서 대한민국은 사라진다. 일본이 조선을 먹다니. 그러면 조선은 어디 있는가? 영원히 사라지는구나.’ 해서 안중근 의사는 총 들고 나름대로 몸부림 쳐본 거예요.
예수님께서 잡힐 때 열 두 제자도 동일한 심정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재산 바치고, 재산도 포기하고, 청춘도 포기하고, 삼년동안 직업도 버리고, 예수님이야말로 메시아인줄 알고 하나님이 약속한 그 천국의 메시아, 구세주인줄 알고 믿었는데 그 분이 이 땅에 와서 여러 가지의 뭔가는 메시아인 것 같은 놀라운 기적들도 행했는데 하지만 그 끝은 창대한 것이 아니고 망해버린 거예요. 이 제자들이 깊은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어요. 가룟유다는 너무 큰 충격에 빠져서 예수님을 팔아먹었고. 앞으로 점점 뭔가 좋아지고 나아져야 되는데 예수 믿고 난 뒤에 급격히 절벽으로 떨어져서, 분명히 예수님이 모든 권세를 이기고 이스라엘, 끊어진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 전체를 합하여 진짜 영원한 다윗의 영광, 솔로몬의 영광을 회복하리라고 생각했고 믿었는데 그 거사가 실패로 끝난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구도 알지도 못할, 누구도 못 알아듣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그동안 많은 기적을 보아왔지만 내가 보여줄 이 마지막 기적은 요나의 기적이다.”라고 했습니다. 요나의 기적이란 요나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난 기적이거든요. 지금 제자들이나 예수님에 대해서 행여 도움 받을까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안 망하고 실패 안하고 안 죽고 지금 멀쩡하게 살아 있는 이 상태에서 이것이 더욱 더 잘 살고 더 복된 삶을 기대하면서 예수를 믿었던 겁니다. 이점은 오늘날 한국교회에 2천년 교회역사의 모든 사람들과 예수님의 열 두 제자와 조금도 다른 요소가 없어요. 똑같아요.
예수 믿는데 망하려고 예수 믿고 죽으려고 예수 믿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없어요. 전부 다 예수 믿을 때는 노림수가 있고 뭔가 얻을 것이 있다 싶어서 예수를 믿은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천국 가는 사람을 어떻게 골라내는가 하면, 바로 그런 사람들이 가짜인 것을 들춰내기 위해서 주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망하지 않고 죽지 않고 천국 가는 방식은 여호와 하나님한테는 없어요. 아까 설교 처음부터 이야기했지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만날 수는 없어요. 한쪽이 저쪽을 죽이든지 이쪽이 죽음을 당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둘 중의 하나, 다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데 예수님을 우리가 믿어서 이용하는 순간 예수님은 바로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분이 되고 내가 가장 기피하고 외면하고 싶은 분으로서 등장하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의 어떤 기대감, 나의 이성적인 방법으로서는 예수를 믿을 어떤 방법도 없어요. 오히려 예수를 안 믿기를 원하고 예수를 믿고 싶지 않지요. 구원 받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쪽에서 믿게 하셔서, 그래서 구원받는 겁니다. 믿음이라는 게 딱 등장했을 때 이 믿음이 어디서 나왔느냐, 나에게서 나온 믿음인가, 아니면 이 믿음이 나에게서 안 나오는 믿음이냐, 그걸 따져봐야 되는 거예요. 나에게서 안 나온 믿음이 나를 구원하는 겁니다. 나에게서 나온 믿음 같으면 이것은 가짜 예수, 가짜 삼위일체, 가짜 하나님을 섬기는 것밖에 안돼요.
여호와를 안다고 생각했던 이스라엘인데 진짜 여호와 하나님이 그 나라를 망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가치 자체가 없어요. 이스라엘의 가치라는 것은 “이스라엘은 망해야 마땅해.”라는 그 말씀의 가치와 말씀의 의미만 남아 있습니다. 그 말씀에 따라서 진짜 여호와가 오셔서 그 말씀에 준해서 이제는 이불을 걷어내고 치워버리지요. 이불을 치워내게 되면 내가 잘났나, 네가 잘났나, 그저 눈에 보이는 인간의 역사, 그리고 역사가 조작해낸 엉터리 같은 종교와 교회와 삼위일체하나님, 이런 것들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구원받을 것이라고 여겼던 그 이불 자체가 거두어질 때, 떠나버릴 때……, 찌익, 하고 뭔가 이불이 찢어지는 부분이 있어요.
아까 말한 대로 레몬주스 짤 때의 그 뾰족한 주방기구, 혹은 믹서기에 오렌지 넣고 돌려버리면 오렌지 즙이 되듯이 그렇게 걸려서 찢어지는 그 부분이 바로 십자가에요. 그 십자가 밑에 보니 진짜 다윗 언약에 의해서 구원받아야 될 진짜 이스라엘이 그 바닥에 있는 겁니다. 시편 126편 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땀을 흘리면서 씨를 뿌리는 자가 아니고 눈물을 흘리면서 씨를 뿌리는 거예요. 그 다음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했습니다.
여기서 눈물, 운다는 말은 뭐냐 하면, 그들이 생각했던, 그들이 시도했던 모든 것이 다 실패로 끝내게 해줄 때 비로소 여호와가 어떤 분인지를 비로소 알게 되는 사람이 진짜 이스라엘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내 나름대로의 역사와 내 지평, 내 영역을 넓히고자 하는 그 모든 이불 같은 역사가 거둬지면서 등장하는데 그게 거둬지면서 실패로 끝났을 때 비로소 우리가 너무 자기성공과 자기 삶과 자기행복과 축복에 몰두하다 보니까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것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밑에 있는 천국과 위에 역사와 예리하게 연결되는 그 십자가라는 것, 하나님께서 기적, 기적, 많은 기적을 행했지만 요나의 기적, 십자가 외에는 다른 기적 준 적 없거든요, 모든 기적은 십자가로서 모든 것이 연결되고 십자가애ㅔ서 나온 기적들입니다, 그 십자가와 딱 걸려서 찌익, 하고 소리가 나면서 내 영혼과 육체가 다 찢어질 때 찢어진 내가 아까워서가 아니라 나를 찢어내시는 그 능력, 십자가 피로서 내 영혼과 육체를 다 찢어버릴 때 그 능력 뒤따라서 천국이 연결되어 있다는 그 말입니다. 거기에 여호와 진짜 하나님이 계신 거예요.
그러니까 이 에스겔의 존재의미는 남들 보기에 우리하고 다 똑같은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보냈다는 점에서, 여호와가 누군지를 알리기 위해서 보냈다는 점에서 에스겔의 위치는 우리와 있는 동일한 이불의 위치가 아니고 에스겔은 그 시대부터 이미 십자가 위해서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얕은 바다에 있을 때에 두 사람의 친구가 그 바닷물 위에 서서 이야기하는데 갑자기 물이 쏵 빠질 때, 자기는 물에 휩쓸려서 움푹 내려갔는데 친구는 물 빠지기 전에는 몰랐는데 물이 빠져보니 뾰족한 돌 위에 서 있었어요. 돌 위에 있으니까 물이 빠져도 돌은 끄떡도 안하니까 돌 위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엘리야, 예레미야, 소위 성경에 나오는 많은 신앙의 선조들은 십자가 영이죠, 십자가 영위에서 그들은 외쳤던 겁니다. 이사야, 예레미야도 마찬가지고.
그러면 이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켜 봅시다. 오늘날 우리가 남들 보기에는 다 같은 이 세상, 하나밖에 없는 이 세상, 자본주의 세상, 똑같이 하루 세끼 먹고, 똑같은 얼굴을 하고, 같은 옷을 입고, 그냥 일상생활 고만고만하게 특별한 것이 없이 그저 그런 사람인줄 알았는데 십자가의 영 성령을 받은 그 사람은 옛날 에스겔처럼 십자가 위에서 세상을 보고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 말씀을 전달하는 겁니다. 그리고 전합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들을 하나 꾀어서 교회에 들어오게 하는 수작이 아니라 여호와가 누군지를 알리기 위해서, 왜 여호와가 십자가에 죽어야 되는지를 알리기 위해서 나는 지금 십자가라는 단단한 반석에서, 돌 위에서 이야기를 한다.” 할 때에 환란과 핍박과 곤고, 세상 어떤 일이 와도, 말레이시아 비행기가 어디론가 떨어지더라도, 북한이 핵폭탄을 가지고 어떻게 하더라도, 의료대란 파업을 하더라도, 그러한 파도가 치고 물결이 치더라도 십자가의 눈 위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외치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통해서 내가 잘되는 것이 아니고 그저 여호와 하나님, 참된 하나님이 누구신가만 드러낸다면 그것이 바로 에스겔의 삶이고 오늘날 같이 성령 받은 성도의 삶이 되는 겁니다.
망해도 괜찮은 삶, 세상에 불 심판 유황불이 떨어져도 상관없는 삶, 그것은 자기가 얼마나 잘난 존재인가, 내가 얼마나 믿음 좋은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 다시 말해서 왜 하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는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오늘도 존재하고 움직이는 그런 사람, 그런 사람만이 썰물처럼 이불을 확 들춰내도 비로소 온전하게 드러나는 진짜 하나님의 성도, 천국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통해서 역사가 거두어지고 그 밑에 깔려 있는 진짜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보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진 민족이요 하나님의 약속대로 성취했기에 비로소 나타나는 백성인 것을 바로 그들과 우리가 한 형제인 것을, 같은 운명이고 같은 입장인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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