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망하는 애굽(겔30;1-3)이근호140319

아빠와 함께 2014. 3. 21. 18:36

망하는 애굽(에스겔 3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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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3-19 21:20 
망하는 애굽 

2014년 3월 19일                     본문 말씀: 에스겔 30:1-3

(30: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30:2) 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이르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통곡하며 이르기를 슬프다 이 날이여 하라

(30:3) 그 날이 가까웠도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도다 구름의 날일 것이요 열국의 때이리로다

애굽 제국의 멸망이 때에 관한 에스겔 예언의 말씀입니다. 애굽에게 슬픔의 날이 온다는 겁니다. 사람이 슬플 때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을 수 없는 경우를 말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더 살고 있고, 더 살기 위해 나름대로 애쓰고 게획한 바가 있는데 그것이 원활하지 않을 때 우리는 슬퍼집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자식보고 “너 미워!”라고 하면 자식은 가출을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이 가정에서 자신이 더 존재할 가치를 찾지를 못하고 배척받는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칭찬을 받으면, 자신의 존재할 정당성이 보장받았기에 기뻐합니다. 이처럼 인간에게 있어 슬퍼거나 기쁘거나 모두 자기 존재 정당성과 연관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애굽에게 슬픔의 날이 온다는 것은 애굽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애굽 나라가 망한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일반적인 인간 사회에는 ‘망한다’는 말은 일단 그 사업은 좋지 않아서 접지만 다른 사업을 할 수는 있는 것처럼 인식될 수 있는 말입니다.

이는 현재 자신의 일은 실패했지만 자기 존재만큼은 아직도 건재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 인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애굽 나라보고 ‘망한다, 멸망한다’는 말씀은, 망함이 먼저고 그 다음의 그들의 활동이라는 겁니다. 즉 애굽 나라는 망하기 위해서 출현한 나라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에 속한 선지자 에스겔이 애굽이라는 나라의 망함을 거론하는 것은, 바로 이 이스라엘이라는 약속된 나라가 애굽의 속에서만 분리되어서 나와야 될 나라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애굽이 없는 상태에서는 이스라엘도 없습니다. 애굽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서 하나님의 개입으로 기적적으로 이스라엘이 그 속에서 만들어져 밖으로 분리되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스라엘, 즉 천국 백성 만드는 작업의 일관된 원칙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애굽의 전제성을 제쳐놓고 자신이 그냥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 천국 백성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입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 되기에는 선행 절차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바로 애굽입니다. 애굽의 속성과 애굽의 운명을 함께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즉 어떤 인간이 이스라엘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애굽을 선택할 것인가를 놓고 저울질 할 수 있는 제 3의 지역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적이 없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없습니다. 애굽 뿐입니다. 애굽 뿐인 세상에서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늘 새롭게 탄생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분리시킬 때 어떤 기준을 적용시킵니까? 창세기 15:13-16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고 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이스라엘의 약속의 땅 점령은 어떤 상황이 숙성되어져야 하는데 그 상황이란 다름이 아닌, ‘아모리 족속이 멸망당해야 마땅한 정도로 죄악이 숙성되는 상황’입니다.

이 말은 곧 아모리 족속을 대체하여 가나안 땅을 접수한 아브라함 후손의 나라는, 아모리 족속이 도저히 가질 수 없는 ‘하나님의 의’를 지녀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아비, 본토 집에서 부르기 전에는 아브라함과 아모리 족속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서 ‘하나님의 의’가 주어지는 순간, 벌써 아모리 족속은 그 ‘하나님의 의’가 없다는 이유 때문에 멸망당해야 하는 겁니다. 이 말은 곧 , 아모리 족속은 자신들의 생계나 존재보다 ‘필히 악해야 됨’이라는 속성이 먼저입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보여줄 하나님의 의는 아브라함의 행함보다 더 선재해서 아무런 행함도 없이 의로워야 하기에 의로운 존재가 되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 일대기에는 ‘하나님의 의’의 근거가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여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이삭의 죽음과 살아남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4대 손으로서 국가 형태로 나타날 이스라엘 나라도 애굽 나라와 차별되는 근거를 갖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어린양의 피’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행함으로 생긴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으로 생긴 의입니다. 애굽 나라 자체에서는 미미할 정도로 움직임을 보인 히브리인들이 결국 국가 형식으로 애굽의 손아귀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의 있음과 의 없음의 차이 때문입니다. 애굽의 존재가 먼저이고 그들이 죄를 지어서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악이 먼저이고 그 악을 위하여 애굽은 이스라엘과 구별되는 나라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에스겔 시점에서 신약으로 넘어가서 모든 인간 나라들이 다 애굽나라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자체적으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보통 인간 사회에서는 망하면 다른 장소에서 또 사업을 시작할 기회를 갖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망하게 하시는 나라는 근원적으로 죄악된 나라이기에 그 어디에도 다 망함이 적용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망하는 애굽이 갈아 타야 될 새로운 장소가 새롭게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그 날’이 제시됩니다. 공간이 아니라 시간입니다. 이 날은 멸망의 날이요 어두운 날입니다. (욜 1:15/2:30/ 암 5:18) 하나님께서 종말 때 합한 새로운 이스라엘을 끄집어내기 위해 모든 공간을 다 애굽으로 만들어놓고, 하나님의 의가 없다는 이유로 멸망케 하십니다.

그렇다면 신약 때 하나님의 의는 어디서 주입되며 어떻게 이스라엘이 만들어지는 겁니까? 요한복음 12:31-32에 보면,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하나님 의 되시는 분이 땅에서 들린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사람을 자신이 있는 세계로 이끄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에스겔이 예언한 바로 ‘그 날’의 내용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적인 성공이 구원의 원칙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만 만족하는 것이 구원의 이스라엘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4-03-20 16:55 
82강-에스겔 30장 1절-3절(망하는 애굽)140319-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30장 1절-3절입니다. 구약성경 1196페이지입니다.



에스겔 30:1-3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이르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통곡하며 이르기를 슬프다 이 날이여 하라 그 날이 가까왔도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도다 구름의 날일 것이요 열국의 때이리로다.”



사람은 두 가지 요소로서 생각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살아가는 땅에서 생산물이 나와서 그 곡식가지고 밥 먹고 삽니다.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슬프다” 슬퍼해야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슬퍼해야 된다. 평소 인간들의 삶 속에서 사람이 슬플 경우는 딱 두 가지 밖에 없지요. 자기 땅에서 생산물이 나지 않을 때, 이 땅에서 사는데 지장 있을 때 사람은 그것만을 슬퍼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뭐냐, 이 땅덩어리 여기서 나를 살려주면 기쁘고 못 살면 슬프고.



사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 땅과 더불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어떤 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2절에 보면 “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이르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통곡하며 이르기를” 그 다음에 “슬프다 이 날이여”라고 되어 있거든요. 슬픈데 양식이 없어서, 곡식이 없어서 슬픈 것이 아니고 “이 날이여” 어떤 특정 시간이 오는데 그 시간이 슬퍼해야 될 날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이 슬퍼해야 될 슬픔의 날이 찾아오는데 누구보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4절에 “애굽에 칼이 임할 것이라 애굽에서 살륙 당한 자들이 엎드러질 때에.”라고 해서 애굽나라의 멸망에 관한 이야기가 그 뒤에 죽 나옵니다.



9절에 보면 “애굽의 재앙의 날과 같이 그들에게도 심한 근심이 있으리라.” 8절에 보면 “내가 애굽에 불을 일으키며” 애굽나라가 멸망하는 것에 대해서 애굽나라에게 이야기하기를 “너희들은 이제 슬픔의 날”이라고 한 겁니다. 슬플 경우가 어떤 경우인가 하면 이런 경우입니다. 이것은 따지고 보면 간단한 문제인데요, 그 이유를 평소에 놓치고 있기 때문에 제가 언급을 하는 겁니다. 사람이 슬픈 이유는 뭐냐 하면, 자기 정당성이 보장받지 못할 때 슬퍼요. 자기 딴에는 뭔가 잘 했는데 자기 뜻대로 잘 안될대 슬프잖아요.



기도를 했는데 기도 응답이 없을 때 슬픕니다. 자기가 애를 쓰면서 뭔가 기대를 했는데, 자기 뜻대로 될 것을 기대했는데 자기 뜻대로 안 될 때 슬프지요. 그것은 뭐냐 하면, 내 뜻대로 내가 애썼다, 혹은 내가 기도했다, 그 속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자기 정당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지금 정당합니다. 하나님이 저를 건드리시면 저는 참 곤란합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 매 맞고 벌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왜, 나는 정당하니까. 내가 여기 살아간다는 것은 분명히 살 권리가 있고 그럴 자격이 저한테 있다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말로서 표현했지만 사실은 우리가 아침에 눈만 뜨면 잠재되어 있어요. 이게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오늘도 열심히 살아야지. 왜, 나는 살 가치가 있으니까. 난 이 땅에서 살 이유가 있으니까. 어떤 사람이 벌을 받으면 아주 고소하다. 나는 그만큼 나쁜 짓을 안했으니까. 나에게 벌이나 심판이나 징계 같은 것이 있을 이유가 없지. 왜, 나는 정당하니까.’ 그 점을 먼저 염두에 두고 2절을 다시 봅시다. 애굽 사람들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너희는 통곡하며 이르기를 슬프다 이 날이여 하라.” 그 말이죠.



그래서 제가 이야기한 것과 이 본문과 연결시켜버리면 “그날에 너희 애굽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이 세상 다른 나라 사람은 다 망해도 우리 애굽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왜, 우리 애굽나라는 정당하니까. 우리는 우리 스스로 보기에도 바르게 사니까.’ 라고 자부했는데 ‘아, 이게 아니구나.’라고 슬퍼해야 될 날이 온다.”고 하는 거예요. 자신의 정당성이 하등의 근거가 없다는 것이 다 들통 나는 그 날이 온다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슬픈 이유는 내가 잘난 존재라는 것을 일어난 일로 증명하고 싶은데 내 뜻대로 안되니까 그것이 슬픈 것이 아니고 ‘나한테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은 내가 정당하지 못하고 살 이유도 없고 가치도 없단 말인가?’ 그런 식으로 내가 노출되니까 그것이 슬픈 거예요.



자기 자신이 살 가치도 없다는 것으로 판정 받을까봐, 그렇게 몰아세울까봐 그것이 슬픈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보면 됩니다. 자기가 계속 살아 있으면, 살 가치가 있다고 보면 기쁘고 “너는 이제 살 가치도 없어.” 이런 소리를 들으면 슬픈 거예요. 부모가 자식보고 “너는 나가 죽어라” 하면 자식이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아이구, 내 새끼야! 오래오래 살아라.” 얼마나 기쁩니까? 슬프다, 기쁘다, 할 경우에는 항상 그 깊은 바닥에 내려가게 되면 ‘누가 뭐래도 나는 계속 살아 있어야 될 권리가 있어.’ 이걸 자꾸 확인받으면 기쁘고 ‘아무래도 난 더 살 이유도 없어. 하나님께서 날 안 살려주는 것 같아. 나보고 빨리 죽으라고 하는 모양이다. 넌 살 가이도 없어.’ 이럴 경우에, 하나님 뿐만 아니고 주변에서도 그렇게 몰아세울때는 우리가 참 슬프지요.



그것은 흔히 말해서 그 집안에서 사랑받지 못하면 가출한다는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엄마 나 밉지?” “밉다.” “나 가출할거야.” 이게 무슨 뜻입니까? 내가 이 집안에서 더 이상 살 정당성과 가치가 없다는 것이 엄마 입에서 확인되었으니까 나는 이제 따로 내 정당성을 챙기기 위해서 나가겠다는 겁니다. 슬픔과 정당성을 연결시키는 그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 에스겔 30장의 예언이 애굽이라는 나라를 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애굽이라는 나라, 지금은 이집트죠. 그 나라가 옛날 지나간 그 나라를 우리가 다시 생각할 이유가 뭐가 있겠느냐, 하는데 애굽이라는 나라에서 이스라엘이 나왔습니다.



이스라엘을 다시 원위치로 집어넣으면 애굽속에 있어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애굽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이스라엘이 거기서 나왔어요. 누가 나오게 했는가? 애굽 따로 이스라엘 따로 분리시키는 그 작업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보이는 형식으로 개입을 했다 이 말이지요. 우리가 하나님 보고 싶지요. 하나님이 언제 느껴지느냐 하면, 애굽과 이스라엘을 뽑아낼 때, 분리시킬 때 그것이 일관된, 지금도 반복되는 하나님의 일관된 작업이요 손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막연하게 생각하지 마시고요, 이 성경대로 하나님이 움직인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성경대로 한다는게 뭐냐, 이스라엘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고 애굽이라는 것이 먼저 선행되고 그 애굽에서 희한하게, 다 같은 애굽사람인데 희한하게 이스라엘이 분리되어 나올 때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사람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안 되고 하나님의 개입이 있을 경우에만 이스라엘과 애굽으로 떨어져 나오는 겁니다. 흔히 교회 좀 오래 다녔다고 해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면, 맨날 하는 소리는, 내가 돈이 없었는데 돈을 벌고 아픈데 병이 낫고, 자꾸 그렇게 하는데 그렇게 하지 마시고 ‘나는 하나님이 개입하고 난 뒤에 무엇이 애굽인지 무엇이 이스라엘인지 알게 되었다.’ 해야 제대로 하나님의 개입과 하나님의 작용을 부여받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관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작업이 신약에도 그대로 되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의 진짜 능력을 받은 사람은 ‘아하, 이것이 애굽이나. 이것이 이스라엘이구나.’ 구분할 줄 아는 안목, 시선이 하나님의 영으로서 발생이 됩니다. 그럴 때 성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성신을 받은 에스겔이 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에스겔처럼 우리가 그러한 믿음을 가진다면, 우리가 에스겔이 애굽을 언급했고 에스겔이 이스라엘을 언급했다면, 우리도 같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 맞는다면 이 시대에서, 내가 부자 되었느니 병이 나았느니 그런 것 하지 말고 무엇이 이스라엘이며 무엇이 애굽인지를 구분할 줄 알아야 된다는 거지요.



그러면 그 애굽이 어쨌다는 말인가? 2절 끝에 보면 “슬프다 이 날이여.” 해서 애굽이 망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부터 이야기가 복잡해지니 약간 긴장을 해야 되겠지요? 애굽나라 망하는데 “애굽나라 망한다고 누가 이야기하더냐?”라고 물으시면 “에스겔의 예언 속에 들어 있다고 이야기 하세요.” “에스겔, 네가 뭐야.”라고 하거든 “여호와 하나님이 보냈다고 이야기하면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해서 말하기를 애굽이 망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방금 이야기하기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풀려나는 것이기 때문에 애굽을 언급하는 일 없이 이스라엘을 언급할 수는 없습니다.



이쪽은 망했는데 그 애굽을 망하게 하신 하나님에 의해서만 그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로 분리될 수 있고 만들어질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한쪽은 망해야 되는 거예요. 그것까지는 이해하는데 어려운 것이 없다 싶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뭐가 어려운가 하면, 3절에 보면 “그 날이 가까왔도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도다 구름의 날일 것이요 열국의 때이리로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 3절은 너무너무 어려워요. 그래서 지금 당장은 이 3절을 설명하기가 곤란합니다. 그 전에 애굽과 이스라엘먼저 말씀드리고 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망한다고 했을 때 망한다는 말은 어떤 경우냐 하면, 사업이 망한다든지 이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개인적으로 사업을 하다 망했다, 이발소 하다가 망했다, 사진관 하다가 망했다, 그러면 다른 직업을 가지면 되는 겁니다. 일상적으로 인간세계에서 망한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에요. 이발소 하다가 망하면 미장원하면 되고 미장원 하다가 망하면 다른 일을 하면 돼요. 그런데 하나님에 의해서 망했다는 것은 그냥 망해버리는 것으로 끝나버리면 이스라엘이라는 것이 규명되지 않습니다.



왜 망했나, 그걸 봐야 돼요. 애굽 나라가 왜 망했냐는 겁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창세기 15장 16절을 읽겠습니다.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 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대목이 무슨 대목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는 대목입니다. 언약이라 하는 것은 미래까지 다 보장되는 약속이죠. 미래까지 모든 시나리오가 구축되는 것을 언약이라 합니다. 아브라함도 언약 맺을 때, 네 자손이 4대만에 이 약속의 땅에 오는데 지금은 아니고 4대만에 와야 돼요.



그들이 애굽 땅에 가서 4대만에 돌아와야 되는데 왜 그 4대라는 기간이 필요하냐 하면 4절에 보니까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진짜 중요한 지점에 왔습니다.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관영치 아니했다는 이 말은 그 약속의 땅에 아모리 족속이 죄악으로 인하여 망할 그 때는 아직 안 되었다는 거예요. 창세기 15장에서는. 그렇다면 생각해 보세요. 그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 아브라함 자손은 죄가 없어야 됩니다.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애굽이 망했다는 것으로 끝나면 안되고 애굽이 왜 망했느냐를 규명해야 돼요.



애굽이 왜 망했는가를 규명을 해야 애굽에서 안 망하고 분리된 나라가 이스라엘이어야 하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나는 이스라엘이다.’라고 자꾸 우기면 안돼요. 어떤 사람은 “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맞습니다. 지금 마지막 때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어디서 나오기는? 난 하나님 믿고 예수 믿어요. 그러면 난 이스라엘이죠.” 이러면 성경과 관계없다니까요? 그것은 자기의 구원받고자 하는 열망이고 욕심에 불과한 거예요. 탐욕이라는 말이지요. 욕구불만, 구원에 대한 욕구불만에 해당된다는 말이지요.



항상 욕구불만 주의해야 돼요. 남들 교회 가서 천국 간다 하니까 욕구불만 되면 자기도 교회 가서 손드는 식으로 할 수 있거든요. 이것은 개인이 직접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이고 우리는 지금 성경 안에 들어가야 돼요. 왜냐, 성경 안에는 지금 에스겔의 예언이 기다리고 있거든요. 에스겔의 예언에 들어가지도 않고 ‘나는 예수 믿고 구원 받는다.’라고 한다고 해서 그것은 구원받은 것이 아니지요. 자꾸만 제가 성경보시라, 하는 이유가 모든 사람이 욕구불만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남 잘되는 꼴 못 봐요. 남 잘되면 자기도 잘하고 싶어서. 성경을 경유하고 성경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일의 일관성 속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냥 한주 교회 나와 놓고는 구원 받았다고 주장해 버리면, 남한테 지기는 싫고, 구원은 받고 싶고, 흉내는 내고, 구원 받았다고 우기고 싶고……, 살 것도 없으면서 거름지고 시장가는 격이 된다는 그 말이지요.



그러지 말고 성경 속에 들어가면 성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가 이발소에서 말끔하게 나오면 이발소 들어갈 때는 머리 깎일 요량을 하고 들어가야지 이발소 문만 열고 ‘여기가 이발소군.’ 하고 다시 그냥 나와 버리면 자기 긴 머리카락은 그대로 있잖아요. 홀랑 깎여야지요. 성경을 바깥에서 보면 안 되고 성경 속으로 들어가면 홀라당 구원욕구불만, 예수 믿고 천당 가야지, 하는 이런 욕심들 에스겔한테 걸려서 홀라당 다 깨야 돼요. 그건 다 폼 내는 것이고 연출하는 거거든요. 그것은 위선이거든요. 성경 속에 들어가서 홀라당 다 깎여야 되는데.



괜히 이발소에 가면 거기가 이발하는 곳인 줄 잘 알고 있으면서 이발은 안하고 이발소를 뱅뱅 돌고만 있어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스라엘은 애굽 안에 있습니다. 애굽을 주물럭거리면 거기서 뭔가 톡, 하고 튀어나왔네요. 보니까 거기 이스라엘이 나왔지 애굽 속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이스라엘 구경도 못해요. 이스라엘 체험이 안 됩니다. 애굽 속에 있어야 이스라엘 체험이 되거든요. 그러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 안하고 ‘가만 있자. 이것은 이스라엘이고 이것은 애굽이고, 난 이스라엘 할래.’ 자기자리는? 그러면 자기 자리는 무슨 자리인데요? 제 삼의 지역이 없습니다. 일단 애굽에 들어가야, 애굽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톡, 하고 튀어나와야 그게 이스라엘이라는 말이지요. 지금도 마찬가지거든요.



‘애굽? 음, 이스라엘? 음, 애굽은 망했다면서? 그러면 애굽은 싫어. 어, 이스라엘은 구원받는구나. 그럼 난 이스라엘 할래.’라고 지목할 수 있는 자기 고유의 자리는 우리한테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그게 바로 욕구불만이라는 말이지요. 허락한 적이 없어요, 그런 자리를. 에스겔을 만납시다. 그리고 에스겔한테 애굽이 어떻게 망했는지 이야기를 들읍시다. 그 망한 이유가 뭐냐 하면, 이발소가 망하면 다른 거 하면 되지만 하나님께서 애굽을 망하게 한 이유는 그냥 큰 나라 망해라, 가 아니라 죄 때문에 망하는 거예요. 죄 때문에 망하는데 죄 때문에 망하는 그 원리가 어디서 나왔느냐를 설명하기 위해서 창세기 15장 16절부터 시작해서 설명해 드리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가 참 어렵지만 들어주세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올 때는 아모리 자손은 죄짓거나 안 짓거나 상관없이 그냥 잘 살고 있어요. 그 사람들 잘 살고 있다고요. 괜히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 있는 우상 만드는 아저씨 불러다가 “야, 너 일가친척 다 떠나.”라고 호출한 그 순간부터 아무 상관도 없는 아모리 족속은 망하도록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이게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세상에 직업이 많아요. 국회의원, 군인, 농사짓는 사람, 교사, 고기 잡는 사람도 있는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지 않으면 다 괜찮은 사람들이고 만나보면 다 점잖은 이웃이고 서로 떡 돌리고 다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정이 넘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고부터 저들은 지옥 간다니까요. 인간 대 인간으로 딱 깨놓고 말해서 나쁜 사람 없어요. 잘해준 만큼 정을 내 놓을 줄 아는 이게 인간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못돼먹어도, 사형수라도 잘해주면 고맙다는 소리는 할 줄 알아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면에서 개나 돼지보다 훨씬 나아요. 하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왔다는 게 문제가 된다니까요. 심판주가. 심판 주만 빼버리면 교회는 절이 되는 겁니다. 절이 되고 친목단체가 되고 문화센터가 되고. 교회를 문화센터로 만들어보세요. 지금도 교회를 문화센터로 만들면 사람들 많이 와요.



그런데 예수님이 문화센터 하려고 이 땅에 왔습니까? 문화센터 하는데 십자가 지시기까지 오버액션할 것 없잖아요. 문화센터니까. 돈 있는 사람들 돈 좀 내서 없는 사람들 도와주자, 여기서 십자가 피를 왜 흘려요? 십자가 피를. 강도가 구원 받을 때 “야, 천국가면 문화 활동 할 수 있으니 주여, 주의 나라에서 저를 기억하소서.”라고 했습니까? 성경의 하나님의 일관성은 뭐냐 하면, 언약이고 그 언약 안에서 비로소 우리가 몰랐던 죄가 거론되는 거예요. 죄가 거론되는 이유가……, 결론부터 미리 말씀드릴게요.



세상 전부가 망해야 된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세상 전부가 애굽이라는 겁니다. 에스겔 당시에는 애굽 따로 망해요. 그리고 이스라엘은 망하지만 나중에 뭔가 다시 나라가 될 가능성이 있어요. 하지만 신약시대에 오게 되면 인간 모든 나라가 애굽이 되어버리며 이스라엘은 어디에도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보고 “난 애굽 싫어. 이스라엘 선택할래.” 할 우리 자리가 없다니까요. 그렇게 선택하겠다는 그 경향성 자체가 애굽적인, 악마적인 경향성, 바로 죄악 된 경향성을 나타내는 겁니다. 나는 애굽은 싫고 이스라엘 되어서 천국갈래, 그 사고방식 자체가 애굽이라니까요. 지금 그걸 설명해 드리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4대만에 이스라엘이 이 땅으로 돌아오는데 아직 아모리족속의 죄악이 관영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언제 되느냐,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숙성될 그 때 아브라함자손은 애굽에서 나와서 많은 숫자의 자손들이 하늘의 별처럼 번식을 해줘야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모리 족속이 죄악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서 망한다면 그 아모리 족속이 살던 그 땅에 대신 들어가야 될 민족은 죄가 없고 의의 나라가 돼야 돼요. 하나님의 의, 의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요.



아까 한 이야기 다시 해 봅시다. 이 세상에서 망한다는 것은 사업하다가 망할 수도 있고 농사짓다가 망할 수도 있거든요. 망하면 다른 것을 하면 돼요. 이 세상에서는 내가 먼저고 내가 인생 살다보니 망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망하는 것이 먼저고 왜 망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야 되는 겁니다. 이 점이 어렵다니까요? 세상에서는 사업하다가 망하면 다른 것을 하면 돼요. 그러나 하나님 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기를 “너는 망해.”라는 말은 “너는 원래 네 자리를 찾아가게 되어 있어.” 그런 뜻이에요.



‘에이, 망하면 다른 것 찾아서 하면 되지.’ 다른 것을 하기를 허락하는 그런 망함이 아니고 완벽한 망함, 철저한 망함이 되는 겁니다. 왜 자꾸 에스겔서에서 망한다는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사람이라 하는 것은 “에이, 하다하다 안되면 죽지.” 그렇게 하거든요. 사람은 죽는 것이 끝이라고 보는 거예요. 죽는 것이 끝이 아니고 에스겔에 의하면 망하는 것이 끝이에요. 그게 참 어려운 이야기에요. 망해야 되기 때문에 죽어야 되는 겁니다. 사람은 무슨 일이 좀 안되면 ‘연탄불이라도 피워놓고 죽으면 그만이지.’ 죽으면 그만이 아닙니다. 죽고 난 뒤에 망해야 될 절차가 또 남아 있어요.



그 망해야 될 절차를 애굽이라는 나라가 대표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불러냈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와 똑같아요. 그냥 땅이 있었고 그 땅이 옥토이고 곡식이나 잘 열리는 땅 같으면 만족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그런 인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생존의 문제가지고 축복한 것이 아니고 네가 의롭게 된다는 거예요. “의롭게 된다.” 아브라함은 어디에 써먹을 의인지도 몰라요. “내가 착한데? 이 정도 하면 성실한 편인데. 그 의가 뭐 그리 중요한데? 나는 의보다는 내가 밥 먹고 사는 옥토, 곡식 잘되는 것, 생존에 필요한 축복을 주시면 나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몸 바쳐 바르게 살겠습니다.” 하거든요.



하나님은 지금 아브라함이 바르게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 속에 미리 하나님이 창세전에 예정한 하나님의 의를 삽입시켜 놓는다니까요. 아브라함에게 의를 삽입시켜 놓으면 이것이 아브라함의 행위 같으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의로우면 그 아브라함이 죽어버리면 그 의도 끝나버려요. 그런데 그 의는 지금 아모리 족속을 쫒아내기 위해서는, 이게 4대까지 계속 이어져 나가야 될 의가 되려면, 아브라함 개인의 행동과 관계없이 후손에서 다음 후손에게 그 의가 전수되고 전달되어야 될 속성의 의가 마련돼야 돼요. 어디서부터? 아브라함 때부터.



아까 제가 말씀드리기를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라 하는데 죽으면 그만이 아닙니다. 제가 주일 낮에도 이야기했잖아요. 사람이 죽고 나면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이것은 참 기가 찰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종교의 문제, 기독교나 천주교냐의 문제가 아니고 이것은 운명이고 현실이에요. 실제상황입니다. 기독교 가져서 뭐 할 거고 교회 나와서 뭐 할 겁니까? 지금 교회 나오고 안 나오고 그 문제가 아니에요. 교회 안 나와도 주의 음성 듣고 나와도 주의 음성 듣는 거예요. 우린 지금 현실을 이야기하지 교회를 어떻게 해 봅시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종교생활 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일관성 있게 어떻게 하느냐에 관한 문제거든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의를 받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의 의가 어디서 생기느냐, 그 의가 나오는 근거와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이삭이었습니다.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믿는 것은 오늘날 이 시대에서 예수님을 죽였다가 다시 살아난 그것을 믿는 믿음과 동일한 믿음이라고 해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린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보기를 원했고 보고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갖고 있어요. 예수님에 의해서 우리 자신은 의를 만드는 장소로 활용되어야 됩니다. 만 피가 그냥 부엌에 있으면 아무 가치가 없어요. 만두피에 속이 들어갈 때 비로소 하나의 만두로서 작품이 되잖아요. 우리는 그 만두피로서 그 속을 채워주시는 것은 누구 소관이냐 하면 바로 언약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소관으로 우리에게 채워주는 겁니다. 우리는 그냥 만두껍데기만 제공했을 뿐이고 그 안에 들어가는 속, 김치하고 돼지고기 다진 것, 부추 넣는 것, 이 모든 것은 주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거예요.



세상에 인간이 아모리 족속이 죄 지었으면 우리는 죄 안 졌습니까? 따라서 아모리 족속의 죄를 진짜 망해야 될 민족으로 규정할 수 있는 기준은 ‘너보다 내가 착하다.’ 하는 나의 행함에서 나온 의 말고 예수님이 주신 의만이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은 죄악이고 지옥가도 마땅하다, 지옥을 천 번 가도 그것은 할 말이 없다고 규정할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아브라함은 세상 어떤 것도 부러워하지 않고 주님이 찾아오신 그것만 해도 감사, 황송무지로소이다, 하고 감사할 뿐이에요. 그게 이스라엘이에요. 그게 바로 이스라엘.



따라서 죽었는데 하나님이 개입 안했으면 살수 없었다는 그 환경을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서 알았고 아브라함의 4대손들은 애굽이라는 나라를 통해서, 어린양의 죽음,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 바름으로 그것을 확인하게 된 겁니다. 이게 무슨 종교입니까? 이게 무슨 교리에요? 실제상황인데. 십자가 옆에 있는 강도는 십자가가 실제 상황입니다. 소설이 아니에요. ‘내가 지금 소설을 쓰고 있지.’ 소설이 아니에요. 강도 옆에 있는 주님은 진짜 자기 옆에서 죽고 피 흘리고 있고 자기도 강도되어서 죽고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는 소리를 실제로 들었고, 그래서 낙원에 실제로 갔고, 이게 무슨 종교입니까?



누구 농락할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꾸며낸 이야기로 남을 현혹시키는, 그런 조작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성경이야기가 무슨 조작입니까? 사람 하나 더 꾀이려는 조작입니까? 그럴 필요 없거든요. 어쨌든 아브라함의 약속대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여기서부터 하나 더 어려운 것을 해야 됩니다. 본문 3절에 “그날이 가까웠도다.”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노리는 것이 뭐냐 하면, 약속의 땅에서 쫓겨났잖아요. 약속의 땅에서 쫓겨났으면 다시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을 거예요.



왜냐하면 아까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사람이 땅 없이는 못삽니다. 만약에 집 주인이 와서 나가라고 하면 어디로 갑니까? 갈 데가 없잖아요. 그래서 사나 죽으나 사람들은 땅 위에서 사는 거예요. 공간 문제입니다. 애굽이 망했으면 애굽땅을 이스라엘에게 주든지 해야 되거든요. 옛날 구약 때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애굽, 애굽이라는 공간, 생활터전에서 나와서 광야라는 그 실제공간을 통해서 약속의 땅, 실제 아모리인들이 거주하던 땅에 들어갔다는 말이지요. 구약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구약 끄트머리에 와 있어요.



그 끄트머리에서 “너희들이 어디에 산다.”가 아니라 ‘그 날’입니다. 공간이 아니고 시간이라는 말이지요. 제가 어렵다, 어렵다 한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어떤 공간에 가게 될까, 어떤 지역을 차지하게 될까, 이게 아니고 그 날이 온다는 거예요. 어떤 시간이에요. 우리는 공간을 기다렸는데, 내가 살 어떤 터전을 기다렸는데 어떤 시간, 그날이 온다는 거예요. 요엘서 1장 15절에 보면 그날은 멸망의 날입니다. 요엘서 2장 31절에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라고 되어 있어요. 32절에는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것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인데 요엘서 2장에 벌써 예언되어 있습니다. 아모스 5장 18절에도 나와 있어요. 5장 18절에 보면 “화 있을찐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다시 말해서 그 날이 오게 되면 이 지구상 어디고 살 곳이 없다는 거예요. 안 살아도 된다는 겁니다. “살지 맙시다.” 그날이 오게 되면. 다시 말씀드립니다. 지금 에스겔이 “애굽이 망한다.” 하거든요. 우리가 아는 일상에서 망한다는 것은 이쪽에서 망하면, 대구에서 망하면 서울 가서 장사하면 되고 서울에서 망하면 부산으로 내려가면 되거든요. 왜냐하면 땅이 있어야 사니까.



그런데 성경에서는 애굽이 망한다고 해놓고 그 망하는 날이 어떤 날이냐 하면, 여호와가 나타나는 날인데 그 망하는 날은 애굽이 다른데서 사는 것이 아니고 아예 인간이 이 지구상에 살 곳이 없게 하는 그 날이 온다는 거예요. 남극이고 북극이고 미국이고 호주고 우크라이나고 크림반도고 어디에서도 살 수 없는 그 날이 온다는 겁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방금 제가 한 이야기를 12장에서 이상스럽고 신기하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요한복음 12장 31절에 보면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이 지구상에 땅 없이 사는 그 날이 온다는 거예요. 그날이 어떤 날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땅에서 들리는 그날이 온다는 겁니다. 그날이 오면 진짜 이스라엘은 바로 애굽같은 이 세상에서 따로 뽑혀 나와서 천국에 집합한다는 겁니다.



그날이 그 날이에요. 예수 믿고 병 낫고, 예수 믿고 사업 잘되고, 지금 그런 이야기는 에스겔에 의하면 “지금 무슨 소리 하고 있나?” 하는 거예요. 애굽에서 출세해서 몇 년 더 살아야겠다, 그게 축복이냐는 말입니다. 여기 살다가 다른데서 살고 또 이 사업에서 다른 사업으로 옮기는 것이 축복이냐는 말이지요. 그게 제대로 하나님의 개입이냐 그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이 개입해버리면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든 이 땅은 우리가 영원히 살 땅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가 있는 그곳, 하나님의 의를 주신 그곳, 예수님이 가 계신 그곳이 비로소 우리가 살 곳이지 현재 이 땅 어느 곳이라도 우리가 살 곳이 아니라는 겁니다. 바로 “그 날을 기다리라. 그날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애굽부터 조진다.” 하는 겁니다. 강대국 애굽, 애굽을 조짐으로서 애굽 안에 있는 이스라엘, 이제는 옛날처럼 그런 이스라엘을 생각하지 말고 애굽의 개념이 확대되면서 확대된 개념에서 나온 새로운 이스라엘을 생각해야 되는데 그것은 장차 오실 그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날, 이 땅에 꽂히는 날,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 날, 그 사건들이 이루어지는 그 때, 종말이 오게 되면 에스겔 예언대로 하늘나라의 새로운 이스라엘, 천국을 만들어내는 그것이 바로 에스겔이 예언한 바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저 제 한 몸 잘되면 축복이라 생각하는데 그게 축복이 아니라 세상이 무엇이며 주님이 누구시며 왜 세상은 다 망해야 되는지 왜 불 심판 되어야 되는지를 깨닫는 축복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