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진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태어나는가(박윤진)

아빠와 함께 2013. 1. 27. 21:01

인간은 태어날 때 부터 죽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마치 인간이 살아있는 것처럼 보여지는 것은 인간을 가지고 놀고 있는 죄의 움직임 때문입니다. 여기 손수건이 있습니다. 손수건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손수건이 놓여져 있는 바닥 자체가 흔들린다면 이에 따라 손수건도 움직이게 됩니다. 그렇다고 손수건을 살아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놓여져 있는 죄의 바닥은 욕망의 움직임에 따라 꿈틀꿈들 움직이게 되는데 그 움직임의 최종 도착지는 죽음입니다. 결국 인간은 욕망에 따라 죄 위에서 출렁거리다가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죽은 존재였음을 확인하게 되는 하찮은 존재일 뿐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확장하거나 제어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닌 것입니다.

하지만 죄는 본질이 죽음인 인간을 평생 속입니다. 살아있기에 계속 살아남으라고 말입니다. 이왕 존재하는 것 영생하라고 부추깁니다. 이 때 등장하는 것이 신, 즉 우상입니다. 오직 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하는 절대자! 이 때부터 인간은 자신이 만든 신과 황홀한 연극에 빠져듭니다. 신과 경쟁하다가 부탁하고, 원망하다가 찬양하고 충성을 맹셍하다가 배신하면서 자신의 욕망과 권태로움을 유감없이 분출합니다.

결국 인간에게 어떤 희망을 걸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쪽에서 어떤 조치를 해 주시지 않으면 인간 쪽에서는 그저 죄를 드러내기만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성경을 보고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쪽에서 먼저 어떤 조치를 해 주셨다. 그러니까 이제 인간이 그 하나님의 배려에 반응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빛(진리, 말씀)이 하나일지라도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권리, 자격)이 오직 죄인에게만 있다고 하면 그 해석의 결과물은 각 죄인의 욕망에 의해 소화된 배설물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세계에 말씀(빛)이 존재하는 방법은 육신의 세계를 해체시키는 방법뿐입니다. 육신의 세계에 그 본질인 죽음을 통보하는 방식으로만 말씀의 세계는 임재합니다. 이미 죽음의 세계에 갇혀 있음이 바로 요한복음 1장의 어두움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어두움은 줄곧 깨닫지 못하고 세상은 참빛을 알지 못하고 빛의 자기 백성들은 그를 영접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 때, 빛이 자신을 증거하는 방식, 영접하는 방식, 믿는 방식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어두움에 의해 증거되는 빛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어둠의 배설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빛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 뿐이며, 이러한 관계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태어나게 됩니까?

빛이 어둠에게 자신의 빛됨을 스스로 증거하기 위해서는 자신 속에 있는 생명과 어둠의 실체인 죽음을 모두 지배하고 있음을 한꺼번에 보여줘야 하는데 이것을 성경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될 때, 빛이 어둠이 될 때, 창조주가 피조물이 될 때, 사실상 하나님의 죽음 안에서만 비로소 육신, 어두움, 피조물이 말씀, 빛, 창조주를 한번이나마 취급할 수 있게 되고 , 그 취급하는 태도를 보면 육신의 세계의 실체를 공개할 수 있게 됩니다.

육신의 실체가 공개되면 비로소 이 세상에 자생적인 하나님의 자녀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하나님의 자녀가 태어났다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인 것입니다.

자, 이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어떻게 취급했는지만 보면 되겠지요? 어떻게 취급했습니까? 그 때 등장하는 증거물이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 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을 우리는 살인자 처럼 취급하였습니다. 세상에 살려두어서는 안될 위험한 인물로 취급함으로써 어두움의 실체인 죽음을 아주 잘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말씀세계의 생명을 잘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는 그렇게 죽음과 생명을 동시에 보여주는 장치로써 원수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자녀를 출산하는 긍휼의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인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는 결코 태어날 수 없다고 하신 요한복음의 말씀이 십자가 위에서 그대로 성취됨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십자가 위에서만 태어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죽음을 통하여서만 태어납니다.

 김성환 (IP:114.♡.231.144) 09-11-08 18:30 
글 잘 읽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될 때, 빛이 어둠이 될 때, 창조주가 피조물이 될 때, 사실상 하나님의 죽음 안에서만 비로소 육신, 어두움, 피조물이 말씀, 빛, 창조주를 한번이나마 취급할 수 있게 되고 , 그 취급하는 태도를 보면 육신의 세계의 실체를 공개할 수 있게 됩니다."(인용된 부분)

이 인용된 부분을 박윤진님이 재차 설명 부탁해요^^
말씀(진리)은 그리스도 예수자신을 두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요14:6), '빛이 어둠이 되고,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고' 등등이 어떻게 설명가능한지요?  
요한복음1장에 따르면 참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어둠)에 생명의 빛으로 오신 것이 아닌지요?
님의 말씀처럼 '빛이 어둠이 될때'는 존재론적인 교체의 뉘앙스으로 다가옵니다.
그냥 만물의 주관하시는 주님이 하늘의 위치에서 세상(어둠)으로'자리바꿈'이 아닐까요?
(정확하지 않지만...)
'될 때'란 말은 'A'란 대상이 'B'란 대상으로 완전히 교체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이해력이 부족해서...)
또한 다른 예로써 '창조주가 피조물이 될 때'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는 만물의 창조주이시고 근원이신데(골1:16-17) 어떻게 창조주가 피조물로 되는지요?
그냥 창조주이신 그리스도께서 피조물의 자리로 잠시 낮아지심(출생과 죽음)이 아닌지요?(빌2:6-8)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비록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지만 '창조주가 피조물이 될 때'란 님의 말처럼 창조주이신 주님이 피조물로서 존재론적인 '될 때'란 의미가 아닌듯합니다(개인적 생각).
다시 반복되는 말이지만...
예수님의 태어나심(낮아지심)은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잠시 빌렸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혈과 육의 관계를 통해서 출생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성령으로 출생했다는 말은 이 세상의 육이란 것을 동원해서 얻어내는 방식이 아닌 즉 피조물이 창조된 방식이 아닌 '스스로의 낮아지심'이죠.
피조물의 창조방식은 타인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지만 만물의 창조주이신 주님은 스스로 존재하시고 스스로 만족하시기 때문에 타인의 도움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출생방식도 육의 방식의 아닌 영의 방식으로 즉 스스로 존재하시는 주님께서 타인의 도움을 필요치 않고 당신 스스로의 능력으로 자기 백성을 십자가의 죽음의 자리으로 몰고가서 육을 죽이고 영(주님의 자녀)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는 것이죠.
비록 주님 자신이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으나 피조물로 '될 때'가 아닌 악마에 묶여있는 피조물의 자리로 낮아지신 것으로 이해됩니다.
 박윤진 (IP:122.♡.62.8) 09-11-08 19:16 
요한복음 1: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The Word became flesh)"부분을 요한복음 1장 3절, 5절과 대응하여 적은 것입니다.
 박윤진 (IP:122.♡.62.8) 09-11-08 19:43 
혹 김성환의 논리가 '하나님--->예수님(잠시 낮아지심, 자리바꿈)--->하나님'이라면 저는 그 견해에 반대합니다. 저는 '십자가 지신 예수님--->십자가 지신 예수님--->십자가 지신 예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존재론적인 교체 정도가 아니라,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강구만 (IP:118.♡.241.91) 09-11-08 21:49 
히2:10,11,14,17, 4:15, 요6:38  아들이신 예수님이 아버지와 관계성에서 보여주신 사건이 죽기까지 순종하신 십자가이고 이분이 죄인의 구주가 되신다고 했을때 존재론적인 하나님이 아닌 오히려 고난으로 온전케 하신 분,십자가 죽음 안에서만 만나는 분을 하나님께로 난 자, 그 이름을 믿는 자의 하나님이 되게 하셨습니다,(요20:27~28) 이 모든날 마지막에 '아들로 말씀하신'그 하나님이십니다.
 김성환 (IP:114.♡.231.144) 09-11-09 00:14 
네, 답변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이름을 갖고 즉 예수란 이름으로 이 땅에 육신의 모양으로 오신 것과 인간이 태어난 후 자신의 이름을 갖는 것과는 천지차이만큼이나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층이 다르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예수란 이름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은 이사야서 말씀처럼(사9:6) 기묘자와 모사와 영존하신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러나 혈육의 방식으로 태어난 인간은 죄악중에 출생하는 전적인 죄인이기 때문에 피조물로서만 존재해야 하고요(시51:5).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그러니까 '피조물'이란 단어 자체의 개념으로만 파악된다면 즉 '창조주'가 '피조물'이 될 때란 말은 어딘가 모르게 낯설어 보입니다.
설사 '말씀이 육신이 되어(...became(=was made)...)일지라도 성자 하나님이 예수란 이름으로 인격화되는 것과 죄악으로 출생한 피조물과의 비교는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성자 하나님은 창세 전에 피조물로서 존재한 것이 아닌 성부 하나님과 영광안에 스스로 계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요17:5)
(요 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주님이 비록 인간으로 출생하시고 인간들의 죄로 인해 십자가에 죽으셨음에도 그분은 '피조물'인 인간들의 층과 다른 묵시세계의 인자로 영존하시는 주님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질문하는 본인도 복음을 알아가고 있는중임^^)
그리고 한 가지 더 질문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십자가 지신 예수님->십자가 지신 예수님'이란 순서는 어떤 근거로 말씀하시는지요?
부탁드립니다^^
 유상준 (IP:121.♡.254.22) 09-11-09 02:28 
진지한 대화 중에 끼여든것 같아 죄송합니다.
저도 배우는 중이라 관심이 넘쳐서^^

첫째 아담은 피조물 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둘째 아담도 피조물과 동등한 위치에 있어야 게임이 시작 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공의가 증거 될 것입니다.(죄 사함의 당위성)

우리와 똑같은 육체와 정과 욕심이 있으나, 흙으로 만든 첫째 아담과 다르게,
약속으로(성령으로) 난자의 죄 없으심과, 아버지에 대한 온전한 순종으로,
성령의 인도 하심을 따라 부활 하실 때,(아버지의 뜻.계획)
우리를 구원 하실 수 있는 맏아들이 되는 것 아닐까요.

만약 예수님이 완벽하게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죄만 없으시고)
자신에게 잠재된 특별한 신의 능력으로 부활 하셨다면
그럴 수 없는 우리에게는 절망이요
지금까지의 복음은 아버지와 아들의 사기극(죄송)
이라고 생각 됩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 하기 위하여는 완벽하게 우리와 같음 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다른 것은 오직 죄있는 피와 죄없는 피 의 차이뿐.
 
33세 십자가에 못 박힌 인간 청년이 하나님 이었기에
 (개인적 견해로는 십자가의 다이루심으로
당신이 기묘자,모사,영존하신아버지임을 증거 하시고 승리 하셨다)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 복음이 되는 것이라 생각 됩니다.

두서없이 제 생각을 올렸습니다.
저의 견해에 잘못된점 가르침 바랍니다.
김성환님 질문 하셔서 저도 덩달아 배우게 된 것 감사 드립니다.
박윤진님 저도 “십자가 지신 예수님” 설명 부탁 드립니다.
 강구만 (IP:118.♡.241.91) 09-11-09 08:42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 즉 마귀의 자식 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력으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구약에서 할례를 행한 것이나 출애굽시에 어린양의 피를 발라 그 집의 장자를 하나님의 소유로 삼아 넘어 간 것과 같이 예수님의 피로사신 그 관계, 아들의 형상을 본받은자,아들의 영을 받은 자,곧 소유가  된 그리스도안에서(약속의 피가 없으면 아들이 아님) 우리는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됩니다.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긍휼이 낳은 양자입니다. 피(십자가)를 벗어나서 알 수있는 하나님은 없다는 말입니다. 처음부터 십자가 지신 예수님밖에 없습니다.독자적 인간(죄인)의 하나님은 모두 가짜 입니다.
 박윤진 (IP:210.♡.130.40) 09-11-09 13:02 
김성환의 논리의 전제조건은 이렇습니다.
(아래는 김성환님의 글에서 인용)
- 성자 하나님(A)이 예수란 이름으로 인격화되는 것(B)
- 하나님(A)이 인간의 이름을 갖고 즉 예수란 이름으로 이 땅에 육신의 모양으로 오신 것(B)

위 두 문장은 같은 뜻입니다. 같은 뜻이 여러 번 등장한다는 의미는 김성환님이 위 전제조건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전제조건에 대해 제가 질문드립니다. 제 질문이 귀하의 질문에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첫 번째 질문)
A를 ‘십자가 지신 예수 밖에서’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두 번재 질문)
김성환님께서는 다음 중 어떤 것을 예수님으로 알고 계신지요?

① A만 예수님이다.
② B만 예수님이다.
③ A+B가 예수님이다.
 김성환 (IP:121.♡.27.162) 09-11-09 20:14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는지...일상생활속에 살다보니 댓글을 달 시간이 나지 않네요^^
우선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기 전에 본인은 복음의 초보이기 때문에 늘 배움이 필요합니다^^

그럼 '십자가 지신 예수님'에 대해 언급하겠습니다.
신약 이후 그리스도의 몸인 성도라면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을 십자가에 지신 예수님안에서만 알고 믿게 됨(성령이 오심으로)에 조금도 이의가 없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 이후 성도의 말씀 지킴(행함)도 아무런 의미도 소용도 없을 뿐더러 절대 지킬 수 없는 불가능영역이고요^^

누구님의 댓글처럼 '피를 벗어나서 알 수 있는 하나님은 없다'는 말에도 동의합니다.
그런 하나님은 세상이나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이 찾아나서는 이방신들이겠죠!

결국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주님)안에서만 모든 진리(성경)가 해석되어진다는 것에 다른 이의가 없습니다.

(고전 2:2, 개역)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럼, 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보겠습니다(제가 알고 있는 범위안에서만요^^).

(첫번째 질문)의 대답: 상기의 언급 된 것과 같이 '십자가 자신 예수 밖에서'는 하나님, 예수님자신, 성령님의 존재증명이 불가능합니다.

만약 십자가 밖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해석 한다면 우리의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겠죠^^

(두 번째 질문)의 대답: 정답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성자 하나님(A)을 예수란 이름으로 인격화된 분(B)으로 나누어서 해석하는 자체가 그리스도 예수를 온전히 계시될 수 있을까요?

저는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다음의 입장에서 설명해보겠습니다(수정이 필요하겠지만요^^).

창세전에 성부 하나님과 영광 중에 계셨던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과 약속하셨던 내용대로 성령님의 주도하에 이 땅에 예수님이란 이름으로 인격화되어 죄악 세상에 빛으로 그리고 육신(죄가 전혀 없으신 몸)으로 오셔서 자기 백성의 죄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주님의 원래 자리인 하나님 보좌우편으로 승귀하신 후 지금도 앞으로 영원히 당신의 이름으로 세상(죄인)을 심판하시고  택한 자기 백성에게만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 그리스도(주님)란 것입니다.

그래서 님의 ‘십자가 지신 예수님->십자가 지신 예수님->십자가 지신 예수님’란 도식은 너무 비약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영원 안에 품고 계셨던 마지막 완성품이라고 할까요? 물론 영원안에서도 하나님의 완전한 작품(십자가)이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로 드러날 때 죄인의 눈에 밝히 보이는 하나님의 완성품으로 말입니다.

이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드러난 계시인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영원 안에 당신의 스스로의 능력으로 계셨던 성자 하나님께 너무 비약적으로 덧붙인 것이 아닌지요?(물론 계시로 드러난 마지막 사건을 통해서 본다면 성자 하나님의 이름과 그 속성과 역할을 알 수 있지만...) 

그리고 이와 더불어 ‘창조주가 피조물이 될 때’란 표현도 ‘말씀이 육신이 될 때’란 코드에 맞추신 것이 아닌지 생각을 했고요. 그래서 적절치 않는 표현이라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개인의견). 만일 그 표현을 굳이 사용하신다면 죄인(인간들)과 의인(예수님)을 먼저 구분(가령 죄인인 ‘피조물’과 인자이신 주님의 몸의 비교랄까요?

그리고 성자 하나님(A)과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여받은(출생되기 전에 보냄받은 천사로부터) 그리스도(B)를 합해야(+)만 예수님이다란 공식은 제가 미쳐 접하지 못한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복음안에서 배워나가야 할 부분이겠죠^^)

짧은 소견이지만 (+)합이란 구조보다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의 약속을 좇아 예수란 이름을 지니고 그리스도(주님)로 이 땅에 약속(언약)의 내용물을 자기 백성에게 발산시키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성자 하나님을 육신의 모양으로 오신 예수님과 더해서 혹은 나누어서 해석불가능하다는 것이죠!

님에 대한 제 질문의 요지 앞에서도 재차 언급했지만 '창조주가 피조물이 될 때'란 부분입니다.
이 부분을 독자가 읽을 때 독자입장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까요?
예수님(창조주)도 우리 피조물처럼 죄악의 몸으로 잉태하셨나?
그러니까 '창조주가 피조물이 될 때'라고 말할 때 과정상의 설명을 덧붙여야 하지 않을까요?

성자 하나님은 즉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으로(성령의 능력) 이 땅에 오셨는데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 태중에서부터 죄악으로 태어나는 것과 다른 방식(성령의 능력)이기에 주님과 구별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요일 4:2, 개역)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마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윤진님은 어떤 개념에서 ‘창조주가 피조물이 될 때’로 언급했는지 한 번 듣고 싶습니다^^.
(반복되는 부분이 있지만...이 마지막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이 나오지 않아서 어떤 의미에서 언급하셨는지 설명 부탁합니다.)
 박윤진 (IP:122.♡.62.8) 09-11-09 21:20 
답변감사합니다.

김성환님의 표현 중에
'이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드러난 계시인 십자가 지신 예수님(A)을 영원 안에 당신의 스스로의 능력으로 계셨던 성자 하나님(B)께 너무 비약적으로 덧붙인 것이 아닌지요'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앞서 제가 인용했던 부분과 같은 부분입니다.
도대체 죄인이 십자가 지신 예수님 안(A)이 아니고서 어떻게 스스로의 능력으로 계셨던 성자 하나님(B)을 추론해냈는지 궁금합니다. 죄인이라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 안에서 성자 하나님을 추론하는 것이라면 그 추론이 십자가 앞에서 뭉개져야 하는데(저의 경우에는 그렇습니다.) 귀하의 글을 읽으면 성자 하나님과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분리해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 스스로 계신 성자 하나님을 밝히는 도구 정도로 이해하고 계신 듯 합니다.

제가 드렸던 첫번째 질문에 A와 B를 분리하여 예수님이 분리될 수 없다고 하셨는데, 그 분리될 수 없는 예수님은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 안에서만 발견되므로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마지막의 계시로만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자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알려주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은 수단이 아닙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야 비로서 육신이 말씀에 대한 태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게 우리의 먹이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창조주가 피조물이 될 때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말씀드렸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라는 부분을 요한복음 1장 3, 5절에 대응하여 적은 것입니다. 창조주가 마치 피조물처럼 피조물에 의해 만져지고 때릴 수 있고 부서지고 죽었을 때 비로소 피조물은 자신이 피조물로 취급했던 창조주를 살해한 자로 드러날 수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가 창조주의 자리를 버리지 않았다면 피조물과의 완전한 단절은 해소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런 창조주와 피조물의 간격이 육체 내에서 해결된 유일한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지요. 

히브리서의 말씀이 제가 적은 것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하심이라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리라(히 2:14-18)

죄인의 괴수이기에 십자가 예수 안을 벗어나 다른 성자 하나님을 추론할 수 없다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지신 예수--->십자가 지신 예수---> 십자가 지신 예수'라는 도식을 언급한 것이구요.
 박윤진 (IP:210.♡.130.40) 09-11-10 09:00 
정리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인간들이 설정해 놓은 창조주는 이러 저러하다는 개념과 피조물은 이러 저러하다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에다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대입하여 질문합니다.

예수님이 피조물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창조주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창조주이면서 피조물입니다. 이게 존재론적으로 말이됩니까?
말이 됩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엄연히 존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1장에 동원된 빛, 어둠, 말씀, 육신이라는 말들은 기존에 있던 용어들이 아닙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안에서 사도요한이 성령에 의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 행적들을 쭈욱 설명하기 위해서 새롭게 동원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빛과 창조주의 개념이 옳다는 전제하에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그 빛과 창조주 맞다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보니 그 분이 바로 빛이고 창조주라고 쓴 것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었습니다.라고 할 때, 그럼 예수님이 피조물이란 말입니까?라고 질문하시면
저는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었는데 그 피조물이 당신이 알고 있는 그 개념의 피조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었다고 하면 피조물안에 창조주가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기존의 창조주는 이렇다, 피조물이 저렇다라고 설명할려니까 예수님을 창조주라고 하신 다른 말씀들과 충돌이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는 이렇다, 피조물이 저렇다가 아니라, 예수님은 이러이러 하셨다라는 증언 차원에서 동원된 말씀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어, 빛이 어둠이 되어라고 표현된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안에서 그 분을 증언하기 위해 동원된 빛, 어둠, 창조주, 피조물이라는 용어를 기존의 개념에 포섭할려고 하면 안되고 기존의 개념은 모두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엄연히 실존하시기 때문에 그 분을 증언하려는 개념은 예수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지,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개념에 엄연히 실존하신 분을 짜맞추는 것은 죄란 말입니다.
 박윤진 (IP:210.♡.130.40) 09-11-10 09:44 
그럼 이렇게 말을 바꾸어 보죠. 아마 제가 이렇게 쓰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가 아니라, 말씀이 육신"처럼" 되어
혹은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어가 아니라, 창조주가 피조물"처럼" 되어
라고 표현했다면 문제가 없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육신이셨습니다. 완전한 피조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서 말씀처럼 완전히 형제들과 범사에 동일하셨습니다. 육신처럼, 피조물처럼 그러니까 유사 육신이나 유사 피조물의 모양이라고 하면 안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한 창조주 맞지않습니까? 맞습니다!!!
바로 이렇게 십자가 지신 예수님 안에서 설명이 뭉개져야 합니다. 벽에 부딪혀야 합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안에서 설명되어 지지 않는 그 분에게 늘 '주여 뉘시옵니까?' 되물을 수 밖에 없어야 합니다.

우리의 언어는 엄연히 실존하고 존재하고 계신, 그러므로 존재론적으로 전혀 문제되지 않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용도로 재정립되고 다시 무너져야 합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십자가 지신 예수---> 십자가 지신 예수'는 이러한 의미도 있습니다.
 김성환 (IP:119.♡.19.218) 09-11-10 09:51 
여러댓글로 답변 감사합니다^^
제가 궁금한 점이 있어서 질문과 답변형식으로 진행되기에 이곳보다 '질문/답변' 게시판으로 가서 저의 의문점을 질문하겠습니다^^
 이상규 (IP:121.♡.211.204) 09-11-10 19:17 
귀한 글 잘읽었습니다.
글내용에 아멘 입니다.

그러나,10일 9;00시에 쓴글중에 끝부분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엄연히 존재하시기 때문에
그분을 증언하려는 개념은 그분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지
이미 알고있는 개념에 엄연히 실존하신 분을 짜 맞추려는 것은 ;죄:란 말입니다."
라는 내용 중 죄라는 표현 입니다.

잘못되었다라는 표현은 좋지만" 짜 맞추려는 것" 죄라는 표현은 읽는 분들에게오해의 소지가있습니다
그렇게 되면"예수안에서 그분을 증언하는행위 개념은" 죄가아니라는 말이 될수도 있습니다.

물론 다음글(09;44)에
"우리의 언어는 엄연히 실존하고 존재하고 계신, 그러므로 존재적으로 전혀 문제되지 않으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용도로 재정립되고 다시 :무너져야 합니다:."
라는 글을 보면 박윤진님에대한 오해는 없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유사복음도 진화되고 업그레이드 되어서
복음을 이야기 하면서,
십자가에주님을 만난 것처럼 흉내를 내면서
행함으로 구원 과  받을 수 없음
피 만으로 구원 받았음
우리의 모든 행위는 죄 뿐임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
주님이 하셨습니다.(은혜)등을 고백하면서도
그것이 죄인줄 모르고 복음아는나,죄인인나,등을 등을 드러내는 자들이 더러 있읍니다.
나는들어 가고(죄인됨 고백) 그자리에 피의 공로만 남아 있어야 하는데요.

십자가 앞에서
피만으로 구원 받았다는 고백도 내 육에서 나온 것은 죄 뿐임을 고백 할 수 밖에 없고

십자가 앞에서는
죽게 되었습니다. 망하게 되었습니다.는 고백만 나오고

주님의 죽으심앞에서는
구목사님 표현대로 깨갱 소리만 나오고
저는 별명이 돼지였으니 꽥 한소리만 나옵니다.

십자가 앞에서 죽었습니다. 고백밖에 나올 수없는데,
복음 지식을 자기자랑으로 알고 교회 만들기 하는 도구로 만드는 자들이
대구에도 여러명 있고 또,
많은 사람들이 이에 미혹되고 있어서 글을 올립니다.

제 의견은 "예수안이든 예수 밖이든" 우리에게나오는 모든행위는 죄뿐이고
피의공로 외에는 아무것도 섞어서는 안됨을 이야기 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좀 별나지요 요즈음. 복음아는것도 자기것으로 챙겨서
    자기 드러내는데 쓰는 사람이많아서요.피앞에서,모~두
 죽은 자인데...)








그러나 요즈음 대구를 비롯한 일부 지역에 몇몇은
마치
 박윤진 (IP:210.♡.130.40) 09-11-11 12:41 
제 글은 모두 유사복음 맞습니다. 그리고 저도 복음아는것도 자기것으로 챙겨서 자기 드러내는데 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혹 누가압니까? 주님이 이 유사복음에 당신의 귀한 피 발라주셔서 택한 백성 찾는데 사용하실지.......
 이상규 (IP:121.♡.211.204) 09-11-11 13:15 
아멘,
저에게서 나오는 모든것도 이단 입니다.
그래서,피공로만 바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