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과 같은 2가지 조건의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첫 번째 조건은 남자, 45세, 백정, 1400년대 한반도 거주, 두번째 조건은 여자, 18세, 음악가, 2009년 영국 거주....
이 때, 첫번째 조건의 남자를 '나'라고 하고 두번째 조건의 여자를 '너'라고 부릅시다. 이제 나와 너가 만나서 진리를 이야기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진리에 대해서 두 사람의 견해가 일치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는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기에 진리라고 불러도 무방하다는 것이지요. 막연하게 사람과 사람사이에 소통이 일어나고 서로 양해되고 이해되었다면, 그것과 놀아주고 있는 주체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어떤 것은 진리로 둔갑합니다. 인간은 진리를 탐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이제 이들의 손에 성경을 들려주고 읽도록 합시다. 그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하도록 합시다. 그럼, 나와 너의 견해가 일치할 수 있을까요? 이제부터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나도 너도 아닌 예수가 진리를 독점하는 현상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고 만질수도 없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던 그 진리. 나한테 유리하거나 최소한 불리하지 않으면 진리라고 해도 크게 문제되지 않았지만 그 진리가 어떤 한 사람이라는 것은 아주 많이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 의해 자신이 판단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쪽에 있다고 생각했던 선악 판단의 능력, 가능성, 권리를 모두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중요한 자신의 삶의 정당한 근거를 송두리째 어떤 사람에게 내주어야 할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나보고 악하고, 악하니 죽어야 마땅하다고 판결하면 어쩝니까?
그래서 인간들은 예수님를 너의 일부분으로 취급합니다. 소통을 시도합니다. 너도 율법은 알고 있지? 너도 하나님 정도는 알지? 너도 인간들이 얼마나 노력하는지 보았지? 그 인간들 안에 사랑, 믿음, 소망을 목격했지? 너도 재물을 많이 가지고 싶지? 너도 많은 사람들로 부터 존경받고 싶지? 너도 왕이 되고 싶지? 너도 죽기는 싫지?
그렇다면 우리와 말이 통하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리를 함께 나눌 수 있겠네. 그러니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이 인간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을 가로막는 것은 아니지? 나도 진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있는 것이지? 너를 인정한다면 말이야! 백번 양보해서 너가 나를 도와준다면 말이야!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소통을 거부하셨습니다. 지금 이런 협상을 제기하는 상대방을 너라고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이 진리이기에 지금 진리와 협상을 하려는 존재를 마귀라고 하셨습니다. 그 안에 가득한 것은 오직 탐심과 살인과 음란이라고 하셨습니다. 독사의 새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도 율법도 모세도 전혀 모르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둠이라고 하셨습니다. 지옥이 합당하다고 하셨습니다. 모두 불태워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사람들에게 남은 패는 이것 뿐입니다. 나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주장하는 그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공란이 되어버린 그 문장의 주어자리에 지금 만져지는 고기 덩어리인 '나'를 살짝 끼어 넣은 것입니다. 그래 놓고는 마치 자신이 그 참된 나를 잘 믿고 따르고 순종하는 종이라고 자처하면서, 나는 성화되어 가는 작은 예수요, 항상 기뻐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면서 범사에 감사하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이런 나를 성령이 때에 따라 돕는다고 합니다.
이렇듯 나와 너를 살아있다고 전제하고 그들이 성경을 읽고 해석을 하여 진리 속에 나를 집어 넣는다면, 진리는 남자와 여자, 45세와 18세, 백정과 음악가, 1400년대 한반도 거주와 2009년 영국 거주 사이에서 갈귀갈귀 찢기고 또 찢길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해석한 진리가 튀어나오고, 너가 해석한 진리가 등장하게 됩니다. 진리가 소유한 사람의 조건에 따라 각색되어 집니다. 진리는 나 또는 너의 배설물이 되고 맙니다. 예수는 그렇게 죄인들의 배 속에서 소화되는 것입니다.
이제 진리 대신 자신을 진리라고 소개하신 예수님을 넣어봅시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넣어봅시다. 나와 너에게 뺨 맞고, 침 뱉음을 당하고 개처럼 끌려다니다가 십자가에서 빨개벗겨진 채로 물과 피를 토해내면서 짐승처럼 죽어간 하나님의 아들을 대입해 봅시다. 그가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이제 다시 사신 예수의 세계입니다. 다시 살아나셔서 진리가 결정한 어느 날, 진리가 정한 방법으로, 진리가 뚜벅뚜벅 나와 너에게 다가갑니다. 진리가 갑자기 주머니에서 십자가를 꺼냅니다. 그리고는 나와 너의 머리를 후려 칩니다. 나와 너는 모두 죽었습니다. 나와 너가 모두 죽으면 진리는 여전히 우뚝 남아있습니다. 진리는 각색되지 않습니다. 진리는 진리외의 것을 모두 죽이고 진리만이 살아 찬란하게 빛납니다.
나와 너를 살아있다고 전제한 후 진리를 이해하는 것(A)과 진리가 살아있고 나와 너가 죽은 후 진리가 해석하는 것(B) 중 진리다운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늘 A의 유혹에 빠집니다. 나를 제발 제거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진리 편이라고, 빛의 자녀라고 하면서 3박자 축복으로 좀 잘 부탁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B는 흔들림이 없습니다.
진리는 나, 너 그리고 진리처럼 열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진리, 너의 진리처럼 소유되는 것도 아닙니다. 진리는 그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포할 뿐입니다. 거칠 것이 없고 못 뚫을 것이 없고 눈치 볼 필요도 없이 바람처럼 임의로 행동하며 그 선택에 후회나 실수가 없고 누군가의 관심도 협조도 필요없습니다. 진리는 진리외에 것에 의해 판단받지 않습니다. 판단할 뿐입니다.
그래서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며,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한 그 성경은 아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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