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4장부터 15장을 천천히 읽어 보면 예수님께서는 사랑과 계명지키기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말씀하고 계심을 알수 있습니다. 나를 사랑한다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가 내 계명을 지키는 자가 나를 사랑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결국에는 내 계명이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단정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태도가 저에게는 영 마땅치가 않습니다. 사랑하는 것과 계명 지키기는 어딘가 모르게 좀 다르다는 것이 저의 불편한 심기의 이유였습니다. 예를 들면, 저는 제 부모님을 사랑하지만 부모님께서 정해놓으신 어떤 계명이나 명령이나 당부 등을 모두 순종하지는 않습니다. 나아가 어떤 경우에는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진정 부모님을 사랑하는 길이라고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반대로 부모님의 말씀을 듣기는 듣지만 그 마음은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과는 아주 거리가 먼 괘씸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랑과 계명준수를 분리해야만 할 것 같은데 예수님은 아주 동일한 하나의 실체를 두고 말씀하시는 것 같으니 마땅치 않은 것이죠.
그럼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랑과 계명준수를 보는 관점이 왜 주님과 제가 다를까요? 그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불순종이지요. 창조주의 은혜를 배신하고 내 나름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안에서 신처럼 살아남겠다는 불순종입니다. 그래서 죄인은 나름의 신을 창조해 내는데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우상의 본질을 성경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
즉, 하나님을 위하여가 아닌 인간, 나를 위하여 만들어낸 신이 바로 우상입니다. 나를 위하여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사랑해도 나를 위하여 하는 것이고, 내가 계명을 지켜도 바로 나 자신을 위하여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나'라는 것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딱 이것이 바로 '나'야 하는 실체가 없습니다. 계속 욕망이 충동질 할 때마다 원하고 바라는 것이 달라집니다.
어떤 경우에는 A만이 나를 위한 유일한 결정이 되었다가 그 반대의 사건이 터져 버리면 A의 정반대에 있던 B가 최선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까 그런 인간에게 사랑과 계명준수가 동일할 수 없습니다. 내가 사랑한다, 내가 계명을 지킨다가 모두 나에게 유리한 경우에는 사랑과 계명준수가 같구나 하겠지만, 시간이 흐르고 장소와 이웃이 바뀌어서 욕망이 달라지면 내가 사랑한다와 내가 계명을 지킨다 중 어떤 것은 나에게 유리하고 어떤 것은 나에게 불리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결국 인간에게 사랑과 계명지키기는 따로 따로 이해타산을 해 봐야 되는 대상일 뿐이지요.
그럼 죄인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죄인은 죄와 인간이 결합된 단어가 아니라, 죄가 주인이고 인간은 그 종일수 밖에 없다는 선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예인 인간이 뿜어내는 모든 행위는 주인인 죄의 소유가 됩니다. 모두 죄로 판명나는 것입니다.죄인의 실체는 내가 아닌 바로 죄입니다. 어떤 행위는 인간들이 보기에 사랑스럽다는 이유로 선이고 어떤 행위는 인간들이 보기에도 혐오스럽기에 죄라고 판단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어떤 행동도 그 행위를 쏟아낸 장본인이 죄인인 이상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비유인 바퀴벌레를 예로 들겠습니다. 어떤 우등한 바퀴벌레가 열등한 바퀴벌레를 도와준다고 합시다. 그 광경을 보던 (바퀴벌레는 끔찍하게 싫어하는) 아줌마가 우등한 바퀴벌레가 선한 일을 했으니 살충제 처분을 면제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까요? 아니죠! 바퀴벌레가 하는 짓은 그냥 다 바퀴벌레와 같은 것입니다. 죽어야 할 대상에서 살려주어야 할 대상으로 환골탈태 할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죄없으신 하나님께서 죄인을 보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인이 하는 짓은 그 모두가 죄입니다. 죽어야 할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니까 말씀과 행동이 다를 수가 없으신 분입니다. 말씀하시는 순간 이루어집니다. 사랑한다는 것이 바로 계명 자체가 될 수 있는 것은 그 분이 그 말씀을 모두 스스로 이루실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꼭 말씀드리고 싶은 충격적인 사랑의 개념 정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 중 가장 큰 사랑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한복음 15장 13~14절)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을 가장 큰 사랑이라고 하십니다. 사랑을 말씀하시면서 그 속에 목숨을 넣어 버리십니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친구될려면 최소한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어떤 친구가 친구를 위해 목숨을 걸수 있습니까? 죄없는 친구가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왜죠? 죄인인 친구는 친구를 위해 죽어도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친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진짜 친구는 인간 중에는 없죠. 따로 예비되어 있지요. 그 친구 이름이 바로 예수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친구를 말씀하실 때에도 자신의 목숨을 건 사랑, 즉 십자가 사랑을 대신하는 말로 친구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사랑을 친구라는 단어를 통해서 그 사랑을 받은 대상과의 관계가 비밀이 없는 아주 아주 가까운 절친한 친구같음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이렇듯 진짜 친구가 죄인에게 '친구야!' 해 주어야 친구되는 것이지, 인간들끼리 마음 맞아서 친구하자고 친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서로 마음맞는 바퀴벌레가 여러마리 함께 기어다니는 것과 똑같습니다. 모두 죽어야 할 대상이지요.
결국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계명을 이렇게 밝혀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한복음 15 : 12)
이 말씀을 보고 또 다시 나도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죽을 정도로 교회 식구들을 사랑해야 겠다고 결심하셨다면 '아, 나는 정말 죄인 맞구나' 생각하시면 됩니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 '이 사랑은, 이 계명은 지키실 분이 따로 계시구나, 그 분이 나를 친구라고 해 주셨구나, 혼자 다 이루셨구나, 참 고맙네, 감사하다, 정말 십자가 말고 자랑할 것이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드셨다면, 그렇게 생각나게 하시고 가르치신 분이 바로 은혜지킴이(보혜사) 성령이시기에 성령 받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 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한복음 14장 26절)
성령은 다른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십자가 사랑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다른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사랑을 가르치십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