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애굽의 위치(겔29;15-16)이근호140226

아빠와 함께 2014. 2. 27. 19:01

애굽의 위치(에스겔 29: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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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2-26 21:58 
애굽의 위치


2014년 2월 26일                        본문 말씀: 에스겔 29:15-16

(29:15) 나라 중에 지극히 미약한 나라가 되어 다시는 열국 위에 스스로 높이지 못하리니 내가 그들을 감하여 다시는 열국을 다스리지 못하게 할 것임이라

(29:16)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의 의뢰가 되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족속은 돌이켜 그들을 바라보지 아니하므로 그 죄악이 기억나게 되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나를 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오늘 본문 끝에 보면 ‘그들이 나를 주 여호와인 줄 알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멘트는 이미 출애굽 당시에 하나님께서 모세 입을 통해서 누누이 말씀하신 멘트입니다. 출애굽기 7:5에 보면,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멘트가 지닌 의미를 그 때에는 충분히 알지 못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인간 세계에 개입하시면서 어떤 식으로 하나님됨을 드러내시는지를 알지를 못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개입은 늘 신기하고 획기적인 기적의 모양새로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일상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감잡을 수가 없게 됩니다. 평범해도 너무나 평범한 일상의 일이 어떻게 하나님의 개입으로 생긴 현상인지를, 인간들의 일상적인 일과 비교해서 차이점이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일이 늘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애굽 나라가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공격받고 심하게 노략당할 때에, 그 일을 유발하신 분이 곧 여호와 하나님인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애굽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이 망하는 것을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개입으로 인정하기가 곤란합니다.

예상 못한 파멸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은 항상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과 연계해서 일하기 마련인데 , 애굽 나라의 망하는 것이 어떻게 이스라엘에 대한 일관된 구원작업과 연결되는지 규명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에서 이 점을 규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전에 출애굽 당시에, 즉 ‘애굽에게 재앙을 내리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작업인 줄 알아라’고 하신 그 때에, 하나님께서 잠시 잠간 사건만 일으키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내부에 잠입하셨습니다. 마치 연못 표면에 돌멩이 하나가 떨어지면 물방울이 튀는 동시에 그 돌멩이는 연못 물 속으로 잠입해서 사라집니다.

연못 표면만을 쳐다보는 사람들은 다시 고요해진 연못 물 표면을 보면서 예전과 다를바가 없다고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돌멩이는 그 연못과 역사를 같이 하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내부에 잠입하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인줄 알리라’는 멘트는 반복적인 이스라엘과 외부 국가와의 충돌에서 그 면면을 보이게 됩니다.

곧 전쟁양식입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생각하기를, 전에 애굽을 벌주시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자기들과 함께 있기에 그 어느 나라와 전쟁을 해도 백전백승이 될 것이라고 자부했습니다. 하지만 갈수록 승전의 경우가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급기야는 언약궤까지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사무엘상 4:9)

그렇다면 과연 진정 ‘여호와다움’이라는 것이 이스라엘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 등장될까요?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주변 나라로 하여금 망할 수밖에 없는 식으로 몰아넣으시는 방식이 됩니다. 쉽게 말해서 전에는 하나님을 몰랐는데 성령을 받고 난 뒤부터 하나님을 제대로 안 순간, 그 성도는 세상에서 망하는 팔자로 가는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동행한다면서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을 주변 국가에게 패배케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정작 애굽에게 매맞고 굴욕적인 평가를 받는 당사자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 애굽이란 지리적 위치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이동경로를 통해서 새로운 애굽으로서 위치가 발생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결코 애굽에서 벗어남에 있어 성공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애굽의 확장’입니다. 이사야 31:1-3에 보면,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의 말씀들을 변하게 하지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들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들을 치시리니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날이갈수록 애굽을 더욱 더 의지하면서 이스라엘 내부의 속성을 감추지 않고 그 본색을 드러내게 됩니다. 물론 그렇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면서 조치를 취하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느냐 하며는, 진정한 최후의 출-애굽을 위하여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스라엘 입장이 아니라 애굽 안에 종속되어 있는 입장에 있게 만듭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본 자손들이 어느 다른 민족보다 더욱더 자기의 하나님 여호와를 핍박해오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출-애굽의 위치가 결국에는 어떻게 확정되느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 종속시키고, 그 애굽마저 바벨론에 종속시키는 작업에 나서십니다.

이스라엘의 나라가 둘로 나뉘어지는데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망하게 하시고, 남쪽 유다는 바벨론에 망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작업의 배후 주도권자는 어디까지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애굽이라는 애굽을 바벨론이라는 애굽으로 교체하므로서 장차 메시아의 오심으로 야기될 종말로 이끄시는 겁니다.

예수님을 십자가 죽게 한 그 짐승의 세력은 바벨론 제국의 긴 우상의 그림자 끝에 해당되는 네 번째 짐승인 로마제국입니다. 즉 확장된 애굽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진정 출-애굽에 성공하신 분은 예수님 뿐입니다. 에스겔이 계시받은 시점은 여호야긴이 바벨론 포로잡혀 온 그 해를 기준으로 합니다. 물론 그 해에는 에스겔 선지자도 같이 끌려옵니다.

이 여호야긴 왕의 체포는 그 선대왕인 여호야김 왕의 지독한 애굽 선향적인 행정에 대한 단호한 하나님의 조치로서 심판이 감행됩니다. 더 큰 애굽으로서 지나간 시절의 애굽을 교체시켜버립니다. 이렇게 해서 온 세상 전부를 애굽천지로 만드시고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팝박받는 모습으로 거주하시면서 바로 그 고난의 모습이 ‘여호와의 진정한 이 땅에서의 모습’임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무지로 인해 지금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서러움 당함을 늘 느끼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4-02-27 12:51 
80강-에스겔 29장 15-16(애굽의 위치)140226-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29장 15절에서 16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96페이지입니다.

에스겔 29:15-16 “나라 중에 지극히 미약한 나라가 되어 다시는 열국 위에 스스로 높이지 못하리니 내가 그들을 감하여 다시는 열국을 다스리지 못하게 할 것임이라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의 의뢰가 되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족속은 돌이켜 그들을 바라보지 아니하므로 그 죄악이 기억나게 되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나를 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오늘 본문 16절 끝에 나오는 “그들이 나를 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하는 대목, 여호와 자신이 일으킨 일이라는 이 사실은 물론 애굽 나라가 멸망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데 이런 멘트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재앙을 내리시면서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나 애굽 사람이나 모세의 입을 통해서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여호와 하나님인줄 알리라,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어떤 뉘앙스를 띠고, 어떤 취지를 가지고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그들은 미처 다 알지 못했습니다. 애굽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그런 이야기인줄 알았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언급을 할 그 순간에도 사실은 그 계시도 이스라엘에게나 오늘날 우리에게나 다 같이 해당되는 사항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시면서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라고 하실 때 하나님이 인간세계에 나타날 때, 그냥 조용하고 곱게 나타나게 되면 사람들은 그 하나님이 언제 다녀갔는지 알 길이 없겠지요.

뭔가 연못에 나뭇가지나 돌이 떨어질 때, 또는 독수리가 먹이를 잡아서 다시 연못위로 날아가면서 물방울 튕기듯,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잠입을 할 때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겁니다. 파격적인 것, 약간의 질서가 깨어지는 것, 그러면서 거기에 붙는 멘트가 있어요. “너희들은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인간들이 일으키는 사건과 다른 사건양식으로, 그런 형식으로 하나님께서 낯설고 이질적인 사건을 유발시키면서 인간세상 속에 관여하시고 잠입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잠시 풍덩, 퐁당, 하는 식으로 잔물결이 일어났는데 다시 그 자리에 가 보면 일상과 다를 바 없이 똑같이 되는 거예요. 우선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일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일상에 대해서, 이 세상에 대해서 관여하시고 일 하십니까?”라고 물으면 “일 하십니다.”라고 하겠지요.

그러면 그런 답변을 예상하면서 “일을 하실 때 인간이 하는 일과 하나님이 하는 일에 어떤 차이가 납니까?”라고 물어보면 선뜻 답변하기가 곤란하지요. 인간이 하는 일과 하나님이 하는 일에 어떤 차이가 날까,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기적을 일으키고 인간의 일은 그냥 보통 일상의 일밖에 하지 않는다, 라고 하는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적 있잖아요,

사람 손으로 하지 않았지만 뭔가 신이 개입했기 때문에 놀랍게 일어나는 어떤 기적, 그 기적이 일어나는 현장에는 하나님이 계시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틀린 답변이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상생활가운데서 내가 놀랍다, 할 정도의 기적이 하루에 몇 번 일어날까요?

만약에 한 번도 없다면 그 하루, 오늘이 2월 26일은 전혀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적이 없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개입할 때는 기적을 일으킨다. 그런데 내가 오늘 하루 사는 동안 기적이라고 할 만한 것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면 오늘 나의 하루 삶은 순전히 내가 일군 나의 삶이지 하나님은 개입한 적이 없다, 그렇게 되는 겁니까?

모든 일에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이것은 교회를 좀 다닌 사람이라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데 막상 우리가 체험하는 것, 정말 하루하루를 하나님이 개입하는 것을 체험하는 것에 대해서는 두루뭉술하게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요. 하나님이 개입했을 때는 반드시 이런 멘트가 있다고 했습니다.

“너희가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이렇게 하나님이 개입했는데 막상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우리는 ‘아, 하나님은 이런 분이구나.’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낄 경우나 기회를 제대로 포착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하나님이 “너희가 나는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는 그것에 대해서 우리가 좀 달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지요.

연못에 풍덩, 하고 특이한 일이 벌어졌을 때에 “하나님이 개입했습니다.”라고 한다면 다음 날에 보니 연못의 표면이 매끄러울 때는 하나님이 개입 안한 것이 되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답변은 잘못된 것이고 이렇게 생각하시면 옳습니다.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그 사건을 계기로 해서 깊숙이 인간세계에 잠입했다, 잠입했다고 보면 되지요. 스파이가 “나 스파이다.”라고 등장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스파이가 휴전선을 넘을 때는 아주 위기지만 일단 휴전선을 넘고 서울 한 복판의 분주한 종로거리에 나타났을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이미 섞여 버렸으니까. 하나님께서 개입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단 와 버리게 되면 사람들은 전에 어떤 특이사항이 있더라도 일단 하나님이 여기에 활동을 해버리면 일상적인 생활의 일부로서 간주하지 하나님의 일을 찾을 수도 없고 찾으려고 하지도 않아요. 세상 돌아가는 것이 그냥 그럭저럭 일상으로 돌아가지 하나님이 개입한다고 해서 특별하고 놀라운 일거리가 날마다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들을 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께서 여기 잠입을 해 버렸어요. 잠입을 해서 어떤 일을 꾸미고 있었습니다. 이제 제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말씀드릴 것은, 주께서 이 땅에 잠입해서 무슨 일을 꾸몄느냐 하는 거기에 대해서 지금부터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겁니다. 어떤 일을 꾸몄는가? 전에 출애굽 할 때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해서 잠입했을 때는 하나님께서 애굽을 멸망시킨다는 신나는 소식에만 신경을 쓰시는 것 같은데 그 이후에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께서는 새로 생긴 이스라엘과 동행했다는 이야기를 여러분이 알고 계시지요?

그 동행했다는 이야기를 저는 세상에 잠입했다, 그렇게 보고 싶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잠입해서 동행하는지, 안하는지를 어떻게 아는가? 여기서 중요한 단어 하나 던집니다. 그것은 위치입니다, 위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속에 하나님이 왕이 되셔서 함께 계시면 그 때부터 이 세상의 중심은 이스라엘이 이동하는 그 이동 선을 따라서 중심위치가 변동이 일어나는 겁니다.

움직이고 있는 거예요. 얼마 전에 충북의 진천중앙교회 교인들이 성지순례 하면서 테러를 당했는데 그 위치가 시내 산이었습니다. 그 시내 산이 광야거든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머물지를 않았어요. 텐트생활 했기에 조금씩, 조금씩 이동했습니다. 어디로 이동했느냐, 약속의 땅 가까운 쪽으로 이동할 때 하나님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자기의 동행의 표징을 알려주면서 이동한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이스라엘 속에 동행한다는 말도 되고 또 같은 말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속에 이미 잠입했다는 말도 되는 겁니다. “나 여호와를 알리라.” 할 때는 퐁당, 하는 그 위치에 있었지만 이제는 잠행했을 때, 같이 동행했을 때 여호와께서는 율법이라는 것을 제시했고 그 율법대로 이스라엘백성들이 제사를 지내면서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특이한 민족으로서 그 면면을 다 드러낸 겁니다.

자, 그 다음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잠입하시고 잠행하면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했던 일은 무엇일까, 물으신다면 두 자로 이야기할 수 있어요. 전쟁입니다. 여호와는 무슨 하나님이냐, 전쟁하는 하나님이에요. 그러면 전쟁할 때 하나님이 동행했기에 하나님과 함께 있는 나라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라고 생각하겠지요.

왜냐, 여호와만큼 센 신이 없고 이 세상 온 힘을 다 가지고 덤벼도 여호와를 이길 수 없기에 여호와와 함께 있는 이스라엘은 반드시 백전백승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실제로 가나안 땅 정복할 때 여호수아가 백전백승 한 셈이 되지요. 그러나 저는 진면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백전백패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퐁당, 하고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고 자기표시 해놓고 이스라엘 속에 잠행하고 같이 동행하시면서 세상에 나타날 때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이스라엘을 몰아넣었느냐 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너희가 이 땅에서 어떤 경우라도 필히 망하게 되어 있다.” 라는 식으로 자기 백성을 몰아세웠습니다.

이걸 요즘 말로 번역하면 절에 갔다가 이제는 무슨 정신이 들었는지 교회 다니기로 종교를 바꾼 순간, 교회 다니고 복음을 받은 순간 그 인생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 땅에서 망하는 인생이 되었도다, 라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 성령이 임한 사람의 공통점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 자신이 이 세상에서 망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음으로서 그들이 잘 될줄 알았지 하나님에 의도에 의해서,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자기 백성을 망하도록 하신다는 그러한 발상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감히 하지를 못했어요.

오늘날 교회가 그런 생각 하겠습니까? 교회라는 것이 하나님을 모시는 것인데 진짜 하나님이 오시는 순간 그 교회는 망하게 되어있고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안 사라지는 교회는? 이것은 덜 망했거나 가짜이거나, 그런 교회지요. 열 두 제자 가는 길이 다 망했던 길입니다. 베드로도 원치 않는 길로 가야 했고.

자 그 다음 문제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기와 동행하는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느냐 하는 겁니다. 출애굽이라는 것은 애굽에서 나왔다는 이야기잖아요. 애굽에서 나왔다고 할 때 애굽에서 나오려면 애굽이 규정이 돼야 돼요. 뭐가 애굽인지 규정이 되고 그 애굽에서 나와야 그게 구원인 것인데, 이게 천국 가는 것이고 이게 영생인데 애굽이 무엇이라는 것은 애굽에서 나왔다고 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그 때부터 애굽이 확대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다고 해서 이스라엘백성들 따로 애굽 따로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이제는 애굽이 확장이 되는데 어떻게 확장되느냐 하면, 이스라엘 이름으로 애굽이 확장이 되는 겁니다.

이사야 31장 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찐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3절에 계속 보면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그리고 유다와 함께 있으면서 유다로 하여금 어떤 속성을 유발시켰느냐 하면 이스라엘나라가 깊숙하게 품고 있던 그 속성을 유발시키는 사건과 사태를 자꾸 일으켜요. 일으키니까 결국은 이스라엘이나 유다나라가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애굽이 예뻐서가 아니라 애굽에게 뭐가 있느냐 하면, 병거와 마병이 많고 무기가 발달했기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서 애굽은 힘이 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자기들은 애굽이라는데서 나왔다고 생각했지요. 위치상 그렇지요. 애굽은 지리적인 위치상 이집트에 있고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위치상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잠행하시고 동행함으로서 애굽이라는 그 위치가 새롭게 정립되는 겁니다.

애굽이라는 곳이 어디 있느냐 하면 애굽이 애굽이 아니고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을 애굽의 대표자로 보고 그 애굽에서 지금 누가 빠져나오느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본인이 애굽에서 출애굽하시고자 하는 겁니다. 출애굽이 되려면 애굽이 무엇인가가 확정되어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동안 이스라엘과 동행하신 이유가 이스라엘을 구원케 함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확실하게 애굽화 시켜서 그 애굽화 된 데서 하나님 빼놓고는 어떤 인간도 애굽화된 인간의 속성 그 본질에서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자 하시는 겁니다.

이 복잡한 작업의 그 단계가 뭐냐, 이스라엘을 애굽화 하는 그 단계가 요청되는 겁니다. 어떻게 되느냐 하면, 방금 제가 말씀드렸듯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애굽에서 나오면서 애굽이라는 나라는 이제는 확장이 됩니다. 지금 생방송 때문에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이 되려면 지리적인 위치로서 애굽나라에서 일단은 나와요. 그런데 애굽에서 나오면서 그들은 애굽이라는 세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음이 분명해졌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그들은 아까 봤던 이사야 31장의 말씀대로 애굽 의존적이지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지금까지 우리가 구약을 보면서 애굽과 이스라엘관계를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 하면 이스라엘 관점에서 애굽을 본 겁니다.

애굽이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과 섞일 수 없다, 이스라엘은 애굽과 다르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위해서 애굽은 멸망당해야 된다, 라고 생각하는데 그러한 인식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어떻게 잘못되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바깥에 애굽이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애굽 안에 이스라엘이 있는 것으로 보시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면서 동시에 애굽도 같이 망하게 하는 겁니다. 애굽을 망하게 할 때 그동안 이스라엘은 결코 애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애굽이 망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애굽이 망하는데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그게 뭐냐, 애굽이 망하고 그 애굽을 대신해서, 그동안 애굽이 한 역할을 대신 해줄 나라가 있어야 되는 겁니다.

북쪽 이스라엘에게는 앗수르가 그 일을 했어요. 앗수르 산헤립이 왔을 때 하는 말이 “유다나라야, 너희가 애굽을 의지하지만 애굽이 결코 너희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그 말은 앗수르가 그 전에 새로운 애굽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그래서 북쪽 이스라엘은 망하고 남쪽 유다나라는 바벨론이 그 애굽을 대신하는 겁니다.

바벨론이 애굽나라를 쳐서 애굽나라가 멸망토록 하는 겁니다. 그러면 애굽나라가 멸망할 때 결국 애굽에 속해 있던 이스라엘도 같이 망해야 될 그 이유가 분명해 졌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애굽을 대비해서 전 세계를 애굽화시키고 전 세계를 바벨론화 시키게 되는 겁니다.

신약에 오게 되면 그 어떤 나라라 할지라도 결코 이 세상에서 인간은 구원될 수가 없다, 출애굽 될 수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어떤 나라도 구원 될 수 없고 출애굽 될 수가 없다면 그 다음 문제는, 그러면 누가 하나님이 원하는 이 출애굽을 성공할 수 있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누가 성공할 수 있느냐 하면, 신약에서 미리 해답을 말씀드리면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만이 이 애굽 같은 세상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라시면서 부활을 통해서 구원이 성사 되는데요, 그 성사될 때 배경으로 자리 잡은 나라가 바로 로마거든요.

이 로마가 그 당시 유다나라를 점령했는데 구약의 에스라 느헤미야 그 이후를 보게 되면, 특히 다니엘 같은 경우에 바벨론나라가 있으면 그 다음나라가 바사, 헬라 마케도니아, 로마가 연이어 등장하더라도 그 다음 나라들은 사실은 바벨론 금신상의 하나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바벨론은 어디에 속하는가? 전에 출애굽 할 때의 애굽의 그림자에요.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17.제 이십 칠년 정월 초일일에.”라고 하는데 여기서 이십 칠년이라는 이 시간은 에스겔이 유다나라에서 여호와긴 왕이 잡힐 때 같이 포로 잡혀 간 때부터 따진 겁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그 때가 BC 597년이에요.

여호와하스-여호야김-여호야긴-시드기야, 이렇게 해서 마지막으로 유다를 끝내는데 여호야긴이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간 이유가 뭐냐 하면, 아버지 여호야김 시대 때 이 유다나라가 마지막으로 몸부림 친 것이 애굽의 군대, 애굽의 힘을 의지했어요. 애굽을 의지했다는 말은 유다나 이스라엘이나 결코 애굽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말이 돼요.

그러면 애굽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그 애굽을 누가 치는가, 바벨론이 치거든요. 바벨론이 칠때 여기서 제일 중요한 문제가 이거예요. 바벨론이 치는데 제일 중요한 문제는 바로 누가 바벨론을 움직이느냐, 하는 겁니다. 누가 바벨론을 움직이는가,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움직인 거예요.

지금 약 10분 동안 생방송이 잘 안 되었으니까 그 이야기를 짧게 해드리면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은 애굽에서 나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왔다고 생각한 이유가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있기 때문에 무사히 어린양을 통해서 애굽에서 나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 애굽에서 나왔다고 자처했던 그들이, 아까 본 이사야 31장이라든지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그리고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대를 보게 되면, 그 이스라엘의 마지막 몸부림치는 모습이 뭐냐, 자꾸 애굽의 힘을 의지하고 또 의지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으로 애굽에서 나왔다고 자처하지만 절대로 그들은 애굽에서 나온 적이 없어요.

그러면 오늘 본문에 “나 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할 때 하나님이 여호와임을 어떤 식으로 알리느냐 하면, 유다나라는 어떤 식으로든 애굽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은 애굽에서 나와야 하고 자기백성은 애굽에서 나온 적이 없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이 여호와인줄 알게 하는 방법이 뭐냐?

이미 그들은 애굽화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옛날에 애굽을 치면서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는 그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지금 하나님께서 유다나라를 애굽화 되었다고 쳐버립니다. 칠 때 그 치는 몽둥이로 사용하는 것이 뭐냐, 북쪽에서는 앗수르고 남쪽나라에서는 바벨론으로 처리하는 겁니다.

이 바벨론 군대를 누가 움직이느냐 하는 거예요. 누가 움직이느냐,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움직인 겁니다. 이렇게 돼요. 하나님께서 제 2의 애굽으로서 바벨론을 등장시킵니다. 그리고 자칭 하나님과 동행했기에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우기는 인간들은 바벨론의 포로가 돼요.

옛날에는 애굽의 포로됨에서 나왔던 그들이 이제는 애굽보다 더 큰 힘, 더 큰 최종적인 힘인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는데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게 하신 분이 누구냐, 바로 하나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에요. 그 여호와 하나님이 그 바벨론을 최후의 제국으로 삼아서 바벨론에서 이름만 바뀌어요.

바벨론에서 페르사, 페르사에서 헬라마케도니아, 거기서 로마, 이렇게 이름은 바뀌지만 마지막 종말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게 한 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유다나라를 지배했던 그 환경은 로마인데 그 로마가 무엇의 끄트머리냐 하면 역시 바벨론 제국의 연장에 속한 로마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다니엘에 나옵니다.

네 번째 짐승으로 나옵니다. 세 번째나 네 번째나 원래 짐승, 원초적 짐승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집니다. 짐승의 확장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짐승 같은 나라 바벨론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자기 백성을 애굽이라고 치는데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나님 스스로 짐승 같은 베벨론 나라에, 애굽나라에 스스로 포로 잡히는 셈이 돼요.

포로 잡혀서 하나님께서 상처받고 매 맞고 학대받는 그 모양새로 하나님 스스로 그 안에서 당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버림받으시고 망하시는 그 모습을 취하시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시는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이 애굽에서 출애굽 하시는 분은 하나님 본인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신약에 와서 하나님의 영이 아니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아니면, 이미 이 땅 바벨론에서 탈출에 성공하신 그 예수님의 성령이 아니면 아무도 이 세상에서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기 때문에. 이제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본문 17절에서 21절까지를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철저하게 바벨론을 가지고 다루시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바벨론이 두로 지방을 치는데 13년 동안 공격을 했지만 그들은 실패를 하고 말아요. 사실 점령은 했는데 알맹이, 실속, 귀금속 같은 것은 두로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다 빼돌린 모양이에요. 별로 얻지를 못했습니다.

18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인자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 군대로 두로를 치게 할 때에 크게 수고하여 각 머리털이 무지러졌고 각 어깨가 벗어졌으나 그와 군대가 그 수고한 보수를 두로에서 얻지 못하였느니라.” 바벨론군대가 철저하게 두로를 공격했습니다.

두로의 성을 공격하는 루트를 확보하기 위해서 그 성과 같은 높이로 공격용 성을 쌓았는데 그 작업을 하면서 병사들의 어깨가 문드러질 만큼 되었지만 별로 승리의 소득이 없었습니다. 소득이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바벨론으로 애굽을 치게 해서 두로 공격에서 얻지 못한 그 모든 노동의 대가를 애굽 공격에서 다 얻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 말씀은 뭐냐, 그만큼 하나님께서 바벨론이라는 제국을 철저하게 손아귀에 쥐고 다루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애굽화 시키도록 그렇게 활용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도대로 바벨론은 새로운 애굽의 나라로 평정 돼버려요.

그 새로운 애굽의 나라로 평정된 바벨론 제국을 통해서 나중에 예수님 오실 때 로마제국이 잉태되게 만들고 그렇게 잉태된 로마제국의 세력에 하나님 본인이 짓밟혀서 죽임을 당하는 일을 의도적으로 꾸미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동행하심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잠입이에요.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뭐냐?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합니다. 어떤 큰 기적이 일어나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그러나 우리가 일상을 통해서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모든 일에서 무시당하고, 모욕당하고, 무관심의 대상이고, 세상을 은혜로 이렇게 만드시고 이끌어주시지만 주님에 대한 공로와 영광은 전혀 돌려지지도 않고,

모든 영광은 이 짐승 같은 인간의 노력과 공로에 돌려지는 이 모습, 이 세상, 이것이 바로 짐승의 세계고 바로 이 세상에서 자기백성을 탈출시키고 출애굽 시키기 위해서 십자가의 영,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에 하나님 스스로, “네가 사는 세상에서 나도 같이 시련 당했고 무시당했고 모독당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줌으로써 그 주님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게 만드는, 십자가 피로 승리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알게 하는 그런 방식으로 지금도 출애굽 하고 계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세상속에 주님이 아직도 활동한다는 것을 우리 자신이 마음을 낮추면서 깨닫게 하옵소서. ‘누구든지 어린아이같이 낮은 마음으로 천국을 받들지 아니하면 결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그 의미가 무슨 뜻인지 우리 일상을 통해서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